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세계사에서 유래가 없는 가장 비범한 일이 약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다. 우주 만물의 창조자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 인간의 역사 한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비극적인 운명과 저주와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처리하고,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의 생명과 의와 자유를 내어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죄와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이 세상에 용서와 해방, 화해와 평화, 그리고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던 전적으로 유일하고도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이 행위가 나사렛 사람 예수 안에서 일어났고, 이로써 인류 역사에서 다른 모든 사건들을 작아 보이게 하였다.
서기 2,000년은 인류 역사에 전혀 새로운 시작을 알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천년 단위의 세월을 세 번째 맞는 새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두 번째 밀레니엄(Millennium)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은 천년에 한번 주어지는 은총의 때이고, '맘몬'의 세력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는 세계사의 방향을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되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이 카이로스적(kairos) 전환기에 서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우리 세대에 허락하신 이 마지막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근본주의적 묵시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암흑 세계가 될 것이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마25:26)이란 호된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해방과 화해의 선교에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다. 우리는 헌신적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언제나 '메타노이아', 곧 '방향전환'을 요구하셨다(막1:15). 메타노이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며 철저한 방향전환과 거듭남을 요청하신 그 비밀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라는 한 가난하고 나약한 인간의 인간성 안에서 감춰진 상태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방향전환하지 않은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 글에서 우리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춰진 모습으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이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해명과 이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메타노이아'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늘'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를 꺼리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다. 그러므로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메시지를 같은 모양으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모든 설교와 비유적 교훈의 주제도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의 공적 활동의 중심도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무런 정의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그 어느 곳에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이 개념을 아무 데서도 정의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이 개념이 뜻하는 바를 익히 아는 것으로 전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전해 주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 대해서 주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애타게 고대했던 하나님 나라를 친히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가 선포하고 친히 가져다주었던 하나님 나라, 예수 안에서 오신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구약의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이 대망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구원과 자유의 총괄개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낡은 "세계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세계의 존재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며 갱신시키는 하나님의 활동의 능력과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도 또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단지 예고되고 예시되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서 말하고 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말씀하는 것 안에서, 그리고 그가 말씀하는 것으로부터 현재적인 사건이 된다.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읽으시고 난 후에 그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눅4:18-9). 그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미래에서만 실현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역사, 화해와 해방의 역사, 완전히 실현된 최종적, 결정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 안에서 도래한 그 나라는 "복음서에서 바로 기쁨의 총체로서 즉 결혼 예식, 축제의 식탁, 그리고 추수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잔치를 벌인다. 환성을 지른다. 춤을 춘다." 여기서 전혀 새로운, 유래가 없는 시작이 이루어진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되고, 저는 사람이 제대로 걸어다니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게 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눅7:22이하, 마11:5이하). 단지 예수의 말씀만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특히 그의 치유와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그렇게 이해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눅11:20). 수많은 세대가 간절히 고대했던 그때가 지금 다 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때를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눅10:23이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장차 이루어질 새 세계의 권능(히6:5)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이점에서 예수를 "'인격'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 (autobasileia)라고 표현한 오리겐(Origen)은 핵심을 지적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역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 한번 결정적으로 '육신이 되었다'. 그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눅17:21) 있었고 또한 현존한다. 이와 같이 예수의 현존과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이 전적으로 동일시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한다(참고, 마10:32-33).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3:18).
그러나 분명히 신약성서에는 소위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의 긴장이 보존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본문들이 이미 생생하게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어떤 본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명백하게 미래적 사건으로서, 그 나라의 도래가 마지막 날의 묵시문학적 사상과의 관련에서 기대된다고 말한다(참고 막13장). 신약성서 학자들이 미래적 종말론이냐, 또는 현재적 종말론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래적 표현방식을, 또는 현재적 표현방식을 결정적인 것으로 강조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로호만은 이런 양자택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신약성서의 종말론이 현재적-미래적 형식의 '이중적' 종말론임을 확인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현실성에 있어서는 현존하고 있지만, 그 최종적인 계시에 있어서는 아직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고 있고 현재를 온전히 규정하고 있다. 복음은 먼 미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미래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건이 되고 돌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지금을 하나님의 현재요 구원의 시간으로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심판이다."
3.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복음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선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눅6:20).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된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몰트만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이란 "배고픈 사람들, 실직자들, 병자들, 낙심한 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포괄"하는 집합개념이다. "그것은 예속되었고, 억압받으며 굴욕을 당하는 백성(ochlos)을 말한다." 가난한 자들은 병자들과 불구자들이며(마11:2-5), 할 일 없이 시내 거리와 골목에서 서성이는 자들이다(눅14:21-23). 그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다(눅6:21).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충분히 묘사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옷까지 빼앗아가고자 한다(마5:40). 가난한 자들은 가난 때문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과 내면의 삶까지를 부자들의 손에 맡기는 소외를 당한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얼굴이 없는 자, 노동력, 인간 자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실패자, 실직자, 낙오자, 국외자, 추방된 자, 억압받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 비인간화된 자들, 가진 것이라고는 알몸뚱이밖에 없는 그들에게 먼저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영적인 가난을 수반하지 않는 물질적인 가난을 부정적인 상태로 이해한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눅6:20)고 선언한 누가와 달리 마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5:3)고 선언한다. 마태와 누가의 이런 차이는 마태가 원칙적으로 영적인 가난에 관심을 가졌고 누가는 사회-경제적인 가난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차이는 이스라엘에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 이중적 특징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가난이라는 개념은 없어진다. 따라서 마태는, 한스 큉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누가에 의존해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누가는 마태 없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로 여김을 받았고,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는 칭찬했기 때문이다(눅19: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원칙적으로 가난한 이들 편이었다. 예수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이 훔쳐갈 수도 있는 재물을 쌓아 두며, 재물에 마음을 쏟는 부자들을 질타했다(참고, 마6:19-21). 예수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며 결단을 촉구했다(마6:24). 재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곳, 사람이 돈을 물신(物神), 즉 '맘몬'으로 섬기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너희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눅6:24)는 예수의 불행선언이 내려졌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해 부자를 무시하고, 비천하고 치욕을 당한 자들을 위해 높고 힘있는 자들을 무시했다. 그와 같이 그는 "모든 가치들을 뒤엎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다른 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인정했다." 그는 낮은 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체계를 경멸한다. 그러나 예수가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편을 드는 것은 그들이 정의롭고 미덕을 지녔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미래와 역사를 짊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며 단지 자본주의 맘몬 숭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적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까지도 그들을 버린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르짖을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요청을 그만두거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버렸을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고 혁명이나 국가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게 될 때,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렘17:5)다면, 그들은 돈이 없다 해도 부유한 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부유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안이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돈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고 돈에서부터 충분한 위로와 소망을 얻는다.
그런데 가난한 자의 반대 개념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단순히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그를 희생시켜서 자기의 부를 꾀하는 '폭력을 행하는 자'이다. 부유한 자는 힘을 가지고 있다(참고, 눅1:46-54). 그는 곡식을 저장할 수 있고 그리하여 물가를 조작하고 올릴 수 있으며 이로써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세리가 부자인 것은 그가 속이기 때문이요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증대하기 때문이다(눅19:1-10). 맘몬은 바로 이 부유한 사람들의 하나님이다. 맘몬은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불의한 영적 권세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권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를 향하게 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마6:21). 맘몬은 사람을 얽매어 재물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도록 사람을 예속시킨다. 그러므로 맘몬을 섬기는 자들은 맘몬의 속성을 닮을 수밖에 없고 불의한 자, 폭력을 행하는 자로 드러난다. 참으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막10:25). 이와 같은 엄격성을 고려해 볼 때, 제자들이 놀라면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서로 말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부유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눅6:24). 이것은 복수의 칼을 가는 노예들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의 선포이다. 그런데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살게 하려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불을 지나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부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맘몬의 노예가 되어버린 부자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자기 만족적인 부유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가난을 의식하고, 재물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어서 가난한 자들과의 친교에, 특히 그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가난하게 만든 자들과의 친교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비로소 그들에게 열려진다. 우선 '편파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된 복음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힘있는 자와 무력한 자를,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가난의 친교에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4. 메타노이아를 통한 해방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예수는 이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 즉 근본적으로 인간 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는 그런 자세를 요구한다(막1:15). 맘몬에게서 "떨쳐 일어나"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된 주님이심을 "고백"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결단이 요구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맘몬'을 선택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예수 자신도 가족과 출세와 집과 고향을 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정적, 사회적 관계를 끊고 자기를 따르라고 불러내었다. 물론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가정과 직업과 고향을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두느냐 이 세상적인 이익에 두느냐 하는 근본적 결단에 맞서게 한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과 인간의 죄악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즉 사랑으로 그 세상과 타인에게 마음을 돌려야 한다. 예수는, 쿰란 교파처럼, 금욕적인 세계 현실로부터 도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악의 세계 안에서, 죄된 인간을 위하여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라고 하였다. 단순히 세계를 부정적으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세계에 긍정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이다(참고 마22:37-40). 세상 안에서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나날이 세상과 그의 이웃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요구에 언제라도 즉각 대응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메타노이아와 직결되어 있다(막1:15).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 속에 앉아 있는 그런 외적인 수행이나 고행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적인 내적 전환이요 전인적인 하나님에로의 '방향전환'을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또한 "복음의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 철저한 변화는 구원의 시대가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요, 철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죄와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수행할 자세를 표현하는 회개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점이 예수의 선포를 세례요한의 선포와 구별짓는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도록 하는 반면에,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권유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는 위협이나 재앙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원과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였고, 그것은 나쁜 소식(dys-angelion)이 아니라 기쁜 소식(eu-angelion), 곧 복음이었다. 이렇게 예수에게서 은총이 회개에 앞선다는 것을 칼빈은 인상깊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회개를 진심으로 할 수 없다...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도 없다."
칼빈에 의하면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다. 회개는 복음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하나님의 응징, 처벌, 진노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어나지는 않는다. 회개의 근거는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자비, 무한한 사랑에 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둘째 아들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위해서 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바로 그런 아버지가 하늘 아버지이심을 예수께서는 가르쳐주셨다(눅15:11-32). 따라서 회개는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발견한다. 삭개오는 그 자신에게 오늘 임한 구원이 너무 기뻤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인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말한다(눅19:8). 죄 많은 한 여인은 예수의 자비하심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발라 드렸다(눅7:36-39). 누구든지 자신을 예수께 맡기고, 그의 나라를 믿고, 회개하고 그를 따르게 될 때, 이러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삶의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회개는 결코 인간의 영웅적인 노력과 결단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음과 용서로써 믿음에서 나오는 새 출발인 회개를 가능하게 하신다. 회개는 복음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잔치에 참여하는 것에서 일어난다(눅14:15-24). 여기서 초청된 자는 구원을 선사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의해서 이제 각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기 시작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죽는 어떤 포기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향해 즐겁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적인 삶의 미래가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초대를 신뢰하고 떨쳐 일어나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죽음과 억업과 악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생명과 의와 자유의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갖게 된다. 여기에 맘몬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있다. 그것은 맘몬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거저 주시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요청한 회개는 사적인 생활과 종교의 범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회개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적용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회개는 영혼과 몸,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개인의 삶의 방식과 사회의 모든 조직을 포함한다." 회개는 그 경향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나라만큼 보편적이다. 따라서 죽음과 악의 세계에서 생명과 자유의 하나님 나라로 되돌아가는 회개는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 종교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으로 구분되어 이해되고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과 함께 전 사회의 구조적인 갱신과 혁명적인 변혁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새로운 천년은 어떠한 모습일까? 미래학자들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자료들과 경향성을 가지고 미래로 외삽(外揷)한다. 그들은 경향성을 분석하고, 최대한 계산하고, 개연적 판단을 통하여 미래를 탐색한다. 그런 그들에게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일한 직선적 시간대 위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미래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현재를 미래로 연장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억누른다.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란 없다. 그들에게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망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죄된 인간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이 나오겠는가?
'전혀 새로운 것'은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안에서 오셨고 지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저항할 수 없는 권능으로(막9:1) 낡은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와 구원의 사건을 일으킨다. 기존의 낡은 세계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세계의 존재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며 갱신시킨다. 예수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하시며, 맘몬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떨쳐 일어나 방향전환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요구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방향전환과 결단이다. 우리의 안일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삶의 태도를 떨쳐 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생명과 자유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적인 책임과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방향전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죽음으로 내모는 맘몬의 세력에서 구해낼 수 있고 새로운 천년을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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