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아들 2024. 2. 25. 23:19

하나님의 나라              

 

1. 신약성경신학이란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계시는 역사를 통해서 점진성을 가지고 진전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과 관련해서 약간의 차별성을 두고 가장 분명히 강조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조를 하셨다.

마 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2. 예수님 자신이 이 땅위에 임하신 동시에 인격적 출현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말씀하시면서,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크게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눅 4: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3.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독자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명을 위해서 보내셨는데, 주님은 그 말씀을 받아서 성취된 말씀으로 말하고 있다.

 

4.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사역 초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구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 “나라(=국가)”란 통치(Reign), 다스림(Rule), 왕권(Kingship)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통치, 주권, 왕권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의 중요한 세 요소로서는 통치자, 백성(=자손). 영역(=땅)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신약성경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들도 결국은 나라라는 통치 개념 속에 다 포함 할 수 있다.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언약, 계약, 또 주님의 구속 사역도 통치자가 백성들을 깨끗하게(=구속) 만들기 위한 관계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5.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권 내에 있는 그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세례, 성찬의 내용들도 통치자와 백성간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신학의 중요한 주제로써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신학에서 다룰 것은 주로 점진성(progressiveness)을 가진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그의 계시를 밝혀 나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의 내용 가운데는 하나님 자신(=통치)의 계시, 백성(=자손)에 대한 계시, 영역(=땅)에 대한 계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구약과의 관계 >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신약성경에서는 용어상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구약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마태복음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계약) 때문이다. 이 언약은 그 당시로만 그치는 언약이 아닌 영원한 언약과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모두 모두 죽었다. 따라서 인간적 차원에서 아브라함, 다윗과는 영원한 언약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손 가운데 영원한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이 곧 메시야와 맺어지는 언약이다.

1) 아브라함과 관련 된 영원한 성격을 띤 언약

- 창 12:2-4, 15:4-5, 17:3-7, 18:18-19, 26:3, 24, 28:15

2) 다윗과 관련 된 영원한 성격을 띤 언약

- 삼하 7:13-16, 23:5, 대상 17:14-15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와 동일하게 다윗과도 영원한 언약(=삼하 7:16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을 맺으셨는데, 이와 관련 된 신약성경은 눅 1:32-33이다.

눅 1:32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다윗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그 성취가 임박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경영하심, 그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주권 행사, 왕권 행사를 구약에서뿐 아니라 신약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 대한 것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더 구체화되고 오늘 우리까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진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3. 하나님의 왕권

이로써 신약성경신학은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왕권(=통치, 나라)에 대한 내용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통치자, 왕으로서 백성과 관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통치자(=이스라엘의 왕)로써 그 백성을 다스리고 꾸짖고 계시다. 그리고 이스라엘 이웃의 이방까지도 친히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왕권을 발휘하고 계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유의 주, 우주의 통치자로서 일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자기 백성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운영하심을 볼 수 있다. 그의 백성을 길들이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백성들의 거주 영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주 영역과 관련해서 한때는 애굽 땅에 430년 동안 살았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고 강퍅케도 하셨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권(=왕권)을 말하는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광야를 지나게 하신 후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셨고, 그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완전한 나라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통치권 속에서 보다 안정된 삶을 살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사들과 열왕들과 율법이 백성을 다스렸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들조차도 범죄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이었다. 지도자들(=왕)이 범죄할 때 그 백성들은 비참하기만 했다. 사람들로 다스려본들 죄로 인해 더욱 불행해지기만 한 것이다.

 

②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약적 방법들은 한시적이고 불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은 본래의 완전한 나라를 형성하시는 쪽으로 진전되는 것이다. 완전한 통치자 안에서 그의 백성도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다. 즉 그의 아들을 통해서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③ 결국 구약이란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하시기 위해서 서론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훈련을 펼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 전체를 한 주제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역사 섭리)로 보면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또 당대 뿐 아니라 대대로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뼈저리게 느끼는가? 이는 인간 통치자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인간 통치자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며, 또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④ 분열 된 왕조 가운데 북 이스라엘은 19대 왕조였다. 평균 통치 기간이 11년이었다. 그 가운데 8명의 왕이 반역자에게 살해되는 비참한 역사를 남기고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다(B.C. 721)가졌다. 여기에 비해서 남 유다는 평균 통치 기간은 16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남 유다도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다. 이런 왕정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이면서 죄가 없는 메시야의 통치를 기대하도록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대한 것이 점차 밝아질 수 있도록 계시가 점진적으로 분명해지도록 진전시키셨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이다.

 

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계시를 진행해 오시다가, 구약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그 아들을 이 땅에 직접 보내셔서, 그의 사역을 끝낸 후에,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말씀하셨던 그대로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십자가와 속죄 사역에 대해서 믿기만 하면,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서 그의 친 백성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⑥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흐름 가운데 보다 구체적인, 사람들이 직접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주제는“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권)”이다.

히 1: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신약과의 관계 >

1. 마태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꼼브렁크(Combrink, H.J.B), 로오르(Lohr,C.H.), 엘리스(Allis, O.T.), 포스터(Vorster,W.S.) 등의 신약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구조를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구조적으로 13장의 천국 비유, 천국에 대한 설교를 마태복음의 중심 혹은 초점으로 보고 있다. 즉 마태복음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중심으로 기록한 복음서라는 것이다.

 

1)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모든 사람들이지만, 특별히 유대인을 의식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은 조상들의 여러 가지 죄로 인해 무너진 불완전한 통치자가 아닌, 메시야를 통한 완전한 통치의 나라를 기대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이 기록되었다고 할 때,“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보다도,“하늘나라(=천국)”라는 용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2) 그 이유는 유대인을 의식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표현하기 보다는 “하늘”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나라(=54회), 왕(=22회), 천국(=34회), 하나님의 나라(=3회), 아버지의 나라(=2회) >

3) 그리고 천국복음(=3회) 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마태복음의 첫 부분에서 특이한 것은 5장에서 9장까지의 내용인데, 이는 5-7장과 8-9장으로 나눌 수 있다. 5-7장은 천국복음 즉 산상보훈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필요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8-9장까지의 내용은 말씀하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셔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하신 것이다. 이런 이적들의 의미는,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언약하시고 이적으로 성취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말씀과 행동하심을 하나로 묶어서 9:35, 4:23의 문맥에 의하면 천국 복음인 것이다.

 

4)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아들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전되고 구체화된 것으로 실현되었음을 마태복음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직접 실현된 것을 힘차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탄의 저항이 이 땅에 잔존하고 있음을 사탄의 나라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마 12:26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5) 마태복음은 아들이 인격적으로 이 땅위에 임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증거한다. 동시에 그 나라는 미래에, 장차 완전한 나라로 실현될 것으로, 미래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천국의 현재적 실현과 미래의 완성의 나라를 동시에 말하는데, 이것은 결코 두 관계가 부자연스럽게, 부조화의 마찰이나 충돌이나 모순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 : 4:1-11

②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완성 7:21, 13:1-37, 16:18-19, 28, 24:1-51

 

2. 마가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1) 마가복음에서 나라는 19회, 하나님의 나라는 14회, 왕은 12회 사용된다. 왕의 12회 가운데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이 15:2, 9, 12, 등 6회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과 비교할 때, 마가복음에는 그 용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 있다. 천국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2) 마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이방인에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자,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충성되게 소개하고 전파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수신자로 인한 강조로 볼 수 있다.

 

3) 그리고 마태복음에 비해서 마가복음에 강조된 것은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종이라고 할 때, 이방인에게는 가볍게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 나갈 때, 이방인은 놀랄 것이다. 마가복음의 클라이맥스에 가면 보통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굉장한 종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종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간주된다. 물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도, 이 분은 과연 왕이시다 라는 것이 강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4)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특이하게 강조되었고, 그 나라를 세우실 주된 통치자가 예수님께서 왕으로 간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3) 누가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1) 누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현이 아주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말라기 이후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줄 수 없을 어두운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32, 11:20, 22:29-30, 12:32)

 

2) 또한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이기도 하다(=1:32-33, 22:29-30). 하나님의 통치는 동시에 예수님의 통치이다.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4:5-8, 22:24-27).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것과는 결코 합류할 수 없는 구별된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3)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실제를 말하고 있다(=7:18-23, 11:20, 17:21-22)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성을 21:5-38에서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1-24장까지가 독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누가복음은 완전히 종결 된 것은 아니며 사도행전 1-28장까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책의 제 1부, 제 2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누가복음 1장에서 사도행전 끝장을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2부에서는 다른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4) 공관복음에는 유대인을 의식해서 기록했든 이방인을 의식해서 기록했든, 공통으로 하나님의 나라, 통치, 다스리심,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아주 강조되었다. 즉 구조적으로 부분적으로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임재하신 인격적 임재로 하나님의 통치가 그 아들과 동시에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도록 미래적인 것까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을 계시하고 있다.

 

4) 요한복음과 생명(=영생)

1) 공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같이 넣어서 공동으로 취급할 수 없을 만큼 요한복음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강조점의 차이중의 하나는, 기록 목적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에는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 유의해서 꼼꼼히 읽어야 목적에 해당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다.“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목적이다”라고 짚을 수 있는 것이다.

 

2) 이 부분이 바로 20:30-31로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도록 하여, 생명(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이 세 가지 내용을 강조하고, 지금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이적(=표적, signs)들을 증거하고 있다.

 

3) 표적은 공관복음에서의 이적과 예수님의 행하신 행동, 특별히 구속사역과 관련된 행동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표적들을 엄선해서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표적, 세 번째 표적 등으로 계획적으로 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는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강조된 부분은,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측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백성, 주권, 통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의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본질적인 문제, 내용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의 영생이다.

 

4) 결국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2회 사용되고 있다(=3:3,5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18:36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내 나라(=왕국)”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 자신의 나라와 예수님의 통치를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용어 대신에 구성원의 본질적이고 내용적이고 자질적인 영생을 요한복음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영생(=생명)에도 현재성과 미래성이 나타난다. 3:36, 5:24-25, 4:35에 보면 메시야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현재적으로 소유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4:14, 7:37-39, 10:10, 20:22 등은 영생이 미래에 대망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공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주고 있는 현재성과 미래성의 밀접한 관계에서 볼 수 있다.

 

6) 요한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확실히 지적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어떤 적대 관계에 있음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상”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고 있다. 특별히 “이 세상”이 많이 나온다. 이 세상이라고 할 때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내용 가운데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반대하는 어떤 그룹,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이 영접하지 않고 적대하고 멀리하는 구조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을 영생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7)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강조의 차이가 있다. 즉 공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가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라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영생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이고 본질적이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굵은 선에서의 계시에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임을 우리가 확인했다. 우리가 그동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역시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중요한 주제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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