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적 교회관
엡 3:9-11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시작하는 말
‘성경신학적 교회관’이란 성경적인 바람직한 교회관을 뜻하는 것이며,
이러한 주제를 설정하게 된 동기는 교회의 본질이 왜곡되고 외적 현상만을 추구하며 기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는 현실 교회의 허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못된 교회관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채 양적 팽창과 함께 기업화, 정치화, 세속화되는 교회로 전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령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과도한 열심과 충성을 강요당하게 되고 진정 누려야 될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들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충분히 검증 된 바 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관은 교황의 절대적 권세에 모든 교회가 순복해야 되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분되는 ‘이층 교회관’을 뜻한다.
이것은 교황이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절대 주관자이며 구약의 제사장을 대리하여 교회를 관할하는 반면,
성도는 평민과 같이 ‘평신도’라 불리 우면서 일방적인 교회의 전통과 계율 그리고 지도층의 구상에 따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체제인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금의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마치 축복과 저주의 권한을 가지고 신권(神權)을 지닌 제사장 행세를 하고,
‘축복’이라는 미명 아래 성도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박탈하여 과도한 열심을 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올바른 교회관은 누구의 강요나 명령 그리고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명감에 의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신학적 교회관 정립은 올바른 진리를 계승하며 성도들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서 너무도 중요한 주제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회(έκκλησία)란 무엇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세워지며, 그 성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다.
일반적으로 보면 교회당(敎會堂)을 교회(έκκλησία)로 혼용(混用)하여 성도들의 연보나 독지가에 의해서 세워지는 건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란 보이는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설립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가 복음진리의 기초 위에 세워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 진리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인데,
예수께서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고백에 대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마16:18)
이것은 교회가 베드로의 신앙 고백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바 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짐이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신약의 구조적인 배열에서 나타나듯이 사복음서(마, 막, 눅, 요)가 ‘교회의 기초를 증거’하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사복음서의 내용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의해서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으며 이것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에 대해서 예수 자신과 제자들도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셨듯이 모든 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한 문장이나 특수한 사건만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의 역사서(창세기~에스더)는 역사섭리로 그리스도를 언약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서(욥기~아가)는 찬양으로 그리스도를 언약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전능성․신실성․주권성․영원성․자비성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서(이사야~말라기)는 예언으로 그리스도를 언약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일관되게 ‘언약’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약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둘째,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구약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하신 내용이다.
특히 사복음서는 예수 자신이 직접 성취하는 것인데,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언약된 선지직, 왕직, 제사직의 직임을 성취하심으로,
마가복음은 구약에서 언약된 하나님의 아들이 변화되는 신분을 성취하심으로,
누가복음은 구약에서 언약된 하나님 아들의 나라에 관한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언약된 하나님과 동등된 본성을 취하심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보혜사 성령의 행적에 의해서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가 복음으로 교회를 설립함으로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고,
서신서는 보혜사 성령의 교훈에 의해서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가 교회를 양육, 무장, 투쟁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성령의 예언에 의해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 성경은 일관된 ‘성취’ 사역(마태복음~사도행전)과 교훈(로마서~요한삼서) 그리고 예언(요한계시록)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약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현상적인 건물과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외형적인 규모나 교세의 크기에 따라서 교회의 진정성이 가려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씀대로 선포되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신앙으로 무장하여 지식에까지 새로워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와 연결된 지체이다.
교회의 구심점은 목사나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주인도 예배당 건축에 기여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단체마다 모임의 성격이 뚜렷하듯이 교회라는 집단 역시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과 이유 그리고 목적이 분명하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을 규정하면 ‘성도(聖徒)’라 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배우며 깨닫기 위해서 모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된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성을 갖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무리를 교회(έκκλησία)라 정의한다.
바울은 이 교회를 가리켜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교회의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자로서 같은 생명을 지닌 한 몸이며 많은 지체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체(肢體)란 하나의 생명과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교회(έκκλησία)란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기운(氣運)을 공급받아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명령이나 지배를 받아서도 안되며 특수한 계층에서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조화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체로서의 교회란 강자라고 자만할 수 없고 약자라고 소외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따라서 각각 자기의 일에 충실하다보면 그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이고 교회를 견고히 세우게 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이란 사랑의 짐을 지는 곳이다.
그 짐은 은혜의 감동에 따라 사명으로 감당하게 되기 때문에 억압이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각자의 신앙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자기에게 맞는 짐을 지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어떤 선한 명분과 목적이 있어도 강요하거나 억압해서 안 되는 것이며,
또한 누구든지 어떤 위협과 유혹 앞에서 굴복 당하거나 혹사당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란 머리와 신체의 관계로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며 주관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지체란 머리의 지령과 명령에 따라서 유기적이며 순조롭게 움직이는 것이지 다른 외부의 명령에 따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명령의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의 생각을 이해하고 인지(認知)한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생각이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이전에는 자기 중심적이며 욕심에 의한 생각만으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나면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며 생각도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범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진리체계를 갖게되어 만족과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명령의 주체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만사의 주관자이시며 주인이라는 것이다.
지체의 겸손은 주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주인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만사의 주관자가 아니다.
무엇 하나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이 비결을 터득하여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주관자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이 되어 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야고보도 주의 뜻이면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체는 주관자를 바로 알아야 의지하게되고 무모한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되며 염려하기보다도 주관자의 뜻을 바라보며 기다리면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나라를 의미한다.
교회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계시하는 것이며 천국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계시의 내용이 ‘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한 교회를 통해서 발전적으로 완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은 하나님의 백성과 통치 그리고 지정된 처소로 형성되며,
이에 대해 성경은 네 개의 과정으로 구분 지어 특성에 따라 증거 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에덴의 교회와 선민의 교회로 신약에서는 지상의 교회와 왕국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에덴의 교회란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아담에게 복을 주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게 하신 신령적이고 원형적인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선악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저주가 없던 에덴동산에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계시하는 것이다.
둘째, 선민의 교회란 이스라엘 백성들로 형성된 이스라엘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서 아담에게 언약하신 신령한 교회가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을 증거하기 위한 모형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세우신 삼대언약의 내용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약속했고,
하나님께서 지정한 처소인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선정한 유다 지파의 혈통을 따라서 나라를 세우시며 다스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계시하는 것이다.
셋째, 지상의 교회란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세우신 현금의 교회를 가리키며 선민의 교회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되어 세워진 지상의 교회이며,
나아가서 환란 가운데서 최후의 승리를 얻게될 영광된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계시하는 것이다.
넷째, 왕국의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세상권세를 심판하시고 승리하신 다음 천년동안 사단의 유혹이 없이 저주가 걷힌 상태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에덴 교회에 대한 신령한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이것은 타락 전 저주가 없는 에덴동산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하며,
변화된 몸과 부활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피조 세계에서의 영광의 절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근접하게 경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계시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교회란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는 방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현실의 지상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의 교회를 통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지상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며 심령의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교회의 관계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주어진 범사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추구하면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지상교회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적으로 계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성도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서 더욱 가치롭게 여겨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회의 의미를 초대교회 성도들은 너무도 절실하게 실감하며 살아왔었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고 환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나갔었다.
이처럼 교회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것이며, 장래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성경신학적 교회관이 성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삶의 가치와 목적을 가늠하는 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우게 하기 위한 피조 세계의 용도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피조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란 철저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생각을 깨닫고 닮아 가는 것으로서 지식에까지 새로워지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연구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교회의 표지는 전도에 주력하기 이전에 온 교회가 말씀을 확실하게 공부하는데 있다.
초대교회 때만 해도 날마다 밤늦게 까지 모여서 성경을 공부했으며,
사도들 역시 가는 곳마다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성경의 내용을 모르면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의 생각을 모르면 자기 욕심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두 마음의 충돌을 의미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에 급급하기보다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6:33)라 하셨으며,
바울 역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목적으로 호소하였다.
둘째,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린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지체 삼으신 이유는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평강이란 걱정과 근심 그리고 갈등이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만사의 주관자를 알고 그 분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 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란 의지의 대상을 찾은 자들이 그가 창조주요 심판자요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가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 그리고 위로를 받는 대상임을 아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가 근심과 염려 그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감동과 평강을 누리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교회일 것이다.
건전한 교회는 많은 봉사활동과 성과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에 평안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강림을 바란다.
교회는 미래의 소망이 분명하다.
즉 보장된 장래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나그네와 같이 흩어져 환란을 겪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며 단호하게 그리고 확신에 찬 논조로 말하고 있다.
교회는 불신자들과 같이 보이는 피조 세계의 영광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단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확인하고 배우는 곳일 뿐이며,
진정한 평가는 최후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전개되는 심판을 기점으로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명예와 권세를 누리지 못해도 절망하지 않으며,단지 시련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며 사는 것이라 증거하고 있다.
교회는 현재의 삶에도 가치를 부여하지만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고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란 인간의 계획과 방법으로 세워지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예정과 능력으로 세워지며 양육되는 것이다.
교회란 인간의 지식과 수단으로 발전되며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혜와 작정대로 자라나며 경영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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