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구속사적 전통신학(Theology of Redemptive History)과 언약사적 성경신학

하나님아들 2024. 4. 2. 23:20

구속사적 전통신학(Theology of Redemptive History)과 언약사적 성경신학(Bible Theology)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 김규욱 목사

목 차

Ⅰ. 서론
1. 문제제기의 역사적 중요성
2. 새로운 대안 발견의 난점과 가능성
3. 연구 결과의 예상
Ⅱ.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변고
1. 역사적 태동
2. 역사적 변고
Ⅲ.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 그 신학적
발상의 정당성
1. 새로운 신학적 발상의 난점과 필요성
2. 성경신학적 발상의 정당한 계기들
Ⅳ.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징들
1. 성경신학의 논리
2. 성경신학의 특징들
Ⅴ. 양자의 구조적 차이점 분석
Ⅵ. 결론
Ⅳ.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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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그 시대적 소임을 잘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의 전체적 진리를 대변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성경적 신학의 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요청에 부응하여 태동된 신학의 틀을 성경신학(Bible Theology)라 이름하였다. 우리는 앞 장에서 성경신학을 기존의 전통신학이 회피해 온 정당한 신학적 문제제기들을 정면에서 대면해 왔고 그 해답을 위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음을 밝혔다. 이제 이 Ⅳ장에서는 성경신학이 주장하는 논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정당화의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성경신학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들이 도출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작업의 결론을 가지고 다음 장에서 기존의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이 얼마나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1. 성경신학의 논리
박용기목사에 의해 제창되어온 성경신학을 관통하는 논리는 다음의 세 차원으로 압축되어 진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주장으로써 성경이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는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책이라는 것이다. 둘째, 빛과 어둠, 선과 악은 이원론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일원론적 논리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셋째, 영원과 시간은 별개의 두 실체로서 설명되어서는 안되며 시간은 영원안에 함축되어 설명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전자의 두 차원만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성경신학적 논리는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글의 주제인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구조적 대비를 위해서는 앞의 두가지 문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1) 성경의 논리적 일관성: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온 건전한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막연한 수준이지만 성경은 한 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그 의미도 단일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소위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관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신학적 이상(理想)은 실제로 구체적인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서 확인되지 못한 채 문자그대로 이상(理想)으로만 존재했었다. 그 경위를 좀 설명해보기로 하자. 중세 카톨릭의 전통우위사상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신적권위와 절대성을 믿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책이므로 따라서 성경 해석의 관점과 틀이 성경밖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너무도 중요한 성경해석학적 원리를 천명했다. 이 주장은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면 너무도 건전하고 타당하다. 예컨대 높은 수준의 문학작품이 있다고 하자. 그 작품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그 작품을 만든 사람과 대등한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 만약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 해석을 시도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 낮은 수준으로 해석되고 만다. 마치 아버지의 어떤 말을 어린 아들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이 듯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럴수 밖에 없다.

이런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해석원리는 너무도 자명하게 도출된다. 성경이 절대적 수준의 권위를 가진 책이므로 그 해석의 관점과 틀이 밖으로부터 올 수 없으며(만약 그렇게 되면 성경은 낮은 수준의 관점으로 왜곡된다) 그 자체 안에 붙박혀 있을 수(built in)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성경의 내재적 해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성경밖에서 해석의 틀을 빌려오는 것을 ‘성경의 외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외재적 해석의 관점(틀)을 가지고 성경에 뛰어들면 그것은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성경에 부과해서(impose upon) 다시 끄집어내는 해석학적 오류(eisegesis: exegesis와 반대되는 해석학의 용어로써 객관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생각을 집어넣는 것을 의미함)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성경 본래의 뜻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존 생각을 정당화, 혹은 강화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외재적 성경해석 방법은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내재적 성경해석이라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원리가 종교개혁 후대에 구체적인 성경해석과정에 원칙적으로 고수 확인되지 못한채 신학논의에서 과거의 해묵은 유산정도로 취급되고만 현상에 있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대로 종교개혁이후 개혁신학의 논의는 성경의 진리중 한 요소인 이신칭의의 교리가 성경해석의 틀로서 격상되어 갔고 그리하여 인간의 구속이 성경의 중심사상인 것처럼 강조되는 구속사신학이라는 틀이 고정화되어 갔다. 이것이 구속사적 전통신학(개혁신학)의 최대 약점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신칭의이라는 구원의 교리는 중세의 잘못된 공덕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경에서 발견한 종교개혁의 빛나는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포괄적 진리중 한 요소가 될 뿐이지 결코 성경을 해석하는 틀로써 기능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성경해석의 기본 틀로써 기능하게 되면 성경에 나타난 근본사상을 배제, 무시하게 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했을때 가장 중요한 점은 성경에 나타난 지엽적 요소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붙박혀 있는(built in) 근본적인 해석학적 틀로써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그 해석학적 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안에서 확인되지 않는한 그 해석은 성경의 전모와 통일된 의미를 드러낼 수 없으며 언제나 지엽적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면,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성경의 통일성을 막연한 수준에서 믿어왔고 성경은 절대적 권위의 책이므로 외재적 해석이 허용될 수 없음을 천명해 왔다. 그러나 성경진리의 한 요소인 이신칭의라는 구원의 교리가 성경해석의 기본틀로 작용함에 따라 그 결과 성경의 의미의 통일성과 근본사상의 파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안에 붙박혀있는 해석학적 틀이 무엇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대안으로 등장한 성경신학의 해석의 틀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자유주의신학 진영에서의 성경해석의 오류를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에 매우 중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신학의 탄생은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한계에 따른 문제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경신학은 양자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자유주의신학의 태동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에서 시작되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 싹터 왔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열기가 17세기에 와서 신조의 확립과 교리의 확정작업(formulation)으로 바뀌게 되면서 진리의 체계화라는 긍정적인 모습을 띠는듯 하지만 실상은 전포괄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단편적이고 항목화된 교리의 형태로 축소, 환원(reduction)하게 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 현상은 점차 교리주의(dogmatism)라는 폐쇄적, 독단적 형태로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교리의 범주밖에서 제기되는 모든 정당한 질문을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워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포괄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리의 원천인 성경의 진리성과 권위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시기는 이미 18세기 이성의 권능을 주장하는 계몽주의가 꽃피는 시기이며 그 완성자인 칸트에 의해서 초월적 계시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만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며 신이란 단지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수행키 위해 요청되는 존재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 자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격인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전통적 교리신학자와 기독교를 도덕화시키려는 칸트주의자들을 모두 비판하면서 종교는 인간의 종교적 감정 위에 세울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에 대한 절대적 의존감정이 있으며 이것이 기독교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기독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성경은 이제 그 절대적 권위를 상실하며 인간의 주관적 종교적 체험이 우선시된다. 또한 그가 보기에 성경은 논리적 일관성과 포괄성을 띤 책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굴러다니던 문서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시대마다의 종교적 신앙적 체험이 반영된 인간의 책일 뿐이다. 철학의 강인한 논리와 보편성에 훈련된 마음으로 볼 때 전통적 교리신학자들의 단편적 교리에 관한 주장은 유아적인 발상과 산만한 논리로 밖에 보여지지 않으며 그 교리가 원천으로 하는 성경 역시 그렇게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부터 전개되어간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성경이라는 텍스트(text)보다는 그 시대의 상황(context)과 철학이 더욱 중요시되고 시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소위 ‘외재적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인 틀을 성경밖에서 가져오는 오류인 것이다. 이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불신할 때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주의신학이 태동하게 된 데에는 성경의 진리성을 성경자체의 해석적 틀과 논리에 의해 입증하지 못하고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인출된 단편적 교리를 절대화시킨 전통적 교리신학자들이 간접적인 기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는 성경에 대한 미숙한 이해로 말미암는다)

이 쯤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성경자체의 내적 해석의 틀에 의해서 확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중차대한 일임을 확인했다. 전통적 개혁신학의 교리적 폐쇄화 현상이나 자유주의신학의 철학화 모두 성경의 내적 논리를 발견치 못한 결과이다. 우리가 이글에서 확인하려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이란 이상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의 틀을 구속사신학과는 달리 약속과 성취라는 언약사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약속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그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이란 하나님 당신이 자기 계시를 위해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한 요소일 뿐이다. 즉 인간의 구속이란 성경해석의 기본틀이 될수 없으며 약속과 성취라는 언약사적인 기본틀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반 이후에 등장한 하나님 나라라는 해석학적 관점도 성경신학에서는 그것이 성경의 기본틀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언약사적인 틀속에서 함축되어 설명된다.

이제 여기서 언약사적 해석의 틀이 왜 성경의 기본 골격이 되는지를 성경 내용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겠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최초 형태는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위의 이 본문은 오늘날 신학계에서 해석상 가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구절이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내에서 말하라면 이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문헌을 통해서 추적해 보았으나 그것을 명시적으로 논의하는 곳이 없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막연히 그렇다고 전제하며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구절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령 앞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최초로 주신 복(히브리어로 베라카;?

 

 

이처럼 온통 상대주의적인 시대정신 속에서의 신학의 자리매김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전통신학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막연한 수준에서나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에 거기에 의존하는 신학은 절대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절대성의 실상은 매우 빈곤함을 나타낸다. 즉 성경의 부분적 해석의 결과인 인간 구원의 교리에 한정됨으로써 포괄적인 절대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린 자녀는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절대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그 자녀가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과 사랑의 내용은 매우 유치하다. 아버지의 깊고 넓은 생각과 사랑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절대성에도 그 수준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것이 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아적인 수준의 절대성은 우리에게 확고 부동한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조그만한 어려움이나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사실상 전통신학은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적 철학과 첨단 과학의 시대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정직한 전통신학자들은 이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내심은 현란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현대의 과학적, 철학적 세계관의 논리 앞에 자신이 주장하는 절대성의 내용이 얼마나 초라함을 절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이 절대적 진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절된 명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포괄적인 세계관을 함축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단순 명제들은 그것들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분리된 진리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성령이 오순절에 오셨다라는 등등의 성경에 나타나는 명제들은 사실상 각각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들 모든 명제들은 하나의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 의해 자리매김되고 전체의 의미에 비추어 진리성을 가진다. 이 점이 성경 진리의 절대성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이는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스광스러운 수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좀더 설명하기로 하겠다.
왜 각 교파마다 자기의 교리를 절대시하는가? 필자가 볼 때는 이들 모두는 그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엽적으로 그리고 단순 명제적으로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 모두는 각자의 수준에서 파악한 성경내의 단순 명제들을 성경 전체의 진리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안한 종교 심리까지 가세되어 그 미숙한 진리 이해 수준을 더욱 고착시켜 버린다. 즉 불확실한 세상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믿어버리고(이때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는 성경적 믿음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 욕망에 기초한 신념적 성격이다) 싶은 조급한 마음에서 성경의 단순 명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더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는 더 깊은 진리의 깨달음이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연유에 의하여 각 교파는 자기들이 성경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성의 포괄성과 깊이는 동일한 것이 아닌 것이다. 전통신학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의 틀인 구속사적 논리의 지엽성 때문에 성경의 단순 명제들에 대한 부분적인 진리성은 파악했지만 포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구성에는 너무도 미흡하다. 따라서 이런 수준의 절대성의 진리 주장을 가지고서는 오늘날 포괄적인 철학적 세계관의 도전을 방어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의 상황에 놓여 있다.

전통신학이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의 수준과 내용이 너무도 미숙한 것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자유주의신학은 아예 노골적으로 신학의 절대성을 공공연하게 부정해 버린다. 자유주의신학은 그 태동이 성경의 신적 기원과 절대권위를 부정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학의 절대성 논의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적 계시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적 정황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 삶의 정황으로부터 신학적 사유(사실상 이는 엄격하게 말하여 신학적 사유가 아니다)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신학은 역사성과 상대성을 띨 수 밖에 없다. 이는 위의 신학의 독자성 논의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자유주의신학은 시대별로 바뀌어온 철학의 변천을 따라 그 주장의 내용이 바뀌어 왔다.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 격인 슐라이에르마허 뒤에는 칸트와 낭만주의 철학이 있으며 예수전으로 유명한 슈트라우스 뒤에는 헤겔이 있고,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리츌 뒤에는 칸트가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한다고 등장한 칼 바르트 뒤에는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눈을 부릅뜨고 서있다. 그러니까 바르트는 성경의 진리로써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존철학으로써 19세기 자유주의신학 뒤에 서 있는 칸트와 헤겔을 비판한 것이다. 비신화화 신학의 기수인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고, 불트만을 비판하고 나선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는 맑스주의자이며 희망의 철학자인 블로흐가 조종하고 있다. 과정 신학자의 논리적 체계는 과정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제공하고 있으며, 해방신학자들과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미 한물간 칼 맑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을 쫓아 포스트모던 신학이 생겨난다. 좀 희화적인 이야기이지만 필자의 짐작으로는 이제 동양사상의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시대적 조류로 보아서 앞으로는 공자 신학이나 노자의 道의 신학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無와 空의 신학도 나올 조짐이 보인다. 이는 단순히 짐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논의를 들여다 보면 충분히 현실화가 가능한 추측이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지적하고 지나가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이토록 자유주의신학은 시대의 조류를 따라 변천하는 상대성을 띠고 있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당대에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이다. 도대체 그 설득력의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목하 우리가 논의하는 신학의 절대성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진리가 절대적으로 옳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의 추종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는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며 진리의 절대성은 진리 자체의 진리스러움에서 그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지 그것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효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드러나는 효과로 말하자면 언제나 거짓이 대세를 이루는 것이 이 어두운 세상의 법칙인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효과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도둑놈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많은 물건을 훔치는 방법이며 병든 사회에 효율적으로 잘 적응하는 자는 병든 인간인 것이다.

자유주의신학은 당대 철학의 영향아래 이루어지며 그 철학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 즉 어떻게 해야 이땅에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수 있겠느냐 하는 인간적 욕망의 문제를 당대의 정황과 관련하여 건드린다. 그래서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추종하는 것이 진리스럽다는 통속적 진리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신학의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그 당대에는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자연스럽게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주의신학의 보편적 설득력은 그 주장의 진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의 욕망의 내용과 일치하며 그것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상황이 바뀌면 슬그머니 새로운 시대의 문제로 관심을 바꾸면서 새로운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자기 변신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신학이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에는 진리의 불변성과 절대성을 결여하고 상대적으로 변천하는 오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당대에는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설득력의 요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마7:13)과 관련하여 진리의 절대성과 그것의 검증 방법에 대한 보다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진리성의 검증은 결코 많은 사람의 동의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일시에 어떤 주장에 대해 열광할 때는 참된 진리의 감각을 가진 지혜로운 자는 그 주장의 진리성에 대해 의심해 볼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 당대에 모든 사람이 교황의 거짓 가르침을 추종하고 있을 때 그는 그 가르침을 의심했다. 그리고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외로웠지만 거짓을 향한 용맹스럽고도 위대한 거부를 감행했다. 모든 사람이 인정치 않아도 성경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것이 외로운 개혁자 루터의 확신이었고 성경신학을 주장하는 우리의 입장이다. 깊은 진리일수록 그것은 많은 사람이 단기간에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깊은 진리를 전파하는 데는 오히려 미숙한 진리 이해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수준으로는 당장 이해가 되지 않기에 오해를 받기가 쉬우며 바울이 말한 대로 해산의 수고가 따를 수밖에 없다(갈4:19). 그러나 그 수고는 결코 고통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수고가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기 때문에 찬란한 기쁨으로 뒤덮인 고통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이 성도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면서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골1:24)

우리는 지금까지 신학의 절대성과 관련해서 전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의 입장을 검토했다. 전통신학은 절대성의 주장은 있지만 그 절대성의 내용이 구속사적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너무도 미숙하며 빈곤하여 포괄적인 세계관을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으며, 반면 자유주의신학은 절대성의 주장은 포기하지만 당대의 보편적 설득력은 철학적 세계관에서 확보하여 거짓된 영향력을 행사함을 확인했다. 이 양자와는 달리 성경신학은 신학의 절대성의 주장을 포괄적인 세계관의 정립 수준에서 언급한다. 성경신학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성경의 많은 단순 명제들을 분리 나열함으로 그 진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신학은 성경이 많은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통일된 의미, 즉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하여 완벽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포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명제들은 언약과 성취라는 구조에 의하여 정리 포섭되며 이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이고 따라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논리로 파악한다. 이 언약사적 논리는 성경을 관통하는 절대적 골격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박용기 목사가 최근에 저술한 성경개론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다.

성경신학은 언약사적 논리의 절대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리에 의해 정립되는 성경적 신관은 올바른 인간관과 역사관 그리고 우주관을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전 포괄적인 기독교의 절대적 세계관이다. 성경신학은 세계의 가치와 목적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세계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사단의 존재나 인간의 범죄까지도 당연히 포함된다. 여기서 선과 악을 주관하시는 기독교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 목적을 철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이 세상안의 피조물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 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확신했다. 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육신적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신학은 성경의 절대적 진리성을 확신했고, 그 구체적인 언약사적 논리를 발견함으로써 그 진리성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세계를 전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세계관적 논리를 확립시켰다.

Ⅴ. 양자의 구조적 차이점 분석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이글이 최종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구조적 차이점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가 ‘부분적’ 차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구조적’ 차이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이글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긴요하다. 부분적 차이라는 것은 논의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방향은 일치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요소가 더 추가되거나 생략되어지는 차이점을 일컫는다. 그러나 구조적 차이라는 것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논의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의 차이가 아니라 논의의 목적과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즉 전체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이점을 가능한한 부각시켜 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하여 이글에서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양자의 구조적 차이를 대비시키고 성경신학적 입장이 얼마나 성경적인가를 정당화하겠다.

첫째, 성경 해석의 목적에 관한 차이점이며 이는 신관의 차이로 귀결된다. 구속사적 전통신학에 의하면(이하에서는 전통신학으로 칭함) 성경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의심없는 전제로 받아들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런 관점에 의하여 성경을 바라보았으며 그 결과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성경 해석의 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인간 본위적인 접근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통과 문제 상황속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해야 구원시킬 수 있는가 노력하는 이방 종교의 성격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과연 기독교의 성경 진리가 이방 종교의 인간 구원의 논리와 같은 차원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논리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속사적 해석의 틀에 의하여 성경이 해석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왜냐하면 신학의 체계가 인간의 구원, 즉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철학의 체계와 동일한 차원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지적해 온 대로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명제에 의해서 포섭되거나 망라되지 아니하는 훨씬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이하에서는 성경신학으로 칭함)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의 계시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인간의 구원이란 그 영광의 계시를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인간 구원의 논리적 전제인 인간의 타락까지도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 계시의 방편으로 간주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타락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허용한 케이스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확고한 깊은 뜻 가운데서 타락을 섭리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능력을 드러내기(계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로마서가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에서는 성경 해석의 목적을 전통신학에서처럼 인간 구원의 도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드러나신 하나님의 영광 계시이며 이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둔다. 이 말은 성경에 인간 구원의 도리가 없다거나 그것이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위한 여러 가지 방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구속사신학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적 사고는 매우 건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의 성경관이나 신학관은 그 당시의 구교의 것과 비교해 본다면 너무도 혁명적이며 성경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은 루터의 이신칭의에 집중되는 구속사적 입장을 넘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을 정립해 가려는 태도를 지녔음을 그의 주저 기독교강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건전한 신학적 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신학작업은 사도신경적(사도 신경은 전형적인 구속사 논리를 대변한다. 신앙고백이 구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리를 좇아가게 되었고 그 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점차 구속사적 논리의 극복을 염원했던 칼빈의 의도는 점차 퇴색되고 오늘날의 구속사적 교의신학으로 고정화되어 갔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전통신학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성경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 계시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수단-목적이 뒤바뀌어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성경 해석의 틀과 목적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게 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신관의 차이로 귀결된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인본주의적인 논리와 신관을 갖게 되고, 후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신본주의적 논리와 신관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계시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보다 더 궁극적 혹은 상위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보다 더 상위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을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인본주의라고 부른다.

둘째, 성경의 논리적 틀에 대한 차이점이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성경에 나타난 논리적 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틀로 파악된다. 이는 위에서 본대로 성경 해석의 목적을 인간의 구원으로 전제할 때 생겨나는 틀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셨으나 인간이 잘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고 인간 스스로도 타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시킬 방도로서 그리스도 사건을 예비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 사건은 인간의 구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훼손당한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움직일 수 없는 교리적 틀로서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어 내려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틀 안에서 논의되어 왔던 전통적 언약 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언약 사상은 우리가 이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틀 안에서 논의되어온 언약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다.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선악과 금령으로 대표된다. 이는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복과 저주가 주어지게 된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이 행위언약을 범함으로써 타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혜로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언약을 체결하게 된다. 전통신학에서는 최초의 구원을 위한 약속 즉 원시복음을 창세기 3:15절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아브라함 당시의 이삭의 제사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제도로 계승되어 왔다고 본다. 이것이 마침내 그리스도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구속사적 틀 안에서의 언약사상은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사후 조치’로서의 은혜언약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 섭리 경륜을 주장하는 전통개혁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저질러 놓은 문제를 사후 처리하시는 분으로 밖에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신학의 논리적 문제점을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모를 리 없다.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눈치채고 있었던 신학자는 다름 아닌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간의 타락 사건에 대한 추후적인 하나님의 반응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육신은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한 경륜속에 든 사건인데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실수에 대한 응급조치적인 반작용일 수 있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라는 것이다(여기까지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전통적 구속사신학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그 해결을 성경에서 찾지 못하고 헤겔식의 神人合一이라는 그릇된 주장에서 찾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에서의 구속보다 더 큰 것을 목표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세계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이 필요하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바르트의 주장의 전제와 배경이 되는 바르트의 언약신학의 골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리 짚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전통신학과 바르트신학에서 언약의 개념이 공히 취급되지만 이글이 주장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개념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개념은 그것이 위치하는 맥락, 혹은 구조에 의하여 의미가 부여된다. 언약이라는 용어는 전통신학에서나 바르트에게서 사용되지만 이글의 입장인 성경신학과는 구조가 다르므로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통신학의 논리적 궁색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인간의 타락 이후 응급조치적인 은혜언약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 (은혜)언약을 언급한다(이점은 바르트가 전통신학 보다도 훨씬 나은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이후의 논리는 완전히 인본주의적으로 치닫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 보다도 언약의 관념에서 신학의 출발점을 찾는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창조를 시작하셨다. 창조는 독립적이며 실재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다. 창조는 언약의 행위들이 전개되어지는 하나의 무대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라고 했고 ‘언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전통신학의 구조가 창조-언약-타락으로 부터 언약-창조-타락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르트가 이렇게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셨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구속사적 전통신학보다는 논리적으로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논의의 목적은 우리가 이 글에서 주장한 성경신학과는 정반대의 귀결을 갖는다. 즉 바르트의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통한 신인합일적인 인본주의적 동기가 깔려있으며 또한 그 언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계시의 방편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이다. 더욱이 바르트 체계에서는 하나님의 성취의 내용이 없다. 그 자리에 인간의 주체적 결단이 개재된다. 이로부터 바르트신학은 완전히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식의 인본적 체계로 뒤틀린다. 더구나 바르트의 이런 언약적 선택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를 인정치 않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사랑의 개념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이것은 결국 만인구원론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언약신학의 성격때문에 이 논리적 틀 안에서는 죄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지 않으며 단지 죄는 언약 관계때문에 신인연합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일 따름이다. 이와는 달리 전통신학에서는 죄는 심각하게 거론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곤혹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처럼 간주한다(전능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죄가 존재하느냐에 대해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이 신을 변호해 준답시고 변신론(辯神論; theodicy)이라는 궁색하고 너절한 주장을 해왔다. 이런 변신론이 전통신학의 논의속에도 들어 있다). 요컨대 전통신학이나 바르트신학에 있어서 죄 문제의 해명은 정당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며 언약은 그것이 타락 이후냐 아니면 타락 이전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그러나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이들과는 다르다.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 삼는 것이 아니다.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방편이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언약사의 논리적 틀은 다음과 같다. 먼저 창세전 영원한 예정이 계시세계에서의 언약의 기초가 된다. 이 예정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근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으며, 이렇게 택하고 버리는 양자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의 계시가 근본 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예정의 목적이 아니라 예정의 한 결과이다(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원한 예정을 기초로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되는데 그것이 창세기 1:28절이다. 그런 다음 그 언약을 그대로 이루어 버리면 인간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의 결과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고 그것을 범하도록 섭리하셨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게 섭리하신 뒤 언약의 자손이신 둘째 아담 예수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게 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의 논리적 골격은 전통신학에서처럼 인간의 타락과 구속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예정에 기초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가 기본 골격으로 우뚝선다. 그리고 그 언약과 성취의 골격 안에 인간의 타락이 섭리되고 언약 성취의 결과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창조 역시 언약과 동일 반열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시킬 무대로서 준비된다. 이를 전체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영원한 예정-창조-(은혜)언약(창1:28)-선악과 금령(행위언약)-타락-성취-구속이다. 이 순서에서 언약과 성취가 근본 골격으로서 다른 항목과는 구분되게 중심을 이루며 나머지는 언약 성취사에 있어서 종속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볼때 성경신학은 인간의 타락과 구속을 논리적 골격으로 이해하고 언약을 구속의 방편으로 이해하는 전통신학과는 완전히 주종이 바뀌어진다. 뿐만 아니라 언약을 창조와 타락 이전으로 보았으나 언약을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방편으로 간주하고 성취가 인간의 결단에 달린 것으로 보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논리를 가진 바르트와도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심으로 당신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신앙의 발생 근거와 형성 과정의 차이점이다. 위에서 대비되는 성경 해석의 목적과 성경의 논리적 틀의 차이는 결국 성도가 갖게 되는 신앙의 성격 차이로 귀결된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구약의 약속대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므로 확고부동하며 성도는 이를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주장은 개신교에서 너무도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것일 뿐 아니라 얼핏보아 성경의 부분적 내용과 합치하기 때문에 그것의 문제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장의 내용을 좀더 들여다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해온 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목하 취급하려는 신앙의 성격 문제이다. 첫째 문제는 위에서 다루어 졌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둘째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성도는 이를 의심치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천년전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오셨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성도가 믿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믿음에 인간의 의지적 요소가 들어가는 것으로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전적인 선물이라고 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전통신학은 무조건 성경에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가르침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묻지 말고 믿어야 된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때의 믿음은 지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 무조건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문제점을 검토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첫째 문제로 거슬러 가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주장의 역사적 족보는 멀리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과 어거스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불합리함으로 믿는다” 라고 함으로써 기독교 진리는 논리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어야 함을 강조했고 이 견해가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게로 전승된다. 어거스틴 역시 “알기 위하여 믿어라” 라는, 믿음이 인식보다 우선이라는 명제를 말한 이후 이것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아버지 격인 안셈(Anselm, 1033∼1109)에게로 계승되고 이것이 중세 신학의 신앙의 성격을 대변하는 맹목적 혹은 암묵적 믿음(implicit faith: 이는 명시적으로 논리적으로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의해 주입되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신학은 이를 정당한 기독교 신앙으로 승인하였다)으로 정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의 우선적 권한 혹은 통로가 믿음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믿고 나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기에 철저히 반 성경적인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강조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 보면 그것의 오류가 드러난다.
전통신학에서는 믿음을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통로 혹은 도구로 간주하지만 그것의 성경적 지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 주장이 오류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제시된다. 도대체 성경 계시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그것 이전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도 믿음이 성립된다는 결과가 된다. 성경은 결코 믿음을 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믿음을 인식의 선행 조건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의 성격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실제 전통적 교의신학에서 믿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의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만약 그때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지식 이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단지 진리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성경은 어디에도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다시 말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성경은 믿음을 진리 인식의 선행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성경적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도무지 성경은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순수 형식적 믿음을 말하는 곳이 없다.
이런 그릇된 신앙의 성격은 16세기 개혁신학자에 있어서도 엄격하고 근원적으로 비판 검토되지 아니한 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역시 칼빈은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기는 했었다. 즉 칼빈은 중세의 맹목적 신앙의 문제점을 의식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성경적 신앙의 성격을 언약과 성취라는 구조적 논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실제 칼빈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좇아 그 암흑기에 카톨릭과 대비해서 대단한 진리를 캐낸 것으로 평가해야 할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기독교적 믿음이란 인식에 근거한 것이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그 신앙이 성령의 인침으로 된 것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단지 성령의 인침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앞의 주장 바로 다음에 우리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굳게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개념에 인간의 의지적 요소를 다소 인정했다. 따라서 이러한 칼빈의 신앙의 개념은 카톨릭의 그릇된 신앙의 성격보다는 훨씬 진일보된 설명이지만 온전한 설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믿음 안에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선물로서의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신앙 혹은 믿음에 대한 전통적 설명 방식은 결국 신앙과 이성은 상호 모순되고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후대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두고 두고 기독교의 맹목성과 유아성에 대한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다. 즉 기독교란 진리의 일관된 객관적인 체계에 기초를 두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을 희생시키며(the sacrifice of intellect) 단지 이 세상에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믿음에 기초를 두는 저급한 종교로 인식되고 비판되어 왔다. 특히 자유주의신학의 태동은 전통신학의 맹목적 믿음을 비판하면서 체계를 중시하는 이성을 인식의 원리로 삼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 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전통신학의 모순과 문제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실존 신학인 20세기 불트만 신학의 뿌리는 근원적으로는 하이데거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에 있지만 지엽적으로는 위에서 논의한 종교개혁 전통의 그릇된 믿음의 이해에 근거한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한 끝에 역사성은 확증될 수 없으며 그것을 당대의 신화적 사유의 반영으로 간주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신화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신앙적 의미는 확보할 수 있다는 실존철학적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의 신앙이란 역사적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절벽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결단을 의미한다고 했다(이는 바르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런 의미의 신앙의 개념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계승되고 있다고 불트만은 간주하는 것이다. 즉 불트만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이 종교개혁의 전통속에 있다고 하는 묘한 논리를 개진한 것이다. 전통신학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불트만은 전통신학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확증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고 몰아 부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신학이 갖고 있는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을 확대 수용하면서 자기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신출귀몰한 불트만의 논리 앞에 전통신학은 지금까지 성경적 논리에 의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뚜렷한 성경적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반복하기만 했으며 불트만의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박의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암묵적으로 긍정적 지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의해 구라파와 미국의 신학계에서는 전통신학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오히려 철학에 기초하는 현대신학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격은 어떠한가? 신앙의 발생 근거와 형성 과정은 어떠한가?
성경신학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나님을 인식하는 선행 조건이 아니다.오히려 신앙은 진리 인식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면 진리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경신학에 의하면 진리 인식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전통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성을 중생시킴으로 성령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성경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참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진리를 들음(깨달음)에서 생겨나는 선물이지(롬10:17) 그것은 결코 진리를 듣기 이전에 인간에게 장치되어 있는 인식의 틀이거나 혹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의 형식이 아니다.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서 성경의 어떤 논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확인 작업이 없이는 우리의 주장, 즉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 신비주의적인 주장으로 오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과거 교회사에서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예는 얼마든지 확인된다. 즉 객관적인 성경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성령께서 주신 신앙이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성령을 빙자하여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강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누가 성령을 받았는지 외관상으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외관상으로 판단하고자 할 때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때문에(고후 11:14) 오히려 더욱 기만당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누구의 주장이라도 그것이 성경의 내용과 합치하는 지를 검증해 보아야 한다.
성경신학이 말하는 믿음이 발생하는 성경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의 논리이다. 여기서 언약과 성취의 논리가 지니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통신학에서도 성경은 언약의 말씀임을 언급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의 성취를 언급하기도 한다. 심지어 언약과 성취는 자유주의신학자의 주장속에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필자가 볼때 그 말을 사용하는 의미와 의도는 모두 다르다. 성경신학에서는 전통신학에서처럼 언약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인간의 구속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즉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를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언약한 것을 그리스도 사건의 그림자적 예표인 다윗을 왕으로 하는 유다 나라를 통해 이루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아담과 맺은 언약을 실체적으로 이루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증했다. 이처럼 성경은 언약의 성취 사건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내용과 성도가 가지는 신앙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신학도 인간의 구속을 말하기는 하지만 언약과 그것의 성취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고 의도하는 목적은 전혀 다르다. 전통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구약에서 약속하신대로 예수를 보내주었으므로 그것을 성도가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낼 것을 약속하시고 신실되게 이루심은 하나님의 하실 일이지만 그것을 믿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구속사적 논리를 따르는 전통 교회의 설교의 대종을 이루는 것이 예수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는 협박조의 내용도 섞어가면서 이루어진다.(사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때의 믿음이라는 것은 진리의 확인에서 오는 참된 믿음이라기 보다는 협박에 강요된 억지 신념에 가깝다. 이런 공갈식의 설교도 의식수준이 높아진 현대인에게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식상해하고 진저리를 내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논리는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전통신학과는 언약과 성취의 목적이 다르다. 그것은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온 대로 인간의 구속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에 따른 결과로 이루어진다. 둘째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증명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성취한 다음 그것을 성도 자신의 의지적 결단을 통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는 다시 승천 직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언약하신다(행1장). 그때의 성령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대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요16:13)이셔서 그가 하시는 일은 다름아닌 당신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약속대로 역사상 그리스도가 오셨고 또한 예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 지금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고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의 결과이며 진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신지식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된 선물이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다. 남편의 신실한 행동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믿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성취가 성도로 하여금 믿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성경신학의 논리를 따르면 설교가 전통신학에서 처럼 믿으라고 촉구하고 강요하는 성격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되게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신ㆍ구약 성경을 통해 구조적으로 확증해 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가 그러하다. 언약대로 신실되게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확인이 되면 믿음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설교의 본령인 것이다. “믿어 주세요”라고 노태우씨가 강조했지만 약속을 파기한 그의 신실되지 않은 행동은 우리에게 결코 믿음을 줄 수 없다. 믿으라고 백번 강조하는 것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성경을 통해 한번 증거하는 것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한다. 도무지 성경이 말하는 선물로서의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으로 부터 오는 것이지 믿는 자 편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선물이 받는 자 쪽에서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 선물이란 주는 편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밝혀온 것은 알고 보면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인간 편에서의 주체적 결단으로 이해하는 모든 신학의 가르침(여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통신학, 바르트, 불트만이 모두 포함된다)은 잘못된 반성경적 가르침이다.

넷째, 세계관의 차이이다. 이는 지금까지 밝혀온 양자의 차이점에 대한 논의의 귀결로써 생겨난다. 모든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신관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의 논의 방식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총체로서의 세계에는 사단의 존재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의 논의에서는 영적 존재로서의 사단의 존재는 거론되지 않는다. 이런 총체적 의미를 가진 세계관 논의는 결국 세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냐라는 논의로 귀결된다. 이렇게 볼때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의 차이는 세계관 논의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전통신학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이원론적 세계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때의 이원론이란 하나님과 사단이 이원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양상을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 대해서 실제 어떤 전통신학자들도 표면적으로는 극구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이글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표면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전통신학의 실제적 논의 내용이 그러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전통신학자가 자신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세계 그리고 사단까지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일원론적 사고를 갖고 있다면, 이 글이 앞으로 지적하는 전통신학의 이원론적 특징에 대해 진지하게 해명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은 명분상 일원론을 내세울 뿐 실상은 이원론자임을 자인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신학자들의 신학하는 태도의 문제점은 교리주의(dogmatism)에 의한 사고의 폐쇄성이다. 교리란 당대의 이단의 도전으로 부터의 방파제였지만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깊이있는 성경의 해석이 이루어짐으로 발전적 변모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리에 의해 해답되기 어려운 질문이 생겨날때 그 질문은 기존 교리의 헛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 계기는 교리를 더욱 발전시킬 절호의 찬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전통신학자들은 오히려 질문자를 위험시하고 억압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교육적 계기를 활용하지 못한채 기존의 교리 안에 안주하고 말았다. 최고 최상의 권위있는 교리란 성경자체의 논리와 증거를 통한 진리 체계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리는 성경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부단히 검증받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때 목하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이원론의 문제는 아마도 전통신학에서 새롭게 검증받아야 하는 최대의 문제 거리가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신학자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에 의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표방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통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인간의 타락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타락한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속사적 주장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해 보면 전통신학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원론적 경향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선한 창조를 해놓으셨는데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타락이 죄를 세상에 도입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신학자들의 글을 보면 사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이 낭패케 되었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이는 다름아닌 이원론적 사고의 뚜렷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사단에 의해 자신의 의도가 좌절되고 그래서 그 극복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파괴된 세상을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께 골치거리인 존재로 부각된다. 이것이 전통적 구속사(회복)신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그 활동을 하나님이 막지 못하시느냐는 질문은 자연히 생겨난다. 지금까지 전통신학은 사단이 천사가 타락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예외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허용이라고 한다. 도망칠 구멍을 만드는 기회주의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천사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사단을 제거시킬 수 없어서 허용하시느냐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느냐는 질문이 생겨난다. 질문이 이쯤 이르면 전통신학자들은 꼬리를 슬슬 감추기 시작하며 언제나 그러하듯이 해답이 궁할때 애용하는 신비라는 보호막을 친다(어떤 신학자는 아예 신명기 성경구절: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인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한다). 신비! 그것이 전통신학자들의 마지막 하는 말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모호한 말뒤에는 교권적 칼을 숨기고 있다. 즉 기존 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에게 내려칠 이단 정죄의 단두대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변호하고 감추려는 신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 모르겠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용기있게 말하는 것이 진리 탐구의 제일 조건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질문하는 사람을 위험시하는 옹졸함을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권장해 주며 함께 탐구하는 것이 진리를 탐구하는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건대 모든 질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의 체계가 아닌가?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설명이 없이 어떻게 죄에서의 구속이라는 명제가 확실해 지겠는가?
전통신학은 죄의 근본 기원문제에 대해서는 신비로 치부하고 현상적 설명으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의한 타락으로 돌림으로써 사실상 이원론을 자인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죄 문제 만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원론적 구속사신학에 의한 세계관은 자연히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교회라는 기관으로 한정시킬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진 타락된 장소며 교회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기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적 기초로 전개되는 설교와 교육을 받는 성도는 언제나 교회와 세상이 이원적으로 대립 분열되어 있어서 양자 어디에 있든지 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교회 생활에 열심내면 세상을 등져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자면 교회 혹은 신앙 생활을 소홀히하게 되는 죄의식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갈등의 해소 방법은 두가지 부류로 나타난다. 첫째는 타락한 세상을 멀리하면서 교회로 도피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세상 직업이나 일들을 죄악시하고 교회의 일만이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며 세상에서 기독교인들만의 공동체를 꿈꾸며 그 안으로 도피코자 하는 심리를 갖는다. 둘째는 명목상의 크리스찬이다. 교회 일에 깊이 개입될수록 세상으로부터 소외될 위험을 느끼고 교회 생활은 형식적으로 영위하며 세상에서 비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타협하며 살아간다.
최근에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의식하고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유행처럼 일고 있다. 이들은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일원론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를 들여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일원론이란 세상에서의 문화적 차원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적으로 영위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논의일 뿐 신학적으로는 여전히 이원론적 구속사적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즉 그들의 신학적 전제는 여전히 앞에서 언급한대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창세기 1:28을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간주하고 그 명령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 가야된다고 하는 입장이다(우리는 앞에서 이 해석의 오류를 밝혔다). 이 논의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건전성 즉 이원론적 신앙생활을 극복하자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극복의 신학적 전제를 여전히 구속사적 틀안에서 찾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인본주의적 귀결에 이르고 만다. 즉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선한 세상은 사단에 의해 훼손되고 그 지배권 안에 들어갔으므로 구속받은 성도는 자기영역에서 기독교적 문화건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탈환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결국 사단에 의해 점령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인간의 문화적 노력에 의해 회복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을 한 걸을 더 나아가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문화적 노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신학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자유주의신학의 理想과 만나게 되는 엄청난 오류에 직면한다.
성경신학은 전통신학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아래 사단이 놓여져 있으며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단은 전능자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부리시는 도구일 뿐이다(욥기 1장, 출애굽기 등등). 인간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지 하나님이 예측하지 못했거나 막을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 사건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가 되실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질문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로마서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택한 백성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 은혜의 영광을 계시 세계에서 깨달아 찬미하게 하려고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해 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는 인간의 구속 자체가 아니라 타락과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여호와)을 위하여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게도 하시고 또한 의의 길로도 인도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전통신학과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신학에서는 ‘사단의 장난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시킨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인 반면 성경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사용하여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셨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바로를 강퍅하게 하셨다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한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도 하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기도 하시는 것이다(롬9장). 누가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막을 자가 있는가? 이것이 성경신학이 주장하는 일원론적 하나님의 섭리이다. 흑암과 빛이 하나님께는 일반이며(시139:12) 천사와 사단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계시하기 위해 부리시는 도구인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
이런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질 때 성도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아가지 아니한다. 양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위한 도구이다. 교회가 특별은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구분되지만 세상의 어느 영역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는 성도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로 도피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영합하여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가치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신학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이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이며 예배의 공간인 셈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죄된 세상에서는 실제적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몸으로 확증해간다. 그래서 거룩과 속됨이 외형적 공간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내면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산에서도 말며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참으로 신령과 진정(진리)이 있는 곳이 참된 예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도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을 배우며 경외하는 예배인 것이다.
이런 세계관의 정립에서라야 성도는 이 죄악 세상에서 죄악을 통해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배우는 절묘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 대적들을 포진시켜 놓으시고 하나님만을 의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일원론적 세계관를 주장하는 자들이 표방하는 기독교적 학문 공동체의 형성을 통한 기독교 문화 창달이라는 것은 이념상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도피적 행태일 뿐이다. 성경신학은 기독교적 문화의 성경적 기초와 개념을 그들과는 달리 설정한다. 창세기 1:28절을 문화명령으로 보는 것은 결정적인 해석의 오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여호와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인간이 이룰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루실 내용이다. 기독교 문화의 개념은 성경의 몇 구절에서 임의적으로 그리고 탈맥락적으로 인출될 성격이 아니다. 성경 전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하나의 명제로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라는 개념은 성경의 원리에서 연역적으로 그리고 그 의미상 종속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기독교 문화의 목적이 성경의 목적과 독립적으로 설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성경신학적 기독교 문화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인간의 능력의 계발을 목적삼는 철학적 문화의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기독교 문화는 성경의 계시진리를 깨달은 농도만큼 처해진 영역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때 기독교 문화의 목적도 문화창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영광을 실증적으로 깨달아 가는 것을 목적 삼는다.

다섯째 기독교 윤리관의 차이점이다. 전통신학의 인본주의적 특징은 윤리관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구속받은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간주한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불철저하고 그릇된 율법관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다음에는 거룩한 생활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의심되지 아니한 채 강요되어 왔다. 여기에는 성경 전체의 복음에 대한 미숙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론과 인간관 등의 오해가 복합적으로 게재되어 있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도무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대변되는 시내산 언약은 그것 자체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그것은 시내산 언약 이전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삼대 언약의 전개 과정속에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그림자적 언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흐름속에서 시내산 율법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도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부각된다. 이런 파편적 성경 이해는 온갖 모순된 성경 해석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관점은 성경은 66권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과 성취를 통한 하나님 계시라는 일관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한권의 책으로 간주한다. 시내산 율법도 그러한 흐름안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 즉 율법은 얼핏 보아 구약 전체에서 지켜야 될 규범으로 틀림없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전통신학에서는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국가법으로 구분하고 의식법과 국가법은 그리스도가 지킴으로 성취했지만, 도덕법 즉 십계명은 항구적으로 성도가 지켜야 될 규범으로 지금도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율법의 복음적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오류인 것이다. 이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가 인간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부족하며 인간의 도덕적 공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도덕주의적인 여지를 남겨 놓으려는 그릇된 견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설정한 자의적인 구분법인 것이다. 어디 성경에 율법을 그렇게 구분해 놓은 데가 있는가? 그리고 도무지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하는 명칭이 합당한가? 굳이 명명한다면 십계명은 도덕법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법이며 이는 나중 그리스도가 지키실 언약적 성격을 지닌다.
이런 율법의 구분에서 카톨릭의 도덕주의적 반성경적 실체를 확인할 수가 있다. 도무지 카톨릭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으며 십자가의 충족한 구원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율법을 지켜 그 공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반복음적인 가르침을 시행한다. 이런 그릇된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율법의 구분을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수용하게 된 것이다(기독교강요 2권). 칼빈은 카톨릭의 그릇된 인간관과 구원관은 비판했으나 십계명이 도덕법이라는 아퀴나스의 주장은 그대로 수용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만다. 이로부터 개신교는 카톨릭과 구원관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가지지만 윤리관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한 율법주의적 도덕주의적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 이 율법주의적 질곡때문에 개신교는 초기 개혁때 가졌던 복음적 구원론의 생기찬 추진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고 지금까지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러면 성경은 율법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성경은 율법을 계명, 율례, 규례로 구분한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방편으로 기능한다. 계명은 근본 모법이며 율례는 배상법적 성격을 띠고 규례는 제사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명을 어길 경우(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킬 수 없었다) 규례 즉 제사를 행함으로 살 길을 얻게 된다.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언약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장차 율법을 못 지키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 살게 될 것을 약속하는 언약적 복음적 성격을 띤다. 배상법인 율례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배상해 주실 것에 대한 언약이다. 계명 역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으로 이는 죄인인 인간이 수행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하실 언약이다. 이를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무지 죄인인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수단이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근원적으로 대비된다. 모든 이방 종교는 인간이 계율(율법)을 지킬 가능성이 있고 지켜서 의롭게 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율법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도덕적 차원이 결코 아니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종교적 방편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적 복음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율법은 히브리서가 증거하는대로 오실 그리스도 복음의 그림자이다(히10:1). 지금까지 율법 해석은 역사적 해석에만 머무르고 그것을 그리스도로 연결하지 못하고 바로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직접 적용시키는 율법주의적 해석을 한 것이다. 이는 바로 구약은 전체로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라는 성경 해석의 신학적 대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신학의 입장이 위에서 논의한 성경신학의 복음적 주장을 받아 들이더라도 역시 남게 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즉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여기에는 그래도 생활의 규범으로써 율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칼빈 역시 이 생각 때문에 율법이 오실 그리스도를 가르친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아퀴나스식의 도덕법으로 이해하는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숙한 인간론과 성령론이 개재되어 있다. 전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주체로 설정하고서 그 주체자인 인간이 객관적 규범을 지켜 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령은 이런 인간의 노력을 보조적으로 도우는 지원자 쯤으로 간주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는 이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육신적으로야 우리 각자가 자기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신령한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 한분을 머리로 모시게 된 것이다.따라서 나란 주체는 실제적으로 껍데기일 뿐이고 본질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내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자신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자신(과거 죄의 종노릇하던 육신적 자아)은 죽고 우리 안에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살아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제 우리 자신이란 하나님 앞에서 개체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윤리적 성숙은 성도 자신이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주권에 달려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성도가 주체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 말 자체가 성립하질 않는다. 말이 안되는 말을 우리가 그동안 사용하며 그것 때문에 고통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성숙하게 살게 하시려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의 복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그 사랑의 힘이 지체인 성도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신다. 성숙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령이 성도의 윤리적 삶의 주관자이며 구체적인 실행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고 성도는 쓰임을 받는 도구이다. 바울은 이를 깨닫고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그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고전15:10). 또한 바울은 자신의 미친듯이 이루어진 치열한 복음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힘이라고 말한다(고후 5:14). 이런 원리를 깨닫게 될 때 성도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 살수록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게 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원리이자 목적이다. 이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전제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때 인간의 의를 자랑하는 철학적 윤리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전통신학이 참된 신학임을 표방하려면 인간의 의와 능력을 전제하는 종래의 율법관과 윤리관을 전폭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살펴본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의 구조적 차이점을 확인했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양자의 차이는 부분적인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인 차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글은 양자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성경신학적 논리와 주장의 성경적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Ⅵ. 결론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편의 논문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큰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 따르는 자세한 세부적 항목들은 점차 더욱 세밀하게 논의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제에 대한 큰 윤곽을 드러 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먼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그것이 역사적 전승가운데 어떤 굴절과 그릇된 고정화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신학적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의 발생 과정에서의 신학적 사유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이런 논의를 토대로 성경신학이 지닌 성경적 논리와 특성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양자가 지닌 구조적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검토했다.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그러나 결정적으로, 양자는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글의 논의에 따르면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성경의 전포괄적인 해석의 틀에서 구성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서 성경의 부분적 내용을 근거로 정립된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당시 즉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혁신적인 진리 주장이었으며 중세의 암울했던 상황속에서 많은 영혼들은 그 구속의 진리만으로도 영적 기갈을 해소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는 조그만 촛불 하나도 대단히 밝게 느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자들의 신학적 원칙들은 오늘날의 시대에도 너무도 건전한 면모를 띠는 것이 많다. 하나님 주권사상, 성경의 절대 권위, 예정론과 이신칭의 등은 우리에게 남겨진 주옥같은 진리들이다. 그러나 후대의 개혁신학은 개혁자들의 건전한 신학적 원칙에 토대를 두고 더욱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고 더 깊이 발견해가는 신학적 진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오히려 개혁자들이 남겨놓은 건전한 면모는 퇴색해가고 오히려 문제점은 강화되는 신학적 퇴보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뚜렷한 증거가 구속사적 교리로 성경을 축소시켜 버린 예이다. 칼빈의 주저 기독교강요를 보면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의 논리를 구성해 보려는 노력은 엿보인다. 그러나 후대의 신학자들은 점차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 삼아, 인간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 분으로 교리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전통적 교의신학의 구속사적 골격이다.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이미 구라파에서 18∼19세기를 거치면서 발흥한 자유주의신학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과 도전 앞에 방어할 말을 잊어 버린 채 신학계에서 뒤안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통신학자들의 유일한 변명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적들의 도전은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지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를 통해 입증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이백여년 동안 전통신학자들이 성경 자체의 전체적 논리를 확인하는 신학적 작업보다는 전승된 교리를 맹목적으로 수호하고 거기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역사적 문서임을 증명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신학자들보다는 훨씬 더 방대한 성경의 연구자료가 확보되고 그들의 잘못된 전제를 입증하려는 현란한 논리들을 개발해 왔다. 그 여세가 20세기 오늘에까지 이르러 구미의 신학계 더 나아가 세계 신학계에는 전통신학자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운 처량한 실정이 되어 버렸다.
이제 신ㆍ구약을 연구하는 주경신학이나 성경신학에서는 성경이 역사적 문서라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 되고 말았다. 구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폰 라드식의 전승사 비평(구약이 역사적 전승의 모음집이라는 문서설적 입장)은 기본 가정이며 신약의 연구에서는 불트만의 양식사 비평은 극단적인 예로서 비판하지만 편집사 가설(각 성경은 기록자의 신학의 반영이라는 주장, 우리는 이를 절대적으로 배격한다)은 이미 전통신학적 입장에 있는 신약 신학자에게도 일반화되었다. 특히 성경의 영감은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독단적 가설 정도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몇몇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신학자에게서 아직도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이 주장되지만 그것을 증명할 성경적 논리가 없다. 유일한 논리가 구속사적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론에서 확인한대로 만약 성경의 골격을 구속사로 보게 되면 그것은 성경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논리적으로 너무도 많은 의문의 여지를 갖고 있다. 조금만 신앙적으로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과 만나면 해답을 할 수 없는 허술하고 부분적 논리인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처럼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해답되지 아니하는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는 구속사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그들의 온갖 그릇된 주장을 확대시켜 나가는 예상치 못한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그렇게 애타게 여기고 그것이 당신의 사역의 근본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멸망자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인본주의적 논리를 전개해 간다. 그 귀결이 바르트의 화해와 사랑의 하나님이며 만인 구원론이다. 이때의 사랑의 개념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도덕적 관념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철저히 인본적 신학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혼의 구원만을 의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원까지 염두에 두시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탄생을 가져 왔다. 이것은 최근 더욱 발전하여 모든 종교도 구원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근거를 전통신학은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이게 되면 전통신학은 구원의 하나님을 너무 축소시키고 있는 편협성과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형국이 되고 만다. 말하자면 구속사라는 전제 때문에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 약점이 잡힌채 끌려 다니는 꼴이 된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구속사적 논리와 편협된 세계관을 가지고는 자유주의신학의 도전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 사상의 물밀듯한 거센 신학적 도전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이 글이 밝히고자 한 성경신학은 이런 전통신학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의 자체 논리와 증거를 통해서만 신학을 구성했다. 성경신학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속사의 전제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계시라는 점에 착안했고 성경에는 언약과 성취의 논리가 수미일관하게 붙박혀 있음을 확인했다. 언약과 성취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데 그 목적을 두는 것이다. 그 내용상의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은 성경의 근본 주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신실하게 성취하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지엽적 주제이다. 전통신학은 가구 안에 집을 넣으려는 본말 전도의 논리를 전개한 격이다. 가구는 집안에 들어갈 한 요소에 불과하듯이 인간의 구속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여러 방편 중에 하나에 해당한다. 이렇게 정립할 때에라야 우리의 믿음이 인간 안에서 생겨나는 결단이 아니라 신실하게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증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성경신학의 논리적 체계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기독교적 세계관의 포괄성과 근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의 만사 만물의 운행은 동양의 자연철학자(기철학)들의 말대로 자연 스스로의 생성적 힘의 발현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이 모든 인본주의 역사가들이 이해하는 대로 인간의 주체적 결단에 달린 것도 아니다. 이런 견해들은 세계를 피상적으로 관찰한 결과일 뿐이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만물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6).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무궁한 하나님의 영광 선포 그 자체에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있을 뿐이다. 이를 깨닫고 전무후무한 인간의 부귀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하나님을 모르는 해아래 삶의 헛됨을 지적하고 그의 영광을 보고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고백했다.(전12:13)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