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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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사역에 관하여 논한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하신 목적은 영원 전부터 정하신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시기 위함이라는 것 2)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육체의 참 성질에 관하여(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를 하늘에서부터 가져 오셨다는 재세례파의 메노 시몬스의 가현실적인 가르침에 반대한다. 3) 중보자의 한 인격이 어떻게 양성을 지니는가 하는 물음에 관하여 (세르베투스 등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임을 강조한다.) 4) 우리를 위한 (pro nobis)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으로서의 중보자의 3직(三?,triplex munus)에 관하여 5) 기독론 고백의 구원적 실제에 관하여, 즉 중보자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에 관하여 6) 공로의 개념이 엄격하고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직분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칼빈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루터와 신학자 오지안더의 논의를 거부하고, 모든것을 하나님의 경륜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칼빈은 성육에 대해 오지안더나둔스 스코투스의 사변적인 논의를 거부하고, 성윤을 구원역사적으로, 즉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조가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인죄론적이며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것은 곧 성육을 하나님 이해와 예정론으로 돌아가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은 초기에 (1536년) 그리스도의 죽음은 형벌로, 그리고 우리를 위한 충분한 선한 행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후에는(1543년) 그리스도의 3직을 파악하는 데서 이해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속성의 교관’에 근거하고 있으나,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호소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3직에 근거한다. 중보자의 직분을 두고 말할 경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나누어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양성은 혼합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루터나 마찬가지로 칼케돈의 신조를 따라 말하지만, 양성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칼케돈 신조를 넘어서서 덧붙여 말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육하신 영원하신 말씀이나 양성의 실체적인 연합으로 이루어진 신적인 인격에 관하여 말하기보다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자로서의 직분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언급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직분론에서 기독론을 전개한 적은 없으나, 멜랑톤은 그리스도를 중보자(Mittler), 구속자(Erloser), 구세주(Heiland), 왕(Konig), 제사장(Priester), 목자(Hirte) 등 여러 가지 직명을 들어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중보자의 사역을 구약에서 말하는 세 직분을 언급하면서 말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첫 판과 ‘제네바 교리문답서’에는 그리스도의 3직 가운데 왕 직에 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으나 1559년 판에는 둘째번으로 말한다. 1545년 이후부터는 선지자 직을 제일 먼저 다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 직은 언제나 왕 직에 이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서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을 먼저 들어 말하고, 그 다음에 제사장 직을, 그리고 맨 나중에 왕 직의 순서로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칼빈은 중보자의 성(natures)이 둘이라고 구분하면서도 통일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개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구원역사적으로 직분의 개념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칼빈은 구약의 선지자, 왕, 제사자의 직분을 따라 그리스도의 3직을 이해하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이미 율법 안에 현존하셨던 것으로 이해하며, 창조의 중보자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로고스의 인격과 구원의 중보자로서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우연적인(contingent) 인격을 구분하여 본다.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보자와 구원의 중보자로 구별해서 보는 견해는 성령론에도 미친다. 칼빈은 온 우주의 창조와의 관련에서 볼수 있는 섭리적 사역자로서의 성령과 예정 가운데 특별히 섭리하시는 사역자로서의 성령으로 구별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해 보는 견해는 더 나아가서 인간을 창세기 1장에서 보여 주는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중보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중생한 구원받은 인간으로 구별해 보는 데까지 부연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능을 제사장 직능에 포함시켜서 본 데 반하여, 칼빈은 이를 따로 본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말씀을 선포한 일을 선지자적 직능에 속한 것으로 본다(「기독교강요」15,6). 선지자적 직능은 그의 지상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진 은혜의 시대에도 수행하는 직능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 안에서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 말씀의 증거와 그 말씀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선지자적 말씀 전파와 행사심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 직능을 현재도 수행하시듯이 선지자의 직능도 계속 수행하신다는 이야기이다. 3) 성경관 로마 카톨릭은 제도적인 교회와 교회의 교의를 규범으로 여김으로써 성경을 상대화하는 데 반하여, 루터는 성경만이 우리의 삶을 위한 규범이 된다고 한다. 루터가 그 점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높였으나 성경과 본래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한 점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는 비평을 듣는다.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속사업이라고 하며, 구약의 율법 역시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복음 중심의 성경 해석과 ‘오직 은혜로’와 ‘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하다 보니까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히브리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책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설교된 말씀은 성령의 내적 역사를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으로 듣는 자의 지성과 양심과 의지에 다가온다고 한다. 말씀은 인격적이므로 듣는 이에게 일정한 반응을 요구한다고 한다.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거 혹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성경은 그 자신이 해석자라고 말함으로써 성경 해석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 점은 칼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이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를 그리스도의 3직에서 시작한 것은 그가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성경의 책들을 두고 우열을 가린 데 반하여, 칼빈은 구약과 신약을 다 같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에 더 철저하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 교회들이 모두 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내세웠으나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에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더 공고함을 본다.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합리성과 논리를 따라 사고하지만, 인간의 자율적인 사고나 판단이나 신비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일은 단연코 배제하고 성경만을 사색의 근거요 규범으로 삼는다. 성경 중심 사상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잘 표현되고 있다. 베른 신조(1528년), 프랑스 신앙고백서(155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등이 계시와 성경을 서두에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칼빈은 성경이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켜서 기록하게 한 말씀으로 믿으며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한다. 칼빈은 신약과 구약에서 제시하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비판하지 않고 공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칼빈은 어디에서도 성경 영감과 관련된 사역의 양식에 대하여는 상세하게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은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는 점과 성경은 마치 우리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개혁신학자들이 후에 성경의 영감의 양식(?式)을 제각기 설명하지만 성경이 말씀한 것 이상은 말하지 않는 칼빈이 더 성경 중심의 신학을 한 것이었다. 4) 교회관 그리스도의 이해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그들의 교회관에서도 병행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communication sanctorum)라고 하는 반면에, 칼빈은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机? 혹은 制度, institution)라고 말하고 ,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이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성립되는 것이므로 교회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라는 개념이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개념보다 선행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주님께서는 교회를 직분자를 통하여 다스리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기독교 강요」Ⅳ,3.1) 교회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직 제도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즉,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먼저 있어서 교회가 성립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앙고백에만 근거하는 교회가 아니고, 복음의 증언자요 성경을 기록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선 역사적인 교회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 차이는 마태복음 16:18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신 말씀에서 ‘이 반석 위에’를 루터는 신앙고백으로 보아 ‘그리스도 위에’로 해석하는 데 반하여, 칼빈은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로 해석한다. 에베소서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심을 말씀한다 (엡2:20). 루터는 또한 종교개혁 초기에 교황주의에 강하게 반발한 나머지 만인제사장론을 말했으나 칼빈은 그런 말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어는 만인제사장론을 언급하고 있으나 성도들이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영적인 의미를 가질 뿐, 교회에서 봉사하는 직분을 두고 한 말은 아니라고 천명하였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교직 제도에 대하여 소극적인 견해를 가지는 경건주의자들이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 되었으며, 교직 제도를 부정하는 그룹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임을 역사에서 알 수 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을 개혁주의적으로보다는 경건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개혁교회는 선교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인 반면에 루터교는 소극적이었던 사실도 양 교회의 교회관과 무관하지 않다. 루터는 교회의 제도에 관심이 적었으므로 루터교는 그대로 감독교회로 머물렀으나, 칼빈은 그와 반대로 교회를 감독교회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중간 형태인 장로교회 제도로 개혁하였던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감독교회는 전제적(?制的)인 교황주의로 발전하였으므로 개혁교회는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감독교회 제도를 지양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가 되는 개교회주의 제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보편성을 덜 고려하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개교회주의 제도도 마다하고 두 유형의 중간 형태인 장로교회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장로교회 제도는 목사가 감독의 기능을 다하는 노회에 속함으로써 노회의 형제들이 서로가 순복하는 가운데 노회가 위임한 교회를 목회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노회는 목회자가 당회를 중심으로 목회하는 지교회의 성장과 유익을 위하여 당회의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감독하는 한편, 다른 지역의 노회들과 함께 대회 혹은 총회를 구성하여 교회의 치리와 교리에 관한 문제를 상의하고 피차 순복한다. 말하자면, 개혁교회의 장로정치 제도는 지교회의 독립성과 교회의 보편성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며 조화(?和)를 기하는 제도이다. 유럽의 개혁교회의 제도는 장로회 제도이면서도 노회 업무를 관장하는 직분자를 ‘감리’(superintendent)라고 하여 4년 혹은5년간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는 점에서 감독교회 제도에 약간 가까울 따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카톨릭 교회, 즉 기구로서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의 쇄신을 주창하면서 교회의 개념을 이분화하였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성장과 동일시함으로써 보이는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는 로마 카돌릭의 교회관에 반하여, 루터는 ‘내적인 교회’와 ‘외적인 교회’로 나누어 말하고, 칼빈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여 말하였다. 완전한 구원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의 모임을 ‘내적인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하고, 최종적인 구원은 받지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교인들을 다 포옹하는 현실의 교회를 ‘외적인 교회’ 또는 ‘보이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교권주의 교회가 되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추구하면 분리주의 교회가 된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회 개념을 이분화하면서도 실제 우리가 관여해야 할 교회는 보이는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참 신자들만의 교회’를 추구하는 재세례파의 교회관을 반대하고 칼빈 자신은 제네바의 시 교회를 목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칼빈의 교회관은 곧 바울의 교회관과 상통한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한편, 홈이 많고 불완전한 현실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상(??象)을 가르친다. 현실의 교회는 성화의 과정에 있는 교회, 즉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불완전한 교회이므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는 현실의 불완전한 교회에 충실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함께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칼빈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전제하면서도 ‘보이는 교회’에 충실하고 또한 ‘보이는 교회’에 충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향해야 함을 말하였다. 신령주의의 전통을 가진 경건주의는 재세례파와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만의 교회를 추구하므로 그들의 교회관은 분리주의적이다. 한국 교회는 여러 경로는 통하여 분리주의적인 교회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식한다. 미국 교회가 많은 교파교회로 되어 있는 것은 본래 신령주의에 속하는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민한 데다가, 같은 신앙고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와 민족적인 배경에 따라 제각기 종족교회들(ethnic churches)을 세웠기 때문이다. 건전한 교회관을 가지느냐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교회의 분열 혹은 연합에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고, 목회와 교회정치와 사회 및 문화 전반에 대해 자세와 세계관에도 반영된다. 신령주의자는 현실의 불완전한 교회를 정죄하면서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신앙인들만의 교회’를 추구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시인하면서 ‘거룩한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 불완전한 현실의 교회를 중요시하며 목회한다. 신령주의는 특별은총을 강조하고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반면에, 개혁주의는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을 균형 있게 인식하고 강조한다. 신령주의는 죄악으로 가득한 현세와 세속의 역사와 문화를 정죄하는 나머지 반지성적이며 반문화적인 경향을 보이며, 영적인 삶에 치중하여 윤리를 소홀히 하는 반면에 , 개혁주의는 그러한 현세와 세속의 역사와 문화가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래 있음을 인식하면서 영적인 삶과 함께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고, 역사에 참여하며, 현세와 문화의 변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개혁주의와 신령주의의 이러한 대응의 차이는 실은 교회관 이전에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의 차이에서 오게 된 것이다. 5) 칭의의 교리와 성화의 교리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를 외롭다고 여겨 주신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義)의 교리를 말하였다. 바울 이후 교회 역사에서 그냥 묻혀 지내 온 위대한 교리를 발견하고 발굴했던 것이다. 칭의 교리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이 강조한 교리를 더 깊이 천착하며 더 강도 높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를 자력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찾는 일반 종교와 구별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이다. 중세교회는 은혜의 교리를 오랫동안 망각하고 반(半)펠라기우스주의에 근거하여 공로주의 사상에 젖어든 바람에 공로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에서 떠나 부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13,14세기에 스콜라신학자들이 다시금 은혜의 교리를 상기하고 논의하였으나 공로주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루터가 성경에서 칭의교리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중세교회의 공로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로주의가 상식으로 통하는 중세의 교회적 상황에서 칭의의 교리의 발견은 위대한 발견이었으며, 그것을 발굴한 것은 대단한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중세의 공로주의에 대항하여 이를 극복하는 칭의의 교리를 강조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외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나 공로 사상에서 선(善)을 행할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행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혹자는 루터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심을 쏟는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정력을 기울였다고 말하는데, 루터가 공로주의의 포로가 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하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루터는 실로 그 일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개척자로서 종교개혁 신학에 큰 물꼬를 트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칭의의 교리를 그대로 받을 뿐 아니라, 은혜의 교리를 더 발전적으로 이해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느냐 하는 데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재발견하고 찬양하는 신학을 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랑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예정론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피조물의 자기 중심적 구원이나 사랑이라는 신적 의지의 보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루터는 칭의의 교리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해야 할 것을 동시에 강조한다. 칭의의 교리가 선행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오해도 있었으므로, 루터는 칭의를 강조하다가는 다시금 선행을 강조하고, 그러다가는 칭의의 교리가 약화될까 보아 다시금 칭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은 성화의 교리를 더 체계 있게 설명한다. 루터가 칭의의 교리에 집중한 반면에, 칼빈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의롭다 하시며 성화시키시는 하나님께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루터와 신령주의자들 및 복음주의자들이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먼저 관심을 두는 반면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그래서 후자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더 많이 말하게 된 것이다. 6) 하나님에 대한 이해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살아서 끝없이 일하시는 의지이시며, 그의 창조 활동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며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이라고 한다. 마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으나, 하나님 자신은 악의 근원자(Urheber des Bosen)가 아니라고 말한다. 악의 근원자는 악한 자(der Bose)라고 한다. 사과나무의 좋고 나쁜 것은 나무의 질에 달린 것이지 심은 자에 달린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예를 들어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질문은 어려운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다고 말한다. 루터의 신관의 특징의 하나는 하나님을 은닉된 하나님(Deus absconditus, 사 45:15)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은닉된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루터는 인간의 강퍅한 죄, 죽음, 마귀를 허용하시는 그런 부분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즉 하나님을 접근할 수 없는 면이라고 한다. 계시된 하나님은 성육된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설교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며 경배를 받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어거스틴을 따라 하나님은 삼위 안에 하나이심을 분명히 말한다. 각 위가 마치 다른 위는 계시지 않는다는 듯이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에 삼위의 각 위가 일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터는 지적인 논리로 삼위일체를 논증하려고 하기보다는 일상의 설교에서 늘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효능을 발휘한다고 말하거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식으로 말한다. 루터에 비하여 칼빈은 보다 지적으로 신론에 접근한다. 우리의 정신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 종교의 씨앗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우주 속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주 속에 나타내셨으나 인간은 죄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한다. 계시된 말씀에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론적인 관심에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접근하는 반면에, 칼빈은 보다 인식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으나 우매하여 깨닫지 못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중보자 아들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접근한다. 신론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루터교회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 그대로 잘 반영되고 있다. 루터교회의 것은 인간의 죄와 구원된 구속에 대한 고백과 문답에서 시작하는 반면에 개혁교회는 성경과 하나님, 하나님의 작정,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고백과 문답으로 시작한다. 루터적인 경향은 경건주의와 부흥주의, 복음주의로 전수되는 것임을 발견한다. 개혁신학은 구원의 하나님을 곧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며, 죄 아래 버려져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고 권능이 있으시다. 개혁신학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열중함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이 넓고 크심을 사색하며 찬양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래 참으시고,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일반은총을 베푸신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재능과 능력과 우리의 생명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이름이높임을 받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모세와 같이, 자신의 구원문제까지라도 다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죽고 사는 일과 영원한 구원까지도 하나님의 처분에 다 맡기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개혁주의 신앙자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에 참여하도록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7) 예정론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칭의론을 강조함으로 예정론을 말하였다. 칼빈은 루터의 예정론을 ‘이중예정론’(Gemina Praedstinatio)으로 발전시켰다. 이중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는 구원으로 택하시고, 어떤 자는 멸망에 버려 두기로 작정 하셨다는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말한다. 그러나 루터가 유기를 말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계시된 하나님이라면서 동시에 은닉된 하나님으로 보는 그의 신관과도 관련이 있다. 루터는 이해하기 어려운 유기를 말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계시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은닉된 하나님으로 보는 그의 신관과도 관련이 있다. 루터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들은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은닉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덮어 두었던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신관과 칭의와 구속론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신학적인 경향을 따르는 루터의 다음 세대의 신학자들에게는 예정론에 대한 강조가 퇴조됨을 보게 된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예정론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성례론을 두고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취하는 스위스 신학자들의 전유물로 치부한다. 그 반면에 보다 합리적인 사고로 접근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구원론을 말하면서 예정론을 더 강조하였으며 후기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주제를 두고 보다 사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초기의 개혁자들, 즉 쯔빙글리, 기욤 파렐, 피에르 비레(Pierre Virret), 부쩌 및 불링거도 예정론을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칼빈은 칭의에서 성화를 논하며 창조주 하나님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 역시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3권에서 구원의 교리를 논한 끝에 21절 이하에서 예정 교리를 논한다. 우리 성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당신의 작정 가운데 미리 정하신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찬양(doxology)에 속하는 교리임을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작정 가운데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하셨음을 성경이 밝히 말씀하신다고 논한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은 당신의 의(義)안에 숨겨져 있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되고 다만 순종과 경외로 대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정론은 아르미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반론에 부딪히면서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열띤 신학적인 논쟁점이 되었다. 반예정론에 대처하기 위하여 모임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도르트 노회는 1619년 예정론을 변증하며 확인하는 신조를 내놓았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예정 교리를 성경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추론하였다. 이를테면 ‘타락 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론’(Infralapsariansm)을 말하는 등 예정 교리를 사변하고 체계화 함으로써,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교리”(doxology)를 보다 객관화된 교리로 다루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비록 칼빈은 신학과 교회 실천의 많은 주제들과 균형 있게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정 교리가 칼빈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교리인 양 일반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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