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대명사 리차드 백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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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라면 누구나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사>(The Reformed Pastor)를 접해보았을 정도로, 그의 책 내용은 탁월하다. 이 책을 두고, 몇몇 목회자들은 1년에 서너 번씩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필립 도드라지(Philip Doddridge)는 이 책의 값어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책의 금언과 방법들이 최선을 다해 추구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목회의 열정을 품도록 목사의 정신을 깨우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목사의 열정이 없이는 많은 선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마땅히 되어야 할 성도들의 자리에 미치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만큼 <참된 목사>는 실천신학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발간 당시부터 찬사를 받았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 목사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다시『참된 목자』를 읽고자 소망하였다. 목사들이 신도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침서가 되는 그 책을, 나는 집이 불탔을 때 읽어버렸다. 그는 기이한 힘과 불을 지닌 인물이다.”
요한 웨슬리도 감리교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회하는 모든 설교자들은 집집이 방문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렇다면 백스터가 제시하는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만일,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면 지체 말고 그 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자.<참된 목자>는 정독할 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그 이후 <참된 목자>는 고전으로서 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스펄전 역시 <참된 목사>를 격찬했다. 그는 주일설교를 끝낸 저녁에 아내로 하여금 이 책을 자주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감리교, 독립교회, 침례교 그리고 영국 국교도 또한 이 책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참된 목자>는 오늘날의 목사들에게도 적잖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J. I. 패커(James I. Packer)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나는 백스터가 믿은 복음을 믿는가? 둘째, 그렇다면 회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 백스터와 견해를 같이 하는가? 셋째, 내 삶과 나의 임무를 구체화시키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가? 넷째, 나는 내가 바라는 목적과 그것을 추구하는 수단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가? 백스터가 하고자 노력했던 대로 나는 나의 신도들과 정기적으로 그들의 영적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는가?
삶과 연결된 설교
설교자 리차드 백스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삶과 성직자다운 고귀함은 목회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 그의 삶을 통해 지금까지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된 백스터는, 한 마디로 ‘자신의 심령에 설교’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성도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백스터는 성경에 중심을 두고, 성령을 의지하며, 자신이 한 설교를 그대로 실행하면서 자신을 살폈다. 그리고 성경에 비추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양심의 소리에 의한 기독교인의 윤리강령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윤리강령을 삶을 통해 실천했고, 때로는 그대로 행하지 못함을 고민하기도 했다. 백스터는 설교자의 삶이 설교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언행일치의 설교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스터는 일생 동안 무엇을 바라고 설교하지 않았다. 자신은 설교하면서 은화 한 닢 받은 것도 기억에 없다고 말한다. 단지 설교자로서 교회에서 설교를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왜? 돈은 영혼의 좋은 것을 신실하게 추구거나 혹은 그것을 쫒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위해 설교하는 것을 거절했다(Hugh Martin, Puritanism and Richard Baxter, 183-184).
비회심자에 대한 강력한 열정
그 당시 청교도에게 흐르는 정신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창조주의 자신에 대한 기록된 증거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눈의 빛이며 영혼의 음식이었다. 설교자의 직무는 성경의 내용으로 회중을 먹이는 것으로, 설교를 통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을 먹이는 일이라는 직무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그들에게 선악 간 교회의 진보나 전통,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오직 성경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 사람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에 대한 현대적 증거들은 청교도주의의 두 가지 초점이다. 이 두 가지 균형을 가지고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의 큰 부분이며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백스터는 이처럼 성경의 우위와 성령의 조화를 생명처럼 여기고 설교했다.
동시에 그는 회심하지 않은 자에 대한 강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설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따라서 설교에서 자세히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심방을 통한 교육으로 기독교 진리를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비회심자에 대한 강력한 책임감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백스터의 삶의 목적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술 취한 사람과 무지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열정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행하기를 권하고 그렇게 행하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을 지나치게 값싸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 시대에 적용할 리차드 백스터의 장점들
리차드 백스터의 가장 위대한 힘은 목회 철학과 설교적 상상력과 적용의 기술에 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후대인들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첫째, 백스터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진 하나님을 위한 목회자였다. 그는 목회자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늘 인정했다. 따라서 직업으로서 하는 업무는 단 한 시간도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직임을 깨닫고 개인적인 영리나 명예를 위한 목회자가 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에 맡게 실행한 사람이었다.
둘째, 백스터는 목회자로서 ‘자아 성찰’을 강조했다. 그는 어렸을 때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자랐다. 또한, 초기 키더민스터 교회 목회자의 모습 속에서 부패한 실상을 보고, 철저히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도들은 지옥에 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면서, 정작 목회자 자신은 지옥에 있을 수 있으므로 철저한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셋째, 백스터는 뛰어난 목회자다. 복음 전도자로서, 분명 그는 성공한 목회자다. 그의 성공한 목회의 방법은 첫째도 가르침, 둘째도 가르침, 셋째도 가르침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때때로 대중설교로, 때로는 개인 접촉을 통해 청중들을 이해하는 삶을 살았다. 심방과 상담을 통한 교리 교육은 신학과 삶에서 무지한 키더민스터를 변화시켜, 800여 가정이 변화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했다.
넷째, 백스터는 뛰어난 설교자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해 일평생 몸이 약하고 수척했다. 그러나 그는 한 영혼을 잡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부적으로 감동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사랑하는 마음이 애처로운 간청의 음악으로 옮기게 하는 목소리였다. 지식의 부요함을 내세우지 않는 평범한 설교와 뛰어난 적용이 그를 능력 있는 설교자로 서게 했다.
다섯째, 백스터는 미래 지향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개혁시킬 수 있음을 믿었다. 교회는 목사의 열심과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열악한 건강 상태와 그 당시 가장 열악하다고 볼 수 있는 키더민스터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 그리고 이 비전을 갖고 최고의 헌신과 노력을 다했다. 마침내 백스터는 자신의 꿈을 그곳에서 실현시켰다.
여섯째, 백스터는 언행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실행해 보고, 성도들에게 행하기를 요구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행동이 함께하는 삶으로서의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일곱째, 백스터는 가정 중심적인 신앙을 지도했다. 그는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각각의 가정을 1시간 간격으로 방문해, 가족 중심적인 신앙 교육을 시행했다. 되도록이면 다른 가족을 배제하고, 가족만의 연합을 중요시 여겼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의 기초가 가정에서 이루어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백스터는 뛰어난 저술이다. 그의 책은 놀라운 흡입력이 있으며, 솔직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수세기를 넘은 지금까지도 목회자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백스터는 사랑의 목회자로서, 권징의 강조와 시행을 강조했다. 그는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겸손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징계했다. 그는 교회 내의 인간적인 불편함 때문에 ‘권짱을 실행하지 않으면 성도들은 삶의 기준을 잃어버린다고 여겼다. 따라서 절차를 밟아 권징을 사용했다. 그는 모든 목회자가 자신처럼 권징할 것을 강조한다. 권징하지 않는 목회자는 태만한 목회자로서, 심지어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칭의 교리의 왜곡
리차드 백스터는 이처럼 탁월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몇 가지 약점은 있다. 첫째는, 새 율법주의다. 백스터는 칭의 교리를 왜곡했다. 그는 이 교리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로마 가톨릭 사이에서의 절충을 궁리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그 당시 정치사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편적 구속, 즉 형벌적이며 대리적이지만 완전한 대속이 아닌 행동으로 설명했다. 그 핵심 내용은, 주님의 이런 행동 덕택에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사면을 주는 새 법을 만드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법에 대한 순종인 회개와 믿음이 신자를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의(義)라고 말했다. 백스터의 이런 견해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당시의 정치사상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통치자이며, 성경은 그의 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구원이 이중적인 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새 율법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의와 참된 믿음과 회개에 의해 새 율법을 순종하는 의이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새 율법인 복음에 대한 실제적 순종이기 때문에 의에 의해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최초의 법전인 도덕률의 수행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비록 새 율법에 의해 의로우나, 옛 율법에 관련된 결점들 때문에 매순간 용서를 필요로 한다. 옛 율법의 지시적이고 형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새 율법을 제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신자를 용서하기 위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정부의 우두머리로 생각한 것이다.
백스터는 예수님을 하나님 정부의 우두머리로 보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이 죄를 사면 받는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이러한 정치적 관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보다는 심판자와 흡사하게 보이게 한다. 백스터의 핵심인 새로운 법인 새 율법주의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근거인 그리스도의 대표적 지위의 불일치이며, 그 체계는 인위적이고 영적으로 비현실적이다.
보편적 교회론의 오류
리차드 백스터는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적 교회는 단지 하나이며,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로 보았다. 이는 결국, 유대교나 로마 가톨릭도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톨릭이 개신교와 신앙을 차별하려는 것에 대해 단순하게 논쟁을 통한 괴팍함으로 해석했다. 그는 주의 기도와 십계명, 세례, 성찬을 행하는 자들 모두를 한 지체로 보았다. 나아가 유대 교회, 가톨릭, 소시누스파(Socinians)들을 교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백스터의 수용 태도와 포괄적인 관점은 복음적 관점에서 거부되어야 한다. 백스터가 억지로 성경을 연역적 형틀에 맞추는 정치적인 합리주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열매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말한 죄에 대한 사상은 교훈주의(Moralism)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로,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율법주의로(Legalism)의 씨앗이 되었다. 이 열매는 스코틀랜드에서 새 율법주의가 되었고, 영국에서는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가 되는 쓰라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백스터가 그렇게 열정을 쏟았던 키더민스터 교회가 오늘날 유니테리언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슬프게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리차드 백스터 연구가인 제임스 패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백스터는 큰 인물이며 성자 같은 사람이다. 목사, 전도자 그리고 저술가로서 그를 아무리 높여도 부족하다. 그러나 신학자로서는 불운했으며 그의 사상은 재앙을 가져왔다. 그는 이것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다. 이러한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에 교리적 혼란을 유발했다(J. I. Packer,『청교도 사상』, 178에서).
우리 시대의 백스터를 꿈꾸며
리차드 백스터는 설교에 관한 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청교도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설교학 이론에 부합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할 때 청중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수사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했고, 회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화체 설교를 도입했다. 백스터는 효과적인 설교 전달을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설교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설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발음과 억양에 주의했다. 그는 설교의 초점을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두었다. 죄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했고, 엄숙하고 진지하게 회개를 종용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였고 말씀을 삶에 실천함으로써 화답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는 말씀을 상기해 볼 때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보는 것 외의 대부분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막중한 책무가 주어지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스터는 하나님 말씀을 그의 삶 속에서 용해시켜 전했다. 이로써 청중들은 그의 삶과 언어가 일치된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고, 여전히 교회에 적잖게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는 희망이 남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있고,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도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거룩한 성령을 지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이 땅의 설교자들이다. 우리 시대의 설교자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예비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리차드 백스터와 같은 열정을 품고 이 땅을 가슴에 안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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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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