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개혁주의(改革主義)

하나님아들 2023. 6. 19. 22:52

개혁주의(改革主義)              

 

요즈음 교계신문을 보면 개혁주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게 됨을 보게 된다. 낱말로만 보면 이전의 잘못된 기독교를 오늘날에 맞게 개혁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와 폐단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①넓은 의미로는 종교개혁 이후의 모든 개신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②매우 제한된 의미로는 루터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 짓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칼빈주의를 말한다.

1.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된 개신교회가 서게 되었다. 이 때 개신교회에 의하여 체계화 되고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잡은 것이 개혁주의이다. 그런데 훗날 개혁주의 신학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개신교도들이 감리교 등 새로운 개신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엔 개신교라는 말에 다양한 신학 사조가 포함 되게 되었지만, 당시 종교개혁 시대에는 개혁주의가 곧 개신교의 주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넓게는 장로교를 포함하여 가톨릭을 제외한 개혁주의 신학를 따르는 모든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진짜 출현은 칼빈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칼빈은 이 사상 체계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는《기독교 강요》에서 개혁파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또 칼빈의 이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이 어거스틴의 사상은 어거스틴보다 몇 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 → 어거스틴 → 칼빈)
그 사상의 흐름이 어거스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어거스틴주의라고도 불린다.
한편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기 때문에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개혁교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1) 성경관(오직 성경)
개혁주의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성경관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가톨릭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알리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 하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을 사용하여 영감으로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경 66권은 저자의 인간성과 개성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개혁파는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는데,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을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내용의 통일성, 위엄 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이런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칼빈은 또한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다. 또 성경은 성도들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成文啓示)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0)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종교 이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창세기 1장 1절부터)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과는 달리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한 비판적 논의에 다소간 무관심하였다. 신정통주의자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 또 신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신 정통주의(新正統主義)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로부터 시작된 개신교 신학이다.)
신정통주의자들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신정통주의자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하지 않는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 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믿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 하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개혁주의는 전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주권사상
개혁주의의 특징 중의 두 번 째는 주로 장로교에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자유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를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장로교는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한다.
장로교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라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장로교는“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게 되면 장로교가 된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믿고 있다.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 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 있어서는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大) 교리로써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 태양이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은의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선택,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3) 불가항력적 은혜(오직 은혜)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恩惠)이다. 이것도 역시 장로교회에서 볼 수 있다. 장로교는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 것이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장로교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 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타락한 까닭에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 루터는 이를 보고 '인간의 의지는 죄의 노예'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거부와 불순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오직 은혜 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기 이전(창세전), 곧 시간조차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에서, 창조 후 인간의 멸망을 아시어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를 방치하실 것인가에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린다.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칼빈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 6:5, 렘 17,9, 시 51:5; 롬 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한 영적(靈的)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가톨릭 주장과 구별 됨)
그리고 성자(聖子)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 1:21, 요 10:14, 행 20:28) 제한 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칼빈은 이 선택교리에 대하여 다른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하였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하여서도 높였지만, 그가 <기독교강요>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를 충분히 논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개혁교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하셨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사,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 같이 참여하신다(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 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개인의 구원은 물로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유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든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 5:19), 개혁주의 신자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으며 세상을 대항하여 싸워왔다.
한편 개혁주의 사상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세상 속에서) 배우게 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고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계 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개혁주의란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된 한국의 모든개신교회가 개혁주의이며, 좁게는 칼빈주의를 개혁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형성된 신학이다. 특히 이 신학은 칼빈주의적 영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교의(敎義)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에는 신사 참배 결의라는 일대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6.25 동란, WCC 운동, 교단의 분열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 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강요가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맺는말
우리는 앞에서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3대 신학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다.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순수 기독교 신앙, 즉 초자연적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를 위하여 일어난 것이 근본주의(根本主義)운동이다. 개혁주의는 한국의 개신교가 모드 개혁주의 신앙이지만, 주로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사상운동이라 하겠다.
복음주의가 복음만을 강조하다보니까 지나친 경건주의에 흐르기 쉽고, 근본주의가 근본교리들(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대속교리,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주장하다보니까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다 보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개혁주의 운동이 다 귀중한 운동이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교리적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 있는 균형을 중대시하고 있다.(딤전 1:9; 6:3; 딤후 1:13)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문화적 명령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힘쓰는 운동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목사들 중에는 세속적 욕망을 함부로 그것을 표출하지 못했던 보수적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문화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또 그대로 수용해서도 안 된다,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바른 방향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 예 : 간통죄 폐지 문제, 동성애 문제, CCM 등)

글쓴 이 / 신복윤 목사(총신대 대학교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학장 역임) 개혁주의 신학의 특색 4/ 이준원 박사의 개혁주의 신학 설명을 요약 후 몇 가지 더 첨삭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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