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언약의 개괄(槪括)적 이해
(언약의 진전과 상호 연계성에 관한 연구 논문<Th.D.> 중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계시서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돼 있으며 총체적 관점에서 구약을 선(先) 언약, 신약을 후(後) 성취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신구약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언약이란 주제는 세상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증거하는 탁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신적 언약의 핵심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란 표현에 집중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임마누엘의 신학적 원리와 본질상 동일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언약사상은 성경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며 개혁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로 부각된다.
개혁신학에서 언약론의 등장은 그 뿌리를 쯔빙글리에서 찾고 불링거와 칼빈을 통해 발전되고 하이델베르그 신학자인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 등의 독일개혁신학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요하네스 코케이우스(1603-1669)의 계약신학/동맹신학(Federal Theology)을 통해 체계화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 저자들은 성경 속에서 언약이란 용어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언약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구약의‘베리트’(berith)라는 히브리어와 이에 해당하는 신약의 용어인‘쉰데케'(Syntheke)와‘디아데케'(diatheke)는 신구약을 통틀어 약 300회 이상 발견된다.
Ⅰ. 언약에 대한 이론적 고찰
A. 구약에서의 언약 개념
구약에서 언약이란 용어로 쓰이는 베리트(berith)는 '자른다'(cut)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바라(bara)에서 기원되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15장 17절에 언급된 횃불 언약식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베리트가 '묶는다'(bind)는 의미를 가진 앗수르어 베리투에서 기원된 것으로 생각해 견고한 결속(solemn bond)이나 상호간 자발적인 협약(agreement)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베리트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에 맺어진 일종의 계약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두 계약 당사자들이 동등한 인간의 협정과는 근본에서 성격이 다르다.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주권자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정체성은 자체 속에 무조건적인 선물의 의미를 내포함으로 항상 은혜로운 행위로 판정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반면 신적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의 발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수혜자(receiver)인 인간 편에서는 시혜자(giver)의 뜻과 요구에 자발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순종의 행위를 동반한다. 무익한 종의 고백(눅 17:9-10)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준다. 구약적 배경 속에서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혜언약)과 창 2:17의 선악과 금령(순종요구) 및 창 12:1-3의 아브라함 언약(은혜언약)에 근거한 출애굽 사건과 십계명(출 20:1-17) 간의 상호 불가분의 언약적 관계성(covenantal interrelation)을 통해 '선(先) 은혜에 수반되는 후(後) 행함'이란 언약적 원리가 극명하게 확인된다.
구약에서 280번이나 등장하는 최초의 언약인 베리트(berith)란 단어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을 통해 처음 확인된다. "I am going to bring floodwaters on the earth to destroy all life under the heavens, every creature that has the breath of life in it. Everything on earth will perish. But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and you will enter the ark--you and your sons and your wife and your sons' wives with you"(Genesis 6:17-18).
상기 본문에서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란 낱말은 대부분의 영역 성경에서 'covenant'(언약)로 번역된다. 본문의 문맥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류를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다(Genesis 6:5-7). 이 과정에서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들의 구원을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란 약속을 통해 보증해 주신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상호적인 개념을 가진다. 구약에서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언약들은 한결 같이 상호적(bilateral)이다. 근본적으로 언약(covenant)이란 단어에 내포된 개념은 동의/합의(agreement)란 뜻으로 두 당사자 간에 권리와 특권, 위탁과 의무의 관계가 수립되는 법적 계약이라는 뉘앙스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어 단어는 상호 동의를 포함한 합의란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상호적이지 않다. 신적 언약은 주권적이며 은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내 언약'(my covenant with you)이란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적 언약은 언약이란 단어가 비록 속박이나 구속이란 뜻을 가질지라도 언약의 수납자(receiver)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성격을 띤다. 언약(covenant)의 의미를 담고 있는 베리트(berith)란 단어가 구약의 유사 문맥들 속에서 비종교적 관점(인간 당사자들 간)을 통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W. J. Dumbrell이 지적하고 있는 세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다음에 예로 든 본문 속에서 베리트는 '언약을 자르다'(카라트 베리트)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창세기 21:22-32에서는 브엘세바의 우물과 관련된 권리를 두고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 간에 벌어진 논쟁과 이에 대한 수습을 위해 두 당사자 간에 언약을 체결하고 이를 맹세로 보증하고 있는 기사를 소개한다. 창세기 저자는 이때의 언약 체결을 가리켜 '언약을 자르다'(카라트 베리트, cut a covenant)란 고어체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베리트(언약)란 단어가 비종교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요한 구약 본문 중 하나다.
둘째, 창세기 26:26-33에서 이삭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동일하게 우물의 관할권을 두고 언약을 맺고 이를 맹세로 확증시켜 화해한다.
셋째, 창세기 31:43-54에서는 라반이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이들 간의 언약을 통해 땅의 경계선 문제가 해결되고 서로에게 가해질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맹세를 통해 제거시킨다. 이상의 이삭과 아비멜렉, 야곱과 라반 사이에 체결된 언약적 용어와 상세한 규정들은 아브라함이 그랄 왕과 체결한 언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언약과 관련해서는 '자르다'란 표현이 사용되었고 언약에 의레 맹세가 부가되었다.
'언약을 자르다'(카라트 베리트, cut a covenant)란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베리트는 이 외에도 율법서(Genesis 15:18), 역사서(Joshua 24:25; Judges 2:2; 1Samuel 11:1-2), 선지서(Isaiah 55:3; Jeremiah 31:31; Ezekiel 17:13), 시가서(Job 31:1; Psalms 50:5) 등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구약에서 자르다란 의미의 베리트란 단어 사용의 효시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맺어주신 횃불언약에서 가장 명백하게 발견된다. 아브라함이 먼저 동물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을 때, 횃불로 상징된 하나님께서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언약이 '이루어지고' '절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른다', '절단 된다'는 동사 자체가 '언약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냄으로 결과적으로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확증시켜 준다.
반면에 창세기 6:18에서는 언약체결에 대한 규범적 용어인 '카라트 베리트'(언약을 자르다)란 표현이 의도적으로 회피된 듯 보인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카라트 베리트 대신 '헤킴 베리트'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헤킴 베리트란 단어는 언약을 자르는(cut) 것이 아니라 세운다(established)는 의미이다. 특별히 '언약을 세우다'(헤킴 베리트)라는 관용구적인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들 가운데 이 표현은 언약의 시작(inauguration)이 아니라 이전 언약과의 연속성을 가리킨다(Genesis 17:7, 9, 21; Exodus 6:4; Liviticus 26:9).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해 주신 Genesis 6:18(Genesis 9:9, 11, 17)에 기록된 '나의 언약을 세우다'란 표현은 앞의 언약들과의 불가분의 연계성(interrelation)과 연속성(continuity)을 띠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언약'이란 표현 속에는 이와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는 어떤 언약이 선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창세기 6:18의 언약은 9:1-2과 9:8-17을 통해 노아 개인이 아닌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노아와 맺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후에 살펴 볼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6:18의 언약은 궁극적 목적상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창세기 6:18에서 언급된 '나의 언약'은 이전의 어떤 언약과 불가분의 연계성과 연속성을 가진단 말인가. 창세기 6:18의 언약이 창세기 9장에 언급된 전우주적인 보존언약으로 확장되는 것을 감안할 때, 내용적으로 놀랍도록 유사성을 띠고 있는 창세기 1:28이야말로 6:18에서 언급된 내 언약과 본질상 상호 깊이 연루돼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결국 창세기 6:18의 소개된 하나님의 '내 언약'은 창세기 1:28에 근거해 창세기 9:1-2과 9:8-17로 확장되면서 선악과 금령(창 2:17)에 불순종한 타락한 인류를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속해 주심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재수립한다는 의미에서 전우주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구약에 언약이란 단어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베리트(berith)이다. 베리트는 용도에 따라서 카라트 베리트(cut a covenant, 언약을 자르다)와 헤킴 베리트(established and/or given covenant)로 구분된다. 전자는 쪼개진 짐승이 상징하듯 언약의 파기자는 반듯이 죽임을 당할 것을 시사함으로 언약의 신실한 시행을 보증한다. 반면 후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어주시는 은혜성의 언약에 중점을 두면서 특별히 이전 언약과의 연계성을 강조한다.
B. 신약에서의 언약 개념
신적 언약의 의미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는 헬라어로 '쉰데케'(syntheke)와 '디아데케'(diatheke)로 번역된다. 쉰데케는 당사자들 간에 동등하게 거래되는 계약(compact), 회합(convention), 협정(treaty)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순데케는 성격상 상호적이며 서로에 대한 의무는 조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우월성과 단일성이 강조되는 구약성경의 신의 성격과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애써 디아데케란 용어의 사용을 선호했을 것이란 관점이다.
헬라어 번역본 70인경(Septuagint)에서는 베리트를 한결 같이 디아데케(diatheke)로 번역한다. 일상적인 용례 속에서 디아데케는 법률이나 법령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유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유언은 디아데케의 원래의 의미는 아니었다. 원래의 의미는 '어떤 이가 스스로 한 계획', '마음의 결정' 등이었다. 그래서 당시 헬라어 성경 번역자들은 번역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했었고 고민 끝에 차선책으로 '마지막 의지'(last will)란 의미를 담고 있는 유언이란 단어를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히브리어 베리트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 불변성이 강조되는 반면 디아데케가 유언의 의미로 사용될 경우 유언자가 죽기 전까지는 가변성을 불식시킬 수 없다는 약점 또한 아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디아데케는 언약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은혜성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언약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의 성격을 띤다.
디아데케는 70인역에서 신약성경으로 전달되어 그대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를 언약(covenant)으로 번역하느냐, 아니면 유언(testament)로 번역하느냐로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었다. 흠정역(A.V.)에서는 14번은 유언으로 나머지는 모두 언약으로 번역했으나 개정역(R.V.)에서는 이를 많이 수정했다. 유언이란 번역이 불가피한 Hebrews 9:16-17을 제외하고는 모두 흠정역의 유언이란 용어를 언약으로 대체시켰다. 참고로 위의 히브리서 본문을 NIV에서는 will로, NASB에서는 covenant로, KJV에서는 testament로 번역하고 있다. Galatians 3:15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몇몇 번역들이 많은 곳에서 유언을 언약대신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다음 세 가지 원인들에 기인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 해당 언약에서 하나님의 우선권을 강조하려고 한 것, 둘째, 해당 단어는 가능한 히브리서 9:16-17과 조화되도록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추측, 셋째, 일률적으로 디아데케를 유언으로 번역한 라틴어 역문의 영향이다.
Ⅱ. 언약에 대한 성경적 고찰
A. 언약의 기원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언약은 시대의 변천에 따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원과 출처가 삼위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실로 인해 창세전 영원 세계에서 수립되었으며(Ephesians 1:4-14) 이런 사실에 근거해 신적 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며 동질성을 띤다. 언약의 기원이 창세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 O.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의도했다는 것은 긍정되어야 한다. 세상 창조 전에 하나님은 백성에 대한 계약(언약)적인 사랑을 세우셨다." Palmer Robertson의 이런 관점은 성부 하나님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에베소서 기자의 선언(Ephesians 1:4)을 통해 강력히 지지를 받을만하다.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의미는 이어지는 근접 문맥(verse 7)을 통해 구속 곧 죄사함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영국의 청교도 개혁파 목사인 Arthur W. Pink 또한 그의 저서에서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Ephesians 1:4-14)과 관련해 이를 '영원한 언약' 혹은 '은혜언약'으로 부르면서 성경에 계시된 최초의 신적 언약으로 기술한다. Arthur W. Pink는 계속해서 영원한 언약을 설명하는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선택자들의 구원을 기대하시며 그의 아들과 맺으셨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정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선택자들의 머리와 대표자가 되실 것을 동의하시는 그런 상호적 언약을 협약하셨음을 논술한다. Arthur W. Pink는 이런 사실에 근거해 창세전 영원한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돼 피조세계 속에서 가시화된 사건이 다름 아닌 창세기 3:15에 기술된 여자의 후손(the seed of woman)에 관한 약속의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은 무엇일까. 또한 최초의 언약은 어떤 성격을 띤 언약일까.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의 언약적 질문에 답하면서 창세기 2장 17의 선악과 금령을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으로 제시한다. 특별히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제 2규범으로 공인받고 있는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7장 2항은 "인간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그 행위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라고 천명함으로 이런 사실을 적극 뒷받침해 준다.
과연 그럴까? 논리상 행위언약(창 2:17)이 은혜언약(창 3:15)에 선행할 수 있는 것일까. 신적 언약의 상호 연계성(interrelation)이란 특성상 제반 신적 언약의 뿌리와 원형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의된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미 위에서 살펴봤다(Ephesians 1:4-14). 언약의 씨앗이 창세전 신적 작정 안에서 은혜성을 띤 영원한 구속언약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면 피조세계 속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언약 또한 은혜가 은혜를 낳는다는 생산의 원리상 은혜언약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이런 논리가 정당한 것이라면 최초의 언약은 은혜성을 띠면서 동시에 창세기 2장 17절에 언급된 선악과 금령 이전에 위치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의 필요충분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언약을 창세기 1장 28에 소개된 소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위스덤 종합강해 주석, 창세기 ,1993, P.26). 창세기 본문은 언약의 내용이 복이며 복의 내용이 언약의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본문에서 복(beraka)은 어원상 언약(berith)과 어근이 동일하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복과 언약이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Genesis 1:28은 내용의 성격상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신 최초의 은혜성의 언약이 확실하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 1장 28절을 은혜성을 띤 최초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으로 본다는 사실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요 성경신학의 진일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어주신 최초의 은혜언약으로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선악과 금령(창 2:17)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일까. 야고보 사도의 관점에 의하면 믿음은 본질상 행함을 수반하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강변한다(James 2:22). 믿음과 행함은 독립된 두 주제가 아니라 본질상 하나란 의미이다. 믿음과 근본에서 동질성을 띠고 있는 은혜 또한 수혜자(receiver)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자율적인 순종의 삶을 요구한다. 은혜와 행함 또한 근본에서 하나란 관점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순종의 요구는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의 고백이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한다.(Luke 17:10).
이런 이유로 행위언약은 선행하는 은혜언약에 종속되는 방식을 취함으로 사실상 신적 언약이 시대마다 다양성을 띠고 나타날지라도 근본에서 은혜언약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오직 하나의 은혜언약 이론과 관련해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John Murray는 그의 저서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 온 전통을 비판하면서 성경 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었다는 은혜언약 일원론을 주장했다. Young-chan Song은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 이를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최초의 언약(행위언약)으로 기술하면서 "엄밀히 말하면 행위언약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어진 언약이기에 사실 행위언약은 처음부터 없으며 은혜언약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입장을 피력한다.
결국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의 기원은 근원에서부터 추적하게 될 때 창세전 삼위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구속경륜, 곧 영원한 구속언약에 기초한다(Ephesians 1:4-14)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은 종전의 행위언약으로 일컫는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이라기보다 자체 속에 은혜성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인 사실을 논리적 정당성을 통해 살펴봤다. 이는 사과나무가 사과를 열매 맺듯이 은혜언약의 씨(엡 1:4-14)는 은혜언약의 싹(창 1:28)을 틔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B. 언약의 정의
언약의 중심 사상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레 26:12; 렘 31:33; 겔 37:27; 계 21:7)는 임마누엘 사상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신적 언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위에서 언약의 중심 사상을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살펴봤다. 본 언약공식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거듭남에 근거한다.(엡 1:7; 골 1:14; 롬 3:23-24). 다른 길은 없다(요 14:4; 행 4:12).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죄사함의 약속이 다름 아닌 주님의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마 26:26-28; 눅 22:19-20; 히 10:12-14). 이로 보건대 신구약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언약이란 용어는 인간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나타내는 탁월한 표현으로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Jakob Jocz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정의와 관련해 송영찬은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정으로 전제한다. 그렇지만 언약의 내용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맺은 피의 약정이기 때문에 계약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언약의 특성상 언약의 수혜자(receiver)는 시혜자(giver)에게 자원해 순종해야하는 요구가 수반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과 영원하심 그리고 사랑에 근거해 언약의 수혜자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겠다는 책임을 스스로 지셨음을 의미한다고 피력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Ⅶ, Covenant of God에서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성적인 피조물이 마땅히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주로 순종해야 하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무슨 축복이나 상급을 얻어 낼 수가 없었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써만 가능하였다. 그런데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수단으로 하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신적 언약의 의미를 정의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온갖 축복의 선물들은 오직 언약을 방편삼아 제공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온갖 천상적 복의 통로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엡 1:3). 에베소서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는 신령한 복의 근원이며 언약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시사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언약의 근간이며 언약은 자체 속에 그리스도를 은닉적으로 내포한다.
Meredith Kline은 그의 저서 Oath Consigned에서 언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시행으로 정의한다. 이는 언약 체결을 전 우주적으로 확대 적용하게 될 때 하나님의 왕권이 그의 피조물들에게 시행되는 법적 도구란 의미를 함의한다고 갈파한다.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언약이라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며, 이 관계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돌보실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또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길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살아 있는 사랑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상의 정의는 성경의 언약공식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 26:12; 렘 31:33; 겔 37:27; 계 21:7)라는 말씀의 확장 및 재해석으로 평가된다.
Peter A. Lillback은 그의 저서 The Binding of God(칼빈의 언약사상)에서 칼빈의 언약개념을 논술하면서 칼빈의 언약사상의 핵심을 '하나님의 결속'이라고 강변한다. Lillback은 이 결속을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행위로 해석한다. Lillback은 칼빈의 말을 인용해 "죄사함은 우리에게 교회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이나 결속(bond)은 없다"고 기술한다. 결국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수단인 셈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bond)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스스로를 결속하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타락하고 자격이 없는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된 백성과 상호적 언약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칼빈의 언약사상은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해 교회를 이루는 구원론을 거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종말론까지를 포괄하는 합목적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언약사상에는 언약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상호 밀접하게 결속돼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칼빈의 지적대로라면 언약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이루는 일에 방편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O.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 당신의 백성들과 맺은 은혜언약(구속언약)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으로 정의한다. Palmer Robertson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관계를 수립할 때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약정(bond)을 세운다. 하나님의 계약을 좀 더 세분하면 첫째, 계약은 약정이다. 둘째,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셋째, 계약은 주권적으로 시행되는 피로 맺은 약정으로 구분된다.
첫째로 Palmer Robertson이 말하는 계약이 약정이란 정의는 계약 당사자들을 한데 묶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계약의 내용과 조건에 의해 함께 강력하게 연합돼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약에 있어서 서약이나 표적의 특징은 계약이 본질상 약정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계약은 계약의 당사자들을 굳게 결속시키면서 필수적으로 엄숙한 책임을 수반한다.
둘째로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란 정의는 계약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결속의 궁극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궁극성이란 삶과 죽음의 궁극적인 문제까지를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이때에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을 세우다"라고 번역되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계약을 자른다"(to cut a covenant)이다. 이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는 "계약을 자른다"는 표현을 특별히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맺어 주신 횃불언약식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받는다(창 15:18). 창세기 본문에서 'made a covenant'는 어원적으로 '계약을 자른다'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자른다'(berith)는 동사 자체가 계약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는 절단의 개념이 성경의 계약 사상에 얼마나 중요하게 관련돼 왔는가를 극명하게 시사해 준다. 일반적으로 계약이 이루어 질 때 수반되는 제의 예식에서 동물들이 절단된다. 이런 사실의 명백한 실례가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횃불언약식 때이다(창 15:9-10). 이때 아브라함이 동물들을 둘로 쪼개어 마주 놓으면 하나님께서 쪼갠 동물 사이를 횃불을 통해 상징적으로 지나가심으로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동물의 절단은 '죽기까지의 서원함'을 상징한다. 즉 잘려진 동물은 서약한 사실을 범할 때 계약자 자신에게 임할 저주를 나타낸다(렘 34:18-20). 결국 '계약을 자른다'는 의미는 삶과 죽음의 약정을 의미하며 이는 피로 맺은 약정(bond in blood)과 언약적 상응성을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언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계약적(언약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계약 파기자를 대신해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셨다고 해석하는 Palmer Robertson의 관점은 탁월하다.
셋째로 계약은 주권적으로 시행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란 정의는 신적 계약(언약)에는 인간들의 계약에서 확인되는 흥정이나 교환 또는 교섭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계약의 주체가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적 계약에는 인간 편의 의무조항이 요구될지라도 순종 여부와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인 결속에 따른 궁극적 성취가 보증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신적 언약의 최대 수혜자인 성도가 세세무궁토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요약하면 신적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를 중보 삼아 맺어 주신 사랑이 동기유발 된 은혜성의 주권적 약정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방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언약의 은혜성은 비록 언약의 수혜자가 언약에 내재된 의무조항에 불충할지라도 은혜의 특성상 언약은 결코 파기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에 동반되는 행함의 정체성은 수혜자로 하여금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O. Palmer Robertson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에서 핵심 단어로 언급되고 있는 Covenant의 한국어 번역을 '계약'으로 번역한 것은 주권적으로 맺은 신적 언약의 은혜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적절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계약이란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거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들은 상호적이기에 계약이란 용어사용이 무난하다. 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비록 자체 속에 순종에 대한 의무조항이 내재돼 있을지라도 본질상 상호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언약의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해 궁극적인 성취가 보증된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의 정체성은 계약보다 언약이란 용어의 사용이 적절하다고 분별된다.
C. 언약의 목적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계시적 방편이다(엡 1:4-6). 그런 의미에서 언약에는 천상지향적인 목적이 전제된다. 그렇다면 신적 언약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위의 언약의 정의에서 언약의 핵심 사상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것"(렘 31:33; 겔 37:27)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본문의 요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사상에 집중된다(마 1:23). 그러므로 언약의 일차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란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마 1:21, 눅 19:10). Han-soo Lee는 이런 관점에 동의하면서 그의 저서 The Gospel and Law에서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형성하는 것이며, 창세기 18장 19절을 인용하면서 본문은 선택과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백성을 형성하는 데 있음을 시사해준다"라고 피력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백성 형성이 언약의 일차적인 목적인지 아니면 궁극적인 목적인지의 여부를 가리는 논의는 좀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의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에서 언약의 목적을 상기 본문(렘 31:33; 겔 37:27)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크게 핵심을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에 Gordon J. Spykman은 그의 저서 Reformational Theology에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를 두 개의 독립된 주제로 보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단일한 주제로 해석한다. Gordon J. Spykman은 계속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언약과 나라의 개념은 창조의 의미를 가리키는 이중의 지표이다. 언약과 나라라는 이중의 도구가 창조라는 하나로 일치되는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세상 속에 거하는 우리의 내적 삶에 관계시키신다"라고 설파한다. 이는 피조세계 속에서 창세전에 수립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경륜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구속사역을 통해 궁극적 성취와 종말론적 완성을 동시에 보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Gordon J. Spykman의 관점에 따르면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고 그들을 통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음을 본다. 이는 Han-soo Lee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견해임에 틀림없다. 이런 관점에서 Gordon J. Spykman의 견해는 Han-soo Lee의 통찰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의 관점을 요약하면 언약의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셔서 구원하는 일이요, 둘째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건설하시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이상의 결론에 덧붙여 언약의 최종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송축하며 경배하는 일이라고 정리한다(Ephesians 1:6).
D. 언약의 특징
1. 주권성(Sovereignty) : 언약의 기원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하나님의 협약에 의해 수립된 구속경륜(엡 1:4-14) 곧 영원한 구속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적 예정은 사랑이 동기유발 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기초한다. 이런 사실은 로마서 기자가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자녀의 정체성을 논증하면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로 여김을 받는다고 기술하는 데서 명백히 확인된다(Romans 9:7-8).
이 과정에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이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Romans 9:13). 로마서 기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적인 발언과 관련해 그 정당성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찾는다. "Not only that, but Rebekah’s children were conceived at the same time by our father Isaac. Yet, before the twins were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 —in order that God’s purpose in election might stand"(Romans 9:10-11). 본문에서 특히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대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극명하게 증거한다. 로마서 기자는 9장 21절을 통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right)이 없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토기장이의 주권성을 비유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변증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언약과 선택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언약적 작정에 기초하기에 기원이 같다. 표현이 다를 뿐 의미상 공통의 목표와 목적을 가진다. 언약과 선택은 이런 이유로 세상 역사 속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이 둘은 공통된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관점에서 언약과 선택은 의미상 불가분의 관계성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세상 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이 주권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첫째로 언약 수혜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언약적 선택의 방식으로 맺어진다. 둘째로 언약의 궁극적 목표와 목적이 때가 찰 때에 반듯이 달성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야곱의 언약적 선택이 이상의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해 준다.
2. 은혜성(Graciousness) : 신적 언약이 은혜성을 특징삼고 있다는 사실은 주권성과 맥을 같이한다. 언약의 기원이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에 기초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구속언약(엡 1:4)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의 은혜성이란 주제는 피조세계 속에서 맺어지는 일체의 언약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창세전 영원한 구속언약에 불가불 의존되고 종속됨으로 본질상 은혜언약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은혜언약은 이런 이유로 비록 시대별로 다양성을 띨지라도 사실상 하나의 언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John Murray는 '오직 하나의 언약'과 관련해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온 전통을 비판한다. 그는 성경 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었다는 은혜언약 일원론을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Grace에서 피력한다. Clarence Stam 또한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언약은 몇 개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오직 한 언약만 있다'고 대답한다. Clarence Stam은 말하기를 성경 역사 속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경륜(economy)이 있었지만 언약의 본질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고 강변한다. 박용기는 언약을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으로 구분하면서도 두 언약 간의 상호 불가분의 의존성과 보완성에 근거해 행위언약을 은혜언약의 은혜성을 더욱 은혜 되게 하기 위해 주신 방편적 언약으로 해석한다. 박용기는 이런 관점 또한 결국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 하나로 귀속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의 관점들을 정리하면 신적 언약의 은혜성이란 본질상 주권성과 맥을 같이 하면서 수혜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맺어주신 언약이란 사실이 강조된다. 따라서 언약에 부가된 의무조항에 불순종하게 될 때 언약적 징계가 주어질망정 언약의 파기나 무효화는 불가하다. 일구이언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에 기초해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맺어주신 언약이기에 궁극적 성취가 보증된다.
3. 연속성(Continuity) : 신적 언약의 연속성의 특징은 언약의 상호 연계성의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언약의 상호 연계성이란 피조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언약은 근본에서 기원이 같고, 언약의 주체가 동일한 사실로 인해 본질상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선악과 금령언약(창 2:17) 및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은 각각 창조, 타락, 구속이란 언약적 주제들을 자체 속에 내포하면서 상호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이들 세 언약은 그 기원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엡 1:4-14)에 두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면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세 언약적 주제들은 이미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영원한 구속언약 속에 잠재돼 있었으며, 때가 찰 때에 '선 계획 - 후 성취'라는 구조적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것임을 간파하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의 연계성이란 첫째로 모든 언약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으로부터 기원함으로 본질상 독립적이지 않고 '오직 하나의 은혜언약'이란 사실을 함의한다. 둘째로 행위언약의 역할은 은혜언약에 종속돼 은혜성을 더욱 은혜 되게 하는 방편적 기능을 담당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모든 언약은 궁극적 성취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로 결국 구약에 계시된 모든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됨을 증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실체이며 총화이다(마 1:1; 고후 1:20).
4. 실현성(Feasibility) : 언약의 실현성이란 언약 수혜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언약의 궁극적 성취의 보증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이 가능한 것은 언약 체결의 동인이 철저히 언약 시혜자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사랑이 동기유발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언약의 실현성의 핵심 주제는 시혜자의 주권성과 은혜성 및 신실성에 의존된다.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세 언약의 상호 연계성을 통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선악과 금령(창 2:17)에 불순종한 아담부부는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따라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죽으면 은혜로 앞서 맺어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이 파기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일구이언할 수 없는 분이기에 창조언약의 파기는 불가하다. 선악과 금령은 아담부부의 죽음을 요구하고 창조언약은 이들의 생명보존을 탄원한다. 두 언약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맺어 주신 언약이기에 어느 것 하나 파기될 수 없다. 두 언약 모두 성취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두 언약 사이의 첨예한 갈등과 충돌의 해결책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맺어주신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아담부부의 죄를 구속하심으로 선악과 금령(창 2:17)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창조언약(창 1:28)이 성취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원복음의 기능을 담당한다(롬 11:32-36). 이처럼 신적 언약은 자체 속에 내재된 주권성과 절대성 및 은혜성으로 인해 언약적 징계가 따를망정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가 보증된다.
5. 요약(Summary) : 언약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자기 백성들에게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맺어 주신 은혜성의 약정이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들은 상호 밀접하게 연계된 가운데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해 때가 찰 때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된 연약성으로 인해 언약에 부가된 의무조항에 늘 실패할지라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기필코 언약 속의 약정들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아무도 성도들을 빼앗지 못한다(롬 8:38-39).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며 영속적이다. 기독교 신앙관의 정체성이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으로 확립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E. 언약의 유형
성경에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특정 성경본문을 통해 문자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구약 성경의 다양한 본문과 문맥 속에서 관련 구절들을 의미적으로 분석해 종합하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정립하게 된다(창 1:26; 마 3:16-17; 행 5:3-4, 롬 1:7; 히 1:8). 언약의 다양성 또한 동일한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세 종류의 언약에 관해 성경은 문자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본질적 요소들인 언약의 당사자, 약속의 내용, 의무조건 등을 함축하고 있다면 이를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으로 부르는 창세기 12장 1-3절의 문맥 속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창세기 17장 1-8절에 의하면 창세기 12장 1-3절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권적으로 맺어 주신 은혜언약이란 사실을 반복해 언급한다. 다윗언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다윗언약으로 알려진 2Samuel 7:11-17의 문맥 속에서 언약이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Psalms 89:3-4을 통해 삼하 7:16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이를 다윗과 맺어 주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설명한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에 약속된 신적 언약의 종류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Paul Enns는 그의 저서 The Moody Handbook of Theology에서 "Covenants theologians view the covenants differently. Some refer only to the covenants of works and grace, whereas others refer to the covenants of works, redemption, and grace. The covenant of redemption and the covenant of grace should not, however, be understood as distinct covenants, but two modes or phase of the one evangelical covenant of mercy"라고 기술한다.
1.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 구속언약은 창세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맺으신 상호간 언약적 협약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엡 1:4).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상호 언약적으로 결속하셨다(covenanted together). 성부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속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둘째 아담을 삼으시고, 그의 생명을 대속적으로 지불케 하기 위해 중보자로 지명하셨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께서 맡기신 구속의 직임을 기꺼이 수락했다. 성자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셨다." 성령 하나님은 성자에 의한 구속의 공효를 성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신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전 구속언약의 핵심 주제는 성부의 선택, 성자의 구속, 그리고 성령의 공작하시는 적용사역에 집중된다(엡 1:4-14).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구속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의 타락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과정의 산물이다(롬 11:32-36).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만일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 작정은 참으로 두려운 작정임을 나도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 인간이 어떤 종국을 맞게 될 지 미리 아셨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렇게 정하신 때문이다"(Inst. Ⅲ. 23. 7)라고 설파한다. 칼빈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그 후손의 파멸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타락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다"(Inst. Ⅲ. 23. 7)고 주장한다. 칼빈은 토마스 아퀴너스의 허용적 작정관을 논박하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도모와 예정을 강조하면서 "왜 우리는 허용을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결정 없이 단순한 허용만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Inst. Ⅲ. 23. 8)고 강변한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엡 1:4)는 언약적 표현 속에는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타락-구속'이란 언약적 주제들이 이미 묵계적으로 잠재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아담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의지를 좇아 범죄 했다. 하나님은 이를 선용해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언약을 성취시켜 나가신다. 하나님은 창조자의 주권을 통해 모든 일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실 뿐 아니라,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신다(롬 8:28). 토기장이의 비유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해 준다(롬 9:20-21).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 중심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능력으로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믿음으로 수납할 수 있다면 하나님 중심의 절대적 선개념의 이해를 통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을 정립하는 일은 시간문제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사건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상충하지 않는 가운데 신비롭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의 범죄는 본질상 단순한 타락과 저주로 간주하기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언약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합목적적 섭리역사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창세전에 수립된 구속언약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만끽함으로 세세무궁토록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엡 1:6). 대반전이며 역설이다(롬 11:32).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사건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 준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구속언약과 관련된 증거본문은 에베소서 1장 3-14절 외에도 3:11; 살후 2:13; 딤후 1:9; 딛 1:2; 벧전 1:2 등을 들 수 있다.
2.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 :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직후까지 행위언약이란 용어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종교개혁 이후 언약교리는 Johann Heinrich Bulinger(1505-1575)와 Zacharias Ursinus, Caspar Olevianus, Johannes Cocceius(1603-1669) 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때부터 '행위언약'이란 표현이 타락 이전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사용되었다. 특별히 선악과 금령(창 2:17)과 관련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단서 조항이 부가됨으로 행위언약으로 불렀다.
언약신학자들 간에 선악과 금령은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순종에 대한 보상 개념이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다는 이유로 생명언약(covenant of life)으로도 불렀다.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면 영생의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고 불순종하면 죽음의 심판에 처해질 것이다란 관점에 근거해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Ⅶ, Covenant of God with Man, 2항에서는 선악과 금령을 언급하면서 "인간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그 행위 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라고 진술한다.
Geerhardus Vos는 그의 저서 Biblical Theology에서 선악과 금령(창 2:17)을 행위언약으로 부르는 전통적인 관점에 묵계적으로 동의한다. G. Vos는 "처음 아담부부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선하게 피조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한층 높은 완전의 수준으로 높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은 언뜻 모순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진보가 성취된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모순 인 것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 진보는 확정되지 않은 데로부터 확정된 선과 축복으로의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상태라 함은 선과 축복 등을 더 이상 잃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 더 이상 범죄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 그래서 더 이상 죄의 결과에 종속될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 상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a state of indefinite probation)였다"라고 피력한다. G. Vos의 이런 표현 속에는 아담부부가 당초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대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최고/최선의 경지로 발전해 나가야 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시사한다. G. Vos의 관점은 아담부부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의 여지는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보상될 것임을 의미하는 듯하다. G. Vos는 계속해서 "이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 불리운 것은 인간을 시험을 통해서 그 최상의 지복과 연관된 종교적, 도덕적 성숙의 상태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 때문이었다"라고 설파한다. 이런 그의 주장 속에는 선악과 금령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면서 순종을 조건으로 확정된 최선과 지복의 상태로 이끄는 시험적 사건으로 간주했음이 확실하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영생)을 약속하고 있는 구절들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 된다(레 18:5; 겔 20:11, 13, 21; 눅 10:28; 롬 7:10; 10:5; 갈 3:12). 그러나 본문의 말씀들은 근본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촉구함으로 영생을 보증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례로 갈 3:21절에서는 생명 얻는 율법의 기능과 관련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부정적으로 진술한다. 본문은 성경의 특정 구절들이 비록 율법을 지켜 구원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 자는 없음을 우회적으로 기술한다. 약속은 있지만 실제로 성취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본래적 역할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정죄와 심판의 기능을 수행한다(롬 3:19-20). 반면 율법은 긍정적인 입장에서 몽학선생(tutor)의 역할을 담당함으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중보적 기능을 수행한다(갈 3:23-24). 성경은 총론적 관점에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다"고 단호히 선언한다(롬 3:20).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될 뿐이다(롬 3:27-28).
그렇다면 순종의 요구를 통해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는 선악과 금령의 경우는 어떤가? 선악과 금령 속에 불순종에 따른 죽음이 선언되고 있다고 해서 순종을 대가로 영생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선악과 금령은 행위언약으로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보증하는 생명언약(covenant of life)일 수 있을까? 과연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말할 수 있는가? 성경에 행위언약이 제시되고 있는가?
Thomas Edward McComiskey는 그의 저서 The Covenants of Promise에서 "창세기 2:15-17에 나오는 행위계약에 대한 조건들을 검증해 보면, 생명이 아닌 죽음에 대한 예견이 아담 앞에 제기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절)고 진술하고 있다. 본문에서 생명이 아담에게 약속되었다는 결론은 기껏해야 하나의 추론일 뿐이다. 우리는 곧 결과를 직면하게 될 행위계약의 조건이 단 한 가지, 즉 아담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렸던 관계의 중지인 죽음을 제공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McComiskey는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보기보다는 율법의 기능처럼 은혜가 요구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로 보았다. 그의 견해는 행위언약이 생명을 제공하지 않으며 율법과 마찬가지로 이미 수립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기능한다고 보았다. McComiskey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약속에 의해 수립되지만 순종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Clarence Stam은 McComiskey에 관점에 동의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킨다.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말하기를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완전하고 개인적인 복종을 통해 영생을 보상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제안은 근거 없고 문제가 대단히 많다. 아담 자신이 신실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 어디에도 입증하는 곳이 없다"고 강변한다. 그는 계속해서 "아담부부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셨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애로운 공급하심으로 생명과 풍성함을 받았다. 그들은 이 선물들을 스스로 획득하거나 더 높은 정도의 완전함을 달성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하고 의롭고 거룩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다"고 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에 대한 아담부부의 불순종은 세속사적 관점에서 욕심의 발로인 동시에 피조물로서 본질상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이며 반역죄가 성립된다.
하나님은 만물을 포함해 아담부부를 보시기에 심히 좋은(very good) 상태로 지으셨다(창 1:31). 선하다(good)란 흠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과 전적으로 일치되는 완전함'이란 의미다. 이는 아담부부가 당초 하나님의 의도대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굳이 '행위언약'을 맺어 주심으로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지음 받은 아담부부를 순종을 조건으로 더 높고 온전하고 고상한 상태로의 생명을 추구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 Clarence Stam은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계시가 아닌 인간 이성과 사색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면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 Chapter 5의 '행위언약이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제목 하에서 이를 우회적으로 부인하고 있음을 본다.
S. G. de Graaf(1889-1955)는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타락 전에 아담과 맺은 이 언약은 대체로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아담이 선행을 통해서 자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에 획득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단지 이 은총(favor)을 선택하고 이 은총 가운데 남아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순종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Graaf는 그의 저서 Promise and Deliverance에서 "이 언약을 일컬어 행위언약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명칭을 잘못 오해하여 마치 영생이 인간 봉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써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이유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불하시는 품삯을 받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의 언약은 하나님의 은총언약(the 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명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필자의 생각 또한 행위언약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아담부부는 피조물의 면류관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지음 받았다. 이는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근거해 기뻐하시는 뜻대로 피조 되었음을 의미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본질상 언약적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다. 사랑은 믿음과 은혜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순종을 요구한다(요 14:15; 23; 요일 5:3).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의 요구로 주신 사랑의 법인 셈이다.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에 담긴 순종의 당위성을 사랑의 발로가 아닌 대가와 보상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은혜를 입은 자의 행위의 성격은 마땅히 행할 바 본분과 도리의 발로이지 조건부적인 보상과 상급의 개념일 수 없다(눅 17:10).
더구나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이해하고,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한다고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고린도전서 기자는 부활체의 정체성을 논하는 가운데 아담의 출생기원과 관련해 그는 땅에서 났으며 혈과 육을 입은 자로서 그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논증한다(고전 15:47-50). 이는 하늘에 속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 연합하는 방식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영생 곧 부활의 생명을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첫 사람 아담이 비록 무죄자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혈과 육'을 가진 땅에 속한 자로서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영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절대 불가하다. 더욱이 창세전에 수립된 그리스도 안에서(구속사상) 베푸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사상(엡 1:4)을 고려할 때, 선악과 금령은 논리의 전개상 순종을 통안 자력구원이나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증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이해하고 순종을 담보로 영생을 보증한다는 종래의 개혁신학의 견해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충분히 재고돼야 한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John Murray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온 전통을 선의적으로 비판하면서 성경의 모든 언약은 본질에서 은혜언약으로 일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계시된 모든 언약의 기원과 원형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Murray의 관점은 수용할 만하다. 은혜의 씨앗에서 은혜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하다.
3.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 : 언약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사랑의 결속과 유대관계를 총칭한다. 언약신학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을 셋으로 구분해 각각 구속언약, 행위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구속언약(엡 1:4)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 속에서 성부와 선택받은 자의 보증인이며 머리인 성자 사이의 약정이다. 행위언약(창 2:17)은 언약신학자들에 의하면 타락 전 인류의 대표자이며 머리인 아담에게 맺어 주셨다. 행위언약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불순종에는 죽음의 형벌 조항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은혜언약(창 3:15)은 타락 후 삼위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 가운데 있는 선택받은 죄인 사이의 약정이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죄로부터의 구원의 은혜를 강조한다. 은혜언약의 핵심이 죄로부터의 구원인 사실로 인해 그 기원을 창세전 구속언약에서 찾는다. 이런 관점에서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은 본질상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신적 언약의 두 국면(phases)과 양상(modes)일 뿐이다.
은혜언약(창 3:15)의 기원은 창세전 구속언약(엡 1:4)에 두지만 가시적인 출발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서 찾는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들을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의 대속적인 사역을 통해 죄를 사면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창 2:17)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께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은 일반적으로 '은혜언약'(창 3:15)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에 의하여 주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고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라고 기술한다. 이상의 구원의 원리들이 해당 본문 속에 암시적으로 함축돼 있다. 여자의 후손언약을 '원복음'으로 일컫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성경의 계시역사는 대속물로 암시되고 있는 여자의 후손을 역사 가운데 출현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언약적 구속사의 옷을 입고 출발한다. 언약적 구속사라 함은 여자의 후손을 세상역사 속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선 언약 - 후 성취'의 방식으로 언약을 도구삼아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는 두 계열 간의 첨예한 적대적 투쟁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통해 일단락되는 것을 신약의 역사는 증거한다(마 1:1; 갈 4;4; 요 19:30; 계 16:17; 21:6).
은혜언약은 그리스도의 영단번(once for all)의 속죄사역에 근거하기에 그 효력이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 파기되지 않는다(Hebrews 10:12-14). 반면에 은혜언약의 적용 범위는 우주적이지 않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은혜언약의 수혜자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자들로 제한된다. 이를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라고 부른다. 은혜언약의 요지는 한 마디로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Ezek. 37:27; 2Cor. 6:18; Rev. 21:7) 이라는 임마누엘 신학의 궁극적 성취에 집중된다(Matthew 1:21-23; Rev. 21:3). 은혜언약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찬미하는 데 있다(엡 1:6).
4. 요약(Summary) : 언약교리의 뼈대는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후 2세기를 지나면서 조직적으로 발전했다. 언약신학은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그리고 코케이우스와 같은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의 정체성을 구속언약, 행위언약 그리고 은혜언약 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은 창세전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엡 1:4-14) 속에서 성부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보증인이며 머리이신 성자 사이에 약정되었다(엡 1:4). 그런 의미에서 창세전 구속언약은 언약의 원형으로 기능하며, 다른 두 언약의 발생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 '선악과 금령'(창 2:17)을 통해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최초로 맺어졌다. 행위언약은 불순종에 대한 죽음이 형벌로 주어졌지만,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삼위하나님의 협약은 논리상 이미 인류의 타락을 고려하고 있다. 아담은 땅에서 났으며 혈과 육을 가진 자로 그 상태로는 비록 무죄자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진술한다(고전 15:47-50). 그런 의미에서 행위언약은 영생의 보증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의 당위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보여진다. 나아가 언약의 연계성(interrelation)이란 특성상 행위언약을 독립적으로 보기보다 은혜성을 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에 종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은혜가 요구하는 행함이란 원리와 일치될 뿐 아니라,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신적 언약은 본질상 은혜성을 띤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John Murray/Clarence Stam). 은혜언약도 본질상 창세전 구속언약에 의존돼 있기 때문이다.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은 아담의 타락 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죄인들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초의 원복음의 성격을 띤 은혜언약을 여자의 후손(창 3:15, the seed of the woman)언약이라고 부른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아담의 죄를 여자의 후손이 속량해 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구속과 대속사상을 함의한다. 여자의 후손언약(은혜언약)은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 된 두 후손들 간의 적대적인 투쟁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본질상 사단의 패배와 그리스도의 승리로 성취된다(요 19:30, it is finished/계 16:17, it is done/계 21:6, it is done). 결과적으로 은혜언약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집중된다(롬 11:32; 엡 1:6).
F. 성경에 계시된 제반 언약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계시서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하신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언약의 방식으로 세상역사 속에 나타내 보이셨다.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은 문자적으로 언약이란 용어가 해당 본문에서 발견되지 않더라도 언약의 핵심 요소들인 당사자, 언약의 내용, 의무조항 등이 확인될 때 이를 언약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선악과 금령인 행위언약(창 2:17),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시내산 언약(출 20:1-17), 아브라함 언약(창 12:1-3), 다윗언약(삼하 7:11-17) 등은 해당 본문의 문맥 속에서 언약이란 용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이들을 언약으로 명기한다. 행위언약은 호세아 6:7에서 아담언약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은 누가복음 22:19-20에서 새 언약으로, 율법을 대표하는 시내산 언약은 히브리서 8:7에서 첫 언약으로, 다윗언약은 시편 89:3-4에서 다윗언약으로 표기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원한 구속언약(엡 1:4-14) : 영원한 구속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된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한다. 구속언약의 요지는 성부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은(엡 1:4) 죄인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해 성자하나님과 협약한 언약이다.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첫째로 보증인(guarantee)으로 나타난다.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대신 담당하는 자이다.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자들의 죄를 속량(atonement)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롬 8:3-4). 둘째로 언약의 머리(headship)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범죄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롬 5:14) 이 되셨으며 구속언약 안에서 저들의 언약의 머리가 되셨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은 논리의 전개상 이미 인류의 타락이 전제된다.
구속언약은 창세전에 수립된 사실로 인해 모든 신적 언약의 기원(origin)이며 원형(prototype)이고 씨앗(seed)으로 기능한다. 언약의 원형이 은혜성을 띤 구속언약이란 사실은 창세 이후 피조세계에서 발생하게 될 일체의 언약 또한 근본적으로 구속언약에 종속돼 은혜언약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결국 총체적 관점에서 신적 언약은 은혜언약 하나인 셈이다. 은혜언약은 수혜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반드시 성취된다. 신적 언약에 담긴 주권성과 은혜성이 이런 사실을 보증한다.
2.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 : 전통적 개혁신학에서 창세기 1장 28절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아담에게 위임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해 왔다. 문화명령을 때때로 창조명령(creation mandate)으로 언급하기도 했고, 기독교적 청지기직(Christian stewardship)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유의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 주신 은혜성의 언약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위스덤 종합강해 주석, 창세기 p.26).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in the sea and the birds in the sky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상기 본문에서 복(bless)으로 표기된 히브리어 베라크(beraka)는 언약의 베리트(berith)와 어근이 같다. 이는 구약에서 복과 언약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성경에서 복과 언약의 관계를 살펴보면 "복이란 언약의 내용을 말해주고 언약은 복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실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 복의 내용이 곧 아브라함에게 맺어주신 언약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창 12:1-3). 창세기 1:28과 관련해 박용기는 그의 저서 성경신학(Bible Theology) 개론에서 본문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으로 주신 최초의 은혜언약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은혜언약의 이름을 붙여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본 연구에서 아담에게 복으로 주신 문화명령(창 1:28)을 문화명령적 창조언약(Cultural Covenant of Creation), 또는 단순히 창조언약(Covenant of Creation)으로 명기해 사용코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해 아담에게 최초로 약속해 주신 복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은 선악과 금령(창 2:17)에 근거한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으로 간주하기보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언약의 연계성에 근거한 논리의 전개상 불가피하다. 언약의 기원과 원형과 씨앗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구속언약(엡 1:4-6)에서 찾는다. 종의 법칙(the Law of Species)에 근거하면 은혜언약은 은혜언약을 낳는다. 은혜언약이 행위언약을 낳을 수 없다.
창조언약(창 1:28)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집중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건설을 언약적 복을 통해 아담에게 위임하셨다. William J. 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에서 창세기 1:28을 위임명령(mandate of commission)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창세기 1-2장을 통해 시사되고 있는 창조의 목적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달성시키도록 의도되었다고 비교적 바르게 파악한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창 2:17) 거룩한 천상지향적 문화 창달의 삶을 전인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목적하셨던 나라는 점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과정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해 가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에덴의 상태는 하나님 나라를 성례전적으로 표상하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미래지향적으로 계발, 발전해 나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초기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Albert M. Wolters는 그의 저서 Creation Regained(창조, 타락, 구속)에서 "역사란 자연적이든 인간적이든 창조의 모체 안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이다"라고 설파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경영한다는 배경에 비추어 역사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결과적으로 창조의 발전 단계는 인간의 문명 단계에 부합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된 초기 하나님 나라의 경영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22:1-5)의 도래로 마침내 종말론적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3. 선악과 금령언약(창 2:17) : 전통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을 선악과 금령(창 2:17)으로 보고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전통 개혁신학에서는 행위언약 속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조건부 단서 조항에 근거해 이를 확대해석함으로 순종을 통해 영생을 보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특별히 G. Vos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해 "이는 시험을 통해서 그 최상의 지복과 연관된 종교적, 도덕적 성숙의 상태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 때문이었다"라고 전통적인 해석에 동의한다. 나아가 영생의 의미와 동의어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최상의 지복의 상태를 일컬어 "확정되지 않은 데로부터 확정된 선과 축복 등을 더 이상 잃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 더 이상 범죄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더 이상 죄의 결과에 종속될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피력한다. 그러면서 "아담의 처음 상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험의 상태였다"(a state of indefinite probation)고 해석한다.
율법은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영생)을 약속한다(레 18:5; 신 4:1; 겔 20:11, 13, 21; 눅 10:28; 롬 7:10; 10:5; 갈 3:12). 그러나 율법을 지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갈 3:21). 율법은 본래의 기능상 죄인을 복음에로 인도하고(갈 3:23-26) 복음은 믿음으로 의인 된 자를 사랑의 법에 포로 되게 한다(고후 5:14-15; 눅 17;10; 마 11:30).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이 순종을 담보로 영생을 보증하는 행위언약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구원론적인 성경의 문맥과 관련해 부적합하다고 보여진다.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개인적인 복종을 통해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제안은 근거가 없고 문제가 대단히 많다"고 부당함을 제기한다. 아울러 "아담부부는 언약 안에서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애로운 공급하심으로 생명과 풍성함을 받았다. 그들은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하고 의롭고 거룩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다"고 설파한다. 선악과 금령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 자체를 요구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관점이다. 더구나 행위언약과 관련해 "일정 기간의 필요한 시험 기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계시가 아닌 사색의 산물"이라고 Clarence Stam은 서슴없이 지적한다.
S. G. De. Graaf도 그의 저서 Promise and Deliverance에서 행위언약과 관련해 대체로 Clarence Stam의 견해에 동의한다. Graaf는 말하기를 "이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고 잘못 오해하여 마치 영생이 인간 봉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Graaf는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보기보다 은총언약(the Covenant of God's favor)으로 이해해야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아담을 창조의 면류관으로 지으시고 만물의 통치자로 세워 주셨으니 은총에 따른 순종은 마땅한 도리이며 본분이란 관점이다. Graaf가 은혜(grace)와 은총(favor)을 구분한 것은 본질상 두 용어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되고, 은총은 범죄하기 전 아담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언제나 죄용서까지 포함하는 특별한 의미의 호의를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피력한다. Graaf가 선악과 금령의 본의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행적으로 베푸신 특별한 은총들(창 1:28 : 피조물의 면류관, 통치권 위임, 복의 언약)과 관련해 이에 상응하는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받고 있다고 해석한 것은 괄목할만한 관점으로 평가된다. 선(先) 은혜에 따른 후(後) 행함의 원리에 근거한 제도적 장치란 관점이다.
한편 William J. 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에서 "아담의 범죄를 자유행위의 하나로 인식하면서, 인간은 자율권을 지닌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또 추측건대 더 충실하고 더 완벽한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나아가기 직전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고 피력한다. 계속해서 Dumbell은 "인간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서 하나님께만 따로 보존되어 있던 어떤 영역을 침입해 들어갔던 것이며 또한 명령을 위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 다시 말해서 신성을 낚아채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바르게 해석한다. 이런 사실은 Dumbrell이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 순종을 통해 영생을 보증하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표현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위해 시험적 존재(probationary being)로 지음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의 견해 또한 Stam, Graaf 및 Dumbrell의 의견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선악과 금령이 불순종에 따른 죽음을 조건부적으로 선언하고 있을지라도 순종을 대가로 영생을 보증하고 있는 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아담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을 대로 지음 받았을지라도(창 1:31)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Dumbrell이 지적한 대로 "더 충실하고 더 완벽한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의 상태"로 성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잠재돼 있었다. 이는 당초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 있었을지라도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초기상태를 표상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이르는 수단은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는 방식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불순종함으로 죄인으로 전락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롬 11:32-36). 이런 사실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엡 1:4)는 구속언약의 원리와도 논리 전개상 상응한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언약 속에는 미래지향적으로 발생하게 될 하나님의 창조(creation)사역과 인간의 타락(depravity) 및 하나님의 구속(redemption)의 주제들이 상호 불가피하게 연계성(continuity)을 띠면서 묵계적으로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논증은 본 연구의 중심 주제로서 본론(Part Four) 부분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단지 본문에 대한 지나친 해석의 확대를 통해 독립된 행위언약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처사로 생각된다. 더구나 순종을 통해 영생에 이른다는 성경의 약속들은 실제로 성취된 적이 없다(갈 3:21). 이는 율법이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한다는 성경의 약속들은 처음부터 다른 의도를 갖고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대가로 영생을 보증한다는 논리는 처음부터 성경의 본의가 아니었다(롬 3:28).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관점이 성경의 증언이다(갈 2:21).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은 소극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해 심판에로 이끈다(롬 3:19-20; 갈 3:23). 반면 율법의 적극적인 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함으로 복음(Christ)에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수행한다(갈 3:24-26). 그러므로 율법은 죄인을 복음에도 이끌고,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을 사랑의 법에 포로 되게 한다(고후 5:14-15; 눅 17:10; 마 11:30).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창 2:17)은 행위언약으로 성급히 단정하기보다 '선(先) 은혜 후(後) 행함'의 원리에 따라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에 따른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셨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은혜성을 띤 창조언약과 행위언약의 성격을 띤 선악과 금령은 독립된 두 언약이 아닌 셈이다. 은혜에 동반된 행함이란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은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흡수돼 본질상 하나의 은혜언약(창 1:28)의 정체성을 띠게 될 뿐이다. John Murray가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온 전통을 비판하면서 성경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라는 은혜언약 일원론을 제시한 것"은 바람직하다.
4.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 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 된 백성들과 맺어 주신 여자의 후손 언약을 가리켜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언약의 수혜자(covenanted party)들과 관련해 한편에서는 타락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가 하면(Arminianism),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죄인들에게 국한시킨다(Calvinism). 성경의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후자의 경우가 더욱 성경적인 것으로 수납된다(마 1:21; 요 6:37; 8:47; 행 13:48; 엡 1:4; 딤후 1:9; 딛 1:2). 개혁주의 신학의 구원론을 정립하고 있는 'TULIP' 교리 중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의 내용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준다.
본 논고에서는 상기 은혜언약을 보다 구체적인 용어로 '여자의 후손언약'(Covenant of the Seed of the Woman)으로 부를 것이다. 이는 은혜언약(창 3:15)의 중심 주제가 타락한 아담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부속된 후손들의 죄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 사면해 주심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이를 통해 당초 은혜로 맺어 주셨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은 대속사상을 내포하며 이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구속언약의 구체적 성취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언약인 은혜언약은 본질상 창세전 구속언약에 기초한다. 대부분의 언약신학자들은 신적 언약을 구속언약, 은혜언약, 행위언약의 셋으로 구분하면서도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의 관계를 별개의 두 언약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복음적인 자비언약의 두 양상과 두 국면으로 수용한다(two modes or phases of the one evangelical covenant of mercy).
여자의 후손언약에는 두 계열 간의 적대적인 투쟁의 역사가 묵계적으로 예언돼 있다. 결과는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지라도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여자의 후손에 의한 종말론적인 성취가 보증된다(창 3:15). 본문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정체성은 각각 이중적으로 묘사된다. 여자의 후손은 '그'(He)라고 일컫는 단수 대명사와‘후손’이라는 복수 대명사가 암시적으로 시사된다. 뱀의 후손도 뱀과 그의 후손으로 구분된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미래지향적인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본질상 여자의 후손의 승리로 일단락될 것이다. 여자의 후손(He)의 승리에 여자의 후손언약의 최대 수혜자들인 성도들이 주님의 승리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뱀과 여자 사이의 원수 관계와 관련해 O.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에서 "최종적으로 사단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낼 후손을 낳을 자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두기 위해 여자가 먼저 언급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 낼 한 사람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주해한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세상역사(세속사)는 우리의 대속물(ransom)이 되실 여자의 후손을 세상 역사 속에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란 영적 정체성을 띠고 점진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적 언약은 '선(先) 언약 후(後) 성취'라는 구조적인 틀을 통해 구속사를 푸는 열쇠로 기능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이처럼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는 언약과 구속의 관계를 통합해 언약적 구속사(Covenantal History of Redemption)로 부를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창세전 구속언약(엡 1:4-6)과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연속적인 창조-타락-구속이란 세 주제들 사이에 감춰진 언약적 상응성(correspondence)과 연계성(continuity) 및 상호 관계성(interrelation)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립은 성경의 전(全) 계시사를 저자의 의도와 성령님의 의중과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할 수 있는 첩경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5. 노아의 보존언약(창 9:1-2; 8-10) : 노아언약은 홍수 심판 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의 연속선상에서 새로운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존언약(covenant of preservation)이란 성격을 띤다. 그러나 노아언약에 함축된 새로운 인류 보존의 핵심 주제는 단순히 보편적인 인류의 증가가 아니다.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죄로부터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문화 창달의 명령을 수행케 함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관점에서 노아의 보존언약이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목적과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조화롭게 연합시킨다"는 Palmer Robertson의 통찰력은 바르다.
노아의 보존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 중 셈을 여자의 후손언약의 계승자로 선택한다(창 9:26; 11:10). 계속해서 셈의 다섯 아들 중 셋째인 아르박삿을 선택적으로 부르시고(창 10:22; 11:10), 아르박삿의 계보를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이른다(창 11:26; 12:1-3). 성경 계시사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는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에서 족보(genealogy: toletot)는 독특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족보의 구속사적 기능은 첫째, 역사의 사실성과 진정성을 보증해 준다.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확증시켜 준다. 둘째,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족보의 도입은 새로운 계시시대의 전환과 국면을 알려준다. 창세기에는 총 열개의 족보 군(群)으로 구성된 일단의 가계들(household)이 소개된다. 열은 일곱과 더불어 완성과 충만의 수를 의미한다. 이는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아브라함 언약을 중심으로 구체화되면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자손언약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되는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애굽기서는 마침내 민족과 나라로 형성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출애굽 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된다. 셋째, 언약적 구속사 진행과 성취와 관련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계시의 통로로서 방편적 역할을 수행한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총체적으로 성취된다(갈 4:4; 마 1:21). 마태복음 1:1은 예수님의 족보기술을 통해 구약언약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고후 1:20).
노아의 보존언약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인간 뿐 아니라 우주 만물 또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대상임을 무지개의 표적을 통해 확증시켜 준다(창 9:10). 로마서 기자 또한 이런 사실을 보증한다(롬 8:19-21).
6.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7:1-8) : 하나님께서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선택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불러내시고 그와 아브라함 언약을 맺어 주신다(창 12:1-3; 17:1-8). 아브라함 언약의 차별성은 종전까지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은닉적으로 진행돼 오던 언약적 구속사가 개인적이고 명시적이며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은혜언약의 전형이며 구속사 진행의 분수령이라는 데 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될 것을 시사한다. Philip E. Hughes는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브라함 언약을 “예언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술한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내용은 사중적이다. 땅과 자손과 왕,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으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란 사실에 집중된다(창 12:1-3; 17:1-8). 아브라함 언약은 이후 창세기 50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언약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을 통해 계승된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얻은 이삭은 노령(90세)의 사라 또한 처음부터 불임녀(창 11:30)란 사실을 감안하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결과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맺어 주신 은혜언약은 오직 때가 찰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취될 뿐이다.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의 성취는 창세기 15장에 소개된 소위 횃불언약식을 통해 미래지향적으로 보증된다(창 15:9-18). 횃불언약식은 번제용 짐승을 취해 둘로 쪼갠 후 이를 마주 대하여 놓은 다음, 그 사이를 계약의 당사자들이 동시에 지나가는 것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이때 계약에 대한 불이행자는 쪼개진 짐승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벌칙조항이 부과된다. 삶과 죽음의 계약인 셈이다. 본 횃불언약식에서 타는 횃불로 상징된 하나님께서 홀로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스스로를 계약에 결속시키시는 방식으로 언약의 필연적인 성취를 보장해 주신다. Palmer Robertson은 이를 가리켜 “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Wisdom 강해 주석은 횃불언약식의 본의를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삶과 죽음의 서약은 이후 역사를 통해 계속 구체화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파괴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히 9:15-22).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언약적 저주의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바침으로써 참된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것이다”라고 주해한다(히 10:20).
횃불언약식을 통해 자손언약의 구체적인 성취 과정이 소개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장차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가 4대(代)만에 큰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다. 가나안 귀환은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는 단서가 추가된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 중 땅 언약의 성취가 가나안 족속을 대변하는 아모리 족속의 관영한 죄를 심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질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여호수아서는 비록 가나안 전(全) 지경을 실제로 정복하진 못했을지라도(수 18:1-2; 8-10) 가나안 땅에 관영한 죄에 대한 심판의 방식으로 땅 언약의 성취과정을 기술한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하나님의 맹세적 보증으로 맺어 주신 횃불언약식의 내용에 근거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는 방식으로 성취된다(출 12:40-4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여호와의 군대’(출 12:41)로 묘사하고 있는 기자의 의도는 출애굽사건이 아브라함 언약 중 땅 언약의 성취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횃불언약식에서 가나안 땅은 관영한 죄에 대한 심판을 전쟁의 방식으로 정복해 차지할 것으로 이미 예언돼 있기 때문이다(출 15:16). 이런 맥락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외적으로 거대한 노예집단과 방불할지라도 향후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질상 하나님의 군대로 존재했던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노정 중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지경의 정탐을 위해 잠시 머물게 된다(민 13:1-3). 40일간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지경을 정찰하고 돌아와 보고한다. 이때 10사람은 이성적 관점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보고한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은 저들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다는 것이다(민 13:33). 전쟁에 승산이 전무하다는 비관적인 평가다. 반면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는 계시의존적인 관점 곧 언약적 관점으로 보고한다. 저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라라”(민 14:8)고 확신한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고 백성들을 안돈시킨다. 이들의 확신은 단순한 신념의 발로가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언약적 확신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사건이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을 성취시켜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역(출 2:24-25)이 확실하기에 가나안 정복 또한 땅 언약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었던 것이다. 특별히 갈렙의 언약적 확신은 그가 정탐했던 가나안 지경을 그의 후손들에게 분배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민 14:24, 수 14:6-14). 그러므로 소위 야베스의 기도에서 나오는 “...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란 대목은 야베스가 드린 단순한 기복주의적인 간구의 내용이 아니다. 과거 가데스바네아 정탐사건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조상인 갈렙에게 약속해 주셨던 헤브론 지경을 전쟁의 승리를 통해 반드시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언약적 간청인 셈이다. 바른 계시관의 정립은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척도로 기능한다.
하나님께서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이스라엘의 거족적인 불순종사건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 중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광야에서 유리하다 죽게 될 것을 경고하신다(민 14:20-24). 결국 출애굽 당시 20세 미만인 자들과 사십년 광야생활을 통해 태어난 소위 출애굽 2세대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밟게 된다(민 14:36-38). 하나님은 창세전 구속경륜을 세상역사 속에서 집행해 나가실 때 ‘선 언약 - 후 성취’하는 방식을 취하신다. 그러므로 신적 언약에 근거한 바른 신앙관 정립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믿고, 의지하며, 섬길 수 있는 첩경으로 기능한다.
아브라함 언약 중 땅 언약의 성취는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가나안 정복을 시도함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수 1:1-9). 그러나 여호수아의 생존 시 가나안 땅은 온전히 정복되지 않는다(수 13:1). 다섯 지파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지만(수 18:1-2) 나머지 7지파는 현장을 정탐한 후 도면 상으로 제비뽑아 분배 받았다(수 18:8-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기자는 후에 이런 사실과 관련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며 이스라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기록한다“(수 21:43-44). 4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결론짓는다. 저자의 이런 표현은 허구가 아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때가 찰 때에 반드시 약속하신 내용을 성취하신다는 언약의 주권성과 실현성(feasibility)의 원리에 근거한 선언이다.
아브라함 언약 중 왕 언약의 성취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필요성이 시사되고 룻기서를 통해 왕의 정체성이 암시된다. 사사기서는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신다. 사사들의 통치 시기는 이스라엘이 왕정에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의 기간이다. 왕정의 강점인 중앙집권적인 통치권의 결핍으로 인해 곳곳에서 통치권의 누수현상이 나타난다. 영적 타락과 암매 현상이 발견된다. 사사기서 기자가 여러 차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17:6; 18:1; 19:1)고 지적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먼저 미가의 개인 가정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보편화된 혼합주의적 신앙의 타락상을 고발한다(삿 17-18장). 다음으로 레위인의 축첩생활과 그녀의 죽음이 이스라엘 동족 간 내분으로 비화되는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사회 윤리적 타락상을 고발한다(삿 19-21장). 사사기 저자는 이런 내용의 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적인 통치자로서 왕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요청됨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사사시대는 향후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실현될 신정왕국으로 가는 길목의 성격을 띠면서 과도기적인 기간임을 암시한다.
룻기서는 사사기에서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왕의 정체가 누구인 지를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족보를 통해 시사해 준다. 베레스의 족보는 보아스와 이새를 거쳐 이새의 아들 다윗을 소개함으로 일단락된다. 이는 사사기에서 시사되었던 왕의 정체가 다윗임을 암묵적으로 가리킨다.
사무엘서 기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등장을 기술하기에 앞서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기사를 소개한다. 사무엘로 말미암는 공적 선지직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왕정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는 왕의 경호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함으로 왕권의 남용을 견제하며 인간적인 연약성을 도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일에 조력하기 위함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직 자체는 종교적 직분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치적 직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다. 따라서 선지자 직분은 하나님의 왕권이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신정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사실상 왕직을 능가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직분임에 틀림없었다.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을 좇아 사울을 초대 왕으로 기름 부었다(삼상 10:1).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했던 왕이었다(삼상 8:20).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아니었다(삼상 8:7-9).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를 허락하셨던 것은 인간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적극 순종케 하시기 위한 계도적인 의도에서였다(삼상 12:19).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붓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신다(삼상 16:1; 13:14; 15:28).
다윗은 통일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모두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는다(삼상 16:13; 삼하:24; 5:3). 첫 번째 기름 부음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은밀한 중에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삼상 16:10-13). 이 사건 직후 아비 이새는 다윗을 형들이 참여하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투의 현장으로 보내 안부를 살피고 올 것을 당부한다(삼상 17:18).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목동 다윗의 적대적인 만남은 이런 평범한 사건의 진행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쟁터에서 이들의 평범한 만남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의 오만방자함과 다윗의 거룩한 분노가 충돌해 급기야 양 진영을 대표하는 전투의 양상으로 비화되었다(삼상 17:46). 칼과 물맷돌이 격돌하는 전대미문의 전투가 벌어진 셈이다. 결과는 한 순간에 결판이 났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골리앗이 졸지에 죽는 바람에 전투는 다윗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삼상 17:48-51).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기사가 아니다.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증적 사건도 아니다. 은밀한 중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을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보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사건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 언약 중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 사사기에서 그 필요성이 시사되고, 룻기서에서 그 정체성이 묵계적으로 암시되었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이 이런 방식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군대가 귀환할 때 이스라엘 여인들이“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6-7)라고 창화하는 데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열왕기서 기자는 1King 4:20-25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의 모든 요소들이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됨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 목표인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명실상부하게 성취되었음을 기술한다. 특별히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25절)는 표현을 통해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25절에서 인용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표상은 미가(미 4:3-4)와 스가랴(슥 3:10) 선지자가 메시아의 도래로 성취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묘사할 때 동일한 표상을 차용해 기술함으로 이런 사실을 적극 뒷받침해 준다.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솔로몬 통치하의 통일이스라엘 왕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솔로몬 통치 말년의 각종 우상숭배의 만연과 불순종으로 인해 분열왕국에로의 불가피한 원인을 동시에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통일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짐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의 파기나 무효화가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처음부터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양면성을 함축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미래지향적인 수혜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 형성된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로 구성된 신약의 교회공동체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며 참 이스라엘이다(갈 3:7; 29).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의 정체성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 속에서 예표와 실체의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성경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중차대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7. 시내산 언약(출 19:1-6; 24:5-8) :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보로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언약이다(출 19:5-6).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24:4-8에서 ‘주권적으로 맺으신 피의 약정‘이란 형식을 통해 정식으로 비준된다. 제반 율법과 율례와 규례 등은 십계명으로 집약된다. 십계명으로 대변되는 율법수여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구원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된다(출 20:1-2).
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율법에 선행하면서 은혜에 동반된 자율적 순종이란 맥락에서 주어진 제도적 장치의 성격을 띤다. 시내산 율법이 구원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준수를 규범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준수란 법적 요구를 강제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율법은 언약에 종속되고 의존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나타나야 하는 자율적 순종의 의미를 가진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할 뿐이라‘고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심정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시해 준다(눅 17:10). 따라서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의 동인인 아브라함 언약과 연속성을 띠면서 은혜에 따른 행함이란 언약적 원리 속에서 그 본의를 해석해야 한다(약 2:22). 이런 관점에서 율법수여 사건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사실을 만천하에 공식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정체성을 띠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의 삶을 자원하는 심정으로 살아갈 것을 강력히 요구받는다(출 19:5; 20:3-7). 이렇게 될 때 율법수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넉넉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출 19:6).
8. 다윗의 왕국언약(삼하 7:11-17; 시 89:3-4) : 다윗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이 솔로몬 통치 하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을 증시해 준다. 왜냐하면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궁극적으로 시사하는 신정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통합적으로 성취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신 17:14-15; 4:20-25; 미 4:1-4; 슥 3:10). 이런 관점에서 다윗언약은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기 위해 맺어주신 왕국언약으로 해석된다.
William J. Dumbrell은 동일한 주제를 왕권언약으로 기술한다. 중요한 사실은 사사기서 저자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스스로 자평하면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고 기술한다. 이는 사사시대가 불의와 불법과 무질서와 혼란으로 만연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지파간의 결속을 다지며 공의와 공법이 일관성 있게 시행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는 왕정에 따른 왕권의 필요가 절실히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정체제와 관련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즉위한 다윗은 예루살렘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는다(삼하 5:1-5).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인 언약궤가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이송돼 안치된다(삼하 5:12-15). 이는 다윗의 즉위와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공식적인 인준의 성격을 띤다. 하나님 자신의 왕권을 다윗의 왕권과 동일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특별한 인물이다. 따라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현격하게 증시해 준다. 다윗언약은 Palmer Robertson이 바르게 해석한 대로 “그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공식적인 약정으로 기여함”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 중 왕 언약의 성취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뜻에 합한 왕의 출현은(신 17:14-15) 다윗에게 맺어 주신 왕국언약을 통해 다윗에게서 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윗언약의 핵심내용은 다윗 왕위의 영속적인 보장과 함께 다윗의 아들에 의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건축될 것과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자지간의 관계를 맺게 될 것, 그 아들이 범죄할 때 징계할 것이나 은총을 아주 빼앗지는 않을 것 등이다.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된 신정왕국의 정체성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초기 통치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왕상 4:20-25). 그러나 솔로몬 통치 말년에 다윗언약은 동시에 파기된 듯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며 동시에 파괴자로 평가된다. 다윗언약을 신약의 기독론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연관된다. 신약은 솔로몬의 실체를 그리스도로 이해한다(마 12:42). 결국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적으로 성취될 것을 전망케 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언약도 아브라함 언약에서 발견되었듯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확약해 주셨다(삼하 7:16). 이는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띤 통일이스라엘의 국권이 지속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이스라엘의 국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솔로몬 통치 초기에 절정에 이르렀던 왕국의 정체성은 통치 말년에 이르러 수많은 처첩들이 갖고 들어온 각종 우상들을 경쟁적으로 좇는 가운데 급기야 하나님을 떠나기에 이른다(왕상 11:1-10).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언약적 징계를 발하시는 가운데 통일이스라엘이 분열될 것을 경고하신다(왕상 11:11). 결국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돼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수하였던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각각 왕으로 책봉돼 본격적인 분열이스라엘 시대가 열린다.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당한다. 남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지만 70년이 찰 때에 고토로 귀환하게 된다. 이는 다윗왕권의 영원성과 연관된다.
남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다윗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신학적/언약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 집약하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신정왕국으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의해 멸망당할 수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신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둘째, 다윗의 왕권을 영원히 보증해 주신다던 다윗언약이 중도에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도 파기될 수 있는 개연성이 가능하다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상의 문제들은 본질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에 전쟁에서 패하시거나 언약의 중도 파기나 무효화는 절대 불가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시내산 언약에 불순종한 데서 비롯된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일환인 셈이다.
이상의 맥락에서 다윗언약의 일차적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통합적 성격을 띠면서 솔로몬 통치 초기 역사 속에서 분명히 성취된다(왕상 4:20-25).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는 다윗언약이 처음부터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윗언약은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 속에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양면성을 띠고 진행하게 된다. 우리는 다윗언약의 미래적인 측면을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9.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 사 53:1-9; 겔 36:24-28; 37:24-28) : 구약성경은 포로 시대까지‘새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히 예레미야가 새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렘 31:31)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앞 세워 맺은 언약의 정체성과 비교해 새롭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새 언약이란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갱신되고 개선되었다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뜻이다.
Palmer Robertson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을 가리켜 구약언약의 내용을 총괄하는 언약으로 해석해 이를‘완성의 계약’(언약)으로 부른다. 그는 계속해서‘언약의 완성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는“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언약 원칙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라고 피력한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의 궁극적 목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약언약의 총체적 완성이란 Palmer Robertson의 관점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성이란 원리 속에서 바른 통찰력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이 포로기를 전후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언약의 특징인 이중 구조성을 극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이 지향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재건 및 성전의 재건축 등의 내용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가나안에로의 포로귀환을 통해 예비적으로 성취될지라도 여전히 미래지향적인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언약적 구속사관에 입각해 포괄적으로 접근할 때 구약을 선(先) 언약의 관점으로, 신약을 후(後) 성취의 관점으로 보는 견해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신약의 기자는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해석한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예레미야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렘 31:31-34; 32:36-44) 에스겔(37:15-28: 36:22-28), 이사야 선지자(사 55:1-5; 65:17-25)를 통해 영원한 언약, 화평의 언약 등으로 묘사된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 강조되는 죄의 영원한 사면(렘 31:34)은 에스겔과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사상을 통해 고난의 종 메시아의 대속사역(사 53:5-6)과 성령의 내주하시는 사역(겔 36:26-27)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거듭나는 사건을 통해 가능함을 상호 보완적으로 기술한다. 구약의 속죄제사를 통해 예표론적으로 표현되었던 죄사함이 고난의 종의 구속 사역을 통해 영단번의 제사로 실체화됨을 함의한다. 결론적으로 새 언약의 특징은 총체적 관점에서“이스라엘의 옛 언약이 취소(nullification)됨에 따라 새 언약이 효과를 갖게 되었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에 의해 특히 강조되고 있다”는 Palmer Robertson의 지적은 옳다. 옛 언약에 대한 불순종에 근거해 이방인에게 멸망당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쫓겨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이스라엘은 새 언약에 근거해 새롭게 재계약을 맺어야 된다는 관점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핵심 사상이다(렘 31:31-33).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이는 취소될 수 없는 확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증한다. 새 언약의 영원성은 아브라함 언약(창 17:7; 시 105:10)과 시내산 언약(출 40:15; 레 16:34; 사 24:5)과 다윗언약(삼하 7:13, 16; 시 89:3-4)에 약속된 영원성과 연속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새 언약의 영원성은 종말론적인 측면까지도 포괄한다. Palmer Robertson은 그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중심 주제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첫째,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 다윗언약에 명시된 영원성에 근거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발로로 해석된다.
둘째,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회복된 삶의 보증이다. 가나안 땅은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던 약속의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언약이 총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 언약에 근거한 가나안 땅의 회복은 옛 언약에 근거한 가나안 땅과는 언약의 본질상 구별돼야 한다. 새 언약의 주체인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은 성취되고 완성되어 극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은 새 언약 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
셋째, 옛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의미이다. 시내산 언약 하에서 불순종으로 일관했던 이스라엘이 새 언약을 통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의 법을 돌비가 아닌 심비에 새겨주시는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신약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 성령의 인침과 내주의 사역을 의미한다. 곧 사랑의 법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익한 종의 심정(눅 17:10)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대변해 준다.
넷째,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내적 소생이 보증된다. 이는 성령의 인침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영혼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갈 2:20). 신약적 관점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고후 5:17).
다섯째, 죄로부터의 영원한 사면을 보증한다. 죄로부터의 용서는 예레미야 새 언약의 주된 사상이다. 죄의 사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선행되지 않는다면 다른 약속들 또한 성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옛 언약 하에서 죄의 사면은 해마다 같은 제사를 반복해 드림으로 죄가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넘어갔을 뿐(pass over)이라고 Palmer Robertson은 해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동물 희생제사에 기초한 옛 언약의 규정들은 죄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효과가 처음부터 없었다.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같은 제사를 반복해서 드려야만 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통해 죄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것을 선언함으로 옛 언약 하에서의 희생제사의 종식을 고한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새 언약에서 죄 용서의 특징은 영(永)단번(once for all)에서 찾아진다(히 10:12-14). 영원하고 영속적이다. 추가로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다. 새 언약 안에서 다시는 죄를 기억치 않으시기 때문이다(히 10:17). 이런 사실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가 불연속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연속성을 아울러 담고 있다는 반증이다. 결국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안에서 옛 언약의 요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율법을 완성(마 5:17)하는 방식으로 마침(롬 10:4)이 되었다. 이는 옛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로 하여금 사랑의 법에 포로 되게 함으로 사랑이 동기유발 된 실천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식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때의 요구는 강제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다. 무익한 종의 고백처럼 자원하는 심정의 표출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고후 5:14-15).
여섯째, 분열되었던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옛 언약 안에서 불순종에 따른 언약적 징계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이 새 언약 안에서 회복을 통해 통합된다는 원리는 필연적이다. 에스겔은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표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통합과 하나님과의 연합을 예언한다(겔 37:15-23). 이런 관점에서 새 언약에 예언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본질상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란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인 역사적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 곧 신약의 교회공동체란 사실이다(갈 3:29; 엡 2:14-22). 이들이 신약시대에 존재하는 참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이 시대의 남은 자들 곧 교회이다.
일곱째, 새 언약에 함의된 영원성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개혁한 것으로 영원한 언약의 성격을 띤다. 새 언약의 영원성은 구약의 제반 언약들이 새 언약의 완성 안에서만 성취의 보증을 받게 됨을 의미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완성을 전망케 한다.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 등이 한결 같이 영원한 언약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 언약과의 불가분의 연속성을 증거한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에스겔과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사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에스겔은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의 역사와 성령 내주의 사역을 소개한다(겔 36:26-27).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죄 사함의 역사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팽배 및 율법의 순종이란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는 지를 보충적으로 설명해 주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에스겔의 새 언약은 그 외에도 신 다윗왕조의 출현 및 성전의 건축을 통해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역설한다(겔 37:25-28). 이사야는 특별히 40-66장의 내용을 통해 그의 새 언약 사상을 집중적으로 기술한다.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의 핵심주제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귀환(사 40:1-2), 다윗왕조의 회복과 다윗의 계보로부터 참 다윗 왕의 출현(사 11:5; 9:6-7), 메시아의 이중 구조적 정체성(사 52:13-15)에 근거해 고난의 종의 대속사역을 통한 죄의 용서(사 53:5-6)와 만왕의 왕 된 메시아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사 65:17-18)에 집중된다.
이상 Palmer Robertson이 지적한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의 핵심 주제들은 에스겔과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다른 주제들과 함께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마 26:26-28; 눅 22:19-20; 고전 11:23-29; 히 10:12-18) 안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된다. 특별히 바울의 관점에서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통해 대망했던 새로운 날(렘 31:31)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교회의 출현을 통해 이미 실현되었고(갈 3:29),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최종 완성될 것이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언약의 공통분모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신적 언약의 핵심주제인“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란 언약적 선언 속에 집중된다. 본 언약의 공식 속에 담겨 있는 본의는 한 마디로 임마누엘 사상이다. 임마누엘의 목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시고 이들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일에 집중된다. 결국 언약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이 둘은 본질상 동행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원(엡 1:4-6)이 같고 종말론적 목표(계 21:1-7) 또한 동일하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마 26:26-28; 눅 22:19-20; 고전 11:23-29) :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란 주제는 Palmer Robertson의 저서 The Christ of the Covenants에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과 더불어‘완성의 언약’이란 제목으로 기술된다. 반면 William J. 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에서 A Theology of Old Testament Covenants란 부제를 달고 주로 구약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들을 중심으로 그의 언약신학을 논술한다. Clarence Stam은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Love에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을 언급하면서“주께서 죽으시기 직전, 마지막 유월절에 새 언약을 선포하시고 제정하셨다”고 피력한다. 이는 유월절을 폐하시고 성찬식을 제정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마 26:26-28; 눅 22:19-20; 고전 11:23-26). Arthur W. Pink는 그의 저서 The Divine Covenants(하나님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을‘메시아 언약’으로 기술한다. 그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최대 수혜자인 이스라엘과 유다(렘 31:31)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거듭난 교회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다양한 신약의 구절들을 근거로 강변한다. Michael Horton은 그의 저서 Introducing Covenant Theology(언약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을 성찬식 제정과 관련해“언약의 피”라고 부른 사실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상의 여러 언약신학자들의 관점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의 중심 주제는‘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속해 언약백성을 삼아 주심으로 구원의 은혜의 영광과 찬송을 세세무궁토록 받으시길 원하셨다(엡 1:4-6). 그런 의미에서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며 방편으로 사용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방편과 무대로 삼아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를 따라 섭리적으로 성취해 가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 새 언약 사상은 제반 구약언약의 총체적 성취와 실체의 의미를 띤다(고후 1:20).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선언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과 다윗언약 속의 아들의 실체가 언약의 점진성과 연속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이다. 마태는 이런 사실을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확증시켜 줌으로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아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강조한다(마 1:16, 21).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아담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킨다(눅 3:23-38). 이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시해 준다. 이런 맥락에서 박용기는 신구약 성경을 언약사적으로 통찰하면서 구약의 언약적 주제를‘하나님은 여호와로’, 신약의 언약적 주제를‘예수는 그리스도’로 요약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 메시아를 약속하시고, 때가 찰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 박용기는 그의 성경신학 개론에서 언약적 구속계시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인간 구원에 있다기보다 인간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 계시에 있음을 강조한다. 즉 계시를 위한 구속이지 구속을 위한 계시가 아니란 관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전포괄적이며 합목적적인 계시사역 속에서 구속사역은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적, 방편적 사역으로 해석하면서도 동시에 일부분에 해당한다고 구속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가 계시역사 속에서 일부분이란 박과 정의 관점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필자의 견해로는 일부분이 아니라 중심 주제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중심 주제란 표현은 목적이 아닌 방편적 기능에 해당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의 구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하는 본질적인 명분을 잃게 된다. 하나님의 구속경륜 속에서 택자에 대한 죄로부터의 구원은 전제 조건이다. 택자에 대한 구속계획이 언약의 방식으로 약정되었다.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구속언약으로 정의하는 이유가 이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구속의 은혜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기독론에 입각한 구원론의 정립과 구원론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관과 교회론 자체가 성경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에 있어서 부분이 아닌 관건(關鍵)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범죄한 인류 중 일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적으로 구원해 주시는가? 창세전에 수립된 영원한 구속의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른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찬미케 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로마서 기자는‘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려 함이라’(롬 11:32)고 타락의 본의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은혜성에 기초해 피력한다. 그러므로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 곧 하나님의 계시를 요약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계시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집중되며, 계시의 방편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사역이고, 계시의 도구인 구속을 푸는 열쇠는 언약이며, 계시의 목적은 이 모든 작정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송축하게 하기 위함이다(엡 1:6; 고전 10:31; 사 43:7, 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핵심 사상은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택자들을 저들의 죄로부터 구원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데 집중된다(엡 2:14-22). 이런 사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있다(계 14:1-3; 계 4:10-11; 5:7-14).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을 포함해 근본적으로 원복음으로 알려진 여자의 후손언약의 구체적 성취와 더불어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속언약의 성취까지를 포괄한다.
11. 재림언약(행 1:9-11; 히 9:28; 계 1:7; 마 25:31-33) : 예수님의 재림 약속은 새 언약과 불가분의 연속성을 갖는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수립된 새 언약의 주제 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만 아니라 승천과 재림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까지를 함축한다(롬 8:23; 13:11; 히 9:28; 요 14:1-3; 골 3:4; 빌 3:20-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은 '이미'(already)와‘아직’(not yet)의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띠면서 미래지향적인 면을 내포한다.“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Ⅲ. 결론
언약은 성경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며 동시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의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성경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계시서로 정의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계시서란 의미는 창세전 영원 세계에서 수립된 신적 작정으로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엡 1:4-14)이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방편삼아 상호간 약정되었다는 뜻이다.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영원한 구속언약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다. 그러므로 언약은 자체 속에 그리스도를 내포하고 그리스도는 신적 언약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계시를 푸는 최선의 열쇠다.
체계화된 언약신학의 정립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본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을 대변하는 방편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제7장 하나님의 언약, 2항에서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을 행위언약(창 2:17)으로 기술한다. 2항은 계속해서“그 행위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라고 기록한다. 3항에서는“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께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은 일반적으로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에 의하여 주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고,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라고 기술한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과 관련해 크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분류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분류는 대부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관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관점이다. 필자가 성경에 계시된 신적 언약들을 내용별로 살펴보려고 시도한 것도 이런 전통적인 기조를 전제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대부분의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최초의 언약을 선악과 금령(창 2:17)에 근거해 행위언약으로 간주하는데 큰 이견이 없다. 행위언약은 불순종에 죽음이 형벌로 주어졌기에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 논고에 따르면 이런 관점은 자기모순이며 이율배반적이다. 창세전 삼위하나님께서 협약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엡 1:4)사상은 동시에 신적 언약의 원형이며 뿌리이고 씨인 사실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사상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로 창세전 신적 작정 속에는 인간의 타락이 처음부터 고려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의미는 근접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상을 가리킨다(엡 1:7). 이는 죄로부터의 구속이란 주제를 함축하고 있기에 인간의 타락은 이미 창세전부터 고려되었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피조세계에서 본질상 신적 작정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사와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돼 있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롬 11:36; 마 10:29). 필자의 견해 또한 소수 개혁주의 언약신학자들처럼 아담의 범죄와 타락사건조차도 창세전에 수립된 하나님의 전(全)포괄적이며 합(合)목적적인 섭리경륜 속에서 당위와 필연의 사건으로 수납돼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렇게 될 때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사상과 아담의 범죄 사이에 논리적/신학적/언약적 상응성과 연속성 및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 칼빈조차도 비록 죄책의 문제를 아담에게 돌리지만 신적 작정 안에 인간의 타락이 포함되었다고 기술한다(Inst. Ⅲ. 23. 7). 칼빈은 말하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그 후손의 파멸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타락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다“(Inst. Ⅲ. 23. 7)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토마스 아퀴너스의 허용적 작정관을 논박하면서 "왜 우리는 허용을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결정 없이 단순한 허용만으로 역사하지 않는다"Inst. Ⅲ. 23. 8)라고 강변한다.
둘째로 인간의 영생은 순종을 통해 자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엡 2:8-9). 물론 성경은 율법의 행위가 영생의 생명을 보증해 준다고 일차적으로 약속한다(레 18:5; 신 4:1; 겔 20:11; 눅 10:28; 롬 7:10; 10:5; 갈 3:12).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보장받은 자는 없다(갈 3:21). 결국 율법은 처음부터 행함을 조건으로 영생을 보증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갈 2:21; 롬 3:28). 율법은 죄를 깨닫고 심판에 이르게 함으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담당한다(롬 3:19-20; 갈 3:24).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행위언약으로 규정하고 순종을 담보로 영생을 보증한다는 논리는 이성적 사색의 산물일 수는 있어도 계시적 관점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라고 여겨진다. 더구나 타락 전 아담의 영적 상태 또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부합되게 지음 받았을지라도(창 1:31) 땅에서 난 자로서 흙에 속한 자였다. 고린도서 기자는 아담의 이런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령한 몸과 대비시키는 가운데 혈과 육을 입은 자로 설명하면서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고전 15:45-50). 산 영(living being/soul)으로 지음 받은 아담은 비록 무죄자로 지음 받았지만 살려 주는 영(life-giving/quickening spirit) 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될 존재로서의 상태였다는 설명이다.
행위언약(창 2:17)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이란 관점도 일방적으로 수납하기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신적 작정에 의한 선택과 언약의 기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약정해 주신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구속언약)에 근거한다면 은혜언약의 씨와 뿌리에서 은혜언약의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맺어 주신 최초의 언약은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창 1:28)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에 선행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은혜가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지 행함이 은혜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약 2:22).
그렇다면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과 창 2:17의 행위언약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신적 언약은 그 기원이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하고 있기에 피조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언약은 본질상 은혜언약 하나일 뿐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의존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특별히 John Murray는 그의 저서 The Covenant of Grace에서 개혁신학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해온 전통을 비판하면서 성경 전체의 언약은 모두가 은혜언약이었다는 은혜언약 일원론을 강력히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은혜언약과 행위언약과의 관계는 독립된 두 개의 언약으로 보기보다‘은혜가 요구하는 행위’라는 원리 속에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은혜(창 1:28)와 행함(창 2:17)이란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아담의 불순종은 죄와 죽음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죄와 죽음은 극복된다(롬 512, 18-19).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구속언약(엡 1:4-6)에 근거해 인류를 다루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행위언약으로 일컫는 순종의 요구는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는 데 유용하게 선용된다. 그러므로 은혜가 요구하는 행함에 불순종하게 될 때, 언약적 징계가 임할망정 은혜는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고, 송축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엡 1:6). 신적 언약은 본질상 은혜언약 하나라는 John Murray의 통찰력은 바르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으셔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하셨던 구속의 경륜을 성취하시는데 결정적으로 선용하신다. 이상의 전(全) 과정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역사가 필자가 정리한‘언약적 구속사관’(Covenantal History of Redemption)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속언약은 창세전에 수립되었고(엡 1:4-14),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묵계적으로 암시되었으며(창 3:15),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명시적으로 구체화되었을 뿐 아니라(창 12:1-3),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마 26:26-28; 눅 22:19-20; 고전 11:23-26; 히 10:16-18)에서 그 실체와 전모가 드러난다. O. Palmer Robertson이 선지자들의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을 통합해 '완성의 언약'(covenant of consummation)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이스라엘의 미래지향적인 회복은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의 왕국언약이 통합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 실체는 신약의 교회공동체이다(갈 3:29; 엡 2:11-16). 이런 사실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들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제반언약의 총체적인 성취자로 증거한다(마 1:1; 눅 1:30-33; 4:16-19; 고후 1:20; 히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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