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성경신학은 게르할더스 보스

하나님아들 2024. 4. 2. 23:19

성경 신학

 

<성경신학>은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저술한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의 책 제목이다. 보스 박사는 1862년 네델란드에서 목사이신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 여기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미국으로 청빈받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여기서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신학 공부를 하고 그랜즈 레피즈에 있는 기독교 개혁교회 신학교 교수로 취임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프리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을 하면서 39년 간 보낸 후 은퇴를 하였다. 그는 1949년 87세의 고령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본서에서 저자는 특별계시의 역사로서 성경신학을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경에 있는 특별계시의 흐름과 그 발전 과정을 밝히며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였다.

  이 책은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어떻게 흐로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장별로 잘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제 1 부 모세적 계시의 시대

 

제 1장 성경신학의 성격과 방법(서론)

 

  신학은 주로 주경 신학, 역사 신학, 조직 신학, 실천 신학으로 4대 분야로 나눈다. 모든 신학이 출발에 있어서는 수동적이고 수납적인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은 이를 듣는 놀라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신학을 알아 가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신적 행위의 완성된 산물이 아니라 그 신적 행위로서의 계시를 다룬다. 신적 계시 행위의 주요 성격은 다음과 같다.

1) 계시 과정의 역사적 점진성 즉 구속은 역사적으로 계속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2) 역사 안에서의 계시의 실제적 구현 즉 계시의 과정은 역사와 동시에 일어날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 구현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그 대표적 예이다.

3) 계시 가운데 관찰할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의 유기적 성격 즉 유기적 점진성이란 씨 형태로부터 완전한 성장에로의 도달을 말한다. 구속은 본래 점진적이다. 따라서 계시도 점진적이어야 한다.  

4) 성경신학에서 결정적인 측면은 계시의 실체적 적용에 있다. 즉 계시는 참으로 종교적인 만큼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끊임없는 의지의 사용을 필요로 한다. 

 

  구속이 객관적이고 중심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 밖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구속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라 할 때는 인간 주체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중심적 구속 행위는 성육신과 속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주관적 개인적 구속 행위들은 중생, 칭의, 회개, 성화 그리고 영화이다.

 

  행위 계시는 그 앞뒤에 언어 계시가 따라 나온다. 일반적인 순서는 먼저 언어 계시가 나오고 그 뒤에 행위가 나오고 여기에 이를 설명하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구약은 예언적이고 예비적인 말을 기록하고 있으며 복음서들은 구속 계시 사건을 기록하고 서신서들은 이것을 뒤따르는 마지막 해석을 기록하고 있다.

 

제 2 장 계시 영역의 구분

 

  계시는 일반적으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한다. 일반 계시는 자연 계시로 특별 계시는 초자연 계시로도 불린다. 일반 계시는 자연을 통해 오는 것이므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기 계시를 통해 초자연적인 영역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정의하는 것이 좋다.

  1) 죄와 상관 없는 상태에서 그 둘의 관계를 보기로 하자. :

선행되어야 하는 본유적 신 인식이 없었다면 아무리 자연을 관찰해도 바른 신 개념에 도달할 수가 없다. 모든 신 인식의 존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내적 신 인식은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을 통해 보충하기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여기서 신 인식은 충만성과 구체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죄의 유입으로 인하여 영향 받고 수정된 때의 두 계시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서 초자연적인 계시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죄된 인간에게서 내재적인 자연은 더 이상 정상적인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게 되었다. 

  3) 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초자연적으로 접근해 오실 때에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전(前) 구속적 특별 계시의 구분 : 

타락 전에도 자연적 신 인식을 능가하는 특별 계시의 형태가 있었다.

 

  구속적 특별 계시의 구분

  (1) 언약 

전 구속적 특별 계시가 흔히 행위 언약이라고 불리운 것에 비해 구속적 특별 계시는 은혜 언약이라고 불리운다.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은 은혜 언약의 두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이 메시아가 강림하기 전의 은혜 언약의 시기라면 신약은  그의 강림 이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의 시기이다. 

  (2) 디아떼케

히브리어 “베리트”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베리트가 언약이라고 칭한다면 헬라어 “디아떼케”는 마지막 의지 곧 유언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가 있다.

  여기서 “옛 언약”의 시기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시기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이 아니라 모세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임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창세기의 기록인 모세 이전의 시대는 옛 언약에 정당하게 포함될 수 있다. 이 부문이 오경에서는 모세 시대의 서언으로 그리고 책의 표지에 속하는 서언으로 의미를 갖는다.

 

제 3 장 전(前) 구속적 특별 계시의 내용

 

  이 계시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큰 원칙이 있다.

 

1) 생명의 원칙과 이에 대해서 “생명나무”로 가르치신 내용

  생명나무는 동산 중앙에 있는 것이다. 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원래 인간의 거주지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거주지로서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인간이 특별히 받아들여진 곳이다. 종교의 하나님 중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창 2:8 겔 28:13,16) 이 곳은 하나님 거주라는 낙원과 같은 곳이며 역사의 마지막에 올 종말적 형태의 상징을 예견해 주기도 한다.

  선지서에서는 이 강을 생명수로 표시하였다. 생명나무와 생명수라는 두 상징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가까이 함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과의 교제의 중심이라는 진리가 여기에 천명되어 있다.

  창 3:22에서 우리는 타락 전에 이것을 먹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계 2:7에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낙원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2) 시험과 이에 대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상징으로 가르쳐진 내용

  이 나무 역시 동산 중앙에 있다.(창2:9 3:3) 이 나무는 더욱 신비롭기에 생명나무보다 더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첫째 신비적 해석이 있다. 이 나무는 이방 신화로부터 성경에 차입되었다고 한다. 신들만의 독점적인 권한을 유지하려고 인간들이 얻게 될 것을 아주 시기한 결과 “선과 악을 아는 것”을 인간들로 하여금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선과 악을 아는 이라는 구절은 선과 악의 선택의 나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험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셋째 이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불리는 것은 시험을 통해서 인간을 그 최상의 지복과 연관된 종교적 도덕적 성숙의 상태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3) 사단으로 상징된 유혹과 죄의 원리

  시험과 유혹에는 차이가 있다. 시험의 배후에는 선이 유혹의 배후에는 악이 자료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타락에 있어서 뱀의 역할 전통적으로 악한 영과 연관된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뱀의 유혹의 과정은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이 두 과정 모두에서 유혹자의 중심 목적은 여인의 마음 속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인은 두 방법으로 반응한다. 첫째가 사실 문제에서 아무런 금지도 없다고 말함으로 유혹자의 시사를 거절한다. 둘째 단계에는 대담히 들어 서면서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도록 여인에게 단호한 형태의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4) 몸의 분리에 의해 상징되는 죽음의 원칙

  창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최초의 죄를 범함으로 모든 인류가 죽음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고 즉 죽음은 죄의 형벌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제 4 장 첫 구속적 특별계시의 내용

 

  타락 이후에 인간을 찾으시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는 은혜 즉 구속이 분명히 있다. 타락한 사람에게 수치와 두려움의 감정이 일반 계시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과 대면함으로서 수치와 두려움의 감정으로 자신을 연관시킴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벗음으로 인한 수치는 순수의 상실로 인한 색(色)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원시적인 양식이다. 신학적인 설명은 육체적인 벗음은 신의 형상을 잃은 영혼의 내부적 벗음이라고 한다. 다른 이론은 죄의 영역을 확정 짓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죄에 의해서 영혼에 도입된 부패의 원리를 몸에 반영하는 수치라고 하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피해 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이다. 이는 수치와 두려움이 하나님을 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1. 세 가지 저주

  세 가지 저주는 죄가 범해진 순서로 선언된다. 뱀에 대한 저주에는 여인의 후손이 뱀과 뱀의 후손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뱀은 여인이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도록 배로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는다. 반면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세 가지 저주 가운데에는 궁국적인 승리의 원칙이 들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구원 사역에 있어서 신의 주도권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수가 되게 하고”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다. 자신이 주권적으로 원수 관계를 설정한 것이다.

 

  2) 사람이 뱀과 하나님 각각에 대해 취한 태도에서 구원의 본질이 나타난다. 범죄한 사람은 뱀과 한편이 되어 하나님과 반대의 편에 섰었다. 뱀에 대한 태도가 적대관계로 화한 것이다.

 

  3) 구원 사역의 계속성이 선언된다. 원수 관계는 여인의 씨와 뱀의 후손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신이 인간 후손에게 그 원수 관계를 유지하게 하신다. 여기서 뱀의 후손에 대하여는 복잡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인류에게서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외의 것에서 찾는 것이다. 즉 사단이 세력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4) 원수 관계의 문제가 예언된다.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롬 6:20에서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상하게 하다”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것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에서 그것은 그 선행구인 “여인의 후손”이다 라고 했다. 라틴역에서는 이를 여인 자신이라 하여 여기서 동정녀 마리아를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가 있다.

 

2. 씨 - 후손

 

  씨- 후손이라는 말은 집합적인 의미이다. 뱀의 후손은 집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여인의 후손의 의미를 규정짓는다. 그 약속은 어찌하든 간에 인류로부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치명타가 가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치명타를 가함에 있어 여인의 씨가 한 개인에 집중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치명타에 의해 머리가 상하는 것은 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저주의 전반부에서는 두 후손이 대조되었으나 여기서는 여인의 후손과 뱀이 대조되고 있다. 여기서 한 여인과 뱀이 그 대표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찾아 오직 그만이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는 개인적 메시아 개념에로 점진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고통

 

  여자와 남자네게 부가된 저주에 나타난 계시를 살펴보자. 

  여인은 원래 여인으로 가진 성질에 고통이 부가되는 저주를 받았다.

  남자에  대한 심판은 죽음에 이르도록 힘써 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노동 그 자체는 형절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저주가 언급된 방식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노동 즉 땅을 파는 일에 연유하고 있다. 

  이 저주는 사람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가시와 엉거퀴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은혜의 요소가 있다. 사람의 노동의 산물이 생명을 유지할 식물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새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놓는 것처럼 남자는 그의 수고로 그 생명을 부양할 수 있는 것이다.

 

제 5 장 노아시대의 계시와 그 시대까지의 발전

 

  이 시대의 계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후속하는 구속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시대에는 중점이 구속에 있다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번성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시가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계시는 3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첫째, 가인 계열에서 죄의 급속한 발전이 묘사되고 이와 연관하여 자연 영역에서 문화적 진보를 위한 발명의 은사라는 일반 은총이 나타났다. 그 뿐 아니라 가인계의 후손이 이런 은사를 어떻게 남용하여 오히려 세계의 악의 번영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둘째, 급기야 살인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범죄 후에 이를 부인한 것은 사랑의 법의 의무에 거만한 것이다. 낙원에서 행한 죄와 비교하면 사람 마음의 부패가 얼마나 빠르게 진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자연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은사를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정도로 죄의 세력이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자연 영역에서 문화의 진보의 첫 단계는 가인의 아들인 에녹이 성을 쌓음으로 나타났다. 그 후 가인의 8대 손들은 목축과 음악 그리고 금속 가공의 발명자로 나타난다. 이들은 라멕의 아들들인데 라멕은 그의 노래에서 이런한 힘과 재물의 증가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이를 벌리는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노래는 칼의 노래이다.(창 4:23) 라멕은 또한 결혼 관계를 단일혼에서 복수혼으로 바꿔놓았다.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

 

  가인의 후예와 셋 계열의 중요한 인물들과의 비교에서 절정을 이룬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다. 가인의 아들인 에녹과 셋의 아들인 에노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대조의 극치는 7대 손에서 나타난다. 셋계의 에녹과 가인계의 라멕이 극과 극을 이룬다. 라멕의 자만과 오만에 비하여 에눅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에녹을 모든 신비를 주도하는 선지자로 표상하고 있고 셋계의 기록이 노아에 이르고 있음을 주목해야한다. 이 연대기들이 셋 계열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의 연대기는 그 안에서 구속의 과정이 일어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이 있었을 지라도 악의 세력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셋 계열이 가인의 계열에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은 없다. 이렇게 구속의 은혜는 정적이었음에 반해 죄의 세력은 강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인계와 셋계가 서로 결혼을 통해 혼합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즉 셋의 자손은 가인의 후예들의 악함을 추종하게끔 자신들을 개방한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이 전자는 가인 계의 여인들이고 후자는 셋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주해자들에 의하여 많은 논박을 가하고 있다.

 

2. 홍수 후의 계시

 

  홍수 후에 주어진 노아의 계시를 다루려 한다. 노아의 언약에서는 자연적인 생명의 발전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은 셈의 계열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노아의 언약은 인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산 피조물들과 땅 자체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노아의 계시는 세 국면으로 나누어 발전해 간다. 첫째는 하나님의 독백으로 표현된 새로운 사물의 질서를 제정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계시이고 둘째는 이 질서에 내용과 안전을 주시는 계시이고 셋째는 이 새 질서가 어떻게 언약의 형태로 확인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첫 부문은 창 8:21-22이다. 자연의 규칙성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둘째 부문은 창 9:1-9이다. 참으심의 역사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명령의 제정과 연관된다. 이 명령은 생육함과 동물과 사람으로부터의 생명의 보호 그리고 생존의 유지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부문은 창 9:8-17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상징을 더함으로 언약의 형태로 그의 약속을 주신다. 렘 33:25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야의 약정”을 말한다. 즉 낮과 밤의 계속적인 교차가 영속적이라는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구속 약속의 확실성을 말할 때 노아의 언약의 불변을 말하는데 그 모형을 말한 것이 사 54:9이다. 무지개로 나타낸 상징도 신인동성론적 이지만 의미가 있다. 그 무지개로 인해 사람이 신의 약속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마치 그가 잊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그 상징으로 자신의 맹세를 기억하시겠다는 것이다.(창 9:16) 후기의 할례와 함께 무지개는 얼마 동안 하나님에 의해 자신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쓰여진다.

 

제 6 장 노아와 대족장들 사이까지의 기간

 

  이 부분에서 다룰 요점은 1. 노아의 그의 후손에 대한 예언적 진술 2. 열방의 족보 3. 언어의 혼잡 4. 셈족의 선택 등이다.

 

1. 노아의 예언적 진술 (창 9:20-27)

 

  이 예언들은 가나안(함)에게는 저주이고 야벳과 셈에 대하여는 축복이다.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기준이 윤리적인 영역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함의 부끄러움 없는 관능성은 야벳과 셈의 겸양과 함께 일반적인 도덕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약은 저주받은 형태의 죄가 가아안 족속 가운데서 나타나는 악의 주도적인 특징임을 보여준다. 오경에서도 레 18:22(남여 동침), 신 12:29,32 (우상 숭배)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문제는 왜 실제로 죄를 범한 함이 아니라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데 있다. 함은 노아의 막내 아들이었고 그래서 함의 막내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 셩경의 족보 관계를 의심해야 한다. 즉 보통 셈, 함, 야벳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이야기는 노아의 아들들이 셈 야벳 가나안(함)이었는데 후에 지금의 순서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둘째 예언은 셈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명칭이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서 벌써 셈에게 축복의 부여가 되는 것이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 분이 셈의 하나님이 되셨도다.”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느 인류의 특정한 그룳의 하나님으로 불리운 최초의 송영이다.

 

  셋째 부문은 그 해석이 다양하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다. 여기서 야벳이라는 이름이 지리적으로 쓰인 것인가 아니면 은유적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라면 영토의 확장이고 후자라면 창성함 즉 부의 증가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셈의 장막을 취함으로 거기서 구속과 계시의 하나님 되시는 셈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예언은 일차적인 정치적인 정복에 잇어서고 그 결과인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샘의 영토를 정복함으로 이루어졌다.

 

2. 열방의 족보

 

  이 열방의 족보는 모세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홍수 이후의 하나님의 경륜에 빛을 비추고 있음을 11장에 가서야 그 구분의 기원이 방언 종족 나라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리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족보상의 순서와는 다르게 셈족이 맨 나중에 나온 것은 이 족보가 세속적이 아니고 구속의 족보에 속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족보에 나타난 사상은 얼마 안가서 셈족속이 구속의 종족을 이룰 것이지만 다른 나라들도 성역의 역사에서 영원히 살아지지 안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언어의 혼잡

 

  성(city)과 대(tower)를 쌓는 것은 인류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결속은 결국 거대한 왕국을 이루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을 영화시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대는 성을 쌓기 위한 것이므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의 실행에 대하여 그 악한 의도를 벌하기 위한 것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의도는 인류의 악한 발전에 홍수의 대 재난적인 구모로 벌하시지 않겠다는 하님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기 위한 간섭이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집중을 막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는 그 의도가 이교적이고 비도덕적이기 때문이었다고 후기 선지서들이 밝히고 있다.

  언어의 혼잡과 나뉨으로 인한 국가적인 다양성을 하나님은 이를 금하신 것이다. 이 사건에서 두 가지의 긍정적인 목적을 찾을 수가 있다. 하나는 인류의 자연적 생명과 관계된 긍정적인 의도이고 하나는 구속의 계획을 실행해 가는 것과 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4. 구속과 계시의 전승자로서 셈족의 선택

 

  셈족이 과연 이 사명 수행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여기에는 심리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으로 나누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적 영역은 셈족은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정서를 가겼다기 보다는 주로 피동적이고 수납적이라는 것이다. 

 

  종교적인 특성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1) 셈족에게 커다란 유일신론의 종교가 발원했다는 것이다.

  2) 각기 나뉜 그룹들 간에 어떤 종교적 유사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3) 셈족의 종교의식이다. 선악간의 종교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지도적 요소가 셈족을 종교 세계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4) 종속적 특성주의이다. 이는 한 신을 종족관계에 있는 한 특정한 종족만이 숭배한다는 것이다.

  5) 셈족의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어디서고 관찰되는 단일화에오 방향지우는 모든 범신론적인 경향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신과 그 예배자들의 인격적 관계에 큰 강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6) 그런 종교적 성향은 진화를 통해 자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화법칙에따라 구약의 높은 차원의 종교를 생산할 만큼 충족하지도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셈족의 세계에서는 이스라엘 외에 이와 비슷한 종교를 이룬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이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 즉 초자연적인 계시가 여기에 작용했다는 것이다.

 

제 7 장 족장시대의 계시

 

1. 비판적 견해들

 

  1)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역사적인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느 역사와 같이 국가나 민족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순전한 가공의 인물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기록의 사건과 인물들의 형성에 대한 문제와 그 이름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인물들 사이의 혈통 관계는 종족들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고 족장들의 이동은 종족둘의 이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역사성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대다수 이다.

 

  2) 더 극단적인 견해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름은 원래 히브리족보 사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가나안 인물들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점유하였을 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오랫동안 섬기던 곳에서 반 신적인 존재로 경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전에 거룩한 땅에 살았었고 이 장소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헤브론이 이삭에겐 브엘세바가 야곱에게는 벧엘이 특별히 주어졌다는 것이다.

 

2. 족장들의 역사성

  

  구약 종교는 사실적인 종교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의 구속 드라마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사실적 시조들이며 객관적 종교의 최초의 구현자들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논리적 입장이다.

 

3. 신현들

 

  아브라함에게 계시가 처음에는 초기의 불명확한 형태로 주어졌다. 창 12:4에서 “이르셨다”고 했고 창 12:7에서는 “나타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 15:13에서 불명확한 진술 15:17에서는 가시적인 나타남 즉 신현이 일어남을 볼 수 있다. 17:1에서 다시 나타나셨다.

  이삭의 생애에서는 창 26:2, 24에서 신현이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야곱의 생애에서 다시 신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에 비하여서는 그 횟수가 적다. 창 28:13에서는 꿈 속에서 여호와가 사닥다리 위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창 35:9에서는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 그에게 복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에서는 신현의 부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현 현상이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모두가 약속의 땅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가나안에 대한 여호와의 구속적 임재의 시작이 있다. 또한 계시 시간의 특성도 고려할 만하다. 여호와께서는 족장들에게 밤에 나타나셨다. 이 밤 시간은 사적 성질이 지켜지는 시간이다. 족장사에서 이상(환상)이 두 번 나타난다. (창 15:1, 46:2) 후자의 경우는 밤에 나타났다.

 

4. 여호와의 사자

 

  족장 시대 계시 중에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계시이다. 여기에는 두 비판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내셨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높이는 유대 사상ㅇ에서 여호와 사자의 개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에서 이 기본적 뜻의 최고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편에서의 본래적인 필요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 성육신은 하나의 구속의 큰 성례이다. 요 1:18에서 고전적 표현으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리라”에서 사자 출현의 사실이 처음부터 구속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 족장 아브라함

 

  족장 세 명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브라함에서 다를 것이고 이삭과 야곱을 다룰 때는 그들 각각과 관련된 새로운 요소들만 다룰 것이다.

 

  1) 선택의 원리

  하나님의 족장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선택의 원리이다. 지금까지는 인류가 전체로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샘 족속 가운데서 한 가족을 택하여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적 사역을 수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가나안이 이 거룩한 족속이 거주할 땅으로 선택된 것은 이를 시사해준다. 비록 메소포타미아와 비교해서 가나안이 외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이것이 족장을 그리로 인도하신 한 가지 동기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가나안이 결코 외진 곳이 아닌 고대 세기의 교통과 세계적 삶으로부터 유리된 곳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의 요지였고 때가 되어 복음이 그 곳을 중심으로 온 세상에 퍼짐으로 그 전략적 위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이 족장 시대 종교의 우주적인 목적을 잘 변론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은혜와 약속의 기초에 서게 된다. 이는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 이후 430년 뒤에야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계시의 종교는 뿌리로부터 자라나 나무의 둥치가 좁은 통로 안에서 어느 정도 수액을 막다가 넓게 퍼져 가간 것과도 흡사하다. 족장 시대는 이 뿌리의 성장에 ,자유롭게 퍼져나간 영광은 신약 시대 계시에 , 줄기의 어느 정도 제한된 형태는 모세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에 각각 사응하는 것이다.

 

  2) 객관적인 은사의 수여

  하나님 계시의 두 번째 특징은 수여된 은사의 객관성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중재에 관련된 종교의 시작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언역하심으로 시작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 후에야 이에 대한 반응으로 주관적인 심리 상태가 내면적 외부적 삶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툭징과 밀접히 연관된 것은 계시 종교의 점진적 성격이다. 즉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역사하시며 미래에도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들 종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족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인 행동하심은 세 가지 커다란 약속과 연관되어 있다. 첫째는 선택된 가족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 둘째는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그들이 모든 백성에게 대하여 축복이 되리라는 약속이다.

 

  3) 이 약속들의 초자연적인 성취

  하나님 계시의 세 번째 특징은 이 약속된 것을 성취함에 있어서 신의 능력의 절대적인 독력주의가 말에서나 행동에서 가장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의 엄격한 초자연주의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왜 자연에 반하는 사건들이 많은 지를 설명해 준다. 

  초자연의 원칙이 요구되기 때문에 자연의 결과로 낳은 이스마엘은 거부되었고(창 17:18-19 갈 4:2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몸이 죽은 것과 같이 될 때까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 후에야 이삭을 낳게 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이 분명하다. 

 

6. 하나님의 이름 “엘-샤다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하심이 초자연성을 통하여 자연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자신의 도모를 이루는데 쓰시므로 여기서 “엘-샤다이“로 나타나신 것이다. 이 명칭은 형태에 있어서 ‘엘’이나 ‘엘로힘’과 연관되고 한 편에서는 모세 시대의 명칭인 ”여호와“와 관련된다. 전자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낸다면 ”여호와“는 하나님 자신의 구속적 명칭이고 ”엘-샤다이“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을 위해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7. 족장 종교에 있어서 발견되는 신앙

 

  창 15:6은 믿음에 대하여 성경이 명백히 언급하는 최초의 말이다. 넓게 말하면 성경은 신앙의 이중의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과 은혜에의 의존이고 둘째는 더 높고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행동 내지 상태를 말한다. 최근에는 후자의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성경에서 신앙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행동을 하게 하고 그의 전 생애는 이 은총을 심화시키는 신앙의 학교였다. 처음부터 그의 믿음에 대한 큰 요구가 있었다. 그는 그의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도록 부름받앗다. 하나님은 처음에 자신이 지시할 땅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았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가 전부였다.

창 12:7에서 하나님께서 특정한 땅을 그에게 준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그에게 놀라움이었다.

아브라함의 신앙 훈련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한 데서 나타난다. (창 22:2,16-18) 이삭은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써 사라지게 될 모든 약속 성취의 대표요 수단이요 보증으로서 하나님에게 바쳐진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최고의 신뢰가 뒤 따르고 잇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수행되고 난 후에 이삭을 살리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8. 윤리적 요소들

  

  구약에서 윤리적 성격은 할례에 의해 상징되었다. 할례는 에돔 암몬 모압 아랍 족속들과 같이 이스라엘과 근접한 나라들에서 만이 아니고 비 샘족이나 이집트인 또 아메리카 인디언 족속들이나 남태평양의 섬들 주민들에게도 행해지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윤리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도록 하셨다. 창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힐례는 순전히 외적인 것이었고 출 6:12, 30에서는 모세의 시대에 비로서 할례라는 말이 자격없는 것의 제거라는 뜻으로 온유적으로 쓰여진다. 레 26:41에서는 이스라엘의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고 그 필요성을 나타내고 신 10:16에서 모세는 그들의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권고한다. 

  할례의 교의적인 이해는 첫째 이 의식이 이삭 탄생 전에 제정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것이 많은 자손에 관한 약속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할례는 칭의와 중생 그리고 성화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다.(롬 4:9-12, 골 2:11-13)

 

9. 족장 이삭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그 본성 상 3단계를 거친다. 그 시작은 힘이 많이 들고 큰 결과를 낸다. 창조적인 시작이다. 그 중간은 고통과 자기 부정의 단계이다. 그러므로 성격상 수동적이다. 셋째 국면을 특정 지우는 주체적 변형을 일으키는  힘의 회복으로 연속된다. 여기서 중간 부분이 이삭에 의한 표징이다.

  모든 성경의 희생은 헌신에서든지 대속에서든지 종교적 행동에 또는 종교의 회복에 있어서 마땅히 하나님께 생명의 드림이 있어야 한다는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대속의 원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대신해야 한다. 창 22장의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전능과 희생의 필요가 나란히 강조되었다. 

 

  신약에서 교의적으로 이 두 요소가 공존해야 하는 필요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을 이 사건에서 희생제적 언어를 빌어 사용하고 있다. (롬 8:32)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 즉 모리아 땅의 어떤 산(창 22장) 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희생 의식 장소로서 연관되어 있음이 시사되기도 한다.

 

10.족장 야곱

 

  야곱-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생산적인 활동성에 대한 강조와 섦의 주체적 변형이라는 원리이다. 세 족장 중 야곱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게 나타난다. 야곱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이를 유념해야 한다.  

 

  1) 선택

  에서와 비교하여 야곱이 윤리적으로 고상하지 못한 성질들을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존중하는데에는 더 뛰어남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은 이들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탄생에도 이 교훈이 논의 되었는데 그 때도 선택이 중요한 요소였다. 즉 약속의 자녀를 생산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문제로 해결한 것이다. 

 

  이상의 두 경우에서 보듯이 구약사에서는 일반적인 예표를 넘어 하나님의 주권으로 개인 선택의 원리를 세우는데까지 보여주고 있다. (롬 9:11-13) 바울에게 있어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 대한 계시가 하나님의 선택 목적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독력(獨力)주의의 대표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선택은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운명이 아니라 적어고 계시된 정도로 알 수 있는 목적이다.

 

  2) 벧엘의 꿈(이상, 환상)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중ㅇ요한 계시적 요소는 벧엘에서 받은 꿈이다.(창 28:10-22) 야곱은 약속의 땅으로부터 우상숭배와 세속에 물들어 있는 가족에게로 가는 행로에 있었고 그런 죄에 물들기 쉬운 처지에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그와 개인적으로 교통하셔서 그가 약속의 영향하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계시가 꿈의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다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여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옛 약속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 꿈은 야곱의 미래 생활에 대한 확인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3) 브니엘에서의 씨름

  창 32장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이상한 자와 겨룬 씨름 이야기이다. 이 사건은 아주 신비롭다. 

  현대의 해석에서 이 씨름은 순전히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즉 야곱이 그와 씨름하는자보다 육체적으로 더 강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와는 반대의 해석으로 이 사건을 순전히 내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병행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즉 신체적인 씨름과 영적인 투쟁이 병행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씨름의 첫 단계는 날이 밝기까지 계속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환도뼈를 치셨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취하신 행동이 야곱의 인생의 태도를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생의 위기인 에서와의 대면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후에는 육체적인 씨름은 계속되지 않고 인간적 노력이 그친다.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정화된 야곱의 후반의 생애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신앙과 기도의 인내를 예증하는 구약의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야곱이 기도할 때 가졌던 마음의 태도를 우리의 기도 모임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죄의 기도이기도 하고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불만족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제 8 장 모세 시대의 계시

 

1. 구약 성경 계시의 구조에서의 모세의 위치

 

  모세 때부터는 전설의 시기가 그치고 역사의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보통 말하여지고 있다. 때로는 여호와 이름으로 모세가 행한 큰 구원이 그의 종 모세를 통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총성을 백성들의 의식 속에 심을 수 있었고 후일 이스라엘 종교를 도덕화하는 주요한 힘이 되었다. 모세가 백성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함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토양을 윤리적 열매의 씨를 심었다.

 

  (1) 모세의 우위성

 

  우리는 처음부터 모세가 이스라엘 종교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고대 오경 기록에 의하면 모세가 종교적 지도자로서 수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세에게 최고의 지위를 부여했다. (호 12:13, 암 3:1-2 참조 사 63:11, 렘 15:1)

  모세에 의해 조직된 그들은 국가적 결속으로 이끌게 했으며 모세는 그들을 약속된 땅의 경계까지 인도하여 내었다. (삼대 약속관 관련해서는 족장 아브라함을 보라)

  모세는 선지자들의 머리에 설 뿐 아니라 좀 새로운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모세가 선지자들과 함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신 18:18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

  민 12:7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종이었다. 모세 사역의 중요성과 함께 그는 유례없는 모형적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구약의 구속자로까지 불리울 수 있다.

 

  신약 성경의 구속에 사용된 모든 용어들이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그의  사역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만 그 병행을 찾을 수 있는 계시하는 말과 구속하는 행동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모세의 행동은 그렇게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다.

 

  모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인 관계는 다음 3 가지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1) 신 18:15 그 선지자는 메시아에게서 정점에 달했다. 이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표현했다. 

  2) 모세는 아론계의 제사장직이 제정되기 전에 옛 언약을 세움으로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했다. (출 24:4-8) 예수님은 자신이 성찬을 베푸시고 새 언약을 수립하실 때 이것을 모형적 사건으로 언급하셨다.(눅 22:20) 

  3) 모세는 백성이 굼 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후에 백성을 위해 대신 기도하고 자신을 그 죄책으로 인한 심판에 그 대속적 임무를 맡기려 했다.(출 32:30,33) 물론 모세가 당시에 왕적 존재로는 볼 수 없다. 여호와만이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 이스라엘의 모세에 대한 관계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을 바울은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1-3)라고 기록했다.  세례애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가 맺어지듯이 모세를 통한 신적 구원의 능하신 행위도 이스라엘 과 그에 대한 신앙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사역 기간에 신앙과 불신앙이 두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처럼 모세의 광야 여행 기간 중애도 신앙과 불신앙의 장대한 드라마가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히 3,4장)

 

2. 모세 시대의 계시 형태

 

  모세가 가졌던 것과 같이 여호와와 직접적이고 계속적인 교통을 누린 선지자는 그 외에는 하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가까이 서서 말하고 행하였으므로 그 뒤의 어느 선지자보다도 충실한 하나님의 대언자 구실을 했다. 

민 12장에서 여호와가 모세는 단순한 천한 종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하는 모든 일을 전하는 청지기라는 높은 의미에서 “내 종 모세”라고 불렀다. 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명칭은 후일 이사야의 예언에서 메시아에게 붙여진 이름이 된다. 모세는 여기에 포함된 독특한 특권을 누린 것이다. (출 33:12)

 

모세의 사역과 연관된 계시의 형태들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이름과 얼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의 현존의 지속성을 표현한다. 이들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 불 기둥과 구름 기둥

 

  출 13:21-22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밤낮으로 백성들 앞에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리고 후에 백성들 뒤로 옮겨가 홍해 가운데 백성과 그들을 추격하는 애굽인들 사이에 계셨다. (출 14:24)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함을 의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나타났고 (출 16:10)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에 여호와를 계시하는 구름이 나타났다. 여기서 구름을 불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2)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첫 언급은 출 3:2에서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이다. 그와 하나님이 동일시됨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내셨다는 사실이다.

  출 23;20,23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이 주어진다. 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민 22장)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도모를 좌절시킨다.

 

 

  (3) 여호와의 이름과 얼굴

 

  앞의 사자를 말하는 두 곳에서 이미 여호와의 ‘이름’과 ‘얼굴이라는 두 계시를 보았다. 출 23:21에서는 ’이름‘이 사자에게 있다는 확인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보았다. 

  다른 형태인 ‘임재는 출 33:14에서 ’내가 친히 가리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여호와 자신이 가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신명기에서는 ‘이름’과 성도의 영광과의 동일시이다. 여호와는 당신의 ‘이름’을 성소에 두셨다고 하신다. 당신의 이름이 잇는 곳은 그의 거처라고 하신다.(신 12:5,11,21 ; 14:23-24; 16:2; 26:2)

 

3. 모세 계시의 내용

 

  (1)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서 구성된 모세 조직의 실제적 기반

 

  출애굽은 구약 성경적인 구속이다. 구약과 신약 종교 자체의 내면적 통일성에 기반을 두고 동일한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이 둘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

그러면 출애굽 구원의 철저한 원리들은 무엇인가?

 

  1) 이방 압제로부터의 구원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서 묘사된 구속은 죄와 악의 객관적 영역에서 구원이다. 애급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스라엘 자체의 복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착취했다. 이후로 구속은 이방 세력에 노예됨이라는 상징과 연관된다.(요 8:33-36,롬 8:20-21)

 

  2) 죄로부터의 구원

  히브리 사람들은 단지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되었을 뿐 아니라 내면적인 영적 저하와 죄로부터 구원된 것이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지식을 잃고 애굽인들의 우상숭배의 관행에 빠져들어 그들과 같아졌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구원이 이루어졌다.

 

  3) 하나님의 전능을 보이심

  구원의 방법과 관련하여 강조점은 이 구원을 가져온 신의 전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앙의 숫자는 성경의 완전수인 10이다. 홍해을 가르는 것은 구속의 대 드라마의 정점이다.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서 여호와의 전능과 출애굽은 서로 연관되어졌다.

 

  4) 주권적 은혜의 행사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압제자들과 함께 우상숭배에 물들여 있었지만 구원되고 남겨졌다.

 

  5) 여호와라는 명칭

  모세 시대의 특정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다. 이 발음은 이 단어의 자음들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서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음 부가는 원래 이 가장 거룩한 이름을 도대체 발음하는 것조차 신중하게 꺼렸던 유대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다. 그 단어를 발음하는 대신에 언제나 아도나이를 썼으므로 편의를 위해 모음이 부기될 때에 아도나이에 있는 모음을 그대로 붙였던 것이다.

 

  6) 유월절

  출애굽 구속의 마지막 주요 특징은 전체를 꿰뚫어 흐르는 속죄의 사상이다 이것이 유월절로 나타난다. 주권성과 함께 은혜는 속죄없이 행사할 수 없다. 이 의식으로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 족속의 집을 유월(pass over)한 것이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집에 발라진 피는 단순히 히브리인들이 거주한다는 것을 인식하게끔하는 단순한 상징만은 아닌 것같다. 그 실제는 그 희생제적 성격이 중요했다. 이것이 제사라고 한다면 어떤 종유의 제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화목제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대속적 요소가 큰 것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속죄제로 분류될 수 없음은 속죄제는 드리는 자가 그것을 먹을 수 없는데 유월절 제사에는 반드시 먹게끔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율법에 의해 제정된 일번적인 화목게와 유월절 제사와의 차이는 유월절 제사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월절 식사와 함께 쓴 나물을 먹음으로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심한 압제를 받았다는 것을 기럭하도록 했다. 일번적인 화목제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비해서 이 유월절 제사는 국가적 성격을 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가족적으로 기념된다

 

  (2)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출애굽 24장에 시내산 언약이 있고 19장은 이스라엘 민족이 새내산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 여기서 언약이 처음으로 양자간 협의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언약의 주도권은 여호와께 있고 언약은 백성들 앞에 베풀어졌고 그들의 동의를 요했다.(출 19:5,8 ; 24:3).

 

  이스라엘이 자유롭고 윤리적인 관계 안에서 결속되었다는 사상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처음 발전되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이스라엘 종교가 언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는 생각지 않았다. 주전 7세기 후반에 쓰여진 신명기적 율법서에 와서야 이런 공식이 등장했다. 이 공식이 등장한 이유는 열왕기하 22장에서 요시야 왕 때 사반이 율법사를 발견하여 백성들 사이에 신명기적 율례들을 준행하자는 동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3) 이스라엘의 조직 - 신정

 

  이 언약에 의하여 시작된 이스라엘의 일반적 조직을 이야기 하면 이는 일번적으로 신정 통치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에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이 용어는 요세푸스에 의해 만들어 진 듯하다. 

  이 신정의 의미는 그 지배를 받고 살던 이스라엘의 율법은 단순히 모든 법의 배후에 있는 샌의 재가를 받았다거나 양심을 통한 일반계시로서 결국 하나님깨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 즉 여호와께서 직접 그 법을 계시하였다는 의미에서 신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흔히 인간 왕들에게 생기는 사력을 여호와께서 친히 수행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필요할 때에는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하여 국가의 왕 노릇을 하신 것이다.

 

  (4) 십계명

 

  십계명은 전체로서의 신정의 구조를 아주 잘 나타내준다. 십계명은 여호와께서 그 종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던가 하는 것을 요약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에는 율법의 분명한 구성 요소의 하나인 제의적 명령이 빠져있다는 것을 집고 넘어 가야 한다.

 

  1) 전 세계적인 적용

  십계명이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적용된 것이 모든 윤리적인 관계에서의 전 세계적인 적용과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십계명은 일차적으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거 선포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후대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상황에 대한 거울로서 의도적으로 형성시킨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을 순종의 근거로 말씀하실 때는 모든 신자들의 삶에의 영적인 유비로서 생각하기에 역사적인 상화을 잘 적용해야 할 것이다.

 

  2) 종교적인 성격

  십계명은 단순히 그 안에 윤리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서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어떤 구속적인 호의를 베푸셨는가를  제시함으로 여호와께 주의를 집중시킨다. 

  모든 명령이 “--하지 말지니라”는 부정 형태로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관련된 4 계명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2계명에 붙은 장대한 부언은 그 율법을 불순종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대상이 된다는 것 뿐 알니라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말하고 잇음을 알아야 한다.

 

  3) 열 마디의 말

  십계명의 본문을 열 개의 계명으로 나누는 대는 의견이 있다. 본문은 열 개의 계명이 잇음을 말하나 그것 하나하나를 몇 째 계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우리가 구약을 절로 나누어 읽지먼 본래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첫 째 계명

  이 처음 네 계명은 특별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처음 세 개의 명령 형태는 그 자체로서 이교의 세 가지 전형적이고 근본적인 죄들을 반대하는 것이다. 즉 다신교에 대한 항의, 우상숭배에의 항의, 마술에 대한 항의 이다.

 

  첫 계명은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인 부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오직 한 경배의 대상만을 가지라고 명령할 뿐이다.

 

  5) 둘 째 계명

  왜 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것이 여호와의 질투를 일깨우는가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 단어는 특히 결혼 관계에서의 질투 부부 사이의 질투을 의미한다. 우상 숭배가 나타나면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단일 혼 견계가 다른 종교적 주와의 복수혼 또는 음란한 관계로 대채되는 것이다.

 

  첫 째 계명이 유일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둘쩨 계명은 이를 준수함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다.

 

  6) 셋 쩨 계명

  주문은 이교적 미신에서 가장 힘있는 것의 하나였고 주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형태는 이름 마술이었다. 어떤 초자연적 실제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마술 사용자의 소원을 이룬다고 믿었다. 이 계명은 특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런 습관에 사용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7) 넷 쩨 계명

  이 계명은 주일의 7일 째 되는 날을 거룩히 여길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 의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앨에게 행해진 구원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창조에 근거하여 주어졌다. 이전에 안식일을 지켰는지에 대한 흔적은 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출 16:23 참조) 일주일이 7일임은 모세 이전에 알려졌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창 29:7 참조)

 

  안식일은 역사의 종말론적 구조와 이 원칙을 상징하고 모형론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매주 6일 동안 노동과 이에 따르는 안식의 날의 율동적 반복을 통해 교훈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안식일 준수는 은혜 언약 하에서 한층 중요시된다. 안식에 들어가 는 사역은 더 이상 사람들의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는 구약이나 신약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안식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구약은 메시아 사역의 수행을 바라고 있으므로 노동의 날들이 먼저 오고 안식의 날이 주간의 끝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약의 우리는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뒤돌아 보고 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안식을 먼저 기념하는 것이다.

 

  (5) 제사법(의식법)

 

이는 모세의 입법 중 가장 폭 넓은 부분이다.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세 시대에 새롭게 도입된 것은 아니다. 옛 관습이 그대로 편입된 예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1) 상징과 모형

  종교적 의미에서 상징이란 어떤 사실이나 원칙 또는 영적 성질의 관계를 볼 수 있는 형태로 의미 깊게 묘사한 것을 말한다. 

  같은 것이라도 모형으로서 보면 훨씬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모형론적인 것은 예상적이다. 이는 앞으로 미래에 실재하게 될 것이나 적용 될 것과 관계된다. 신약 성경에서는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언급된 곳(롬 5:14)에 단지 한 번 모형이라는 말이 쓰였다.

 

  악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에서 모형으로 취급된 것만을 모형으로서 생각하기로 하자고 제안된 일도 있다. 이런 것들을 ‘내재적 모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밖의  연구에 의해 모형론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을 ‘외부적 모형’이라고 한다. 

 

  2) 성막

  성막은 구약 종교의 중요한 제도들 중에서 상징적인 것과 모형적인 것이 공존하는 좋은 예이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중요한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다. 이러한 개념을 구약의 종교적 상태에 관련되어 있는 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신약적 구원의 최종적 구원에 관하여는 모형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존경이라는  두 요소의 공존은 성경 종교 전체에 흐르는 성격이다. 지성소의 궤 위에 있는 그룹의 존재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장엄에 대한 위엄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그룹은 하나님이 보좌에 둘러선 자들이다. 천사들은 심부름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리들이고 그룹은 여호와 보좌 주변에서 그들의 둘러섬과 끊임없는 찬양으로서 여호와의 왕적 위엄을 표현해야 하는 천사들이다. (사 6:3 계 4:8-9)

 

  4) 예배의 장소

  성막에는 여호와의 임재외에 또 다른 개념이 있다. 이는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라는 개념이다. 이 곳은 백성이 그에게 존경을 돌리는 왕의 궁전이다. 그 특성은 성소에 속해 있다. 이 곳은 세 기구에 의해 상징되는데 향단 진설상 등잔이다.

  분향은 기도를 말한다. 이 상징은 연기와 관련되고 또한 위로 올라간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진설상은 (출 25;30 레 24:5-8) 소제와 전제를 나타낸다. 여기에 쓰인는 제물은 생의 활동을 하나님께 헌신함을 상징한다.

  등잔은 기도와 이스라엘의 선행이라는 빛의 두 상징과 연결 선 상에 있음이 분명하다. 슥 4‘21과 계 1:20과 관련하여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을 의도한다고 보면 좋겠다.

 

  5) 그리스도는 성막의 원형적 실체이다.

  성막이 가르치고 전달하고자 하는 그러한 종교적 원칙들과 실체들이 계속되는 구속사에서 어디서 다시 나타나고 그 절정 단계에 까지 올려지는가? 

  첫째로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발견한다. 요 1:14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은혜와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서 그 백성들 중의 장막 속에 오셨던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 분이시다. 요 2:19-22은 그의 적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취하는 태도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파괴되는 구약의 성전을 예수님 자신이 부활을 통하여 삼일 안에 다시 세우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성소와 자신의 영광의 인격의 계속성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6) 성막은 또한 교회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에 적용되는 것은 또한 교회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교회에 대해서도 성막은 모형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이는 필연적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운다.(엡 2:21-22 딤전 3:15 히 3:6 밷전 2:5)

  계 21:3은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곳의 표상의 독특성은 이사야 4:5-6과 연관해서 성막과 성전의 영역이 전체 새 예루살렘과 동일하게 확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7) 율법의 희생 제사 제도

  의식법에서 두 번째 오는 중요한 요소는 희생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 희생제의식은 성막의 의식의 중심을 차지한다. 제단은 사실 하나님의 집이며 축소된 성막이다. 이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만나시는 곳이라고 묘사되었다.(출 20:24)

  제사 자체는 오세 율법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들의 제물을 가져온 것과 홍수 후에 노아가 제사를 드린 것을 보았다. 이런 희생 제사도 역시 죄의 상태에 속해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희생제의 개념은 죄의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8) 제물들(offerings) - 예물들(gifts) - 희생제사들(sacrifices)

  제단 위에 오름이 제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여호와께서 제단에 거하심으로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은 제물을 여호와께서 바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신인동형론적인 언어로 여호와께서 제물을 소화하신다는 원칙을 표현한다.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미치는 부분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성례전적인 재가이다. 여기서 사람은 순전히 수동적인 위치에 선다. 중요한 것은 기도보다도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9) 드리는 자와 그의 제사와의 관계

  제의의 내적 의미와 드리는 자와 그의 제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세가지 일반적인 견해가 있다.

  첫째는 순전한 상징적 이론이다. 제사 과정은 드리는 자에게 일어날 어떤 것들을 구성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이 제사를 통해서 그에게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사의 상징적 대속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는 주로 사람의 의무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상태를 묘사함으로 시작한다. 상징적 대속론은 사람 자신으로서는 효과 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하여 그 대신에 대신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의 자체가 말한다고 한다. 즉 제의의 후속 과정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그 대신하는 것에 적용된다.

  셋째는 두 이론과는 아주 다르다. 제사 율법이 오랜 발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오랜 옛날의 관습들을 서로 조화되지 않는 원칙들에 따라 짜놓은 견고하지 못한 집적물이라는 것이다. 제사에 관한 어떤 지적인 의미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사의 이론이 아니라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0) 희생 제의의 단계들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란 희생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께는 최선의 것만 바쳐야 한다. 희생제는 드리는 자의 복사로서 상(像)으로 보일 뿐이다. 드리는 자는 제물과 동시에 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족하고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댜면 어떻게 완전히 정상적이고 흠없는 동물이 그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상직적 대속론이 답을 해 줄 것이다. 불완전한 드리는 자를 완전한 동물 대리자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제의의 다음 단계는 동물이 성소에 끌려온 후 드리는 자가 머리에 안수하는 것이다. 안수는 언제나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에게 무엇인가가 전가된 사람은 안수하는 이와는 다른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희생의 대속적 해석을 나타낸다.

  레 17:11을 살펴보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죄하느니라,’

희생제에 있어서 피는 풍부한 상징을 갖고 있는데 첫째 죽음을 상징하고 둘째 대속적인 인격의 개인적인 죽음을 상징하고 셋째 고통을 수반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11) 대속의 정의

  레 17:11은 대속 원칙의 분명한 진술을 하고 있다. 생명이 생명을 대속한다는 것이다. 대속에는 다음의 3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자의 생명을 동물의 생명인 다른 생명으로 대치시키신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대속의 원칙은 보유하고 있지만 대속적 고통과 대속적 죽음의 사상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 이론을 신약의 실체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림에 우리가 실패하자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셔서 자신의 봉사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변상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죄를 문제 삼으시나 그에 대한 심판에서가 아니라 당신께 드려진 손해에 대하여 보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선물을 바라신다는 것이다.

  셋째 희생제의 제물은 그 죽음에서 드리는 자에게 올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죽음에는 죽음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통과 죽음으로써 우리 죄의 비정상성을 대신하신 것이다.

 

  12) ‘가리운다’는 의미(속함의 의미)

  가리운다는 것에는 말살과 보호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후자인 보호한다는 해석이 원래 속죄에 대한 사용법이라고 가르친다. 이 상징은 하나님과 드리는 자 사이의 피의 매개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부터 드리는 자가 안전함을 얻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리움 후의 제의의 단계는 제단에서 동물의 특정한 부분을 태우는 것이다. 이 태우는 행위가 동물을 죽이는 것에 표현된 사상을 더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단에서의 제물을 태우는 것은 후에 죄인에게 있을 죽음의 경험을 더욱 집중적으로 상징한다.

 

  희생제의 마지막 단계는 희생제 식사이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독특한 것이다. 식사 전에 희생제에는 참된 속죄가 있다. 

 

  13) 제사의 다양성

  속죄제에서는 속죄 개념이 전면에 나오며 이것이 강조된 후에는 또한 단에서 태움을 통하여 성별 개념이 주목을 받게 된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속건제에는 두 개의 특색이 있다. 하나는 이 속건제가 얼마나 갚을 것인가에 대한 가치 평가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의 돈이 더해지는 유일한 제사라는 것이다. 모든 죄는 드리는 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 위반한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순종을 빼앗은 것이다. 만일 속죄제가 전자를 바로 잡는 것이라면 속건제는 후자를 상환하는 것이다.

  번제와 연관하여 우리는 전체 제물을 제단에서 불태우는 것에서 표현된 성별하여 드림에 대한 강한 강조를 주목할 수 있다. 이에 상응하여서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유월절과 희생제적 식사를 논의하면서 말한바있다. 화목제의 종류로는 감사제 서원제 그리고 자원제가 있다.

  소제는 동물 희생제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상징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로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볶거나 고운 가루로 오븐이나 팬에 굽거나 찐 떡이나 전병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다.

 

  14) 부정한 것과 정결 의식

  정하다는 것은 성막에서 여호와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하다는 것은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결과 부정이라는 대조와 거룩과 거룩하지 못함이라는 대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두 대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하다는 것은 거룩함의 전제 조건이다. 부정한 것은 그대로 있는 한 결코 거룩해 질 수 없다. 이 영역에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동으로 취해져야만 거룩하게 된다.

  부정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나 과정이 율법의 주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규정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지켜오던 관습과 용법을 규정했을 뿐이다.

 

  14)-1 토테미즘

  구약 율법에서 부정한 것과 정결의식에 관한 특별한 언급과 관련하여 3 가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토테미즘의 구별로 설명하는 것이다. 토테미즘이란 야만 종족이나 가족들이 자기들의 기원을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비생물적인 대상에서 이끌어 내고 그 종의 모든 객체에게 종교적인 경의를 표시하며 그들을 쫓아 자신들을 이름하고 그것들을 죽이거나 먹는 것을 금하는 형태의 미신이다.

  구약의 대중적 종교의 여러 현상들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 중에서도 그 고대적 형태가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14)-2 조상 숭배

  부정한 것에 대한 현상을 조상숭배로부터 연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정함에 그 근거가 있다고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숭배는 죽은 자의 영이나 영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제사장들의 친족들의 장례의식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하고 있다. 대제사장은 절대로 시체 곁에는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 제사장의 경우는 친족들의 장례의식을 수해하도록 허용되었다. 만일 조상숭배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면 그 금지는 친족에 관해서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숭배 이론에 의하면 죽은 친족이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14)-3 활물론

  이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둘 모두는 원시인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사물들이 피해야만 하는 악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한 이론은 이런 세력의 담지자들은 인격적이고 마귀적인 종류의 것이는 것이고 또 다른 이론은 위험은 비인격적인 활물(soul-matter)에 내재해 있다고 한다.

첫 이론에 의하면 특히 장례 의식에 있어서 부정한 것의 형태는 이런 마귀적 세력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자신을 가리우는 많은 노력들이라고 한다.

둘째 이론은 이런 습관들을 자기 방어적인 것으로 보나 위장의 수단이 아니라 예방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제 2 부 선지적 계시의 시대

 

제 9 장 구약 계시에서의 선지자들의 위치

 

  계시는 사건들 후에 나타난다. 새로운 계시를 위해서는 새로운 발생사가 어떤 새로운 것을 그 배후에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출애굽 이후에 신정적 조직을 시작하게끔 되었을 때에 많은 계시가 뒤따랐다. 그러면 새로운 계시체를 불러 일으키는 커다란 사건을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통치자 아래서 신정적 왕국을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었다. 사무엘 시대에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1. 왕국 형성 운동

 

  선지자들은 전개된 신정의 수호자들이었고 이 수호활동은 왕국의 중앙에서 수행되었다. 그 목적은 이 왕국이 여호와의 왕국의 참된 구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커다란 국가적 포부와 함께 처음에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개인적으로 선지 활동이 나타난 것이다. 사사 시대의 드보라의 경우가 그 초기의 예라 할 수 있다.

  엘리사는 다메섹에서 이사야는 니느웨에서 에례미야는 바벨론에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여호와께서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에게만 의존해야 한다는 신정적 원칙에 대한 충실한 주장의 결과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나단이나 갓 같은 선지자들이 왕권을 통하여 활동하였고 후기에 와서는 엘리야나 엘리사가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엘리사는 오므리가의 왕조에 대항하여 음모에 끼어들었으나 그의 목적은 예후의 집안을 통하여 오므리가를 몰아냄으로서 바알 종교를 불과 칼로 근절시키려는 것이었다.

 

2. 선지활동의 도구로서의 말씀

 

  선지자들은 예언 활동을 통하여 성경 종교는 비로서 진리와 신앙과 말씀의 종교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선지자들을 형식적인 관점에서 개신교의 선구자들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계시라는 중요한 사실에 밀착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에게 가까이 하시는 여호와는 주로 말씀으로 가까이 하시는 것이다.

 

3. 연속성

 

  선지자라는 이름이 앞일을 말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언하는 일이 선지자의 일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선지자들은 그 시대 안에서 외롭게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귀중한 동정심이 없는 백성들 사이에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현재에 총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미래에 찾으려는 경향 일 수가 있다.

 

4. 선지 활동의 중요한 두 시기

 

  선지 활동의 전반부는 사무엘 시대의 선지자들의 대부흥으로 주전 8세기 중엽의 첫 문서 활동을 한 선지자들의 연대에 이르고 둘째 시기는 이로부터 구약 예언이 그칠 때까지의 시기이다.

  전기에서는 선지적 선포에 부응한 회개와 변개의 가능성이 아직도 있다는 점에 있다. 둘째 시기에는 비록 회개에의 요구가 끊이지는 않지만 다소간 형식적이다. 

  8세기 중엽 이후에는 선지자들이 문서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아모스 호세아 그리고 조금 후에는 이사야와 미가가 처음으로 문서로 예언 활동을 하였다.

 

제 10 장 선지자의 개념 - 명칭들과 그 어원

 

1. 히브리어 명칭 - “나비”

 

  선지자라는 히브리어는 “나비”이다. 나비란 신을 위한 정규적인 대변자로 정해진 사람으로서 그의 말에 신적 권위가 있는 이 라고 이해 할 수가 있다.

  선지자의 직무는 말하는 영역에 있다. 그리고 이 말함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일반적인 말함이 아니고 신적인 의사소통에 근거한 신의 권위와 전능을 전달하는 독특한 것이다. 구약 사람들에게 선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권위있는 대변자였다. 

 

2. 헬라어 명칭 - “프로페테스”

 

  히브리어 “나비”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 헬라어는 “프로페테스”라 할 수 있다. 예언자라는 의미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제 11 장 선지 활동의 역사 - 비판적 이론들

 

  선지자라는 명칭은 항상 고정적으로 계시의 수단 에 상응하는 말로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모세도 선지자로 불리웠다.(민 12:6) 아브라함도 선지자로 불리웠다.(창 20:7) 여기서 의미는 하나님과 특별한 친분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란 뜻이다.

 

1. 선지 활동의 역사

 

  선지 활동 역사의 출발점은 모세 시대로부터 잡을 수가 있다. 당시 종교적 우월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민 11:29에서 모세는 모든 여호와의 백성이 선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표현했다.

  사무엘 시대부터는 선지 활동의 역사가 이전의 계시시대와는 구별된다. 두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선지자 직무가 더 공적인 신정적 배경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들의 수적인 증가를 들 수 있다. 선지 활동은 단지 왕국의 종교적 부록의 하나가 아니었고 시간이 흘러 정권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를 견제하고 교정하고 때론 거부하는 기관이 되기도 하였다.

  집단적인 선지자들과 개인적인 선지자들의 구분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런 구분은 없다. 집단적 선지자들이 생애 전체를 바쳐서 선지자의 생활과 기능을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야나 예례미야 같은 이는 분명히 생활 전체를 바쳐서 선지자로 봉사한 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파견하는 것이 여호와에 의해서 백성에게 내려진 자비의 하나라고 말한다. (암 2:11)

 

2. 이스라엘에서의 선지 활동의 기원

 

  비평학파의 보편적인 가정인 선지 활동의 가나안적 기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가정은 선지 운동이 이스라엘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영향 아래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다.

 

3. 후기 선지자들이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만들었는가?

 

  후기의 선지 운동에서 구약 종교의 독특하고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 윤리적 유일신론의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모스나 호세아 시대 이후로부터라고 한다. 여호와의 윤리적 성격이 유일신론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개의 비평학자들은 이 유일신론적 추론이 에례미야 시대 이후로 분명해졌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의 중간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기는 유일신론의 발생 초기로서 선지자들은 일관해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단일신론과 유일신론 선상을 때때로 배회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쿠에넨의 견해) 다른 이는 유일신론은 포로기 선지자 때까지는 아직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실제적 유일신론은 예례미야가 아니라 포로 기간 동안의 제 2 이사야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스타데의 견해)

 

제 12 장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실제적으로 교통하심을 확인하거나 함축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오는 것을 그들이 수납하는 양식과 경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쿠에넨의 견해 검토

 

  쿠에넨은 선지자들이 그들이 선포하는 사신의 직접적인 신적 기원을 분명히 믿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에언의 많은 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으로 아니 현재에는 또는 가까운 장래에는 실현될 수 없으므로 그들이 잘못했음이 틀림이 없다고 한다.(신적 기원 여부의 확신에 대하여) 이것은 단지 그들의 윤리 종교적 신념의 진지함과 확고함의 반영이 큰 확신성을 가지고 표현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선지자들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교통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가르침이 참되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이런 객관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2. 핵심 사상 계시 이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진리의 기본적인 핵심만을 무여해 주셨고 이를 주체적인 예언적인 반성으로 만드는 것은 선지자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그들의 사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할 만큼은 보수적이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말씀과 들음을 통한 계시 

 

  여호와의 말씀하심에 대한 언급은 선지자들의 기록에서 흔히 살펴불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하심은 의도된 사람의 마음에 사신(massage)을 가져다 주는 전체 과정과 이에 이르는 모든 단계를 포함하는 전체 형식을 말하는 수도 있다.

 

4. 보여주심과 봄을 통한 계시

 

  말씀하심과 들음을 통한 계시와 함께 그 다른 형태인 보여주심과 봄을 통한 계시가 있다.

  고대에는 이상이 흔한 현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민 12:6에 의하면 모세 시대에는 여호와와 선지자의 일반적인 대화가 이상이었고 또 꿈이었다. 여기서 이상은 전문적인 의미에서의 이상이다. 사무엘이 등장하기 전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이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였다.(삼상 3:1)

 

5. 들어올림(휴거)를 통한 계시

 

  선지자의 몸이 하늘 영역에 들어 올림(휴거) 을 받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단지 자신을 위해 내려온 객관적인 초자연의 한 부분을 보았을 뿐 아니라 몸으로나 혹은 그 보다 그럴듯한 것으로는 영으로 하늘 영역에 올랐다는 것이다.

  하늘에 올려 지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도 그 들려 올림이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고후 12: 1-4)

 

6. 내적 정신 상태

 

  이 모든 것은 몸과 영혼의 교통과 관계되는 것이다. 이상이 일어나는 동안의 내적 정신 상태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미묘하고 어려워진다. 이럴 때 이상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영혼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제 13장 예언 전달 양식

 

1. 말씀

 

  선지자에 의하여 전달되는 사신이 담겨서 전달되는 형식은 말의 형식이고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형식은 재생적 말씀의 형식인 것이다. 신적인 말씀이 이렇게 해서 인간의 말이 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언어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됨의 한 부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에는 어떤 신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2. 이적들

 

  신적 예언의 전달을 다루면서 선지자들에 의해 수행된 이적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말들은 특유하고 의외적인  어떤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적들을 볼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수행되는 방식보다 가는 그 결과인 영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지서에 다루어지는 이적의 기록이 역사서 만큼 많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는 행위의 기록이고 예언은 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선지서 가운데서도 역사 기술이 포함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역사서 만큼이나 이적이 분명히 나타난다. (사 36-39장 참조)

 

제 14 장 선지적 계시의 내용

 

1. 여호와의 성품과 속성

 

  선지자들의 정향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으면 어떤 종교도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유일신론

  선지자들의 성품과 속성은 유일신론에서 출발하여야만 한다. 그들이 유일신 신앙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성품과 속성

  여호와는 신으로 불리웠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의적인 용어와는 다른 내포를 갖는다. 이것은 빗물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생명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되는 개념은 피조물의 내재적인 무력성을 의미하는 육체이다.(사 31:3)

 

  (3) 전능성

  (4) 만군의 여호와

  (5) 시 공간에 대한 여호와의 관계

  (6) 전지성

  (7) 거룩성

  (8) 의

  (9) 감정들과 사랑

 

2.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유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혼인하셨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열매를 거두시려고 경작하시는 포도원과 같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에 관해서는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만 배울 수가 있다.

 

  (1) 혼인 관계에 대한 호세아의 가르침

  1) 이 연합은 여호와 편에서 기원하였다.

  2) 이 관계는 분명한 역사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3) 비록 이 연합은 실제로 여호와 편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도 자유롭게 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4) 비록 그 언약은 여호와의 성품과 선택에서 그 최고의 이상적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

  5) 호세아에 따르면 언약은 모든 신약의 저자들의 생각과 같이 국가적 언약이다.

 

3. 연합의 결렬 - 이스라엘의 죄

 

  심판은 백성들의 죄로 인해 임한다. 심판 자체는 이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종말론적인 전망에 속한다. 그러나 심판을 이끄는 죄는 현 단계에 속해 있다. 선지자들은 어디서도 죄를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를 말하고 있다. 그 죄들은 모두 여호와께 관계되는 것이었다.

 

  (1) 집단적 국가적인 죄

 

  (2) 회생 제의의 부패

  1) 암 5:25

  2) 사 1: 10-17

  3) 호 6:6

  4) 미 6:6-9

  5) 암 4:4

  6) 렘 7:21-23

 

  (3) 사회적인 죄

 

  (4) 호세아의 죄론

 

  (5) 이사야의 죄론

 

4. 심판과 회복 - 선자적 종말론

 

  (1) 벨하우젠 학파의 비평주의적 견해

  동방에는 고대로부터 종말론이 있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이곳의 영향을 받은 히브리 신앙은  종말론에 문제가 있어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대선지자들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

 

  (2)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가르침

  종말론에서는 심판과 회복을 반드시 다룬다. 선지자들이 심판을 말할 때면 언제나 곧바로 영광의 상태에 대한 이상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둘은 항상 이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산혜립의 승리를 비할 바 없는 종국의 영광의 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3) 호세아

  호세아도 다른 선지자들 처럼 심판이 진노에서 촉발된다는 것을 선언한다(9:15, 11:8-9) 그러나 같은 심판이 정반대의 목적도 이룰 수가 있다. 즉 심판은 여호와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징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4) 이사야

  심판은 그 동기가 이사야와 미가에게 있어서 주로 정화를 위한 심판이다 그러나 이 정화는 악한 요소들을 근절하는 것을 통하여 얻어진다. 그 과정에서 남은 자들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가 “여호와의 날”이다. 아모스서에서도 이 말이 나온다. 고대 선지적 종말론의 존재를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신약에서 “주의 날“로 연결되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제 3 부 신약 계시의 시대

 

제 15 장 신약 계시의 구조

 

신약 계시의 구조는 성경 자체로부터 규정할 수 있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

 

1. 구약에서의 지시로부터

 

2.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3.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제 16 장 성탄과 관련된 계시

 

  여기서 일어난 사건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육신은 신학에서 처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계시 자체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으로의 수직적인 운동을 묘사한다. 그 가운데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 안에 들어오시면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제 17 장 세례 요한과 관련된 계시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히 6:20에 이 선구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눅 1:17, 76에는 이 말은 없지만 요한이 그의 역사적 활동으로 예수의 사역을 준비할 것잉라는 것이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주는 여호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태에 의하면 (3:13-15) 요한은 예수께서 그에게 오자마자 그가 자기보다 더 큰 이라는 것을 안다. 만일 이것이 순간적인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요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 마 11:2-19

 

2. 세례 요한과 엘리야

 

  유대인들은 문자적인 엘리야의 부활을 기대했었던 듯하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강조했다.(요 1:21) 그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실제적인 의미의 엘리야임을 부인했던 것이다. 

 

3. 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베푼 것과 예수께 베푼 두 세례가 있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마 3:13-15의 구절들을 자세히 살피면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음을 밝힐 정도로 예수님의 위치와 성격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의 이 확신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었다.

 

4. 예수님 위에 강림하신 성령

 

  예수님의 세례에는 굉장히 큰 두 사건이 동반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임하심과 예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 되심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선언이다. 

 

5. 세례 후 예수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에 관한 다음 세 가지의 선언에서 그 절정을 본다.

 

  1) 요 1:15, 30

  메시아의 경력을 두 시기로 구분하여 말한다. 세례 요한 뒤에 오는 국면 죽 공생애에서 세례 요한을 잇는 것과 세례 요한이 나기도 전에 분명히 앞서 계셨던 국면 즉 구약 하에서의 메시아의 사력을 말하고 있다.

 

  2) 요 1:29, 36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또는 둘째 인용에서처럼 축약된 형태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죄짐을 말하는 것이다.

 

  3)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위에 성령이 임하시는 표적적인 배경을 중언하고  관찰하고  응답하는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반영하고 있다.

 

제 18 장 예수님에 대한 유혹에서 나타난 계시

 

1. 광야에서의 유혹

 

  예수를 시험으로 이끄신 신은 그이 메시아적 성령이다. 세례 사건과 시험 사건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이를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만든다.

  성령의 원조 하에서 한 것은 그 배후에 하나님 자신이 계신다는 것이다. 일면에서는 사단의 행위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메시아적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주님께 대한 유혹에 대한 해석

 

  첫째 유혹에서는 메시아직을 자기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이용하는 이기적인 유용을 일축하셨다. 

  둘째 유혹에서는 메시아직을 이적을 만드는 메시아라는 직책에서 취함으로 숭배를 받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용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셋째 유혹에서는 앞선 두 가지와 마찬가지로 영광에의 추구에 호소하는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메시아 개념을 한 번으로 영원히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첫째 유혹에 대한 주님의 대답 : 신 8:3

  둘째 유혹에 디한 주님의 대답 : 신 6:16

  셋째 유혹에 대한 주님의 대답 : 신 6:13

 

제 19 장 예수님의 공생애에서의 계시

 

1. 그리스도의 계시적 기능의 여러 측면들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의 네 가지 분야

  1) 자연 안에서의 계시, 다른 말로 말하면 세상의 창조 때부터 무한히 계속되어 나가는 일반 계시

  2) 죄의 유전과 구속의 시작으로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구약 경륜 하에서의 계시

  3) 주님의 탄생으로부터 그의 부활과 승천하기까지의 지상의 공적 사역 동안의 하나님의 계시

  4) 그가 승천하신 뒤로부터 성신의 무오한 인도하심 아래서 된 마지막 영감된 증인의 죽음에까지 미치는 그의 선택된 종들을 통하여 그가 중재하셨던 계시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계시적 사역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떠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였다.

  2)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하여 즉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씀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3) 요한의 계시 개념은 그 자체가 강한 구원론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

 

  1) 직유와 은유

  2) 제한된 의미의 비유

  3) 특례의 비유

  4) 풍유적인 방법

  5) 비유적 가르침의 철학

  6) 요한 복음에서의 “참”과 “참됨” 

  

3. 구약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성경에 관한 예수님의 의식은 바울을 비롯한 어떤 신약의 교사나 계시의 기구들이 그와 공유하지 못할 특별한 예수님 만의 특성이 있다. 많은 자료들을 구약으로부터 사용하였다는 것과 그의 모든 가르침이 구약과 엄격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예수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은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전체 구약 운동을 자신을 그 목표로 하는 신적으로 방향지워지고 영감된 운동으로 여기셔서 그의 역사적인 출현과 사역이 없이는 구약은 그 목적과 의미를 잃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신론

 

  예수께서는 참 계시자였다. 그리고 성경적 관점에서는 모든 계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께 관한 교의에 어떤 공헌을 하셨다는 것을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께 있어서 신성에 관한 가르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생각해야만 한다.

 

5. 하나님 나라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

  1) 창조로 시작되었고 전 우주에 미치는 섭리로 화대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2)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선성적 나라가 결코 모두 파기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정도로 사라져간 때가 있었다. 포로기 동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3) 바라는 메시아적 왕은 언제나 궁극적 왕인 여호와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대리자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왕권을 가지시고 그의 대리자인 메시아적인 왕으로 완전하고 이상적으로 나타나시도록 하신다면 그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희망을 실현시킬 것이다.

 

  복음서에서의 하나님 나라

  추상적인 용법으로는 왕의 통치의 행사 또는 그 적용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임한다. 나타난다. 가까이 왔다. 혹은 그와 비슷한 용어들로 수식된 많은 경우에서는 추상적인 의미가 적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