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하나님아들 2023. 5. 13. 22:10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계 몽 주 의

Die Aufklarung

 

들어가는 말

 

17세기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적 신학 위에 서서 참된 경건을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경건주의가 활동할 때 세계사에서는 인간의 자율과 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계몽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런데 엄밀히 이 두 운동을 주시할 때, 한편으로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다른 면으로 볼 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도 했다. 한 예로 경건주의는 너무 인간의 이성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너무 이성의 역할인 지성을 도외시하는 맹목적인 신앙이 광신에 빠져드는 위험성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두 사조는 하나될 수 없는 엄격한 차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1. 계몽주의는 17세기 유럽에서 나타난 정신운동으로서 당시의 고백신앙적, 교리주의적 교회로부터 그리고 권위주의적 진리 추구로부터 벗어나 관용의 아이디어(die Ideen der Toleranz)를 강조하고, 자유와 이성의 권위를 내세웠다. 이러한 철학은 18세기 모든 생의 영역에 있어서 많은 힘을 행사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에서 절정을 이루고, 전 유럽을 휩쓸었다. 18세기 중엽 이 운동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계몽주의(Aufklarung, Enlightment)라 부르게 되었다.

2. 계몽주의의 뿌리는 중세사상의 비판적 경향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물론 고대 헬라철학의 계몽에서 그 근원을 가져오기도 한다. 가까이는 15, 6세기의 르네상스(Renaissance)에서 찾는다. 이 계몽주의가 강하게 영향을 행사한 서유럽 국가들은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프랑스이다. 여기에 대치되는 교회운동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우는 경건주의를 들게 된다.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활발한 활동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계몽주의는 독일에서 이상주의(Idealism), 긍정주의(Positivism)로 나타났으며, 프랑스에서도 활발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3. 종교개혁, 반종교개혁, 30년 종교전쟁, 신앙고백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기성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은 공적인 국민생활에서 지금까지의 위치를 잃고, 특히 정치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 대신 하나의 새로운 세속적 문화가 교회의 영역 밖에서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분위기로 바꾸어 갔다. 이러한 경향은 너무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문화생활의 변화와 더불어 다른 문화에 대한 교회의 위치변화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현실로 와 닿았다. 무엇보다도 지식인 계층에게 이러한 물결은 더욱 세차게 몰아 닥쳤다. 교회의 초자연적 초월적 세계관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권위를 뛰어 넘는 독립적 세계관, 생의 철학을 형성하려고 했다.

 

4. 교회는 이러한 계몽주의의 도전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교회 안의 지성인 계층을 현저하게 잃어야 했다. 가장 심한 영향은 프랑스의 카톨릭 교회가 유물론주의(Materialism)와 무신론(Atheism)에 많은 신자들을 빼앗겨야 했다. 불란서 혁명 당시 교회와 기독교가 무서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관주의(Subjectivism)로 지성적 교리와 단순한 신앙을 멀리하고 새로운 종교적인 색채를 띤 세계관으로 대체하였다. 그럼에도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는데, 그럴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 외 다른 일반서민들은 여전히 교회 중심적 경건성의 지배하에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다. 물론 교회의 교리를 무너뜨린 계몽주의의 지성인들이 지닌 세계관과 생의 가치관 역시 그럼에도 많은 점에서 앞선 신앙고백시대의 기독교와 많은 점에서 또한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거부할 수 없었던 사실은 교회가 그러한 시대적 조류를 따라 점점 뒤따르는 결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 특히 독일에 있어서 상당 부분이 새로운 문화의 경향을 따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신교는 내적으로 영향을 받아 점차 세속문화와 타협하는 모습을 가져왔다.

 

5. 이로부터 개신교 신학은 일치성과 절대성을 잃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정통주의 시대의 특징이기도 했던 그런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많은 특징적 지역교회의 나뉨, 교리적 이단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부분적으로 계몽주의에 무릎을 꿇었다. 예외적으로 동방교회(정교)는 계몽주의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 이러한 계몽주의를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아니하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에서 지역에 따라 각자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양성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영적 생활에 있어서는 일치감을 갖는다. 한 마디로 이점에 있어서 내세울 수 있는 바는 지성주의(Intellektualismus), 인식의 노력, 진리추구의 경향이 놀라운 정도로 급격히 상승되었다. 지난 시대의 신앙이란 이름 하에 이루어진 맹목적 권위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조바심으로 가득찬 영성을 뛰어 넘어 독자적 인식을 향한 과감한 시도가 나타났다. 이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배제되었다. 탈세상적 금욕적 내세추구 또는 그러한 경향은 현세를 중요시 여기며, 문화생활을 기뻐하는 삶으로 바꾸어 나갔다(diesseits und Kulturfreudigkeit). 창조와 인간의 마음을 향한 거의 한계가 없는 적극적 긍정주의(Optimismus)는 이제 부정적, 회의주의적 입장으로 바뀌어 갔다.

 

2. 특히 1755년 리싸본에서 이루어진 대지진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뀌게 했다.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긍정적 사고가 나타났다. 국가, 경제적 삶, 교회,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이제는 새로운 개혁의 마음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종교성이 약화되는 반면 도덕성의 강조가 그 자리에 들어왔다. 예를 들어 상당한 계몽주의자들이 중국의 유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일반적 신(神)개념과 중국의 윤리학 등이 계몽주의에 강하게 한 몫을 감당했다. 인문과학의 전면적 체계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종교학, 도덕, 국가헌법, 경제체제 그리고 자연법 또는 이성 등의 윤곽이 확실히 두르러졌다. 이 모든 것의 척도는 ‘이성’(Vernunft)이었다. 이 이성에 의해서 자연적, 일반적인 것만이 오직 진리라는 규명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적 체계의 요소들로 스토아(Stoa) 학파에게서 유래되었고 초대교회의 신학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6세기에는 개신교 신학에 들어왔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스토아 학파와 함께 다시금 확인된 후 많은 학자들 사이에 번져있었다.

 

1. 네덜란드

수 십년 동안 카톨릭적 스페인의 통치로부터 네덜란드는 해방전쟁(독립전쟁)으로 승리를 거둔 후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을 가지게 되었고, 결과 유럽에서는 보다 앞서서 폭넓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 보다 고위층 사람들 사이에 계몽주의의 정신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파가 형성되었다. 그의 사상은 전통과 권위로부터의 자유로운 사고를 강조하였다. 곧, 의심의 원리(das Prinzip des Zweifels)와 선명하고 정확한 인식(chare et distincte percipere)을 이성의 권위에 부합하는 방법으로서 철학에 도입하였다.

결국 데카르트와 함께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고 일컫는 시대는 끝이 나게 된다. 새로운 시대는 자연적이고 이성적 세계관의 형성시대로서 거대한 철학체계가 형성되는 새 시대로 돌입하였다.

계몽주의가 가장 앞선 나라 네덜란드에서는 수도 암스텔담이 당시 계몽주의 문헌의 가장 중요한 인쇄장소가 되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제 1, 제 2차 독립전쟁(1566-1609, 1621-1648)을 완료한 후 베스트팔렌 종교화해(Westfalischer Religionsfriede, 1648)가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로써 칼빈주의는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결정적으로 활발해졌고, 네덜란드 문화는 눈부신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17세기 중엽에 벌써 최고의 꽃을 만발시켰다. 다양하고 기초 확실한 민족적 교육은 경제적 번영을 형성했고, 학문과 예술(미술)을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찍이 교회의 관용이 형성되고, 학문적 연구 역시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도 자유롭게 발전되었다. 여기서 자연신학, 자연법 그리고 역사적 또 법적 해석학으로 유명한 학자 휴고 흐로테우스(Hugo Grotius)가 배출되었다. 아울러 교회적 교리에 강한 영향력을 받지 않는 인문주의적 언어학이 발달했다. 유명한 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피에르 베일리(Pierre Bayle) 등의 사상가가 이곳에서 피신처를 찾기도 했다. 그 결과 당시로서 가장 앞선 거대한 형이상학적 학적체계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

프랑스 출신 데카르트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형성되어진 귄위들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오랜 네덜란드 거주로 데카르트 철학파(Cartesianism)의 거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의 철저한 자율적 의심과 더불어 형성되어지는 철학(eine vollig autonome und zugleich jeglichen Zweifel unzugangliche Philosophie)을 추구하였다. 학문성을 향한 가장 첫 번째 독자적 철학적 세계관인 그의 사상체계는 실질적으로 계시신앙과 종교에는 완전히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럼 그의 사상의 단편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Das Denken ist es, es allein kann nicht von mir getrennt werden. Ich bin, ich existiere, das ist gewiß. Wie lange aber? Nun, so lange ich denke. Denn vielleicht konnte es sogar geschehen, daß ich, wenn ich ganz aufhorte zu sein. ... Ich bin also genau nur ein denkendes Wesen, d.h. Geist, Seele, Verstand, vernunftlauter Ausdrucke, deren Bedeutung mir fruher unbekannt war. Ich bin aber ein wahres und wahrhaft existierendes Ding, doch was fur ein Ding? Nun, ich sagte es bereits: ein denkendes ... Unter dem Namen ≫Gott≪ verstehe ich ein Substanz, die unendlich, unabhangig, allwissend und allmachtig ist und von der ich selbst geschaffen bin und ebenso wie alles andere Existierende, falls es solches gibt.??

 

스피노자(Baruch Spinoza,1632-1677)

포루투갈 출신으로서 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 스피노자는 테카르트 보다 더 과격한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회당과 교회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결과론적, 개인적 신을 그리고 개인적으로 죽지 않는 불멸성을 강조하는 범신론(Pantheismus)을 역설했다(deus sive natura). 종교 교리로부터 학문적 사고의 독립을 가져왔다. 그 대신 종교는 사랑과 경건한 느낌으로 제한시켰고, 성경을 역사적 비평의 선상으로 가져왔다. 당시 그는 벌써 모세 오경의 점차적 형성을 말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입장은 당시 수많은 적대자들로부터 “무신론”(Atheismus)으로 공격을 당했으나 그도 역시 결정적으로 방어했다. 소수의 추종자들을 가졌으며, 18세기 중엽 후반기부터 물론 확실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스피노자주의가 독일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2. 영국

특히 네덜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로서 영국에서는 17세기말부터 영국 계몽주의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학문연구의 활발, 다른 문화영역에 있는 종족들과 종교들과의 무역증진, 문학의 현저한 발달, 신학의 이성주의화, 1688년 슈트어트(Stuart)의 절대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자유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1694년부터 공식화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계몽주의는 급속도로 영국 전역에 파고들었다. 결국 영국에서 이신론(Deism)이 출현했다.

대표적인 사상가들로는 완전한 반(反)종교적 사상사가로서 일컬어지는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 1588-1679)와 영국 경험주의의 창시자로서 관용을 위한 문헌적 싸움을 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평가되는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를 들 수 있다.

 

3. 프랑스

계몽주의가 무엇보다도 일반서민층에 파고들었다. 부분적으로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으나 프랑스 궁정은 이 새로운 사상을 완전히 거부했다. 이러한 특별성은 18세기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궁정이 계몽주의에 정복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문화와 학적 방법론을 영국에서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점에도 거대한 의미를 프랑스에 주었다. 프랑스는 그들이 가진 탁월성을 활용하여 계몽주의의 예술, 놀라운 케치 플레이(Motto)의 형성으로 이 운동으로 세계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반교회적, 반종교적 사상이 부각되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파리 출신으로서 영국 종교철학과 자연철학의 유명한 대중적 사상가인 볼테르는 영국에서의 거주생활(1726-28)로 이신론(Deism)적 사상과 만나게 되었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신(神)은 이론적이 아니라 사고(思考)를 요청하는 분으로서 실질적인 면에서는 그의 실존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Jean Jacaues Rousseau, 1712-1778)

제네바 출신인 루소는 느낌과 자연을 향한 열정적 선지자로 불리운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의 상태란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평등의 상태이다. 그러나, 문화, 국가, 사유재산은 이것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4. 독일

30년 종교전쟁(1618-48) 후 독일의 문화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정신체계를 황량하게 만들었고 가난에 찌들게 했다. 지금까지 강한 정통(Orthodoxie)을 내세웠던 신학에서는 주변국가들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새로운 입장이 나타났다. 점차적으로 계몽주의 정신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이신론과 프랑스의 과격주의(Radicalism)와는 구별된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매우 적절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물론 예외가 없지 아니했다. 대표적인 탁월한 인물로는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① 고트푸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시대적으로 독일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경건주의와 계몽주의가 시작되었다. 1670년 독일 프랑크푸루크에서 슈페너가 가장 첫 번째 성도들의 경건모임(Konventikel)을 시작했을 때,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마인쯔에서 젊은 라이프니츠가 독일 계몽주의에 있어서 결정적, 창조적 저술들을 내놓게 된다. “독일 계몽주의의 아버지”인 라이프니츠와 “경건주의의 아버지” 슈페너는 이 시대에 가까운 친구로서 당시 정통주의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주의와의 논쟁을 멀리한 채 독일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새로운 정신적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함께 머리를 모으며 만났다. 서부유럽에 물려드는 무신론 사상과 기계론(Mechanism)에 반하여 창조적 준비를 실감하였다. 이는 마치 한 때 루터와 멜랑히톤이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연관을 시도했던 역사를 연상케 한다.

 

공공연하게 슈페너의 저술로 간주되었던, 무신론자들을 대적하여 쓰여져 많이 읽혀졌던 글은 라이프니츠가 쓴 것이었다(Confessio naturae contra atheistas, 1669). 아쉽게도 라이프니츠가 파리로 떠나게 되자 이 두 신학자와 철학자의 관계는 멀어져 갔다. 슈페너는 불경건(Gottlosigkeit)을 경건성(Gottselig- keit)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세속지혜(Weltweisheit)를 멀리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달랐는데, 새로운 서부유럽의 철학, 새로운 법사고, 새롭게 일어나는 당시의 자연과학적 인식을 동원하여 거꾸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입장은 경건주의와 멀어지게 했고 라이프니츠를 점점 서부유럽의 계몽주의와 근접케 해였다. 이러한 라이프니츠로부터 학문의 영역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특히 신학과 교회를 향해서는 철학과 신학의 원리적 관계의 새로운 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이상주의적 형이상학과 세계관의 철학적 근저가 형성되어졌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철학은 계시에 적대시되는 입장이었지만, 신학으로부터 해방된 철학의 입장에서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성(Vernunft)과 계시(Offenba rung)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조화(Harmonie)를 이룸이 사고의 기본 전제(Grundvoraussetzung)이었다.

 

이러한 라이프니츠는 노년에 이르러 당시 과격한 영국의 성경비판을 공격하기도 했고(1701), 기적신앙과 교회교리를 그는 비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철학, 사고의 가능성 그리고 이성적인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철학과 신학의 유대가 이루어졌다. 당시 대두되었던 서부유럽의 계몽주의와는 다르게 독일 계몽주의의 특이성은 계시와 이성의 조화사상을 근거로 형성된 유대관계(Bundnis)에 있다 하겠다. 이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실이었다. 물론 후에 헤겔이 이러한 차이점을 깨닫고 대조를 부각시켰다. “독일에서는 계몽주의가 신학의 편에 서 있었다”.

이러한 이성과 신앙의 조화의 원칙은 18세기 독일사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독일 이상주의 철학에 이르러서 까지도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입장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성과의 결별을 선언한 입장은 보수신학이 더욱 강해지는 입장이 되고, 역으로 이성으로 인한 학문세계에 긴장을 가져다주어 쉽지 않는 길을 가야 되었으나, 독일의 신학, 학문세계는 결국 보수신학 약화와 더불어 학문의 발달, 신학의 새로운 모습에로의 변모를 금방 추측할 수 있게 한다.

 

② 독일 계몽주의 신학(Die deutsche Aufklarungsteologie)

권위주의적 교권과 교리적 입장에 반대한 싸움은 독일에선 계몽주의에 의해 시작되지 않았다. 정통과 수 십 년간 싸웠던 경건주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강한 신앙고백적 입장이 약화되었고 신앙의 확신으로 인한 개인적 신앙의 입장(자유)이 적극적으로 주어졌고, 신앙고백시대를 뛰어 넘게 되었다. 단지 과격한 경건주의에 있어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교회적 경건주의에 의해서도 계몽주의를 관통하는 입장이 형성되어 신학과 삶이 강조되었다.

 

전환기의 신학(Die Ubergangstheologie)

독일 계몽주의 신학의 첫 단계는 18세기초에 꽃핀 》전환기의 신학《이었다. 교리적 전통과의 단절은 없었으나 새로운 시대에로의 조심스러운 접근, 전통의 조심스러운 보존에 신경을 썼다. 둘째 단계는 이성과 계시의 조화의 사상이 물러가는 새 교리학(Neologie = neue Lehre)이 등장했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전승에 있어서 이성의 비판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다름 아닌 역사비판적 성경연구의 창시자 요한 살로모 제물러(Johann Salomo Semler, 1725-1791)의 출현이다. 1753년부터 할레(Halle)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이제 영국의 성경비판을 옳은 것으로 옹호하였다. 곧 바로 그는 지금까지의 성경교리를 이성적, 역사적 증거제시로 인해 떠받들 수 없음을 인식했다. 학문적 신학(Wissenschaft)과 신앙(Glaube)의 구별을 내세운 제물러는 자신의 저서 「경전를 향한 자유로운 연구에 대한 논문」(Abhandlung von freier Untersuchung des Kanons, 1771-1775)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개신교의 성경교리를 무너뜨렸다. 영감설과의 단절을 가져 왔다. 결국 구개신교적 성경신학과 신개신교의 성경신학을 나누는 결정적 구획석(Markstein)을 놓은 장본인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형성물(historisch gewachsene Sammlung), 곧 교회가 공공연하게 인정한 문서로 인식했다. 더 이상 하늘로부터 떨어진 계시된 책으로 보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이해될 책으로 인식했다. 지금까지 개신교의 입장이었던 성경(Bibel)과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을 동일하게 보는 관점을 중단시켰다. 그런데도 성경의 역사비평의 허용이란 계시의 무시를 뜻함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을 영적, 도덕적 교훈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서 이해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모든 비판 밖에 그리고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Das Wort Gottes ist freilich außer und uber aller Kritik). 독일 개신교에 있어서 자유신학의 창시자인 그는 후기에 가서는 더 이상 경건주의적 - 정통주의 신학과 싸우지 않았고, 도리어 당시 독일 계몽주의 신학의 과격한 시도에 대적하였다.

 

③ 독일 이상주의(the German Idealism)

계몽주의가 폭넓게 신학자들과 지성인 계층의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국가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막대한 새로운 힘이 형성되었다. 곧 독일 이상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시(詩), 세계관(Weltanschaung) 그리고 철학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조의 확대는 몇 십 년만에 강하게 이루어졌다.

레씽의 비판의 예리함, 주관주의적 정서적 생의 모습, 칸트의 새 시대를 여는 이성비판(Vernunfts- kritik), 고전주의(Klassizismus), 새로운 인본주의(New Humanism)와 유대를 갖는 괴테와 쉴러의 詩들을 들 수 있다.

독일 이상주의는 초기 소수에만 해당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장 강하게 독일 정신세계를 휘어잡았다. 아울러 영국, 프랑스, 북아메리카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최근 근대사에서 가장 깊고,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결국 독일 이상주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레씽(Gotthold Ephraim Lessing,1729-1781), 칸트(Immanuel Kant,1724-1804), 헤어더(Johann Gottfried Herder,1744-1804),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실러(Johann Christop Friedrich Schiller,1759-1805), 술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 1834)등을 들 수 있다.

 

Ⅰ. Gotthold Ephraim Lessing(1729-1781)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사이에 두고 그 가운데 매우 독특하게 날카로운 사상가로서 레씽이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적 저술가로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신학적 저술로는, 1777-78년에 이루어진 논쟁모음들, 종교철학적 드라마인 “지혜자 나단”(Nathan der Weise,1778), 종교철학적 소품인 “인간교육”(Die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1780) 등을 들 수 있다.

Ⅱ. 계몽주의에 대적한 강한 적대세력이 등장한다. 곧 새로운 주관주의적 감정적 생애 추구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1760년경 독일문학에 강하게 침두 하였다. 인간 개체(Individuum)의 창조적 능력을 중시하여 발굴하며, 탁월한 천재적 민족들의 자부심이 등장하게 되고, 본래적, 민족적, 단순한 것 등에서 의미를 찾으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신앙에 있어서는 너무 심한 감정적 경건성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요한 게오르그 하만(Johann Georg Hamann, 1730-1788), 요한 카스파 라바터(Johann Kaspar Lavater,1741-1801) 그리고 요한 고프리드 헤어더(Johann Gottfried Herder,1744-1803)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헤어더의 계몽주의를 대적한 사상을 그의 저술 「신학의 진정한 본질」(Das wahre Wesen der Theologie,1785)에서 듣는다:

“신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서 확실히 가장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로운 이성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귀한 덕목과 계몽을 돕는다. 신학자들이란 인간이성의 아버지들이며, 인간정신 그리고 인간마음들의 아버지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새로운 기독교에의 인식으로 나타났다. 예수를 신적 능력의 전달자로서 이해되었고, 성경을 미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성의 종교(Humanitat)로 이해되어 기독교와 고대를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또한 낭만주의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해를 향한 전초적 신학이 되었다. 1900년대에 이르러서 그의 저작들이 인용되었다. 주저로서는 「인류 철학사를 향한 아이디어들」(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1784-91)가 등장하였다.

 

임마누엘 칸트(Immauel Kant, 1724-1804)

칸트는 쾨니스부르그 대학교의 철학 정교수로서 계몽주의를 극복하고 뛰어넘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려운 점은 칸트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①계몽주의로부터 가져온 순수한 지성주의적 종교의 의미

②계몽주의적 학교 형이상학의 부정→ 교회적 교리를 뛰어넘음.

저서들로는 「순수 이성의 영역 안에 있는 신앙」(Die Religion innerhalf der Grenzen der bloßer Vernunft, 1793)과 「영원한 평화에 관하여」(Von ewigen Frieden, 1795)와 초월적 철학, 초월적 이상주의를 보여주는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이 있는데, 인식 비판과 인식론이 제시된다. 「실천이성 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이 나왔는데, “신앙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서 나는 앎을 중단해야만 한다”(Ich mußte das Wissen aufheben, um von Glauben Platz zu bekommen)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神, 자유, 죽지 않음(Unsterblichkeit)은 이론적 이성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Bewußtsein)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확신들(Uberzeugung)로서, 실천이성의 피할 수 없는(거절할 수 없는) 요청(Postulate)들이다라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이론적 이성에 앞선다(Primat). 이러한 사고의 전제가 칸트의 윤리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행위는 확실히 의무감으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 행위의 목적을 통해서 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무조건적(unbedingt)으로 당연하게 되어야 한다(Kategorischer Imperativ -종교적 열정 lnbrunst 1785). “내 위에는 별들 반짝이는 하늘이 있고, 내 안에는 도덕법이 있다.”

「순수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Die Religion innerhalf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에서 칸트는 실천이성의 비판 안에서 이루어진 이성신앙(Vernunftiglaube)이 역사적 종교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칸트는 윤리와 종교의 불가분의 관계를 “신적 계명으로서 모든 우리들의 의무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 사고 가운데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항상 단지 이성의 추구로서 온전성의 원형으로서 이해된다(Urbild der Vollkommenheit immer nur als Vernunfideal). 결코 감성적 세계에서 구체화되지 않는다. 악을 대적한 선한 원리의 종국적 승리는 지구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이다. 눈에 보이는 역사적 교회들은 단지 이 나라를 위한 전초이다는 것이다.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의 신의 현존」(Das Dasein Gottes als Postulat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행복이란 세상에 있는 이성적 실존의 상태이다. 총체적 실존 가운데 근거를 두는 인생들의 모든 소원과 의지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모든 목적을 향하는 본성과 일치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의지에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상태이다.“

"Was ist Aufklarung?"(1784)에서 Kant는 말한다.: "Aufkla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undigkeit. Unmundigkeit ist das Unvermo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n zu bedienen."

※고전주의(고전파) - 괴테( Goethe 1749-1832), 쉴러(Schiller, 1759-1805)

(Classicism) 인간성의 추구(Humanitat)

 

이상화된 고전적 헬라문화를 추구

 

인간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종교적, 도덕적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미적 교육 (die asthetische Erziehung)이 요구된다.

 

낭만주의(Romaticism)

초기에는 순수한 미적 세계관과 관계되는 사조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

후기 : 종교에로의 갑작스러운 관심

느낌, 환상(환영)에의 강조는 새로운 신비주의로 나감.

교육→새로운 미적(신비적), 범신론적 경건성을 추구 카톨릭과 가까운 신비주의적 요소,전설 등과 이성적 계몽주의와는 거리가 멈.

낭만주의가 종교에로 전화하게 됨은 1799년 발간된 슐라이어마흐의 저술 "Reden uber die Religion" 때문이었다.

→Johann Gottfried Fichte(1762-1814)

1794 Jena 대학 교수

1799 Preußern 교수

1810 Berlin 교수(새로 세워짐)

→Friechrich Wilhelm Joseph Schelling(1775-1854)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

1801 Jena Dorent

1818 Professor in Berlin

"Phanomenaligi des Geistes"1807

계몽주의를 뛰어넘음 ← 철학의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방향설정을 통하여 오직 지성주의적 체계가 모든 실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르침.

철학과 종교는 같은 대상(Objekt)을 서술하는데, 약간의 차이란 종교는 ‘상상(Vastellung)의 보다 낮은 품안에 있는 대상을 철학은 '이상(idee)'의 보다 높은 것에 있는 대상을 다룬다.

그의 역사철학 안에서 기독교적 종교는 “세계사에 결정적 대상(일)”이다. "entscheidende Angelegenheit der Weltgeschichte" 당시 정통개신교와 헤겔 철학은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1831) “젊은 헤겔주의자(Junghegelianer)는 보다 과격한 노선을 걷게 된다. 곧 헤겔학파를 법에서 그리고 좌익으로 향하게 된다. 그 추종자들로는

- David Friedrich Strauß

-Ludwig Feuerbach (1804-1872)

?"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

?"Das Wesen der Religion“(1845)

종교란 단순한 하나의 환상이다. eine blaße Illusion으로서 인간적 소망들과 이상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초월적인 것안에서 神을 상상(Gottesvorstellung)

"Der Mensch schaffe Gott Nach seinem Bilde"

→Karl Marx (1818-1883), Friedrich Engels(1820-1895) Friedrch Nietsche(1844-1900)

"Also Sprach Zarathastra"(1883-1884) "Autichrist"

1869-79 교수 고전언어학 Basel

1889-정신병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재구성의 시대 "eine Zeit der Rerogunisation"

J.Wallmann, Kirchengeschichte, 1845

당시 절박한 개신교의 상황을 Henrit Steffens은 1799년 독일 계몽주의의 중안인 베를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Die Krichen waren leer, und verdienten es wsein die Theater waren gedrangt voll, und mit Recht《 신앙의 완전한 상실과 더불어 철저한 형식주의에로 교회는 이르렀다. 세례식이나 입교식(Kanfirmation)정도만이 교회행사로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가장 훌륭한 개신교 설교자 Wristoph Friedrich von Ammon은 신앙의 황폐화를 절규한다.

".... der glaube andie wesentlichsten Wahrheiten der Religion hat fur unendlich viele siene Gewißeit und Starke verloren, Zweifelsucht und Gleichgultigkeit sind hautig au seine Stelle getreten, der Gedanke an Gott und eine kunftige Welt ist ganzen Familien und Gesellschaften frend geworden"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나타난 저술이 Friedrich Schleiermacher의 》U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n ihren Verachtern《(1799)이었다. 이 책의 첫 장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당시의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그의 생각을 제시한다.

》In das Hilternfen der meisten uber den Untergang der Religion stimme ich nicht ein《 ......das Christentum, werde》noch eine lunge Geschichte hahen trotz allen, was man sagt von seimen buldigen oder schon enfalgten Untergange《

모든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쉽게 기독교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안목을 내어 놓았다.

그의 신앙론(Glaubeenslehre)

?19세기 신학사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신학적 저술을 하나 열거한다면, 1821/22년에 출판된 슐라이어마허의 「신앙론」일 것이다. (HDTh 3, 153). 1830/31년에는 제2판이 나왔다. 이 책에서 Schleirmacher는 기독교신앙의 본질과 당대 교회의 신앙경험들을 신학의 주제로 부각시켰다. 서론에서 Schl.는 기독교는 문화와 일반적 진리자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내세웠다. Schl.는 지금까지의 교리들(Dogmen)과 교회적 신앙고백들이 더 이상 직접적 규범(Norm)으로서가 아니라, 지나간 시대의 기도교적 인식의 의미로운 표현으로서 역사적으로 가치를 부여했다. 즉, 그 시대 그 시대는 경건한 자각에서 그 효능을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Schl.에게 있어서 하나의 전제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실재(Wirklichkeit)는 그세대 인간들의 모든 신앙적 경험 그리고 인간적 신앙의 자각과는 상관없이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Schl.는 경험의 시금석에로의 강조와 함께 지금까지의 전통적 요소인 성경 그리고 신앙고백은 현저히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Schl.가 말하는 신앙경험이란 개인적 경험보다는,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경험들을 의미한다(die lefendigen Glanbedserfahrungen der Gemeinde)

schl.는 교리학(Dogmctik, 조직신학)을 역사신학에 토착시켰고, 실질적 조직신학(die aktuelle Doqmatik)이란 역사 가운데서 계속되는 교리개념의 마지막 산물(Endprodukt eine sich in der Geschichte wandelnden Lehrbegrigfs)로 이해했다.

신앙론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4가지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Vier Kriterien :①gegenwartige Glauhensenfahrung ②Belenntnisgemaßheit ③Schrigtgemaaßheit ④innerdogmatische Systematik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점을 들추어낼 수 있다. 제시된 순서는 Schl.에게 의미가 있다. 경험, 신앙고백서, 성경 그리고 교리학 내에 있는 조직신학이 열거되는데, 성경 앞에 신앙고백서가 있다는 점이다. 그 성경은 신약에 한한다. →symbolisch → schriftenaßig → wissenschaftlich란 교리학이(Dagmatik)이 Schl.에게 있어서 제시된다.

?Schl. 에게 있어서는 그의 신학사고는 전통과의 관계보다는 현재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 한다. 곧, 당대의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개신교 교리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의지를 가졌다. Schl.에게 있어서 개신교 교리란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신앙고백들을 통해서 이미 형성되어진, 굳어진 거대한 총체가 아니라, 지금도 그 개념이 형성되어지고("im Werden"), 계속 발전되어지는(Fartentwicklung) 것으로 이해한다.

?Schl.신학은 자각신학(Bewußtseinstheologie), 경험신학으로 불리우는데, 이 신학은 개신교의 계몽주의 신학의 절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Schl.의 물질문명 이해

당시는 기계문명의 시대의 도래를 앞둔 시대로서, 문화발전을 Schl.은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결코 이러한 기계문명이 하나님과 그의 창조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인간의 땅의 다스림을 두드러지게 할 것이며, 동시에 이성과 자연의 일치가 드러나는 과정으로 보았다.

→문화신학의 출현(Kulturtheologie des Protestantimus)은 Schl.의 1809/10의 작품 》Christliche Siggenlehre《에 힘입은 바 크다.

?Schl.개신교와 카톨릭 이해

신앙론 24장에서

개신교는

》das Vechaltnis des Einvelen un Kirche abhanging macht von seimen Berhatnis in christo《

카톨릭은 반대로 》das Verhaltnis des Einvelen von Kirche《라고 말한다.

Schl.두 종류의 고백들은 기독교에 있어서 동등한 정당성을 가진 모형들로서 이해된다.

?생애(1768-1834)

프로이센 개혁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나라면서, 도덕주의, 계몽주의의, 이성주의를 멀리한 채 해른히트적 신비적 예수 경건성의 결정적 영향을 입었다.

할레당 대학에서 계몽주의 사상에 물들고, 칸트의 철학에 목입한 후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적 신학을 뛰어넘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신앙에 나아가게 되었다. 할레대학 베를린대학 교수, 헤밀의 동료로서 가르침

<각성운동(Erweckangskeweging)>

19세기 초에 일어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형성된 또 다른 방향의 신학은 종교적 갱신과 밀접히 연관이 있다. 곧 “각성운동 Revival movement"으로서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며 보다 깊은 종교적 경건성 그리고 낭만주의적 역사이해와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와는 다르게 보다 폭넓게 대중적 운동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회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모양을 형성하게 되었다. 근대교회사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거대한 경건운동은 이 각성운동이었다.

각성운동은 당시 독일에만 국한된 운동은 아니었다. 19세기 초반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루터(?)주의자들에게도 일어난 운동이었다. 대륙에 있어서 서부유럽의 칼빈주의를 중심으로 특히 제네바에서 출발된 〉Reveil〈은 둘이 합쳐져 보다 거대한 각성운동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18세기에서부터 영국과 북미에서 일어난 각성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독일각성운동은 다양한, 경건한, 조직적인 운동이지만 일관성을 갖지는 않았고 거의 대부분 일치되게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에 대적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특별한 출발점을 갖지 않고, 많은 다양한 돌출적 운동이었다. 확고하고 계속되는 운동의 중심부를 결코 갖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감리교운동의 Johan Wesley(1703-1791) 와 같은 중심적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뿌리를 근거로 자란 각성운동은 (laus Harms(kiel), August Neander(1789-1850)(Berlin, Kirchen historiker) August Tholuck(1799-1877)등을 들 수 있다.(Johann Totias Beck(1804-78)

-August Neander

유대인으로서 어린이처럼 경건한, 학자였으나, 덜 비판적인 그는 1806년 세계와 더불어 Neander라 일컬었다. 1813년 베를린 대학 교회사 교수, 십정신학(Pektoraltheologie)의 대변자 (Pectusest quod theologum facit)로서 새로운 경건주의의 입장에 선 교회사 서술을 함.

1825-1856:「Allgemeine Geschichts der christ Religion und Kirche 」

-August Tholuck(1799-1877)

폭이 넓으며 영성이 깊은 학자였던 그는 1826년부터 Halle 대학의 교수로서 학생의 친구와 목회자로서 그의 개인적 활동을 통해서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그의 저서는 「Die Lehre von der Sunde und von Versohner, oder die wahre Welhe des Zweiflers, 」(1823) → 이 저서는 각성운동신학이 있어서 전형적인 저술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Johann Tobias Beck(1804-78)

1836년부터 Basel대 교수 1843년부터 Tubingen대 교수

금욕주의적 - 신비주의적 입장에 선 근본주의적 성경문자주의(Biblizismus)와 천년왕국설을 적극 신봉, 교회교리에 무관심한 입장. 이러한 Beck에게 수 천명의 추종자들이 따름.

-Claus Harms(1778-1855) Kiel의 Propst

1817년 종교개혁 기념일에 마틴 루터의 95개조 조항을 발표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95개 조항을 첨가해서 발표했다. 이는 곧 당시의 이성주의에 반대한 싸움이었다. 이와 더불어 작센 주의 이성주의자들의 싸움이 일어났다. 이러한 Harms의 95개 조항은 프로이센의 교회연합(Union)에 대적하며 강조하는 영적 직분과 고백교회의 강조를 대적한 신앙고백적 선언이었다. 결과적으로 루터주의자들의 신앙고백을 형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개혁과 교회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Menken, Kohlbrugge, Collenbusch등이다.

<95개 조항>

1. 우리의 선생이시오,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회개하라”고.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만남을 바로 형성할 수 있도록 그는 교리를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사이 그렇듯이-변화하는 시대 정신에(dem veranderten Zeitgeist gemaß)에 따라서 (딤후 4:3)

2. 신앙 그리고 행위의 개념이란 사람이 완전히 그러한 삶 속에 있을 때에야 형성될 수 있다.

27. 옛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새 신앙에 의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한다.

43. 만약 이성이 종교를 가까이 했다면(손댔다면), 종교는 진주를 내던져 버리고, 껍데기하고만 노는 꼴이 된다.

93. 복음적 개혁파교회는 멋진 교회다. 그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앞세우고 이루어진다.

Friedrich August Gottlob Tholuck(1799-1877)

성경주석가로서 특별히 그는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영향력을 미친다.(Jena)

유대인-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그의 강조 점은 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생론이다(로마서 주석 1824).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가 쓴 <죄와 화목자의 교리 또는 의심하는 자의 진정한 축복>(1823)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두 친구의 중생의 전기를 그리고 있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과 이성은 긴장 속에 있다.

<신앙와 이성>에 관하여 S.191(Neuzeit)

① Die Gesing ist das gefarbte Glas auch welches die Erkenntnis die Welt schallt.... Ist das Gemut......

② Nachdem wir soviel uber das Wesen der Vernunft........

 

 


 

경건주의 자료

지형은 박사(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신학대, 연세대 강사)

 

1. 머리말

유럽에서 일어난 개신교 각성운동인 경건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절정에 이르렀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사회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각성운동 가운데 뒷날까지 가장 크고 길게 영향을 끼친 것이 경건주 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경건주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근대의 신학 사상사와 교회사 흐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경건주의를 깊이 알지 못하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경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두 신학 진영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10여년 동안이나 경건주의 연구에 몰두했던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과 변증법적 신학의 드높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경건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책이라고 불리는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Pia Desideria, 1675)을 살핌으로써 경건주의 본래의 요청과 성격 을 드러내고 그것이 당시의 현실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 강좌의 목적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의 흐름을 살핀다. 다음으로 스페너가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까닭과 함께 그가 쓴 '경건한 요청'을 다룬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을 쓰고 나서 30년을 더 살았다. 강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건한 요청'에 나타난 사상이 스페너가 죽기까지 그의 글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추적한다. 경건주의에 관한 굵은 선을 뚜렷하게 하기 위하여, 또 강좌의 시간 때문에도 어느 한 곳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경건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려고 했던 성경운동이며, 그 방법론이 스페너에게서 '교회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로 나타난다는 것이 이 강좌의 초점이다.

 

2.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의 배경

경건주의는 정통주의 시대에 일어났다. 종교개혁후에 생긴 기독교의 세 종파, 곧 루터교와 개혁교와 로마 카톨릭은 1555년 까지 서로 무력으로 싸웠다. 1555년 '이욱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이 서로 화해하였다. 이 회의는 교회사 에서 매우 중요하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다음 가장 처음으로 서로 다른 기독교 종파가 공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개혁교도 후에 공존 구조에 포함된다. 1555년부터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가 시작되며, 이 때마다 각 종파들은 논리로 싸웠다. 논쟁에 필요한 논리적이며 개념적 수단으로써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슬그머니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수많 은 교리 논쟁을 통하여 교파마다 신조가 만들어졌고 이로써 거대한 교리 체계가 생겼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 체계와 비교할 수 있는 '개신교 스콜라 철학'이 건축된 것이다.

 

이러는 가운데 '경건성의 위기'(W.Zeller)가 생겼다. 이러한 위기 현상은 1600년 즈음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객관적 인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에게 주관적 확신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생긴 위기였다. 이 때 사람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문제의식과 정통주의 시대의 교리 논쟁을 잘 알고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일어난 것이 경건주 의였다.

정통주의는 정통-교리(Ortho-doxie)를 확정하고 지키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정통 교리를 삶에서 실천 하는 것(Ortho-praxis), 또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교리에서 삶으로 강조점을 옮겼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 네델란드의 개혁교 정통주의 안에 있었던 "제 2의 종교개혁 운동"(nadere Reformatie), 독일 루터교 정통주의 안에 있었던 갱신의 움직임 등이 이런 흐름 가운데 있다. 경건주의를 개혁교 경건주의와 루터교 경건주의로 나눌 때 개혁교 경건주의에서 중요한 인물은 "제 2의 종교개혁 운동" 참여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와 테오도르 운더아&#40103;(Theodor Undereyck, 1635-1693)이다. 루터교에서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와 필립 야콥 스페너가 중심 인물이었다.

 

특히 아른트는 경건성의 위기를 넘어서서 '새로운 경건성'을 제시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아른트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딤후3:5) 그 시대를 비판하였다. 아른트는 루터의 사상을 따라 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하였고 교리보다 삶의 변화를 더 중요하 게 보았다. 그의 책 "참된 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Vier Buecher von de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에 이런 그의 사상이 눌러 담겨 있다. 아른트가 활동할 때에 루터교 정통주의를 이끌었던 세 대학교(도시)는 비텐베르크와 에나와 스트라스부르트였다. 이 가운데 알사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크는 아른트가 제시했던 '새로운 경건성'의 흐름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그 때에 독일 땅이었던 이 알라스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스페너였다.

 

3. 스페너와 경건주의의 출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알사스 지방의 라폴츠바일러(오늘날의 Ribeaubille)에서 태어났고 스트라스부르 크 대학에서 역사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스페너는 1666년에 프랑크푸르트(a.M)의 수석목사로 청빙받았다. 이 때부터가 그가 본격적으로 일한 시기다. 스페너는 1666 -1686의 20년 동안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로, 1686-1691까지는 드레스덴 궁정의 수석 목사로, 1691-1705까지 15년 동안은 베를린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의 목사로서 일했다.

 

스페너는 전반적으로 아른트의 길을 따랐다. 교리보다 삶을 더 강조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뿐 아니라 그렇게 된 그리스도인이 계속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성화론이 본격적인 토론거리가 된 것이 바로 경건주의에서 이다. 경건주의 연구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는 스페너가 아니고 아른트라는 주장(E. Stoeffler)이 계속되었던 것이 이런 까닭이다. 그러 나 오늘날의 경건주의 연구는 경건주의 창시자 문제에서 스페너와 아른트 둘을 적절하게 평가하는데 의견을 모아간다. 곧 경건주의를 넓은 의미로 정의할 때는 아른트가 경건주의의 창시자이지만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는 스페너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적인 흐름과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에 중점을 두어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를 논하며, 경건주의가 당시의 사회와 교회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확인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좁은 의미로 경건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경건주의를 전체적으로 표현할 때 스페너를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며 또 자연스럽다. 스페너를 이렇게 부르는 가장 큰 까닭은 스페너가 1675년에 쓴 책 때문이다. 이 책이 교회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경건한 요청, 복음적 교회를 하나님 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갱신하려는 중심으로 부터의 요구'(PIA DESIDERIA: oder Herzliches Verlangen Nach Gottgefaeliger Besserung der wahren Evangelishen Kirchen/ sampt einigen dahin einfaeltig abzweckenden Christlichen Vorschlagen).

 

4.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Pia Desideria)

(1) 쓰인 배경

1675년 프랑크푸르트(a.M)의 봄 책시장에 요한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이 나왔다. 출판업자 요한 다비드 쭌너(Johann David Zunner) 가 이 책을 출판하면서 그 즈음 이 도시의 수석 목사인 스페너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서문은 그 시대에 그저 책을 추천하는 정도의 간단한 글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본격적인 글양식이었다. 아른트의 글은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리고 꾸준하게 팔렸다. 말하자면 쭌너는 베스트셀러며 스테디셀러인 아른트의 책을 출판하면서 유명세가 있는 목사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이다.

이 책이 잘 팔렸다. 특히 스페너의 서문이 크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스페너가 쓴 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서문만을 따로 출판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문을 읽기 위해서 비싼 책 전체를 사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또 출판된 책이 벌써 다 팔리고 없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같은 해 가을 책 시장에 자신이 쓴 '복음서 설교집' 서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자신의 책에 스페너가 서문을 썼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 책에 붙은 제목이 바로 '경건의 요청'이다.

 

(2) 경건주의의 방향제시서

'경건한 요청' 전체를 꿰뚫고 있는 굵고 진한 맥은 두 가지, 곧 실천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스페너는 기독교의 본질이 실천에 있다고 본다. 교회의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는 쓸데 없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스페너는 독자들 을 교회 갱신에 참여하게 하려고 '경건한 요청'을 썼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갱신의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긴요한 것은 각 사람이 찾아낸 그 방법을 어떻게 각 교회에서 실천에 옮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제안들은, 우리는 우리가 말한 선한 것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 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Philipp Jakob Spener, Pia Desideria, hg. v. Kurt Aland, 3. durchgesehene Auflage, 1964, davon 2. Nachdruck, 1982, 8, 17-29 이하 '경건한 요청'으로 씀)

"기독교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익숙해지도록 해야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오히려 실천에 있다. 특별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구주께서도 사랑이 제자의 바른 표식이라고 권면하셨다."('경건한 요청', 60, 31-61,3)

 

신앙의 실천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에만 교회는 갱신될 수 있다. 스페너가 본문의 세 번째 부분에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안했는 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하나님 말씀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다섯 제안을 꿰뚫고 있는 것이 또 하나님 말씀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우리 속에 있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 스스로에게는 원래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만일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역사를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경건한 요청', 53, 31-34)

'경건한 요청'은 서문과 본문으로 짜여 있다. 본문은 다시 셋으로 나뉜다. (1) 타락한 교회의 현 상태를 진단함. (2) 교회 앞날을 전망함. (3) 타락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안함.

 

스페너는 사회 계층을 보는 당시 루터교의 삼계층론을 따라 교회의 현상태를 진단한다. 세속 정치가와 성직자와 평민이 그 세 계층이 다. 스페너는 세 계층을 진단해 가면서 교회가 타락한 근본 원인을 찾아간다. 스페너가 찾아낸 원인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Der wahre Iebendige Glaube)이 없다는 것이었다.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란 교리+삶, 칭의+성화, 믿음+믿음의 열매였다.

 

둘째 부분, 교회의 앞날을 전망하면서 스페너는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재림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두 가지가 남아 있다고 보았다. 바레론(로마 카톨릭 교회)의 멸망과 많은 유대인의 개종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 면 하나님께서 교회에 약속하신 더 나은 시대가 온다고 보았다. 스페너는 천년왕국론이 문제되던 그 때의 상황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 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더 나은 시대"가 천년왕국을 뜻한 것임은 분명하다. 스페너는 천년 왕국이 있은 다음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후천년설) 믿었던 것이다. 이런 소망을 토대로 스페너는 교회가 갱신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제 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구체적 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본문의 셋째 부분에 나오는 여섯 가지 제안은 이렇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더 풍성해져야 한다. (2) 만인 제사장직(스페너의 표현으로 "영적 제사장직(Das geistliche Priestertum)"을 부지런히 실천해야 한다. (3) 기독교의 본질이 지식에 있지 않고 실천(사랑)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종파간의 논쟁과 변증에서도 사랑의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5) 신학교육을 성서주석과 성령을 통한 거룩한 삶 중심으로 개혁해 야 한다. (6) 신학과 목회 현장이 연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특히 설교의 훈련이 필요하다.

 

첫 번째 제안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가 나머지 모든 제안을 꿰고 있다. 영적 제사장직의 일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학교육에서 성서 주석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데, 학문적인 이유에서만 아니라 삶의 변화를 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신학 교육의 장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작은 모임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Collegium pietatis an der Universitaet). "설교 강단은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뽐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 게 그러나 강력하게 설교하는 곳이다."('경건한 요청' 79, 17-19)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더 풍성해지는가? 스페너는 작은 모임을 통하여 말씀을 살아 움직히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스페너가 제안한 방법이 저 유명한 '경건의 모임'(Colleg -ium pietatis)이었다.

(4) 경건의 모임 (Collegium pietatis)

스페너는 고린도전서 14장 소그룹 성경모임을 제안한다. 말씀을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하려는 것이 이 모임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옛 사도들이 했던 방식을 다시 교회 모임에 시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정규적인 설교 예배 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묘사했던 것과 같은 모임을 하는 것이다."('경건한 요청', 55, 13-17)

스페너는 교회안에서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열심히 가진 사람들을 먼저 모아 이런 모임을 함으로써 점점 전체 교회가 갱신될 수 있다 고 보았다. 경건의 모임은 경건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경건주의에 관한 처음의 문제들, 곧 찬성과 반대가 주로 경건의 모임 때문에 일어났고 경건주의 시대에 있었던 마지막 논쟁도 이것 때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스페너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스페너와 같이 경건의 모임을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서 분리주의자가 생겼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한 야콥 쉬츠(Johann Jakob Schuetz)였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페너 는 1686년에 드레스덴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다음 다음부터는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 다.

지금까지는 경건주의 연구에서 스페너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부터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경건한 요청'에서 스페너가 교회 갱신의 방법으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 었는데, 스페너가 경건의 모임을 포기했다면 교회 갱신에 관한 그의 본디 구도도 바뀌었다는 말인가? 스페너는 작은 모임을 통해 하나님 의 말씀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는가? '경건한 요청'에 밝힌 기본 구상을 수정했는가? 지금까지의 경건주 의 연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었다.

 

5. '경건한 요청'에 밝힌 사랑의 전개

 

(1)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교회를 갱신하려는 스페너의 본디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스페너의 근본구도는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 모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체 (대중교회 Volkskirche)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즈음의 정통주의가 '제도적인 방법(교회치리)를 통하여 일시에 대중 교회를 갱신하려고 한 것'과 뚜렷이 구분된다. 이런 스페너의 갱신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교회안의 작은 교회'( ecclesiola in ecclesia)다. 이 표현은 교회사에서 스페너가 처음 쓴 말이다. 스페너가 1675년 7월 23일에 사무엘 베네딕트 카르프쪼프(Samuel Benedikt Carpzov)에 게 보낸 편지에 이 표현이 처음 나온다(M.Matthias).

스페너의 본디 생각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려면 '교회안의 작은 교회'와 '경건의 모임'이 서로 다름을 살펴야 한다. '교회안의 작은 교회' 가 원리라면 '경건의 모임'은 이 원리에서 끌어낸 구체적인 한 가지 방법이다. 앞의 것은 상위 개념이며 뒤의 것은 종속 개념인 셈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바뀌어도 원리가 바뀌지 않으면 본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안의 작은 교회'란 표현은 1675년 7월의 편지에 처음 나오고, 스페너가 같은 해 가을에 단행본으로 '경건한 요청'을 출판하면서 쓴 서문에 그 '내용'이 나온다. '경건한 요청'의 서문이 1675년 9월 8일자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들을(목회자들: 역자) 헌신합시다. 각 목회자들이 개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들을 먼저 양육하여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 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점점 가까이 끌 수 있게 되며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신앙 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되어서 그래서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경건한 요청', 8, 25-36)

 

서론의 이 부분은 '경건한 요청' 모두의 핵심이며 요약이다. 경건주의의 교회 갱신 방법이 여기에 고전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통주의가 (1) 법적인 치리를 통하여 (2) 전체 교회를 한꺼번에 개혁하려고 했다면, 경건주의는 (1) 경건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앙의 헌신을 통하여 (2) 누룩이 퍼지듯이 점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스페너는 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죽는 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방법은 바꾸었다. 경건의 모임은 당시의 교회 제도 안에서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드레스덴 시절부터는 교리문답 교육을 강조하였다. 교리문답 교육은 당시의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된 모임이었다. 스페너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 원리에 근거한 또 다른 한 방법으로서 교리문답 교육을 사용했 던 것이다. 교리문답 밖에도 스페너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다른 방법들도 말했다. 심방, 가정 예배, 비정기적 인 만남 등 될 수 있는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대중 교회 안에서 작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교회화(Verkirchlichung)와 중용의 길(Die goldene Mittelstrasse)

스페너는 평생 목회를 했던 '교회의 사람'이었다. 교회 갱신을 위해 애쓰면서 스페너는 두 쪽에서 공격을 받았고, 또 그 둘과 싸웠다. 정통주의와 탈교회적 급진주의, 기존 교회가 병들었음을 날카롭게 보면서 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페너는 정통주의와 충돌했다. 그러나 한편 스페너는, 교회는 갱신될 수 있다고 굳게 믿음으로써 탈교회적 급진주의를 반대했다. 기존 교회는 벌써 개혁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바벨론이며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탈교회적 급진주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스페너는 이 둘 사이의 길을 걸었다. 스페너 자신은 이 길을 '중용의 길'(Die Mittelstrasse), 또는 '황금같은 중요의 길'(Die goldene Mittelstrasse)이라고 불렀다. 그 길은 기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도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믿는 길이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제도 권 교회밖에 있는 원리('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교회에 정착시키려고)교회화, Verkirchlichung) 애썼던 길이었다. 순수한 성도들만 모이 자는 작은 교회(ecclesiola) 사상은 교회 역사에서 아주 초기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소종파를 이루었다. 스페너 경건주의의 공헌은 이러한 작은 교회 사상을 대중 교회 안에(in ecclesia)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ecclesiola' 사상은 스페너가 개혁교의 탈교회적 경건주의자인 라바디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스페너는 'in ecclesia'에 더 강조를 둔 것이다.

 

6. 맺는 말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세로 변하는 포물선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시대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이 변화를 짧게 가장 잘 표현한다면 '객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다. 중세적인 구조에서 중요했던 객관성(신, 교회, 신앙, 전체, 교리....) 은 주관성(인간, 이성, 인격적 개인, 경험적 진리....)에 밀리고 있었다. 전통적 기독교, 내려오던 교회와 신앙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계몽주의에 와서 이런 커다란 변화의 과정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세적인 구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된 것은 계몽주의에서부터 라는 트뢸치(Ernst Troeltsch)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를 반대하는 무신론적 경향이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아른트와, 특히 스페너는 벌써 무신론이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이런 가운데서 기독교를 의미있게 변증하려던 운동이었다. 중세 때 신앙이란, 그 자체가 거대한 성례인 제도적인 교회에 그저 소속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인정하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바뀌고 있었다. 개개인이 그리고 개인의 인격성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러함'(객관)보다 '나에게 어떠함'(주관)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국가의 권력이 나 그 어떤 외적인 제도가 개인의 신앙과 양심을 강제할 수 없다는 근대적인 사상이 크게 흐르고 있었다. 1600년 즈음에 있었던 '경건성 의 위기'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른트는 교리보다 삶이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방향의 신앙이 실현될 수 있는 '마당'이 없었다. 그 때까지 공적인 신앙 모임의 거의 유일한 방식은 예배 뿐이었다. 예배라는 마당은 한 사람이 설교하고 나머지는 수동적으로 듣는 형식이다. 개인은 결단할 수 있는 여건이 넉넉하지 못하다. 스페너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말함으로써 아른트의 방향이 구체적으 로 실천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었다. 작은 모임에서 각 개인은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모르면 묻고, 서로 가르치고.... 그리하여 신앙적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경건주의는, 소그룹 모임 사상을 말한 스페너는 변하는 당시의 큰 흐름을 정확하게 읽으며 그 가운데서 기독교 복음과 교회의 존재의미를 찾으려던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운동이었다.

 

스페너는 정통주의 처럼 변화에 대하여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변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편, 변화를 무조건 받아들이 지는 않았다. 성서에 근거한 전통과 이 시대의 흐름을 이으려고 했다. 이것이 스페너 경건주의의 요청이었다. 이 요청은 당시의 현실속에 서 수용되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근대사상의 흐름이 과학의 발전이나 계몽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이나 프랑스 시민 혁명... 등으로 나타났는 데 경건주의의 본디 요청은 이런 것들과 만나면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그길 은 되돌이킬 수 없는 세속화의 과정이 진행되는 세계에서 교회의 존재와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찾으려는 길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여러 가지 점에서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와 비슷하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경건주의가 그 즈음에 교회에 있었다고 본 문제점들 그래서 경건주의가 해결하려고 애썼던 문제점들과 비슷하다. (1) 시대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2) 교회의 도덕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위, 교리와 도덕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위, 교리와 삶의 분리 현상이 심각하다. (3) 이미 오랜 이야기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정보화 시대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더 사라져 가고 있다. (4) 신학과 목회의 괴리 현상이 심각하다. (5) 교회의 문제는 지도력에 결점이 있는 것이다. 지도력을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6) 평신도의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 (7)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삶에서 살아 있을 때 해결될 수 있다.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는 한국 교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데 꼭 필요한 여러 가지 작업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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