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하나님아들 2023. 7. 24. 23:33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켜 "나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 할 수 있는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칭과 그의 속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속성은 그의 인격의 여러가지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 같이 위대한 존재에 대하여 기술할 바가 있다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해보고 나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훨씬 용이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을 마치 컵으로 태평양의 물 전체를 담아보려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그를 알 수 있는데 족할만치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다음과 같은 분류를 살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절대적 속성
     피조물을 떠나 하나님 차체로서 절대적인 것. 이와 같은 절대적 속성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2. 활동적 속성.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3.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1. 하나님의 내적 성격 (절대적 속성)
  (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영이시다. 그는 생각하며 느끼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지체와 감정과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적 존재의  조건들에 굴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안과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그를 인식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비현실적 존재로서 살아 계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7참조). 하나님은 참다운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러나 본질상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그를 적절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요 1:18,출 33:20).
     그러나 우리들은 성경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마 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한 그의 무한한 인격을 유한한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기술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갖고 계신 존재로서 볼 수 있고 감촉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 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권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4:11).

 
 

     (2)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광대 무변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왕상 8:27). 곧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에나 안계신 곳이 없는  무소부재의 원리 속에 있다. 그의 임재와 능력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특정된 곳 곧 하늘에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그가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2)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출 15:18, 신 33:27, 느 9:5, 시 90:2, 렘 10:10, 계 4:8-10).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이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불변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이 진리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신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신 33:27).


     (3) 하나님은 하나이시다(출 20:3, 신 4:35,39, 6:4, 삼상 2:2, 삼하 7:22, 왕상 8:60, 왕하 19:15, 느 9:6, 사 44:6-8, 딤전 1 :1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종교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  리고 많은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의 세계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멧세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는 신약과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두 가지 단일성 즉 절대적 단일성과 복합적 단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인격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단일성의 사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는 복합적 단일성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두 사  람이 한 몸으로 결합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 3:1과 겔 37:17도 '하나'를 뜻하는 동일한 말 '에카드'가 사용되었다(창 22:2,12, 암 8:10, 렘 6:26,슥 12:10,잠 4:3,삿 11:34).


     신 6:4에는 어떤 종류의 단일성이 언급되어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복수형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합적 단일성을 가르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단일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성삼위를 포함한 복합적 단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우주와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 (능동적 속성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창 1:1, 17:1, 18:14, 출 15:7, 신 3:24, 32:39, 대상 16:25, 욥 40:2, 사 40:12-15, 렘 32:17, 겔 10:5, 단 3:17, 4:35, 암 4:13, 5:8, 슥 12:1, 마 19:26, 계 15:3, 19:6).


     하나님의 전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자유 "하나님은 능치못할 것이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한다든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곧 자가당착의 모순 가령 삼각형의 원이라든가 마른 물을 만들어 낼 수는 도저히 없다.


     둘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 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단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욥 1장과 2장을 참조하라).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무소부재이시다. 즉 다시 말하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창 28:15,16, 신 4:39, 수 2:11, 시 139:7-10, 잠 15:3,11, 사 66:1, 렘 23:23,24, 암 9:2-46, 행 7:48,49, 엡 1:23).
     광대무변과 무소부재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대무변은 공간과의 관련하에서의 하나님의 실재인데 반하여 무소부재는 피조물과의 관련하에서 본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영광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가 나타나심(사 6:1-3).
      ●효과적으로 자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심(나 1:3).
      ●섭리에 의하여 인간의 여러가지 일 가운데 나타나심(시  68:7-8).
       ●주위 깊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  에게 나타나심(마 18:19,20).
       ●심판하시려고 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나타나심(창 3:8).
      인간은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의 창조주의 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육체로 그의 아들 속에 거하신다(골 2:9).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 "
      ●신비하게도 교회 속에 거하신다(엡 2:12-22).
      ●공식으로 그의 일꾼들과 함께 계신다(마 28:19,20).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 한 편 어디에나 거주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고 일컬어진다.


      (3)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곧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다(창18:18,19, 왕하 8:10,13, 대상 28:9, 시 94:9, 139:1-16, 147:4,5, 잠 15:3, 사 29:15,16, 40:28, 렘 1:4,5, 겔 11:5, 단 2:22,28, 암 4:13, 눅 16:15, 행 15:8,19, 롬 8:27, 고전 3:20, 딤후 2:19, 히 4:13, 벧전 1:2, 요1서 3:20).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 그는 추리하거나 점차적으로 학습 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속성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크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시련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대두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가 타락할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함으로부터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상용하는 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지하시나 미리 고정시키지 않는다.


     (4) 하나님의 현명하시다(시 104:24, 잠 3:19, 렘 10:12, 단 2:20,21, 롬 11 :33, 고전 1 :24,25,30, 2:6,7, 엡 3:10, 골 2:2,3).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지와 전능의 결합에서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지식을 최선의 수단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항상 올바른 일을 적당한 때에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 모든 사건의 과정을 자기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배하실 때에 이 행위를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특수한 섭리는 인간 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5)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처리할 절대적 권리를 갖고 계시다(단 4:35, 마 20:15, 롬 9:21). 그는 그의 무한한 우월성과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 소유권과 모든 만물이 지속하기 위하여 그에게 의존하는 절대적 의존성에 의하여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을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다. 클라크 (D.S. Clarke)의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 보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가장 유용하고 격려의 힘이 되는 교리이다. 만일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맹목적인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우연이나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자아나 무한히 현명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며 능력이 있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우리들은 어느 것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해야만 될 것  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이외에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출 15:11, 레 11:44,45, 20:26, 수 24:19, 삼상 2:2, 시 5:4, 111:9, 145:17, 사 6:3, 43:14,15, 렘 23:9, 눅 1:49,약 1:13, 벧전 1:15,16, 계 4:8, 15:3,4).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절대적 도덕상의 순결을 의미한다. 그는 죄를 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거룩'의  근본적 의미는 '격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격리되어 있는가? 공간적으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지상에 있다.


 본질과 인격에 있어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되다. 그러면 우리들은 성결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신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겔 36:22, 38:23).


     곧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신다. 스랍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로 부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부르짖었다(사 6:3)
     인간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경외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케 하는 것이다(민 20:12, 레 10:3, 사 8:13).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그를 모욕할 때에 그들은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의 반대는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 6:9).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거룩한 백성이라든가 거룩한 건물이라든가 거룩한 목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사람이나 물건에 적용하였을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렇게 따로 구별된 물건들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사람들은 거룩한 법을 쫓아 살려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실들로써 성결의 교리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와 거룩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는 행위로 나타난 거룩이라" 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의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의는 옳은 표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행위를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나타내시는가?


     1)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악한 자를 벌하실 때에 정의가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에 의거하여 재판하듯이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를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메시야는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 정의로써 판단하신다(사 11:3).


     2)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할 때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 (시 51:14, _5.1서 1:9, 히 6:10).


     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사 8:17, 암 3:2).


     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것을 그의 의라고 칭한다(사 46:12, 45:24,25).
     구원이 소극적인 면이라고 하면 의는 적극적인 면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의 의가 되는 것이다( 60:21, 54:13, 61:10, 51:6).


     5.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종들에게 승리를 주었을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사 50:4-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를 좇아 살게 될 것이다(벧후 3:13).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스럽게도 의로 여겨주신다(롬 4:5). 이것이 칭의의 교리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 본질은 인간과 그의 관계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답게 행동하신다. 거룩하신 분은  신성하게 하며 의로우신 분은 의롭게 하신다.


      (3)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며 그의 말씀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약속을 굳건히 믿을 수 있다(출 34:6, 민 23:19, 신 4:31, 수 21:43-45, 23:14, 삼상 15:29, 렘 4:28, 사 25:1, 겔 12:25, 단 9:4, 미 7:20, 눅 18:7, 롬 3:4, 15:8, 고전 1:9, 10:13, 고후 1:20, 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히 6:18, 10:23, 벧전 4:19, 계 15:3).


      (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그의 피조물의 비참에 대하여 표명된 하나님의 선과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만일 그들이 개과천선의 가망이 있는 죄인들이라면 그들을 구제하려고 오래 참으신다(딛 3:5, 애 3:22, 단 9:9, 렘 3:12, 시 32:5, 사 49:13, 54:7).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에 하나를 시 103:8-18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지식이 소망의 근거와(시 130:7) 신뢰의 근거(시 52:8)가 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났다(눅 1:78).


      (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창조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신 7:8, 엡 2:4, 습 3:17, 사 49:15,16, 롬 8:39, 호 11:4, 렘 31:3).


     (6) 하나님은 선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그밖에 다른 축복들을 주신다(시 25:8, 나 1:7, 시 145:9, 롬 2:4, 마 5:45, 시 31:19, 행 14:17, 시 68:10, 85:5). 어떤 사람들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만일 조심성  없는 직공이 부주의하여 아주 섬세한 기계 속에 모래를 집어 넣었다면 그 기계를 제작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망쳐놓았다.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들이 고의로 범한 죄악에 기인된 모든 고통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남는 고통이 많치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악은 그의 허락을 받아 존재 한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길은 찾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에게는 '게 사색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선을 위하여 악을 억압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과 바로와 헤롯과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의 죄악을 어떻게 억압하셨는가를 기억하라. 어떤 고대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지당한 말을 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악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도 선으로 만들 수 있다. "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시련의 불길 가운데서 인격을 정화 시켰으며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속 깊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이란 불로 연단된 인격을 사는데 필요한 대가이다.


     4) 하나님은 이 우주를 자연법칙에 의하여 조정하셨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 속에는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이 게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인해서 또는 고의로 낭떨어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범한 결과로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있음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 한다. 그것은 만일 이와 같은 법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온통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5) 우리들은 항상 이 세상이 완전한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늘 나라의 표준시(Heavenly Standard Time)에 의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눅 18:7,8).
     이 세대라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내릴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이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주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감추어져 있는 심연속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그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깊은 곳을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고전 1:10).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기 위하여는 인간이 하나님 보다 더 위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욥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무한자를 이해하려는 인간능력에 대한 신랄한 거부였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한편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욕구에 합당한 한도내 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마저도,하나님께서 자신을 즐겨 계시하시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폐하셨던 자신의 베일을 벗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 주셨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고찰을 한 후에는 그 기원이 되는 계시에 대하여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인간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계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구별할 수 있다.
     물론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계시를 믿지 않는다. 범신론자들은 그들의 사상체계 속에 계시를 허용하지는 않지만 가끔계시에 대하여 언급하기는 한다 자연신론자들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정하나,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의 필연성과 실재성, 심지어는 특별계시의 가능성까지도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다 믿는다.

 
 1. 일반계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시간상으로 특별계시보다 앞선다. 일반계시는 인간에게 구술적 전달 형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건과 자연 세력과 자연법칙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 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시 19:1, 롬 1 : 19-20, 2: 14-15).


     (1)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펠라기우스파와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신론자들은 일반계시만으로 현재 인간의 요구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로마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는 일반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남아있는 죄의 암영에 의해 희미하게 되고 말았다. 창조주의 솜씨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 흐려지고 희미해진 것이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영적인 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 못하므로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한다.


 종교를 순수하게 하나의 자연적 근거에만 세우려는 자들의 현재의 종교적 혼란이 바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을 분명하게 증명하여 준다.
     일반계시가 일반적 종교에도 합당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하므로 참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방 민족들은 어떤 가상적 특별계시에 호소한다. 결국 일반계시로서는 죄인들의 영적인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에 관한 다소의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다.


     1) 죄는 일반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을 모두 변화시켰다.
     2) 일반계시는 하나님과 영적 사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3) 일반계시는 대체로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도 주지 못한다.
     4) 일반계시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로서도 전혀 불충분하다.


     (2) 일반계시의 가치


     그러나 위에 언급한 내용이 일반계시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는 아직도 이교의 진정한 확립 요소를 설명 해 주는데, 이 계시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깨닫고(행 17:28),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행 17:27),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롬 1:19-20),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다(롬 2:14). 또 그들은 죄와 무지의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곡해하지  만, 말씀의 조명(요 1:9)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창 6:3)에는 참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그의 특별계시의 배경을 형성해 주므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과 역사는 성경 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2. 특별계시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일반계시와 함께,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구체화된 특별계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성경은 탁월한 특별계시의 책으로 이 계시에서 말씀과 사실은 서로 손을 잡고 걸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은 사실을 해석하고 사실은 말씀에게 본질을 제공하여 준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흐려지고 부패 해졌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구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처럼 분명하게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우기 인간은 암흑과 무지, 오류와 불신앙의 권세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의 맹목과 왜곡 속에서, 인간은 현재 그 최초 계시의 흔적까지도 바로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바꾸어 놓는데 기뻐하고 있다. 이리하여 일반계시는, 이 이상 더 하나님과 영적사물에 관한 믿을만한 절대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또한 인간에게 옳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친교상태에까지 회복시킴에 아무 소용이 없게되었다.


 그리하여 네 가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영적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1) 일반계시에서 수집한 진리들을 정정하며 해석할 것
     2)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인간이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도록 계명할 것
     3)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줄 것
     4) 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친교를 갖도록 하여 인간의 영적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것 등이다. 

     (2) 특별계시의 방법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종류로 구별된다.


     1) 하나님의 현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또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그룹(CheruMbim) 사이에 임재하셨다(시 80:1, 99:1). 하나님의 임재는 불과 연기의 구름 속에서 보여 졌으며(창 15:17, 출 3:2, 19:9, 16이하, 33:9, 시 78:14, 99:7), 폭풍우 속에서 보여졌고(욥 38:1, 40:6, 시 18:10-16), 또한 미풍 속에서도 보여졌다.


 이것들은 모두가 그의 임재의 표상으로, 이 가운데서 그는 영광의 얼마를 계시하셨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주의 사자"의 현현이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자는 분명히 창조된 사자가 아니었다. 한편 이 사자는 하나님과 구별되었으나(출 23:20-23, 사  63:8-9), 다른 한편, 그는 하나님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창 16:13, 31:11, 13, 32:28).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는 삼위 중의 제 2위라고 한다(말  3:1 참조). 하나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 육신에서 그 최정점에 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 1:19, 2: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성령의 전이 된다(고전 3:16, 6:19, 엡 2:21).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 사이에 쳐질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가장 충만한 동거의 실현이 있게 될 것이다.

 
     2)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그의 사상과 의지를 전달하셨다. 하나님은 가끔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계시의 대상에게 말씀하셨다(창 2:16, 3:8-19, 9:1, 8, 12, 32:26, 출 19:9, 신 5:4,5, 삼상 3:4). 어떤 때는, 하나님은 제비와 그리고 우림과 둠밈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하셨다(삼상 10:20, 21, 대하 24:5-31, 느 11:1, 민 27:21, 신 33:8). 꿈은 계시의 통상적인 방법이었다(민 12:6, 신 13:1-6, 삼상 28:6, 을 2:28). 또한 이스라엘 백성 이외의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꿈이 사용되었다.


 계시의 친밀하고도 보다 숭고한 형태는 환상이었으며, 이것은 선지자들의 경우 극히 통상적인 것이다(사 6장, 21:6 이하, 겔 1-3장, 8-11장, 단 1:17, 2:19, 7-10장, 암 7-9장).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영을 통하여, 내적조명의 방법을 써서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지고자, 진리,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하신 예언자로 나타나고 계시다. 그는 계시의 조명의 영이기도 하신 그의 성령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다(막 13:11, 눅 12:12, 요 14:17, 15:26, 16:13, 20:22, 행 6:10, 8:29).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거룩 한 분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며, 따라서 우리 주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게 된다(요일 2:20).


     3) 이적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또한 이적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적은 하나님의 특별권능의 현현이며 특별임재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적은 가끔 영적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앞으로 올 신국의 현현으로서의 이적은 위대한 구속사업을 돕게 된다. 따라서 이적은 자주 악인을 벌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구원 하는데 사용된다.


 이적은 예언의 말씀들을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수립하고 계시는 새 질서를 강조한다. 성경의 이적도 또한 성육 신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것이요 가장 중심적인 이적이다. 절대적인 이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물은 회복되며, 창조물들은 그 원시적 美에로 환원되는 것이다(행 3:21).


     (3) 특별계시의 특성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 구원계획의 실현 방법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이 특별계시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죄인을 성도로 변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 계시는 분병히 진보적이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며 모든 종교생활의 근원이다.
      창조란 말은 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엄밀한 의미로 정의하자면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 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창조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나 있다(창 1:2, 욥 26:13, 33:4, 시 33:6,사 40:12,13,요 1:3, 고전 8:6, 골 1:15-17).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엡 1:11, 계 4:11).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이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함으로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을 나날이 유지해 나가신다(행 17:28, 히 1:3).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곧 현 물질세계의 시작을 가르쳐준다. 이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창조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無)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않은 창조이었다(창 1:1). 무에서의 창조란 표현은 성경에서는 직접 찾아볼 수 없지만, 외경 중의 한 책에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마카비 2서 7:28).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분명히 잘 나타나 있다(창 1:1, 시 33:9, 148:5, 롬 4:17, 히  11:3).


     어떤 학자들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충족함을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 위해 벌려놓은 하나의 허황한 구경거리로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안녕을 촉진시키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사 43:7, 60:21, 61:3, 겔 36:21,22, 39:7, 눅 2:14, 롬 9:17, 11:36, 엡 1:5,6,12,14, 3:9,10, 골 1: 16).

 

      창조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그룻된 이론을 주장한다.


      첫째, 이원론이다. 어떤 학자는 본래의 물질은 영원한 것인데, 이 물질로부터 세상이 우연히 또는 고도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두 영원자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즉, 두 개의 무한자가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유출설이다.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이 본질상 하나라고 주장하며, 세상은 신이 존재할 때 필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에게서 자기 결정의 능력을 박탈하였으며, 인간에게서는 그들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의 특징을 빼앗아 버리게 되고 말았다.
 또 이 이론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악의 책임자로 만들고 말았다.


     셋째, 진화론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데, 이 이론 역시 분명히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이미 기존물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질 (The Nature of God)


  1. 성서적 견해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또 어떤 분이신가? 지금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최선의 정의를 웨스터민스터 교리 문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 무궁토록 불변하는 무한한 영이요 그의 존재 속에 지혜와 능력과 성격과 의와 선과 진리가 거한다." 하나님의 명칭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면 성서적 정의를 명확히 계통을 세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명칭은 다만 문자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선포하여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신다(출6:3,33:19,34:5,6). 

 하나님을 예배함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요 (창12:8)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요(신28:58).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요(삼하22:50). 그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는 것이다(시68:9).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나 (출20:7) 욕되게 하는 것은(레18:21, 24:16) 악한 것이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백성을 높이 드시며(시20:1) 그의 이름을 인하여 그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삼상12:22).


 다음은 가장 평범한 하나님에 대한 성서상의 명칭들이다.



  (a) 엘로힘 (Elohim) 
  이 명칭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전능 성이 기술되거나 암시되어질 곳에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창조의 신 (the Creator-God)이다 복수형은 능력의 충만과 삼위 일체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b) 여호와 (Jehovah) 
 창조의 신이신 엘로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피조물의 필요를 아시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는 그 자신을 언약의 신 (the Covenant God) 이신 여호와로 계시하신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존재 (To be) 를 나타내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the three tenese)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존재하였던 분, 존재하고 계신 분, 존재할 분 곧 다시 말하면 영원하신 분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신이므로 그 명칭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나타내었고 또 나타내고 있으며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바 그 일은 그의 명칭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체험할 때에 "그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여호와의 언약의 명칭들 속에 요약 되여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자들에게는 "병을 치료해주시는 신" 이신 여호와 _ 라파 (Jehovah-rapha) 로 알려져 있다.(출 15:26).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였을 때에 그의 백성들은, 우리들의 깃발이신" 여호와 -닛시 (Jehovah-nissi)라고 그를 불렀다.(출17:8-15). 근심에 싸여있을 때에 그들은 그가 "우리들의 평화"

 이신 여호와 살롬(Jehovah-shalom)임을 깨달았다. (삿6:24).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들은 "목자"이신 여호와-라하 (Jehovah-ra'ah)의 필요성을 느꼈다.(시23:1). 
 정죄를 지각하고 의의 필요성을 의식하였을 때에 그들은 "우리들의 의의신 여호와 -지드 (Jehovah-Tsidkenu)에 게 소망을 걸고 부르짖었다.(렘23:6). 궁핍할 때에 그들은 그가 "궁핍을 채워 주시는 신"이신 여호와-이레(Jehovah-Jireh) 인줄을 깨달았다 (창22:14).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할 때에 그는 여호와 - 샤마(Jehovah-Shammah)로서 알려질 것이다(겔44:35).



 (c) 엘 (EL)(하나님) 은 복합어로서 사용되어 진다. 엘엘이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불리워지는 다른 존재들보다는 훨씬 우월한 분이시다. 엘샤-다이(EL- Shaddai)는 "그의 백성의 궁핍을 채워주는 신"이다(출6:3),엘-올암(EL-Olam)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창21:33).


 (d) 아도나이 (Adonai)는 글자 그대로 "주" (Locd)또는 "선생" (Master)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명칭은 통치권과 주권의 개념을 갖고 있다. (출 23:17,사10:16,13). 그는 그의 인격과 행위 때문에 그의 백성의 봉사와 충성을 요구한다. 신약에서 이 명칭은 영화럽게 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e) 아버지(Father) 라는 명칭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사용되었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명칭은 만믈의 생산자와 인간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의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행17:28).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가 인간의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요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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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못된 신관(神觀) 

  성경을 도외시한 그릇된 다른 신관들이 있다. 이 신관들 중에 어떤 것은 진리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어떤 신관은 부적당하고 또 다른 신관들은 악용되어졌거나 타락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신관을 살펴 볼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완전히 설명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그릇된 신관을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신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a) 불가지론 (Agnosticism) 
  불가지론 (헬라어로 "알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부인한다. 불가지론 자들은 "유한한 인간 정신을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불가지론 자들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약간의 것을 인식하는 것과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곧 다시 말하면 그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를 이해 할 수 있다. 즉 그에 관해서 알 수 있다. 
  " 우리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온갖 것을 알지는 못해도 그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비록 우리들이 우리들의 팔로 온 지구 덩어리를 얼싸안을 수는 없을지라도 지구를 만져 볼 수는 있다. 철학자가 전능 자를 완전히 찾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어린아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클라크(D.S.Clarke)씨는 말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편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분적으로 그를 알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해 주고 있다.(출33:20,욥11:7,롬11:33,34,고전13:9-12).



  (b) 다신론 (Polytheism) 
  다신론은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 고대 종교의 특징으로서 오늘날도 아직 이교도의 나라 안에는 존속하고 있다. 이 다신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수신과 화신과 산신과 전쟁의 신 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신론은 이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유한한 대상물을 신들로 만들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롬1:25). 
  아브라함은 이교 신앙을 떠나 참다운 유일신의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스라엘 선교의 시작으로 주위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다신론을 반박하여 유일신교를 전하는 것이 되었다.



  (c)  범신론 (Pantheism) 
  범신론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뜻을 나타내 주는 헬라어에서 왔다.) 은 하나님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 체계이다. 나무와 돌과 새와 동물과 땅과 물, 파충류와 인간, 이 모든 것은 신의 일부분이며 마치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표현되듯 이 신은 이 모든 물질과 힘을 통하여 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상 체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롬1:20-23 은 여기에 대하여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득히 먼 과거에 이방인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들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만큼 큰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두고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산과 나무와 사람들과 짐승과 그밖에 모든 자연의 힘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볼 대 자연 숭배는 매우 아름다운 듯이 보이나 불합리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나무와 꽃과 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면 버러지와 세균과 범과 비열한 죄인들도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불합리하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자연을 혼동하고 잇다. 그러나 시가 시인이 아닌 것처럼 예술이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음악이 음악가가 아닌 것처럼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유대 민족의 아름다운 전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피조물과 하나님을 구별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는 아름다운 광채 때문에 별들을 하나님을 잘못 보았었다. 
 그러나 별들의 빛 보다 달빛이 더 뛰어나게 밝은 것을 보고 달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 빛에 비할 때 달빛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태양을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도 밤에는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모든 성좌들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숭배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은 범신론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성경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과 자연을 구별하고 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곧 우주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범신론은 오늘날 어디에서 신앙되고 있는가? 첫째로 자연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시인들 사이에 신앙되고 있다. 둘째로 범신론은 대부분의 인도의 종교 속에 침투하여 우상 숭배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셋째로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 Science)는범신론의 한 형태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의 근본 교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God is all and all is God). 크리스챤 사이언스는 관념론적 범신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교파는 모든 것은 마음 또는 "아이디어"(idea)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비 실재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d) 물질주의 (Materialism) 
  물질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구별을 부인하고 생명과 정신과 그리고 모든 힘의 현상은 다만 물질의 특성이라고 단언한다.  " 간장이 담즙은 분비하듯이 두뇌는 생각을 산출한다." "인간은 기계이다." 물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상한 생각과 신성을 말살해 버리기 위하여 "인간은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이 물질주의는 너무도 조잡하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논박할 가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 안에서 또 수많은 소설 안에서와 기타 여러모로 물질주의가 논의되어지고 있으며 또 신봉되고 있다. 즉 사람이한 짐승이 아니면 기계이다. 또 사람이란 자기에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선도 악도 없다고 믿고 있다. 물질주의의 오류를 논박함으로서 다음과 같이 관찰해 보라.


 (1) 우리들의 의식은 물결 이상이며 또 돌과 나무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적은 상식이 많은 철학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일랜드의 웅변가 다니엘 오코넬 (Daniel O' Connel)이 어떤 날 아일랜드의 어떤 부인의 날카로운 혀와 신랄한 말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인을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퍼부어 이 부인을 압도시켰다. 
 " 이 비참하고 뻔뻔스러운 사람 같으니!" 부인이 당황해질 때까지 그는 이런 지독한 욕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자들도 으리으리한 말들로 우리들을 무섭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오류가 진리로 될 수는 도저히 없다.

 (2) 경험과 관찰에 의할 것 같으면 생명이란 오직 존재하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생명은 살아 있는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수년 전에 어떤 과학자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서 생명이 생겨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중에 미생물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자 학설은 수포로 돌아갔다.
 (3) 우주 속에 있는 섭리와 계획과 지성의 증거는 맹목적 물질주의를 부인한다.
 (4) 가령 인간이 기계라고 가정해도 기계 자체는 기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계는 그 발명가를 산출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발명가는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질주의의 악은 그것이 도덕의 기초를 파괴해 버린다는 사실 속에 있다. 만일 사람이 다만 기계에 불과하다면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웅을 고상하다고 부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을 악하다고 부를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다만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마치 둥근 톱이 단두대를 보고 "너는 왜 그다지도 잔인하냐?" 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질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무엇인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나타나며 그 표적이 따른다.



  (e)  자연신교 (Deism) 
  자연신교는 이 세상을 창조한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창조 후에 그는 이 세상을 자연 법칙의 지배 아래 두고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마치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았듯이 이 세상이란 시계의 태엽을 감아놓고 다 풀릴 때까지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 하든가 혹은 기적 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 체계를 종종 이성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이성을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길잡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 종교의 반대로서 자연 종교라고도 한다.


 이 사상 체계는 성경의 영감의 증거와 역사 중의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와 모순된다. 자연 신교를 믿는 사람들의 신관은 편역 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사실은 그의 초월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을 초월하여 따로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사6:1). 
 둘째 사실은 그의 내재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행17:28,엡4:6) 자연 신교가 첫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성경이야말로 균형이 잡힌 참다운 신관을 보여주고 있다. 곧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초월하여 계시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그는 이 세계 속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계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아들은 또한 우리들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의 교리는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밖에 계신가 또는 세계 안에 계신가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두 가지가 다 옳다는 긍정적 답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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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하나님의 속성 (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켜 "나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칭과 그의 속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속성은 그의 인격의 여러 가지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 같이 위대한 존재에 대하여 기술할 바가 있다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해보고 나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훨씬 용이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을 마치 컵으로 태평양의 물 전체를 담아보려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그를 알 수 있는데 족할 만치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다음과 같은 분류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절대적 속성.
 피조물을 더나 하나님 차체로서 절대적인 것. 이와 같은 절대적 속성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 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2. 활동적 속성.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3.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1. 하나님의 내적 성격 (절대적 속성)



  (a)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영이시다. 그는 생각하며 느끼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지체와 감정과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적 존재의 조건들에 굴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안과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그를 인식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비현실적 존재로서 살아 계시다는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5:37,빌2:6 참조) 하나님의 참다운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러나 본질상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그를 적절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고 요한은 선언하였다. (요1:18,출33:20). 
 그러나 출24:9-10 속에는 모세와 장로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등의 모순된 점을 찾아 볼 수 없다. 요한은 아무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경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마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의 무한한 인격을 유한한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기술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갖고 계신 존재로서 볼 수 있고 감촉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권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4:11).


 (b)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광대 무변 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왕상8:27
 곧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 부재의 원리 속에 있다. 그의 임재와 능력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특정된 곳 곧 하늘에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그가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출15:18,신33:27,느9:5,시90:2,렘10:10계4:8-10).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이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불변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이 진리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신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에 네 아래 있도다."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신33:27).



  (c)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출20:3,신4:35,39,6:4,삼상2:2,삼하7:22,왕상8:60,왕하19:15,느9:6,사44:6-8,딤전 1:1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종교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의 세계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삼위 일체의 교리를 가르치는 신약과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두 가지 단일성 즉 절대적 단일성과 복합적 단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단일성의 사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2:24). 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는 복합적 단일성을 의미한다. 왜 그러냐 하면 두 사람이 한 몸으로 결합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3:1과 겔37:17도 참조하라. 이 성경 구절들 속에도 "하나"를 뜻하는 동일한 말(에카드)이 사용 되었다.(창22:2,12,암8:10,렘6:26,슥12:10,잠4:3,삿11:34).


  신 6:4에는 어떤 종류의 단일성이 언급되어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복수형(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합적 단일성을 가르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삼위 일체의 교리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단일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성삼위를 포함한 복합적 단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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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주와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 (능동적 속성들)


  (a)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창1:1,17:1,18:14,출15:7,신3:24,32:39,대상16:25,욥40:2,사40:12-15,렘32:17,겔10:5,단3:17,4:35,암4:13,5:8,슥12:1,마19:26,계 15:3,19:6). 하나님의 전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자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한다든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곧 자가 당착의 모순 가령 삼각형의 원이라든가 마른 물을 만들어 낼 수는 도저히 없다.


 (2)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을 유지되고 있다. (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3)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은 유지되고 있다(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b) 하나님은 무소 부재이시다. 즉 다시 말하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창28:15,16,신4:39,수2:11,시139:7-10,잠15:3,11,사66:1,렘23:23,24,암9:2-4, 6, 행7:48,49,엡1:23). 광대 무변과 무소 부재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대 무변  은 공간과의 관련해서 하나님의 실재인데 반하여 무소 부재는 피조물과의 관련하에서 본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1) 영광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가 나타나심(사6:1-3). 
 (2) 효과적으로 자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셨다. (나1:3). 
 (3) 섭리에 의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일 가운데 나타나셨다.(시68:7-8). 
 (4) 주위 깊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심.(마18:19,20,행17:27). 
 (5) 심판하시려고 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나타나심 (창3:8 시68:1,2). 인간은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의 창조주의 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어느 한 중국인은 중국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계시다면 그는 지옥에도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 신자는 재빨리 "그의 노여움은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God is no where)고 기록하여 놓았더니 그의 어린 딸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God is now here)라고 읽은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6) 육체로 그의 아들 속에 거하신다 (골2;9)."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 
 (7) 신비하게도 교회 속에 거하신다(엡 2:12-22). 
 (8) 공식으로 그의 일꾼들과 함께 계신다 (마28:19,20).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 한 편 어디에나 거주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고 일컬어진다.



 (c)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곧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다.(창18:18,19,왕하8:10,13,대상28:9,시94:9,139:1-16,147:4,5,잠15:3,사29:15,16,40:28,렘1:4,5,겔11:5,단2:22,28,암4:13,눅16:15,행15:8,19,롬8:27,9,고전3:20,딤후2:19,히4:13,벧전1:2,요1서3:20).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 그는 추리하거나 점차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속성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크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시련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대두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 타락할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함으로부터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를 상용하는 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지 하시나 미리 고정시키지 않는다.



 (d) 하나님의 현명하시다(시104:24,잠3:19,렘10:12,단2:20,21,롬11:33,고전1:24,25,30,2:6,7,엡3:10,골2:2,3,).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지와 전능의 결합에서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지식을 최선의 수단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항상 올바른 일을 적당한 때에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 모든 사건의 과정을 자기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배하실 때에 이 행위를 섭리하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반적의 특수한 섭리는 인간 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e)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처리할 절대적 권리를 갖고 계시다.(단4:35,마20:15,롬9:21). 

 그는 그의 무한한 우월성과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 소유권과 모든 만물이 지속하기 위하여 그에게 의존하는 절대적 의존성에 의하여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을 비판하는 것을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다. 클라크씨 (D.S.Clarke)의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가장 유용하고 격려의 힘이 되는 교리이다. 만일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맹목적인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유언이나 변경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이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자아나 무한히 현명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며 능력이 있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우리들은 어느 것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해야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이외에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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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a)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출15:11,레11:44,45,20:26,수24:19,삼상2:2,시5:4,111:9,145:17,사6:3,43:14,15,렘23:9,눅1:49,약1:13,벧전1:15,16,계4:8,15:3,4).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절대적 도덕상의 순결을 의미한다. 그는 죄를 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거룩"의 근본적 의미는 "격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격리되어 있는가? 공간적으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지상에 있다. 본질과 인격에 있어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되다. 그러면 우리들은 성결이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신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겔36:22,38:23).





 곧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신다. 스랍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로 부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부르짖었다.(사6:3
  인간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경외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케 하는 것이다 (민20:12,레10:3,사8:13).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그를 모욕할 때에 그들은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에 반대는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거룩한 백성이라든가 거룩한 건물이라든가 거룩한 목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은 거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사람이나 물건에 적용하였을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렇게 따로 구별된 물건들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사람들은 거룩한 법을 쫓아 살려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실들  로써 성결의 교리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b)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와 거룩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는 행위로 나타난 거룩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의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의는 옳은 표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행위를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나타내시는가?



  (1)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악한 자를 벌하실 때에 정의가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에 의거하여 재판하듯이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를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메시야는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정으로써 판단하신다.(사11:3)

  (2)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할 때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 (시51:14,요1서1:9,히6:10).
  (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사8:17,암3:2).
  (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것을 그의 의하고 칭한다(사46:12,45:24,25). 구원이 소극적인 면이라고 하면 의는 적극적인 면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의 의가 되는 것이다(사60:21,54:13,61:10,51:6).
  (5)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종들에게 승리를 주었을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사50:4-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를 쫓아 살게 될 것이다. (벧후3:13).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 스럽게도 의로 여겨주신다. (롬4:5). 이것이 칭의의 교리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 본질은 인간과 그의 관계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 거룩하신 분은 신성하게 하며 의로우신 분은 의롭게 하신다.



       (c) 하나님은 성실하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며 그의 말씀은 틀림 없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약속을 굳건히 믿을 수 있다(출34:6,민23:19,신4:31,수21:43,-45, 23:14,삼상15:29,렘4:28,사25:1,겔12:25,단9:4,미7:20,눅18:7,롬3:4,15:8,고전1:9,10:13,고후1:20,살전5:24,살후3:3,딤후2:13,히6:18,10:23,벧전4:19,계15:3).



       (d) 하나님은 자비스럽다. 
  "하나님은 자비심은 그의 피조물의 비참에 대하여 표명된 하나님의 선과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만일 그들이 개과 천선의 가망이 있는 죄인들이라면 그들을 구제하려고 오래 참으신다. (Hodges)(딛3:5,애3:22,단9:9,렘3:12,시32:5,사49:13,54:7).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에 하나를 시 103:8-18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지식이 소망의 근거와(시130:7)신뢰의 근거 (시52:8)가 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났다. (눅1:78).



       (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창조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라(신7:8,엡2:4,습3:17,사49:15,16,롬8:39,호11:4,렘31:3).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 보라 (요3:16,요1서4:9,10,롬9:11-13,요1서 3:1,사43:3,4, 사63:9,딛3:4-7,사38:17,엡2:4,5,호11:4,신7:13,롬5:5).



       (f) 하나님은 선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그밖에 다른 축복들을 주신다. (시25:8,나1:7,시145:9,롬2:4,마5:45,시31:19,행14:17,시68:10,85:5). 죤슨 박사 (Dr,Howard Abnew Johnson)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수년전에 나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집 주인은 나에게 식기도를 드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있은 다음에 나는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더니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나는 기도의 진의를 알 수 없는데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식사는 내가 친해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일 파종이나 추수가 실패되어 온 지구에 흉년이 들어 인구의 반이 다음 추수기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만일 이와 같은 흉년이 이년 동안 계속된다면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고 말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해 보신 적이 계십니까? 
 곧 그는 정색을 하면서 이와 같은 흉년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시인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그가 장만하였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과 또한 능력을 주어 이와 같은 음식을 장만케 하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음식물로 사용하는 곡식과 동물 속에 생명을 넣어 주셨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암시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선물로 줄 것 같으면 당신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루에도 이와 같은 선물을 두세 번 받게 되면 받을 적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는 곧 나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이유를 알게 됐을 겁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흥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이제야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 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만일 조심성 없는 직공이 부주의하여 아주 섬세한 기계 속에 모래를 집어넣었다면 그 기계를 제작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망쳐놓았다.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들이 고의로 범한 죄악에 기인된 모든 고통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별로 남는 고통이 많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악은 그의 허락을 받아 존재하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에게는 "네 사색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명한 작가인 스트븐슨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비록 내가 한 눈을 감고 다른 한눈으로 들여다보는 적은 구멍으로 우주의 적은 단편을 살펴보아도 나는 나의 자신의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신호의 단편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없다고 미칠 듯이 불평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와 같은 광대한 계획 가운데서 믿음을 격려해 줄 수 있는 적은 것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한 경의 가운데서 감사함이 마땅치 않을까?"



   (3)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선을 위하여 악을 억압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과 바로와 헤롯과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의 죄악을 어떻게 억압 하셨는가를 기억하라. 어떤 고대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지당한 말을 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악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도 선으로 만들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시련의 불길 가운데서 인격을 정화시켰으며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속 깊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이란 불로 연단 된 인격을 사는데 필요한 대가이다.


  (4) 하나님은 이 우주를 자연 법칙에 의하여 조정하셨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 속에는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이 개재되어 있다. 가령 예를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인해서 또는 고의로 낭떨러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범한 결과로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있음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만일 이와 같은 법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온통 혼란한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5) 우리들은 항상 이 세상이 완전한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늘 나라의 표준시 (Heavenly Standard Time)에 의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눅18:7,8). 

  이 세대라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나릴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주실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들

하나님께만 속한 성질들,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탁월함들을 의미함. 

스스로 계심(自存, Self-Existence):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 과거"라고 부르는 모든 것 이전에도 존재하셨다. 그분에 의해 되어진 모든 것들 이전에 계신 분인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창조에 예속되지 않으시며, 아무 것도 아쉬운 것이 없으시다.


영원함(Eternity) : 이 영원하신 분께서는 그 생의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그분은 시간의 경계 밖에서 존재하시며, 어떠한 시간의 측정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실재 가운데 거하시는, 영원한 지금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I Am, 출 3:14)이시다.


불변함 : 그분의 본질과 속성들과 계획과 뜻에 그분은 변함없이 머무신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말 3:6)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 1:11,12).


단일함(Unity) : 하나님께서 세 인격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 신격의 각 구성원께서 다른 위격들과는 다른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나 목적에서나 뜻에서나 하나이시다. 이에 관한 히브리어는 하나의 단일함(a unit)이 아닌, 한 복합 된 단일함(a compound unity)을 나타내고 있다.


삼위일체: 이 단어가 성경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는 그 안에 널리 스며들어 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명백히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세 인격들로 계시되어 있다. 이성은 하나님의 단일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오직 계시만이 그분의 삼위일체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상대적인 속성들

하나님께만 속한 특성들이긴 하나 그분의 피조물들과 우주에 대한 그분의 관계를 통하여 알려질 수 있는 속성들. 

스스로 계시하심(Self-Revelation) :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그분 자신의 계시하심 - 창조, 역사, 성경,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

 
전능하심: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의 완전함들과 조화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 따라서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없다는 진술은 그분의 능력의 한계가 아닌 그분의 영광의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편재하심 : 무한한 분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서나 알릴 수 있으시다.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 가운데 그분은 무한하시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전지하심 :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아시며 , 또한 다른 모든 것을 아신다. 실제인지 단지 가능성인지, 과거,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그분은 그것들에 대해 완벽하게, 즉각, 동시에 그리고 영원 전부터 아신다.


주권자이심: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 즉 우주 안에서 최고의 통치자로서 지닌 하나님 고유의 권위는 그분의 속성중의 하나가 아닌 하나님만의 특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 

도덕적 성질들에 관계된 신성한 본질의 표현들이 이러한 특징들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공유되긴 했으나, 그것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무한하고 완벽하게 나타나진다. 

영 : 하나님은 실체이시다. 그러나 물질적 실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비물질적이시며, 무형이시며, 비가시적이시다  

 
인격: 하나님은 비인격적 영이 아니시고 자의식과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사랑 : 첫째로 신격 안에서,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펼쳐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감동을 받으시는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질투: 종종 부정적으로 보이나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질투"는 그의 소유와 권리들을 지키시기 위한 세심한 보호책이시다.


양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 그 이상적인 분께 호응하는 모든 자질들을 포함한다


관용: 그분의 피조물들이 느낄 수 있는 이 애정이 인간의 계산을 초월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졌다.


은혜: 범죄함으로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다루심,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권이다.


자비: 비탄 속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인정많은 취급, 그분의 연민과 동정과 자애와 유사하다.


오래 참음: 성나게 하는 것에 직면하여 성급히 보복하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는 것, 인내도 이와 유사함


분노: 특별히 죄의 도발에 대하여 외관상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의 표현.


신실: 언제나 자신이 하리라고 말씀하신 바를 행하신다는 것과 그 자신이 계시되어진 바와 같이 동일할 것임을 믿어지게끔 하는 하나님의 속성.


공의: 하나님의 본성과 행동간의 완전한 일치를 가리킴. 

 
거룩 :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고, 다르며, 측량치 못할만큼 높으사 또한 그에 걸맞게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시다.

: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를 제정하셨고, 그의 피조물들에게 제재하는 율법을 부과하셨다.


지혜: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치있는 목적들과 그것들을 위한 최선의 수단들 안에서 스스로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덕목.  



 
진리: 영원히 실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식과 선포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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