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의 저작권
1790년대에 초연신론(혹은 理神論)의 승리로 시작하여 19세기에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을 거쳐가면서 모세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판결들이 내려졌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학자들이 오경에 있는 옛 구절들 중 몇 가닥의 실마리들을 모세의 것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나, 기록된 현대의 오경에 대해서는 그 전부가 포로 후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모세 저작권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에 들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이미 1800년대부터 기정화된 사실이며 문서설 이론가들이 그 때부터 모세를 구전의 문맹자로 몰아붙여 버렸다.
앞의 두 장(6,7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벨하우젠의 접근법이 그 시초부터 어떤 약점과 오류를 안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벨하우젠 이론의 약점과 오류
① 문서설은 미묘한 순환논법으로 특징지어졌다. 즉, 그것은 결론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다.
이 전제는 물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서양 지성인들의 신조였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것은 성경 안에 담긴 모든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과 혹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 항상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설명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② 벨하우젠 이론은 텍스트 자체의 증거 위에 서 있다고 단언하면서도 텍스트 자체의 증거가 그 이론에 상반되면 곧
회피해 버리고 만다. 예를 들자면, 문서설주의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구약성경의 역사책들은 포로 후기까지 P의 규례나 기록된 모세의 법전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P의 규례들에 대한 수많은 구절들과 언급들을 제시하면, “이 모든 언급들은 포로 후에
이 책들을 재구성한 제사장 계의 서기관들에 의해 후에 삽입된 것이다.”라도 대답한다.
즉, 그 이론을 입증하는데 사용된 증거뭉치들이 그 이론과 상반될 때는 다 거부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이론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가정된 바로 그 자료에 의해 부인될 때 즉시 편집자, 혹은 삽입자 등의 고장 발견 수리 팀에게 전화를 하여 구호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회피전술을 가지고는 그 결과의 건전성에 신빙성을 얻을 수가 없다.
③ 문서설주의자들은 히브리 저자들이 문학사에 알려진 다른 저자들과 달라서 그들만이 하나의 하나님 이름, 주제와
상관없이 하나의 문책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여 한 사상에 대해 동의어를 여러개 쓸 수 없으며, 단 하나의
주제와 관심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밀톤과 같은 한 명의 저자가 알레고로(L’Allegro) 같은
즐거운 시들과, 실락원과 같은 고상한 서사시(epic poetry)와 아레오파키타(Areopagitica) 같은 번뜩이는 산문 에세이를
쓸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 그가 고대의 히브리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즉시 ABC 복합자료 가설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④ 고고학적 증거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을 다룸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19세기의 박사들이 비역사적인 것으로 일축한 수많은 성경구절들이 후대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확증되었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이 성경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학자들은 갖고 있다.
올브라잇의학문적 노력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의 평판이 신빙성 있는 과거의 기록으로 높
아지게 되었다. 수많은 책들과 논문들로써 그는 성경의 기록을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그 비평가들로부터 옹호해
주었다.
⑤ 벨하우젠 학파는 이스라엘 종교가 다른 것들과 같이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진화론의 산물로서 설명이
될 수 있다는 순수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⑥ 교묘하게 본문을 다르게 착색하며, 그 구절을 문맥에서 도려내어 “차이점”을 드러낸 후 그 어떤 조화의 가능성도 배제해 버리면서 추정된 차이점이 문서의 다양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참고, 시스라를 죽이는데 대한 “두 개의 기사” 사이에
있는 추상적 차이점에 대해 파이퍼는 말하기를 사사기 5:25-27은 야일이 시스라가 우유를 마시고 있을 때 망치와 못으로
죽인 것을 제시하나 사사기 4:21은 시스라가 자고 있을 때 죽였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5:25-27은 시스라에게 충격이 가해질 때 그가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파이퍼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J와 E 사이에 “상이점”을 구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⑦ 비록 다른 고대 셈계 문학들은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사를 진술해 가는 기술로써 반복과 중복을 여러 번 해나가고
있지만, 히브리 문학만은 다른 저작권을 드러냄이 없이 이와 같은 반복과 중복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가들은 전제하고 있다.
⑧ 벨하우젠 학파는 현대 유럽의 비평가들이 고대 히브리 문학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도 각 문서들의 편집연대를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고정시킬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다.
⑨ 그들은 3400여년이나 후대에 살고 있는 학자들이 고대의 자자들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더 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벨하우젠의 가설이 과학적 공안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특별히 편집자에게 비약을 한다거나, 순환논법을 따른다거나, 기초도 없는 전제를 따라 의심스로운 추론을 하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그 방법론이 과연 법정 앞에 설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2. 모세 자작권의 적극적 증거들
오경 본문을 심사숙고해 보면, 외증과 내증의 모든 증거들이 모세의 저작권이라는 사실에 가장 부합하다.
간단명료하게 꾸밈없이 이 결론에 이르는 몇 가지 증거들을 열거해 본다.
⑴ 성경이 모세의 저작권을 증거하고 있다.
① 오경 자체는 모세가 그것을 작성했다고 입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 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7:1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출24:4).
“(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34:27).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노정은 이러하니라”(민 33:1-2).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주고”(신 31:9).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31:11).
② 구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도 이와 같은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
7절에서는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이라고 말한다.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수 8:31).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돌 위에 기록하매”(32절). “네 하나님 야호와의 명을 지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왕상 2:3).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왕하 14:6, 신 24:14을 인용한 것으로 이 사건은 약 B.C. 796년으로 추정된다). “만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왕하 21:8, 므낫세의 통치를 언급함. B.C. 696-642년). 다른 언급들은 요시야 시대 이후로 구약성경에서 발견된다(물론 벨하우젠의 가설에 따르면 신명기는 출판되었고 J E 에 속하는 것이 된다). 토라의 저작권은 항상 개인적으로 모세에게 돌려졌다.
③ 신약성경 역시 모세 자작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 19:8에 “모세가 너희 마음을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말을 믿겠느냐”(요 5:46-47).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행3:22, 신 18:15에서 인용).
“모세가 기록하되”(롬10:5, 레 18:5 인용).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거짓말이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문서설을 믿겠는가?(즉, 모세가 율법을 아직 쓰지 않았음을 믿겠는가?).
마가복음 12:26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모세에게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⑵ 다른 내증들
① 출애굽 기사에 대한 목격담은 그 사건 후 수세기가 지난 후에 살았던 사람의 지식 범주밖에 있으며 그 사건을 실제적으로 보고 참여한 사람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로써 출애굽기 15:27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엘림에 12개의
샘물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고 말한다. 민수기 11:7-8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 주신 만나의 모양과
맛을 이야기해 준다.
②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자는 마치 출애굽에 동참한 사람처럼 애굽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애굽의 이름에 대해 익숙하다.
오경의 애굽적 배경을 최근에 다룬 것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야후다의 책이다.
그는 여기에서 애굽에 있는 요셉과 모세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는 단지 빌린 단어들에만 자신의 영구를 제한시키지 않고 원래는 애굽이었는데 히브리어로 번역된 상당수의
숙어와 말의 변화를 토론하였다. 창세기 41:40을 KJV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복종하리라.” 이것을 직역하면 “네 말에 따라 모든 나의 백성이 키스하리라” 야후다는 애굽어에서
sn(키스하다)이 “음식”과 연결될 때는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사용됨을 밝혔다. 궁중관리들의 칭호들, 바로와 대화할 때
쓴 공손한 언어 등은 모두 애굽의 용법에 충실한 것이다.
이와 반면에 후대에서는 애굽 왕의 이름이 “바로”라는 칭호를 앞에 붙이지도 않고 불려졌다.
이것 역시 그 당시의 애굽 용법이다. 예로써 열왕기상 11:40에 시삭(애굽어로 Sheshong)이 언급되어 있다. 7
세기 후반과 6세기 초로부터 히브리의 역사 편찬가들이 정확한 애굽의 용법을 벗어나 자유롭게 바로 라는 칭호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③ 토라의 저자는 가나안 땅에 관한 외부인으로서 팔레스타인 밖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기사에 언급된 계절과 기후는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의 것이다(예로써, 출애굽기 9:31-32에 있는 우박재앙과
연관된 곡물생산의 순서를 보라. 델리취는 이 사건이 1월 하순이나 2월 초순에 있었음을 이것이 지적해 준다고 말했다).
언급된 식물과 동물들도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 혹은 시내반도의 것이다.
싯딤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볼 수 없고, 애굽이나 시내 반도의 토종이다. 그것은 고유한 사막의 나무이다.
이 나무를 가지고 성막의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성막의 바깥 부분을 덮어주는데 사용된 가죽은 tahash가죽(출 25:5;36:19)으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애굽과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다. ④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그 배경이 사막이다. 벨하우젠이 가정하는 것처럼 조상들이 이미 1000년 전에 정착한 농경문화가 배경이 아니다.
성막을 예배의 중심장소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저자가 만일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이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선전과 성막은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그
러나 성막은 계속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목민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성막의 재료들을 기자는 여러 장에 걸쳐 아주 세심히게 배열하고 있다. 열 두 지파가 사면으로 성막을 둘러싸고 성막이
중앙에 있도록 한 것은(민2:1-31) 모세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여 다른 어느 시대에도 어울리지 않는 대형이다.
⑤ 특히 창세기에서 우리는 B.C. 2000년―1000년대에 있었던 옛 습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누지(Nuzi)에서 발견된 법조문들은 B.C. 15세기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하녀가 합법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관습
(아브라함과 하갈)과 운명 때 구두로써 유언을 하는 것 (이삭이 야곱에게)과 상속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족 드라빔을
소유하는 것(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치는 것, 창 31장)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또 다른 글들을 통해
창세기 23장에 있는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살 때 행했던 거래의 관습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하게 되었다.
⑥ 도한 언어에서 고풍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 3인칭 단수는 HY’ 대신에 HW’ 로 쓰여졌다.
처녀도 N‘RH 대신에 N‘R로 쓰여졌다. 어떤 학자들은 오경의 히브리어와 8세기의 저자, 예를 들자면 아모스 같은
사람의 글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두 가지 요인을 여기에서 염두해 두어야 한다.
첫째로, 구약성경이 맛소라 시대에 보전이 될 때까지 발음과 알파벳 형태가 모음이 없는 자음 알파벳에 의해 변화됨으로
상당히 애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자음으로만 쓴다면 구 영어(Old English)도 엘리자베드 시대의 영어와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토라를 모세 이후 시대의 젊은 사람들에게 중심적으로 가르친 교육 때문에 마치 코란이 13세기의 아랍어 문체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후대의 히브리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아랍어는 620년 모하멧이 사용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 모든 특징들은 ①-⑥에 이르러 모세 저작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이것들은 벨하우젠의 이론, 즉 9세기에서 5세기까지 점차적으로, 단계를 따라 편집되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내어 준다. 증거의 법을 따라 판단한다면 문서설은 실제적 데이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기각되어야 한다.
⑦ 전 오경을 관통하는 놀라운 통일성과 그 점진적 발전을 묶어주는 고리들이 있다. 물론 계시의 단계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중복과 반복이 어느 정도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문서설주의자들도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오경의 최종형태는
가상적인 편집자가 질서와 배열을 잘 해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통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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