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에롤헐스/이중수 역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1. 누가 청교도들이었는가?
2. 루터교 및 제네바 종교 개혁 운동과 존 칼뱅
3.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청교도
4. 대학과 강의 및 설교의 역할
5. 청교도 전성기
6. 제임스 1세의 통치
7. 찰스 1세와 라우드 대주교
8. 시민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9. 청교도 상위 시대
10.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
11.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대한 해명
12. 청교도들의 유산
13. 청교도 운동의 종식
14. 청교도들은 속이 좁은 자들이었는가?
15. 침례교인들과 청교도들은 어떤 관계인가?
16. 청교도와 대학교
17.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18.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컨퍼런스
19. 청교도의 지속적인 영향
1. 누가 청교도(Puritans)들이었는가?
1568년 런던에는 재침례파(Anabaptists) 회중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청교도 혹은 흠없는 주님의 어린양들이라고 부렀다. 청교도란 용어는 이들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기간(1588~1603)에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대진리들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의 강조점은 성경 말씀에 충실하기, 강해 설교, 목회적 돌봄, 개인 경건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거룩이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이처럼 철저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경건한 자들 혹은 명칭만의 교인이 아닌 자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또한 복음을 귀히 여기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들을 청교도라고 칭하였다. 성경의 경고처럼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 때문에 놀림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당신의 경건한 교인에게는 '흥을 깨는 사람' 혹은 '청교도'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청교도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다. 이것은 알마니안/칼빈주의 논쟁에서 기인되었다. 그 결과 은혜 교리를 따르는 잉글랜드의 목사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라는 대 주교가 목회자 승진 인사 목록을 올렸을 때 청교도들의 이름 옆에는 그들의 신앙 노선에 대한 경고로 청교도인 약자로 P자로 적고 다른 이름 옆에는 정통이라는 약자인 O자를 적었다. 이로써 대주교의 해석에 따라 결정된 정통 목사들은 승진이 가하다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로드는 사실상 독단적인 알마니안주의자였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경멸의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641년 헨리 파커는 '교황파들, 감독들, 궁중간신들, 무대 시인들, 방랑 시인들, 광대들, 술주정꾼들, 불량배들 등등의 사람들을 청교도들'이라고 실컷 놀려댔다.
2. 루터교 및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과 존 칼뱅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전기를 마련한 것은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의 글과 모범을 통해서였다. 잉글랜드의 개혁 초기에는 마틴 루터(1483-1546)가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고 나중에ㅡᄂᄂ 존 칼뱅(1509-1564)이 깊은 영향을 주었다.
존 칼뱅의 설교는 성경을 책별로 각 본문들을 강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교 스타일과 그가 제네바에서 보인 개혁의 모범은 메리 여왕의 학정을 피해 제네바로 피신했던 약 1백명의 잉글랜드 망명 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 망명교인들에게는 교회 체제와 예배 형태를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는 비전이 있었다. 이들 중에 여러 명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식 때 귀국해 국교회의 중책을 맡앗다. 그러나 그들은 급진적 개혁이 방해를 받아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네바 교회의 패턴과 터가 잡힌 장로교에 따른 개혁 교회의 비전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기 있는 교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trwright, 1535-1603)에 의해 불이 붙었다. 1570년에 가르친 그의 사도행전 강의는 매우 큰 영향을 주어 교회 체제의 개혁을 시도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의 두 제자였던 존필드(John Field)와 토마스 윌콕스(Thomas Wilcox)는 1572년 의회에 보내는 권고랄느 ᄂ타이틀로 본 주제를 상술하였다. 이 글은 힘있고 비타협적이었지만 의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필드와 윌콕스는 투옥을 당하였다.
한편 카트라이트는 자신의 가르침에 오류가 잇다는 비난을 받고 다음과 같은 본 문제의 핵심을 약술하였다.
1. 대주교와 대집사(감독 체제)직책은 폐지되어야 한다.
2. 교회의 직책은 신약의 모델에 따라야 한다. 감독 혹은 장로들은 설교를 하고 집사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3. 모든 교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4. 누구도 교회의 높은 직책을 받으려고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5. 교회의 직분은 국가가 아닌 교회에 의해서 수여되어야 한다.
3.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
엘리자베스(Elixabeth)가 1558년 11월 23일 여왕으로서 런던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치 세력들을 잘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의 감정과 희망 사항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그년는 튜더(Tudor)왕가으이 어떤 군주보다도 더 나은 수완으로 정부와 교회 정책을 통솔하였다. 그녀는 라틴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고 헬라어도 알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나의 연합된 국교를 가진 강력한 단일 국가를 건설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비서실장이엇던 윌리엄 쎄슬은 '두 개의 종교를 인정하는 곳에서는 국가의 안정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를 즈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경쟁은 승부가 나지 않은 때였다. 백성들은 대부분 어느 한 쪽에라도 쏠리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행정부는 대체로 중용적인 입장을 취하는 개신교였다. 엘리자베스는 로마카톨릭에 전적으로 투신된 사람들은 등용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문제도 신중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엇다. 외국의 왕자와 결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는 문제였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독신으로 지냈다. 한편 그녀는 자기의 배다른 형제였던 메리 여왕보다다는 덜 난폭했지만 그래도 두 명의 재침례파들을 1575년 화형시켰다. 그리고 1593년에는 그린우드, 배로운, 펜리 같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을 교수형으로 처벌하였다.
교황은 1570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파문시켰다. 이것은 교황에 대한 반대를 강화시켰고 잉글랜드에 개신교 운동을 돕는 결과를 낳았따. 그리고 1588년에는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려는 대대적인 시도가 있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30척의 군함과 상륙 공격용 지상군 5만명을 준비하고 전쟁을 도발했으나 대패하였다. 귀국한 무적 함대의 전함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에 개신교의 발판을 굳혀 주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국에 대한 긍지를 품게 하였다. 백성들은 가장 악마적이고 잔인한 팝박 체제인 종교 재판으로 악명 높은 로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위협한 사실에 분개했다.
경건한 처교도 목회자들이 동지애를 갖고 어떤 상황에서 수고했는지 이해하려면 1559년 잉글랜드에 부과된 지상권을(Acts of Supremacy)과 일치령(Acts of Uniformity)과 새 기도서(Prayer Book)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지상권 법령의 의도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1640년까지 왕권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의 예배 방식은 예민한 문제이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목회자들은 흰 가운을 입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반발하였다. 그래도 대부분은 평안을 위해 양보했지만 일부에서는 거절하였다. 맨체스터의 한 목회자는 이렇게 설교하였다. "목회자 가운은 교황의 넝마이며 교회 안에 있는 큰 이단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착용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또한 어느 목사는 1570년 리치필드의 감독에게 찾아가서 경고하였다. '이것은 짐승의 오염과 저줄르 받은 표시이다. 그런 적그리스도의 넝마를 사용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처음보다 더 심한 제이의교황주의에 빠질 것이다."
일치령의 적용은 장소에 따라 달랐다. 많은 감독들은 같은 개신교 목회자들을 박해할 생각이 없었다. 초창기 청교도 운동은 1580년대와 15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낸 능력있는 목회자와 설교자들의 역적 교제에서 활기를 띠었다.
이 지도자들 중에서 유명한 인물들은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헨리 스미스(Henry Smith), 리처드 로저스(Rischard Rogers), 로렌스 채더턴(Laurence Chaderton), 아서 힐더샘(Arthur Hildersam), 존 도드(John Dod), 존 로저스(John Rogers),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였다. 이들은 설교뿐만 아니라 영혼의 의사들로서도 유명하였다. 이들의 사역으로 청교도들의 수효가 크게 늘어났다.
4. 대학과 강의 및 설교의 역할
청교도의 성장은 위에서 예시했듯이 대중의 적극적인 관심을 끌게 한 경건한 목사들의 모범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윌리엄 퍼킨스나 로렌스 채더턴의 경우처럼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할도 청교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청교도 학자들로 채워진 케임브리지의 임마누엘 대학이나 서섹스의 시드니 대학은 재능있는 청교도 목사들과 설교자들을 꾸준히 배출하였다. 청교도의 진전 배경을 거슬러 살피려면 강의의 역할도 인정해야 한다. 마을에서는 시장이 자체 설교자들을 화보하고 평일 공개 설교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예배 때의 기도서 사용과 교회 의식의 일치를 위해서 강의를 사용하였다. 에섹스의 웨더스 필드에서 사역한 리처드 로저서와 런던의 세인트 클레멘트 데일즈에서 사역한 헨리 스미스는 공적 강사들이엇따. 1560년에서 1662년 사이에 적이도 700명의 목회자들이 런던에서 이런 공개 강의에 가담하여 누구나 한두 번 정동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약 60퍼센트가 청교도들이었다. 귀족들과 상류층의 후원도 청교도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유한 후원자들은 청교도 설교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였다.
엘리자베스 통치 동안에 '프라퍼싸이즈(Propersyings)'라는 것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강해 설교와 토론을 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모임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제재를 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주교인 에드먼드 그린달이 여왕의 뜻을 받들지 않고 프라퍼싸잉즈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망하기 전 7년 동안 대주교직에서 정직되었고 이 가간 동안 대부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여왕은 1577년 5월에 직접 감독들에게 사허나을 보내어 프라퍼싸잉즈 집회를 억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5. 청교도 전성기
1603년과 1662년 사이의 기간은 격동기였다. 왕권과 의회가 갈라져서 급기야는 심니전쟁으로 비화되었다. 1640년대에는 종교적인 다원화 현상이 고개를 쳐들었다. 청교도 운동은 이 시기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특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이제 서술하려는 다음 다섯 가지 단계의 역사는 청교도 이해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첫 단계는 제임스 1세 통치,
둘째 단계는 찰스 1세와 로드 대주교,
셋째 단계는 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넷째 단계는 청교도 상위 시대
다섯째 단계는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이다.
6. 제임스 1세의 통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했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대국으로 만들려고 힘썼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년는 성격이 고르지 못한 편이었다. 때때로 역정을 부리고 기분이 언짢으면 말을 하지 않으며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17세기 후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적지 않은 업적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17세기 초반의 청교도는 잉글랜드 국효회 목회자들의 약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청교도들은 새왕(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라고 부르고,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 칭함) 이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교회 개혁에 동조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교도들은 1천몀의 청교도들이 서명한 타원서(Millenary Petition)를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내려오는 길에 제출하였다. 이 타원서는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는데, 그 결과 햄튼 왕궁 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회의는 런던에 있던 햄튼 왕궁에서 1604년 1월의 각각 다른 날에 세 번에 걸쳐 모였다. 제임스는 상당히 지적인 왕이었다. 그는 교회 행정의 민감한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수권을 믿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국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으며 따라서 왕에게 불복하는 것은 하나님게 불순종하는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시비를 걸기 좋아하는 장로교인들에게서 많이 시달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절대권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국교회에 장로교를 소개할 의향인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였다.
햄튼 왕궁 회의가 진행될수록 제임스 왕은 점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고 하거나 '청교도주의와 군주제는 하나님과 마귀처럼 닮은 데가 업사.'는 등의 극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교도 대표자들에게 협박을 하였다. '당신들은 속히 국교의 방침에 따르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서 몰아내겠소!' 회의는 왕의 비위만 잔뜩 거스르고 끝나는 결과가 되었다. 반면 왕은 새로운 성경 번역 사역에 동의했는데, 이것이 1611년 완성된 흠정역(Authorized Version) 또는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이라고 부르는 역본이다. 왕이 허락한 다른 사항들은 얼마되지 않으며 별로 중요한 것들도 아니었다.
1604년과 1609년 사이에 약 80명의 목회자들이 국교의 방침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파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1607년 이전에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였다. 감독들은 성공회의 방침을 강요하지 말고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의회에서는 경건한 사람들이 보직을 박탈당한 목사들의 복직 운동을 벌였다. 제임스 1세는 도르트에 대표를 보냈다. 도르트 총회는 1618-9년에 네델란드에서 열렸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알마니안주의에 반대하는 전통 칼뱅주의의 입장이 확정되었다.
제임스 알마니안주의가 칼뱅중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불분명하였다. 1624년 리처드 몬태규는 A New Gagg for an Old Goose 라는 반(反) 발뱅주의 글을 출판했다. 이것은 잉글랜드 국교회가 알미니안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었다.
7. 찰스 1세와 로드 대주교
제임스는 1625년 사망하였다. 그리고 찰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인물이 잘 생겼고 품위가 있었으며 도덕적이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그의 부친인 제임스와는 달리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 특히 그는 청치에 필수적인 통제나 균형을 유지할 줄 몰랐다. 찰스는 당시에 프랑스를 다스린 루이 13세의 여형제인 앙리에따 마리아와 결혼했다. 앙리에따 마리아는 열렬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국정에 참견했다. 그래서 의회와 백생들이 항상 오아비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심은 유럽의 개신교가 하강세를 보인느 위기 의식과 관련해서 더 짙어졌다. 유럽에서의 개신교 위축은 많은 개신교도들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하였다.
윌리엄 로드는 찰스가 신망하는 자문관이 되었다. 1625년 찰스가 왕위에 즉위한 때로부터 로드는 세력을 행사하였다. 이것이 공식화 된것은 그가 1633년 대주교가 된 때였다. 제임스 1세는 찰스 1세에게 로드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경고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기질을 모른다니까.' 이 경고를 찰스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로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모든 면에서 적대시하였다. 그가 대주교가 된 뒤에 시행한 첫 번째 일의 하나는 주일날 게임과 기타 놀이를 권장하는 것이엇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반감을 일으켰다. 그는 자유 의지를 강조하고 예정론을 배척하는 철저한 알미니안주의였다. 로드는 미신적이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예배 형식은 수용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배격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의식과 예식들로 짜여진 것들이었다. 오늘날가지 성공회 교회들 중에는 교회당 안의 동편 끝에 제단들을 가진 경우가 많다. 제단의 메시지는 희생에 대한 것이다. 로드는 제단이 '지상에 있는 가장 큰 처소이며 강대사보다도 더 큰 곳'이라고 믿었다.
유명한 토마스 맥콜린 경은 청교도의 영성을 이해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윌리엄 로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썼다. '성공회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 중에서 로드는 종교 개혁의 원칙에서 가장 멀리 이탈되고 로마에 가장 접근된 자이다. 그는 성격이 조급하고 화를 잘 내며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동정할 줄 모른다. 그는 미신적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거짓에 잘 이끌리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까다롭고 고약한 감정을 경건한 열정으로 착각한다. 그의 지시로 나라의 구석구석이 항상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분리주의자들의 소그룹들까지 샅샅이 뒤져서 다 해체시켰다. '맥콜리의 과장법은 박해자들의 열성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리주의자들의 회중이 그의 말대로 다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드는 대주교로서 국교의 양식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체포하고 투옥시키는 권력 행사를 하였다. 그는 심문을 하고 박해를 하기 위해서 스타 쳄버라는 법정을 사용하였다. 로드의 잔인성의 한 실례로서 알렉산더 레이통 박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로버트 레이톤 대주굥의 부친이었다. 레이톤은 변호나 상소권을 박탈당한 채 뉴게이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중재 재판소에 끌려나가 판결을 받았는데 두 귀가 잘리고 양편 코가 찢겨지며 얼굴에 반동분자라는 글자를 문시으로 새기는 형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두 번의 태형을 받고 사지를 형틀에 끼워 다시 감옥에 보내는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로드는 이 천인공노할 판결이 내리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윌리엄 프린, 존 배스트윅, 헨리 버튼, 존 릴번도 이와 유사한 야만적인 취급을 받았다.
청교도들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있엇다. 1629년 1640년 사이에 2만명의 남녀노소가 미국의 뉴잉글랜드로 떠났다. 이 들 중에는 29면의 목사도 포함되었는데 본국의 형편이 호전되자 28명이 귀국하였다. 박해 때문에 청교도들은 네델란드를 통해 많이 나라를 떠났다.
뉴잉글랜드에 가서 정착한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은 토마스 후커, 존 코튼, 토마스 셰퍼드였다. 그리고 윌리엄 에임스(1576-1633)는 특기할 만하다. 그느 ᄂ청교도로서 주로 네델란드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글들은 뉴잉글랜드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글들은 뉴잉글랜드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신학의 정수'라는 책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의 대표작이다.
찰스는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 없이 나라를 통치하였다. 국가 행정은 지방법원을 통해 처리되었다. 정치 세력은 주로 60명의 귀족 혹은 peer라고 부르는 대토지 소유가들의 손에 있었다. 이들 밑에는 gentry라는 상중류층들이 있었다. 1642년 시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귀족들과 젠트리들은 왕에 대한 충성도에 있어 절반 정도로 갈라졌다.
8. 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로드(Laud) 대주교는 1638년에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도서와 의식서를 장로교도들인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았다!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St. Giles) 교회의 유명한 사건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흰 성의(聖衣)를 입고 거드름을 부리면서 한 사제장이 기도서를 읽으려고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분개한 제니 게데스(Jenny Geddes)라는 여성도가 자기가 앉았던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 되먹지 못한 건방진 인간아! 네가 내 귀에 미사를 들려주려고 하느냐?" 제니의 모범은 그토록 증오하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을 다른 사람들도 분연히 저지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1638년 찰스는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대는 참패를 당하여 1639년에 휴전을 맺었다.
의회와 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런던에서 왕권과 교황권을 반대하는 시위는 금방 진압되었다. 왕은 의회에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애썼다. 그는 1642년 무장한 무리들을 데리고 의회의 지도자인 존 핌과 4명의 다른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하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하였다. 5명의지도자들은 이미 귀띔을 받았기 때문에 탬즈 강의 거룻배를 타고 도망친 뒤 도시에 잠적하였다. 이러한 왕의 행위는 그에 대한 반대를 더 일으키게 하였다. 혁명의 기운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찰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런던을 부득불 떠나야 했다. 1642년 5월에 그는 잉글랜드 요크(York) 시에 자신의 본부를 세웠다.
1642년 10월, 첫 번째 시민전쟁이 에쥐힐(Edgehill)에서 일어났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처음에는 왕정파(왕당원)와 의회파(원두당) 사이에 세력이 엇비슷한 듯 하였다. 그래서 군사적인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고 의회가 스코틀랜드와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조인하였다.
1644년 1월에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국경을 넘었고, 같은 해 7월에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에서 왕정파와 접전이 되어 스코틀랜드와 요크셔[Yorkshirer, 토마스 패어팩스 (Thomas Fairfax)경이 거느림]와 이스턴 어소시에이션[The Eastern Association,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과 맨체스터 (Manchester) 백작이 거느림]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역할과 성공이 드러나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고 '철기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승리는 계속되지 못하였다. 의회 지도자들 중에서, 특히 에섹스 백작처럼 유약하고 단호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의회는 결단력있고 한층 더 투철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더 나은 장군들과 군대 재조직 없이는 승전을 거둘 수 없었다. 크롬웰은 적을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맨체스터 백작을 나무랐다. 맨체스터 백작의 답변은 만약 의회파가 왕정파에게 질 경우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만약 우리가 왕을 아흔아홉번 이기고서도 그와 그의 후손이 여전히 왕위에 앉아 있으면 우리도 여전히 그의 백성이 되오. 그러나 왕이 우리를 단 한 번만 이겨도 우리 목이 떨어지고 우리 후손들도 망하게 될 것이오."
1645년 군대는 새롭게 재편성되었다. 총사령관은 토마스 패어팩스 경이었는데 그는 불과 33세였다. 그의 기병대 장군은 크롬웰이었다. 이때부터 시민전쟁은 크롬웰의 군기 확립과 전략에 의해 결정적인 승리를 바뀌었다. 맥콜리 경은 올리버 크롬웰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의 자유를 위해 헌신했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기병대를 그런 정신을 가진 자들로 채웠다. 그는 군인들에게 잉글랜드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기율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지적, 도덕적 측면을 개발하여 용맹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시켰다.
한편 패어팩스는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이해심이 적고 결단력이 부족하였다. 그는 명칭만 총사령관이었지 실질적인 대장은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자신의 기병대를 조직한 것처럼 전군을 동일한 원칙에서 편성하였다. 크롬웰 군대가 다른 군대와 다른 점은 엄격한 도덕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열렬한 왕정파들도 크롬웰의 군대에서는 맹세를 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노름을 하는 것을 볼 수 없고 또한 장기간의 군사 장악 기간에도 시민들의 재산이나 여자들이 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크롬웰의 기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자기 군인들을 전쟁터로 데려갔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승리를 위해 언제 공격해야 할지 알았다. 크롬웰은 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는 백전 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는 사관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 능하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사람이다. 로마 카톨릭 저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Praser)는 그녀의 전기에서 크롬웰을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행해야 할 일을 달성하는 것과 그 일을 완전하게 처리하는 것은 규모에 상관없이 탁월한 능력이다. 이 점에서 크롬웰은 당연히 유명 인사의 명단에 올라갈 자격을 가졌다."
9. 청교도 상위 시대
로드(Laud) 대주교는 1641년 의회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반역죄로 1645년 런던 타워(Tower of London)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감독들에 의한 교회 체제도 1646년에 폐지되었다. 시민전쟁에서의 의회가 점차 승리를 거두자 새로운 문제도 나타났다. 이것은 의회 내에서 장로교도와 독립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분열이었다.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인들은 주로 독립교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대를 싫어하고 두려워하였다. 한편 찰스 왕은 스코틀랜드인들과 비밀 조약을 협상함으로써 시민전쟁을 재개시켰다. 찰스 왕의 이러한 이중 정책은 군부로 하여금 그를 재판에 회부케 하였고 1649년 1월에 잉글랜드 공화국의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찰스 2세를 지지하는 군대가 1650년 던바(Dunbar) 전투에서 크로웸에게 패하였다. 정확하게 1년 뒤에 찰스 2세를 지원하는 군대들이 워세스터(Worcester)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의회의 최종적 승리로 시민전쟁은 종식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크롬웰은 호민관(Lord Protector)이 되어 의회를 통해 국가를 다스렸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굳게 믿은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
1643년 6월 12일 의회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운영 체제와 예배의식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들을 회집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같은 해 7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가 열렸다. 이것이 1649년 2월까지 있었던, 1,163회의 모임 중에서 첫 번째 회집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임명된 사람은 151명이었는데, 그중에서 121명이 목사들이고 나머지 30명은 평신도였다. 이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Faith)과 대교리 문답 및 소교리 문답 (The Larger and Shorter Catechisms), 공공 예배 지침서(The Directory of Public Worship)의 작성을 마쳤다. 이 문서들의 영향은 심대하였다. 특히 신앙고백서는 전세계적으로 후속 세대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회중교회는 1658년에, 침례교는 167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기본 고백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전체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수정을 가하였다.
17세기 중반의 청교도 목사들의 리더십이 지닌 깊이와 질은 잉글랜드의 교회사에서 독특하다. 이 당시에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들은 로버트 볼턴(Robert Bolton),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 제레마이어 버로우즈(Jeremiah Burroughs),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등이다.
1640-60년 사이와 그 이후에 살았던 가장 유명한 청교도들로서 저술이 전집으로 당시나 혹은 현대에 와서 모두 다시 출판된 사람들은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토마스 맨턴(Thomas Manton), 스티븐 챠녹(Stephen Charnock), 존 오언(John Owen),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번연(John Bunyan), 존 플레이블(John Flavel),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 데이빗 클락슨(David Clarkson),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존 하우(John Howe)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련됐던 지도자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명은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였다. 그는 런던의 교회 역사에서 가장 길고 강력한 사역을 한 사람이었다.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는 장로교파의 지도자로 인정되는 사람으로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자주 설교하였다.
핸서드 놀리즈(Hanserd Knollys)와 헨리 제시(Henry Jessey)는 침례교인들이었다. 그들의 전기는 최근에 침례교도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존 번연의 불후의 작품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과 '성전'(The Holy War)을 비롯한 다른 유명한 저서들은 지금도 계속 출판되고 있다. 예컨대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의 '신령한 한 몸'(A Body of Divinity)과 백스터(Baxter)의 '개혁된 목회자'(The Reformed Pastor)를 들 수 있다.
10.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였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이 자기 부친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없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그래서 또 다른 시민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군주제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찰스 2세는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에서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세력을 잡고 있는 성공회 쪽에서 보복을 강력하게 밀고 나옴으로써 좌절되었다. 1643년에서 1654년 사이에 8,600명의 교구 목사들 가운데서 약 34퍼센트가 무능력 혹은 왕정파나 교황을지지했다는 이유로 퇴출되거나 다른 형태의 고통을 당하였다.
1661년 1월에 토마스 베너(Thomas Venner)는 5차 군주제 운동의 지도자로서 득세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크롬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체포된 자였는데 처형은 면했었다. 베너는 약 50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런던을 공포에 질리게 하였다. 22명이 이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와같은 종류의 폭력과 무질서는 세력을 잡은 성공회가 강력한 대응책을 적용시킬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무차별 제재를 가하였다. 난폭한 무질서는 당국이 모든 종류의 비국교도들을 탄압하는 핑계가 되었다.
침례교도들은 베너와 절연했지만 소용없었다. 1661년 1월 10일 왕명으로 재침례파, 퀘이커교도, 5차 군주제 회원들의 집회를 모두 금지하는 선언이 통과되엇다. 짧은 시간에 4천 명 이상의 퀘이커교도들이 투옥되었다. 무장 군인들이 침례교도들을 밤에 침대에서 끌어내려 감옥으로 밀어넣었다. 번연이 바로 이때 잡혀서 1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서 죽었다.
다음에 클라렌돈 백작의 이름을 딴 클라렌돈 법령(Clarendon Code)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형태의 비국교도들을 해롭게 하는 법안이었다.
1662년에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를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만약 목회자가 감독 체제하에서 안수를 받지 않았으면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서 다시 안수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모든 부분에 동의해야 했다. 목사는 누구나 국교회법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부인해야 했다.
이러한 요구는 청교도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과 같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신앙 양심상 정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통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약 2천 명의 청교도들이 쫓겨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에는 교사들도 포함된다. 우리는 청교도들이 국교의 시책에 순응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과연 얼마나 국교회에 남아 있기로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국교회에 남아 있던 자로서는 '전신갑주의 크리스천'(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을 저술한 유명한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이 있었다.
1662년은 잉글랜드의 청교도가 쇠퇴하기 시작된 해이다. 이때 이후의 시대를 '디센트'(Dissent, 국교 반대)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잘 알려진 청교도는 1705년에 이 세상을 떠난 존 하우(John Howe)와 1707년에 작고한 토마스 둘리틀(Thomas Doolittle)이다.
John Owen
1662년은 청교도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때부터 그들은 설교 영향은 줄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집필 사역은 계속되었다. 청교도의 가장 귀중한 글들의 일부가 1662년 이후에 쓰여졌다. 한 예로써 존 오언(John Owen)의 기념비적인 히브리서 주석, 내주하는 죄에 대한 책, 시편 130편 강해는 모두 1662년 이후에 집필되었다. 존 오언은 과연 '청교도의 왕자'라는 타이틀을 받기에 합당한 자이다. 25권에 달하는 그의 전집은 영어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대의 신학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청교도 운동의 최대 신학자로 인정된다.
왜 청교도 운동은 1662년 이후에 급격하게 하강했을까? 국교 반대자들에 대한 핍박은 무자비하게 철저한 것이었다. 비국교자들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목회자들의 수준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에 영적 동지애를 통해 화목한 영적 연합을 이루었고 다음 시기의 청교도 상승 운동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나, 1662년 이후로는 그런 연합된 분위기가 식어 버렸다. 왕은 1672년에 종교 자유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내려 잠시 동안 비국교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억압을 다소 이완시켰다.
청교도 운동의 주된 하강 원인의 하나는 연합의 상실이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장로교도들에게 주된 책임을 돌린다. 장로교 지도자들은 요한복음 17장과 같은 말씀에서 선명하게 나와 있는 연합을 단단히 붙잡지 않고 정치적인 편볍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 자제를 망각하였다. 17세기 후반의 청교도 운동에 기여한 또 다른 하나의 쇠퇴 요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즐겨 읽는 저서들을 쓴 유명한 청교도 지도자들이 떠난 뒤에 그들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비슷한 수준의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11.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대한 해명
1980년 《이반젤리컬 쿼털리》(Evangelical Quarterly)에서 짐 패커(Jim Packer)는 청교도를 하나의 부흥 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부흥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정의했다. 나는 18세기의 각성 운동과 비교해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청교도들의 이야기는 휫필드 스타일의 극적인 부흥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뛰어난 설교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리처드 백스터, 존 번연, 존 로저스가 있었고 이들보다 덜 알려진 목회자들로서는 케임브리지에서 멀지 않은 캐딩톤(Kedington)의 사무엘 패어클로우(Samuel Fairclough)와 서머셋의 마을인 멜즈(Mells)에서 사역한 그의 아들 리처드 패어클로우(Richard Fairclough)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강력한 각성 사역을 통해 많은 영혼을 수확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든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대한 해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청교도들은 설교자 또는 목회자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힘껏 강해하고 적용하는 것을 믿은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노고였는데 이를 위해 말씀과 성령과의 가장 밀착된 연합을 추구하였다. 강약의 차이는 있었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생기를 불어넣고 죽은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일으키는 역사를 하셨다.
청교도들은 새 시대의 기사나 이적이나 표적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의 성패를 말씀 사역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메마른 땅을 기경하는 것을 믿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보편적 특징이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본국에서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접하는 원주민들이 있는 먼 땅에서 수고하는 목회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모범이 된다.
12. 청교도들의 유산
청교도들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 청교도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살았던 3명의 청교도들을 지적하고, 그 다음 청교도가 현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서술하기로 한다. 청교도는 존 오언의 경우에는 깊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학의 형성이었고, 리처드 백스터에게는 열정적인 전도와 목회였으며, 존 번연에게는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 있는 설교였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서로 달랐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청교도의 주류가 오늘날의 우리 교회들과는 달리 다른 입장들에 대해서 대체로 관용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J.C.Ryle
잉글랜드 국교회는 1662년의 대축출(The Great Ejection)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따금씩 라일(J.C.Ryle,1816-1900) 감독과 같은 출중한 지도자들이 나왔다. 라일은 청교도들의 강조점을 따라 자신의 스타일대로 글을 썼다. 대표적인 예로써 '거룩'(Holiness)이라는 제목의 그의 저술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라일은 청교도의 점진적 성화론을 강설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열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교도 신학과 헌신의 유산은 때때로 비범한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을 산출시켰다. 찰스 해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은 청교도들의 후계자로 불리운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청교도의 또 다른 후계자는 마틴 로이드존스(Dr. Martyn Lloyd-Jones)이다. 그는 청교도 서적들을 추천하였고 청교도 신학과 그들의 강해 설교 스타일을 따랐다. 그는 목회자들의 지도자로서 리처드 그린햄, 존 도드, 로렌스 채더턴과 같은 청교도 선구자들을 닮았다. 로이드존스의 강단 사역은 다른 지도적인 청교도들의 경우처럼 저술의 바탕이 되었는데 그의 강해서는 아직도 전세계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청교도의 경건과 건전한 교리는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잉글랜드 청교도는 잉글랜드에 크리스천 가정과 주일을 주었다. 그들은 균형 잡힌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건전한 교리의 모범을 남겨 주었다. 또한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완전히 잃어갈 위기에 처한 성경적인 죄론을 그들의 저술들을 통해 보존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도덕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도덕법은 구원을 위해서가 이나고 중생한 사람이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청교도는 우리에게 깊은 기도와 헌신된 삶을 촉구한다. 그들은 부지런히 마음을 지키는 일과 영적 전쟁의 실체와 깨어 있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교회 성장에 대한 청교도의 소망은 하나님 중심이었고 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다. 종말에 관한 청교도의 교리는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였고, 수고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인내를 일으켜 오래 참게 하였다. 이러한 청교도의 입장을 처음으로 실천한 사람 중의 하나는 존 엘리옷(John Eliot)이었다. 그는 1631년 27세의 나이로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갔다. 그는 보스턴에서 1마일 떨어진 새로 세워진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인디언 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앨곤퀸(Algonquin) 언어를 배우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이 작업을 40세에 시작하여 마침내 앨곤퀸 언어로 전 성경을 모두 번역하였다. 회심자들이 생겼고 교회들이 개척됐으며 인디언 목회자들이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84세로 사망할 즈음에는 많은 인디언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다.
청교도주의는 교리와 체험과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 매우 성경적이며 균형적이다. 그래서 청교도는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앞으로 청교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런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청교도의 주류가 미래를 낙관한 것이 옳았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합2:14)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1:11)
13. 청교도 운동의 종식
모든 교회는 잉글랜드의 국교회에 맞추어야 한다는 법령이 1662년에 통과됐다. 국교회의 감독 체제하에서 안수 받지 못한 목회자들은 안수를 다시 받아야 했다. 또한 목회자들은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모든 부분에 동의해야 했다. 목사는 누구나 교회 체제에 복종하는 맹세를 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내버려야 했다. 엄숙 동맹 언약서는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과 함께 나란히 인쇄된 개혁 서약이었다.
신일치령(The New Act of Uniformity)은 이 개혁이 공적으로 폐기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할 나위 없이 청교도들은 양심상 이런 요구에 굴복할 수 없었다. 약 2천 명이 자신들의 생업에서 강제로 쫓겨났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목회자들이었고 나머지는 학교 교장이나 교원들과 같은 권위 있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막일을 찾아야 했다. 매우 험한 시기였다.
이제 청교도 시기가 끝나고 국교반대(Dissent)로 알려진 새 시대가 시작됐다. 청교도 운동은 17세기 말경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18세기까지 살았던 유명한 청교도로는 존 하우(John Howe, 1705년 사망)와 1707년에 작고한 토마스 둘리틀 (Thomas Doolitle)과 성경 전권 주석가로 명성이 높은 매튜 헨리(Matthew Henry)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662년에 태어나서 1714년에 사망했다. 매튜 헨리는 1662년에 쫓겨난 청교도 필립 헨리(1631-1696)의 아들로서 한동안 런던의 이슬링턴(Islington)에 있던 토마스 둘리틀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1662년의 대축출(The Great Ejection)로 초래된 고난과 1688년까지 계속된 무자비하고 극심한 박해로 복음주의자들의 연합이 깨어지고 잘 훈련된 자들에 의한 목회 사역의 유익이 큰 제한을받았다. 비국교도들은 대학 입학이 거부되었다. 이것은 사역 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청교도들 사이에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영적 단합은 1662년 이후에 급격히 하강하였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균형이 잡힌 복음주의였다. 그러나 1662년 대축출 이후부터 알미니안주의가 교회들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유니테리안주의(Unitarianism)의 길을 열었다. 축출당했던 신실한 목사들은 계속해서 집필을 했으나 큰 인물들의 세대가 끝나자 그들의 자리를 메울 자들이 없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1662년의 대축출에서부터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따금씩 라일(J.C.Ryle) 감독과 같은 예외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라일은 청교도들의 강조점을 따르면서 청교도처럼 글을 썼다. 그의 거룩(Holiness)이라는 잘 알려진 저서는 청교도의 성화 교리에 대한 강설이다.
19세기에 태어난 가장 빛나는 청교도는 스펄젼(C.H. Spurgeon)이고, 20세기에는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이다. 스펄젼의 청교도의 글과 원칙에 흠뻑 젖은 사람이었다. 그는 청교도에 의해 엮어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청교도의 관점에서만 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청교도의 맥락은 급강하면서 20세기 초반에 거의 맥박이 끊어졌다. 스펄젼은 이러한 퇴조를 예상하면서 말하였다.
"현재로서는 청교도 사상이 경멸을 당하지만 많은 담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머지 않아 청교도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창문을 검게 칠한 자들은 하늘의 빛이 밝게 비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당황할 것이다."
청교도들과 그들의 글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에 퍼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증가되고 있다. 신학적인 갱신이 없었더라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청교도에 대한 관심은 그가 1925년에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전기를 읽으면서 일깨워졌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청교도들에 대한 관심을 광범위하게 일으켰다. 그가 청교도 집회(The Puritan Conference)에서 전한 19회의 강설은 청교도들(The Puritan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박사도 청교도들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1944년 옥스퍼드 대학 1학년 재학 중에 옥스퍼드 기독 대학생 유니온에 기증된 청교도 문헌을 검토하고 정돈하는 부서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24권의 세트로 된 조 오언(John Owen)의 글을 발견하였다. 페이지는 잘린 곳이 없었고 내용은 책의 표지에 요약되어 있었다. 패커는 죄를 굴복시키는 문제를 읽기 위해 제6권으로 곧장 들어갔다. 이것이 그가 청교도들을 재발견한 계기였다. 나중에 그는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다. 짐 패커 박사가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부흥시킨 공헌은 지대하다. 그의 청교도 연구는 하나님의 거장들(Among God's Gaiants)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청교도주의는 교리와 경험과 실천에 있어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14:6)를 높임으로써 성경의 진리들을 매우 균형 있게 제시한다.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성령의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와 하박국 선지자의 약속된 선언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사60:22)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2:14)
14. 청교도들은 속이 좁은 자들이었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교도들이라고 하면 검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사는 것을 혐오한 편협한 무리들로 생각한다. 이것은 청교도에 대한 대중적인 풍자이다. 레란드 라이켄(Leland Ryken)은 청교도의 실체를 학적으로 조사하고 규명한 뒤에 '세속적 성자들 : 청교도의 정체'(Worldly Saints-The Puritans as they Really Were)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청교도에 대한 그릇된 정보들을 시정하였다. 그는 잉글랜드 청교도와 뉴잉글랜드 청교도로 알려진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을 함께 다루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잉글랜드 청교도에 한정시켰다.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나름대로 특징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라이켄의 관찰은 대서양 양편의 청교도들의 성격을 균형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라이켄의 평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 청교도들은 성관계를 반대했다. 이것은 말도 안된다.
○ 청교도들은 웃는 적이 없고 즐거운 삶을 반대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청교도들은 심각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보다 우리의 기쁨을 훤씨 더 원하신다."
○ 청교도들은 단조롭고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었다. 사실이 아니다. 청교도들은 당시의 계급과 시대에 따른 복장을 했다.
○ 청교도들은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을 반대했다.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많은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청교도들은 사냥, 낚시, 일종의 축구 게임, 볼링, 독서, 음악, 수영, 스케이팅, 활쏘기 등과 같은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하였음이 드러났다.
○ 청교도들은 부자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하는 일의 노예였다.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청교도들은 사실상 부유함의 위험들을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하였다.
○ 청교도들은 예술을 적대시하였다.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청교도들이 교회에서 음악과 예술을 제거했다는 사실에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것은 음악이나 예술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고 로마 카톨릭 형태의 예배와 의식에 대한 반대였다.
○ 청교도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성을 격하시켰다. 넌센스다. 그들은 머리와 가슴의 균형을 목표로 삼았다.
○ 청교도들은 혈압으로 고통을 받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나 어필이 된 구식 운동이었다. 전혀 틀린 말이다. 청교도주의는 젊고 박력있는 운동이었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초기 청교도들은 "젊고, 용감하고, 진보적인 지성인들로서 매우 인기가 있는 신시대의 사람들이었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 청교도들은 몸과 물질 세계를 혐오했다. 사실이 아니다.
○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참지 못하였다. 현대적 수준에서 보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당시의 수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어떤 그룹도 전적인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관용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청교도들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사실인 경우가 적지 않다. 사무엘 워드(Samuel Ward)의 일기를 보면 자신의 실패 목록과 자기 비판이 나열되어 있다. 이중에는 기도하지 않고 잠들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잠들기, 자원 기도를 하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청교도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억눌렀다. 전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은 따뜻한 인간적 감정을 가졌다.
○ 청교도들은 사람의 외형적 행동만 보고 판단한 율법적인 도덕주의자들이었다. 원래의 청교도들에게는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 청교도들은 지나친 자기 혐오에 빠졌다.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코튼 매서(Cotton Mather)는 이런 형태의 모습들을 일기에 기록했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겸비한 생각을 가져야 하고 자신을 낮추는 반성을 해야 한다. 자신을 계속 혐오하고 또한 자신의 혐오스런 상황들에 민감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는 자이다."
○ 청교도들은 교육을 반대한 무지한 자들이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들보다 교육에 더 열성을 보였던 기독교 운동은 아직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15. 침례교인들과 청교도들은 어떤 관계인가?
존 번연은 설교와 삶의 방식과 저술에 있어 청교도주의의 대표적인 모범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번연은 비국교도였기 때문에 그의 교회 관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청교도가 아니었다.그는 국교회와의 타협을 싫어했기 때문에 1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침례교인들은 청교도에서 자랐는데 1640년대와 1650년대에 크게 성장하였다.우리는 앞에서 핸서드 놀리즈(Hanserd Knollys)와 헨리 제시(Henry Jessey)의 삶에서 이러한 성장을 살펴보았다.청교도 시대에서 발생된 침례교인들의 출현에 대해서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교수는 '키핀, 놀리즈, 키치'(Kiffin, Knollys and Keach)라는 저서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필치로 3K들의 생애를 서술하였다. 그중에서 핸서드 놀리즈(1599-1691)에 대해서 잠시 소개한다.
Hanserd Knollys
그는 케임브리지의 캐서린 홀(Catherine Hall)에서 신학을 하고 린컨셔(Lincolnshire)에서 목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1635년에 청교도의 확신 때문에 잉글랜드 국교회와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641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침례교인들과 함께 사역했는데 나중에 가장 두드러진 침례교 리더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646년 침례교 신앙고백의 서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놀리즈는 런던에서 약 1천 명이 모이는 침례교 대형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677년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이 작성되기까지의 발전과정에 대한 기록은 '침례교 유산'(Our Baptist Heritage)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1688년에 상황이 호전되자 이미 공식적으로 작성됐었지만 널리 배포하는 것이 부적절했었던 신앙고백을 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1677년 신앙고백은 1689년 신앙고백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단지 당시에 널리 배포가 됐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의 교리를 대변한다.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회중교회의 신앙고백(사보이 선언)에 나오는 청교도 양식에서 따왔다. 청교도 이야기에서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지도급의 비장로교 사역자들의 상당수가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에 관련됐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존 오언,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조셉 카릴, 윌리엄 그린힐, 존 하우이다. 사보이 선언에는 120개의 교회가 대표되었다. 세 개의 청교도 신앙고백서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교회 조직과 침례 부분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16. 청교도와 대학교
독자들은 청교도들이 거의 모두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 받은 것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요즘의 상황에서 보면 이것은 퍽 훌륭하게 들린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는 1백 개 이상의 영국 대학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 명문 대학들이다. 오늘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려면 최고 점수를 받아야 하고 특별 입학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아니면 장학금등을 받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좀 놀라운 뉴스가 될지는 몰라도 청교도 시대의 잉글랜드에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유일한 대학들이었기 때문이다. 학적 수준과 교육 방식도 각 대학 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앞에서 존 오언의 생애를 스케치하면서 그가 부총장으로 있을 때 개혁할 일이 많아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언급했었다(총장은 대부분 대학교의 명성을 높여 줄 만한 유명 인사이고 부총장은 실제적인 행정을 맡는 자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출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신화들이 있다. 이것은 알란 코반(Alan B. Cobban)의 저서인 '중세기 잉글랜드 대학교 ;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The Medieval English Universities : Osford and Cambridge)에서 해명되었다. 코반은 이 대학교들은 앞서 세워진 프랑스의 파리나 볼로냐(Bologna) 대학교들처럼 대학교의 위상을 서서히 세워나갔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1209년 직후에 대학교가 되었다. 대학교가 설립되기 전에 고등 교육은 대성당 학교들에서 제공되었다. 14세기의 잉글랜드 인구는 세 번째 대학교를 세울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예술, 법률, 신학, 의학의 네 분야를 모두 다루었기 때문에 또 다른 대학이 필요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장 아래 있었다. 대학이라는 시스템이 생겼는데 이것은 더햄(Durham) 대학교를 제외하고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특성이다. 각 대학은 기본적으로 독립했지만 중앙 행정만은 공동 관심사를 위해 함께 처리한다. 대학들은 원래 왕이나 왕비, 고관과 귀족들에 의해서 설립되고 기증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는 약 40개의 대학들이 있다. 몇 개 대학의 설립 연대를 참고로 적어 본다. 이 대학들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또 어느 정도가 비교적 새것에 속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발리올(Balliol, 1263), 머턴(Merton, 1264), 맥덜린(Magdalen, 1458), 워드햄(Wadham, 1612), 펨브로크(Pembroke, 1624), 위세스터(Worcester, 1714), 리전트 파크(Regent's Park, 1810), 케블 (Keble, 1868), 윌프스톤(Wolfston, 1965).
케임브리지 대학교 안에는 약 24개의 대학들이 있다. 피터하우스(Peterhouse, 1284), 곤빌 앤드 캐이어스(Gonville and Caius, 1384), 킹즈(King's, 1441), 퀸즈(Queen's, 1448) 지저스(Jesus, 1496), 트리니티(Trinity, 1546), 임마누엘(Emmanuel, 1584), 시드니 서섹스(Sidney Sussex, 1596). 이 마지막 두 대학들은 원래 청교도 대학들로 기증되었다. 또한 두 대학을 더 열거하면 셀와인(Selwyn, 1882), 처칠(Churchill, 1960)이 있다.
스코틀랜드에도 자랑할 만한 오래된 명문 대학교들이 있다. 즉 세인트 앤드류즈(St. Andrews, 1411), 글래스고(Glasgow, 1451), 애버딘(Aberdeen, 1495), 에딘버러(Edinburgh, 1583)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다음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는 런던 대학교(London University)이다. 학생도 가장 많고 대학과 연구소도 가장 많으며 의대와 치대도 있다. 맨체스터(Manchester, 1851), 뉴캐슬 온 타인(Newcastle-on-Tyne, 1852), 버밍햄(Birmingham, 1900), 리버풀(Liverpool, 1903), 리즈(Leeds, 1904), 셰필드(Sheffield, 1905), 브리스톨(Bristol, 1909), 레딩(Reading, 1926), 노팅햄(Nottingham, 1948) 대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잉글랜드의 거의모든 주요 도시마다 대학교가 세워졌다.
17.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는 1971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집회(Westminster Conference)에서 '청교도주의의 창시자, 존 녹스'(John Knox, The Founder of Puritanism)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 제목은 스코틀랜드에 관한 한 사실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선명한 이해를 위해 두 개의 독립된 개혁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서로 병행되는 측면도 있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들은 별도로 분리해서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의 나라이다. 잉글랜드는 그런 적이 없었다. 현재 잉글랜드에는 활발한 소수의 장로교회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수백개 정도의 교회들이 1689년 침례교 신앙고백(1689, Baptist Confession of Faith)으로 알려진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London Baptist Confession of Faith)을 그들의 교리적 기반으로 채택하였다. 이러한 교회들이 없다면 청교도주의는 잉글랜드에서 거의 종식됐을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신학적으로 성경에 충실한 빛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성경 말씀에 대한 신실성은 더 넓은 지역의 교회들을 윤택하게 하는 은혜로운 증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교회들이 17,18,19세기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하강할 때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의 정통성이 굳게 지켜졌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부흥의역사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있다. 신앙고백에 대한 신실성은 중요하다. 예로서 특수 침례교(Particular Baptists)가 그들의 청교도 유산인 1689년의 신앙고백에서 멀어져 갔을 때 교회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본연의 위치로 돌아왔을 때 교회는 활기를 찾고 부흥되었다.
존 녹스(John Knox)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발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주로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한 지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잉글랜드에서 전례를 찾는다면 단연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을 청교도의 전주자로 손꼽아야 한다. 잉글랜드 평민들에게 성경책을 쥐어 준 사람은 틴데일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절대적 군주권에 반기를 든 첫 번째 기수였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특징은 복음의 수호와 개혁의 진척을 위해 경건한 자들이 상호 도움과 지원을 하기로 결성한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언약'이라고 하는 이 최초의 결성은 1556년 존 녹스의 지도하에서 만들어졌다.
약 1천 자로 된 국가 언약서(National Covenant)는 1580년에 작성됐는데 이 문서에서 로마 카톨릭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부인하였다.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는 1630년대의 스코틀랜드의 교회 개혁 지도자였던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이 언약서는 1643년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통과되었고 잉글랜드 하원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동 회의에서 다시 통과되었다. 서명자들은 스코틀랜드에 개혁 교리를 보존하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개혁을 도우며 로마 카톨릭과 감독교회와 이단들을 포함한 일체의 그릇된 시스템들을 제거하기로 맹세하였다.
일치령(Act of Uniformity)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2천 명 이상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이 사건이 스코틀랜드에도 영향을 미쳐 전체 목회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백여 명의 목사들이 강제로 교회에서 쫓겨났다. 콘벤티클즈(conventicles, 비밀집회)라고 불리는 무허가 집회에 모이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조치가 내렸다. 양심에 따라 계속 비밀집회에 참석한 자들은 벌금, 투옥, 추방에 이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이 기간을 잉글랜드에서는 비국교주의자들(Dissenters)의 시기라고 부르는데 스코틀랜드의 경우는 언약주의자들(Covenanters)의 시기였다.
1685-8년 사이는 특별히 잔혹한 기간이었는데 '살해의 시기'(The Killing Time)라고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법이나 민사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채 군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다. 언약파들은 교리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용하였다. 많은 언약파 목회자들이 총살이나 교수형이 아니면 추방을 당하였다. 이러한 살해는 언약파의 지도자들이 거의 다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언약파의 이야기는 알렉산더 스멜리(Alexander Smellie)의 '언약의 사람들'(Men of the Covenant)이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18.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컨퍼런스
1950년에 한 작은 스터디 모임이 시작됐다. 이 모임은 청교도 컨퍼런스(Puritan Conference)로 알려졌는데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뒷방에서 모였다. 이 연례 모임은 1959년경에는 4백여 명이 참석하는 이틀 간의 집회로 불어났다. 제임스 패커(Jemes Packer) 박사와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목사가 주관자였다.
청교도들에 관한 자료들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자 참석자들의 수효는 줄어들었는데 여러 해 동안 220명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아직도 12월 중순에 이틀 동안 집회가 열린다. 날마다 세 개의 연구 논문이 발표되고 이어서 폐회 시간을 제외하고 약 1시간의 토의가 따른다. 1970년에는 집회가 없다가 1971년에 다시 모였을 때 이름이 웨스트민스터 컨퍼런스(Westminster Conference)로 바뀌었다. 1956년부터 발표 논문이 해마다 출판되었다. 연구 논문의 수준은 대체로 높은 편이었고 어떤 것들은 탁월하였다.
제임스 패커 박사가 청교도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10개의 논문들은 그의 저서인 '하나님의 거인들'(Among God's Giants)에 실렸다. 이 논문들의 가치와 질은 최상급에 속한다. 로이드존스 목사가 준 19편의 발표문도 '청교도'(The Puritans)라는 제목으로 배너 오브 트루스(The Banner of Truth)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컨퍼런스의 일부 강론들은 청교도들의 전기이다. 예를 들면 브라이언 프리어는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모리스 로버츠는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고든 머레이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아이언 머레이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알란 깁슨은 존 번연(John Bunyan)에 대해 썼다.
이 책을 집필하는 현재까지 해당 자료들은 모두 180편이다. 이 자료들은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치있는 자원이다. 1955년에 시작된 '배너 오브 트루스 잡지'(Banner of Truth Magazine)와 1970년부터 나온 격월지인 '리포메이션 투데이'(Reformation Today)에서 이러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19. 청교도의 지속적인 영향
지금 내가 청교도 문헌의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든지 곧 구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교도 문헌들을 새로 번역하고 편집하거나 개정해서 찍어 내는 출판 작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 문헌들을 읽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해당 출판사에 연락해 새로 나온 카탈로그를 요청하기를 바란다. 청교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950년대에 일어나기 시작해서 1960년대에 가속되었다. 배너 오브 트루스(Banner of Truth) 출판사가 앞장서서 다음과 같은 청교도 문헌 전집을 출판하였다.
존 오언(John Owen, 16권과 히브리서에 관한 7권), 존 플레이블(6권) 토마스 브룩스(6권) 존 번연(John Bunyan, 대형판 3권), 스티븐 챠녹(Stephen Charnock, 5권) 데이빗 클락슨(David Clarkson, 3권)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22권 진행중),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7권)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3권)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의 신령한 몸(A Body of Divinity),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산상보훈(The Beatitudes), 조지 뉴튼(George Newton)의 요한복음 17장(394쪽의 양장본), 뉴튼은 축출된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97년에 배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는 로버트 마틴(Robert P. Martin)의 청교도 가이드(A guide to the Puritans)를 발간했다. 이것은 청교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의 글들을 주제별과 본문별로 찾을 수 있는 색인표이다. 전기, 설교, 성찬, 절기 설교 등을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토마스 맨턴(Thomas Manton, 1620-1677)의 22권에 달하는 전집은 1870년에 재발행되었다. 라일(J.C. Ryle)은 소개문에서 청교도들이 그 어떤 시대의 잉글랜드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국민성의 수준을 높였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대에 미국의 한 출판사가 토마스 맨턴의 전집을 1천 부의 한정판으로 다시 찍었다. 1996년에는 또 다른 미국 출판사인 탠스키(Tanski)에서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80)의 강해서를 12권으로 출판하였다.
배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는 염가판으로도 다음과 같은 유익한 청교도 서적들을 많이 배포하였다. 존 오언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과의 교제(The Glory of Christ and Communion with God), 복음의 배교(Apostasy from the Gospel), 존 플레이블의 섭리의 신비(The Mystery of Providence), 윌리엄 브리지의 좌절한 자를 위한 격려(A Lifting up of the Downcast), 토마스 브룩스의 사탄의 계략을 막는 귀한 처방(Precious Remedies against Satan's Devices), 리처드 백스터의 개혁된 목회자(The Reformed Pastor, 우리말로 '목회자 상'으로 번역됨), 사무엘 바운즈의 크리스천 자유의 참된 영역(The True Bounds of Christian Freedom), 토마스 브룩스의 지상의 천국(Heaven on Earth), 토마스 왓슨의 회개의 교리(The Doctrine of Repentance),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All Things for Good). 미국에서 세워진 매우 활기찬 청교도 출판사인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에서 나온 책들도 적지 않다. 리처드 백스터(4권의 대형판), 존 하우(3권), 윌리엄 브리지(5권), 제레마이어 버로우즈의 은혜로운 성령의 탁월성(The Excellency of a Gracious Spirit)과 악 중의 악(The Evil of Evils), 토마스 왓슨의 폭풍으로 취한 천국(Heaven Taken by Storm)과 자기 부정의 의무(The Duty of Self-Denial), 로버트 볼튼의 상처난 양심의 위로(A Treatise on Comforting Afflicted Consciences),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한 사람이었는데 시편 110편의 강해서를 썼다. 465쪽에 달하는 이 보고(寶庫)도 출판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장로교에 끼친 영향과 1689년의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후자의 신앙고백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레이스 침례교 미션(Grace Baptist Mission)은 청교도 문헌들의 축약판을 내고 있다. 1999년까지 16종이 나왔다. 청교도 고전들의 축약판을 내게 된 생각은 남인도의 타밀(Tamil)어를 사용하는 크리스쳔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존 오언의 책인 죽음 중의 죽음(Death of Death)이 선택되어 그분의 죽음에 의한 생명(Life by his Death)이라는 제목으로 198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초창기 열매의 하나는 스리랑카(Sri Lanka)에 사는 타밀어를 쓰는 한 힌두교 농부의 회심이었다.
오언의 책들 중에서 4권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예로써,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은 한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타밀어로 출판되었다. 플레이블의 섭리의 신비(The Mystery of Providence)는 히브리어, 스페인어, 타밀어로 나왔고, 제레마이어 버로우즈의 크리스챤 만족의 진귀한 보배(The Rare Jewel of Christian Contentment)은 알바니아어, 프랑스어,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페르시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해외의 청교도 서적들의 카탈로그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참고사항
「제네바 성서」(The Geneva Bible, 1560)
제네바는 신학학자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와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의 고향이다. 칼빈의 동서 윌리엄 위팅햄(William Whittingham)이 존 녹스(John Knox)에 이어 제네바 영국교회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제네바 성서」 발행에 있어서 공헌이 컸던 인물이다. 이 성서가 나오기까지 위팅햄을 도왔던 인물이 바로 1553년까지 「카버데일역」을 냈던 카버데일이다.
「제네바 성서」는 「큰 성서」(1539)의 교정판이다. 틴들의 공헌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은 히브리어 본문과 라틴역 본문에 따라 철저히 교정된 것이다. 신약은 주로 「틴들역」의 교정이다. 이 성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봉헌된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에 즉위하였고, 개신교 편을 강하게 들던 왕이었다. 「제네바 성서」가 당시 교회에서 「큰 성서」를 대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신도들 사이에서는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감독성서」(1568)가 나올 때까지 이 두 성서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제임스왕역(KJV)」(1611)이 나올 때까지 「제네바 성서」는 140여 회나 판을 거듭하면서 출판되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장군과 그의 군대가 바로 이 성서를 읽었고,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신대륙 북아메리카로 간 필그림 조상들과 존 번연, 세익스피어 심지어는 「제임스왕역」(1611)을 낸 제임스왕도 바로 이 「제네바 성서」를 읽었다. 「제네바 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온다. 신․구약 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이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서인 「제네바 성서」 초판이다.
[출처] 청교도들은 누구인가?|작성자 포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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