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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본 칼뱅의 삼위일체론

하나님아들 2023. 6. 6. 22:29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본 칼뱅의 삼위일체론

 

 

I. 들어가는 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아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라고 했고 칼뱅은 하나님의 본질은 “불가해”(incomprehensible)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 방식은 그 근본에 있어서 신비이다. 하나님은 불가해하며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런데도 이는 침묵과 도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비 그 자체인 불가해한 하나님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접근된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는 확실히 계시적 삼위일체이다. 만약 하나님 자신이 한 분 하나님을 세 존재 방식으로 계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는 우리의 구원과 유익에 필요한 지식은 충분하다. 그러므로 불가해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본질이고 정수이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는 삼위일체론은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삼위일체 교리가 신학의 논의에서 사라진 “일식 현상”이 나타났다. 20세기 신학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과 재발견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의 부활을 가져왔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록에 두었지만,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을 삼위일체 신학으로 시작했다.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논의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이다. 백충현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해서 일곱 가지 입장으로 구별하여 정리했다. 바르트의 “상호 상응”, 라너의 “동일성”,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일치”, 보프의 “훨씬 더 큼”, 브라켄의 “침지”, 수코키와 라투나의 “흡수”, 이정용의 “상호 포월”이다. 백충현은 “깔뱅의 삼위일체적 함께하심의 원리”라는 논문을 통해서, 칼뱅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일반적 논의가 아닌, “삼위일체적 함께하심의 원리”(Calvin’s Principle of Triune Toge- therness)를 가지고 칼뱅의 삼위일체론을 다루었다. 이 연구의 결론에서 현대 삼위일체론에서 다루어졌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칼뱅의 “삼위일체적 함께하심의 원리”가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뱅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강요󰡕 I권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13장의 제목은 “성경은 세상의 창조부터 삼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한 본질에 대해 가르친다”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I권 13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를 깊이 인식하면서도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했다. 칼뱅의 삼위일체론이 󰡔기독교강요󰡕 I권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해도, 거기에만 삼위일체론이 주장되어 나타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강요󰡕 전체와 그의 성경 주석과 설교, 요리문답, 논문 등에도 삼위일체론은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 연구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칼뱅의 삼위일체론을 다룬다. 이를 위해 󰡔기독교강요󰡕 I권 13장을 주 텍스트로 삼고 칼뱅이 이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곳에서 말했던 것을 종합한다.

 

현재까지 칼뱅의 삼위일체론은 어떤 방식으로 연구되었는가? 이 오갑은 칼뱅의 삼위일체론을 칼뱅 사상의 발전 단계를 통해서 또한 삼위일체와 관계된 논쟁을 쟁점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연구는 칼뱅의 삼위일체론이 그에게서 어떻게 시작되고 논쟁을 통해서 발전되어 나타났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연구이다. 또한, 이오갑은 칼뱅의 삼위일체론이 가진 독창성과 그 특징까지 제시했다. 박경수는 칼뱅이 삼위일체론에서 어떤 공헌을 했는지를 말했다. 그는 칼뱅 신학의 구조가 삼위일체론적이며, 성경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이며, 관계의 삼위일체론이며,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론이라고 주장했다.

 

칼뱅의 삼위일체에 관한 연구는 칼뱅이 주장한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그가 가진 삼위일체 신학의 독창성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하지만 어떤 논문이나 연구도 칼뱅의 삼위일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점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칼뱅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전체 구원 역사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가 비록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구별과 차이를 칼뱅은 분명하게 인식하였고 그 바탕에 그의 신학을 전개시켰다. 이 논문은 이것을 밝힐 것이다. 칼뱅의 주요 관심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있었다. 하나님이 본질상 어떤 분이신가?(Dieu en soi)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Dieu enversnous)이 어떤 분인가에 일차적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상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 역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에게 계시 된 하나님보다 더 크고 더 장엄하다고 생각했다.

 

본 논문은 먼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II) 그다음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칼뱅의 이해를 다룬다. (III) 마지막으로 칼뱅에게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어떻게 나타나며(IV), 이 둘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 (V)

 

II.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문제

 

이동영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전통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별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전통은 어디까지 소급되는가? 다시 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구별하여 사용하였는가? 내재적 삼위일체는 처음에“본질적 삼위일체”(trinitas essentialis)로 불렸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교회사에서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한 것은 울스페르거(J. Urlsperger)이다. 물론, 이 용어의 사용이 울스페르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구별은 삼위일체 신학이 태동할 때부터 이미 존재했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은 성서의 명시적 진술이 아닌 교회의 교의이다.

 

백충현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용어가 “내재적 로고스”와 “표현된 로고스”로 불렸음을 적시했다. “이 구별은 안디옥의 테오필로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로고스를 내재적 로고스와 표현된 로고스로 구별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동영은 이를 “소리”와 “의미”로 구별한다. “비록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에게서 이 양자의 개념, 즉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소리를 따라서”(quoad sonum)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를 따라서”(quoad sensum)는 분명히 그와 같은 사상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밀리오리(D. Migliore)에 의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위격들의 영원한 구별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원의 경륜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이면서 삼중적인 작용이다. 같은 의미에서 백충현은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내의 내적인 관계들을 가리키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 구속, 완성의 활동을 통해 계시 된 삼위일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라고 정의했다. 칼뱅에 의하면 전자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Dieu tel qu’ilest en lui-même)이며, 후자는 “우리를 위한(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Dieu envers nous)이다. 칼뱅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 의미와 상응하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을 구별했다. 몰트만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자기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본질의 삼위일체”라 부르며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원을 위한 계시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으로서 “계시의 삼위일체”라 불렀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은 두 가지 다른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사역)와 외적인 관계(사역)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중적 존재 안에서의 사역을 말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식에 따라 “안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opera trinitatis ad intra)이라 불렸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밖을 향한 삼중적 행위를 말한다. 이 역시 “밖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opera trinitatis adextra)이라 불렸다. 그렇다면 이 둘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밀리오리에 의하면 구원의 경륜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 속에 있는 하나님과 동일하지만, 구별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별된 세 위격적 방식은 하나님 그분 자신의 영원한 내재적 존재 안에 그 근거를 둔다. 밀리오리의 주장은 첫째로 구원 경륜 속에 드러난 삼위 하나님은 내적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과 분리되거나,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나님 자체는 동일하지만, 구별된다. 둘째로 구원 경륜 속에서 계시 된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는 하나님의 내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식을 통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지식을 가질 수 있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써 경륜적 삼위일체의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위격, 아버지, 영 사이의 관계들은 역사적이고 구속-경륜적일 뿐 아니라, 그 점에서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표시하는 관계들로 예시될 수 있다”라고 적합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면서 삼위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삼위 하나님의 내적 관계밖에 없었지만, 창조 이후에는 창조 세계에 관계하여 그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즉, 창조 이전과 이후로 구별된다. 창조 이전 하나님은 내재적 삼위일체, 창조 이후 하나님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칼뱅은 더 나아간다. 구원 경륜의 완성 후에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제시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안을 향한 사역이다. 이는 “나누어진 사역”(opera divisa)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성부가 성자를 “낳음”(gen- eratio activa in aeterna)이며 성부가 성령을 “내쉼”(spiratio activa) 또는“발출”(processio activa)이다. 이것은 성자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출생(generatio passiva in aeterna)이며, 성령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내쉼 혹은 영원한 발출(spiratio sive processio passiva in aeterna)이다. 여기서 “영원한”(in aeterna)은 그렇지 않은 적이 없음을 뜻한다. “영원한 출생”이란 출생했지만, 출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다. 즉, 출생의 시점이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성자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성과 자존성을 가진 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발출”이란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지만, 나오시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다. 발출했지만 발출의 시점은 없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밖, 세상을 향한 사역이다. 이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사역”이다. (opera indivisa)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 성삼위의 함께 하는 사역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부에 의한 세계의 “창조”(creatio), 성자에 의한 “구원”(redemptio), 성령에 의한 “성화”(sanctificatio)이다. 창조와 구원과 성화는 성부, 성자, 성령의 고유한 행위 곧 그들의 “전유”(appropriatio)에 속한다. 하지만 또한 삼위는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 협력 속에서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강조하는 용어가 상호침투(perichoresis; circumincessio)이다. 전유로서 각 위격이 가지는 사역은 다른 두 위격의 사역에 상호침투의 방식으로 참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의 지식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내재적 삼위일체로 곧바로 들어갈 수가 없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주장은 전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 또는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나와야만 한다.”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영원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계시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과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말하는 것이다.

 

III. 칼뱅의 삼위일체론

 

칼뱅에 의하면 외부적 권위가 아닌 성경 저자의 권위 자체에 의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성경의 저자인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령은 성도의 영혼 안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내적으로 증거한다. 이러한 주장을 한 후 칼뱅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에 의하면 성경의 계시 밖에서 이교도와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신들은 거짓이며 우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에게 하신 대로 그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게 맡겨져야 한다. “하나님 자신만이 그 자신에 대한 적합한 증인이 되신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 없이는 하나님은 결코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계시 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칼뱅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교리는 선험적이 아니라 후험적으로 도달되는 기독교의 진리이다. 에밀 두메르그는 츠빙글리를 선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신학자로, 칼뱅을 후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신학자로 규정했다. 선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츠빙글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반면 후험적 방법을 사용하는 칼뱅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은 신학적 논의를 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에밀 두메르그는 이것은 모순 같지만, 모순이 아니라 했다. 선험적 방법인 하나님 속성의 논의는 추상적인 한 분 하나님으로 출발하기에 오히려 삼위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에 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험적으로 도달되지 않고 후험적으로 도달된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인데, 합리적인 근거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경험 곧 구원론에서 오는 공식이다. 이 교리는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적 신앙 경험에 의해 접근된다. 확실한 경건의 체험이 없이는 이 교리를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칼뱅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경험 없는 신학적 사변이 아닌, 하나님의 현존과 그가 베푸시는 구원을 체험하는 곳에서 오는 “실천적 인식”(pratica notitia; connaissancequi git en pratique)이다. “이것은 우리가 특히 익숙하게 잘 알아두어야 하는 실제적인 지식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는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실제로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냉랭하게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만나지 못하고 조명, 칭의, 성화와 같은 구원 경험이 없는 자에게는 삼위일체론이 사색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관계해서 호튼(M. Horton)은 “칼뱅에게서 삼위일체는 우리가 동의하는 하나의 도그마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실재의 핵심이다”라고 옳게 말하였다.

 

칼뱅은 신자들이 삼위일체를 다룰 때 겸손과 절제와 같은 마땅한 태도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절제되지 못한 신학적 탐구나 신적 본질을 완전히 파헤칠 수 있다는 오만함은 이 지식을 오류에 빠뜨린다. 칼뱅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체가 신비임을 주장한다.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이 깊은 신비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인도함을 받도록 하자.” 신적 비밀은 탐구하기(enquerir)보다는 경배해야(adorer) 한다. 그러므로 칼뱅은 삼위일체를 아는 데 있어서 교회의 건덕(aedificatio Eccelesiae; edifier l’Eglise)을 앞세운다. 호기심은 억제되어야 하며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세우는 것을 넘어서는 논의는 교회의 유익이 되지 못한다.

 

칼뱅은 삼위일체론을 󰡔기독교강요󰡕 I권 13장에서 다룬다. “성경은 창조 이후로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함을 가르쳐 왔다”라는 13장의 제목은 삼위일체 논의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 제목은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의 핵심 사상을 내포한다. 첫째, 삼위일체는 문자가 아닌, 사유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다. 삼위일체는 교부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역사 속에 그 표현이 처음 등장했지만,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적 진리이다. 성경은 삼위일체나 위격과 같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칼뱅은 성경 자체의 문자적 표현에 매달리기보다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의 진리를 중시했다. 기독교적 진리는 성경에 기록된 문자에 종속되지 않는다. 거짓된 교리에 의해서 성경의 진리가 불명료해질 때 성경의 진리를 밝히는 신학적 개념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성경이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말씀의 한계 안에서 삼위일체를 생각해야 함을 말한다. 칼뱅은 말씀이 깨닫게 하는 것 이외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사유하거나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둘째, 고대교회의 증언에 따라 삼위일체는 “한 본질에 세 인격이 존재한다”를 말한다. 칼뱅은 󰡔마태복음 주석󰡕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한 본질 안에서의 세 인격(trois personnes en une essence)을 구별하여 인식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 본질 안에 세 인격이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각 위에 있어서 구별된 존재임을 말한다. “성경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는 본질(실체)의 단일성을 이해해야 하며 반대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셋이라고 말할 때는 이것은 한 본질 안에 있는 세 인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서 칼뱅에게서 인격(personne)의 정의는 중요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인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고유성을 나타낸다.” 세 인격이란 독립된 존재로서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삼신론이 된다), 구별되지만 나누임 없이 연합된 세 위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격은 두 가지 것이 동시에 강조된다. 첫째로 신성의 본질(essentia Dei; essence)인 하나님이심과 둘째로 그가 가진 고유성(proprietas; propritété)이다.

 

인격(위격) = 본질(하나님이심) + 고유성(특별한 표지)

 

본질(essentia)에는 구별이 없다. 칼뱅은 본질을 실체(sub- stantia;substance)라고도 불렀다. 칼뱅은 “실체”라고 부르긴 했지만 “본질”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왜냐하면, 본질과 같은 뜻을 가진 이 실체는 위격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실체(ὑπόστασις)와 용어가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위격(hypostase)이라고 부르는 것을 라틴 사람들은 인격이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나오는 ὑπόστασις는 본질이 아닌, 인격에 해당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ὑπόστασις를 라틴어 그대로 번역하면 실체(substantia)가 된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사용되는 라틴어 substantia는 그리스어로는 οὐσία에 해당되지 ὑπόστασις가 아니다. 그리스어 οὐσία = essentia(substantia), ὑπόστασις= persona(subsistentia)인 것이다. “내가 실체로 번역했던 단어는 아버지의 존재 혹은 본질(essence)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인격(personne)에 해당하는 말이다” 라틴어에서 ὑπόστασις를 persona로 번역하자, 그리스어 사람들은 persona를 다시 πρόσωπον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Persona, subsistentia, ὑπόστασις, πρόσωπον는 동의어이다. essentia, sustantia, οὐσία가 동의어이다. 본질은 하나(une)이며 단일하고 유일하다. (unique) 한 본질 안에 세 “위격”(subsistentia; subsistance)이 존재하는데,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의 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가진다. 그러므로 한 인격에서도 신적 본질 전체가 인식된다.

 

칼뱅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distinctio sed non separatio)라는 기독론적 원칙을 삼위일체의 위격 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나는 인격이란 말을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세 위격적 존재라고 이해한다. 이 위격적 존재는 다른 위격적 존재(résidence)들과 서로 관련되어 있으나(étant rapportée aux autres)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propritété incommunicable)에 의해 구별된다.” 위격적 존재는 다른 위격적 존재와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면서 다른 위격적 존재와 관계한다. 이는 위격 간의 상호 구별은 존재하지만, 분리되지 않음을 주장한 것이다. “세 위격은 구별되지만,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리되지도 나눠지지도 않는다.” (Dieu n’est point séparé ne divisé ensoy).

 

더 나아가서 칼뱅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위격과 본질의 관계에도 적용한다. 그는 “위격은 본질과 불가분리적 끈으로 결합 돼 있으며 특별한 표지(la subsistance est conjointe d'un lieninséparable avec l’essence, toutefois a une marque spéciale)에 의해 구별된다”라고 적시했다. 위격은 신적 본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이렇듯 그는 삼위의 상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위격과 본질에서도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전자를 통해서 양태론의 이단에 후자를 통해서 삼신론의 이단에 빠지지 않게 했다.

 

셋째, 창조 이후로부터 나타나는 성경적 계시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가 구원 계시의 경륜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대부분 칼뱅의 진술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 칼뱅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가 지나친 사색에 빠지게 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로고스가 육신을 취하여 한 인격이 되셨지만, 그 육체 밖에도 신성은 존재한다. 칼뱅은 소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calvinisticum), 곧 육체 밖의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육체 밖의 그리스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거의 하지 않았다. 금지된 사색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I권 13장의 삼위일체의 논의를 끝마칠 때, 성부는 항상 성자를 낳으시는지, 낳지 않으시는지를 논쟁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면서 성부의 출산의 지속적인 행위를 상상하는 것은 지나치고 경박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13장의 제목 “성경이 세상의 창조부터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있는 삼위일체를 가르친다”라는 주장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삼위‑하나님을 사유하는 원천이고 규범임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이 성경에 계시 된 삼위 하나님은 대부분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 역시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지식이 나오는 것이지 그 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적으로는(혹은 시간적으로) 내재가 경륜을 앞서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경륜이 내재를 앞서서 계시한다.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감춰진 위엄은 육신의 눈으로뿐만 아니라 인간적 사고력을 통해서도 볼 수가 없고, 다만 감춰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우리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그를 바라볼 수 있다.” 칼뱅이 하나님 자신의 감춰진 위엄을 말하는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계시 된 경륜에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IV. 칼뱅 신학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1. 내재적 삼위일체

 

삼위가 가지고 있는 신성(본질)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내재)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경륜)에서 언제나 동일하다. 신성은 내재와 경륜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본질은 서열이 없고 온전하고 동등하다. 반면 고유성에 있어서는 서열이 존재한다. 각 위의 고유성은 하나님 자신 안의 관계성 안에서의 고유성과 구원의 경륜 안에서의 고유성은 달리 나타난다.

 

칼뱅에 의하면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성부의 고유성은 출생시킴(genuit)과 무 출생(ingenitus)이다. “성부가 특별히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자신에게서 그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Deus genuit ex se suam sapientiam; il a engendré de soi saSagesse) “성부는 그의 인격에 있어서는 출생함을 받지 않으셨다” (Pater etiam personae respectu ingenitus; le Père au regard de sapersonne n'est point engendré) 성자의 고유성은 출생이다. “그리스도는 창세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신 말씀이다” (Sermo est aPatre ante secula genitus; la Parole engendrée du Père) 칼뱅은 아들의 영원한 출생을 일종의 계속되는 본질의 전달 또는 성부로부터의 계속되는 유출(emanation) 이론을 부정한다. 본질은 전달되거나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결론으로 다시 창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말씀은 항상 그와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의 신성은 매우 잘 입증되는 것이다.” 성령의 고유성은 발출이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 (a Patre procedere; Saint Esprit procede du Pere) 칼뱅에게서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위격에 관한 것이며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아들도 태어나지 않으며 성령도 발출되지 않는다.

 

성부는 처음이라 불리고, 그다음에 성부로부터 온 성자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의 순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란 본성적으로 처음에는 하나님을, 그다음에는 지혜를, 마지막에는 그가 계획하신 바들을 수행하는 능력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단지 성부로부터 출생하고(venant),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나온다(procédant)고 말해진다.

 

이 텍스트는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나오심에 대한 것이다. 이 출생과 나오심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성부의 위격에서 비롯된다. “아들의 본질은 아버지의 본질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다”라고 칼뱅은 분명하게 선언했다. 성자는 신성에 있어서는 자존하지만(la déité est de soi), 위격에 있어서는 아버지로부터 낳으심을 받는다. 성자의 본질은 시작이 없지만, 위격의 시작은 성부이다. 칼뱅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서 그 자신이 유일한 기원(le seul commencement)이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부와 상관없이 성자를 말할 때, 성자가 스스로 존재한다(ipsum a se esse; il a son être de soi-même)고 단언하는 것은 적절하고 타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한 기원(unicum principium; le seul commencement)으로 부른다. 그러나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성부를 성자의 기원으로 본다.” 성령 역시 신성에 있어서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위격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신성에 속한 모든 직무는 아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성령에게도 속한다.” 성령은 “하나님 안에 계신 위격적 존재(une subsistance qui résidât en Dieu)”이다.

 

다른 한편 칼뱅은 성부를 “신성의 시작”(deitatis principium; commencement de déité)이라고도 표현했다. 이 표현은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은 성부가 주는 것이 아니다. 성부는 “신성 수여자”(deificator)나 “본질 수여자”(essentiator;essentiateur)가 아니며 그것으로써 성부가 다른 위격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위격과 관계해서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위격 간의 선후가 아닌 본성과 원인에 있어서 우선함을 말한다. 삼위일체에 있어 칼뱅의 중요한 기여는 성자와 성령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주장한 것에 있다.

 

제네바의 개혁자는 서방 교회 전통을 따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ilioque) 나온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를 부정하는 헬라 교부들의 주장에 대해서 궤변이라며 비판했다. 게르하르트 보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안을 향한 하나님의 내적 사역은 나누어진 사역(opera divisa)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칼뱅은 안을 향한 내적 사역에도 구별이 존재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함께 있음을 주장한다.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성자 로고스는 성부와의 연합 가운데 계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신 한에서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한 분 하나님이셨다.” 칼뱅에 의하면 이러한 성부와 성자의 내적 연합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성령을 연합의 주체로써 부각시킨다. “영원한 말씀이신 아들은 그의 본질에서 동일한 성령 안에서 성부와 결합된다.” “성령은 한 본질과 동일한 영원한 신성을 지니신 성부와 성자 각각의 영이다.” 칼뱅에 의하면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고 그사이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뜻한다.

 

2. 경륜적 삼위일체

 

칼뱅에 의하면 삼위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삼위‑하나님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이 분리될 수 없는 외적 사역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 나타난 삼위의 성령에 의한 연합의 적용이다. 이는 바르트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상호 상응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세 존재 양식의 상호 내 관계와 더불어 있는 상호관계에 가장 엄밀하게 그의 역사에서의 상호 내 관계와 더불어 있는 관계가 상응한다”라고 기록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본질 안에서)와 경륜적 삼위일체(그의 역사에서)에 상호 상응이 존재한다.

 

위격들의 고유성과 관계해서 삼위는 구별되지만, 삼위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누어질 수 없다. 이것은 내재와 경륜 어느 곳에서나 적용된다.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고유성을 전통적으로 “창조”를 성부에게, “구원”을 성자에게, “성화”를 성령에게 귀속시켰다. 이 귀속을 성부에게만 속한 “전유”(appropriatio)라고 불렀다. 창조를 성부만의 사역이라 할 수 없기에, 성자와 성령이 나누어진 협력 속에서 성부의 창조 사역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순환”(circumincessio)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칼뱅은 창조, 구속, 성화를 성부, 성자, 성령에게 귀속시키기보다는 창조, 구속, 성화 전부의 시작을 성부에게, 이에 대한 지혜와 배열을 성자에게, 이 모든 것의 능력과 효력을 성령에게 귀속시키길 원했다.

 

성부에게는 모든 활동의 시작과 만물의 원천과 기원이 돌려지며 성자에게는 지혜와 계획 그리고 만물 안에서 운행이 돌려지며, 성령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진다.

 

성부는 창조, 구원, 성화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기초, 원천)이며 성자는 모든 것의 지혜(계획과 배열)이며 성령은 그 사역을 실제로 현실화시키는 힘과 능력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 사역의 고유성을 가지면서 모든 일을 함께,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

 

칼뱅은 중보자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두고 이 역시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연합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앞서 필리오케가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을 말한다면, 성령의 파송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셨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성령은 아들의 요청에 의한 아들의 파송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에게서 아들의 성령 보내심의 의미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칼뱅은 아버지와 그의 영원한 말씀 그리고 성령은 구원의 경륜을 위한 사역에 있어서 조화와 일치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V. 칼뱅 신학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1. 인식론적 문제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위격 간의 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은 동일하며(consubstantialem), 영광과 능력은 동등하다. 성부와의 관계에서 성자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영원한 출생을 하는 아들이다. 이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칼뱅은 경륜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가진 아들의 지위는 영원한 출생(ab aeterna genitura)에 근거해서 가진다고 주장했다. 신적 본질에 관계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중보자 직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중보자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성자의 위격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 칼뱅은 중보자의 효력과 은혜는 영원한 신성을 토대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륜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기초는 내재에 놓여 있음을 밝힌다. 칼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된다. “육체로 나타나신 이후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계신다.” 곧, 중보자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토대는 그의 영원한 신성(영원한 아들)에 있으며, 영원한 아들이심의 인식론적 토대는 중보자의 계시 사역에 있다.

 

중보자는 경륜에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계시하고 더 나아가서 그의 영원성을 계시한다. 그럼으로써 성부와 성령 역시 계시한다. 곧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율법과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심으로써 먼저 율법 아래에서 희미하게, 복음 안에서 선명하게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그러나 복음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훨씬 더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왜냐하면 이때 아버지는 그의 생생하고 뚜렷한 형상이셨던 아들 안에서 그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의 밝은 광채를 통해서 세상을 비추셔서, 사람들에게 그 자신과 성령을 아는 지식을 전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자의 영원한 출생(aeterna generatio)이다. 즉, 성자는 창세 전에 무한한 시간 동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계셨고, 율법 아래에서는 족장들에게 희미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셨다가 마침내 육신으로 더 온전히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존재의 계시와 구원의 계시와 관련해서, 인간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먼저 접하고, 그 경륜을 통해서 내재적 지식까지 도달하지만, 현재적 경륜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 분량 자체의 한계도 있지만, 인간 자신이 인식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뱅은 지금은 거울(예수 그리스도와 말씀, 복음)에 비친 삼위‑하나님의 모습을 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직접 봄으로써 완전한 삼위‑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완벽성을 우리는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너무나 큰 간극과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그의 본질이 아닌 상징 아래서 보였다. 따라서 지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위엄은 이 없어질, 부패하는 본성의 베일이 제거될 때야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안다고 하여도 거울을 통해서 얻는 것 같은 우리의 그러한 지식은 우리가 장차 도달하게 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것없는 지식에 불과하다.

 

경륜 안에 나타난 삼위‐하나님의 지식도 계시의 한계와 인식론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물며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어떠하겠는가? 칼뱅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그 자체를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계시 밖으로 나가 하나님을 탐구하려는 자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이것은 신적 계시의 방식을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2. 구원론적, 존재론적 문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 중보자가 되신 이유는 무엇인가? 중보자로서의 그의 사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곧 성도의 구원과 만물의 회복이다.

 

그는 창세 전에 성부에게서 출생하신 영원한 말씀이셨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키기 위해서(pour nous conjoindre àlui) 중보자의 인격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주는 끈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다.

 

우리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곳으로 올라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 (…)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합되게 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 (…) 그리스도는 오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인도자로 세우심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가운데서도 성부와 상호 내주 가운데 계셨다. 칼뱅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부들과는 달리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부의 하나 됨이 아닌, 중보자로서 구속 사역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 속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으로 해석한다. 칼뱅에 따르면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상호 내주는 계시와 구원 경륜을 이루기 위함이다. 계시와 구원 경륜 안에서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완전히 낮아져야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en forme de Dieu) 계셨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의 본체 안에 머무는 것이 부당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비우셨다. (…) 여기서 본체는 하나님의 위엄(majestè)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위엄에 있어서 성부의 위격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구원 경륜을 위해서 성부와의 동등성을 버리고 사람이 되고 종이 되셨다. 칼뱅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의 구절을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비웠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위격의 위엄을 낮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자기 낮추심, 가운데서 성부와의 상호 내주를 이루시면서 구원 사역을 하신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 내주의 하나 됨은 한편에서 성부와 그의 선택된 자녀들의 하나 됨을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하나 됨(한 몸)을 위한 것이다. 구원론적, 교회론적 목적을 갖는다.

 

이러한 구원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신성을 가진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이심과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위격적 존재로서의 아들임이 동시에 계시 된다. 성부의 능력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 계시 되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입증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인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는 또한 필수적이다. 성령은 신자의 정신을 열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깨우치게 한다. 칼뱅 신학은 계시와 구원을 분리하지 않고, 구원을 위한 계시를 주장한다.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 가운데 삼위는 함께 일하신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성부를 머리로 두었고, 승천 후 천상에서도 여전히 성부를 머리로 두고 계신다. 성부를 머리로 두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권위 아래 계심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신다. 이러한 복종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에 대한 성자의 종속이 나타나고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성령은 아들의 영이다. 이러한 종속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기능적 종속이다.

 

칼뱅에 따르면 성육신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성부를 머리로 두고 있다는 것은 성부로부터 만물의 통치권을 받으셨음을 말한다. “아들만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신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의 대리자, 즉 하나님의 전체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말하자면 간접적으로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중보자의 직분은 지상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성부를 계시하심으로써 그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계속적으로 아버지를 머리로 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대리적 통치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당시에도 중보자이셨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후로는 더 분명하게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칼뱅에 의하면 천상에 있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셔서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과의 충만한 연합으로 이끄신다. 천상에서 더욱 강력한 위엄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는 맨 마지막에 그의 나라를 아버지에게 바치면서 중보직을 완성한다. 그때까지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받은 통치를 간접적으로 수행하며 교회를 보호하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끝마치는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친히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

 

칼뱅에게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최후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통치의 최종 행위”이다. 최후 심판 후에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어졌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것이며, 이에 따라 성도는 하나님과 완벽하게 결합한다. 그리스도가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그의 왕국 통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이 그의 인성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신성으로 넘어가면서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 나라를 돌려드리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신적 위엄이 감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통치권은 더욱더 빛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지금은 아직 수건(그의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지 않을 때, 신성이 스스로 충만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성육신 있기 전,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떠했는가? 성부를 머리로 두지 않고, 그가 스스로 머리가 되어 스스로 빛을 발하였다. 그는 스스로 머리 됨을 버리고 아버지를 머리로 둠으로써, 구속 역사를 이루며, 구속 역사가 완성되면서 다시 스스로 머리가 되실 것이다. 이는 칼뱅이 궁극적으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는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로, 다시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복귀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차이가 존재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의 영광, 곧 창세 전에 아버지와 나누었던 이 영광이, 전에는 육체 없이 있었다면 이제는 성육신하시며 영광스럽게 된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 없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영광과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의 영원한 영광이 차이가 있다. 더구나 그는 육체와 함께하는 영광을 그에게 참여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스도는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가 육체에도 그대로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것이라고 밝힌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자기가 늘 갖고 계셨던 저 신적 위엄이 이제 중보자로서의 자신과 자기가 입고 있는 인간의 육체에도 찬란하게 나타나기를 바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 모든 중보는 끝이 난다. “그때에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끝날 것이며, 교회에서 사역들과 다른 직무들의 권한 행사도 끝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천사의 손을 통하지 않고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능력과 권위를 행사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자 인격으로서 기능은 완성되고 끝마쳐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직무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통치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통치하실 것이다. 리차드 멀러(R. Muller)는 칼뱅의 이러한 사상을 “하나님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시는 반면에 심판 후에 그는 직접적으로 통치하실 것이다”라고 요약했다.

 

하나님의 대리로서 모든 중보가 구원의 현재적 경륜 안에서 필수적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 완성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모든 중보는 우리의 연약함과 구원을 인하여 필요로 했지만, 완성 후에는 하나님의 위엄에 접근하는 길이 전적으로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면서 시작되는 아버지의 직접적 통치는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로서 파악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무가 완성되고 끝나더라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하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삼위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또한 영원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는 존재론적으로는 내재가 경륜을 앞서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경륜이 내재를 앞선다고 주장했다. 경륜을 통해 계시 된 내재의 지식은 한계가 있으며 종말론적 성취를 기다린다. 경륜이 완성되는 곳에서 삼위의 관계는 내적인 관계로 복귀되면서 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구원의 현재적 경륜 안에서만 종속이 나타나지만, 구원 경륜이 완성되면서, 위격 간의 서열이 종결되고 내재적 동등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칼뱅 신학은 경륜을 강조하는 신학이지만, 내재에 대한 강조, 다른 말로 하면 초월성에 대한 강조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그의 신학에서 종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이다. 내재와 경륜에 대한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면 구원의 현재적 경륜 안에 나타난 종속적 모습을 보면서 이를 내재인 존재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원 사역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경륜적 종속을 하나님의 내적 관계로 이해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에 대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과 천사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 창조주 아버지와 함께 있는 영적 피조물로서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VI. 나가는 말

 

칼뱅은 삼위일체를 기독교 교리로 중요하게 여겨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 구조 자체를 삼위일체적으로 접근했다. 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를 회복시켰다. 최종판 󰡔기독교강요󰡕의 구조는 사도신경 구조로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이중 지식의 구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사도신경이나 이중 지식이나 삼위일체 안으로 소급된다. 󰡔기독교강요󰡕 III권과 IV권을 성령의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으로 구분한다면, 󰡔기독교강요󰡕는 삼위일체의 구조이다.

 

칼뱅은 삼위일체에 있어서, “삼위”와 “일체” 어느 것 하나 희생시키지 않고 균형 있는 강조를 나타냈다. 삼위에 있어서는 다른 위격과 공유할 수 없는 각 위의 고유성 혹은 특징을 강조하면서도, 위격 간의 관련성을 내재적,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모두 성령의 연합 사역 안에 있는 것으로 믿었다. 더 나아가 위격과 본질의 불가분리성을 말하고 본질은 유일하고 하나이고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위격이 가진 본질은 자존적이다. 칼뱅이 삼위일체 신학에 기여한 것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성부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과 자존성은 그 자체로 있으며 성부 신성의 근원은 본질이 아닌 위격에 있다. 그로 인해 삼위일체를 위계 구조를 가진 종속 주의에 빠지지 않게 했다. 삼위의 본질은 동일하며(consubstanialem) 이를 기초로 해서 위격 동등성을 확보한 것이다.

 

칼뱅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다루고 있는 성부의 출생시킴, 성자의 출생, 성령의 발출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 혹은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 안에 있는 내적 관계이기에, 이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성경보다는 형이상학의 문제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뱅은 삼위일체론을 선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삼위일체 자체를 사색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후험적 곧 성경과 경험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경이 계시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과 관계성을 살피고 그 성부, 성자, 성령이 베푸는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경건의 확실한 체험과 함께 이 교리에 접근한다. 이러한 접근은 공허한 사색과 호기심에 빠지지 않게 하면서 삼위일체의 신학을 실천적이며 교회를 세우는 목적을 이루게 한다.

 

칼뱅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다룰 때, 전통적으로 “밖을 향한 사역”에서 주장하는 성부의 전유를 창조, 성자의 전유를 구속, 성령의 전유를 성화로 여기기보다는 이 전체의 시작을 성부, 이 전체에 대한 지혜를 성자, 이 전체에 대한 능력을 성령에게 귀속시킨다. 이러한 귀속은 성부, 성자, 성령 만물에 대한 모든 사역을 함께하심을 더욱더 드러낸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나타난 삼위의 사역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 곧 계시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현대신학의 뜨거운 논점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이다. 비록 칼뱅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에는 이러한 사상이 강하게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성경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를 사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칼뱅에게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에서 경륜으로, 경륜에서 내재로의 복귀(완성)라고 볼 수 있다. 내재로의 복귀 후에는 세상(밖)을 향한 사역이 존재하며, 영원한 로고스는 영화롭게 된 육체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아버지를 머리로 두고 아버지를 대리하여 간접적으로 신자와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는 것은 계시 경륜과 구원 경륜을 이루기 위함이다. 여기에 자기 비하와 일종의 종속적 특징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와 같은 성경 구절은 구원을 위한 성자의 자기 낮추심이지 존재론적 차이가 아니다. 구원에 대한 칼뱅의 전체 신학은 내재와 경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해와 함께한다. 내재와 경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와 구원은 신학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며, 종말론적 성취를 희망하게 한다.

 

칼뱅은 삼위일체론을 신비로 보았다. 이 지식은 인간의 지각으로 도달하기에 너무나 고상한 비밀이었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비밀은 경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삼위일체에 나타난 하나님 존재의 신비를 교육적인 차원,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시켰다. 칼뱅은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말씀이며,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이 영원한 아들은 경륜에서 하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그분이 우리들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에 있다고 천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삼위일체를 형이상학적 탐구대상이 아닌, 궁극적으로는 신비로서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기독교의 진리이며, 구원론적이며 실천적인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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