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성령의 감동, 선지자의 예언, 주의 뜻

하나님아들 2024. 3. 7. 09:00

성령의 감동, 선지자의 예언, 주의 뜻

사도행전 21장 1-14절(217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지난주까지 우리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고별 설교를 했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밀레도에서 출발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 대한 기록은 특별한 것은 없지만 그 중간 중간에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는 모습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번은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장면이고, 다른 한 번은 가이사랴에서 선지자인 아가보가 바울의 체포에 대해 예언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감동과 선지자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과 주님의 뜻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1-6v)

 

1) 두로까지의 행선(1-3v)

1-3절입니다.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그곳 성도들을 비롯하여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합니다. 이후의 여정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간략하게 소개됩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Kw'")*라는 작은 섬으로 갔다가, 다음 날 로도스(@Rovdo") 섬으로,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의 루기아 지역에 있는 해안 도시인 바다라(Pavtara)에 도착해서 다시 배를 바꿔 탑니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항해하다가 수리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결국 두로에 상륙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탄 배가 그곳에서 짐을 하역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밀레도 남쪽 68km 지점에 있는 작고 비옥한 섬으로 명주, 솜, 고약의 산지로 유명하며 또한 전설적인 의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고장으로 규모가 큰 의학교가 있었다. - 호크마 <사도행전>

 

이 부분에서는 특별하게 말씀드릴 것은 없지만, 바울이 밀레도를 떠나서 고스로 출발한 것을 기록한 부분에서 ‘바로’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만 지적하려 합니다. 이 단어는 ‘지름길을 잡다, 곧바로 가다, 똑바로 달려가다’*라는 뜻으로 배가 직선 코스로 항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최단(最短)의 코스를 선택했으며, 조금의 꾸물거림도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해 나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고스에서 로도스 섬으로 떠난 것도 ‘이튿날’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순서적으로 계속해서, 잇따르는 다음, 연속되는 다음’**이라는 뜻으로서, 이어지는 모든 여정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미 20:22-25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시간을 끌거나 늦추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둘러서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착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 ‘유뒤드로메오’(eujqudromevw)는 원래 ‘지름길을 잡다, (배가) 곧바로 가다, 지름길로 (오다)’(to sail a straight course)라는 뜻이며, ‘바른 진행을 하다, 똑바로 달려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헥세스’(eJxh'")는 원래 ‘연속하는, 후에, 다음의’(next)라는 뜻이며, ‘1)순서적으로 계속해서 2)잇따르는 다음, 연속되는 다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길로 갈 수 있습니까? 영광이 아닌 고난이, 손쉬운 승리와 박수갈채가 아닌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과연 바울은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성령의 감동과 작별(4-6v)

4-6절입니다.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5)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쉼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바울 일행은 두로에 도착하자 그곳의 제자들을 수소문하여 찾은* 후 그들과 함께 일주일을 머뭅니다. 서두르던 그들이 이곳에 일주일씩이나 머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배편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5절에서 ‘지난’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미치다, 완전히 갖추다, 완성하다’***라는 뜻인 점을 감안하면 그곳에서 끝마쳐야 할 무슨 일이 있어서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찾아’라고 번역된 ‘아뉴리스코’(ajneurivskw)는 ‘찾다, 조사하여 찾다’(to discover by searching)라는 뜻이다. 이것은 두로에 있던 성도와 바울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그곳의 성도 수가 많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 바울 일행이 일주일간 머물러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행첸(Haenchen)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타고 온 배는 두로가 종착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배를 기다려야 했다고 보며, 이에 반해 벤트(Bent)나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다른 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배의 짐을 풀고 다시 싣는데 이레가 걸렸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 호크마 <사도행전>

*** ‘엑사르디조’(ejxartivzw)는 ‘(시간이) 미치다, (교사로서) 완전히 갖추다, 완성하다, 완료하다, 철저히 마련하다’(to finish out)라는 뜻이다.

 

여하튼 그들은 일주일을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드디어 떠나야 하는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알게 된 두로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개역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감동’이라는 말은 없고 단순히 ‘성령 때문에’ 또는 ‘성령을 통하여’라고 직역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바울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 것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감정적인 원인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특별히 성령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 말을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 원문은 ‘디아 투 프튜마토스’(dia; tou' pneuvmato")라고 되어 있다. ‘디아’는 일반적으로 ‘통하여’나 ‘때문에’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상고(詳考)하려 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밀레도까지 오는 여정 가운데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심지어는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곳에 가야 그가 이제껏 행해왔던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급하게,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두로의 성도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9-30에서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30)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주어진 계시가 먼저 주어진 계시보다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에 따르면 바울이 먼저 받은 계시보다 지금 두로의 성도들을 통해 주어진 계시가 더 우선권을 갖는다고 해야 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다면 발걸음을 멈춰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가 예루살렘 행을 고집한 것을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불순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두로 성도들을 통하여 주어진 성령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바울이 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도 분명한 근거를 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성령 하나님의 뜻과 성부 하나님의 뜻이 서로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성경적, 신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의 이해는 두 번째 단락에서 살펴볼 가이사랴에서의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보아야 완전하게 풀리기 때문에 그때에 가서 함께 답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확신을 하고 있었기에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갔다는 것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바울이 떠날 때에 두로의 성도들은 가족들까지 모두 나와서 바울을 전송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작별했고,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떠납니다.

* 바로 위의 각주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부분에서 ‘성령’이 단순히 ‘프뉴마토스’ 즉, ‘영’이라고만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그것이 ‘성령’이 아니라 두로 성도들 자신의 ‘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뒤에 나오는 아가보의 예언 가운데서도 성령이 언급되지만(11절), 그는 분명히 ‘토 프뉴마 토 하기온’(to; pneu'ma to; a{gion) 즉, ‘거룩한 영(=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킬 때에 반드시 아가보가 사용한 방식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영’이라고만 해서 ‘사람의 영’이나 ‘성령’ 모두를 가리키고 있고, 문맥상 구분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성경 번역들은 이 부분을 ‘성령’(the Spirit)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임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2.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14v)

 

1) 가이사랴까지의 행로(7-9v)

7-9절입니다. “(7)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바울은 두로에서 다시 배를 타고 돌레마이*에 도착해서 그곳 성도들의 안부를 묻고** 하루를 함께 보냅니다. 다음날 출발하여 가이사랴에 도착해서는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며 전도자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여러 날을 머뭅니다. 아마도 빌립은 처음으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므로 이방인 전도의 시발점이 된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공동 관심사가 많았고 해서 좋은 교제의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프톨레마이스’(Ptolemai<j)는 두로에서 가이사랴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로 구약 시대에는 악고(Acco, 삿 1:31)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돌레마이‘라는 이름은 아마 톨레미 2세(Ptolemy II, B.C. 285-246)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Bruce). 이 도시는 오늘날 아크레(Acre)로 불리어진다. - 호크마 <사도행전>

** ‘아스파조마이’(ajspavzomai)는 원래 ‘팔을 접다, 경례하다, 환영하다, 포옹하다, 인사하다’(to enfold in the arms)라는 뜻이며,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다, 인사하다, 맞이하다, 환영의 말을 하다, 환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누가는 빌립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에게 네 몇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였고 예언하는 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의 ‘예언하는 자라’는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빌립의 네 딸들이 ‘예언자’라는 말이 아니라,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언을 하면 예언자가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예언 행위를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예언자라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사울 왕은 몇 번 예언을 한 적이 있지만* 그를 예언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누가는 뒤에 나오는 아가보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선지자’**라고 부르지만, 빌립의 딸들의 경우에는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고 ‘예언 행위를 한다’**고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삼상 10:10-11 “(10)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11)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9:23-24 “(23)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24)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 ‘프로페테스’(profhvth")는 원래 ‘미리 말하는 자, 예언자, 시인, 선지자’(a fore teller, prophets)라는 뜻이며, ‘1)신탁이나 다른 비밀한 것의 해석자 2)성령에 감동되어 그의 대변인이 되어 엄중히 영감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자, 선지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프로페튜오’(profhteuvw)는 원래 ‘영감으로 말하다, 예언의 직무를 실행하다, 사건들을 미리 말하다, 예언하다’(to prophesy)라는 뜻이며, ‘예언하다, 선지자가 되다, 신의 영감으로 미리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제가 이 부분을 예민하게 구분하고 지적하는 이유는 ‘선지자’라는 직분과 ‘예언을 하는 은사’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언자’와 ‘예언하다’라는 단어는 모두 같은 단어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그래서 하나는 같은 의미를 가진 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동사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드리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 드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모두 ‘제사장’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예언하는 일’은 은사를 받아서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은사일 뿐 예언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예언자/선지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빌립의 딸들의 경우 일시적으로만 ‘예언’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초대 교회 직후의 구전이나 기록들을 보면 그녀들이 몇 년 후에 소아시아의 히에라볼리로 이주해서 여생을 보냈고, 그들 가운데 몇은 상당히 늙을 때까지도 생존하면서 초대 교회의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자료들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Eusebius, Papias). 하지만 누가가 그녀들에 대해 ‘선지자’라고 하는 대신 ‘예언을 했다’고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기록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아가보의 예언과 작별(10-14v)

10-11절입니다.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아가보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유대에서부터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전에 큰 흉년을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그것으로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의 임자인 바울을 이처럼 결박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는 이것이 성령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두로에 이어서 가이사랴에서도,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분명하게 아가보 선지자를 통하여 바울의 체포에 대해서 경고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예언을 들은 바울 일행과 그곳 사람들의 반응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이들은 두로의 성도들처럼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권함’***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권면이 아니었습니다. 13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보면 그들이 ‘울면서’, 그것도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울부짖어 흐느껴 울면서**** 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바울의 굳은 결의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다른 곳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류하지 못했던 바울 일행들까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울면서 바울을 말렸던 것입니다.

*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 ‘잡아매고’라고 번역된 ‘데오’(devw)는 원래 ‘묶다, 동이다, 매듭하다, 조이다, 감다’(to bind, tie)라는 뜻이며, ‘끈을 묶다, 채우다, 책임을 지우다, 의무를 지우다, 금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파라칼레오’(parakalevw)는 원래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 기원하다, 청하다, 요구하다, 위로하다, 욕망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to call near, exhort, encourage)라는 의미이며, ‘1)부르다, 소집하다 2)연설하다, 말하다, 훈계하다, 간청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크라이오’(klaivw)는 원래 ‘흐느껴 울다, 큰소리로 울부짖다, 울부짖다, 눈물을 흘리다’(to weep)라는 뜻이며, ‘슬퍼하다, 울다, 한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3절은 그들의 만류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기록합니다.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들이 울면서 권할 바로 그때에* 바울이 대답합니다. 울며 권하는 그들을 보는 바울의 마음은 매우 상하게 되었는데, ‘상한다’는 말은 산산이 깨뜨려졌고, 힘과 용기를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마음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울고 통곡하면서 말리기만 하니 바울로써는 힘 빠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문은 ‘토테’(tovte)라는 단어로 13절을 시작한다. 이 단어는 ‘그때, 그 당시'(then, at that, time)라는 뜻이다.

** ‘쉰드륍토’(sunqruvptw)는 원래 ‘서로 충돌하다, 낙담하게 하다, 상하게 하다’(to break in pieces)라는 뜻이며, ‘1)산산이 깨뜨리다, 으깨다 2)은유. 마음을 깨뜨리다, 힘과 용기를 빼앗다, 기운을 잃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의 권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각오’한다는 말은 원래 ‘언제든지, 곧, 즉시’*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굳은 결단을 하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기에 드로아나 밀레도, 또는 두로에서도 성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이사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결심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헤토이모스’(eJtoivmw")는 원래 ‘언제든지’(readily)라는 뜻이며 ‘곧, 즉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4절입니다.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결국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본 성도들은 더 이상 바울에게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권하는 일을 멈추고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주의 뜻’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대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그 뜻대로 바울이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 ‘그쳤노라’라고 번역된 ‘헤쉬카조’(hJsucavzw)는 원래 ‘적막을 유지하다, (노동, 참견, 담화에서) 물러나다, 쉬다, 평화를 지키다, 침묵하다, 휴식하다’(to be still)라는 뜻이며, ‘조용히 있다, 휴식하다, 일을 멈추다, 침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두로 성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의 음성과 그것에 대해 불순종하는 것처럼 보였던 바울의 태도에 대해서도 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펴본 아가보의 예언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비록 아가보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체포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체포될 것이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러한 일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에 불과합니다. 아가보의 예언 가운데 어디에도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암시나 명령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은 그 예언을 들은 바울 일행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두로에서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했던 성령의 음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두로의 성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체포와 환난, 혹은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상황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이 고난의 길임을 재차 확인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 때문에 그 길을 떠나거나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 그 길을 계속 갈 것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금방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 확신했다면 외적인 어떤 상황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았는데, 두로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면 무어라고 변명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옛날 발람 선지자가 발락에게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확고한 답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마음에 재차 묻고 ‘가라’는 허락을 받아 길을 떠난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가라고 하셨지만, 그가 발락에게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길에 천사를 보내어 발람을 죽이려 하셨던 것입니다(민 22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전에 한 번 소개했던, 고든 맥도날드가 쓴 <현실 세계, 믿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영국 종교개혁 당시에 활동했던 토마스 빌니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은 카페에 수요 설교를 올리면서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아주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씀에 근거한 바른 설교로 영국 국교회의 미움을 받아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친구들과 잘 알고 있는 주교 등이 찾아와서 그를 설득했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냐, 어리석게 화형당해 죽기보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더 오랜 기간 사역하고 설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설득에 넘어가 자기가 믿고 있었던 것을 포기하기로 하고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곧 화형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했던 자기의 결정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고, 결국은 다시 활발하게 사역하다가 화형을 당해 죽게 됩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친구들에게 설득당하는 부분을 보며 큰 도전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부분만 읽어드립니다.

 

토머스 빌니는 재판관들이나 적들이 회유했다면 결코 믿음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회유는? 그건 다른 문제였다. 빌니가 확신을 지키고 있고 형의 선고는 아직 내려지지 않은 시기에, 그가 좋아하고 또 믿었던 사람들이 감옥으로 그를 찾아와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라고 애원을 했다. 철회하고 살아서 계속 설교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그들은 조언했다. 그들의 ‘격려’는 유효했고, 빌니는 자신의 믿음을 벼리는 데에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빌니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의심을 도비뉴는 묘사하고 있다.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 자기주장을 철회한 빌니는 더 이상 빌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구하고 싶어 한 친구들은 빌니로 하여금 자기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그의 굳건함은 정복되고 말았다.

 

빌니가 신뢰하고 있는 주교 친구가 그를 방문하여 역시 결심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압력을 넣었다. 빌니는 자문했다. : 나 같은 젊은 군인이 노장보다 전쟁의 규율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가엾고 어리석은 어린양이 런던의 우두머리 목자보다 우리가 가는 길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갈수록 빌니의 친구들은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들의 충고가 폭탄처럼 그에게 쏟아져 아마 그의 영혼은 졸도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 시대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 휴 라티머(Hugh Latimer)는 빌니의 용기가 꺾인 것에 대하여 회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여러분들이 위험에 빠지고 투옥되어 감옥에 가게 된다면.” 회중에게 빌니에 대하여 가르친 개혁가들 중의 하나인 라티머가 말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싸움을 위해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친구를, 모든 친구 관계를 삼가십시오. 하나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적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빌니를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었소.”*

* 고든 맥도날드, <현실세계, 믿음, 진정한 그리스도인>(하늘사다리) pp 38-43에서 발췌.

 

빌니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최후에 가서는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떠한 이유를 든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확고한 뜻을 떠나는 것은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이 꿋꿋하게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친 것은, 그의 마음이 산산 조각이 나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간 것은 매우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 허락하시고 명령하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어렵고,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만류하고 반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