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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개념과 주일성수,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님아들 2023. 11. 10. 15:55

안식 개념과 주일성수, 어떻게 볼 것인가?               

 

“주일성수란 온종일 풍요로운 안식 누리는 것”

민성기 목사 / 한주교회 (글 쓸 당시)

 

 

오늘날 교회가 주일성수의 당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안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날(주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논쟁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실정 이다. 이에 신,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 개념과 관련해 신약 교회에서 어 떻게 주일성수를 할 것인가를 점검하고자 한다.

 

 

1. 온종일 주일성수에서 온전한 안식 개념 나타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1장 8항)와 예배모범에는 온 종일(24시간) 주일성수가 강조되어 있다. 특히 주일 외에 어떠한 특별한 절기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예배모범). 한편 특별한 절기를 거절하는 것과는 예외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공적인 엄숙한 금식과 공적인 감사 주일의 항목을 예외적인 형태로 선언하고 있다.

 

이런 공적 금식과 감사 주일은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하여 절기로 지킨다는 것보다는 어떤 절박한 상황, 비상적인 악행이나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 요구 될 때, 하나님의 섭리를 필요로 하는 특별한 때에 따라 목회자와 성도들이 정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반드시 정기적인 절기로 지켜야 할 필연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있다.

 

미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웨스트민스터의 표준문서에 따라 주일성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헌법(1788년 뉴욕과 필라델피아 대회 채택, 1915년판)에 명기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구조와는 다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 헌법에서는 제 1장 주일 성수에 대한 항목에서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제15장 1항과 2항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거절하고 예외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과 동일하게 공적 금식과 감사주일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금식과 감사주일과 관련된 지침을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제15장 3-8항).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지교회에 따라, 서로 다른 인접한 지교회들에 따라, 노회나 대회에 속한 지교회들에 따라, 총회의 모든 지교회들에 따라 그런 날을 정하여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3항). 이런 금식일과 감사절을 정하는 날은 각 상황에 따라 3항의 성격에 따라 그 자체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4항).

 

특히 다른 날들보다도 이런 금식일과 감사주일은 보다 더 엄숙하고 심중에 깊은 겸허함으로, 또한 평상시보다 더욱 큰 감사함으로 경솔함에 빠지지 않고 마음에 거룩한 기쁨을 가지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에 있어서도 그 상황의 시기에 맞는 기도, 시편송, 성경읽기, 설교 등으로 특별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5-8항).

 

주일 외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거절하고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것은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면 주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오후나 저녁 예배 그 후의 시간들은 자유롭게 스포츠, 오락, 여가 생활로 보내는 일 등을 허용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한 퓨리탄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 등 전 신학적 체계를 통해 안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안식에 대한 바른 이해와 주일성수를 위해서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과의 연속성 문제도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에 따라 정립된 도덕법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안식에 대한 이해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눌 수 없고 분리할 수 없는 실체에 따른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의 개념으로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 역사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여 신구약의 통일성을 없애는 일이 여러 방면에서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과 율법을 버렸다. 재세례파는 구약에 복음적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역시 율법을 버렸다. 소키누스주의는 구약이 신약보다 더 열등하다는 이유로 버렸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약을 이 세상의 축복만을 약속한 언약만으로 이해하였고, 루터 후기와 루터주의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두어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킴으로써 신구약의 통일성을 파괴하였다.

 

이미 성경 안에 율법만을 고수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 상관없다는 반율법주의자(Antinomianism)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를 향해 사도 바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복음)가 나타났으며(롬 3:21, 22, 28, 29),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함(롬 3:31; 8:4) 을 논증하여 그 통일성을 말하였다. 칼빈이래 개혁주의는 율법을 이해할 때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여 한쪽을 강조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form)’으로 ‘영적으로 율법은 복음과 동일하고’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율법의 그림자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칼빈이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라고 했을 때는 루터 후기나 루터주의의 율법의 제1효용(죄를 지적)과 제2효용(죄를 억제)을 넘어 중생된 이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규범으로써 율법의 제3효용(usus tertius legis)을 말한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칼빈의 이런 전 성경(tota scriptura),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주어진 자기계시이고 그 계시는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상급으로써 약속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핵심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과 의지에 기초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신구약 통일성을 기초로 하여 율법과 복음을 이해하였다.

 

이런 이해는 어거스틴의 입장에 따라 개혁교회에 하나의 공리화 된 내용으로 신구약 통일성에 있어 실체의 통일성이 위치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경륜적 통일성’보다는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성’이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지는 피조물과 관계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 의 역사는 언제나 동시에(simul unum)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하나요 동일하게 존재하신다.

 

그러나 그 자체로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가 볼 수 있는 피조물의 형체를 통해서 분리되어 계시될 수 있는데, 이때에도 삼위일체는 동시에(simul) 분리됨 없이 역사하신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증거이다. 또한 역사와 계시와 관련하여 피조물 자체와 형체를 통해서 분리되어 계시될 때도 시대에 대응하여 삼위 일체 자신의 경륜에 따라 구별될 뿐 분리되거나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 경륜과 신약 경륜의 구별은 항상 동시성(simul)의 개념 아래 통일적 경륜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차이는 신구약 성경의 저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의 실체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한 실체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경륜에 따른 은혜의 명료성(계시의 판명성)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일관적으로 ‘율법에서 죄의 용서는 육적이고 세속적이다’는 주장과 ‘믿음도 육적이고 세속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후에 맺으신 언약의 동질성과 차이성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언약에 있어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동질성)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차이성은 단순히 ‘경영의 방식에 있어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즉 경영의 차이란 다양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들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외형적 형식과 방식(modus)들을 바꾸신 것은 인간의 머리가 다양하고 변하기 때문이며, 이런 적응 형식들은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과잉 때문에 은혜의 명료성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경영 방식에 따라 구약은 교회의 유년기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훈련받은 것이고 신약은 청년기로 더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①율법은 문자적인 부르심이요 복음은 영적인 교리로 하나는 돌판에 다른 하나는 마음에 쓰신 것이며 ②구약은 사망과 정죄, 무효를 신약은 생명과 의, 길이 남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③신구약의 차이는 은혜의 부요성에 있어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구약백성들도 율법 안에 포함된 복음의 약속에 따라 하늘의 안식을 소망하였으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았고 성령의 지배로 선과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 결속되며 신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구원의 서정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법의 개념인 도덕법으로서 하나님의 안식(sabbath)에 대한 이해

 

세속사에서 일반적으로 도덕법을 입법이나 관습 등에 의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이나 그 이후 개혁주의자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요리문답)들에서 규정하고 있는 도덕법은 스콜라주의나 계몽주의나 인본주의에서 기초로 하는 그런 도덕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법 개념으로서 도덕법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칼빈은 율법을 해석하는 부분과 십계명을 해석하는 부분, 그리고 세상통치와 관련된 부분에서 도덕법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특히 율법을 도덕법(mores), 의식법(caeremonias), 형법(iudicia)으로 구별하면서 의식법과 재판법을 도덕법에 포함시켜야 할 여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덕법을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뜻에 따라 모든 족속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참되고도 영원한 의의 법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는 창조시 인간의 마음에 주어진 본성에 따른 법도 아니요 더욱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의 이성(본성, 양심)에 심어진 도덕법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트위스는 칼빈이 정의했던 도덕법보다 더 체계적인 이해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창조시, 사람의 마음에 주어진 의미에서의 도덕법이라기보다는 계시가 주어진 때로부터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법은 어느 것이나 도덕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원리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내에서 도덕법을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따른 그의 계시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모세의 율법(십계명)에 국한하여 도덕법을 제한시킬 수 없다. 따라서 트위스는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의식법, 형법, 도덕법이 시초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아벨의 제사든지, 가인의 살인죄에 대한 형벌, 노아에게 피를 먹지 말라고 명한 것, 아브라함에게 명했던 할례 등이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따라 계시된 법으로서 도덕법으로 보았다.

 

모세에게 주어졌던 율법은 칼빈이 이해했던 것처럼 그 시대 하나님의 경영방식에 따라 이스라엘을 유아기의 교회로서 훈련하셨던 것으로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으로 이미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영원한 도덕법으로 이해할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제 3효용은 이런 도덕법 아래 중생한 신자에게 있어 경건하고 바른 삶을 사는 규범으로서 위치하게 된다.

 

이런 도덕법에 대한 개념 아래 안식에 대한 이해는 한 날(6일 후 7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하여 6일 동안의 창조 후 창조의 완성 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안식을 말한다. 마치 안식일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여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무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트위스는 안식일 논쟁과 관련하여 6일 후 7일(sabbath Day)이 아니고 6일과는 구별되는 창조를 완성한 안식(sabbath)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일곱째날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즉각적으로 끝났음을 말하며 하나님이 “쉬셨다” 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시지도 아니하시며 휴식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시다. 타락한 인간은 이런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안식의 기쁨과 평강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창조 사역 후 완성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에게 앞으로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상징으로 남아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식하도록 하시기 까지는 아직 하나님의 큰 일이 남아 있음을 보며 영원한 안식의 소망을 하나 님께 두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중 4계명인 안식일 준수는 출 20:8-11과 신 5:12-15 에 언급되고 있는데,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 이미 만나 사건을 통해 6일째 되는 날은 다음 날 먹을 양식을 두 배로 주셨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에 대한 의미를 그들의 삶에 적응하셔서 보이셨다.

 

안식일을 위해 만나를 두 배로 거두게 함은 창조와 관련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배하도록 하라는 의미(출 20:8-11)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신 구속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를 경배하도록 하라는 의미(신 5:12-15)에서 서로 상호 통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안식을 상기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고 예표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식은 구약에 자신의 계시에 따라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선포하시고 드러내신 영원한 도덕법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금하거나 폐지하지 않는 이상 계속된다는 개념으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에 대한 이해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변경되어 지키는 근거와 관련하여 웨스트민 스터 총회 성직자중 윌리암 구지(William Gouge)는 그의 책 ‘주일의 거룩성’(The Sabbaths Sanctification) 제 43, 44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님의 날(주일)에 함께 모였다는 것의 성경적 근거를 들고 있다(요 20:19, 26; 행 2:1; 20:7; 고전 16:2). 특히 사도행전 20장 7절 이하 를 보면 안식 후 첫날(주일) 바울의 강론이 있었고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진 사건과 다시 계속된 바울의 강론을 말하며 24시간 온 종일 주일성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사도시대 때부터 주일을 온 종일(24시간) 성수하는 일이 성경의 증거라면 그 어떤 권위보다 명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은 어떤 점에서 변경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앞서 신구약 통일성에 대해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때로부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은 변함이 없다.

 

신구약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로서 히브리서의 역할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구약 신약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방식에 따라 구별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히브리서에서 증거(히 1:1-2:4; 4:12-13)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구약과 신약에 대한 통일성은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1-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하여 구약 전체 를 해석하며 그 실체에 있어 신약과 다르지 않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개혁주의자인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의 히브리서 주석(A Short Explanation of the Epistle of Paul to the Hebrewes,1635)에서 안식을 설명하기에 앞서 히브리서 3장 주석에서 실체에 있어 하나님의 집은 하나라고 하면서 그 집을 교회로 보았고, 율법 아래 하나님의 교회 와 복음 아래 하나님의 교회로 구분하면서 하나라고 하였다. 모든 신자들은 지금 그 집의 살아있는 돌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해석은 교회를 예정론에 입각하여 보이지 않는 성격에서 지어져 가는 돌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돌들로 집들이 완성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 후 안식하시고 쉬심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그의 히브리서 주석(4:8)에서 다윗이 언급한 안식은 구약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최종적인 안식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가나안 땅은 영적 상속의 모형(type)과 상징(symbol)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딕슨은 성경에는 세 가지 안식이 있다고 정의하면서 첫째, 하나님의 창조 후안식 둘째, 모형적으로 가나안 땅의 안식 셋째, 영적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안식을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다윗이 말하는 안식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진정한 안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다른 안식인 제 3의 안식을 염두에 둔 영적 안식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히 4:9.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특히 칼빈은 히 4:10의 주석에서 영원한 안식을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최고 복(summa hominum beatido)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inter illos et Deumsimilitudo) 그에게까지 이르는(cum ipso cohaereant)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칼빈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주시기 위함인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인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상급과 보상으로서 소개하신 내용(창 15:1)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안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초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의 의논에 따른 작정과 예정을 기반으로 그의 백성들(택한 자의 무리로서 교회)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이 땅의 시간 안에서 친히 이루시는 역사를 생각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실체로서 신구약의 통일성에 따라 변함 없이 기뻐하시는 뜻과 작정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계시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선택의 기초와 택자의 머리와 중보자로서 예정되셨고, 죄와 죽음까지도 수단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도록 하셨다.

 

 

 

5. 맺는말

 

개혁주의 신학에서 확인되는 신구약의 통일성은 계시의 주체와 언약의 주체를 인간론적으로 보지 않고 신론적 차원의 통일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서의 계시와 그 종결에 따른 기록된 계시로서의 성경은 오직 삼위하나님을 저자로 갖고 하나님의 동일한 지식을 그 내용으로 삼는 원리와 규범으로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을 이룬다.

 

이런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외적 사역들에 있어 위격적으로 나누거나 분리될 수 없이 한 실체로 통일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인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도 그 자체로서 진리인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성경의 자리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안식일과 관련된 논쟁들도 이런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을 어느 선에 두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5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새로운 복음을 지정하시고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실체는 변한 것이 없이 그 시대 방식에 따라 더 명료하게 해석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율법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아 해석하셨다는 점이다.

 

특히 안식일 논쟁과 관련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심”이라는 점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선택의 기초와 택자의 머리와 중보자로서 예정되어 항상 살아계신 분으로서 어제도, 지금도, 앞으로도 있으시다. 그런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율법(안식일 준수)을 중생된 신자들에게 제 3효용으로 철저하게 지켜야할 규범과 삶의 원리로서 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칼빈은 히브리서 4장 안식과 관련된 주석에서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 우리의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그 안식에 이르는데 따른 인간의 한계를 말함으로써 자기부정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안식으로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언제나 변함 없이 택자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식일의 주인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죄의 용서와 은혜의 차이가 다르고, 구약성도보다 신약의 성도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성경해석은 한 실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요성을 깎아 내리는 결과요,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에 앞장선 존 후커(John Hooker, 1495-1555)는 안식일 준수와 관련하여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로 땅의 노고를 견딜 수 있도록 사람과 짐승에게 주기적인 쉼을 준다는 것. 둘째로 사람이 스스로 게으르지 않고 세상의 노고로부터 쉬되, 하나님의 역사와 은택들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며 병든 자와 가난 한 자를 돌보도록 주신 것. 셋째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예표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내용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반영되는데 기초가 되었다. 주일 이외에 어떤 다른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것을 철저하게 거절하였던 순수한 퓨리탄들(non-conformist) 안에는 바른 안식에 대한 이해와 주일성수의 삶이 있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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