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방법 해석! 분해!

성경 해석의 원리 및 해석자의 중요성

하나님아들 2023. 7. 12. 23:16

성경 해석의 원리 및 해석자의 중요성              

 

성경은 유일한 책으로 다른 종교 서적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구속하셨는지에 대해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파가 다르고 믿는 신조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가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 아니고 성경 해석의 차이로 오는 결과이다.

여기서 올바른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올바른 성경 해석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특성을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올바른 성경 해석의 원리를 개혁주의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A. 문법적-역사적-정경적 해석 방법

 

1. 성경 해석과 교회

성경은 허공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의 책이요, 기독교 공동체에서 읽혀지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과 교회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교회가 성경 해석의 방향을 지도하느냐, 성경이 교회의 진로를 정해주느냐에 따라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전통에 입각해 성경을 해석했으며 그것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수했다. 이때 루터(Luther)가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해석으로 가톨릭교회의 교훈에 도전했을 때, 가톨릭교회는 루터에게 성경 해석을 할 수 없음을 명령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비밀’이란 교리 아래 개인 성도들에게 성경해석권을 허용치 않고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이는 교회 전통이 성경 해석을 주관하는 면모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들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가르친다. 개혁주의 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또 보호하는 임무를 위탁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해석적 사명을 감당한다고 믿지만 교회의 결정을 성경 위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오한 것으로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관계가 정경 형성 문제로 인해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 형성의 과정으로 인해 도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에게 의아심을 야기시킨다. 현재의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수납된 것은 교회 회의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흔히 교회 회의가 성경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마치 교회가 성경을 정정하거나 다른 교훈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 정경이 존재하게 된 과정을 우선 생각해 보면 교회가 성경을 정경(Canon)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바울 서신을 예로 들면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가 산출했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 후대의 교회가 만들어 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로마서는 바울이 쓸 때 영감 되었으며, 계속해서 영감된 기록으로 전해 내려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경의 형성을 순전한 인간의 판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야놀드(Yarnold)는 이 점에서 잘못을 범했다. 그는 교회가 정경을 인정한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판단이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서 있다. 즉 교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투표로써 성경을 무효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결정으로 어떤 책은 영감 되었고 어떤 책은 영감 되지 않았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그 책들이 영감된 책들이라고만 생각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후서 3:16-17을 기록할 당시는 사실상 구약뿐만 아니라 이미 써진 신약도 포함하여 언급하고 있다(딤전 5:18). 그런데 1세기 말에는 모든 성경이 완결되어졌다. 교회의 결정은 실재(reality)에 대한 동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실재는 이미 존재한 것이었고 사실상 교회의 동의가 있기 전에 존재한 것이었다.

 

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우체국에 우표가 붙어 있는 편지 위에 검인(stamp)을 찍는 것과 동일하다. 검인을 찍었기 때문에 우표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우표가 있었기 때문에 검인을 찍어 그 존재를 확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표의 존재는 검인의 유무에 불구하고 편지 봉투에 붙어 있었지만 오직 우체국에서 검인을 찍음으로 그 존재를 확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뉴튼(Isaac Newton)이 만유인력(the force of gravity)을 만든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만드신 것이다. 뉴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발견한 것뿐이다.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후서를 썼는가?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후서를 쓴 것이 아니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서신들을 쓴 것이다. 바울이 서신들을 쓸 때에 이미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고 교회가 후에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경도 교회가 수납하기 전에 이미 정경으로 영감되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교회가 후대에 가서야 정경으로 받은 것에 불과하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그 시기가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부피가 작은 책은 교회 전역에 보급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각권을 처음으로 받았던 수신자들은 그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으로 곧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경들을 신적인 권위가 있는 책으로 수납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공적 결정을 내린 히포(Hippo)회의(393년)와 카르타고(Carthage) 회의(397년)에서 의결되었기 때문에 성경이 영감 되어진 것이 아니고 성경 66권은 그들의 내용에 의해서 신령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oracles)으로 인정된 것이다.

 

“성경의 책들인 ‘정경’(혹은 권위 있는 책 목록)의 형성 과정은 교회가 이 책들에다가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책들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권위를 인정하는 것(recognition)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문을 지배할 수 없고 오히려 본문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문 해석, 즉 성경 해석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성경 자체는 오류가 없는 것이다.

 

2. 문법적-역사적이라는 용어

 

해석의 원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재삼 인정하여야 한다. 성경 내에서 찾아진 해석의 원리는 해석자의 마음속에 내재함으로 실제적인 해석을 할 때, 해석자에게 안정감을 주고 해석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은 성경의 기록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방법은 성경이 기록됨과 동시에 성경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법적-역사적이란 용어를 성경 해석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카일(Karl A. G. Keil)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문법적-역사적이란 말은 해당 언어의 문법적 법칙과 역사적 사실과 형편을 터득하여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법적’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문자의 뜻을 찾는 문자적(literal)이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같다. 영어에 익숙한 우리들은 ‘문법적’이라 하면 단어와 구절을 배열하여 문장을 만드는 것으로 그 뜻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서 ‘문법적’이라고 하면, 성경에 사용된 단어와 구절이 쓰여질 때,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원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역사적’이란 말은 역사적인 형편 가운데서 저자가 사용한 용어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저자의 시대와 형편을 연구하여 저자가 사용한 말의 참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과 ‘역사적’이라는 말이 밀접히 연관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란 역사적인 형편과 환경에 의해 그 뜻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법적 해석법

 

‘문법적’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내에 나타난 문법을 자신의 문법으로 생각하고 해석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일반적인 문법적 규칙에 비추어 상충되는 성경 본문을 대하게 될 때, 성급하게 성경의 문법적 오류를 지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저자의 뜻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해석자는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성경 저자가 사용한 언어의 문법을 습득한 후 그 문법을 해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해석자는 저자가 의미를 붙여 사용한 용어들의 구조나 설명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문맥이나 사상의 연결을 연구하여 저자의 의도인 주제, 범위, 목적 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문법적-역사적 해석에서 중요한 원칙은 일반적으로 단어나 문장이 한 문맥에서 한 뜻만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와이너(Winer)는 “살아있는 대화의 언어에서는 하나의 정관사가 반드시 필요한 그곳에서 생략되어졌다고 가정할 수 없다. 헬라어 ‘오로스’(ὄρος)는 결코 ‘그 산’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없고, ‘토 오로스’(τὸ ὄρος)는 결코 ‘하나의 산’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법적 연구는 항상 그 원어의 법칙과 원리를 연구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연구하며, 그리고 그 단어가 다른 단어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격, 법, 시상이 문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사상의 발전 등을 연구하여 그 언어가 그 당시의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문법적 해석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문법적 해석은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용어들의 뜻이 문맥 안에서 이해될 때 올바로 이해되며, 문장의 요점과 강조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역할은 문맥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법적 해석을 위해서는 단어의 뜻을 어원적으로 연구하고, 그 단어가 성경에 쓰여 졌을 때,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단어가 문맥 내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문법적 해석 방법이 올바른 해석 방법인 이유는 성경의 기록 성격에서 증명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계로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성품, 배경, 교육 정도 등을 무시하지 않고 사용하시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잘못 없게 기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 본문 속에서 저자들 자신의 차이점과 특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의 사상이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저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에 비추어 사용되어진 용어의 뜻을 찾아내야 하지만, 저자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저자의 문법이 우리들의 문법이 되어야만 올바로 그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문법적 해석을 위해서 어원학(Etymology)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원학은 단어의 기원과 그 형태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어떤 단어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흔히 어원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성경 본문에 적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실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습관은 본문을 곡해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에 나타난 단어의 뜻이 반드시 어원학적인 연구를 통해 얻어진 뜻과 같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바르는 이와 같은 위험을 지적하면서 어원학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단어의 뜻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원학은 단어의 기원을 연구하고 그 의미의 변천 역사를 연구하여 단어의 뜻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의미에 도달했는가를 알려주는 데 큰 기여를 한다. 또한 성경 본문에 단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인 ‘하팍스 레고메나’(ἅπαξ λεγόμενα)의 뜻을 찾기 위한 출발은 아마도 어원학을 통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자는 역사적인 변천에 따른 단어의 뜻을 찾는 일은 숙련가에게 맡기고 숙련가들의 수고를 사용하여 그 단어가 사용되어질 문맥을 잘 연구하여 단어의 뜻을 문맥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문법적 해석법은 어원학의 연구 결과를 참조하여 문맥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4. 단어 연구 방법

우리가 단어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데 최소한 다음의 절차를 숙고해야 한다.

(1) 우선 주어진 단어가 어느 정도 지시적(referential)인지를 결정

한다.

(2) 표준 사전들을 택하여 그 단어의 의미론적 폭을 결정하되 그 폭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한 의미인지 살핀다.

(3) 그 단어의 병치 관계를 살핀다.

(4) 그 단어의 동치 관계와 그 단어의 넓은 문맥들을 살핀다.

(5) 역사적, 동시적 차원을 살핀다.

(6) 저자의 의식과 의도에 초점을 맞춘다.

 

5. 역사적 해석법

이미 ‘문법적’이란 말과 ‘역사적’이란 말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사실을 언급했다. 올바른 문법적 해석을 하려고 하면 언어가 사용되어진 역사적 형편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를 기록하게 하실 때 그 계시가 주어진 시대의 언어를 항상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역사적 해석 방법은 다음 사실을 근거로 시작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방법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사건들에 비추어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어떤 말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그 말을 쓸 때의 정신을 포착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셋째, 저자와 저자의 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글이 써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글의 내용을 올바로 터득할 수 있다.

넷째, 장소, 시대, 환경 등은 그 가운데서 기록된 글에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역사적 해석 방법은 오늘날 범람한 역사적-비평적(historical-critical) 해석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칼 바르트도 그의 로마서 주석 2판 서문에서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통한 연구는 주석을 하는데 있어서 서론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 주석은 역사적-비평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하며, 주석은 본문의 실제 뜻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칼 바르트 자신도 역사적-비평적 방법이 신학을 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역사적-비평적 해석 방법은 성경 기록들을 순전한 인간의 산물로서 생각하고 그 기록들이 역사적인 가치가 있느냐 하는데 큰 관심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해석 방법은 성경의 각 책을 연구하는데 그 책이 써진 역사적 형편에 비추어 연구하므로 본문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무오하게 기록된 성경이지만 성경 기록에 사용된 언어들은 역사적인 언어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성경의 언어들 역시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받은 언어를 하나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시되 저자들을 영감 시켜 잘못 없게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기록될 당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받은 언어의 뜻을 알 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역사적 해석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지적해 준다.

역사적 해석은 저자, 저작 연대, 저작 장소, 저작 형편 등을 알므로 성경 본문 해석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해석자가 성경 이해를 위해 역사적 연구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로, 해석자가 현재 살고 있는 형편을 떠나 성경이 기록된 과거의 형편 속에 자신을 완전히 담을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 성경 저자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성경 본문을 곡해할 만큼 그들을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6. 정경적 해석법

여기서 사용하는 정경적 해석 방법은 지금까지 언급한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과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보충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정경적 해석 방법은 벌코프(Louis Berkhof)가 설명한 “신학적 해석법”과 비슷한 방법이다.

여기서 비슷한 방법이라고 말한 이유는 정경적 해석법과 신학적 해석법이

 

첫째로, 정경적 해석 방법은 성경의 신적인 기원을 인정하며 따라서 성경의 통일성의 근거 위에 설립된 것이다.

둘째로, 정경적 해석 방법은 정경 66권이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정경 66권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다.

셋째로, 정경적 해석 방법은 계시의 점진성을 인정하는 해석 방법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벌코프의 “신학적 해석법”과 그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를 나타낸다. 보스(G. Vos)는 “계시는 구속과 서로 짜여 있기 때문에 구속을 생각지 않게 되면 계시는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계시가 구속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계시의 점진적 성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정경적 해석법은 어떤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넓은 구속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서 성경 해석에 임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넷째로, 정경적 해석 방법은 성경 66권 속에 여러 가지 문학적 장르로 기록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문법적-역사적 방법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7. 성경 해석 원리의 요약

(1)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2) 성경 원어의 어휘와 문법을 익혀야 한다.

(3) 성경 원저자의 뜻을 찾도록 해야 한다.

(4)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배경을 성경 해석에 참조해야 한다.

(5)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B. 특수한 해석 방법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경 본문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명백한 상충이 나타나지 않으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가지 언어의 표현법(figure of speech)을 활용하여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분의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 언어의 특성을 계시 전달 과정에서 그대로 활용하셨다는 점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의 특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의 표현법은 단어를 사용하거나 사상을 사용한다.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한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사상을 사용할 경우에는 여러 단어를 합치거나 한 문장 전체를 사용하여 그렇게 표현한다.

 

힐쉬(E. D. Hirsch)는 여러 가지 종류의 문학적 표현을 운동 경기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운동 경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그 경기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어떤 해석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경우는 먼저, 어떤 경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유는 그 경기의 운영 규칙에 대해 혼선이 있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성경 저자가 어던 문화적 표현을 사용하여 계시를 전달했는지 알아야 하며 그 문화적 표현의 해석 방법을 알고 있을 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1. 간략한 언어의 표현법

 

(1) 비교를 강조하는 표현법: 직유와 은유

첫째, 직유(simile)는 명백히 표현된 비교이다.

직유는 “~같이”(like) 혹은 “~처럼”(as)을 사용하여 명백한 비교를 통해 교훈을 준다. 직유에 있어서 비교는 사상이나, 집단이나, 행위를 비교한다. 그리고 주제와 비교하고 있는 그것과는 별개의 성질로서 구분시키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서 비교한다.

하지만 올바른 성경 해석이 이루어지려면 직유 해석의 유의점을 명심해야 한다. “직유들은 이해의 증가를 가져오지만, 그것들이 완전한 모습이나 이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해석자는 직유들이 조명해 주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하지만 너무 열심이 지나쳐서 직유가 명백히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 이상 전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직유의 해석은 스스로 해석되어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해석자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 비교된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은유(metaphor)는 명백히 표현되지 않은 비교이다.

은유는 직유보다 성경에 더 자주 사용된다. 그리고 은유의 경우는 그 특징들이 함축적으로 비교된다. 은유의 경우는 문맥을 통해서 그 뜻이 밝혀지지만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 은유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말의 의미가 다른 뜻으로 전환되는 화법이다.

은유의 표현은 그 의미가 함축된 표현 방법이기 때문에 직유에 비해 훨씬 간략하며 더 날카롭게 나타난다.

 

(2)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표현법: 완곡어법과 곡언법

첫째, 완곡어법(Euphemism)은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완곡하게 표현하므로 상대방에게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표현이다.

둘째, 곡언법(曲言法, Litotes or Meiosis)은 부정적인 진술을 사용하여 긍정적인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상당히 좋다”(pretty good)라는 표현을 “나쁘지 않다”(not bad)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3) 효과를 진작시키는 표현법: 과장법과 반어법

첫째, 과장법(誇張法, Hyperbole)은 표현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과장시키는 표현 방법이다.

과장법은 우리에게 비진리를 믿지 않게 하고 강조를 통해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아 그 문제에 대해 심각히 고려하게 만든다.

 

핑크(A. W. Pink)는 과장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지켜져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과장법은 실제로 사실인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② 과장법은 보통 이상으로 고려해야 할 사건에만 적용시켜야 한다.

③ 과장법은 잠언의 형태로 진술되어야 한다.

④ 과장법은 평등과 불평등의 비교로 설명하기보다 유사점과 차이점의 관계로 설명해야 한다.

 

둘째, 반어법(反語法, Irony)은 저자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표현하므로 그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법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맥이 있어야 한다. 말하는 사람의 말할 때의 형편과 듣는 사람과의 관계를 알아야 반어법을 바로 해석할 수 있다.

 

(4) 연관을 사용하는 표현법: 환유법과 제유법

첫째, 환유법(換喩法, Metonymy)은 전유법이라고도 하며, 한 단어를 다른 단어가 사용될 장소에 넣어 사용하므로 두 단어의 실제적인 관계를 설명해주는 표현법이다.

 

환유법이란 한국 대통령 대신에 ‘청와대’를 쓰거나 미국 대통령 대신에 ‘백악관’을 쓰는 경우를 말한다.

둘째, 제유법(提喩法, Synecdoche)은 대유법이라고도 하며, 일부분이 전체처럼 혹은 전체가 일부분처럼 표현되는 방식이다.

 

제유법은 단수가 복수를 대신해서 사용되거나, 복수가 단수를 대신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환유법은 비교되는 두 요소의 관계가 저자나 말하는 사람의 형편이나 삶의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 즉 그 관계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제유법은 비교되는 두 요소 사이의 관계가 물질적인 차원이나 범주적인 차원에 기초하고 있다. 즉 그 관계가 관련된 사물들의 본질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5) 인격적 차원이 강조된 표현법: 의인법과 돈호법

첫째, 의인법(擬人法, Personification)은 무생물이 마치 생명과 인격을 소유한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이다.

둘째, 돈호법(頓呼法, Apostrophe)은 글의 도중에서 갑자기 격앙된 어조로 사람 또는 물건의 이름을 부르는 표현법이다. 사람이나 물건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 비유와 풍유의 해석

(1) 비유(Parable)

비유는 직유의 연장된 형태이다. 비유는 우화(fable)나 풍유(allegory)와는 구별된다. 풍유는 실제적인 경험이나 비실제적인 경험을 활용하여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형태(form)로 나타난다.

우화의 형태는 비이성적인 피조물이 이성적인 행위나 말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꾸며진 것이다. 그리고 우화의 내용(content)은 세상 도덕을 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개된다. 우화는 영적인 차원이나 신적인 자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이처럼 비유는 그 형태나 내용에 있어서 우화와 구별된다.

 

비유, 우화, 그리고 풍유가 모두 연장된 형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간에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비유와 풍유가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 우화는 세상적인 도덕에 더 관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비유는 하나의 중요한 요점만을 나타내는 반면, 우화와 풍유는 여러 가지 요점을 나타낼 수 있다. “비유는 도덕적 혹은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보통 생활 속에서 얻어진 짧은 이야기이다. 각 비유는 하나의 요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비유를 풍유처럼 취급하려고 할 때,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비유는 실재적(reality)이고 자연과 생활의 참다운 사건들과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비유의 목적과 내용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하늘에 근거한 것이다. 모든 비유의 근거는 창조의 법칙에 따라 지상적인 것이 하늘의 것의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것들을 설명하고 상징하기 위해 자연과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현상들을 사용하신 근거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것들의 모형으로 자연적인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비유를 분석해 보면 몇 가지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비유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이로운 점이 있다.

둘째, 비유는 편견을 제거할 수 있다.

추상적인 표현은 적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비유는 적대심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교훈을 전달할 수 있다.

 

셋째, 비유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넷째, 비유는 단순히 교훈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심오한 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를 통해 태초부터 창조 속에 감추어진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창조의 사역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드(C. H. Dodd)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정의한다. “비유란 가장 간단히 말해서 자연이나 일상생활로부터 이끌어 온 은유나 직유인데, 그 비유의 생생함이나 특이함으로 듣는 자들을 사로잡고 그 비유의 정확한 적용에 대해서는 듣는 자들의 마음에 충분한 의심을 남겨두므로 적극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비유 해석의 원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유에는 주님께서 설명하시고자 하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

둘째, 비유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비교되고 있느냐를 아는 일이다.

셋째, 비유를 문맥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넷째, 비유의 중심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기본적인 요소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비유의 메시지와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비유를 해석할 때, 왜 그런 비유로 가르치셨는지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곱째, 일반화된 어록이 비유 속에 있을 경우, 그 어록은 권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덟째, 극단적인 해석은 피해야 한다.

아홉째, 억지 해석은 피해야 한다.

열 번째, 분명하고 절대적인 비유 해석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열한 번째, 비유 해석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비유를 교리 구성의 주된 근거나 절대적인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풍유(Allegory)

풍유는 은유의 연장된 형태로 되어 있다. 풍유는 주제와 비교하는 것이 서로 얽혀져 있다(참조. 시 80:8-16). 풍유는 주동사가 여럿 있으며 동사의 시상도 여러 시상으로 구성되어질 수 있다. 풍유는 비교가 직접적인 것이고, 용어는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교의 요점이 여럿 나타나며 일반적으로 영원한 진리를 강조한다. 풍유는 또한 실제적인 경험과 비실제적인 경험이 혼합되어 특별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풍유적 해석은 본문 속에 감추어진 특이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따라서 풍유적 해석은 전혀 다른 주관적 의미가 본문의 의미인 양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풍유화는 어떤 설화(narrative)의 일차적이고 명백한 뜻에 근거한 이차적이고 감추어진 뜻을 찾는 것이다. 풍유화시키는 사람은 어떤 설화를 취하여 원저자가 의도한 일차적이고 명백한 뜻은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임의적으로 그 설화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풍유의 해석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풍유는 성경에서 정당하게 사용된 언어의 표현법 중의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갈 4:21-31; 요 15:1-10).

둘째, 성경 본문에 이미 해석이 주어진 것을 적어 보면 전체 풍유 해석에 큰 도움을 준다.

셋째, 풍유는 그 지역 형편이나 역사적 설화의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넷째, 청중이나 독자가 누구였는지 명백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풍유는 옛날 설화의 문학적인 형태보다는 교훈의 살아있는 매개체로 나타난다.

다섯째, 왜 풍유로 말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도록 해야 한다. 풍유는 진리의 특별한 면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섯째, 원저자가 강조하고자 한 비교의 기본 요점들을 찾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풍유는 이런 기본적인 요점을 강조하므로 기본적인 요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일곱째, 기본적인 요점들을 열거한 후 왜 이 기본적인 진리들이 원래 청중들에게나 독자들에게 근본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간단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들이 오늘날 무슨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풍유와 비유가 다른 점은, 비유가 이야기와 그 해석이나 혹은 적용을 특별히 구별시킨 반면, 풍유는 이야기와 그 뜻이 서로 엉켜져 있다는 점이다. 해석적으로 풍유와 비유가 큰 차이를 나타낸다. 비유의 해석에서는 해석의 내용과 관심이 한 초점에 맞추어지고, 자세한 내용은 그 초점과 관계될 때에만 의미가 나타난다. 반면 풍유의 해석에는 일반적으로 한 초점에 집중됨 없이 여러 가지 요점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겨자씨의 비유(마 13:31-32)는 복음 전파가 적은 무리의 기독교인들(겨자씨)로부터 많은 사람의 신자 혹은 온 세상에 퍼져있는 신자(완전히 성장한 나무)에게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 중심 요점이다. 반면 기독교의 전신갑주(엡 6장)의 풍유에서는 요점마다 의미가 있고 각 요점이 반드시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 풍유, 우화를 요목별로 비교해 보자.

첫째, 비유, 풍유, 우화 모두 연장된 형태의 이야기란 점은 공통된 요소이다.

둘째, 비유, 풍유, 우화 사이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이야기의 배경

비유 - 실제적인 생활 경험
풍유 - 실제적 혹은 비실제적 경험
우화 - 비실제적인 사건

② 나타내는 요점

비유 - 하나의 중요한 요점만 나타냄
풍유 - 여러 가지 요점을 나타냄
우화 - 여러 가지 요점을 나타냄

③ 전달하는 메시지

비유 - 영적인 진리
풍유 - 영적인 진리
우화 - 세상적인 도덕

여기서 풍유의 부분을 지나가기 전에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예를 통해 풍유가 아닌 본문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난폭하게 본문을 다루는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헤롯 대왕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미만의 사내 아이들을 살해한 사건을 해석하면서 어떤 이는 말하길 “두 살 아래의 어린이들만 살해되고 세 살 먹은 어린이들이 피할 수 있었던 사건은(cf. 마 2:16-18) 우리들에게 삼위일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함을 받고, 반면 신의 두 위만을 믿는 자들(binitarians)이나 유일신론자들(unitarians)은 의심할 것 없이 멸망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Spuria of Chrysostom)라고 말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출애굽기 17:8-16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르비딤에서 싸운 기록이 나온다. 여호수아 장군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군대를 지원한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고 전한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를 바위 위에 앉히고 모세의 양쪽 팔을 붙들어 올려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여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모세가 손을 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손을 든 것은 합심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성도들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데 유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문에 없는 사상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3. 표상과 상징의 해석

(1) 표상(Typology)

표상은 현재의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사용하여 미래에 나타날 원형인 인물이나 혹은 사건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표상과 원형 사이에는 서로 상응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표상은 세상에서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발전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궁극적인 형태와 완성이 단번에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은 역사적으로 완전한 실현의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표상에 상응하는 신약의 원형에는 종말론적인 충만이 나타난다. 구약의 표상에서 분명하지 않은 개념이 신약의 원형에서 충만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표상론은 구속 역사의 진행 속에 더 충만히 나타난 종말론적인 성취를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표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요,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적 실현은 하나님 자신이 미리 정한 계획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같은 언약의 다른 세대들이, 후기 세대는 그 이전 세대의 진전으로, 이전 세대는 다음에 오는 세대의 예표로서 완전을 향해 발전하는 것이다.

“표상은 과거 역사적 사건들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문자적 주석도 아니며, 또한 과거에 발생된 사건들을 단지 상징으로 취급하여 영적으로만 해석하는 풍유적 주석도 아니다. 오히려 표상은 과거의 사건을 약속으로, 그리고 후대의 사건을 성취로 생각하여 역사적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중요한 가정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상관관계를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하나의 표상은 성경적인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로서 다른 사건들이나, 인물들이나, 제도들을 위해 표본이나 혹은 패턴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표상의 역사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표상들은 미리 정해진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 제도(들), 구약 세대로서 그 자체로 실재적(real)이지만 그 실재의 더 고상하고 미래적 형태를 예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옛날의 인물이나 그룹 혹은 경험 등에 특징을 부여하셔서 그 특징이 다음 시대에 더 완전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표상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표상은 그 자체가 실재 역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둘째, 표상은 항상 미래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셋째, 표상(Type)와 원형(Antitype)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어야 한다.

넷째, 표상은 하나님이 계획한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일반 원리는 우리가 표상으로 생각하는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이 그것을 표상으로 계획 하셨음이 명백하다.

다섯째, 표상과 원형 사이의 구별이 있다.

표상은 항상 원형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표상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의 계획된 뜻의 전체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표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알 때만 하나님의 뜻을 전체적으로 알 수 있다.

 

표상을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표상으로 사용되는 인물들(persons)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둘째, 제도(institutions)

셋째, 직책(offices)

넷째, 사건들(events)

다섯째, 행위들(actions)

가장 중요한 표상의 해석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표상은 사건들이나 인물들, 혹은 사물들 간의 연계를 계시의 역사적 구조 안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 표상과 원형과의 사이에 명백한 유추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유추와 사소한 것들과는 구분시켜야 한다.

셋째, 표상과 원형 사이의 차이점들을 언급하되 표상의 열등성과 불완전성을 강하게 부각시켜야 한다.

넷째, 표상은 항상 신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표상의 충분한 이해는 표상을 원형에 비추어 볼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2) 상징(Symbols)

사실상 모든 언어는 상징적인 것이다. 단어나 구절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사상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해석을 하는 경우 사실은 일련의 상징들을 다른 상징들로 바꾸므로 같은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는 많은 상징들이 있다. 그리고 상징들을 해석하기란 어렵다. 상징들은 표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표상보다 해석하기가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상징은 일반적으로 상징하는 대상의 그림이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 사이에는 유사점이 별로 없다. 떡과 포도즙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나. 일곱 금 촛대(계 2:1)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17)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아담에게 제재나 금지를 시킬 권한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은 이를 잘 뒷받침 해 준다.

상징과 상징하는 대상의 관계는 흔히 논리, 상상, 느낌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은 형태나 모형의 상징들을 제시한다. 즉 네모, 입방체, 원 등이 상징으로 나타나며 숫자의 상징, 색상의 상징, 금, 은, 보석 등 귀금속의 상징 등도 있다. 그리고 바다, 지구, 바람, 동물 등의 상징들도 있다.

 

마이클센(Mickelsen)은 상징 이해를 돕기 위해 상징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상징 자체는 문자적인 물체이다.

둘째, 상징은 어떤 교훈이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셋째, 상징으로 사용한 물체와 물체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 사이의 관계는 우리가 상징을 사용한 사람의 의도를 알 때, 더 명백해진다.

상징의 의도가 알려지면 상징은 스스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상징이 본래 무슨 교훈을 가르치도록 의도되었는지를 찾아야 한다.

 

상징과 표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상징이 다음 시대에 오는 실재에 의해 대치될 때, 그 상징은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은 영적이고 하늘의 실재를 나타내 보이는 지상적 표시(sign)이다. 이와 같은 성경에 나타난 상징들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략적인 구분을 하자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상징적 사물

촛대, 떡, 불, 술, 태양, 달, 별, 장막, 황소, 사자, 독수리 등

② 상징적 환상(Vision)

③ 상징적 행위

④ 상징적 속성과 상징적 이름

 

 

숫자(1, 3, 4, 6, 7, 10, 12 등) 및 이런 숫자들과 관계된 다른 숫자들의 사용, 색깔(Colors), 모형, 형태, 차원, 이름 등

이러한 상징들을 해석하는 원리를 대략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 자체가 그 상징을 해석해야 한다.

둘째, 상징 자체가 우리의 이해에 납득되어야 한다.

셋째, 상징이 나타나는 모든 성구를 찾아 비교함으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뜻을 찾아야 한다.

넷째, 어떤 특정한 문맥에 나타난 상징의 특별한 뜻을 찾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연구해야 한다.

다섯째, 상징은 때로 하나 이상의 대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여섯째, 상징은 처음 독자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었지만 여러 가지 장애적인 요소로 인하여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명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의 해석을 할 경우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성경을 대해야 한다.

 

4. 예언의 해석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로 예언자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는 대언자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아론(Aaron)은 모세(Moses)의 대언자가 되는 것이다.

예언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들을 말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런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예언이 모두 나타나 있다. 예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때, 첫째, 예언은 미래 사건을 미리 말하는 경우가 있다(참조, 계 1:3; 22:7,10). 둘째, 예언은 현재에 관한 감추어진 사실들을 나타내 보이거나(눅 1:67-79; 행 13:6-12), 교훈과 위로와 권면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아모스; 행 15:32; 고전 14:3-4, 31).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예언 중 미래의 사건을 미리 말하는 예언이 많이 나타난다.

페인(Payne)은 성경의 31,124 구절 중 8,352 구절(27%)이 기록된 시점으로나 말해진 시점으로 볼 때 사실을 예언한 것으로 주장한다.

 

(1) 예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어떤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언을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기록한 역사로 생각하거나(vaticinium post eventum) 혹은 예언을 미리 기록한 역사로 생각한다. 이런 견해들은 잘못된 견해이다. 예언은 일반 역사처럼 구체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언은 때로는 사건을 전혀 다루고 있지 않고 오히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의 실현에 대해 하나님의 전능한 섭리의 일반 원리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이클센(Mickelsen)은 “히브리 예언의 형태로 역사를 쓰는 사람은 예언자처럼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절반은 잊어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교의 조작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

 

(2) 예언과 구속 역사

예언은 주권적인 하나님이 미래에 발생할 일을 그의 선지자를 통해 미리 나타내신 것을 말한다. 예언을 이처럼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미리 말한 것으로 생각할 경우,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특별계시에 비추어 천국의 발전과 그 종국적인 절정을 미래 실현으로 내다보게 한다.

그러므로 예언은 많은 메시야적인 예언과 시에서 왕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고, 왕국의 백성들을 볼 수 있게 하며, 왕국의 다른 단계와 궁극적 완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예언을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실현할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든지 아니면 원하지 않든지 섬기게 되는 것이다.

 

(3) 예언 해석의 원리

첫째, 예언의 유기적인 특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예언과 역사의 연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예언에 나타난 표상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예언자 자신도 알지 못한 요소가 예언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 해석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의 특성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은 역사와 무관한 책도 아니며 그렇다고 역사상에 존재한 어떤 하나의 책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들을 사용하여 그분의 계시를 쓰게 하셨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무오한 기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인간의 작품”이다.

 

이처럼 성경은 다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특수한 책이기 때문에 성경 해석자는 성경의 신적인 특성과 인간적인 요소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즉 성경의 내재적 특성을 이해하면서 성경 해석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장에서는 이와 같은 성경의 특성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A. 성경의 신적 기원

성경해석학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믿음을 기초로 시작해야 한다. 이런 믿음은 성경 본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해석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본문으로 삼고 출발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성경 계시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이 배제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이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작용하시는 능력에 의해 조정되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참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영감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들의 말과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로 그들이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전한 것이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이전 세대에게 전달한 진리를 후세대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존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인간 저자를 소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간들을 사용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이 참 저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적이면서도 인적인 신비한 책인 것이다.

패커(J. I. Packer)는 “복음주의자들은 성육신이 ‘신비’(Mystery)인 것과 병행적인 의미로 성경이 ‘신비’임을 강조한다. 즉 인성이 하나님을 입은 것과 같이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이 동일하게 된 것은 우리들이 그 본질이나, 양식(mode)이나 역동적인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창조적인 신의 행위였다. 성경은 그것이 신적인 것과 똑같이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히 인적인 것이다. 그것은 유대기독교의 종교적 문헌 이상인 것이다. 기록된 말씀과 성육하신 말씀 사이에는 참다운 유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합치되었고 절대가 상대의 형태로 나타났다.”라고 바르게 설명한다.

 

성경은 인간을 저자들로 삼고 기록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저자들을 성령으로 영감시켜 그 인간 저자들의 기록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되게 하신 것이다.

 

던(James Dunn)은 디모데후서 3:16의 “영감”(θεόπνευστος)을 해석하면서, 디모데후서 3:16의 “영감”은 성경의 신적 영감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무오(inerrant)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영감”은 수동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이 숨을 내 뿜으신”(God-breathed)의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경의 참 저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저작성과 성경 무오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시라면 그분의 성령을 통해 영감으로 기록한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영감 활동에 오류가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바른 영감론을 가졌다면 성경의 무오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던(Dunn)은 디모데후서 3:16의 “영감”이 영감 이상도 영감 이하도 가르치지 않고 순수하게 신적인 영감만을 가르치지 성경의 무오(inerrant)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나, 성경은 항상 그 자체를 넘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저자로 가리킨다는 사실을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성경에 관한 논쟁을 고찰해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The Bible is the Word of God)의 “이다”(is)를 다른 말로 고쳐 쓰려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회 역사는 학자들이 “이다”를 “된다”(becomes) 혹은 “포함한다”(contains)등의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려는 시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신적 계시의 자료로 생각하고 객관적 계시로 받지 못하는 신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역사할 때에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성경 속에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기 때문에 거짓을 제거하고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성경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고 초자연적인 성격을 제거하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신적 기원 문제는 해석학 이전에 다루어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기 이전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해석학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입증시켜야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바른 성경 해석은 성경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고 믿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신적 기원을 믿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 해석학을 시작하기 이전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함을 볼 수 있다. 성령의 재생시키는 역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고”(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신적 기원을 믿는 믿음과 구원받을 믿음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경이 완성된 형태로 알려지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롬 10:9-13).

 

그러나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신앙은 성경 해석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신적 기원과 관련이 있는 성경의 무오성도 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만약 우리들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가정하면 오류가 있는 성경을 근거로 만든 성경 해석의 원리 역시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해석의 원리로는 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은 바른 성경 해석 원리를 산출하며 그런 원리는 해석자에게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서로 상충되는 것같이 보이는 본문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른 성경 해석이다. 에드워즈(Brian H. Edwards)는 말하기를 “성경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게목이다. 그것은 성경의 축자 영감교리만큼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해석한다면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면 하나님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 역사상 불행하게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성경을 호화찬란하고 어리석게 해석하므로 분명하고 명백한 교훈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우리 세대는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해석학은 이론의 문제만이 아니요, 항상 실제적 적용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성경 해석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성경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는 것은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성경의 무오성은 해석자에게 바른 성경 해석 원리를 제공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성경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는 믿음은 바른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B. 성경의 영감

성경의 신적 기원과 직결되어 있는 교리는 성경의 영감교리이다. 인간의 말로 기록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성경 영감교리에 관한 분야이다. 성경은 자체의 영감 문제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의 성경 영감에 대한 태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기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특성은 모든 신학적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기대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한 설명이 성경의 한 곳에서만이라도 명확하게 언급되었다면 그 설명은 성경 전체의 입장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경 영감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 20절과 21을 주해함으로써 성경이 어떤 영감의 방법으로 기록되었는지를 고찰하려고 한다.

 

1.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본문은 성경의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를 가르친다.

(1) 그렇다면 성경(γραφή)은 어떤 책을 가리키는가?

 

본문의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헬라어의 ‘그라페’(γραφή)라는 용어는 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전문적인 의미로 신약에서 사용된다(마 21:42; 22:29; 눅 4:21; 24:27, 32, 45; 요 2:22; 10:35 등).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 구절에서 ‘그라페’를 관사 없이 사용한다. 그라페가 바울 서신에서 관사 없이 사용된 예는 그렇게 흔한 예가 아니다.

 

바울 서신에서 ‘그라페’가 정관사 없이 사용된 로마서 1:2; 16:26; 디모데후서 3:16 중 로마서 1:2과 16:26은 정관사는 없지만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라페’가 구약을 한정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디모데후서 3:16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디모데후서가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 서신이요, 이 구절이 성경 영감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도 바울이 본 구절에서 정관사 없이 ‘그라페’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라페’가 관사 없이 사용되면 ‘그라페’에 질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즉 ‘그라페’의 질을 소유한 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일차적으로 구약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미 기록된 신약이나, 기록의 과정에 있는 문서들도 ‘그라페’에 속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2) “모든 성경”의 “모든”은 무슨 뜻인가?

본문의 ‘모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사’(πᾶσα)인데, 이 단어를 집합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전체(all)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해석과,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전체(every)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해석이 있다. 집합적인 개념의 전체나 개별적인 개념의 전체가 결과적으로 같은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모든”을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성경의 어느 부분은 영감되고, 또 어느 부분은 영감되지 않았다는 사상을 인출해 내기 때문에 본문의 경우 “모든”을 집합적인 개념의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성경의 어떤 저자도 성경으로 분류된 어떤 책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써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본문은 성경의 모든 부분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기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 본문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θεόπνευστος)이란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가 문장 구성상 서술적 위치에 있는지 혹은 한정적 위치에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서술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을 한정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으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한정적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성경을 직접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을 한정적으로 보다는 서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첫째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와 ‘오펠리모스’(ὠφέλιμος)가 “그리고”(καί)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데오프뉴스토스’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오펠리모스’(ὠφέλιμος)도 한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오펠리모스’(ὠφέλιμος)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본문의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데오프뉴스토스’를 한정적으로 생각할 경우, 즉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속에 성경의 어떤 구절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지지 않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경 66권 중 어느 부분만을 따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 한정시키고 있는 부분만이 “모든 성경”속에 내포되고 그 부분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문장 구조로 보나 그 의미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나 본문의 ‘데오프뉴스토스’는 서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바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θεόπνευστος)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한번 등장하는 단어(hapax legomenon)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동사적 형용사(verbal adjective)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데오프뉴스토스’가 능동적으로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느냐이다. 이 용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숨을 내뿜고 계시는”(God-breathing)의 뜻으로 해석되며, 수동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숨을 내뿜으신”(God-breathed)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 용법을 성경의 영감과 연결시키면, 능동적인 해석은 “성경이 영감 시키고 있느냐”(Scripture is inspiring)가 되며, 수동적인 해석은 “성경이 영감 되었느냐”(Scripture is God-breathed)로 된다.

이 문제는 얼핏 보기에 큰 문제가 없는 듯싶다. 하지만 ‘데오프뉴스토스’를 능동으로 취하느냐, 수동으로 취하느냐에 따라 성경 영감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데오프뉴스토스’를 능동으로 취하면, 성경은 단지 영감의 도구나 수단의 역할을 할 정도에 머물러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럴 경우 성경의 기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성경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행위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반대로

‘데오프뉴스토스’를 수동으로 취하면, 성경은 궁극적인 의의를 소유하게 되며 성경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숨을 내쉬는 행위의 산물로서 성경의 본문을 생각하는 것이다. ‘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의 내뿜는 호흡”과 “그라페”(γραφή)와의 본질적 관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비로운 특성 때문에 성경은 다른 모든 기록으로부터 구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에 의해 생성된 산물이다. 하나님의 이런 행위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기원과 그 내용이 하나님의 내뿜는 흐흡,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 기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본문의 저자이신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란 의미를 요약하면 현재 교회가 수납하고 있는 66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의 활동으로 나타난 산물로서 하나님께서 기록하기를 원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베드로후서 1장 20-21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본문은 성경의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 그렇다면 베드로가 “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말했을 때,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

“경의 모든 예언”(πᾶσα προφητεία γραφῆς)이 단지 예언만을 포함하는가 아니면 전체 성경을 포함하는가? 물론 베드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가치가 아니요, 성경의 신뢰성과 확실성이다.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19에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한 사실은 본문이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본문이 성경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베드로가 본문에서 예언과 다른 성경을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성경의 다른 부분과 구별하여 예언만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문맥에 나타난 의미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경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경의 모든 예언”은 구약의 예언 부분만을 가리키지 않고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2) 본문에서 성경이 될 수 없는 것과 성경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한글 개역 성경에 나온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에 대해 두 가지의 견해로 집약된다. 첫째해석은 한글 개역과 같이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거짓 선생들이 전통적인 집단에서 인정한 해석을 따르지 않고 사사로이 임의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잘못을 공격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할 때는 사사로이 해석할 것이 아니요 성령에 의해 인도된 정통 교회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베드로후서 3:16의 강한 지지를 받지만 몇 가지 어려움에 빠진다. 만약 베드로후서 1:20이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해석 방법을 배척하는 내용이라면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베드로후서 1:21은 배척의 근거로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1:21은 배척의 근거로 너무 약한 내용이다. 본문의 사상을 이런 입장으로 전개하면, 성경은 사사로이 해석할 것이 못 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애용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 본문의 뜻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 베드로후서 1:20-21은 베드로후서 2장의 내용보다는 1:16-19과 더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1:16-19의 내용이 방어적인 어조인 반면, 베드로후서 1:20-21의 내용은 공격적인 어조로 나타난다. 베드로가 정통 교회의 해석만을 인정하고 성도 개인의 해석을 금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성령께서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도록 교회를 인도하시지만 개인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령의 인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금지의 사상을 본문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둘째 해석은 “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해석으로 나온 것이 아니니”라는 의미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성경의 기원을 염두에 둔 해석이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이 구약을 생각할 때 구약은 선지자들이 자신의 환상에 대한 자기 자신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예언이 단순히 인간의 해석의 산물이 아닌 이유는 저자들이 자신의 뜻이나 해석을 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말했기 때문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20에서 어떤 것이 바른 해석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면 베드로후서 1:21은 논리 전개에 있어서 부적절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의 ‘에필뤼세오스’(ἐπιλύσεως)의 용법은 둘째 해석을 지지한다.

아퀼라(Aquila) 역본에서는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할 때, ‘에필뤼시스 / 에필뤼에인’(ἐπὶλύσις / ἐπιλυεῖν)을 사용한다(창 40:8). 그런데 문맥에서 꿈의 해석은 하나님이 주신 사실을 명백히 한다. 허마스(Hermas)도 ‘에필뤼시스’를 하나님이 주신 해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경우, 선지자들은 먼저 이상(암 7:1; 렘 1:11, 13)이나 꿈(슥 1:8; 단 7:2)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그 후에 해석까지도 받은 것이다. 에스겔 37:1-10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에 대한 이상을 주시고, 에스겔 37:11-14은 하나님께서 그 이상에 대한 해석을 직접 해 주신다. 다니엘 8:1-14까지에 나타난 다니엘이 을래 강변에서 받은 이상을 하나님이 직접 해석해 주신다(단 8:15-27). 그러므로 참다운 예언은 그 해석이 선지자 자신의 해석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해석이어야 한다.

 

여러 학자들이 ‘에필뤼시스’를 번역할 때 “해석” 이외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스펜스(R. M. Spence)는 ‘에필뤼시스’를 “계시,” “나타냄”(revealment)으로 번역했으며, 안드리(E. R. Andry)는 “충동”(prompting)으로 번역했고, 스피타(F. Spitta)는 “분해”(dissolution)로 해석했으며, 루오(J. Louw)는 “영감”(inspiration)과 “황홀경”(ecstasy)으로 번역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본문의 의미가 문맥에서 부드럽게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에필뤼세오스’(풀 것)가 “영감”의 뜻이 있다면 본문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운 영감(황홀경)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 21)로 문맥의 앞뒤가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 자신의 해석”으로 번역하면, 본문은 “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해석으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가 되어 성경의 신적 기원을 명백히 하며, 문맥의 앞뒤 역시 잘 일치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경이 인간의 연구 결과나, 어떤 종교적인 경험의 산물이거나, 어떤 영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경이 영적인 전문가들의 권면이나 조언에 지나지 않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 없이 해석한 내용이 있다면 그것도 성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문은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을 언급한 후,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 21)이라고 성경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본문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 성경이라고 말함으로써 성경 기록에 있어서 사람들의 역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면 성경이 다른 책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본문에서 성경은 “인간 저자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해석을 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과 기록한 것이 동일함을 볼 수 있다. 즉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 자체인 것이다(엡 3:3-4). 본문은 성경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명백히 한다. 베드로는 사람이 성경의 기원이 아님을 밝히고 곧이어 하나님이 성경의 기원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계시해 주셨는가?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라고 할 때의 “입은”이라는 표현이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입은”(페로메노이, φερόμενοι)을 특별하게 사용한다. 신약에서 이 단어가 성령의 활동과 연계되어 사용된 것이 여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단어를 여기에 의도적으로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본문에서 사용된 ‘페로메노이’가 성령의 사역과 관계되어 사용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용례를 통해 추정하는 것이 유익하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묘사한다. 여기 “강한 바람”이라고 할 때의 “강한”은 베드로가 사용했던 “입은”과 같은 용어이다. 이는 제자들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종된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가는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을 때의 형편을 묘사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행 27:14-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carried along by the wind)가 같은 용어의 우리만 번역이다. 본문에서 누가가 묘사하고자 하는 장면은 배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는 배로서 남아있었지만 항로와 목적지에 대해 자체적으로 전혀 조종할 수 없는 상태였고 바람의 조종을 받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활동은 성도들의 삶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1:21에서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인도하는 사역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의 “입은”(φερόμενοι)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운반자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마치 돛을 단 선박이 바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처럼(행 27:15, 17 참조), 성령이 성경 저자들을 충만하게 하여 성령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말한 그것이 바로 성령이 말한 것이 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경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령이 제1차적인 저자요 인간 저자들이 제2차적인 저자임을 분명히 한다.

키스트메이커는 “성령은 성경을 만들기 위해 도구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인간들을 사용하셨다. 성령은 인간들은 사용하시되 그들의 죄와 잘못에서부터 보호하시면서 그들의 재능, 통찰력, 버릇, 특성과 함께 사용하셨다. 성령이 사람을 조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 점에 있어서 명확하다. 즉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사람은 수동적이고 성령은 능동적이다.”라고 바로 설명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에 관한 그리고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영감에 관한 디모데후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21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소유한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내뿜는 호흡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저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철저하게 100% 활용하시면서도 그들이 기록한 내용이 하나님께서 기록하기를 원하시는 내용으로 나타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은 100% 신적이면서도 100% 인적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소유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C. 언어의 성격

 

1. 언어의 신적 기원

오늘날 자유주의 학자들은 신적인 행위나 계시가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의 애매성을 주장하며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경은 기껏해야 반사적인 기능만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경은 절대적인 것이 반영되어 상대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시도이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한다.

언어 분석에 정열을 쏟은 사람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있다. 그는 20세기의 철학자로서 간결성이 그의 특징이다. 그는 지성적인 혼잡(intellectual stables)을 정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깊은 사색을 통하여 표현을 간결하게 하려고 애썼던 철학자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자라났고, 1910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물리학, 수학, 논리학에 관심을 쏟았으며, 캠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럿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철학을 읽었다. 그는 스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의 몰락”(Decline of the West)과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불합리에로의 도약”(Leap into the Absurd)에 영향을 받았으며, 톨스토이(Tolstoy)의 말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결심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이 간결한 표현을 추구한 이유는 언어가 실재의 뜻을 정의하고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뜻을 흐리게 하지 않나 하는데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words)과 실재(reality)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저서에서 언어의 한계를 정하려고 노력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태도나 자유주의 학자들의 언어에 대한 태도는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며 따라서 초월적인 진리가 언어화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성경은 언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어적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언어활동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언어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 해석을 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언어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상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고, 언어를 통해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전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로 전달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도 바울(엡 3:3-4)이나 베드로(벧후 1:12-21)의 증언을 보면 언어로 계시 전달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은 언어화될 수 있고, 또한 언어화된 하나님의 진리는 전수되어질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어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 언어의 해석적 성격

성경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구속 역사를 해석해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해석적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언어화된 성경은 해석의 순전한 대상이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해석의 매개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언어로 기록되어질 때 이미 해석적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는 성경을 중립적인 산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자는 성경이 이미 해석자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해석이며, 해석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셨던 과거의 일, 현재 하고 계신 일, 그리고 장차 하실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는 것과 그의 백성을 죄에서부터 구속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주제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제를 연구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해석자의 궁극적 관심은 역사가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을 때, 그 역사의 구속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다. 해석자는 역사의 구속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속 역사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은 해석을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은 구속 역사를 해석해 놓은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 활동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나 우리들의 해석 활동은 모두 해석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성경이 구속 역사를 해석할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무오하지만, 우리들의 해석 활동에는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의 바른 전망은 성경에 우월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해석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아울러 언어의 해석적 성격은 번역에서도 나타난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해석적 성경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경우에도 해석적인 성격이 나타나며, 또한 번역 시에도 다소의 해석적인 성격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3. 언어의 역사적 성격

언어는 진공 가운데서 사용되어지지 않는다. 언어는 항상 역사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언어도 그 뜻이 변화되거나 상실되어진다.

그러므로 같은 뜻을 유지하는 영존한 언어는 역사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언어는 역사의 진전과 무관할 수 없다. 역사가 진전됨에 따라 언어는 그 뜻이 변화하며 어떤 언어는 완전히 사장되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상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언어의 역사적 성격을 감안하면서 연구에 임해야 한다. 때로 성경영감설과 무오성을 근거로 성경 언어의 역사적 성격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 언어의 역사적 성격을 인정함으로 성경 영감설이나 성경 무오성을 부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 언어의 역사성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사용하신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그 원리를 정당하게 취급하게 된다.

아울러 성경 원어에 있어서도 언어의 역사성은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는 언어의 역사적 성격을 인식하고 성경을 기록할 때 단어나 구절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내므로 성경의 원뜻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성경 언어의 역사적 성격을 무시하면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보다 오히려 이질적인 개념을 성경에 첨가시키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D.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1. 성경의 통일성

근본적으로 성경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는 사실 자체가 성경의 통일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의 저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전망으로 생각할 때 성경은 단일한 저자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고 성경의 한 부분은 신적인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벧후 1:21).

이사야 34:16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이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라고 말한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영의 지도를 받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경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은 그 성격상 본문적(textual)것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의 통일성을 성경 밖에서(above, beyond, beneath) 찾을 수 없다. 성경의 통일성을 생각할 때 성경 밖에서 구성된 단일화시키는 원리에 의해 성경 본문의 통일성이 판단되어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노력의 결과는 본문 내에 서로 상충된 신학이 가득 찬 것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신학이 성경 밖에서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판단하기 때문에 성경 속에 여러 가지 이질적인 신학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성경 속에 서로 다른 신학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성경 밖에서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판단하려는 현대신학의 신학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통일성은 본문(the text)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그것은 본문적이며 교리적이요 교훈적인 것이다.

본문적이라 함은 성경의 통일성을 찾을 때 정경 66권에서 찾아야 하며 정경 66권이 의미상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교리적이라 함은 정경 66권내의 교리가 다양성은 있으나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교훈적이라 함은 정경 66권의 교훈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경 66권 안에 외경을 삽입하거나 다른 책을 삽입하면 본문적, 교리적, 교훈적, 통일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2. 성경의 다양성

성경 내에 개념적인 다양성(diversity)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unity)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 내의 다양성을 통일성(단일성)을 더 풍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다양성을 연구할 때 항상 통일성의 규제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 내에 다양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이 인간 생활을 묘사하며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속받은 성도들로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또 했느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시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역사상에서 살아간 그 실제 모습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생활이 다양한 만큼 성경 기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다양성(diversity)은 기독교 교리를 연구해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선택 교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문제 등은 성경 저자마다 약간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의 표현과 바울 사도의 표현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견해를 약간씩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다양성은 한 성경 저자가 진리 전체를 모두 전수받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부분적으로만 안다고 말한다(고전 13:9-12). 이는 바울이 하나님의 진리 전체를 모두 알았다고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사실상 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전수받은 진리를 종합할지라도 그것이 모든 진리의 전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경 저자들이 부분적인 진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성견 애에 다양성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성경 내에 다양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적어 보자.

(1) 성경 내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 주변이 다양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묘사하므로 나타나게 되었다.

(2) 다양성의 또 다른 근거는 하나님이 어떤 종류의

사자(messenger)를 택해서 말씀하시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사자들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생활 배경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된 사자들의 인격과 성품이 다양한 만큼 성경 속에 다양함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성경 내의 다양성은 저자들의 저작 목적의 차이에 따라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열왕기상하는 남북 왕조에 모두 관심 있지만 역대 상하는 남 왕조에만 관심을 쏟는다. 바울의 개심을 설명할 때 사도행전 9:10-19과 22:12-19 사이의 강조점의 차이에서 다양성을 찾을 수 있다.

(4) 다양성은 메시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필요에 따라서도 나타날 수

있다.

비록 메시지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수신자의 필요에 따라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정경화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성이 나타나지만 전체가 합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통일성은 부분들의 완전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자료가 서로 완전 일치하는 것이다. 즉 성경 계시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일치하고 또 전체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에 함축된 해석학적인 원리는 모든 성경 해석은 성경적 계시의 구조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실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은 성경 교훈의 전체적인 면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즉 어떤 특별한 구절이 전체에서부터 분리되어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특정한 구절이 성경 전체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어지며 전체를 연결하는 구조에 입각해서 그 분문이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통일성은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는 문맥(context)을 존중하는 원리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어떤 성경 단위(unit)도 문맥(context)으로부터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 성경의 단위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함을 증거 한다.

문맥을 연구하므로 해석자는 저자의 전체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면이 저자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 일을 위해서는 문맥을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상이 표현되어지고 전달되어질 때는 서로 연관을 가진 일련의 단어와 구절 혹은 표현을 통해서 되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문장의 뜻은 앞뒤에 따라 나오는 다른 문장과 함께 연구될 때 올바로 이해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의 저자가 남자인지 혹은 여자인지 분간하는 것이 본문의 문맥을 연구하므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11:32에 기록된 표현 가운데 “~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ἐπιλείψει με γὰρ διηγούμενον ὁ χρόνος)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내게”(με)를 남성분사(διηγούμενον-διηγέομαι)와 연관시켜 사용한 것으로 보아 히브리서 저자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임이 확실하다. 하르낙(A. Harnack)은 히브리서 저자를 브리스길라(Priscilla)로 생각하나 이는 잘못이다.

오늘날 우리 성경의 장, 절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사상의 연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해석자는 사상의 연결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철저한 문맥 연구를 통해 찾아야 한다. 해석자가 문맥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자의 사상을 저자의 사상인 것처럼 본문의 내용에 첨가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해석자가 저자의 사상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삽입시킨다면 해석이라는 구실 밑에 자기선전을 하고 있는 격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해석자가 가장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점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맥과 문맥이 연합되어 전체를 이루고 그 전체 성경 가운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학적인 측면에서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들은 성경의 통일성을 올바로 인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 자체가 성경 해석학적인 명제로서 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성경은 성경 밖에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찾게 하는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 내에서만 해석의 원리를 찾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루터(Luther)의 “성경은 그 자체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말에서 “오직 성경”의 중요성을 찾아 볼 수 있고 종교 개혁시대에 성경 안에서만 성경 해석의 원리를 찾으려고 시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통일된 사상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자체를 해석하는 가장 좋은 해석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스스로 해석하는 자이다”라는 말고 뜻이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해석학의 일반적인 법칙인 “불분명한 구절은 쉽고 명백한 구절에 의해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전체적인 뜻은 항상 어떤 특정한 구절을 해석하는데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통일성은 그 특징이 구속적-역사적 (redemptive-historical)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의 신학적 논문을 수록해 놓은 것이 아니며 고립된 진술을 집합시켜 놓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역사적인 책으로 역사적인 자료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잘못 없게 기록해 둔 것이다.

특히 성경 계시는 그의 백성의 구속과 창조의 회복을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과정을 증명하거나 해석하고 있다. 성경이 구속 역사를 기술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성경 해석을 위해 성경 밖의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성경 밖의 학문이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중요한 원칙은 성경 내의 자료가 성경 밖의 자료보다 항상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어떤 특정한 문구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 문구를 구속적-역사적 전망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문맥이 무엇이라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속적 역사적 문맥이 무엇이라 하는가?”이다.

구속적-역사적 전망으로 볼 때 문맥의 원칙이나 성경 유일의 사상은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성경의 통일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이 완성된 작품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는 성경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바로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동시에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언어의 역사적 성격이나 해석적 성격이 바로 성경 자체 속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런 본질적인 특성을 아는 것이 성경을 바로 취급하는 것이요, 바른 성경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E. 외경(Apocrypha)

1. 정경과 외경

(1) 정경

정경이란 헬라어 “카논”(κανων, Canon)의 의역이다. 카논은 ‘척도나 표준’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이 말을 성경에 붙인 시기는 주후 4세기 이후였다. 이렇게 정경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그것은 (1) 사도성(apostolicity), (2) 내용(contents), (3) 보편성(universality), (4) 영감성(inspiration) 등이었다. 이러한 기준이 필요한 까닭은 정경이라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경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모든 선포와 신자들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신약 27권, 구약 39권의 성경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외경(Apocrypha)이나 위경 혹은 가경(Pseudepigrapha)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울러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도 외경 가운데 어떤 책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다.

(2) 외경

외경을 뜻하는 헬라어 ‘아포크뤼파’(ἀπόκρυφα)라는 말은 “숨겨진 책들”이란 뜻을 지닌 헬라어 중성 복수 형용사이다. 이 용어는 명예로운 명칭이었다. 그 까닭은 이 용어가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비밀의 교의가 그 자체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던 책들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음에 높이 평가되었던 작품들 중에는 헬라의 영지주의적 작품들과 유대의 기독교 묵시문학들이 있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파멸 이후 이 묵시문학들은 유대교에서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아마도 이 사건은 “외경”이란 용어가 천대받게 된 이유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어쨌든 ‘외경’이란 용어는 ‘거짓’ 혹은 ‘이교적’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 까닭은 이러한 묵시문학의 비밀의 지혜를 전수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숨겨진 비밀의 책들이 특별히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이교적인 교훈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외경에 포함된 책들은 역사적, 소설적, 설교적, 종교적, 묵시적 형태 등 여러 가지 문학적 장르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표준이 되기에는 미흡하기에 개신교에서는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외경이 신약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길잡이 노릇을 하는 중요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학 양식이나 교리의 발전, 평행구절의 비교 등 지엽적인 것에 그치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오늘날과 같이 이 용어가 정경에 들지 못한 특정한 종교적인 책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제롬(Jerome)에 의해서 된 일로서 그는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나 히브리 정경에 들지 못한 책들”을 외경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러한 책들은 교회의 교리들을 확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화를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히 제롬에게 있어서 외경이라는 용어는 이교적인 작품이 아니라 “비 정경”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에서 통용되고 있는 ‘외경’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우리가 정경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원 정경’(protocanonical)으로, 외경을 ‘제2 정경’(deuterocanonical)으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위경을 ‘외경’ 으로 부른다. 하지만 신약의 정경 형성에 관하여, 어느 책을 인정하고 어느 책을 배격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교회 회의의 결정 행위가 초기에는 없었다. 책의 선택과 용납은 교회를 통해 나아가고 있던 자발적인 과정이었을 따름이다.

2세기 말에는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책들을 포함하게 되었고, 3세기 동안에는 이른 바 ‘안티레고메나’(Ἀντιλεγομενα, antilegomena, 신약 성경 중 정경으로 의문시되던 논란의 책들)의 정경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동방에서는 특히 ‘계시록’을 반대하였고,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반대했었다. 최초로 정경에 관하여 결정을 내린 회의는 ‘카르타고의 제3차 회의’(The Third Council of Carthage, 주후 397년)였다. 이 회의에서는 오늘날의 신약 27권이 포함되었다.

신구약 중간기의 약 400년 기간 동안 일어났던 많은 중요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이었다. 이 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구약 성경의 진리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전달되었다. 아울러 당시에는 많은 외경들이 있었다. 외경들은 구약 정경이 편집된 이후 구약과 신약 중간시대에 기록된 14권의 책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외경들은 구약 히브리 정경에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칠십인경과 벌게이트역에 수록되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놓여졌다. 이러한 외경들은 유대인들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신약시대가 개막되기까지 몇 세기 동안 율법의 준수와 경건한 신앙의 덕을 권면하는 목적으로 기록한 종교적 문헌들이었다. 이 책들은 우상숭배의 실제적인 소멸, 메시아 소망, 부활과 미래의 보상과 징벌 신앙의 확신 그리고 신약에 대한 영향 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술과 문학, 종교에 대한 전체 성경의 영향을 확인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외경에 대한 지식을 배제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4권 가운데 11권을 소위 '제2의 정경'으로 인정하여 주후 1,546년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 성경의 한 부분으로 선포하였다. 즉 정경은 카르타고 회의에서 현재의 신약 성경 27권을 공인할 때 포함되어 있었으며, 트렌트 공의회에서 재확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내·외적 증거로 인하여 이 책들의 정경적 지위를 부정한다. 이 외경들은 유대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에 의해서 또한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조사한 교부들 중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성경으로 인정된 일이 없다.

외경에 속한 책들을 열거,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외스털리(W. O. E. Oesterley)가 분류한 기준에 따르면 전기 마카비 시대의 책으로는 제1 에스드라서(주전 300년경), 토비트(주전 250년경), 세 청년의 노래(주전 200년경), 벤 시라의 지혜서(주전 200년경, 집회서), 세 청년의 기도(주전 160년경), 유딧(주전 150년경), 에스더의 추가서(주전 140-130년경), 벨과 용(주전 150년경) 등이 있고, 후기 마카비 시대의 책으로는, 마카비 1서(주전 90-70년경), 마카비 2서(주전 50년경), 수산나 이야기(?), 솔로몬의 지혜서(주후 40년경), 바룩(주후 70년경 혹은 그 이후), 제2 에스드라서(주후 100년경), 므낫세의 기도(?) 등이다.

2. 제1 에스드라서

이 책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역대하 정경과 동일한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광범위한 부분(3:1-5:6)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대체로 전설적인 이야기로 그 내용은 참 지혜를 확증하기 위해 다리오 왕정에서 세 사람의 유대인 시동(侍童)이 벌이는 경연으로 되어 있으며 스룹바벨이 승리자였다. 그는 상으로서 유대인의 송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왕명으로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외경의 첫 번째 책은 개신교도에게는 에스드라 1서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일명 에스라의 헬라어형에서 유래되었고, 벌게이트를 사용하는 이에게는 에스드라 3서로 알려져 있다. 벌게이트에서 정경인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에스드라 1서와 에스드라 2서로 되어 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에스드라 1서는 로마 가톨릭에 의하여 2차적인 정경으로 용인되지 않은 책들 가운에 한 권이다. 에스드라 1서는 벌게이트의 클레멘트판(the Clementine Edition)의 말미에 위치되어 있다. 에스드라 1서는 아마도 개신교의 목록에서는 맨 처음이었을 텐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명칭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의 정경과 외경 사이의 적절한 연결을 이룬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이 책에 대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 카우취(Kautzsch)의 독일어판의 외경과 최근의 다수 독일어 판(아이스펠트를 포함해서)에서 에스드라 1서 대신에 에스드라 3서라는 벌게이트의 명칭을 부활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중적인 애매함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을 “헬라어 에스드라”라고 부른다. 에스드라 1서는 많은 언어와 많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당혹스런 문제를 제기한다. 에스드라 1서는 본질적으로 다음에서 보여주듯이 역대하 35: 1-36:23, 정경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전체가 말하는 내용을 재 진술하고 있다.

에스드라 1서 1장 = 역대하 25, 36장

에스드라 1서 2:1-14 = 에스라 1장

에스드라 1서 2:15-25 = 에스라 4:7-24

에스드라 1서 3: 1-5:5 = 이 책의 독창적 부분

에스드라 1서 6,7장 = 에스라 5,6장

에스드라 1서 8:1-9:36 = 에스라 7-10장

에스드라 1서 9:37-55 = 느헤미야 7:73-8:13

구약과 일치되는 에스드라 1서의 부분은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서 사본으로부터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책을 수록한 다른 성경들로부터 번역되었다고 여겨진다. 에스드라 1서의 헬라어역은 에스라-느헤미야의 칠십인경 번역보다 더 나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메쯔거(Metzger)는 에스드라 1서와, 역대하와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야기 사이의 가능한 관계를 설명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첫째는 에스드라 1서는 정경의 이야기들의 자료일 수 있으며, 둘째는 에스라-느헤미야가 에스드라 1서에 의하여 수정되었을 수 있으며, 셋째는 양자가 모두 공통적으로 독창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스드라 1서는 역사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미흡하며 기껏해야 진리를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의 도덕적인 편집물에 불과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3. 제2 에스드라서

이 책은 주후 100년경에 완성된 몇 편의 예언적 성격을 띤 묵시문학작품이다. 물론 구약 성경의 일부를 가리켜 ‘묵시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정경적 용어는 아니다. 이 용어는 18세기 비평학에서 유래했으며, 헬라어에서 따온 현상학적인 단어에 기원을 둔다.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극단적으로 종말론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이 개념은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시대에 발생했고, 주전 150년경 사이에 크게 번성했던 사조이다. 묵시문학의 형식적, 내용적 특성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저자의 익명성, 두 시대의 설정, 해석자가 필요한 정교한 상징체계, 역사 종말의 임박성, 역사와 연속되지 않는 구원 이해 등이다.

어떤 권위 있는 학자들은 에스드라 2서를 외경 가운데 두지만 다른 이들은 위경 가운데 두기도 한다. 이 책은 영어 번역본의 외경문헌들 가운데서 발견되며 1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경 가운데서는 묵시문학의 장르에 속하는 유일한 책이다. 또한 외경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정경상의 묵시록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어떤 학자들은 에스드라 2서가 매우 매력적인 빛으로 유대교의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에스드라 2서가 모든 외경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일 것이다.

영어역의 외경에서 에스드라 1서는 칠십인경의 에스드라 A, 또는 벌게이트의 부록에 실린 에스드라 3서를 말하고 에스드라 2서는 주로 에스라 묵시록(the Apocalypse), 또는 벌게이트의 부록에 실린 에스드라 4서가 된다. 따라서 영어에서는 개신교의 에스드라란 명칭은 외경에 속한다. 에스드라 2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3-14장으로 일반적으로 에스라 묵시록으로 알려진 것이며 앞에 2장, 뒤에 2장이 따른다.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이 네 장이 에스라의 묵시록의 일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책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학자들마저도 에스드라 2서가 사상들의 집결인 것을 인정한다. 라그레인지(Sagrange)는 모세적 요소가 문헌 속에서가 아닌 사상들 속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기 앞에 어떤 전승의 요소들을 두었으며 이것들을 융합시키거나 자기의 주된 주제와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삭제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아마도 주전 5세기 중엽에 살았을 서기관 에스라의 입을 통하여 구술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어느 부분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며 현재의 형태는 주후 1세기 말엽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에스드라 2서는 예루살렘 멸망 후 30년, 우리의 연대 계산으로 주전 557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곱 가지 환상을 수록하고 있다. 제2 에스드라서의 1-2장은 유대인 에스라의 묵시 원문인 3-14장에 첨가되는 반유대적인 부분이다. 3-15장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살라디엘 묵시록(the Salathiel Apocalypse) : 3-10장은 악의

문제와 이것의 내세에서의 해결을 취급하고 있다.

② 독수리 환상 : 11-12장은 로마제국과 메시아 도래를 취급하고

있다.

③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인간(메시아)의 환상 : 13장

④ 에스라가 어떻게 성문학을 재 기록하였느냐를 설명하는 전설 :

14장.

⑤ 마지막 15-16장은 신약과의 어구적인 일치성을 내포하고 있으

며 다소 뒤늦게 기록한 것으로 주후 270년으로 추정된다.

4. 토비트

토비트는 로마 가톨릭이 그들의 구약가운데 2차적 정경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 책이다. 히포(Hippo, 주후 393)와 카르타고(Carthage, 주후 419) 회의는 본서를 정경 가운데 하나로 결정하였다. 트렌트 회의는 이전의 종교회의들에 의하여 취해진 결정들을 재확인하였다. 쿰란의 제4동굴에 하나의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과 두 개의 아람어 맛소라 사본이 발견된 것은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본서가 읽혀지고 유대인들에 의하여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비록 토비트가 역사적인 오류와 지형상의 잘못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의 경건생활과 기독교 이전 시대의 천사와 귀신과 영들에 관한 자라나는 교리의 지식을 흥미 있게 던져주고 있어서 가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양한 번역본들이 회람되었다는 사실이 증거하고 있듯이 본서는 고대에는 널리 유포되었다. 헬라어의 세 개의 고정본, 라틴어의 두 개의 고정본, 수리아어의 두 개의 고정본, 히브리어의 네 개의 고정본, 그리고 에디오피아어의 한 개의 고정본 속에 들어 있다.

현대의 로마 가톨릭 학자들은 토비트의 목적이 역사서가 아닌 “건덕에 유익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오류들과 연대기적 곡해들은 저자가 도덕적인 이야기, 즉 적절한 훈계들을 삽입시킨 이야기임(4:3-21; 12:6-15; 14:8-11 기타 여러 곳)을 지적해준다고 믿어진다. 토비트의 의도는 선한 사람이 인내하여야 하는 고난과 역경을 신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믿음에 충실하기만 하면 결국 하나님이 그를 세상적인 좋은 것들로 축복하실 것이다(3:17; 4:21; 11:17). 이러한 주제와 함께 율법 준수의 가치(1:4-9, 12; 4:6), 기도의 중요성 (3:1 이하, 11 이하, 24, 벌게이트), 자선(3:16-18, 벌게이트 4:13; 6:16-22), 자비의 행위(1: 15, 벌게이트 2:1-2), 연보함의 우월성(4:7-12; 12:8하-9:19-20), 기타 죽은 자에 대한 존경표시에 관한 복합적인 교훈들이 있다.

본서는 성경에 사용된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구약에 대한 많은 암시가 있다. 비록 원본이 현존하지 않을지라도 다수의 학자들은 이론적으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원본에 사용된 언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갖고 있다. 헬라어 사본들 가운데는 몇 가지 상이점들이 있다. 시내 사본(S)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개정본인 바티칸 사본(B)과 대조할 때 가장 긴 본문을 갖고 있다. 제롬은 그의 벌게이트에 있는 번역본을 아람어 사본에서 번역하였다.

이 이야기는 주전 250년경에 기록된 종교소설이다. 이것은 앗수르에 이주되어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 토비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토비트는 앗수르 치하에서 살해된 자기 동족을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가 사고로 눈이 멀게 된다. 비통 중에도 토비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가바엘이라는 친척에게 예치해 둔 돈 전부(약 2만 달러)를 찾아오게 한다. 천사 라파엘이 믿을 만한 친족으로 가장하여 토비아스와 함께 간다. 그것은 눈 먼 토비트의 기도에 응답해 줄 뿐만 아니라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과 에드나의 딸 사라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악신 아스모데오의 시기로, 사라와 결혼했던 일곱 남편이 모두 결혼 첫날 밤에 차례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토비아스는 티크리스강가에서 야영을 하다가 물고기 염통과 간을 태워서 악신을 쫓아버리고는 사라와 결혼한다. 라파엘은 그 사이에 라구엘에게 달려가서 돈을 찾고, 니느웨에 있는 토비트와 그의 처 안나에게로 토비아스와 갓 결혼한 아내를 인도하여 돌아온다. 토비아스의 여행이 오래 지체됨으로 그들은 비통에 잠기게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라파엘의 지시대로 토비아스가 연로한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얹어 놓음으로써 토비트는 시력을 회복한다. 천사 라파엘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라진다.

 

5. 유딧

이것 또한 교훈적인 가치가 있는 소설적인 이야기로 주전 2세기에 기록되었다. 유딧은 용모가 아름답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베툴리아(세겜의 가명)의 과부이다. 유딧의 용기는 홀로페르네스 휘하 느부갓네살 침략군으로부터 그녀가 속한 도시를 구해낸다. 그 도시의 장로들이 5일 이내로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유딧은 당당하게 그 도시를 떠나 홀로페르네스 진영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미모와 언약을 통하여 장군을 현혹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베툴리아로 돌아온다. 이 결과 그 도시의 수비대는 진격하게 되고 홀로페르네스의 대군은 잇따른 혼란 속에서 도망하다 파멸된다. 대제사장 요아킴(Joakim)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걸 유딧을 칭송하기 위하여 베툴리아로 온다. 유딧서의 기사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가장 절망적인 상태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오히려 보증하여 준다는 것과 또 개인의 용기와 모험심은 결코 그러한 경우에도 감소되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에스더의 추가서

구약의 에스더는 하만의 교사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매우 국수적인 책이다. 그러나 에스더의 영웅적인 행동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내의 그들의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받을 수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75,000명을 주살한다. 정경 에스더는 하나님의 성호가 언급되지 않고 반면에 페르시아 왕의 이름이 175회 거론된다. 기도에 대하여 한 마디의 언급이 없으며, 사실 종교에 대하여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는다.

외경인 에스더는 정경을 보충할 목적을 띠고 있다. 에스더 10장에 10절을 추가하는 외에도 외경 에스더는 6장이 더 첨가되었다. 에스더 부록(the Additions to Esther)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자료들은 벨의 이야기(the Episode of Bel)나 수산나 이야기(the Story of Susanna)와는 달리 정경 에스더에다 고유한 가치를 부가시키거나 성경 이야기에 어떤 공헌을 하지는 않는다. 제롬이 벌게이트 번역본을 만들 때 사용하였던 에스더의 헬라어 번역본은 히브리어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107절을 수록하고 있었다. 제롬은 그것들을 에스더 본문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부록 안에 배열시켜 영역본들에서 발견되는 순서에 위치시켰다. 클락(Clarke)는 “이것들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서”라고 주장한다.

에스더에 새롭게 첨가된 내용은 에스더의 내용에 강한 종교적 요소들을 추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긴 기도를 하며, 모르드개는 “부림”이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하나님이 만드신 두 개의 제비를 말하는 “제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부록이 성경의 내용에 모호한 부분을 명료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아닥사스다(크세르크세스)의 두 통의 긴 편지가 에스더 3:13-15에서 언급된 조서에 소개되며, 또 다른 편지가 이전의 조서를 폐기시키는 8:13에 언급된다. 칠십인경은 이 부록을 전체 본문의 7개의 부분에 첨가시키고 있다. 아닥사스다의 통치에 대하여는 그가 통치하기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이 틀림없는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영어 번역본의 외경에서 이 부록은 항상 하나로 모아져 있다.

외경 에스더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연대와 장소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어떤 권위 있는 학자들은 에스더 부록이 주전 180-145년 사이에 애굽의 어느 곳에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다. 왁스맨(Waxman)에 따르면 여러 권의 부록들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는 11장의 표제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거기에서는 이 편지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톨레미의 아들인 리시마쿠스(Lysimachus)에 의하여 해석되었으며 톨레미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4년 후에 도시테우스(Dositheus)라고 하는 레위인 제사장이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부인을 얻은 톨레미란 왕이 4명이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결정짓기는 어렵다. 이것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 가운데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칠십인경에서는 정경 에스더서에 삽입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과 그가 왕에 대한 모반을 사전에 막는 이야기로

히브리 정경 제1장의 앞에 17절이 포함되어 있다.

②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이다. 이 부분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왕의 조서로써 히브리 본문 3:13

에 이어진다.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로 히브리 정경 제4장에 이어진다.

④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극적으로 알현하는 장면으로 5장에 8

절이 추가된다.

⑤ 하만의 처형과 유대인을 칭송하고 자위적 방비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가 정경 8:12에 이어진다.

⑥ 모르드개의 꿈 해석과 부림절의 의미에 대한 끝 맺음말로써, 이

부분은 히브리 정경 에스더의 마지막 장에 이어진다.

 

7. 솔로몬의 지혜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거주하였으며, 특히 포로기 이후에는 더욱 많은 외국 거주민이 있었는데, 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로 알려진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유대인의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의 하나는 헬라 문화권의 지식과 과학의 중심지였던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곳에는 고대세계의 가장 큰 도서관중의 하나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의 종교와 사상은 이방의 종교와 철학과 부딪히게 되었다. 이따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공격과 그들에 반감을 지닌 박해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 대한 변호자가 되었다.

솔로몬의 지혜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이 전해준 신앙에 신실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믿어진다. 본서는 집회서와 마찬가지로 지혜문학의 장르에 속하도록 구분된다. 그러나 사상의 범위는 물론이고 종교적 통찰, 종교적 개관, 사상의 조직력에서 지혜서는 집회서보다 우월하다고 평가된다.

본서는 일편 논쟁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적이다. 초두의 몇 장은 거의 확실히 사두개파를 의미하는 “불경건한 자들”에 대하여 경고가 발해진다. 그들은 미래의 생명을 믿지 않았고 따라서 심판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헬라어 언어권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향락주의(Hedonism)가 큰 유혹이었다. 지혜서 저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헬라화 된 유대인들을 가르쳐 그의 조상 전래의 신앙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과거 유대인의 역사를 암시하는 은근하고 신비스런 방법은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고안되었다(10-12장; 16-19장). 이러한 기교는 또한 무녀의 신탁서들에서도 사용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의 지혜서가 신약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고 있다. 어떤 학자들을 본서와 바울 서신 중의 어떤 책들 사이에 평행구절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리아리티(Moriarity)는 성 요한과 성 바울 모두가 그들의 기독론적 사상들이 본서의 교훈에 영향 받았음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혜서의 영향은 지혜의 개념이 말씀(헬라어 로고스)의 성육화의 방법을 예비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제4 복음서에서 특히 자명하다고 여겨진다. 신약에는 지혜서에서의 직접적인 인용은 전혀 없다.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 있는 외경서 가운데 하나로 주전 40년경에 기록되었다. 첫째 부분(1:1-6:8)은 '종말서'라고 불리는데,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비교함으로써 비도덕성의 진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부분(6:9-11:1)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지혜의 찬사이다. 셋째 부분(11:2-19:22)은 앞부분들보다는 못한데, 이 부분은 애굽과 광야의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우상숭배(13-15장)의 기원과 악함을 거론하며 끝맺는다. 복합적인 이 책은 기록자 불명이다.

8. 벤 시라의 지혜서(집회서)

전체 51장으로 된 이 책은 ‘호크마’ 또는 히브리 지혜문서에 속한다. 이것은 외경 가운데 저자가 알려진 유일한 책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자인 벤 시라가 이스라엘 청년들에게 교훈한 지혜의 글이다. 저자는 예루살렘 시라의 아들 예수(50:27)로 주전 175년경에 기록하였다. 그의 손자는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주전 132년 히브리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과거 조상들을 칭찬하고 있고(44-50), 의사들을 칭찬하고 있다(38:1-5). 이 책 전편을 통해 벤 시라는 지혜의 참된 성품을 나타내 주고 인간 생활에서 실행해야 할 종교적, 사회적 의무를 지적한다.

저자의 사상은 정통적이어서 헬라적인 문화에 대한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는 사두개인이었던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본서는 히브리 지혜문학의 마지막 커다란 예로서 전형적인 강조점은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한 데에 있다. 집회서의 전통적인 라틴어 명칭은 외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회서’ 임을 보여 주며 '금언'이 지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성격, 초기시대 이래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았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9. 마카비 1서

마카비 1서와 2서는 중간사 기간의 역사를 위한 귀중한 두 권의 책으로 인정되고 있다. 마카비 1서의 사료 편집은 직설적인 표현과 진실함이 특징을 이룬다. 또한 기적에 대한 언급도 피하고, 초자연적인 간섭을 어떤 사건에도 연루시키지 않으며, 부활의 교리를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마카비 1서의 저자는 바리새파 보다는 사두개파의 인생관에 적합한 보수적인 종교 성향의 사람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책은 수준 높은 역사, 문학작품이다. 이 책은 134년 모데인 반란(주전 167년)에서 시므온 마카비의 살해(주전 134년)까지 마카비 일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와 그 후임자에 맞서 싸우는 모데인의 마타디아스 아들들, 즉 유다, 요나단, 요한, 엘르아살과 시므온의 전율어린 용솟음치는 애국심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아울러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확신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10. 마카비 2서

이 책은 부분적으로 마카비 1서와 동시대(주전 175-160년)의 기록이나, 역사적인 가치 면에서는 그것보다 떨어진다. 마카비 2서는 주로 유대 종교를 찬양하는 글이다. 그 목적은 흩어지고 핍박 중에 있는 유대인들을 교훈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도덕적 신학자로서 이방 종교와 비교하여 유대주의가 측량할 수 없이 우월한 것을 강조하려 했다.

만일 마카비 1서가 사두개파의 관점을 표방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면 마카비 2서는 분명히 바리새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그는 결코 이야기의 도덕성을 지적하는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본서가 말하는 신학의 가장 흥미 있는 모습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훈이다. 사실상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리는 본서가 몇 구절을 인용했으리라고 추정되는(4:20-5:14) 솔로몬의 지혜서를 제외하고 중간사 시대의 문학 가운데서 여기서 만큼 명확하게 가르친 곳은 없다.

마카비 2서에서 사후의 보상과 징계(6:26; 7:36; 12:45), 죽은 자를 위한 기도(12:43-45), 성자의 중보에 관한 교리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에는 그리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이 다소 신화적인 찬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네 사람 야손의 작품을 요약한 이야기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1. 바룩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것으로 공언되는 작품이다. 본서의 증거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 후 5년째 되는 해, 즉 주전 592년, 혹은 582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예레미야의 신실한 추종자인 바룩은 귀환한 포로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의 제사를 돕기 위한 기금을 위탁받았으며 유대인의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인 벨사살을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이것이 파괴된 성전과 흩어진 제사장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저자는 분명히 적고 있지 않다.

바룩서가 회당예배 시에 사용된 사실은 이 책이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편집물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며 또한 이 책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 기록 연대는 주전 350년경일 것이다. 그러나 본서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편집 연대가 주전 2세기가 보다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네리야(Neriah)의 아들인 바룩은 유대인의 전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정경 예레미야를 재기록 하였다고 증거 되며, 또한 예루살렘 멸망을 목도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남 왕조의 패망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굳스피드(Edgar J. Goodspeed)는 본서가 많은 유대인들이 수납하기 어렵다고 여긴 제국에 대한 충성스런 태도를 가르치고자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반란을 도모하지 말며, 제국에게 충실히 봉사하며 제국으로부터 굴복을 얻으라고 권면 받고 있다. 주후 132-135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의 반란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충고의 필요를 보여준다.

예레미야의 편지(The Letter of Jeremiah)는 원래가 분리된 책이었으나 바룩과 예레미야가 친구이자 협력자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룩서에 병합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편지의 저자와 전혀 무관하였다고 학자들은 확신한다. 이제 예레미야 편지는 바룩 6장에서 발견되며, 외경의 여러 필사본에서는 각기 다른 곳에 삽입되어 있다. 벌게이트에서는 본서가 바룩에 첨부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편지로 주장된 책은 정경 예레미야 10:11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 구절은 전 예레미야에서 아람어로 된 유일한 곳이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너희는 그들에게 이르기를”에서 2인칭은 이 진리를 이방인에게 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책은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 형태로서 우상숭배를 신랄하게 공격한 전형적인 헬라-유대적인 책이다. 바룩서의 전반부(1:1-3:8)는 산문체로, 후반부(3:9-5:9)는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및 기타 예언서와 흡사하다. 이 책은 포로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회복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12. 세 청년의 노래

칠십인경에 수록된 다니엘서는 벌게이트에서도 답습되듯이 정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세 권의 부록이 있다. 그것은 (1) 아자랴의 기도서(The Prayer of Ahzariah)와 세 청년의 노래, (2) 수산나 이야기, (3) 벨과 용이다. 아자랴의 기도서와 세 청년의 노래는 모두 헬라어 다니엘 사본들의 3:23과 24절 사이에서 발견된다. 즉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이 외경은 풀무불 이야기(단 3:23) 다음에 삽입되었다. 이 책은 아자랴의 감동적인 기도, 기적적인 구원의 기사와 세 청년들이 합창으로 드리는 찬양시로 되어 있다. 아자랴의 기도서는 그것이 삽입된 장의 문맥과 연결되어 있으며, 세 청년의 노래는 풀무의 열기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불에 탄 사실과 주의 천사의 하강을 말한다. 아자랴의 기도서는 유대인의 경건문학의 뛰어난 예로 생각된다. “그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며 그를 영원토록 높일지어다.”라는 후렴이 노래 전체에 32회나 반복된다.

13. 수산나 이야기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외경으로, 정숙한 바벨론 부인 수산나가 어린 소년 다니엘의 지혜로 어떻게 조작된 간음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헬라어 역본에서는 제1장 앞에, 라틴어 벌게이트역에서는 제13장에 기록되어 있다. 메쯔거는 수산나 이야기를 “세계 문학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단편 이야기”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수산나 이야기의 저자는 증인에 대한 심문, 특히 공모의 혐의가 있는 증언에 대한 더욱 엄격한 심문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나아가 위증한 자에게는 그 그릇된 증언에 의한 희생자가 언도 받은 형량과 동일한 형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을 법칙화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클락은 이 이야기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기에 저술된 비유라고 믿고 있다.

수산나 이야기는 교회의 교부들에게 관심 있는 책이었으며, 그중에 어떤 이들은 풍유적 해석을 하였다. 주후 3세기에 로마의 주교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수산나는 교회의 예표이며, 그녀의 남편인 요아김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정원은 교회에 심겨진 과실나무와 같은 성도들의 단체이며, 바벨론은 세상이다. 두 장로는 교회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두 나라, 즉 하나는 할례의 유다, 다른 하나는 이방 국가의 예표이다.”

14. 벨과 용

벨과 용의 설화는 칠십인경의 다니엘 뒤에 나온다. 메쯔거는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탐정소설이라고 부른다. 벨과 용에 담긴 두 가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상숭배를 경시하고 이교의 제사장직을 혹평하려는 유대인의 변증적 노력의 재미있는 표본을 보게 된다. 바벨론 유수 이후로 유대인들은 주변국가들, 특히 정복국가의 남신과 여신들에게 유혹을 받았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신들이 우월하여서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느꼈다. 더욱이 유대인의 대다수가 디아스포라로서 살았는데 그들이 사는 곳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룬 정복 이후에 그리스의 관습과 문화를 채용하려는 세계적인 경향이 있는 곳이었다.

이방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와 바벨론과 같은 중심지에서 이방종교를 포함한 그 지역의 관습을 받아들임으로써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키게 하는 커다란 압력들이 유대인들을 억눌렀다. 벨과 용, 예레미야의 편지는 인간이 만든 우상을 믿는 어리석음을 조롱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굳스피드는 “용”(Dragon)이란 이름이 헬라어 ‘드라콘’(drakon)과 라틴어 ‘드라코’(draco)에서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다. 바벨론의 서사시에 나오는 마르둑에 의하여 살해된 티아맛(Tiamat)과 이 뱀을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알렉산더 대왕이 인도에서 뱀을 숭배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고 전해진다). 벨과 용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본서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지, 아니면 아람어인지 분명히 단언할 수가 없다. 외스텔리는 헬라어가 원어라고 믿는다. 다니엘과 같이 벨과 용은 테오도티안 사본에서 번역되었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상숭배를 조롱할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다니엘서의 세 번째 추가 외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 벨 신상은 살아 있는 신이어서 매일 밤 그 곁에 차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생각되었다. 다니엘은 신전 바닥에 재를 흩뿌려 놓아서 제물을 정작 먹어 없애는 것은 벨 신 제사장이라고 왕에게 증언한다. 그 즉시 왕은 벨 신상을 파괴하며 그 제사장들을 처형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바벨론에서 숭배되는 용의 이야기다. 용에게 경배하라고 소환된 다니엘은 역청과 머리털과 비계를 섞어 용에게 먹임으로써 용의 숭배를 타파시킨다. 격노한 백성들은 사자굴 속에 다니엘을 던져 넣으라고 왕에게 강요한다. 이 속에서 그는 유다에서 추수꾼들에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천사에 의해서 머리털을 휘어 잡혀 바벨론으로 옮겨진 예언자 하박국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을 먹고 지내게 된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다니엘을 건져내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굶주린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

15. 므낫세의 기도

어떤 유대인의 외경 목록에는 므낫세의 기도서란 짧은 책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칠십인경에 속해 있지만 시편 마지막에 송가집(Songs)이라 불리는 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역대하 33:10-13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유대에서 가장 악한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버리고 외국의 종교를 도입함으로써 죄를 지었다(왕하 21:1-8과 대하 33:1-20). 그의 우상숭배는 결과적으로 유대에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 및 바벨론으로의 포로를 당케 하였기 때문에 므낫세와 유다의 종국은 비참하였다(왕하 23:36이하; 24:3, 렘 15:4). 므낫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심오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므낫세의 기도서는 앗수르에서 한 왕의 회개의 기도를 전하고 있다.

므낫세의 기도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14권의 외경 가운데 10권을 2차적 정경으로 인정한 것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최소한 분실되어서는 안 되는 책”으로서 벌게이트의 부록이 되었다. 기도서에서 인용된 문구들이 로마교회의 성무일과서의 화답성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기록된 므낫세의 참회기도다. 그는 유다의 사악한 왕으로 앗수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다. 대하 33:19 이하에 삽입되었으며, 대체로 주전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F. 위경(가경, Pseudepigrapha)

위경이란 오랜 과거에 성경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잘못 판정되고 성경이 기록된 시기의 것으로 잘못 인정된 책들이며, 따라서 그릇된 혹은 거짓된 문헌들이다. 이 책들은 고대 교회에서 결코 정경으로 용인된 적이 없었다. 이 저작들이 독자를 속이려고 의도하였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저자들은 유대교가 외세와 투쟁을 하거나 그 밑에서 고역을 겪고 있을 어두운 시대에 교훈이나 위로나 경고의 필요를 깨달았고, 어떤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초기 유대 역사에 있었던 어떤 유명한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세인들의 주의를 끌고 그들의 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신구약 중간기에는 외경 이외에도 위경(‘허위문서’)이라고 불리는 문서들이 있다. 이것들은 주전 200년-주후 200년에 걸쳐 기록된 종교적인 작품으로 아담, 에녹, 노아, 모세, 스바냐, 바룩과 같이 훌륭한 구약인물들이 저작자라고 허위 주장한다. 외경과는 달리 위경 문헌들은 한 번도 정경의 위치에 오른 적이 없다. 이 책들은 주로 묵시서, 교훈집, 전설적인 이야기들이다. 일부 중요한 책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모세 승천기(The Assumption of Moses)

모세 승천기는 고대의 문헌들에서 그것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는 어떤 대단히 큰 작품의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본서는 1861년 케리아니(Ceriani)에 의하여 밀란의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모세의 몸을 두고 벌어진 천사장 미가엘과 사단 사이의 투쟁을 말하는 유다서 9절의 암시가 모세의 승천에 대한 언급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이 책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원문을 번역한 헬라어판을 다시 번역한 주후 6세기의 라틴어 사본만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라틴어 번역본은 모세의 승천을 언급하지 않지만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는 일종의 묵시록이다.

이 책의 내용은 주로 모세가 승천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을 기록하고 있다. 외경의 초기 목록에는 두 가지 작품, 즉 모세의 유언과 모세의 승천기가 언급되어 있다. 모세 승천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오히려 모세의 유언의 특성을 보여준다. 본서는 모세가 하늘로 들려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모세의 꿈 속의 승천 개념이 배제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모세는 먼저 그 시대에서부터 마카비와 헤롯 시대까지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 한 후, 이스라엘을 높이고 보복해 주기 위해 오실 하나님에 대해 예언한다. 이 책은 그 당시 바리새파가 점차 세속화함에 따라 한 바리새인이 주후 15년경에 기록한 항변서다.

본서의 주된 관심은 유대의 신학에 대한 교훈 보다는 일반적인 관점에 담겨 있다. 본서는 마카비의 행적을 논박하며 무저항을 지지하였다. 마카비 시대의 위대한 순교자인 엘르아셀이 추종의 모범으로 제시된다. 메시아의 시대는 무력이 아니라 순교에 의하여 인도된다. 따라서 모세 승천기는 유대인의 정적주의(Jewish Quietism)를 주창하는 책이다.

이 책은 유다서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나타나는 몇 가지 문구들에 빛을 던져주기 때문에 신약의 연구자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학자들은 믿는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배계급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다른 이들이 당시의 정권이 빠진 타락상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이사야 승천서(The Ascension of Isaiah)

이사야 승천서는 중간사 시기의 묵시문학에 속한 책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적 자료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중간사 시기의 묵시록들과는 다르다. 이사야 승천서가 런던의 책방에서 로렌스(Archbishop Laurence)가 발견한 에디오피아역에 의존하고 있다. 역시 헬라어와 라틴어로 된 약간의 단편들도 발견되었다.

이 책은 세 부분, 즉 이사야의 순교(The Martyrdom of Isaiah), 이사야의 환상, 히스기야의 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랫동안 사멸되었던 히스기야의 유언 부분(2:13-4:18)은 사도시대 말기 기독교 교회의 영적 상황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이사야의 환상(6:1-9:40)은 주후 1세기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과 천국에 관한 신앙을 조명해 보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사야의 순교’는 여러 부분에 나뉘어 있다(1:1-2, 6-13; 2:1-8, 10; 3:12; 5:1-14). 이것은 악독한 므낫세에 의해 톱으로 켜서 갈기갈기 찢겨진 이사야의 죽음을 재현해 주고 있다. 이사야의 순교의 헬라어 번역본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의 번역이라는 견해가 있다.

3. 에녹서(The Book of Enoch)

이 책은 단 번에 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장르의 전승과 책을 수집해 놓은 전승의 집성체로서, 약 3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현재 에티오피아로 된 역본만이 한 권의 책 안에 에녹서 자료 대부분을 보존해 오고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중에 “에녹의 비사”(에녹 1서 37-71)를 제외한 에녹1서의 모든 부분의 아람어 단편들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이 문서들은 원래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던 것 같다(아람어에서 헬라어로, 헬라어에서 에티오피아어로 번역될 수도 있었다).

이 책의 첫 부분(1-36장)은 “파수꾼들의 책”(Book of the Watchers)으로 불리며, 그것의 주요 주제는 타락한 천사들 때문에 발생한 홍수, 하늘의 보좌 앞에 선 중재자 에녹의 역할 등에 대한 설명이다.

두 번째 부분(37-71장)은 “에녹의 비사”(Similitudes of Enoch)라 불리며, 우주의 비밀을 다룬 환상, 계시, 예고, 세상 왕들과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 불의한 사람들의 정죄, 의인들을 위한 축복 등을 제시한다.

세 번째 부분(72-82장)은 “천체들의 책”(Book of the Luminaries)으로 불리며, 우주적, 도덕적 무질서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364일로 이루어진 태양력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네 번째 부분(83-90)은 “동물의 묵시”(Animal Apocalypse)라고 불리며, 83-84장은 홍수를 예고하고, 85-90장은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짝을 짓고 번식하고 서로 잡아먹고 박해하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창조에서부터 마카비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를 상징적으로 예고한다.

마지막 결론부(91-108장)는 “에녹의 편지”(Epistle of Enoch)라 불리며, 여러 종말론적인 권면들을 하고 있고 “주간의 묵시”(Apocalypse of Weeks)도 포함하고 있다(91:12-17, 93장). 이 에녹서는 유다서 14-15절에서 인용되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차올 심판에 대하여 노아와 에녹에게 임했던 묵시서라는 평을 받는 단편 작품이다. 저자 불명으로 주전 1-2세기에 기록되었다.

(1) 에디오피아어 에녹서(The Ethiopic Book of Enoch)

주전 170-46년경에 기록된 이 문서는 위경 중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 꼽힌다. 일관된 사상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독립된 문서를 모아 편집한 것으로, 신약성경에서처럼 메시아를 ‘사람의 아들’ ‘선택된 자’라고 칭하며, 메시아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2) 슬라브어 에녹서(The Slavonic Book of Enoch)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널리 인용된 흔적이 있으며, 내용은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와 비슷하다. 저작 연대는 주전 30년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4. 희년서 또는 소 창세기(The Book of Jubilees; The Little Genesis)

‘소 창세기’로도 알려진 희년서는 흥미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널리 알려진 이름은 그것이 따르고 있는 연대기의 형식, 즉 희년의 제도가 갖는 양식에서 유래되었다. 각 희년은 49년으로 구성되며 49주로 구분되어 매 1년은 1주일의 하루를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이름은 희년서가 주로 정경인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을 보충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희년서는 헬라어 번역본에 근거한 에디오피아 사본만이 현존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희년서의 원어가 히브리어나 아람어 둘 중의 하나였다고 확신한다.

희년서는 두 가지 문학 양식, 즉 주석적인 것과 변증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서 주석적인 내용이 압도적이다. 희년서에는 묵시적 요소 또한 괄목할 만하며 천사와 마귀들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다. 희년서는 악한 천사들의 타락과 그들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기술하고 있다. 미래가 다른 묵시문학들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이지만 다른 묵시문학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초자연적인 특성들의 묘사가 없다.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며 그것은 물리적이며 윤리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불멸의 세계에 들어가 천년 동안 고통과 죄가 없이 살 것이다.

50년 주기(레 25:8-12)의 희년기로 세계역사를 구분하면서 이 작품(주전 153-105년)을 기록한 바리새인은 비 도덕화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유대교를 구해내기 위해 율법을 격찬하며 히브리 족장들의 우수함을 기록하였다. 일명 ‘요벨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주전 1세기를 전후로 하여 씌어졌다. 내용은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12장까지에 대한 유대교적 해설이다. 저자는 유대교의 역사관에 입각해서 이른바 구세사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저자가 소유한 유대교의 신앙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한 그대로의 정황임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거룩한 숫자인 7이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역사 속에서 수행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5. 시빌 신탁서[무녀의 신탁서, Sibylline Oracles]

기독교 시대의 시작 이전에 무녀의 신탁서에 대한 다수의 결집이 있었다. 헬라와 로마의 저술가들은 무녀(시빌, Sibyls)에 대한 신앙을 유포시켰다. ‘시빌’이라는 단어는 “신의 협의체”(The Counsel of God)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시빌은 “신의 영감을 받아 예언하는 여인으로 동굴에 거하는 자”였다. 헬라인들 가운데 통용된 ‘시빌라’(sibylla)는 노아의 사위가 되었던, 호머(Homer) 시대 이전에 유포된 소설의 등장인물이었다. 무녀의 신탁서는 그리스적 환경 가운데 특별히 그것들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이 신탁서는 마카비 시대의 것이다. 제국의 몰락과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취급하면서 헬라인 시빌의 예언담을 모방하였다. 원작 쿠마인(Cumaean)의 시빌은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주전 500년경)가 최초로 언급하였다.

이 책은 주전 140년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약 400년간에 걸쳐 전수된 것들로, 내용은 집필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열망하는 종교적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무녀의 신탁서는 전도의 목적으로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이 시들에서는 유대교가 찬양되며 유대인의 미래와 영고성쇠가 예언되어 있다. 유대인의 무녀 신탁서들이 유대교로 개종시키는데 얼마만큼 성공을 거두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들이 대단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사실은 믿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에 의하여 시작된 무녀의 신탁서들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계속 사용되었다.

6. 솔로몬의 시편(The Psalms of Solomon, 바리새인의 시편)

이것은 주전 1세기 중엽부터 내려오는 18편의 시편으로 되어 있다. 익명의 바리새인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메시아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외경 가운데서 유일한 시편이며, 주전 63-4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내용은 주로 의인의 강력한 자신감과 죄인들(외국인 통치자와 이스라엘인 통치자, 경건치 못한 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되어 있다.

파이퍼는 이 시들을 영지주의 작품인 피스티스 소피아(The Pistis Sophia)에서 발견되는 5편의 기독교적 송가(ode)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회쉘(Hoeschel)이 17세기 초에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의 도서관에서 어떤 사본들을 보게 되었고 세르다(Della Cerda)는 그것을 1626년에 발간하였다. 그 때 이후로 동일한 작품의 헬라어 사본이 4번이나 더 발견되었으며, 인쇄본의 근거로서 도움이 되었다. 본서의 원어는 히브리어이지만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그 사본은 헬라어 사본에서만 구할 수 있다. 헬라어 사본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헬라어 사본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1909년 해리스(J. Rennel Harris)는 그의 “솔로몬의 송가와 시편”(Odes and Psalms of Solomon)에서 수리아어 번역을 간행하였다.

본서의 목적은 “율법을 경시하고” 사두개파와 제휴한 마카비 가의 군주들의 최후를 통고하는 것이었다. 이 시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는 유대인에게 강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언급은 폼페이에 대한 암시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시편 2편에서 예루살렘을 정복한 용이 해안에서 자멸하였다는 글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7. 12족장의 유언집(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

이 12 족장의 유언서는 창세기 49장에 시사된 바와 같이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유언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자료는 주전 2세기 초(대략 140-110년 경)에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책의 형성은 주후 250년 이후로 보고 있다.

이 책은 히브리 성경의 유언 형식을 헬라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즉 유언의 역사적 서론 대신에 개인의 전기를 기록함으로써, 국가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들을 상기시키는 것들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덕과 악을 배합한 이야기로 변경시킨다.

유언 형식의 축복과 저주는 묵시의 예언으로 대치되며,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죽을 시 각각 자기 자녀들을 향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묵시적인 예언을 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 12 족장의 유언서는 묵시적인 성격보다 윤리적인 성격에 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면과 격려를 담고 있으며, 죄를 피하라는 경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8. 아담과 하와의 역사(The Book of Adam and Eve)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에는 창세기에 없는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삽입되고 첨가되었다고 한다. 본서의 저작 장소가 어디인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본서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생애]”(The Book [or Life] of Adam and Eve)이며, 반면에 헬라어 역본은 “모세 묵시록”(Apocalypse of Moses)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유대인의 설화문학에 속한다. 본서는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으며, 아람어역과 슬라브어역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역본들은 히브리어나 셈계의 원본에서 유래되었다고 토레이는 주장한다.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상당한 삽입과 첨가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정경인 창세기에서 발견되지 않은 내용이 위경 문헌에서는 나타난다고 추정된다.

9. 마카비 3서(The Third Book of Maccabees)

주전 25-24년경에 기록된 이 책은 마카비 1서나 2서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마카비 전쟁 이전에 일어난 유대인 박해 이야기로, 전체적으로 허구적인 내용이 많은 책이다. 이 책은 불확실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소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을 죽이고 그 신전에 들어가려고 한 애굽의 톨레미 4세의 시도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신전이 봉헌되는 것을 유대인으로부터 거절당하나, 그 안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손에 매 맞는다.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학자들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마카비 3서의 저작 동기는 에스더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과거에 하나님께 성실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는가를 상기시킴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의 도덕적 성격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구성된 유대 민족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찬양인 것이다. 마카비 3서의 원어는 헬라어였다. 저자는 그이 어휘 구사에 있어서 비범한 어휘수와 뛰어난 수사적 기교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마카비 2서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양식상의 오류들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토레이는 이러한 스타일이 “극도의 과장법이며 즐겁게 읽혀질 수 있는 헬라어는 아니다.”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판정에 아이스펠트(Eissfeldt)도 동조한다.

본서의 저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유대인이었다. 본서는 다니엘서와 외경인 그 부록을 인용하며 마카비 2서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본서는 역사적인 책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이 기간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애굽 정복자들에 대한 감정과 주전 3-2세기에 애굽에서 취해졌던 반 셈적 태도의 감정에 흥미로운 빛을 비추어준다는 점 때문에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10. 마카비 4서(The Fourth Book of Maccabees)

본서의 책명은 마카비 일가에 대한 다른 세 권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마카비 4서는 철학적이며 교훈적 문헌의 부류에 속한다. 주후 1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마카비 2서 6장 18절부터 7장 42절에 실려 있는 율사 엘르아잘과 그 밖의 사람들의 비참한 순교설화로 엮어진 설교풍의 교훈적 작품이다. 본서는 형식에 있어서는 헬라적 패턴을 지닌 일종의 강화 혹은 비난의 책이거나 “정욕을 극복하는 이성의 규율에 대한” 일종의 소책자이다.

본서는 제롬과 유세비우스의 어떤 책에서는 “이성이 지닌 최상의 능력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명명되었다. 유세비우스의 책들에서 본서는 “이성의 최상권에 대하여”(On the Supremacy of Reason)란 책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카비 4서란 명칭 역시 이른 시기에 발견된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치세에 있었던 유대 국민의 순교가 보여준 영웅심을 회상함으로써 유대인 독자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인 듯하다.

11.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아리스테아스가 자기 형제인 필로크라테스(Philocrates)에게 저자의 동시대로 추정되는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다. 본 서신은 모세오경의 헬라어 번역본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서신의 진정성을 부정하면서 본 서신은 작자 미상이거나 남의 이름을 도용한 작품으로 단정 짓는다. 이 편지는 칠십인경이라고 불리는 구약성서 그리스어 역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엮은 것으로, 주전 145-100년경에 기록된 이 편지의 목적은 유대인의 율법이 그리스인의 지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 개괄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굽 왕은 히브리 율법의 번역을 원했다. 그리하여 자기 신하인 아리스테아스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뛰어난 학자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는 72인의 학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왔으며 파로스 섬에서 72일간 번역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헬라어 역본을 만들게 되었다. 이 책은 학자들의 숫자를 따라 칠십인경이라고 명명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첨가된 이 이야기는 그 원래의 형태대로 요세푸스의 작품에 수록되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를 비평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유명한 학자는 호디(Humphrey Hody)였으며, 18세기 옥스퍼드의 헬라어 교수였던 레기우스(Regius)는 70인경이 아리스테아스가 말하는 대로 왕의 명령에 의하여 번역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요청에 부응하여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참(H. G. Meecham)은 이 서신에 대하여 보다 호의적인 평가를 한다. 파피루스의 해독은 아리스테아스 편지의 허구성에 대한 호디의 비평을 수정케 하는데, 즉 그 안에서 저자는 알렉산드리아의 관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참은 본 서신이 톨레미 왕조 후기에 써진 유대인 변증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하다스(Moses Hadas)는 본서의 언어 용법에서 주전 150년 이후의 연대를 연상케 할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비평학자들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의 저자가 유대교 역사상에서 진정으로 놀라운 사건, 즉 히브리어 모세오경을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한 일을 이용하였다는데 동의한다. 이방인의 유대교도로의 개종의 측면에서 볼 때, 70인경은 부패로 특징 지워진 세계에서 개종자를 얻는 놀라운 수단이 되었다.

G. 신약의 외경(Apocryphal New Testament)

1. 어록자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록이라고 불려진 자료들이다. 대부분 초대 교회 교부들이나 신약 성경에 인용된 고립된 어록이지만 가장 유명한 자료는 ‘옥시린 쿠스 로기아’이다.

2. 외경 복음서

(1) 초기의 텍스트

초기의 텍스트에는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파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토론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2) 영지주의 복음서

영지주의적 복음서와 외경과 관련된 문서들의 공통성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부활로부터 승천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주신 게시를 담고 있다.

(3) 유년기 복음서

유녀기의 복음서는 정경 복음서의 누락된 사항을 보충하고 설화의 간격을 메워보려는 시도였다.

 

3. 외경 서신

신약성경의 서신들, 즉 사도 바울의 서신들과 정경 사도행전에 편입된 서신들에 의해 계시된 구성의 한 형식이다. 외경의 서신은 비교적 수가 적고 대부분 그 내용이 보잘 것 없다. 하지만 널리 회람되던 것도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서간”이었다.

4. 외경 행전

각 사도들의 순교와 그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정경의 사도행전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이 외경들은 사도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설화적인 분위기 그대로 사용했다.

5. 외경 계시록(묵시록)

신약의 인물들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비교적 적은 그룹의 묵시문서이다. 이 묵시들은 세상에 대한 환상을 제공하며, 때로는 이 세상의 끝을 예언하기 위한 것이다.

6. 현대의 외경

현대의 외경이란 성경의 계시에 덧붙이려는 의도로 지난 여러 세기 중에 기록된 종교적인 책자를 가리킨다. 그 종류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2) 아쿠아리우스 복음서

(3) 예수의 십자가 처형

(4) 본디오 빌라도의 고백서

(5) 빌라도의 보고서

(6) 베한의 서신서

(7) 사도행전 29장

(8) 천국의 서신서

(9) 요세푸스의 복음서

(10) 야셀의 책

(11) 그리스도의 모습

(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 증서

(13) 잃어버린 사도행전 2서

(14) 오아스페

(15) 성경의 잃어버린 책들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해석자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 본문과 해석의 원리는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나 해석자만은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기록의 과정은 해석자의 필요성을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는 성경 자체가 해석자의 위치를 보증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들을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그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유기적으로 사용하셨다. 따라서 성경 저자들의 특성이 잘 짜여진 직물과 같이 성경 속에 반영되어 있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의 작품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극치와 유기적 영감의 신비가 성경 기록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성경 기록에 있어서 성경 저자들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해석자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하여 그의 계시를 기록하게 하셨고 또 그의 계시를 풀어 설명하는 일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런데 해석자는 완전히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해석자는 과거에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잘못 없이 보고하는 정도에 그치는 방관자적 보고자가 아니요, 자신의 과거에 발생한 사건의 경험과 사상의 참여자가 됨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같은 경험과 사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참여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같은 해석 원리를 사용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된다. 해석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해석의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해석자가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해석자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이 되는 것이다.

 

A. 해석자의 주관성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해석자는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해석자는 역사적인 형편, 개인의 경험 또는 개인의 특질 등에 의해 항상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해석자가 본문을 대할 때는 이미 그를 제약시키는 다른 요소들의 영향이 있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해석자는 이미 그의 생각과 지식에서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자가 성경을 해석할 때 해석자는 자신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이해’(pre-understanding)나 ‘선판단’(pre-judgment)을 통해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해석적 연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우리들이 본문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읽어 내려갈 때 계속 그 관심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대부분 우리를 주제로 삼고 우리를 빚어 만드는 데 사용된 신학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전통에 속해 있고,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중재 없이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카아슨(D. A. Carson)의 말처럼 “시작 속에 살면서 언어를 말하는 어떤 사람도 어떤 일에 대해 전적으로 문화적 영향에서 자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피상적으로는 해석자를 제한시키고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편견 없는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시켜야 해석자가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은 불가능한 것이며, 또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은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실행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의 원리는 인격자인 사람을 도와 본문의 뜻을 찾게 한다. 성경 해석의 원리들은 사실상 독자이건 해석자이건을 막론하고 그 사람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석자는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되고자 하는 모든 것까지를 본문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해석자가 편견 없는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해석자가 성경 해석을 할 때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성경 본문을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본문과 해석자의 융합을 제창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될 때 결국 해석자의 주관성이 성경 해석을 조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 해석은 해석자의 주관성을 인정하면서 늘 객관적인 성경 본문이 주관적인 해석자를 변화시키며 조종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자신의 주관성이 성경 해석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치는데 그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석자의 주관성은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성도는 이미 성령의 조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성을 상실한 상태이다. 하지만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자연인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으로,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유 19). 자연인은 죽은 자와 같고 죄로 어두워진 자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요 8:47; 약 1:21). 오직 성령의 조명을 받은 신령한 자만이 신령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해석자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도 해석자로 하여금 절대적인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B. 고린도전서 2장 6-16절 해석

본 구절을 해석하면 해석자의 주관성이 더욱 명백해진다. 특별히 해석자가 “신령한 자”, 즉 성령으로 중생된 성도라는 사실 때문에 생성되는 해석자의 주관성이 밝혀지게 된다. 고린도전서 2:6-16은 좀 더 넓은 문맥인 고린도전서 1:18-3; 23에 비추어 생각하여야 한다. 이 구절의 내용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부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이유는 바울이 가르친 교훈을 오해한 나머지 고린도 성도들이 파당을 이루는 결과를 나타냈는데(고전 1:11-17), 이에 대한 교정을 위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근본적인 전망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역의 기본적인 주제를 전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본 구절에 나타난 중심된 용어는 지혜(σοφία)이다. 바울은 지혜를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첫째,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된 지혜가 있다. 이런 지혜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지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지혜는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지혜로운 것이다(고전 1:21).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적인 방법으로 알 수 없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통찰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어진 것이다(고적 1:24).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것이다(고전 1:21).

 

바울은 자신이 전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이 세상의 관원들의 지혜도 아니라고 말한다(고전 2:6). 바울은 이 세상의 관원들이 자신이 전한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사용된 “이 세상”(this age)이란 용어는 신약에서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유대주의에서 빌려 온 용어이다. “이 세상”(this age)은 “오는 세상”(the age to come)과 대칭을 이루어 해석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대칭은 현 세상 질서와 오는 세상 질서의 대칭을 뜻한다. 이 대칭은 전체 역사로 확장되어 창조에서 완성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현 세상 질서를 가리키는데 타락(the fall) 이후 죄에 굴복된 창조 질서를 가리킨다. 반대로 “오는 세상”은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 즉 구속된, 그리고 완성된 세상 질서를 가리킨다. “오는 세상”은 죄와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다. 바울이 함축적으로 말하는 요점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지혜는 새로운 질서에 속하며 또한 궁극적 질서요, 새로운 창조의 질서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지혜는 “이 세상”에 내재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비밀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만세 전에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고전 2:7). 하늘에서 이미 준비되고, 이제는 시간과 역사 안에 나타난 것이다.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는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엡 3:3; 골 1:26). ‘감취어진’이란 말은(2:7) 전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 ‘비밀’과 ‘감취어진’이란 용어는 특히 잘 어울리는 용어들이다. 그 이유는 이 문맥에서 지혜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1:24, 30).

 

‘비밀’이라는 용어의 용법이 우리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인간의 이해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솔선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나타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고전 2:9). 즉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능력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깊은 것”(τά βὰθη τοῦ θεοῦ)이며 하나님의 깊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다(고전 2:10).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성이나 통찰력이나 감정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일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다(고전 2:7).

 

바울은 고린도전서 2:10에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의 지혜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성령은 계시의 과정에서 도구로 사용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실 수 있다(고전 2:10). 이 뜻은 성령만이 계시 과정에 관해 조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만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 그것들을 나타내 주실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1에서 유추를 사용하여 논리를 전개시킨다. 그는 낮은 차원의 일과 높은 차원의 일을 유추적으로 비교한다. 여기 “사람의 속에 있는 영”은 성령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의 영을 가리킨다. 즉 여기에서 영(πνεύμα)은 인간의 마음이나 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과 하나님이 스스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를 아는 것과 같이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τά τοῦ θεοῦ)도 하나님이 친히 아는 것처럼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고전 2:11).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정을 안다고 말한다. 고린도 전서 2:12은 성령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 초점이 움직인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들을 알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지식의 전달을 위한 원리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계시된 일들은 구원에 관한 것이요, 십자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세상의 영”이란 표현은 바울 서신을 포함한 신약성경 전체에서 여기에 유일하게 사용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사단이나 다른 영적 존재를 가리키지 않음에 틀림없다. 바울이 이 표현을 여기에 사용한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의 대칭을 강화시키기 원해서이다.

 

여기에 사용된 “세상”은 본 구절 여러 곳에서 사용된 “세상”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전 1:20-21, 27-28 참조).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세상(κόσμος)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류”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상은 죄인을 전체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런 기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3을 관계대명사 ‘하’(ἅ)로 시작함으로 이전에 계시된 것과 연관을 시킨다. 바울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과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비교한 후 성령의 가르치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성령이 하나님의 지석을 전달한 사실에 대해 설명한다. 성령이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측면을 볼 수 있다. 한 면은 사도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다른 면은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의 반응인 것이다(고전 2:14-15 참조).

 

이처럼 계시와 반응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바울은 말씀의 복수성을 지적하고 그 말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말한다. 바울은 계시나 사상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말들은 성령에 의해 가르침 받는 것임을 확인한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을 주장하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말씀들은 인간 지혜의 형태로 된 것이 아니요 성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15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를 비교 설명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연인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2:11)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대로 신령한 자는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요, 성령의 조종을 받는 사람이다. 신령한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그 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신령한 자는 성령의 사역범위 안에 포함되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이 계시한 것에 대해 두 가지 방면으로 반응이 나타난다고 말한다(고전 2:13). 사람이 그것을 수납하든지, 배척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를 구분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느 한 쪽에 속함을 암시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 즉 자연인은 죄의 파괴와 전적 부패에 의해 조종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 즉 계시를 수납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자연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자연인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신령한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신령한 자는 성령의 사역범위 안에 속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성령의 사역의 포괄적인 특성을 설명한다. 신령한 자가 모든 것을 분별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한다(고전 2:15). 이 말은 신령한 사람이 신비적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뜻도 아니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또한 신령한 사람이 모든 종류의 정보를 아는 데 전문인이 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가 단순히 인생 삶의 종교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다른 모든 부분에도 연관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계시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6에서 이사야 40:13을 인용한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포괄적인 속성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구절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6에서 이사야 40:13을 인용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다고 결론짓는다. 이 말씀의 뜻은 신령한 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골 2:3; 3:22, 23)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을 통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게 된다.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이해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해하는 열쇠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이처럼 성도들은 구원 계시 속에서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한 열쇠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계시를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것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 사건들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신령한 자는 “성령의 사역범위”안에 붙잡혀 속박 속에 있지만 사실상 성령에 매인 이 속박이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성령에 매여 얻는 지적인 자유야말로 완전한 지식에 대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을 바탕으로 몇 가지 요약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지혜로 이룩된 사건으로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난다. 오직 신령한 자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사정, 즉 하나님의 비밀을 성도들에게 계시해 주셨다.

성령은 계시 전달의 주체가 되신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비밀은 어떤 신비스런 것을 가리키지 않고 오래토록 감취었다가 이제는 계시된 그리스도 사건을 가리킨다(롬 16:26).

넷째, 신령한 자, 즉 중생된 자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

신령한 자는 성령이 내주하시고 성령의 조종을 받는 사람이다. 이 사실은 해석자가 완전한 객관을 유지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해석자는 어느 정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C. 성령과 본문과 해석자와의 상호관계

본문과 해석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본문의 우월권은 항상 유지되어야 한다. 본문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계시로 변함이 없지만, 해석자는 자신의 주관성에 매여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과 조명 없이는 해석자가 성경 본문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신학에서는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해석자의 철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성경 본문을 연구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는 결국 성경에서 서로 상충되는 내용만 발견하게 된다.

해석자는 성경 연구를 할 때 올바른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올바른 방법론은 “성경 본문에 의해서” 성립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성령과 본문과 해석자와의 상호 관계를 고찰함으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해석자의 위치를 더 명백히 밝히고자 한다.

 

1. 본문과 성령

성령과 본문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졌다(딤후 3:16; 벧후 1:19-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본문의 중요성을 다룰 때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성령과 성경 본문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 주는 성경 구절을 통해 본문과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첫째, 신약은 성령이 성경의 저자인 것처럼 기술한다. 신약은 구약의 인간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성령이 저자인 것처럼 구약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행 28:25; 히 3:7; 9:8; 10:15).

둘째, 신약은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성령과 인간 저자를 동시에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마 22:43; 행 1:16; 4:25).

셋째, 성령은 사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성경을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신다(요 14:26; 15:26; 16:13).

 

성경은 그 기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본문의 저자이신 것이다. 성경은 저자이신 성령에 관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미 성취하신 사역과 지금 성취하고 있는 사역을 설명해 준다.

즉 성경은 성령의 하시는 일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과 본문과의 밀접성을 찾을 수 있다. 성령 없이는 본문의 권위가 있을 수 없고 본문 없이는 성령의 구체적인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2. 본문과 해석자

본문과 해석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은 주권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성령은 부활하셔서 살려주는 영(The Life-giving Spirit)이 되신 하나님과 같은 기능을 발휘하신다(고전 15:45). 누가복음 24장 32절과 45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 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살아 계실 때 성령의 기능으로 설명하신 내용과 일치한다(요 14:16, 26; 15:26; 16:7, 13).

즉 진리를 알게 하고 성경을 풀어 주는 일은 성령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 32절과 4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경 해석의 기능을 발휘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살려주는 영으로서 기능적으로 성령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과 살려 주시는 영이 똑같이 주권성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 14:16, 26; 15:26; 16:7-14). 요한복음 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성령의 사역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며(요 14:26),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하며(요 15:26),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요 16:7-11)들이 될 것이다.

오순절에 보혜사가 오시기 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했을 때 제자들은 항상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납하지 못하는 태도를 취했다(눅 9:43-45; 막 9:32). 그러나 오순절 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구속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오순절 이후 성령의 사역의 특징이 계시를 이해하게 하는 일, 즉 성경 해석임을 증거하고 있다. 성경 해석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에 주신 새로운 질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6:13에서 오실 성령의 역할을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묘사했는데,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난 빌립의 해석 행위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8:31은 빌립의 성경 해석 행위를 “인도 하신다”(ὁδηγήσει)라는 말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6:13과 사도행전 8:31을 오순절 이전과 오순절 이후의 관점에서 비교할 때 빌립이 행한 성경 해석 행위는 이미 성령의 활동으로 예고된 바와 같이 빌립이 성령의 도움으로 실행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빌립은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성경 해석을 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경 해석의 기능이 교회에 부여된 새로운 질서임을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교회의 터전이 된다(엡 2:20). 따라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 교회가 축복으로 받은 성경 해석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가 불분명한 입장에 의해서나 비진리에 의해 도전을 받을 때 위축됨이 없이 성경 해석의 기능을 통해 진리를 수호해 나갈 사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진리가 도전을 받을 때 성경 해석이 계속되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3. 성령과 해석자

성령과 해석자와의 관계는 보혜사로서 성령의 기능을 연구하면 명백해진다. 성령은 알리시는 일을 하고(요 16:13), 책망하시는 일과(요 16:8) 증거 하는 일을 하시며(요 15:25 이하), 가르치시고 또한 생각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요 14:26).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행위는 이해를 돕고 뜻을 풀어 주는 해석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해석자의 역할도 이해를 돕고 뜻을 풀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할과 해석자의 역할 사이에 공통된 요인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해석자의 해석 행위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경은 성령이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며 자의로 말하지 않고”(요 16:13)라고 말한다. 성령이 듣는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이다(요 14:26; 15:26).

성령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나 공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요 16:13-14),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그의 것들에 관해서(요 16:15) 말씀하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중점적으로 설명하실 것은 예수님의 사건들, 즉 구속적이고 역사적이며 기독론적인(Redemptive-historical-Christological)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설명하실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계시의 절정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초점으로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를 사도적 유전(살후 2:15)이라고 가르쳤고, 오늘날 우리들로 말하면 성경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결코 성경의 내용과 상충되는 설명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경 본문이 성립될 때도 성령에 의해 되어졌고 해석자가 본문을 이해할 때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성령의 역사는 본문과 해석자에게 공통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성경 해석 방법론이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만들어지지 않으면 해석자가 본문을 대할 때 상충되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즉 해석자가 올바른 방법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 해석자는 성경 해석적 긴장을 느끼지만, 성경에서 찾아진 올바른 방법을 소유했을 때는 성령의 완전케 하시는 역사로 성경 해석상 느낄 수 있는 어떤 긴장도 해소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석자는 성령에 의해 조종 받은 신령한 자여야 한다. 고린도전서 2:12 이하의 말씀은 신령한 자(ὁ πνευματικός)만이 신령한 것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깊은 것’(고전 2:10)이요, ‘하나님의 사정’(고전 2:11)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고전 2:12)이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고전 2:7)이며, ‘그리스도의 사건’(고전 2:8), 즉 십자가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계시의 사건과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pneumatic)이라는 자격 규정을 소유한 신령한 자여야 한다. 신령한 자는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고전 2:12). 성령은 이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자들에게 알게 하고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고전 2:6-16)에서 신령한 자의 행위를 해석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분별할 수 없으나 성령의 사람은 성경 해석을 포함하는 성령의 일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석자는 성령의 사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4. 성령의 주권적 승리

성령께서는 궁극적으로 승리하신다. 이 말은 성경 해석학적으로 볼 때 의미심장한 것이다. 궁극적인 전망으로 볼 때 성경도 성경 해석을 요구하며, 역사의 주인 되시는 살려 주는 영도 성경 해석을 요구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백성들의 해석적인 반응을 통해서 완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적인 반응은 상대적(relative)이며 불완전(imperfect)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해석 활동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성경 해석은 전체 성경 해석사의 일부분이며 이와 같은 성경 해석적 행위는 종말에 이르러 환전해질 때까지 교회 내에서 유기적으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경 해석을 통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성경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통찰력을 제공하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 이외에 이전 세대가 소유한 전통도 전수받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는 성경 해석을 할 때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잘 연구하여 어느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어느 것이 인간으로부터 기인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분간해야 한다. 한 세대가 진리를 잘못 해석했을 경우 다음 세대에 가서 언젠가는 이전 세대의 잘못이 밝혀지며 신자는 성경의 바른 뜻을 다시 계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역사는 성경 해석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때때로 비정통적인 성경 해석이 전체 교회를 주장하는 듯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가 바른 성경 해석의 궤도로 다시 들어설 수 있도록 주권적인 인도를 하신다. 교회의 성경해석적 행위는 완전을 향해 유기적으로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성경 해석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엡 4:13) 그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 기간 동안 항상 그분의 주권적인 인도를 하실 것이다.

 

D. 현대신학의 맹점

18세기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이후 이성에 입각한 역사가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성경 본문은 많은 공격을 받아왔다. 그로 인해 성경은 역사책 중의 하나로 전락되었으며, 해석자는 그의 이성과 합리로 만든 도구를 가지고 성경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발전으로 인해 성경은 수술대 위에 올려 졌고 자율적인 역사가의 손에 들려진 이성과 자율이라는 메스에 의해 임의적으로 해부되어진 것이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하나님은 스스로 해석하시는 자이다” 대신에 “인간은 스스로 해석하는 자이다”로 입장이 변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인간이 자연과 역사에 관한 최종 권한을 소유하게 되었고 성경 연구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계몽주의가 성경 연구에 미친 영향은 첫째, 성경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계시와 성경 기록의 불연속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셋째, 성경도 연구의 대상에서 예외 취급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성경도 역사책 중의 하나이므로 인간의 산물이요, 그 가치는 역사가의 연구를 통해 결정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발전은 성경 본문 중심적인 신학적 사고의 방향이 해석자 중심적인 신학적 사고의 방향으로 궤도 수정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1. 자유주의의 맹점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성에 근거하여 성경 내에서 믿을 것과 믿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 그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내에서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등 초자연적인 성격의 사건을 제거시키기를 원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해석자의 임의적인 판단에 따라 성경 본문이 난도질당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성경 해석에 있어서 권한의 소재가 하나님과 성경 본문으로부터 해석자에게 넘어가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2. 불트만과 비신화화의 맹점

불트만(R. Bultmann)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은 자유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불트만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 내에서 비과학적인 내용은 버리고 납득할 만한 것을 택하는 방법은 마치 목욕물과 아이를 같이 버리는 잘못과 같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고대 세계의 사상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표현되어 있는 방법을 같이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트만은 성경의 메시지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신화적인 것과 비신화적인 것을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른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트만은 성경의 사상이 신화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모든 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신화로 표현된 진리를 찾아 비신화적인 형태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신학적 작업을 다른 종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철학적 표현 방식인 진정한 실존(authentic existence)과 비진정한 실존(inauthentic existence)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진정한 존재는 죄와 낮은 본성의 능력 아래에 있는 삶을 가리키며 진정한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삶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진정한 존재에서 진정한 존재로의 변화는 복음으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트만은 역사적 사건에 무관심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건에 관심이 없다. 그것들이 불트만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선포”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진정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사건”의 선포만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트만은 복음서의 대부분의 내용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결국 불트만은 역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메시지를 인간에 관한 일련의 사상으로 변경시켜 버린 것이다. 불트만에게는 성경이 기본적으로 사람에 관한 책으로 전락되며, 또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트만의 입장이 자유주의의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한 성경 본문의 내용을 찾는 데 있지 않고 해석자의 실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본다.

 

3. 새로운 해석학파의 맹점

새로운 해석학파(New Hermeneutic)의 대표자는 푹스(Ernst Fuchs)와 에벨링(Gerhard Ebeling)이다. 이들은 성경 본문을 석의(Exegesis)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의 신학적 방법론을 제창한다. 그들은 성경 내의 케뤼그마(Kerygma)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려는 정도에 멈추지 않고 신약 전체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새로운 해석학파는 시간적 상대성을 본문과 해석자에 같이 적용시킨다. 따라서 본문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으므로 절대성이 없고 해석자도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으므로 그의 해석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본문과 해석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해석자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해석학파는 성경이 무엇을 말했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경 본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되어질 수 있다. 에벨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로의 증인”(the witness to faith) “믿음의 증인”(the witness of faith), “믿음의 기초”(the basis of faith)로는 부를 수 있지만, “믿음의 대상”(the object of faith)으로는 부를 수 없다고 한 사실도 신약이 신앙의 언어를 가르쳐 준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객관성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하고 본문과 해석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 주장을 통해 해석자에게 제공되는 실존의 가능성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새로운 해석학파가 그들의 신학적 방법론을 전개할 때 새로운 색채를 그려낸 것만은 인정하지만 계몽주의 이후 이성 중심의 실존적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 그들은 본문은 내동댕이치고 해석자의 주관적 실존에만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해석자의 위치를 다루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해석자는 어떤 경우이든 주관성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항상 겸손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본문을 대해야만 한다. 마샬이 성경적 교리와 행위를 주관적 사고로 설명하려는데 현대 해석자의 위험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중심 메시지에 비추어 성경의 부분들을 이해할 때 대부분의 어려움은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지적한 것이다. 어찌하든지 해석자는 자신을 주관적 사고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내적, 외적 유혹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반면 객관적인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체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로 주어진 성경 본문을 떠나 해석자의 주관성에 의존하면, 성경 해석은 해석자의 개인차가 다양한 만큼 성경 해석적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게 되며, 유기적인 진전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현대 신학의 맹점은 객관적인 본문의 의미는 찾으려 하지 않고 해석자의 실존적 의미를 찾는 데만 그들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쏟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 신학은 시류를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해석자가 처한 형편에 따라 신학이 계속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성경 본문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아니요 해석자의 실존을 찾는 데 들러리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석자의 실존적 의미를 찾는 데는 성경 본문 이외에 다른 서적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다. 그만큼 현대주의자들은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저버리고 해석자 중심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해석을 할 때에 본문을 붙들어야지 해석자에 매달릴 수는 없다.

 

E. 어휘의미론(Lexical Semantics)과 성경해석

의미론(semantics)은 문자 그대로 의미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의미란 단순한 단어들의 의미만이 아니라, 한 문맥(context) 속의 단어들과 문장들의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의미론과 성경해석의 관계는 제임스 바르(James Barr)가 1961년 출판한 “성경언어 의미론”(The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에서 획기적이면서 결정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그런데 바르는 페르디난드 드 쏘시르(Ferdinad de Saussure)의 사후 1915년에 출판된 쏘시르의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에서 영감을 얻어 성경해석에 그 영감을 적용한 학자이다.

바르는 쏘시르의 언어학 사상을 성경해석에 적용할 때, 전통적인 언어학에 따른, 키텔(Kettel)의 “신약신학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DNT, 전 15권)을 주로 비판하면서 적용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여기서는 의미의 가장 작은 단위인 단어의 의미를 다루는 어휘의미론을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다루고자 한다.

 

1. 키텔(Kittel)의 신약신학사전

(1) 전통적인 의미론

의미론은 ‘현대 언어학의 최근의 가지’(the youngest branch of modern linguistics)인데, 의미론 중에서도 현대적 의미론은 19세기 말엽 아르세 다메스테터(Arsene Darmesteter), 특히 미헬 브레알(Michel Breal)에서 그 효시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현대적 의미론이 시작될 당시에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가진 전통적인 의미론이 통용되고 있었다. 안토니 씨슬톤(Anthony Thiselton)은 전통적인 의미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토마스 퀸(Thomas Kuhn)의 표현을 빌면 전통적인 의미론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가진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문장이나 언어 행위(speech-act)보다 단어가 기본적인 의미 단위이다. 이것은 문맥 속의 언어 행위들보다 단어들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입장이다.

 

둘째, 어원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 혹은 ‘기본적인’ 의미를 다소 규정한다. 19세기의 언어학은 주로 원언어들(proto-languages), 언어들의 관계, 언어의 역사 등 ‘통시적 분석’(diachronic analysis)을 대체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러한 분석에서 어원이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 것이다.

이런 관점을 20세기의 ‘동시적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 즉 “(언어의 화자들이 그렇듯이) 언어들이 현재의 형태에 이르게 된 루트를 무시하고 언어들이 일정한 시점 (흔히 현재)에 존재하는 대로 놓고 그 의사소통 체계들을 분석하는 언어분석”과 비교해 보면, 19세기의 전통적인 의미론이 금방 드러날 것이다.

셋째,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는 인습적인(conventional)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법칙들’은 단순히 서술적인(descriptive) 것이 아니라 지시적인 (prescriptive)것이다.

 

넷째, 논리구조와 문법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가령 “이것은 독이다”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전통적인 의미론에 의하면 ‘이다’는 것을 서술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곧 독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론에 의하면, 위의 문장은 ① 서술적 선언적 진술일 수도 있고, ② “급해! 의사를 불러!”라는 시급한 명령일 수도 있고, ③ “조심해! 이것을 마시지마!” 라는 경고일 수도 있고, ④ “당신은 기 커피에 설탕을 안 넣었군요.”라는 책망일 수도 있다.

요일 2:26에 “내가 이것들을 너희들에게 썼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것을 단순히 글 쓰는 행위를 서술하는 직설문으로 보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론에 따른 그릇된 생각이다. 현대의 의미론에 의하면, 이 문장은 “너희들을 오도할 자들에 대해서는 이만큼 말해 두겠다.”는, 한 토픽의 끝을 표시하는 것이다.

다섯째, 의미는 항상 한 단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간의 관계에 의존한다.

여섯째, 언어 사용의 기본은 선언문 즉 진술이다.

일곱째, 언어란 내면적인 개념들 혹은 관념들의 외면화다.

 

(2) 크레머에서 키텔까지

첫째, 크레머는 “신약헬라어 성경신학 사전”(Biblico-Theological Lexicon of New Testament Greek, 1867)에서 신약의 모든 헬라어 단어들을 취급하지 않고 종교적인 삶을 표현하는 성경 신학적인 단어들을 다루었다.

그는 고전 헬라어와 70인경의 헬라어의 차이는 물론, 70인경의 헬라어와 신약 헬라어의 차이도 발견하였다. 크레머는 이러한 차이점이 성육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① 일상 용법에서 사용되지 않아 둔해지고 침식된 헬라서 단어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고, ② 기존 헬라어 단어들에 기독교적 정신을 불어넣어 그것들을 변혁시키고, ③ 기독교적 선포의 새로운 내용이 새로운 단어들과 표현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크레머는 성육신으로 헬라어가 그리스도의 영의 도구가 되어 새롭게 발전되었다고 주장했다. 초판에서는 600단어, 9판에서는 1,251단어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었다.

튜빙겐에서 공개적인 죄를 범해 놓고도 자신은 외롭다고 생각하고 만족스럽게 사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회개와 용서를 가르칠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힌 크레머는 처음에는 스승 베크(T. Beck)의 사상을 따라 율법을 정직하게 가르쳤다.

 

후에 그는 회개의 능력은 은혜의 선포에 있는 것이지, 율법의 심각성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크레머는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스승 베크와 거리감이 생겼다.

그래서 크레머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 연구에 2년을 투자하였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고 밝힌 것이다.

크레머가 이렇게 신약 헬라어 단어들의 성경 신학적인 의미들을 연구할 때, 고전 헬라어는 많이 인용했으나 파피루스가 아직 알려 지지 않은 때라 후기 작가들을 많이 인용하지 못했고, 외경과 위경, 묵시 랍비 문헌 등 유대 작품들을 무시하였고, 신약 각권들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입교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논제를 세웠다는 점에서 스스로 약점들을 노출했다.

 

둘째로, 다이스만(A. Deismann)은 크레머가 70인경에 비추어 신약의 언어를 설명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이 점에서 크레머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신약 언어를 분리하여 정경화한 점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다이스만은 당시 계약서들, 유언들, 진정서들, 점성서들 등 파피루스에 쓰인 글들을 연구해서 신약의 5,000단어 중 1%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상인들의 헬라어와 같은 단어들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신약의 설교자들과 청중은 당시 하류 사회의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심지어 바울의 헬라어도 문학어가 아니라, 통속어라는 것을 밝혔다.

셋째, 다이스만이 단어 연구로 크레머를 비판했다면, 물톤(J. H. Moulton)은 문법 연구로 크레머를 비판했다.

물톤은 신약 헬라어가 특수 헬라어라는 것은 픽션이고 실상 그것은 파피루스의 코이네라는 것을 논증했다. 크레머는 신약 헬라어를 성령의 헬라어로 보았지만, 물톤은 문법 면에서 성령이 보통 사람들의 헬라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밀리간(G. Milligan,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과 함께 파피루스 비문들의 예를 들어서 신약 헬라어가 코이네임을 입증한 것이다.

 

넷째, 프로이쉔(E. Preuschen, Vollstaendiges Griechisch Deutsch Handwoerterbuch zu den Schriften des NT und der uebrigen urchristlichen Literatur, 1901)은 주변 세계의 자료들은 사용하지 않고 사도적 교부들과 초대 기독교 자료들을 사용하여 사전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이 사전이 크레머 이전으로 퇴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섯째, 바우어(W. Bauer)는 다이스만과 공감하면서 프로이쉔의 사전을 완전히 바꾸었다(1928). 바우어는 애틱(Attic)을 따르지 않는 폴리비우스, 디오도루스, 스트라보, 플루타크, 에픽테투스, 아스테미도루스 등과 헬라적 유대주의자들(요세푸스, 필로, 70인경)과 신약 외경을 인용하면서 사전을 만들었다.

여섯째, 쾨겔(J. Koegel)은 크레머의 일방적인 입장을 시정하면서 그의 입장을 채택하여 사전을 편찬했다. 기독교는 새로운 표현들을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기존 표현들에 새로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파피루스, 비문, 필로, 랍비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1915년에 사전을 편찬했다.

쾨겔이 자기사전에 랍비 자료들이 너무 적다고 하면서 사전 편찬 작업을 키텔에게 요청하자, 쾨겔 사후에 키텔이 그 작업을 이어받아 TDNT를 편찬한 것이다.

 

(3) 신약신학사전(TDNT)

크레머가 신약 헬라어 단어에 대해 소논문을 썼다면, 키텔은 각 단어에 대해 대논문(major-article)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크레머가 약 1,200단어만 다루었다면, 키텔은 신약 단어들 거의 전체, 심지어 전치사들까지 다루었다.

가령 ‘엔’(ἐν)이란 전치사에 대한 대논문을 7페이지나 썼고, ‘헤이스’(εἷς)란 수사를 두고 9페이지의 대논문을 썼다. 즉, 그는 하나의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예 1. ἐν]

A. 비인칭 여격과 함께 쓰인 ἐν

B. 인칭 여격과 함께 쓰인 ἐν

1. 일반적인 사람들과 함께 쓰인 ἐν

2. 영(πνεῦμα)과 함께 쓰인 ἐν

3. 그리스도 예수, 주 및 관련 공식과 함께 쓰인 ἐν

4. 신자들 안의 그리스도

5. 요한 문헌에 나타난 교제의 ἐν

 

[예 2. εἷς]

1. 신약에서의 독특성 이해

2. 아담과 인류의 공동 운명

3. 그리스도와 교회의 단일성

키텔의 “신약신학 사전”은 “어휘에 근거해서 알파벳순으로 조직된 신약 신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TDNT는 단어의 의미보다는 세계 속의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백과사전적 정보를 제공하는 ‘사전’인 것이다. “신약신학 사전”은 단어와 연결된 사상과 개념의 구조, 개념 발전의 단계를 다루었다는 면에서 ‘내면적 사전’(internal lexicography)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들에 근거한 개념들의 연구서”인 것이다.

그것은 그 서언에 밝힌 대로 용어들에 근거해서 개념들을 다루되 개념들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개념사’(Begriffsgeschichte, conceptual history)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약신학 사전”은 단어와 관련된 개념의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아래에 제임스 바르가 비판한 대로 약점들도 지니고 있다.

2. 제임스 바르(James Barr)

알론소-쇠켈(Luis Alonso-Schoekel)은 “다윗이 사자들과 곰들로 더불어 훈련을 받은 후에 그 블레셋 사람[골리앗]을 직면한 것처럼, 바르는 특정 저자들(Pedersen, Boman, Gerleman)로부터 시작해서 TWNT(TDNT의 독어 명칭)를 직면했다”고 했고, 켄트(H. T. Kent)는 바르를 ‘성경 양떼들 속의’ 송아지에 비겼으며, 무울(C. F. D. Moule)은 말하기를, 바르는 “지뢰밭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달리는 무모한 운전수에게 적신호”를 켰다고 평했다.

그런데 이렇게 언어학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성경신학자들, 특히 “신약신학 사전”에 기고한 신학자들을 비판한 바르의 배후에는 쏘시르의 영향이 있다.

 

(1) 페르디난드 드 쏘시르(Ferdinand de Saussure)

쏘시르는 “일반언어학 강의”(1915)의 저자로서 ‘20세기 언어학의 아버지’ 혹은 ‘현대 구조 언어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조나단 쿨러(Jonathan Culler)는 쏘시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페르디난드 드 쏘시르는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언어와 언어들의 체계적인 연구를 재조직 사람으로서 20세기 언어학의 업적들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는 현대의 거장, 그가 현대화한 학문의 거장이라 할 수 있다.”

쏘시르의 언어학은 다음과 같이 네 항목으로 요약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지시물(signifier)과 피지시물(signified) 관계의 임의성, 둘째, 병치(paradigmatic)와 동치 관계(syntagmatic), 셋째, 랑구(langue)와 빠롤(parole), 넷째. 통시(diachronic) 분석과 동시(synchronic) 분석 등이다.

 

① 지시물과 피지시물의 임의적인 관계

지시물(signifier)과 피지시물(signified)의 임의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가령, ‘개’라는 단어는 ‘개’라는 실물을 지시한다. 여기서 ‘개’라는 단어는 지시물이 되고, ‘개’라는 실물은 피지시물이 된다. 그런데, ‘개’라는 피지시물을 지시하기 위하여 반드시 ‘개’라는 단어가 사용될 필요는 없다. 만약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가 ‘개’라는 실물을 지시하기 위해서, ‘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약속한다면 ‘바이’를 가지고 ‘개’라는 실물을 지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라는 피지시물과 ‘개’라는 지시물(단어)간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공동체가 그렇게 하기로 임의로 약속하고 사용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형태(form)와 내용(substance), 구조(structure)와 내용(substance), 또는 단어(word)와 개념(concept)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임의성이다.

구조와 내용 간의 임의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리용(John Lyons)이 전형적인 예를 제시하였다. 조각가가 대리석 덩어리에서 조각품을 조각할 때, 그는 형태도 없고 내적으로 구별되지도 않은 덩어리를 위해서 조각을 하는 과정에서 선명하고 뚜렷한 형태를 준다. 그리하여, 그것이 아폴로나 페가수스의 조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 구조와 내용 간의 관계는 임의로 정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지시물과 피지시물의 임의적인 관계는 어디까지나 언어 공동체의 사회적인 인습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 언어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은 사회적인 인습들의 체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시물과 피지시물 간의 인습적 임의적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립될 수 있다. 첫째, 지시물과 피지시물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둘째, 한 언어의 피지시물 또는 개념들은 다른 언어의 그것들과 아주 다르다. 셋째, 한 언어의 역사적 진전 과정에서 개념들 또는 피지시물들은 그 경계선들을 바꾼다.

 

이렇게 볼 때, 고정된 보편개념들(signifieds)도 없고 고정된 보편적인 지시물(signifiers)도 없으므로, 피지시물 자체도 임의적이고 지시물도 임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언어에 있어서의 인습성(conventionality)이다.

그렇다면 임의적인 지시물과 피지시물의 선을 그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지시물과 피지시물을 규정하는가? 지시물과 피지시물은 순수하게 관계적인 것으로서 구조 속에서 규정된다. 여기에 구조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② 병치(paradigmatic)와 동치 관계(syntagmatic relations)

언어라는 것은 그 개별적인 부분들이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 기능을 발휘하고 가치를 요구하는 하나의 독자적으로 완비된 체계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하나의 망(a network)이다. 각 용어의 가치는 다른 용어들의 동시적인 현존으로부터만 발생하게 된다. 한 조각의 가치는 그것이 전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한다. 언어의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언어가 하나의 체계적인 구조라면, 그 개별적인 부분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 개별적인 부분들의 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병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동치 관계이다.

병치 관계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가령 ‘가시관’에서 ‘가시’ 대신에 ‘월계’도 들어갈 수 있고 ‘금’도 들어갈 수 있다. 이럴 때 ‘가시’와 ‘월계’, ‘가시’와 ‘금’의 관계는 병치 관계이다. 한 단어 또는 언어 단위와 다른 단어 또는 언어 단위의 관계가 서로 대치될 수 있을 경우, 그 관계를 병치 관계라고 한다.

 

동치 관계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가령 “나는 학교에 간다.”에서 ‘나’와 ‘학교’와 ‘가다’는 동치 관계이다. 다시 말해서 쇠사슬처럼 함께 묶여서 나타나는 단어들 혹은 언어학적인 단위들의 직선적인 관계가 동치 관계이다. 병치 관계가 서로 대치될 수 있는 요소들 간의 상대적인 관계라면, 동치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결합된 직선적인 결합관계라 할 수 있다. 전자는 대조적인(contrastive) 관계이고, 후자는 결합적인(combinatory) 관계이다.

 

③ 랑구와 빠롤

위에서 지시물과 피지시물의 관계는 규정하는 것은 구조라는 점을 설명하면서 병치관계와 동치관계를 소개하였다. 그러면, 병치관계와 동치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무엇인가? 그것은 랑구와 빠롤이다.

랑구는 언어를 배울 때 각 개인이 자신을 동화시키는 사회 공동체의 문법체계(a grammatical system)이고, 빠롤은 각자가 사회적인 언어 체계의 요소들을 선택하고 결합하여 구체적인 소리를 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 행위(actual speech)를 말한다.

 

랑구는 언어 능력의 사회적인 산물이며 사회 공동체가 개인들로 하여금 언어 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채택한 필요한 인습들의 모음이다. 이것은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머리 속에 축적된 단어 이미지들의 총합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언어 행위를 위해 준비된 언어 체계이다.

빠롤은 언어 행위의 ‘집행적인 측면’(executive side)이다. 이것은 개인 편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언어 행위, 언어 체계의 실제적인 표출이다. 화자는 빠롤의 행위 속에서 언어 체계의 요소들을 선택하고 결합하여 이러한 형태들에게 소리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자는 이러한 빠롤의 연구를 통해서 언어의 구조를 유추한다.

요컨대, 랑구는 사회적인 언어 체계이고, 빠롤은 구체적인 언어 행위인 것이다.

 

④ 통시와 동시 분석

위와 같은 구조로 나타나는 언어는 전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서 항상 변한다. 언어가 역사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통시적인 분석’(diachronic analysis)과 ‘동시적인 분석’(synchronic analysis)이 나온다.

‘통시적인 분석’은 일정한 기간에 걸쳐서 언어가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살피는 시각이다. ‘동시적인 분석’은 시간의 개입을 배제한 채 한 시점에 공존하는 것들을 살피는 시각이다. 전자는 진화적인(evolutionary) 국면이고, 후자는 상태(language-state)적인 국면이다.

 

쏘시르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말하지 않고, 각기 그 역할이 다르다고 했다. 쏘시르가 동시적인 분석의 우선권을 말했다고 해서 언어가 계속 변하는 역사적인 실체라는 것을 무시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쏘시르가 언어의 철저한 역사성을 누구보다 깊이 간파했기 때문에 언어의 진보(통시적인 분석)와 언어의 상태(동시적인 분석)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게 되었고 한 시점에서이 동시적인 분석이 언어의 요소들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쏘시르는 사회학의 에밀레 두르크하임(Emile Durkheim), 심리학의 지그문드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함께 인간 이해는 물리적인 세계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택하였다. 즉 인간은 화학 물질이 어떤 온도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낸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보이는 반응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인간 행위가 사건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사회적인 산물이므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모든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 있는 대상들과 행위들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들로 하여금 의미 있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개인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회적인 규범들이라는 것이다.

 

(2) 신약신학사전에 대한 바르의 비판

바르는 이상에서 요약 소개된 쏘시르의 언어학을 성경신학에 도입하여 성경신학자들의 글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그의 획기적인 작품인 “성경언어의 의미론”에서 그런 비판 작업을 하였다.

① 히브리어 구조가 히브리적 사고를 보여준다는 이론 비판

학자들은 종종 헬라적 사고(thought)와 히브리적 사고를 다음과 같이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헬라적 사고는 정적인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동적이고, 헬라적 사고는 명상, 불변, 존재에 관심을 둔 추상적 사고인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행동, 동작, 생성에 관심을 둔 구체적인 사고이다. 헬라적 사고는 ‘선’이란 추상에 관한 것이라면, 히브리적 사고는 ‘좋은 식탁’이란 식으로 구체화 된다. 헬라적 사고는 지성화와 추론의 특징이 있는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실제상황에 근거한 논증의 특징이 있다. 헬라적 사고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분석적 영육이 원론에 기초하고, 히브리적 사고는 사회 속의 인간을 강조하는 종합적 일원론에 기초한다.

 

보만(Thorleif Boman)은 위와 같은 사고방식의 대조를 제시하고 그 언어학적인 근거를 히브리어의 동사체계 속에서 발견한다. 보만이 이런 논증을 제시할 때는 훔볼트(Humboldt)에 의해 창시된 현대 언어철학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들은 민족들의 특이한 사상의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언어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 생활과 문화에 작용하고 있는 정신력(Geisteskraft, 즉 관념)이라는, 당시 관념론(idealism)을 담고 있다.

이런 전제에 따라, 보만은 히브리적 사고의 역동성이 히브리어에 표현되어 있다고 보고 히브리어 동사체계를 히브리인들의 역동적인 사고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보만에 의하면, 히브리어 동사는 항상 동작이나 행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무(ein Nichts)이고, 이런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활동하고 움직이는 어떤 것과 내적으로 연결된 존재만이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나의 실재(reality)이다.

 

보만의 이런 논증에 대해 바르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보만은 히브리어 동사만 설명했을 뿐, 헬라어 동사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대조를 말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둘째, 다른 언어들에서와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문맥이나 시제 등에 따라 같은 동사가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동작’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한 동사가 동작과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놓고 역동적인 의미(동작)가 상태의 의미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설명했는데, 이것은 부당하다.

넷째, 보만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존재’(rigid unmoving being)라는 철학적인 범주를 도입했으나 이것은 논의 대상의 의미론적인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바르는 “키텔의 신약신학 사전 보다 신약 연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했다.

첫째, 키텔은 “신약신학사전”이 ‘개념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놓고, 이것을 헬라어 단어 사전으로 내어 놓았다.

둘째, “신약신학사전”은 일련의 개념들이 단어들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하였다.

셋째, “신약신학사전”은 단어의 실제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고, 단어의 어원과 단어와 먼 관계가 있는 것들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넷째, “신약신학사전”의 필자들은 보통 ‘단어’라고 부르는 언어학적인 단위에 대해서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다섯째, 키텔은 신약의 단어와 문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을 선명하게 하는 도구들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하신 행위들이라고 하지만, 원래 사전이라는 것은 단어들의 책이지 문장들의 책이 아니다.

여섯째, 다이스만 바우어-리델과 스코트 전통은 크레머-키텔 전통과는 달리 사전의 통상적인 기능을 ‘개념’ 제공에 두지 않고, 대용단어 제공에 두고 있다. 헬라어 단어 하나에 대해서 잠정적인 대용 단어로 영어 단어를 제공하는 것이 사전이 하는 일이다.

일곱째, “신약신학사전”은 의미(meaning)와 의의(significance)를 구분하지 못한 작품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명칭들이 사용될 수 있다고 해서, 그 명칭들이 동일한 의미론적 가치(semantic value)를 가진 것은 아니다. ‘부당한 정체이양’(illegitimate identity transfer)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덟째, “신약신학사전”은 ‘부당한 전체이양’(부당축의, 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의 우도 범했다. 가령 신약성경 전체에서 교회의 개념을 종합한 다음에 그 총체적인 개념을 어느 문맥의 어느 문장 속에 나오는 교회에 덮어씌운다면, 이것이 바로 부당한 전체 이양이다.

 

(3) 바르에 대한 평가

바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데이비드 힐(David Hill)은 “헬라어 단어들과 히브리적 의미들: 구속론적 용어들의 의미론 연구”에서 바르의 많은 주장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바르가 단어들은 의미의 담지체(bearers)가 아니므로 의미론적 분석의 대상으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고 비판했다.

 

프리드리히(G. Friedrech)는 키텔 사전의 새로운 편집자로서 “신약신학사전” 제6권부터 편집을 맡았다. 프리드리히는 바르의 의미론이 결코 유일한 의미론이 아니며, 훔볼트(von Humboldt)의 사상이 영국에서는 지지자들이 적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아직도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단어와 개념 간의 관계에 대한 키텔의 입장은 위대한 언어학자 바이스거버(L. Weisgerber)의 입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그렇게 쉽게 매도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바이스거버의 ‘개념’관으로 키텔을 변호하고 있으나 이것은 부당하게 변호하는 것이다. 바이스거버가 말한 ‘개념’은 어휘론적 개념(lexical concepts)에 속할 수 있는 최소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키텔이 말한 ‘개념’은 어휘론적 개념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사상들과 그것의 신학적 의의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레바드 챠일즈(Brevard Childs)는 바르의 “의미론”이 종전의 연구에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터너(Turner)는 바르의 “의미론”이 “슈바이쳐의 작품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닌 것처럼, 단어 연구에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하고 그것의 방향을 재조정한 것”이라고 했다.

바르는 이와 같이 단어 연구를 키텔과 같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적극적으로 단어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적극적인 면을 보여주지 않았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단어 연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가 앞으로 논의되어야 한다.<임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