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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사명"

하나님아들 2024. 4. 19. 08:44

"두 가지 사명"  

 


성서본문: 창세기 1장 28절-2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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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독교 내에서도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접근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을 동양에서는 신성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식해온 반면 서양에서는 신의 저주요 죄의 결과로 간주하여 왔습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노동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자기성취, 사회참여라고 표현합니다. 노동을 보수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사람과 노동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업의 동역으로 인식하는 사람 사이에는 삶의 결과에도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모든 것이 전문화, 분업화되어 가는 현대 경제구조 아래서 의미를 상실한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성경에서는 노동에 대해서 어떤 정의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노동이라는 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활동에서부터 천한 노예의 고된 노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노동을 '목적 지향적인 에너지 소비'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너무 광범위하며, 의미를 좁혀서 '단지 보수를 받기 위하여 치르는 에너지'이거나 '생계의 유지를 위해 치르는 에너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의 노동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노동을 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육체 노동은 인간의 품위를 저하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장인들은 이상향의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사업은 마음을 비천하게 만들고 한 곳으로만 쏠리게 하기 때문에 모두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헬라 당시 천시 받던 육체 노동은 중세 봉건사회에 들어와서는 종교적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사제, 신부, 수녀 같이 종교적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일반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높은 정신적 신성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색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인정했으며, 행동하는 생활 가운데서도 육체 노동자는 더 낮은 위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그 위치가 낮다고 해서 그들을 불필요한 존재 또는 하나님의 직정에서 제외된 인간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동이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삶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삶의 실체이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동을 하며, 이러한 목표는 인간의 능력과 활동력에 비례하여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을 목적 그 자체로 격상시켰다 해서 구원과 해방의 수단으로 보게 된 것은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매력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발전의 전망을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하는 직업이나 경력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들이 완전한 인격체로서 노동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집단적인 기업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의 조직과 방향에 있어서 자신들의 노동을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기계의 작은 부분으로 취급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술과 능력을 가진, 그리고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견해를 가진 개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노동이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노동을 개인생활과 공동체생활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동문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생산의 조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유용한 사회적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에는 노동이 삶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상실하여 가고 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일상생활의 필수여건입니다. 그러나 좋은 조건 아래서의 노동은 대단히 만족감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지만, 때때로 노동은 무익과 실망에 그칠 때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노동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합니다. 사회에 대한 봉사 혹은 가족부양의 책임이라고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이라고도 합니다. 하여튼 인간은 원시사회에서부터 고도화된 첨단 기계사회에 사는 오늘날까지 노동이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의 중요성 때문보다는 필요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노동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땅은 인간의 범죄 후에도 인간의 문화활동을 위한 소재로 남아 있으며, 인간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존속합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것은 아니며, 인간 존재를 위한 법칙, 즉 생육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땅을 경작하는 법이 철폐되거나 폐지되지는 않았습니다. 불순종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으며 생명의 근원에서 영적인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생명의 빛이 인간에게서 사라지고 어두움에서 신음하게 되었고, 문화는 참된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와 문화는 갈라지게 되었으며, 수단인 문화가 오히려 목적이 되어 인간은 그의 손으로 만든 창작물 속에서 제일가는 기쁨을 찾으려 합니다.
죄로 인하여 문화활동의 본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인간은 그리스도의 힘을 입을 때에만 인간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잃었던 소명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근대 과학기술의 발달은 대량생산을 위한 전체주의적인 집단화로 개인의 창의적인 노력을 좌절시켰으며, 전체주의적인 사회구조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모든 직업의 활동에는 소외성이 엿보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문화활동의 비본래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직업에 대한 소명감을 회복하고 생동적이 되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겠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신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사람들과 달리 히브리인의 사고는 노동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의 정상적인 일부분으로 생각했으며 어떤 인간도 이것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윤리 가운데 노동의 지위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그의 전 생애중 30년을 나사렛에서 목수로 지내셨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복음 사역에 대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을 움직여 양식을 벌었고, 그 누구에게도 폐나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바울 뿐만 아니라 전도자들도 스스로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12사도의 교훈이라는 기원 100년경에 기록된 교회 최초의 법령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에게 오는 사도들은 누구나 주와 같이 영접하라. 그리고 사도는 하루 또는 만일 필요하다면 다음날도 계속 머물 수가 있다. 그러나 만일 3일간 더 머문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만약 너희에게 나그네가 오면 네가 할 수 있는 한 대접하라. 그러나 필요 없이 2일이나 3일 이상 오래 머물면 안된다. 그가 기술이 있고 너희 중에 살고자 원한다면 그에게 일하게 하고 먹도록 하라. 그러나 그가 너희가 아는 대로 아무 직업이 없다면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너희 중에서 나태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파는 자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필요한 최소한의 빵을 제공받았고, 기술이 있으면 그것을 업으로 삼아 자기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믿음이 성별된 자기들만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 역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나 지출을 메우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에겐 모든 노동이 하나님 보시는 가운데 행하여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노동은 곧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일을 잔인한 필연성, 피곤한 노역으로 알아 일에서 돌아서는 현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우주의 궁극자로 보려는 세속주의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종교의 퇴폐는 문화의 퇴폐를 가져오게 합니다. 열두 제자는 물론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거의가 다 낮에는 손으로 일하는 직공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노동의 개념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직무이고 인간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노동이 죄와는 관계없는 것이며,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생계를 위한 일반적인 날마다의 노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나 디도서의 기자들 역시 신자들이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야 할 신도의 의무라고 합니다. 노동의 가치평가는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있지 않고 왜 일을 하며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에 대한 해석이며 여기에서 비로소 노동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칼뱅의 노동관에 앞서 루터의 노동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가 일으킨 개혁운동은 역사적으로 400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일이지만, 인류의 사상사에 미친 의의를 살펴볼 때 불변하는 현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노동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는 동시에 직업 전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른바 크리스천의 직업관과 사명관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 대항하여 루터는 모든 신자의 소명을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목적은 모든 제사장들을 폐지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을 제사장으로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이나 노동에 종사하는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임무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직업에 있어서 성속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을 반대했고, 염주를 굴리며 열심히 미사를 올리는 것도 자기가 맡은 직업에 충실한다는 전제가 없는 한 별 뜻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직업을 주셨는데 그것은 신탁이며 누구나 자기의 직업에 소명감을 느끼는 자는 성직자와 마찬가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이런 직업관은 종교개혁의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신학적인 입장을 설명하여 주는 중요한 관점이 됩니다. 그의 직업관 속에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성실한 의무 이행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윤리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요구하시는 일인 이상 모든 직업은 거룩한 부르심에 근거한 사명완수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루터의 직업관이었으며 그 사상은 후세에 사회윤리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뱅은 크리스천의 생활이 항상 어디서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노동과 크리스천의 생활을 밀접하게 연결시켰습니다. 복음이 노동을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만든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천직을 존경할 수 있게 된 것은 루터의 덕이지만 그의 원리를 행동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칼뱅이었습니다. 칼뱅은 인생 전반을 하나님의 뜻의 입장에서 보고,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의 훈련으로 다루었습니다. 칼뱅은 노동에 영적인 권위와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직업관은 첫째, 청지기로서의 직업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은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결산 보고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직업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현세에 탐닉하는 향락주의와 금욕주의를 배척해야 된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세상에 임하여야 하며, 동시에 다가오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노동을 거룩한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실로 그 당시 새로운 윤리로서, 세속적 노동을 잘하는 것이 신을 뜻을 잘 지키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의무 즉, 사회생활에서 직업으로 주어진 임무를 준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업은 모두 그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둘째, 칼뱅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은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는 직업 소명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명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루터가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제사장만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하는 노동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생활을 위해 마련하신 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그 노동이 올바로 성취될 때 바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노동은 비록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형벌이다"라고 말한데 비하여 칼뱅은 모든 사람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귀하거나 천한 것이 없듯이 모든 노동은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만큼이나 신성한 것이요 똑같이 평등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노동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 혹은 의무를 뜻하며, 둘째는 하나의 저주로서 고통, 슬픔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노동에 대하여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노동이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이라는 점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노동이 인간에게 부여된 임무임을 볼 때 노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동참입니다. 노동이 인간의 다른 활동과 독립되어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업과 세계 구원의 일부분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노동에 대한 반사인 것입니다. 창세기 1, 2장에는 인간의 죄가 없는 상태에서의 노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과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노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복'은 이질적인고 반항적인 힘의 정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팔과 정력을 가지고 땅과 그 자원을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서도 노동에 대해 구약의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흐르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보잘것없는 노동 환경에서 태어났고 직접 노동을 했으며, 열심과 충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의 목적과 의미는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자신 천막 제조업에 종사하였으며,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에 보면 부지런히 일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데살로니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일상적인 노동생활에서 얼마나 조용히, 부지런히 일했는가를 보아 그가 성도들을 알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중세의 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노동은 필연적으로 그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변화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비인간화에 직면하고 있으며, 인간의 실존과 공동체 생활에 위협을 주는 거대한 비인격적인 세력들이 나타남으로서 노동의 본질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노동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의미에 도달해야 합니다.
노동의 첫째 원칙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고, 그것만이 경제적 기구 전체에 있어서 덕을 수호하는 것이 됩니다. 노동 규칙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원칙에 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작인 우주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그의 말씀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처음에는 노동자와 같이 손수 그의 뜻대로 창조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 기사중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지배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회생활을 유지시키고 인류를 보존하며, 인간의 영적 활동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육체적 기반을 공급하며, 따라서 인간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의 의미에 대한 기독교적인 첫 번째 긍정인 것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기독교적 삶의 의미가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위해서 일하심으로서 그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히브리 사회에서는 일을 중히 여겨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고 했으며 게으름을 멸시했습니다. 반면에 현대는 인간에게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며, 그가 먹는 양식을 위하여 노동을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압력이 게으름의 행동을 극복케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먹고사는 수단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면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노동은 소위 자연법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노동 없이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채울 수도 없고, 사람으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도 없습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필연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노동은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봉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은 고립이 아니라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책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관을 가지게 합니다. 노동은 그것이 진정으로 봉사하는 것이 될 때에만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참된 노동은 '삶의 한 방식으로 여겨지고 인간의 본성이 적절하게 나타나며,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이 하신대로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노동이 개인적인 특성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창조적인 개인들의 활동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탐험가, 발명가, 사상가, 예술가, 창안자들이 없었다면 문명은 결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명의 발전에 앞장서 왔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봉사해 온 자들인 것입니다. 인간을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자로 보는 기독교적 관점에 있어서, 모든 장소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에 응답하는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노동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사회가 노동을 천시하고 그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하나의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육체 노동을 천한 것으로 보고, 인간의 품위를 저하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중세에 와서는 육체의 노동을 천시하는 사상이 종교적으로 공인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루터와 칼뱅에 의해 종교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즉 노동은 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직무요, 인간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인간에게 부여한 생존의 조건이며, 봉사의 방법입니다. 노동의 일차적 목적이 자기 개발과 증진을 통하여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타인에 대한 봉사적 동기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기만과 착취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자연적 축복으로 설정하신 공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문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노동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자기의 생존 문제와 복지 증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께 대한 응답과 이웃에 대한 봉사라는 입장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하나님, 이웃, 자기라는 삼중적 관계에서만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자기자신의 생존이나 복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사 그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봉사하는 소명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이거나 인간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적 축복으로 주어진 이 노동을 비인간화하고 압제하는 고역의 멍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고도화된 산업사회인 현대 사회에서 인간소외와 가치관의 혼란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노동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비윤리적인 노동조건, 저렴한 노임, 생산증대에만 치중한 근로조건, 비윤리적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 현장에서의 비리는 노동의 올바른 개념 파악과 건전한 윤리의식이 결여된 데서 오게 되는 부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의 성서적 본질을 깊이 자각하고 인간생활의 합리적 발전과 전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신뢰와 인간성에 근거한 성경적 노동 윤리의 정착과 확신에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적 노동윤리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모범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노동의 산물이며, 노동의 실상은 소명이므로 이제 이를 기피하거나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거역하는 것으로 단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기쁨으로 노동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