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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회적 책임/박득훈

하나님아들 2023. 11. 7. 15:23

교회의 사회적 책임/박득훈               

 

김진호는 최근 펴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한국개신교회의 성공과 실패를 욕망의 사회학이라는 관점에서 흥미 있게 분석했습니다. 개신교회가 성공한 것은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미국주의, 반공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군부독재와 친화적 관계를 잘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미를 본 한국개신교회는 1987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등장한 시민들에게 거부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개신교회는 이미 퇴출된 과거에 아직도 얽매여 있는 낡아빠진 집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김진호는 신의 몰락을 봅니다.

 

그렇다고 신을 버린 시민들이 마냥 평화롭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IMF 외환위기와 함께 들이닥친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시민들을 경쟁절대주의와 승자독식으로 압박하면서 깊은 고통과 외로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들에겐 고통과 외로움을 분노로 폭발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에서 자신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모종의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뜻밖에 촛불집회에서 분노를 폭발할 공공의 출구와 더불어 그 분노를 받아주며 위로해줄 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김진호는 시민종교의 등장과 신의 귀환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들의 신 경험은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지적인 사유가 결여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함께 신을 경험한 공간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그냥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성찰이 없는 시민종교는 미래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을 목도하며 김진호는 한국개신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이제 교회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런데 ‘새 옷’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또 다시 시대에 편승하는 것, 대세를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대세를 비평하는 ‘다른 신앙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교회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참여와 책임의 가능성을 묻는 신학적 모색이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물론 현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대세에 편승해선 안 되고 ‘다른 신앙의 자리’를 펼쳐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엔 교회가 현대사회의 변화를 명확하게 읽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1987년 민주화체제가 대응할 능력이 없어 1997년 IMF 관리체제하에서 한국사회를 장악하게 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특징을 읽어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해서 교회가 구체적으로 감당해 나가야할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제시되기 시작한 경제민주화를 중심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할 것입니다.

 

I.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

 

교회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은 성경전체가 밝히 보여주는 바입니다. 하지만 여기선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명명한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마 5:13-16). 예수님이 상대하는 제자들은 단순히 각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명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세상의 소금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세상에 깊이 스며들어야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존재

 

김교신 선생은 산상수훈 강해에서 예수님은 기독자를 땅의 설탕이라 하지 않고 땅의 소금이라고 부른 데에 주목합니다. 설탕 역시 소금처럼 조미제와 방부제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런데 설탕은 독자적으로도 유혹적인 맛을 내기에 그 자체로 탐식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소금 한 입을 물고 견딜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은 오로지 다른 것에 스며들어가야만 조미제와 방부제로서의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세상에 깊이 스며들어가야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를 인식하고 실현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잘못된 전통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왕국 전통입니다. 원래 교회는 세상으로 스며들어가 그들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과 삶으로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 안으로 사람 끌어 모으는 데만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만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종교개혁이후에도 이러한 기독교왕국 전통은 충분히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둘째, 성(聖)과 속(俗)의 영역을 왜곡시켜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와 삶의 양식입니다. 마이클 프로스트가 전해주는 야콥이라는 한 랍비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어느 정도 금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환상을 통해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 데, 그녀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비극적으로 분리된 하나님의 영광(히브리어로 ‘셰키나’)을 상징하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현재 유배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부터 발목까지 검은 베일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겨우 드러난 그녀의 발은 오랜 동안의 힘겨운 여행으로 헐벗은 데다 먼지와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랍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나는 나를 잡으려 하는 사람들 때문에 죽을 만큼 지쳐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고문했기에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당신들[인간들]은 나를 유배상태에 있게 한 폭군들입니다. 당신들이 서로 적대할 때, 당신들은 나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서로 악을 꾀할 때, 당신들은 나를 고문하는 것입니다.……이런 일을 행한 당신들은 동료 인간을 유배 보내고 나도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 랍비 야콥, 당신은 종교적인 의식으로 나를 따르려고 하지만 사실은 점점 더 나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셰키나)를 사랑한다면 사람들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녀의 결론입니다.

 

내 이마가 천상의 광선을 발할 것이라고 꿈꾸지 마세요. 그 주위에 후광도 생각하지 마세요. 내 얼굴은 피조된 존재의 바로 그 얼굴입니다. 그리곤 자신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어버립니다. 거기엔 랍비의 한 이웃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 25:31-46에서 하신 말씀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 즉 가난에 시달려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 거할 집이 없어 이리 저리 떠도는 사람, 병이 들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 가난을 이겨보려다 범죄 하거나 빚을 갚지 못해 옥에 갇힌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이 곧 예수님을 돌 본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성과 속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이원론을 극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2) 세상을 맛나게 하며 부패를 방지하는 존재

 

앞서 밝힌 것처럼 소금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맛나게 하는 조미제, 다른 하나는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맛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주심으로서 결혼축제를 만끽하도록 도와주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 전형을 발견합니다(요 2:10).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막아내는 존재입니다. 5년 전 모 재벌 회장의 범죄사실을 특검이 가볍게 다룬 사건에 주목해 보면 세상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을 보면 정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냉혹한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1280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1199개의 차명계좌를 통해 무려 4조 5373억 원의 자금을 관리하면서 주식을 사고 팔아 남긴 차익 5643억 원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것입니다. 그밖에도 다른 범죄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검은 수사발표를 하면서 그를 구속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법의 적용, 집행은 보편성이 있어야 하며, 불합리한 차별은 용인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적용하여야 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합니다.

 

여기까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평등한 법적용이 그 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이 갖고 있는 개별적 특수성이나 시대적 상황 등 다른 요소는 전혀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특수성을 감안한 평등성의 원칙, 이른바 보편적 특수성의 입장에서 보면 앞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사건 피고인들의 범행이 중죄에 해당한다고 하여 본건 피고인들을 반드시 구속하여 재판해야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나 수려한 언어입니까? 그러나 이른바 보편적 특수성은 사회적 강자만을 위한 것 아닙니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조금만 실정법을 어겨도 즉각 체포되고 구속되지 않습니까? 큰 죄를 저지른 재벌은 나라 절기를 맞아 쉽게 사면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피치 못할 작은 범법행위를 한 사람들이 사면되는 경우를 얼마나 보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렇게 썩어가는 세상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그 부패가 중단될 때가지 도전하고 싸워야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다시 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재생불가입니다. 하여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힙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밟힘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교회가 짠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재판관이 2003년 교단장 선거를 위해 자기 교회 재정을 횡령한 죄에 대하여 실형을 내리며 그 목사에게 호소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돈이나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싸움의 대상을 만들어내서는 안되고 그런 곳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헌금의 많고 적음, 직분의 높고 낮음, 목사와의 친소, 신앙의 기간에 관계없이 모두 함께 똑같이 사랑을 나누는 그런 멋진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받아치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의 항의를 받아 세상이 공적으로 사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를 하면서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를 우리는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으로부터 밟힘을 받고 있는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옷을 찢으며 통회자복하고, 세상을 향해 머리 숙여 진실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2. 세상의 빛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데는 세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숨길 수 없는 존재

 

우선 교회는 언덕 위에 동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초대교회는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선한 목자를 발견하고 에게 몰려왔습니다(막 6:30-44). 초대교회의 친밀한 교제와 아름다운 나눔을 보고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행 2:43-47). 그런데 세상이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이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존재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올려놓듯이, 교회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빛이 항상 드러나 숨길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일은 매우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숨기려고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 합니다.

 

3) 빛의 역할은 착한 행실을 드러내는 것

 

예수님이 잘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의 구체적인 모습은 착한 행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뒤에서 의로운 행위를 할 때 은밀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마 6:1-18; 구제, 기도, 금식). 둘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교회의 착한 행실을 보도록 하되 그 동기가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6장에서 말하는 의로운 행위와 5장에서 말하는 ‘착한 행실’ 사이에 일정한 내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씀해주십니다.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은 누가 보더라도 아름답고 고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은 그와 달리 우리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하지 않으려는 어떤 행실들입니다.

 

착한 행실의 구체적 모습은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먼저 세상의 빛이 되셨는가를 살펴보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16절을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 있는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머무르신 사건은 바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마태는 말합니다. 이는 이사야 9:1-7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 본문을 보면 메시야가 멸시를 당하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 임하는 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9:2]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그리고 이어서 어둠에 빛이 임하는 것의 구체적 내용을 묘사합니다.

 

[사 9:3-5] (3) “하나님, 주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4) 주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5)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메시아가 한 아기로 태어나서 성취하게 될 하나님나라의 정의요 평화라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사 9:6-7] (6)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펼쳐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 되신 핵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스티븐 모트는 성경에서 ‘빛’은 ‘어둠과 대항에서 싸우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사야 9:2-7에 주목하면서 빛의 역할은 바로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는 것이요 정의를 세우는 것’임을 역설하였습니다. 여기서 힘없는 사람들을 내리 누르는 멍에,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통나무 그리고 압제자의 몽둥이는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권력과 그를 정당화해주는 정치경제 체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두움입니다. 그 어두움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에 입각하여 그런 억압적 권력구조를 변혁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세상의 빛의 역할의 전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 되려면 이런 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8:6-7에 기록된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사 58:6-7]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신 금식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 9:2-7의 맥락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전자를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으로 후자를 사회적 봉사(social service)로 정의내립니다. 사회적 행동은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적 봉사에는 긍정적이지만 사회적 행동에는 매우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봉사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적 행동은 영적으로 해석하길 좋아합니다. 즉 죄와 죽음 그리고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 자체는 맞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사회적 행동을 부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사회적 억압체제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죄와 죽음 그리고 사단의 권세입니다. 그 권세도 깨뜨리시기 위하여 주님은 오셨고 하나님나라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회적 봉사도 하셨지만 사회적 행동도 종종 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당시의 억압적인 안식일 체제에 대한 도전이요, 성전정화사건입니다. 당시 안식일과 성전예배는 사실상 유대교 지도층 들이 백성들을 지배하고 갈취하는 구조요 제도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보다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이 실질적으로 백성들을 직접적으로 억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권력체계에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당시의 기존 질서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성전정화사건의 구약적 배경은 예레미야 7:1-11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웃 간의 정의 즉 사회정의를 짓밟는 한 성전예배와 신앙고백은 다 헛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레미야나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것이지 일반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의 공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런가하면 다니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정의를 행해야만 나라가 존속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단 4:27). 더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가 거기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분명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착한 행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세력과 제도에 도전하고 항의하며 좀 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에 가까워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 때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임할 것입니다(계 21:1-2). 이는 오늘의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세상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고 새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지만 현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책임인 것과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 모두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몸으로 세상가운데서 행하는 주의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고전 15:58).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오늘 세상가운데서 몸으로 하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할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윌버포스 같은 영국의 기독국회의원은 노예매매 철폐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삶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만일 노예매매 철폐라는 단일 이슈에 올인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영국의 수상이 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상이 되기보다는 노예매매를 금지시키고 결국 노예제도를 폐기하는데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 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하여 별로 감동을 받지 않는 듯합니다. 바울은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안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바울에 대한 성급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노예와 자유인이 주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요 그들은 서로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가져야한다는 혁명적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엡 6:5-9). 다만 그런 확신을 당시 노예제도폐지운동으로까지 전개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러한 사회적 행동이 하나님나라 정신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일단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만이라도 당시의 노예제도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학자인 리처드 롱게네커는 바울이 비록 직접적으로 노예 제도 폐지를 주창하지는 않았지만 폭발력이 잠재되어 있는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출발했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바울의 급진적인 사회사상은 적절한 토양과 환경 위에 뿌려져 자랄 수 있도록 준비된 씨알과 같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제2의 윌버포스들과 그의 동지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II. 자본주의사회 읽어내기

 

앞서 모두에서 밝힌 것처럼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려면 우선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사회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우선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낸 다음 신학적으로 읽고자 합니다.

 

1.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내기

 

조선일보는 작년에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에 착안하여 ‘자본주의 4.0 시대를 열자’는 시리즈를 1-2부로 나눠 연재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 4.0은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합니다. 그 골자는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과 시장의 원리를 유지하되 기업의 사회적 연대의식, 즉 사회적 책임을 중시함으로써 경제 생태계 곳곳이 고루 혜택을 보는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복지를 달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4.0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따뜻한 자본주의’ 혹은 ‘복지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를 선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와 IMF관리체제를 겪으면서 확실하게 자본주의 3.0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선국면에서 자본주의 4.0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확실한 경제민주화를 통해 좀 더 급진적이고 새로운 정치경제체제를 실험할 것인지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의 원초적 흐름은 자본주의 1.0과 3.0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경제를 자본과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이 주도하도록 가만 놔둘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절대적 신념이 있습니다. 경제정의나 복지 혹은 동반성장의 이름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협하거나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본주의는 칼 폴라니가 말한 시장사회, 즉 자본 주도하의 시장이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 영역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자본주의 2.0이나 4.0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과 시장이 어느 정도 통제받게 된다고 해서 원초적인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자본과 시장엔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려는 내재된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여론에 밀려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도 기회만 되면 다시 전면에 나섭니다. 자본을 사회적 가치 아래 항상 묶어두려면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둘째, 자본과 시장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경제체제가 세워진다 해도 그것이 역사의 종착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품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나가야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두 입장을 단순화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간단히 소개한 후 그리스도인은 후자를 상대적으로 더 선호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1) 긍정적인 입장

 

주류경제학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자본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둘로 나뉠 수 있는데 한 그룹은 민주적 자본주의 혹은 최근에는 공동체 자본주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그룹은 실제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시장체제 혹은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라는 개념자체를 아예 폐기시켜버리려고 합니다.

 

한편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은 자본주의의 장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변호하고 강조합니다. 이들은 슘페터가 말한 이른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택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합니다. 즉 마가렛 대처가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대중화했듯이 사회 및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사회는 그 실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석의 출발점엔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개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개인은 시장의 신호인 가격을 통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뿐인데 이러한 개인의 행동이 합해지면서 놀랍게도 공공의 이익이 극대화됩니다. ‘정보 처리 기계인 시장’만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합리성을 제공해주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야 말로 가난한 자들을 가난해서 해방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사회경제체제라고 확신 있게 주장합니다.

 

2) 비판적인 입장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롯한 급진주의 경제학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합니다. 우선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 대신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쓰려는 경향성에 대하여 유작인 『경제의 진실』이라는 책에서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상인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그 표현은 경제체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힘의 주체가 다양한 형태의 부와 자본이라는 점을 명시합니다. 그러나 시장체제라는 새로운 표현은 시장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경제체제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본의 권력을 은폐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시장은 마치 소비자들이 제조회사와 자본가들을 충분히 종속시킬 수 있는, 즉 경제민주주의가 실현되어질 수 있는 교환의 장으로 미화됩니다. 하여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를 시장체제로 명명하는 것은 자본권력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에 불과하다고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장체제란 표현은 …… 자본가 권력의 불미스러운 역사를 감추고 마르크스 엥겔스의 유산과 그들의 열렬하고 뛰어난 추종자들에게서 경제체제를 보호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본주의 대신 시장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무죄일 수 없는 사기행위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급진주의적 경제학을 선호하는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로 하여금 역동성을 갖게 만드는 기저에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경제학은 크게 나누어 다음의 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① 노동가치설 ② 자본주의 발전론 혹은 착취론(잉여가치설) ③ 자본주의 위기론(이윤율 감소의 법칙, 경기순환의 가중되는 혹독성). 이중에 자본주의 발전론 혹은 착취론을 마르크스의 전통적인 노동가치설이나 잉여가치설과 관계없이 새로운 각도에서 강력히 방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를 주도하는 그룹은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코헨, 부케넌과 로이머 등입니다. 먼저 코헨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동자만이 생산품을 창조해 낸 유일한 당사자이다.

2. 자본가는 그 생산품의 가치의 얼마를 취득한다.

3. 노동자는 자신이 창조한 것의 총 가치보다 적은 분량을 취득한다.

4.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조해 낸 것의 가치의 얼마를 취득한다.

5.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 착취된다.

 

코헨은 노동자가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치가 있는 생산품을 창조한다고 봅니다. 자본가는 경영에 참여할 때 그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자본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윤을 받는 것은, 생산품을 창조해 내는 노동의 과정에 참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착취라는 것입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자의 성격이 있는 이윤의 부분을 위험부담, 기회비용, 시간의 대여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도 자본가들이 노동자에 비해서 왜 그렇게 많은 부분을 취득해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협상력에 의한 결정입니다. 부케넌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자신의 노동의 산물로부터 또한 노동행위 자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착취론을 펼쳐갑니다.

 

한편 로이머는 ‘탈퇴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착취론을 정립합니다.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성립되면 S는 자본주의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S가 사회의 양도 가능한 자산(즉, 생산된 재화와 생산되지 않는 재화) 중 1인당 할당분과 자신의 노동과 기술을 가지고 사회에서 탈퇴한다면, S는 (수입과 여가 면에서) 현재의 배분상태 보다 더 이익을 얻게 된다.

2. S‘가 같은 조건으로 탈퇴하면 S´는 (수입과 여가 면에서) 현재보다 손해를 보게 된다.

3. S가 자신의 자질(자신의 일인당 할당 분이 아님)을 가지고 사회에서 탈퇴하면 S‘는 현재보다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로이머의 착취론이 성립되려면 S가 탈퇴해서 새롭게 참여할 대안적 체제가 역사적으로 실현가능하다는 점이 설득력 있게 논증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3) 비판적 입장을 상대적으로 선호해야 할 이유

 

주류경제학과 급진적 경제학의 과학적 우열을 가리는 것은 결코 중립적인 과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 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윤리적 선택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경제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적 개념과 전제가 달라집니다.

예컨대 주류경제학은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인에게서 출발하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모든 경제현상을 설명하고 시장경제의 효율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류경제학은 화폐와 상품(노동력)이라는 사물에 의해 매개되고 은폐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지배-예속 관계를 외면합니다. 이는 의도되었던 안 되었던 결과적으로 자본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급진주의 경제학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 그리고 노동의 중요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상품의 생산과 교환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사회적으로 분석한 결과 자본의 노동착취론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의 ‘총량적 효율성’을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급진주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주류경제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경제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경제정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급진적 경제학을 상대적으로 선호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분석하는 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무게중심을 그들에게 더 기울여 그들의 소리를 더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총량적 효율성’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적 분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대체적으로 승리가 보장되어 있거나, 자기도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규범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는 일종의 지배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2. 신학적으로 읽어내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지고선이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이 지고선을 추구하는데 결정적인 방해물이 됩니다. 첫째는 전폭적인 하나님께 도전하는 맘몬숭배고, 둘째는 이웃을 억압하는 경쟁절대주의와 양극화 현상입니다.

 

1) 맘몬숭배: 하나님에 대한 도전

 

잘 알려진 대로 베버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보완하는 면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주요 원동력의 하나로 자본주의 정신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정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인간은 돈을 벌고 취득하는 일에 지배당한다. 이는 그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경제적 취득은 더 이상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이를 베버는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명명합니다. 부를 축적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을 덕목으로 간주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는 훈련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리처드 토니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신이 분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돈 버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은 유지되었지만 검소한 삶을 추구하는 훈련은 대체적으로 포기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의 축적에 대한 열망과 집착에 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역사적으로 노동자 계급과 일정 정도 타협하여 다양한 복지정책을 수용하곤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일정한 수준의 중산층이 유지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복지정책이 벽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자본축적의 위기가 다시 도래하면 노골적인 자본주의가 다시 부활합니다. 그것이 바로 1970년도 중반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지구화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총체적 부의 극대화, 그리고 소수에게 집중된 부의 축적을 절대화합니다. 그 외의 가치와 이상은 억압합니다. 그 순간 자본주의는 맘몬숭배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더 작은 선을 지고선의 자리로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허경회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맘몬숭배를 실로 예리하고 적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이다. 우리들 현대인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顯在)하는 신이다. 우리들은 ‘이성 잃은 경제 이성’으로 유일하게 현재하는 신, 맘몬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하는 거룩한 맘몬의 성도(聖徒)들이다. 우리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인 노동을 스스로 쥐어짜 내며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반색하며 우리에게 ‘마조히스트(masochist)의 자학적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다른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며 나의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우리에게 기꺼이 ‘샤일록(Shylock)의 냉혹한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맘몬에게 우리의 건강과 우리 후손의 멸종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종식을 번제물로 바치며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우리에게 흔쾌히 ‘학살자(slaughterer)의 잔혹한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테리 이글턴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경과 신학의 용어로 옹호해 왔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행태와 거기에 내재된 가치관과 신조들은 실질적으로 신을 부정합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신학적 사고가 불가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성취와 충족이 패키지로 거래되고 욕망이 관리되며, 정치마저 경영화되고 소비자중심경제가 지배하는 깊이 없는 사회에서는 신학적인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가능성조차 거의 없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심오한 정치적, 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영적인 향수 달래기에, 아니면 무가치한 세계로부터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데에나 이용되지 않겠는가.

 

하이에크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글턴의 진단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이에크는 사회윤리의 핵심적 주제인 사회정의는 신기루같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적 최저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정의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폭동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위한 편의의 문제라고 잘라 말합니다. 요즘 조선일보가 자본주의 4.0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사회정의가 신기루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돌고 돌아 항상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건 자본주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무너져선 안 되는, 최상의 정치경제 체제라는 주관적 신념입니다. 하지만 그는 왜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안 되는지, 정치철학적으로 논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가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 있다면 자본주의와 사회정의는 공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정의조차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질적으로 맘몬숭배의 기초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는 두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경쟁절대주의요 다른 하나는 양극화현상입니다.

 

2)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 이웃에 대한 억압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는 이웃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진정한 이웃사랑에 대한 부정입니다.

 

① 경쟁절대주의

 

맘몬숭배는 자연스럽게 경쟁절대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부의 축적을 절대적 목표로 삼는 한 타자와의 절대적 경쟁은 항상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로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제한된 경쟁, 건전한 경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맞는 일이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허나 그것이 경쟁절대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는 인간본성의 다른 측면 즉 관계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철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러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정, 시민사회내의 다양한 집단 즉 소위 ‘부분적 공동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냉혹한 경쟁은 시장에서만 벌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시장의 경쟁논리가 현대사회 구석구석에 얼마나 넓게 그리고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가를 애써 외면하는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우쯔바르트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지구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경쟁논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널리 그리고 아주 깊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학교, 스포츠기관, 심지어는 병원까지 시장의 경쟁논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경쟁원리는 가히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기업은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정보공학을 최대한 활용하여 각종 미디어와 통신망에 연결된 인간의 마음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다양한 상품과 관련된 정보홍수에 노출되어 진정한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행복한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새로운 희소성이 인위적으로 창출됩니다.

 

문제는 경쟁논리에 철저히 맹종하는 시장은 그 희소성이 충족되도록 세계자원을 동원하는 반면 세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된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일, 즉 식량과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데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정부나 구호단체들에게 넘겨집니다. 정부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 그나마 다행이지만 구호단체를 통해 도움을 받을 경우 수혜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기 일쑤입니다.

 

② 사회적 양극화

 

각자가 자신의 부의 축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시장의 절대적 경쟁에 뛰어 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발생합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사회의 공동체성을 심각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절대적 지지자들은 소위 낙수(落水)이론(trickle-down theory), 즉 상층부의 부자들에게 부를 집중시켜주면 흘러 넘쳐 하층부의 가난한 자들에게 까지 혜택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러한 비판을 피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서구의 사회복지국가 건설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노동자들 그리고 그와 연대한 이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의 산물로서 얻어진 사회적 대타협의 결과일 뿐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꽃 핀 나라일수록 예외 없이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미국의 경우 수많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저하되고 극빈층은 증대되었습니다. 소위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 직접 목도하고 있는 바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그 존엄성과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신앙이 요청하는 이웃사랑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III. 교회의 사회적 책임: 경제민주화를 중심으로

 

지난 17대 대통령선거에서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슬로건은 ‘줄푸세 타고 747로’였습니다. 줄푸세는 박근혜 의원이 747은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가 각각 내세운 것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세금은 줄이고, 간섭과 규제는 풀고, 법치주의를 세워 매년 7% 경제성장, 4만 불 일인당 국민소득, 세계 7위 경제를 이룩하자’는 뜻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전형적 슬로건입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 18대 대선엔 전혀 다른 화두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른 바 경제민주화입니다. 이는 지난 5년 동안 경제성장을 통한 낙수효과가 허구라는 점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던 미국 그리고 미국을 부지런히 뒤 쫓았던 한국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에 해당하는 부유층은 엄청난 부의 축적을 누리는 반면 나머지 99%는 아무런 혜택을 못 보거나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대선후보들은 너도 나도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경제민주화는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신과 가치를 이제는 정치영역 뿐 아니라 경제영역에서도 실현해 가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우선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하고 교회가 경제민주화를 지지해야 하는 신앙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경제민주화

 

1) 경제민주화의 헌법적 배경과 그 의미

 

흔히 헌법 제 119조 2항을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합니다. 1항과 함께 봐야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헌법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87년 개헌 시 확정된 것입니다. 이 조항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도 해석의 차이가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보수성향의 학자들은 1항을 원칙으로 2항을 부수적 혹은 보완적 성격의 조항으로 보고 2항에 근거해서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는 것을 견강부회 내지는 헌법해석의 남용이라며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런가하면 아예 1항은 계획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영역을 민주화의 이름으로 규제하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공정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시장경제와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평등을 전제로 하는 민주화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후자가 보다 정직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헌법 119조 1항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활동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성격을 띤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쟁에 따른 결과에 순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불평등으로 나아가는 반면,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상충하는 경향성을 갖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충할 때 어떤 지점에서 균형 상태를 이룰 것인가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 2항은 절묘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항은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허용규정이지 ‘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하는 것은 국가의 판단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가의 판단과 의지는 결국 언론과 학계의 주장, 국민의 여론, 다양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정당정치의 향방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이는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2항은 현실정치의 판도에 따라 전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매우 강력하게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제 2항이 MB정권 초·중기엔 있는지도 모르게 파묻혀 있다가 후기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됩니다. 초·중기에는 MB정권의 신자유주의 친기업적 경제정책이 강하게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민주화라는 화두가 등장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미국금융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 친기업적 정책에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도 적당히 규제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살펴보겠지만 한미FTA가 적극 추진되는 과정에서 반대론자들이 한미FTA는 헌법 119조 2항을 무력화함으로써 한국경제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매우 높다고 주장하면서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경제민주화 조항의 기본정신과 의미 그리고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기본정신은 민주주의 가치는 정치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영역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국가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일정한 목적 내에서 경제를 규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은 3가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첫째,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 그리고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국가복지를 의미합니다. 둘째,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시장만능주의와 자본권력의 절대화에 대한 견제입니다. 셋째,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경제주체란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자본과 노동 그리고 소비자와 지역사회 등을 의미합니다. 이들 간의 조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해소함으로서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헌법 119조가 지향하고 허용하는 정치경제체제를 무엇이라고 부를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독일식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자는 민주적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오늘의 미국정치경제제체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현행 헌법이 매우 진보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 전 헌법은 더 구체적으로 진보적이었다는 점입니다.

 

1948년 제헌헌법 제 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의 3공화국 헌법 111조는 1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2항에서는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의무규정은 아니지만 ‘한다,’는 ‘할 수 있다’보다 강한 표현입니다. 1980년의 5공화국 헌법은 3공화국의 조항 뒤에 ‘독과점의 폐단은 적절히 규제·조정한다.’를 제 3항으로 추가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현행헌법 119조 2항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정신과 의미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할 것입니다.

 

2) 경제민주화 실현의 길

 

그 점에서 유종일 교수는 『경제 119』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헌법 119조 2항에 담긴 정신을 실현하는 길로 공정경쟁, 참여경제 그리고 분배정의를 제시합니다.

 

공정경쟁

 

공정경쟁이란 누구나 시장에서 유의미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공정한 시장질서의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재벌개혁이 필요합니다.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이라도 법의 엄중하고 평등한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경제적 합리성과 무관한 재벌총수의 전제적 지배체제를 해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지주회사 규제를 강화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감몰아주기를 근절하고 중소기업을 일정하게 보호해야 합니다. 둘째, 노동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떤 형태의 노동자도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확고히 세워야 합니다.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강화해 사용자와 협상력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부당한 정리해고 방지와 실업자 생활안전망 확보가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융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부당한 경제력집중 방지를 위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강화해야 합니다. 아울러 독립적 금융감독과 금융소비자보호의 강화와 서민금융의 정비와 활성화가 필요합니다.

 

참여경제

 

참여경제란 주주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이른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더욱 확장한 개념입니다. 이는 주주뿐만 아니라 종업원 즉 노동자, 소비자,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관점이 기업의사결정에 반영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 그리고 ‘경제주체간의 조화’와 직결됩니다. 이렇게 경제영역에 민주적 참여를 확대하려면 첫째, 노동자의 경영 참가를 허용해야 한다. 둘째, 비자본주의적 기업 형태라 할 수 있는 협동조합, 노동자소유기업, 사회적 기업들이 활발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셋째, 경제정책 입안과정이 민주적으로 진행되도록 행정부의 주도성을 약화하고 입법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합니다. 유종일 교수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집단적 운동과 소리를 억압하는 부당한 법들을 철폐함으로써 여론이 공정하게 형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분배정의

 

분배정의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잠재력 계발과 자아실현에 필요한 여건을 공평하게 제공하고 사회정의의 요구에 따라 사후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와 조세정의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 유지’와 ‘시장의 지배 방지’와 연결됩니다.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시장의 규칙만 준수되면 출발점의 상이함이나 결과적 불평등은 사회윤리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출발점을 최대한 동일하게 만들려고 한다든가 결과적 불평등을 재분배를 통해 교정하려는 것은 시장을 교란해 결국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이러한 시장의 절대적 지배에 맞서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분배정의 실현을 위해선 가장 우선적으로 무상보육과 의무교육 확대, 학생선발제도의 개혁을 통해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시혜적 복지가 아닌 모든 국민의 권리로서의 복지 즉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조세정의의 확립이 시급합니다. 특히 고소득층의 음성·탈루 소득을 없애고, 세무조사를 강화하고, 일부 고소득층을 위한 불합리한 비과세, 감면제도를 정비하고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을 일정하게 올리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2. 경제민주화를 지지해야할 신앙적 근거: 정의와 공의

 

물론 성경에는 경제민주화, 공정경쟁, 참여경제, 분배정의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역사와 가치 혹은 사상을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해줍니다. 성경적 패러다임의 핵심엔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물같이, 공의(쩨다카)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암 5:24).

 

한글번역 성경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는 각각 정의, 공의, 의, 공도, 공평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이 됩니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기도 하고 서로 바뀌기도 합니다. 여기선 편의상 미쉬파트는 정의로 쩨다카는 공의로 번역하기로 합니다. 정의 즉 미쉬파트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등장하는 데, 공의 즉 쩨다카보다 더 법정 용어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뜻은 법정에서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레 24:22] 이 법(미쉬파트)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사는 외국 사람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정의란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동일한 기준으로 재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의는 소송의 전 과정과 최종결과(선고와 집행), 판례법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는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의 법적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 5:28]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미쉬파트)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쉬파트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거의 어김없이 당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들이었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과부, 고아, 나그네(이주노동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즉 이들의 미쉬파트라는 표현엔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에 맞서 이들의 권리를 변호해야한다는 당위가 담겨 있습니다. 미쉬파트는 단순히 평가의 기준이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합니다.

 

공의 즉 쩨다카는 ‘바른 관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 어근을 살펴보면 ‘바름’ 즉 의당 그래야 할 바를 온전히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쩨다카란 알렉 모티어가 이사야서를 주석하면서 잘 설명했듯이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삶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계들을 바르게 하는 데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쩨다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공의 혹은 의를 개인의 사적 윤리적 차원에 국한해서 이해합니다. 성적 순결, 충실한 기도와 성경공부 등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공의 혹은 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갖게 되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공평, 너그러움, 형평에 따라 맺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쩨다카)는 한 쌍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서로 약간 구별되는 의미를 갖고 있는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한 개의 복합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수사법을 중언법(hendiadys)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에 의하면 정의(미쉬파트)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공의(쩨다카)에 부합되도록 해당 상황에서 행해야 할 바입니다. 하여 라이트는 정의와 공의를 아우르는 가장 가까운 단어로 ‘사회정의’를 듭니다. 그러나 라이트가 경계한 것처럼 성경적 정의와 공의는 사회정의에 대한 현대적 이해와는 달리 단지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는 개념들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행하는 구체적인 일들’이라는 점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에 따라 구약 율법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다양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임금체불 금지, 전당잡은 옷 해지기전 돌려주기, 칠 년 단위의 빚 탕감, 사회적 약자들의 식량에 대한 권리, 안식년 노예해방, 희년 토지재분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시 33:5] 주님은 정의(쩨다카)와 공의(미쉬파트)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

 

[시 97:1-2] 1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 정의(쩨다카)와 공평(미쉬파트)이 그 왕좌의 기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것을 흐르는 물에 비유했을까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은혜로운 노래꾼이자 시인인 홍순관님은 「평평한 물」이라는 단상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물은 서로 평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평이 기울면 다 그리로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물이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다 평평해지려고 가는 길입니다./ 흐르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머무는 것도 평평하기 위해서지요./ 평평하여질 때 물은 비로소 그 길을 멈춥니다./ 그러나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서지요. 조금이라도/ 평평함이 깨어지면 곧 떠나고 맙니다.// 물은 평편(平便)하려고 평평(平平)합니다.

 

‘정의와 공의’ 그리고 ‘물과 강’의 공통점은 평등을 향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해 양자 간의 평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가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 차이에 모든 차별대우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정의로운 상태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갈 3: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도 인종, 빈부나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해서 차별대우를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단순히 인격적인 존중을 의미하는 내면적인 혹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모든 면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존중을 의미합니다. 그 총체적 의미는 야고보가 약 2:8에서 잘 말씀한 것처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하나님의 황금률 즉 최고의 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삶의 모든 면에서 내가 나에게 주고 싶은 최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자신이 좋은 교육환경을 누리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누리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내가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똑같이 누리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물론 취향이나 은사에 따라 받고 싶은 교육의 내용이나 살고 싶은 집의 디자인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의 질적 수준은 같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사회적 복지의 질적 수준이 다른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후 8:13-15] 13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14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15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평형’으로 번역된 이소테스란 헬라어는 동일, 공평, 평등(equality)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평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겐 이웃의 필요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똑 같은 행위를 바울은 정의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고후 9:9-11] 9 이것은 성경 말씀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로우심이 영원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9절은 시편 112: 9를 인용한 것인데 의로우심은 히브리어로 쩨다카이고 헬라어론 디카이수네로 되어 있습니다. 10절의 의 역시 디카이수네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정의로 이해함으로써 구약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평등과 정의가 결국 같은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정의가 요청하는 평등을 이야기 할 때 일정한 한계를 두길 좋아합니다. 음식, 옷, 주거 그리고 교육 같은 기본적 필요를 누구나 채울 수 있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에 머뭅니다. 그 이상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것은 정의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시혜의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최고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시혜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빈부격차의 해소, 상대적 빈곤의 해소를 정의가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의와 평등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성과 세상에서의 현실성 사이에서 정의와 평등의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의 정의론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발전시켜나간다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체성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정의가 요청할 수 있는 평등의 한계점에 대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지면상 롤즈의 정의론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결과만 간단히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시민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모든 구성원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2. 민주적 참여를 확보하기 위해 평등한 기본권과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3. 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본인이 속해 있는 기관 내의 경제적 결정과정에 참여 할 수 있는 균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4. 사회의 모든 조직체의 구조가 공공협력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5. 사회적, 경제적 불균등은 다음의 조건하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첫째, 그 불균등이 가장 불리 한 입장에 있는 계층에게 최대의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정당한 저축의 원칙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 불균등은 가장 불리한 입장에 있는 계층의 자기 존중을 심각히 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상의 정의론에 입각하여 보면 정의가 요구하는 모든 시민의 경제적 평등에는 6단계 혹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앞서 간단히 설명한 성경적 정의에 잘 합치합니다. 둘째, 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년에 빚을 탕감해 주는 것(신15:1-3), 특히 희년에 땅을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레25:8-13) 등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세대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좋은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가장 불리한 계층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마 25:31-46; 렘22:16). 그러므로 프레스톤이 주장한 것처럼 ‘기독인에게 있어서 거증의 책임은 불평등에 있습니다.’ 넷째, 경제활동을 하는 조직 내에서 경제적 결정과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다섯째, 경제활동을 통해 특정 계층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익이 고르게 충족될 수 있도록 사회구조와 제도를 형성해 갈 권리가 있습니다. 여섯째, 가장 불리한 계층의 자기 존중감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소득이 증가한다고 해도 불평등이 너무 심화되면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추구해야할 정의와 공의는 경제민주화에 담겨 있는 공정경쟁, 참여경제, 분배정의와 친화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려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각 대선후보가 내 놓는 구체적 정책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그 중 누구의 것이 경제민주화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성 면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분별해서 지지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맺음말

 

한국교회는 지금 중요한 기로점에 서있습니다. 쇠퇴와 멸망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돌이켜 갱신과 회복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그 핵심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정체를 사회과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흐름은 교회가 깨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한국교회가 평등을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가슴에 품고 경제민주화의 길을 힘차게 걸어감으로써 그 사회적 책임의 중요한 한 부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