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성도의 소망을 이루는 성령

하나님아들 2024. 3. 9. 16:32

성도의 소망을 이루는 성령

 

본 문 / 로마서 8:24-28

주 제 / 누구나 소망은 있다. 그 소망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작성일 / 2008년 3월 9일 (№ 08-10)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4-28)

 

 

Ⅰ 성도의 소망(ελπι?, 엘피스)은 구원이다 (롬 8:24; 히 11:1; 눅 1:71)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몇 가지의 용어들 중에 ‘소망’(所望)이란 말도 있다. ‘소망’이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꿈’이란 말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소망’은 약간 차이가 있다. ‘소망’으로 번역된 헬라어 ‘엘피스’(ελπι?)의 정확한 의미는 “확신에 찬 기대”이다. 그러니까 한국어의 ‘소망’은 단순한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경에서의 소망(ελπι?)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엘피스’(ελπι?)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엘피스’(ελπι?)의 의미가 잘 나타난 본문은 히브리서 11:1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은 “믿음은 소망의 실상”이란 말인데, 공동번역은 이를 쉽게 번역했다. 즉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준다.”고 번역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말인데, 믿음을 동반한 기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소망’ 바로 ‘엘피스’(ελπι?)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의 소망은 헛된 꿈일 수도 있으나, 믿음이 있는 성도들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내일의 현실이다.

2008년 우리 영광교회의 신앙의 목표는 “꿈을 이루는 성도, 꿈을 이루는 가정”이다. 나의 소망을 이루고, 가정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소망은 있으면서도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곧 헛된 꿈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과 우리 가정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기정사실로 믿고 있을 때, 우리 신앙의 목표대로 꿈을 이루는 2008년이 될 수 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 8:24을 보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한다.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이 관거완료형이다. 이는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고백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구원을 얻은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믿음의 선언이다. 소망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즉 구원은 우리가 육적으로 죽은 뒤에 누리는 영생이거나 혹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누리게 될 영생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원은 현실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구원은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의 구원도 역시 최종적인 구원 못지않게 의미 있고 중요한 구원이다.

‘주님’은 병 고침을 받아 육체가 자유롭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마 9:22).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핍박하던 대적으로부터 도망하여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얻은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출 14:13; 신 20:4). 그리고 ‘세례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눅 1:71).

즉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가 최종적인 구원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자유함을 누리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소망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그 구원이다. 첫째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한 질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소망이며,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힘들게 하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시기하는 세력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올해는 한 가지 이상씩 이런 구원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꼭 마음에 기록을 해 놓았다가 송년 감사주일 예배에서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예배로 드릴 수 있길 바란다.

 

 

Ⅱ 구원의 소망을 가진 성도의 태도 (롬 8:25)

 

이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가만히 누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확신에 찬 기대가 있는 성도들은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소망의 응답을 준비한다. 감을 따기 위해 사다리도 준비하고, 바구니도 준비하고, 장대도 준비한다. 왜냐하면 저 감은 반드시 익을 것이며, 그 익은 감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감임을 믿기 때문에 합당하게 준비한다.

 

1. 참고 기다림 (롬 8:25)

 

첫 번째 준비하는 것은 참음과 기다림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5)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믿음에 의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태도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조바심을 낸다. 그러다가 일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바심은 무리한 행동을 유발시키고 무리한 행동은 뜻하지 않게 일을 크게 망치게 된다.

우리는 ‘사울’이 조바심으로 인해 크게 낭패를 본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삼상 13:1-12). 처음 왕이 된 사울은 백성들로부터 완전한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을 받아 선지자들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하자, 전부터 사울을 알던 사람들은 사울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가 기스의 아들이 아니냐? 저가 언제부터 예언을 하였단 말인가?”라며 사울의 영적 위상을 무시했다(삼상 10:10-12).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사울이 왕으로 뽑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어찌 저가 우리를 구원하겠는가?”라고 멸시했다(삼상 10:27). 사울은 이런 전후 사정으로 인해 조급해졌다. 자신이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실력을 통해 증명해 보고 싶었다. 마침 블레셋과의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모든 준비는 끝나고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올리면 출전하여 승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왕임을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7일이 지나도록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조급한 나머지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올린다(삼상 13:1-12). 바로 이 조급함이 사울을 불행한 임금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과 전혀 달랐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사울을 대신하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조급하지 않는다. 기름을 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자신을 왕이 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참고 기다린다. 다윗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사울은 다윗은 견제하기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핍박하지만, 다윗은 그런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죽이지 않는다(삼상 24:4). 조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이 기름부음에 대한 책임을 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기만성이라고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모든 핍박과 고난을 참고 기다린 다윗은 영영토록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믿음을 동반하는 소망을 가진 성도는 사울처럼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다윗처럼 참고 기다린다. 하나님이 때를 주실 때까지 어떤 고난이 와도 참고 기다린다. 우리가 소망이 없다면, 고난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우리에게는 믿음을 동반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고난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천하 범사에 때가 있음을 인정하고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

 

2. 기도함 (롬 8:26; 마 7:7)

 

믿음을 동반한 소망을 가진 성도가 취해야할 두 번째 태도는 ‘기도’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도의 기도를 강조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롬 8:26). 소망이 있는 성도는 기도함으로써 그 소망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다윗’을 보라. 그는 수많은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는데, 그는 누워서 입 벌리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사다리를 준비하고, 바구니를 준비하며, 장대를 준비하면서 기다렸다. 그것은 바로 기도이다.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의 기도이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시편 34편을 보라. 표제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한다. 사울의 핍박을 피해 원수의 나라 블레셋에서 망명생활을 하는데, 블레셋의 신하들이 다윗은 사자새끼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자신은 사자의 새끼가 아니라, 개에 불과하다고 위장하기 위해 미친 체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대문짝을 박박 긁어 미치광이 노릇을 함으로써 겨우 살아 나와서(삼상 21:10-15 참조)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다는 말이다. 천하의 다윗이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하는 참담한 현실을 그는 잘 견디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수치스러운 세월을 기도로써 소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 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 34:6-7)

미치광이노릇을 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감사하는 기도를 한다. 구원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소망 있는 성도의 태도이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실 것이요,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의 꿈과 가정의 꿈을 위해 참고 기다리되, 기도하며 그 열매를 기다리길 바란다,

 

 

Ⅲ 소망을 이루시는 성령 (롬 8:26-27)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위해 참고 기다리며 기도할지라도, 우리의 인내와 기도가 그 소망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소망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은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취할 태도일 뿐이다. 소망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 말씀을 하신다. 26절 보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성도는 소망을 위해 인내하며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연약한 기도일 수밖에 없다. 즉 성도의 기도에는 결점이 많다. 그래서 성령이 탄식하며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는 말씀이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란 목사님은 신앙서적을 많이 집필한 분인데, 이 분의 책 중에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 취급당합니다.」란 책이 있다. ‘오르띠즈’ 목사님은 이 책에서 말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되 반복하지는 말라”고 한다. “기도의 응답은 자꾸 반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항상 옳은 것은 하나님뿐이다. 그래서 성령은 탄식하며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옳은 기도를 하도록 도우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7)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하되,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그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중한 우편물 취급을 받아 응답받는 기도가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보혜사 성령의 역할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을 막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도록 유도하신다. 기도할 때에도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래서 응답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소망 있는 성도는 참고 기도하되, 연약한(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해야 한다.

 

 

Ⅳ 나와 가정의 꿈을 이루자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 참고 기도하며 소망을 키워가는 성도들은 반드시 그 마음의 소망을 이룬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하나 소망을 이루어지도록 돌아간다. 왜냐하면 소망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소망을 우리가 이루어야 한다면, 우리의 소망은 벌써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그 소망은 아직도 유효하고, 내일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소망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믿음을 동반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무엇인가 다르다. 조급해하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소망을 이루려하기 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얻으려고 성령이 인도하는 기도를 쉬지 않는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올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고,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