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겨자씨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 김영선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54

겨자씨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

 

 

김 영 선

 

 

 


목 차

 

 

Ⅰ. 서    론
   A. 연구의 목적과 중요성
   B. 연구 방법 및 범위
   C. 연구사
Ⅱ. 예수의 복음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비유 
   A.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성격
   B. 예수의 비유법 
   C. 하나님 나라의 비유법적 이해
Ⅲ. 가라지 비유의 구조와 내용 분석
   A. 마태복음 13장에서의 가라지 비유의 위치
   B. 가라지 비유의 구조와 해석
   C. 내용 주해 (마태복음 13장 24∼30절)
Ⅳ.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신학
   A. 하나님 통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B. 하나님 나라가 갖는 심판 사상
   C.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 
Ⅴ. 결    론
   참고문헌
   영문초록

 

 

 

 


Ⅰ. 서  론

 

  A. 연구의 목적과 중요성

  본 논문은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 중에서 24-30절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라는 것에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해석들은 세부적으로 상당히 다양하지만 몇가지 특징적인 형태들을 갖는다.
  어거스틴으로부터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견해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 교회와 동일시되고 있으나, 이런 견해는 현재 카톨릭 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어질 수 없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순수 예언적 종교 - 하나님의 부성, 인간의 형제됨, 개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 등 - 로 이해한다. 예수의 교훈 속에 나타난 묵시론적 요소는 그의 실제적인 종교 메시지의 핵을 담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개인의 종교체험 - 하나님께서 개별 영혼을 다스리심 - 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 왔다.
  대다수 학자들의 총의를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국이 전적으로 미래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미 그 능력이 체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새벽이 일출을 앞서는 것 같이 왕국의 표증들은 현재하지만 왕국 자체는 현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예레미야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예수의 전사역을 왕국이 실현된 사건으로 이해하여, 심지어 세례요한도 성취의 때에 속한 사람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고 구원의 때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와 그의 귀신 축출 기적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뚫고 들어왔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부활과 재림을 포함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스는 예수가 그의 부활, 재림, 왕국의 완성을 하나님의 승리가 나타나는 단일 사건으로 간주하였다는 도드의 재의를 따른다.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새로운 견해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구약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음이 분명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날카롭게 구분짓는다. 후자는 지상에서의 천국(하나님) 통치이며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지상적 신정 왕국을 우선적으로 지칭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국의 제시를 거절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을 세우는 대신 믿는 자는 누구나 안식과 봉사를 제공받을 수 있으며, 인종적인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앙가족을 형성할 새 메시지를 소개하였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천국 비유가 이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천국은 이스라엘이 회심하고 다윗 왕국의 회복을 예언한 구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실현되어질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명백한 가르침을 비유라는 문학형태로써 사용하였다(막 4: 33, 34).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의 1/3이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비유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비유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지금까지 살펴 본 하나님 나라의 견해에 대하여 마태복음 13장 24-30절에 나타난 가라지 비유를 통해 살피려고 한다.
  비유란 일상생활의 친숙한 상황을 예증함으로써 화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말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이런 비유의 독특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이 비유들은 단순한 예들이 아니고 예수의 전체 사역의 핵심이 되었다. 특히 예수의 가라지 비유 속에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비록 감추어진 형태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 증언을 하였다. 또한 이 가라지 비유는 마태복음의 특수 자료이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하여 마태 기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의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비교하여 그 중요성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가라지 비유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만이 해석 본문을 가지고 있는 점으로 미뤄보아도 가라지 비유에 대한 마태 기자의 각별한 관심을 알 수 있으며, 의미의 적용에 있어서도 가라지 비유 만이 하늘나라(Kingdom), 씨 뿌림(sowing), 분리(separation)의 세 요소를 결합하고 있는 점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보다 한층 복잡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가라지 비유는 어떤 비유보다도 생생하게 마태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선과 악'의 혼합으로부터 야기되는 갈등과 문제점은 마태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의 끊임없는 관심과 촛점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점에서 가라지 비유는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나아가서는 인간의 실존적인 차원까지 폭넓게 포함하고 있는 비유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마태복음의 가라지 비유를 연구하여 예수의 신약성서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같은 연구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규명하고 교회의 복음 선교와 구원의 사역, 그리고 신학 연구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를 중심으로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구이다. 따라서 비유 해석에 대한 성서 연구 방법이 중요하다. 성서 연구 방법들에는 자료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그리고 최근의 사회학적 성서해석 방법등이 있다.
  자료비평은 복음서가 형성되던 기록단계의 연구에 그 중점을 두며,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편집하기 위해서 어떤 기록 자료들을 사용하였는가를 밝혀내려고 노력한다. 특히 공관복음서 사이에 나타나는 정확한 일치나 큰 차이점이 나타나는 원인을 분석하고 그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가정을 찾고자 한다.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안되었고, 특히 두 문서설이 중요하다. 이후 이 문서설에 대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 것이 스티리터(B.H. Streeter)의 네문서설이다.
  양식비평은 구전당시의 상황에 관심을 집중한다. 우선 신약의 여러 문서들을 문학 장르별로 분류하고, 또한 전승자료의 가장 작은 단위들을 문자 이전의 구전 시대에 지녔던 양식 혹은 모양에 따라 분석한다. 그러나 양식비평 학자들은 비유들을 해석하는 데는 노력하지 않고 대신에 그것들을 양식에 따라 분류하고, 그것들의 구조적, 형태적(stylistic) 특징들을 기록하며, 그것들이 기여했다고들 여기는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자리)"을 결정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시도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특정한 이야기와 가르침의 일정한 양식을 취하며, 그 양식은 그것의 삶의 자리 혹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본다.
  사회학적 성서해석이란, 성서 이면의 사회적 세계를 밝히는데 목적을 둔다. 그래서 동시대라고 하는 시간의 평면 위에서 여러 사회적 사항들, 사회제도, 기구, 통치제도, 이해집단 등등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밝힌다. 이런 방법들은 역사와 사회라는 차원에 강조를 둔다. 따라서 본문의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약했다.
  편집비평은 성서 저자들의 자료사용 방법을 분석하여 그 신학적 의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저자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창조적이고 의도적으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구성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도한 주장이나 가설을 펼침으로 부당한 적용에 다다를 가능성이 있다. 이 원리를 제대로 사용한다면 매우 긍정적으로 성서 연구에 공헌할 것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상황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비유들을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마태 역시 그가 속한 그 교회의 상황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에게 전수돼 내려온 비유들을 채용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그 자신의 시대와 그 자신의 신학에 기여하도록 배치된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들이 마태의 복음서의 문맥 내에서 연구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신학을 반영하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마태의 가라지 비유를 마태 자신의 견지로 이해하여 분석하기 위하여 편집비평의 방법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문의 의미와 예수의 메시지를 살펴나가고자 한다.
  그 범위에 있어서 Ⅱ장에서는 예수의 복음 선포, 특히 비유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성격을 찾아볼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라고 이미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비유에 대한 개념적 정리를 해 본 후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비유의 독특성을 찾아볼 것이다. 그런 뒤 예수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격과 신학을 정리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본 연구의 중심 주제인 가라지 비유의 의미 파악을 위하여 우선 마태복음 13장의 구조를 살피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13장을 마태복음의 핵심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장의 구조를 살핀 후에 13장에서의 가라지 비유의 위치와 구조를 연구하고 난 후, 가라지 비유 주석을 통하여 비유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정리하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가라지 비유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통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어서 하나님 나라가 갖는 심판 사상을 다루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연구하며,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구체적 사상을 정리할 것이다.
  Ⅴ장에서는 결론으로서 가라지 비유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총괄 정리하고자 한다.

  C. 연구사

  신약 연구의 전 영역에서 어떠한 주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보다 더 다양한 이론들을 유발시키거나 더욱 격심한 논쟁을 야기시킨 적이 없었다. 이런 사실은 특히 지난 50년 동안에 주지되었던 바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이 성서 전체에 내포되어 있는 중심 메시지이며, 그 사상은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에서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곧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입장은 시대와 학자들마다 서로 그 차이의 현격함을 보이고 있어서, 그 강조점의 지나침에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케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내재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해석했으며, 하르낙(A. Harnack)은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리츨(Albrecht Ritschl)은 자기 자신의 고유적 개념으로서 예수의 설교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께서 창건하시어 복음의 사랑의 법을 실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로 구성되는 윤리·종교적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교회가 진척시켜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공동체였다.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을 거부하고,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리츨이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공격하였다. 바이스에 의하면 리츨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의 근원은 칸트의 도덕 왕국에 대한 견해와 계몽주의 신학에서 유래된 것임을 주장한다. 종교사학파의 대표자인 바이스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는 오직 예수 당대의 사상계, 특히 후기 유대 묵시 문학들의 배경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윤리적 이상이라든지, 발전도상에 있는 내재적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개념들은 궁극적으로 기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국을 전제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대사건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나라 자체는 결코 이 세상에 이미 계시된 실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였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 나라는 오직 묵시문학에서 대망하여 온 새로운 세상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 자체는 현시대의 파국적인 격동 후에 계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말론적 이해에 있어서 전형적인 대표자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이다. 그는 바이스의 해석을 확장하여 종말론적 개념이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전 생애와 사역을 통하여 종말론적 기대감으로 충만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복음 전파가 완료되기 전에 세상에 종말이 올 것으로 믿었으나, 실제로 성취되지 않음으로 재림의 지체 혹은 연기로 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신뢰하던 종말론의 바퀴에 눌려서 의미없는 생애를 마쳤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메시야로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선포하고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다가 자신의 위업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죽은, 실제적인 역사적 과제들에 의해 충격을 받고 그 자체 안에서 스스로 균열된 인물로 이해하고 있다.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인 행위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배경에서 슈바이처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은 없고 미래성만 있다는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전혀 별개의 윤리가 통용되는 초월적인 어떤 세계이며 시간적으로 볼 때, 현재보다는 항상 미래의 시점에 있는 것이다.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하나님 나라의 한 측면 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을 파악하지 못했다.
  다드(Dodd)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사역 가운데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주장한 대표적 학자이다. 다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서 통치하는 것"이며,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자기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었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하며,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나타내는 용어는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하여 미래적 요소를 부인하였다. 다드는 그 나라가 무시간적인 것으로서, 올 세상의 것들인 하나님 나라, 심판,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궁극적인 일들이 이미 예수의 시대에 현존하였고, 그 영향이 지금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되고 파급된다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하였다. 다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 당대에 현존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때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라는 그 이후 계속 현재 상태에 있으므로 지금 우리에게도 현존한다는 것이다. 다드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현재의 종교적 경험의 문제로 간주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다드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만을 주장한 슈바이처의 일방적인 견해를 극복하는 업적은 인정되나 그 또한 일방적으로 치우친 것이다.
  불트만(Bultmann)은 실존적인 종말론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경험될 문자적인 사건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달하리라는 기대는 있으나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불트만도 현재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제 견해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긴장된 양면성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서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래드(Ladd)는 현대 성경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그 일련의 말들 -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완성 -을 어떻게 고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열쇠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교훈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징을 찾는다면 비유의 사용이며,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되고 있어서 그 중요성을 더해준다. 비유의 해석에 있어서 1888년 율리허(A. Julicher)의 『예수의 비유』란 책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우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율리허는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점을 반박할 수 없도록 증명하였다. 그것이 C.H. 다드의 『천국비유』란 책이 출판된 이후 비유는 삶의 정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제시해주었다. 그후 비유 연구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예레미아스의 『예수의 비유』란 책이 나와서 비유 해석학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역사 비판 방법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와 그 무오성을 해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다드의 문제점은 양식사 비판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과 천국 개념을 오로지 현재적 측면에서만 봄으로써 미래적 측면을 제거 내지는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알레고리적 비유 해석은 비판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루터의 말대로 "원숭이의 잔재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예수의 천국 비유 중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상과 같은 학설을 종합하므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신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균형있는 신학을 정립할 것이다.


Ⅱ. 예수의 복음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비유


  A.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성격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하셨는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마가복음 1: 14, 15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시어 수행하신 활동에 대해 소개해준다. 마태와 누가는 동일한 메시지를 상이한 용어들로써 표현한다(마 4: 17, 23; 9: 35; 눅 9: 11). 우리는 누가복음 4:43의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서 그의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전파한 말씀(눅 8: 11)은 또한 "그 나라의 말씀"(마 13: 19)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전 케리그마(Kerygma)로 요약되는 복음은(눅4: 43; 8: 1; 16: 1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취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전체 설교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사도들의 설교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그 뜻과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달만(G. Dalman)은 '하늘 나라'가 히브리어           (Malkuth Shamayim)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라는 말로 불렀는데 이는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는 동의어로 보고 있다. 스트라우슨(W. Strawson)은 그의 저서 『Jesus and the Future』(1959, 67)에서 '하늘나라'가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마태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가 동의어이지만, 각각 하나님의 통치의 다른 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하늘 나라'는 하나님 통치의 초자연적 특성을 강조하고, '하나님 나라'는 지금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장래에 완성될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가 위의 두 어구를 모두 사용했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를 동의어로 간주했을 것으로 보는 달만의 견해와 입장을 같이하며 본 논문을 전개한다.
  또한 신약의 헬라어         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나라, 또는 하늘로부터 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라는 용어는 왕권, 혹은 왕의 지배권과 왕국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왕권(kingship) 곧 왕의 지배권 혹은 하나님의 주권(the supremacy)을 의미하고, 구체적인 개념으로는 왕국을 의미하며, 공간적이며 실제적인 국가(a static entity)를 나타낸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추상적인 의미로 또는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추상적 의미가 더욱 흔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삼중의 본질(the threefold essence)을 소유한다. 첫째는 구원-능력의 범위, 둘째는 의(righteousness)의 범위, 셋째는 축복의 상태의 범위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고자 한다.
    1.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배경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사상이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또한 초대교회와 신약성경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고자 한다.

      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구약성경은 그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사상으로 뒤덮여 있다. 또한 십여가지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의 소망으로 일관되고 있다. 또한 구약은 그 분량에 있어서나 관심의 강도에 있어서 거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존재에 치중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논의를 구약의 큰 역사적 흐름과 연결지을 때, 자연히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와 끊임없이 맞닥드리게 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나라'(역대상 28: 5)라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개념을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왕 되심, 혹은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들이 있다. 특히 구약의 왕권 사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며, 전세계의 왕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에덴 동산에서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처음부터 확립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자신이 창조주로서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틀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절대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 대한 서술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아담과 하와), 하나님의 처소(에덴 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하에서(하나님의 말씀) 라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 동산을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지켜지고 다스려지는 거룩한 지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인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나님 나라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근원을 언급할 때 예외없이 아브라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적-혈통적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에 대해 구체적 내용을 제공하는 기록은 창 11: 10이하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 핵심 내용은 창 12: 1-3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되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 하시며 그 땅에서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되고 세계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한 축복의 나라를 세우시며, 세계 모든 민족이 그 축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를 세우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므로 명칭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창 12: 1-3과 창 11: 1-9의 관계를 살피면 그 구조와 내용이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 본문이 다같이 나라 건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자의 나라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신 반면 후자의 나라는 인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본문에는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후자는 인간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려는 오만함과,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시도했음을 보인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을 위한 인간 중심적 나라였다. 그결과 단일 언어를 사용하던 인류 공동체가 언어 혼잡이 초래한 내적 통일성 붕괴를 통하여 여러 민족으로 분열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맞게 된다. 이와같은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브라함 선택은 불가피했다.
  아브라함의 후사의 선택에서, 하나님은 롯 계열을 상속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며, 충직한 종이었던 엘리에셀도 제외시키고 오직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미 자녀 생산이 불가능한 사라에게 말씀과 능력을 주시므로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이삭이 상속자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하심과 하나님의 이적적 능력에 의한 출생임을 밝힌다. 또한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부자연스러운 선택이 되는데, 이것은 우주적인 통치의 개념에 응하여 발생된 것이며, 이 통치는 백성들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통치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노예로 살아가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활동들 가운데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다.
  사사시대에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8:23)는 말로 그의 왕위를 거절한 일이 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의 다스림이 있는 나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다.
  솔로몬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덟 번 왕조가 바뀌었으나 남왕국 유다는 단일 왕조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에 친히 개입하셔서 율법을 따르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반대로 율법을 떠난 타락한 자들은 징벌로 다스리심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현재적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로가 되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역사적(historical)인 이 세상적인 다윗 왕국의 영광이 회복되고 이스라엘이 자기의 적들에 완전한 승리를 성취하는 역사적 힘들에 의해 영향받을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다. 이런 사상은 후기 묵시문학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지상적 왕국 사상을 비판하며, 그렇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의 하나님 나라를 제시한다. 그래서 인간의 계획에 의해 수립되는 국가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희망이 있다고 선언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 개념을 명백하게 제시해 준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이스라엘 국가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다니엘이었다. 다니엘 2장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왕국, 세상의 모든 왕국을 무너뜨릴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역사 속으로 하나님이 격변적으로 들어오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적 질서는 구체적이며 지상적이며,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 밖의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이 기대되는 세상 - 질서(world - order)는 종류상 현재의 것과 다르다.
  이와같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현재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며, 또한 예언을 통하여는 미래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신약에서처럼 일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도래하는 그 나라는 자기 백성을 회복하고 반대 세력을 물리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대망을 성취하는 나라, 그리고 우주적 지배를 성취하는 나라인 것이다.

      ⑵ 후기 유대교 문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야웨의 왕직에 대한 언어적, 개인적인 발언들과는 대조적으로 후기 유대문학에서는 거의 일정하게 malkuth-shamayim(하늘들의 나라)라는 추상적 표현이 발견된다. 그것은 앞서 살폈듯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치 않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으므로 shamayim이란 단어가 하나님이란 단어의 완곡어로 간주될 수 있다. 이 malkuth-shamayim이란 표현은 후기 유대문학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모든 인간들 위에 임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의미하여, 인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피조물이란 사실을 암시하며, 온 인류가 거부하였던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 안에서 다시 인정받게 되고 이스라엘 속에서 고수된 통치이다. 둘째, 좀 더 광범위하여 이스라엘을 이교의 세력에서 해방시키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께로 복종시키게 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인류들에게 충만히 실현될 하나님의 왕직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고 다윗의 집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자의 개념은 위경 문학가운데 하나인 『솔로몬의 시편』(The Psalms of Solomon)에서 특징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여기서는 미래의 대망들이 지상적이고 국가적인 성격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의 위대한 시기의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특성이 더 강조되는 후자와 같은 개념은 『열두족장들의 증거』(The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와 같은 작품에서 국가의 미래에 관한 대망은 초자연적인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올 메시야 왕국은 전 우주의  구원, 죽은 자들의 부활, 전 세상에 대한 우주적인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낙원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포함한다. 『바룩의 묵시록』(Apocalypse of Baruch)에서는 두 개념이 혼합되어서 마지막 세대의 지상 메시야 통치 후에는 초월적이고 천상적인 종말론에로의 전이로 나타난다. 그러나 『제 4 에스드라서』에서는 현세가 갱신되고 다시 태어날 지상이 세상의 심판 후에 이 세상의 새로운 시대의 자리에 다시 차지하게 될 것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구약에서처럼 종말적 성격을 가지는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역사의 궁극적 결과로서 마지막 구원단계로 보고 있다. 그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종말적 미래 희망'에 대하여 우리는 그 양상을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표로서 그들 스스로가 천국의 멍에를 지는 것이다(토라에 대한 순종과 쉐마를 매일 읽고 암송함). 둘째, 메시야적 왕국이 이스라엘에게서 성취된다는 기대이다. 셋째, 순간적으로 나타날 우주적 천국에 대한 묵시적 기대이다. 이 사상의 원형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세상 제국, 하나님의 나라, 인자 사상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의 기대하는 왕국은 모든 지상적 존재가 없어지면서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을 통해서 이룩되는 미래적 왕국이다.
  유대교 문헌은 구약에서와 같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왕권 이외에 이스라엘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 나라가 세상적이고 일시적이라고 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적이고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초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변함없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인 특성이었다.
  그 나라가 세상적이고 역사적이라고 이해한 자들은 메시야가 지휘하는 군사적 행위를 통한 정치적 회복에의 기대를 하였으며, 이 기대가 무산되고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지 않았을 때, 동조자를 규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로마의 통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정치적 메시야 사상 또는 거짓 메시야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초월적인 나라로 보는 자들은 그 나라를 '이 세상'과 대립해 있는 '초월적인 피안의 세상'으로 이해했으며, 이 사상은 후에 에세네파와 바리새파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두 견해에 대하여 사해사본을 연구한 Kuhn박사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이 두 이질적인 견해는 내적인 관련에 있어서 서로 연결되지 않고있음을 지적하여 메시야 왕국이 malkuth shamaim이라든지, 메시야는 그 활동에 의하여 malkuth shamaim을 가져온다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러한 견해들은 메시야상이 잘못되었음으로 두 견해 안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의 개념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유대교 문헌에는 구약성서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는 다른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⑶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

  1세기는 로마가 최대로 확장되는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기원전 63년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틴으로 진입하여 팔레스틴은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 있던 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로마의 통치권 하에 있게 되었다. 특히 분봉왕 헤롯은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40-4 B.C.) 팔레스틴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부를 착취했다. 그러므로 1세기 팔레스틴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였고,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강한 욕구가 배태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순수한 형태의 메시야보다는 오히려 군대의 무력을 갖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우세했다. 백성들을 압제자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킬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온다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근본적으로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구약의 세가지 주된 개념, 하나님이 현재 왕이시지만 장차 왕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상,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메시야가 와서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사상, 다니엘서에 나타난 인자와 종말론적인 나라 개념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강조점에 있어서 구약과는 차이가 있거나 발전적인 면들이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즉 현세계에 세워지는 나라라기보다 오는 세상, 즉 미래에 세워질 나라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는 현재 역사와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역사가 아니라, 현재 역사의 연장에 있는 미래세계이다. 둘째, 메시야에 의하여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민족 중심적이며 동시에 역사 세계에 군림하는 나라라는 점이 강조된다. 즉 이 나라는 현재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모든 이방나라들을 타파하여 세워지는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나라인 것이다. 셋째,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갑작스럽게 묵시적으로 임하게 될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성전(聖戰) 운동을 일으켰던 열심당(the Zealots)은 로마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무력으로 쟁취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게릴라식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도 했으며, 또한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왕적 통치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였으나, 그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메시야에 의하여 세워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였다. 즉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⑷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신약성경의 전체 케리그마(Kerygma)로 요약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취지를 천명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전체 설교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공관복음서의 공통된 주제는 구약에서 약속된 때가 차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독특한 양상을 지닌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뜻하며, 이차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축복의 영역을 뜻한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시대를 끝내시고 오는 시대를 시작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하셨다. 공관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한 것을 역사 안에서의 실제적 사건으로 선포하고 있으며, 이 선포는 유대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긴장된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다. Ⅳ장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서에는 초반에 '하나님 나라'란 말이 2번 나오고, 후반에 빌라도의 신문 과정에서 예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내 나라'(                 )라는 말이 3번 나온다(요 18: 36). 전자의 경우 천국은 성령과 관계 된다. 즉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신자에게 역사하고 있으나 그러나 '그 나라'로써 하늘에 있는 처소에 대한 설명과 함께(요 3: 13) 미래에 완성되는 '그 나라'로써 묘사하고 있다(요 18: 36; 14: 14; 21: 22). 그러므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보다 구원의 현재성을 더 강조하지만,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현재성과 미래성의 양면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 나라는 양면적 구조의 긴장을 보여준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했으며, 종말론적 축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롬 6: 4).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살리시고 하늘 나라에 앉히신 것이다(엡 2: 1-10). 또한 바울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게 될 날을 기대하였다(고후 5: 4). 그날이 오면 우리는 신령한 몸(고전 15: 44)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때가 와야만 신자들은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축복의 나라이기도 했다(고전 15: 50; 딤후 4: 1, 18). 그러나 신자의 삶은 단순히 그 날을 바라보는 소망적인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자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충만한 삶의 최초 단계이며,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질적으로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 차이가 없는 것이다. 현재 성령 안에서의 삶은 내세의 삶이며, 충만한 추수의 삶은 아니지만 종말론적인 추수의 최초의 삶이다. 현재의 삶은 부패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서의 삶인 것이다. 즉 바울은 신자가 현재적으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와 미래에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존과 이에 대한 소망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며, 하나님 나라의 양면적인 긴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를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첫째, '그 나라'는 빛의 나라요 용서와 사랑의 나라이다. 그리고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나라에 이미 들어갔다(골 1: 13). 둘째, 물질적이 아닌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나라이며 그곳에 나타나는 것은 의, 평강과 희락이다(롬 14: 17). 그것은 능력의 나라이다(고전 4: 20). 셋째, 신자들에게는 미래에 온전히 완성될 그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자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골 4: 11; 살전 2: 12; 살후 1: 15; 딤후 4: 18; 고후 12: 2-4). 즉 미래에 완성될 그 나라는 현재 이 세상에서부터 윤리적인 삶과 신앙적 결단이 요구된다. 넷째, 신자가 이미 속한 하나님 나라와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계속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하나님 나라가 소유한 삼중의 본질

      ⑴ 구원-능력의 범위

  하나님 나라는 구원-능력의 범위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구원-능력의 요소는 하나님 왕권의 근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는 모세가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정복하신 것을 인하여 여호와를 왕이라고 찬양했다. 그때부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 혹은 왕국에 관하여 말씀한 것에서 원수를 정복한다는 개념이 계속되었다(예, 단 2: 45).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원수 하나하나를 계속하여 정복시키는 과정과 같다고 묘사한다.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원수 곧 죽음을 정복하시고 난 후에는 정복할 것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자기의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고 했다. 정복하는 순서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임하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정복당하고 나서 완성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정치적인 왕국의 개념을 영적인 왕국 개념으로 무한히 높였다. 예수께서 나타내신 원수의 정복은 사탄과 귀신과 죄와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의 왕권이 구원-능력의 범위에서 드러난 것을 증명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메시야적인 구원 행위로서의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복음서에서 지적해 주는 바 마귀의 활동과 질병, 사악한 행위들, 그리고 사람을 위협하는 재난들 사이에 연계성이 있음으로 인하여 추론된 것이다. 이런 이적들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요 암시적인 의의를 지닐 뿐이다. 즉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활동으로서의 수단이요 복음 선포의 보조적인 것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이때의 이적들은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인증한다. 이적은 하나님 왕국의 기호들이요 하나님의 구원-능력의 공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기회가 되게 하여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의 규칙이 인간의 전반적인 내적 생활 속에 새롭게 세워졌다. 또한 이적들이 외부적 범위에서 하나님 나라에 연결된 것은 이적의 능력이 하나님의 왕권-능력을 예언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적들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왕권-능력을 예언하고 기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적이 보여주듯이 말세의 끝에는 병고침을 받은 것처럼 우주가 재생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되고 모든 죄악이 정복되고 육체적인 것과 동시에 영적 세계가 재생하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⑵ 의의 범위

  하나님의 주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          )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시한다. 의는 율법을 주신 자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취한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행위와 도덕적 상태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의 높으신 수준으로 볼 때 올바르다고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의는 하나님의 도덕적 영광을 다시 산출하게 된다(마 5: 48).
  예수는 두가지 큰 계명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과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 커다란 두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 실제적인 시험(the practical test)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누가 해주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남에게 행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종합한 것이다(마 7: 12).
  의로움의 실제 내용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심이고, 하나님의 의의 덧씌우심(imputation,    )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칭의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들 가운데 하나이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왕권이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것을 예언했다. 예레미야 31: 33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자기의 율법을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에스겔 36: 27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의 율법 안에서 걸어다니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사야 55: 1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의를 나누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표현된 심령의 상태는 산출적(productive)인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receptive) 마음의 상태이다. 자기 자신 안에 선한 것을 갖고 싶으나 갖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 원하던 선한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질 때 이것은 자기들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요구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5: 39ff, 마 19: 29ff, 마 7: 6 등등의 계명의 요점들은 자기의 목숨, 아내 및 결혼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가치있는 것들은 만약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계명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이런 것들의 가치가 아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지고의 선이며 모든 인간적인 가치, 관심사, 이상들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의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들을 철저히 희생시키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의는 인간의 가치 구조와 관심사보다는 훨씬 고상한 것이며 우리들의 모든 것이 그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의의 또 다른 내용은 의 자체가 상급인 것이다. 마태복음 5: 20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뛰어난 의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의 생활을 포도원과 추수할 밭과 일하는 일꾼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주었다.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지적한 상급은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즐거움이다. 이런 최고의 즐거움은 이미 내적인 하나님의 왕국에 부속된 축복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받은 달란트보다 배나 이익을 남기고 상급을 받게 한 원래의 달란트가 종들의 것이 아니고 주인이 종들에게 위탁한 것이다.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상급이 종들이 행한 것보다 더 많다(마 24: 47, 25: 21,23). 궁극적.으로 상급은 거저 주신 선물인 것이며, 따라서 잠간동안만 포도원에서 일한 자도 똑같은 품값을 받은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 중 하나가 예수님께 돌아갔을 때 그도 온전히 구원을 받은 것이다.

      ⑶ 축복 상태의 범위

  하나님의 주권 곧 하나님의 왕국이 축복의 상태와 같이 묘사된 것이 어린 무리에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눅 12: 32; 마 20: 23). 유사(analogy)로 말하면 고대 동양의 왕은 아낌없이 여러 가지 선물을 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떤 왕이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결혼 잔치를 백성에게 베푼 모습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셨다(마 22: 2). 감추인 보물과 값비싼 진주의 비유(마 13: 44-46)에서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자가 아주 귀중하고 좋은 것을 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 34의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가장 구체화한 것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축복으로 되어있고, 그 축복은 부정적인 것과 동시에 긍정적인 것이다.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모든 악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것은 죄를 사하여 주는 축복이다. 이 진리를 예수는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마 18: 23-35)에서 가르치고 있다.
  긍정적으로는 위의 부정적인 면에서 본 축복 즉 속죄 안에 나타난 정의의 선물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영적 즐거움과 만족이다. 죄의 짐에서 심령이 해방되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함을 받은 확증이 받는 자들에게 무한히 깊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들어가게 한다(마 11: 28-29; 막 5: 34; 눅 7: 50). 이와 같은 축복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들의 신분과 생명이라는 두 개념으로 묘사된다.
  아들의 신분(sonship,         )에 관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마 6: 32)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들 신분"의 유일한 가치를 단언한 가장 강력한 단언이다. 이 사실을 마태복음 11: 27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① 가장 완전한 상호간의 지식(the most perfect mutual knowledge), ② 가장 직접적인 생명의 교제(the most direct communion), ③ 가장 절대적인 목적(의도)의 통일성(the most absolute unity of purpose)이다. 이 세가지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성하는 "아들 신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는 경건한 자의 특권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아버지가 되신다(마5: 45). 이 의미는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미쁘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이 뜻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마 6: 9)라고 말하면서 가능한 한 가장 자연스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자연히 아버지 되심이라는 영역을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 놓는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기초를 두었다. 이미 모세의 노래에서 그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 6). 한 시편 기자는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시 89: 26).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 13). 호세아도 11장 1절에서, 이사야는 63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노래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이 된다는 관계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발견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배경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이야기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생명 개념은 성장과 번영과 하나님의 호의를 가지게 됨으로 일어난 행복이 특징이다. 이것에 예수님이 동의하여 구약성경의 생명 개념을 미래에 반영시키고 있다. 생명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축복과 즐거움의 총체(total)와 같은 것이며 "기업"이다(마8:22; 눅15:24-32, 20:28). 그리고 생명은 주관적 의미로 믿는 자들에게 영적 성장과 활동이고, "사는 것"(lived)과 기업으로 받는 것(inherited)이다. 요한복음17:3에서 예수님이 생명을 정의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지식은 지금 벌써 나누어 주었고, 나누어 주신 생명은 종말론적 끝날에 완성되고 완전한 소유가 될 것이다. 이 지식은 실제적인 지식과 성품의 일치(congeniality of nature), 혹은 적응에서 일어나는 애정 깊은 판단과 최고의 영적 사랑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교훈의 과정(a process of instruction)이 아니고 위에서 온 재생이고, 이 재생으로 말미암아 근본적 성격이 변화되어 낮은 지상의 감각 세계에서 변하여 영적 세계의 존재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는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 6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지상에서 하늘 생명의 대표이고 실체화(embodiment)가 되므로 예수가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고 했다. 탕자의 비유(눅15: 11-)에서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묘사했다(15: 32). 이처럼 아들 신분에서 다시 양자 되어지는 것(readoption)과 생명이 다시 회복된 것이 일치한다.
  예수의 가르침 중 많은 말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상급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동시대의 유대 사상은 공적과 상급의 교리의 많은 것을 만들었고 얼핏 보면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핍박에 대하여(마 5: 12), 자기 원수를 사랑함에(마 5: 46), 올바른 정신으로 행해지는 구제에(마 6: 4), 금식에(마 6: 18) 상급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고용자나 주인과 그의 노동자나 종의 관계이다. 상급은 어떤 때는 행한 일에 대해 엄격히 동등하게 보상하는 것으로써, 혹은 손실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보여진다. 상급은 어떤 때는 의무를 수행한 성공도에 따라 약속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징계도 유사하게 등급이 매겨진다. 이러한 말들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상급은 양적으로 보상된다는 평범한 유대인의 공적(功績) 개념과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급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다른 조명에서 비추는 다른 말들이 있다. 그는 결코 공적(merit)의 윤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충성은 결코 상급을 바라보고 행해져서는 안된다. 상급 그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다. 상급에 대해 말한 비유들은 정확히 모든 상급은 결국 은혜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상급은 그들의 노동의 결과에 상관없이 충실했던 모든 자에게 부여되고 있다. 상급은 하늘 나라 자체이다(마 5: 3, 10). 이것은 위하여 준비된 자들에게 주어진다(마 20: 23; 25: 34). 봉사를 위한 기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다(마 25: 14f). 그러므로 상급은 공적에 관계없는 무상의 은혜가 되며 행해진 봉사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눅 12: 31, 32). 사람을 무죄방면하는 것은 변호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형태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한 대가로 받는 상급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선물 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다른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은혜 위에서 자신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의 선물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의는 둘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속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이것도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늘 나라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보상을 약속한다. 이 보상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입장과 관계된다. 하나님은 주인이시며 인간은 그의 종이다. 이 관계는 보상의 사상을 제외시키거나 제한시켜 준다. 왜냐하면 종은 몸이나 목숨이 다 주인의 것이어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신분이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나 천국에서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순종의 표현일 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능력의 범위와 의의 범위와 축복의 상태의 범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실현되고 있는 동시에 아직 덜 실현된(unrealized) 것을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선포하셨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비유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연구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의 비유법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B. 예수의 비유법

  신약성경(공관복음서)를 주의깊게 읽어본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많은 교훈들이 "비유"라는 독특한 문학적 장르(a specific literary genre)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놀라게 된다. 사실상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모든 교훈의 약 1/3이 비유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마가복음 16%, 마태와 누가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료 29%, 마태만의 자료 43%, 누가만의 자료 52%). 그래서 비유를 알지 않고는 사실상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메시지의 특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예수님 당대의 그 어떤 현존하는 유대 문헌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같이 많은 비유를 말한 사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현존하는 모든 유대 초기 문헌(주후 200년 이전)에서 단 한번의 비유 실례 밖에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은 예수의 비유를 발견하며, 또한 마태복음 13장에서의 하나님 나라 메세지는 모두가 비유로 선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유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는 비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를 위하여 비유의 정의와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목적과 비유의 특징 등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비유의 정의

  비유의 어원은 헬라어 '파라볼레'(        )라는 단어에서 유래된다. 헬라어 '파라볼레'(        )는 전치사     (옆에 혹은 곁에)와 동사      (던지다 혹은 제시하다)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신약 사전에서는 '파라볼레'(        )를 "어떤 도덕적 혹은 영적인 진리를 위해 일상 생활 중에 흔히 일어나는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 형태의 예화(illustration), 비교(comparison) 또는 유비(analogy)"로 정의한다.
  종합할 때 '파라볼레'(        )의 뜻은 어떤 것을 가지런히 던져주어서 비교하도록 도와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유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비로소 나오며 웅변의 한 방도로 사용된 비교나 비론(analogy)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붙잡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의 히브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금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의 모국어가 히브리어와 같은 셈족 언어인 아람어이었으며, 신약의 저자들이 "비유"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희랍적 배경에서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과 그의 유대인 청중들의 언어였던 히브리적 언어 배경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마샬'(   , mashal)이라는 낱말이 씌어졌다. 본래 '마샬'은 잠언, 수수께끼, 속담 등으로 넓은 의미로 씌어지던 말인데, 칠십인 역(LXX) 이래로는 헬라어 '파라볼레'(        )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비유라는 말은 헬라 시대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샬'(   )이라는 단어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 자체에서 '마샬'(   )이라는 말은 단순히 '속담'(proverb)(겔 18: 2-3, 삼상 24: 13, 겔 12: 22-23, 16: 44)을 언급하기도 하고 '웃음거리의 말'(byword), '풍자'(satire), '비웃음'(taunt) 또는 '조소'(word of derision)(사 14: 3-4, 합 2: 6, 민 21: 27-30, 신 28: 37, 왕상 9: 7, 대하 7: 20, 그리고 시 44: 14, 69: 11)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편으로 '수수께끼'(riddle)(시 78: 2, 겔 17: 2f, 시 49: 4, 잠 1: 6등, '이야기'(story) 혹은 '풍유'(allegory)(겔 24: 2-5, 겔 17: 2-10, 20: 49- 21: 5등)로도 사용된다. 그밖에 비록 '마샬'(   )이란 용어가 사용되진 않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도 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나단 선지자가 사용한 비유로 알려져 있는 삼하 14: 1-11과 이사야 5: 1-7이 그것이다.
  '마샬'(   )의 어근에는 "∼과 같으니"(to be like)라는 의미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동사로 사용된 경우가 간혹 있지만(시 28: 1; 143: 7), 대개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샬'의 원형적인(archetypal) 의미는 속담이며, 위에서는 단지 넓은 의미에서 속담 이외에 다른 용어들도 '마샬'이라고 부르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수수께끼나 풍유와는 구별되는 장르이다. 즉 '마샬'은 '마샬'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항목들(items)이 암시하는 말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추리(inference)와 해석(interpretation)이 '마샬'의 본질이다. '마샬'은 내용을 압축시켜(a suppressed) 표현하는 기호언어(semiotic terms)이다. 따라서 '마샬'의 언어는 강렬하고, 구전시대의 문화(an oral culture) 속에서는 기억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샬'이 문맥의 배경은 아니다. '마샬'은 어떠한 독특한 한 가지를 표현하기보다는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샬'의 원형이 속담이므로 속담의 형태로 여러 가지 다른 문맥(context)들 속에서 적절히 적용되고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마샬'(   ) 즉 비유라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혹은 영적 진리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 이상의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써 정확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        )라는 용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 희랍 문헌에는 '파라볼레'(        )를 '옆에 있는 것', '비교', '은유', '직유', '짧은 이야기', '알레고리', '해설'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도 '파라볼레'(        )는 구약성경의 '마샬'(   )처럼 그 의미가 다양하여, 속담(눅 4: 23, 6: 39등), 은유 또는 직유로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두 가지의 일을 비교하는데 사용된다(마 13: 33, 막 7: 14-17, 눅 5: 36-38등). 또한 어떤 사물을 통하여 영적인 계시를 나타내는 '상징'(Symbol)의 의미로도 사용된다(막 13: 28, 마 24: 32, 눅 21: 29). 그리고 어떤 그림 이상으로 이야기(story)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눅 10: 29-37, 14: 7-14, 14: 16-42, 16: 1-8, 마18: 23-35, 21: 18-31등). 마지막으로는 보기 드물게 나타나지만 알레고리(allegory)의 의미로 사용된다(막12: 1-11).
  칠십인역에서의 '파라볼레'(        ) 사용은 새로운 의미를 더한 것이 아니고, 다만 "대조"(comparison)한다는 생각이 강조된 것이다.
  랍비 문서에서는 '마샬'을 사용할 때에 구약과 칠십인역에서 나타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가지 새로운 것은 "비유"가 많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랍비 문서에서도 '마샬'이 속담과 직유와 풍유와 그밖의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사용된 비유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말 가운데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랍비 문서의 비유를 예수 비유의 모델로 삼으려면 매우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는데, 그것은 주후 일세기와 랍비문서에 기록된 자료들은 모은 기간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이다. 랍비 문서에서는 적어도 200년부터 400년 사이에 "비유"라는 장르가 나타나며 발전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 사이에는 랍비 문서에 있는 비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부정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속한 랍비 전승에서는 비유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바리새적 랍비 전승에는 비유가 없지만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같은 문학적 양식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의 비유는 유일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언어학적 독창성(fundamental linguistic originality)과 포괄적인 창조력(a generic creativity)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비유를 만드는 일(parable making)이 모든 유대인의 회당 안에서 일어나고 발달되었다고 단정했다. 다시 말하면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예수님과 랍비들이 사용한 '마샬' 장르에 속한 비유 교훈이 새로 일어나게 된 시기이며 장소라고 했다.
  랍비 문서의 비유는 미드라쉬적 문맥, 곧 주석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① 예증(illustratia, 시 79: 1), ② 소개(introductory) - "이것과 같으니" ③ 비유 자체, ④ 적용, ⑤ 성구 인용이다. 이중 흔히 한두가지 이상의 요소가 빠지고 꼭 필요한 요소는 비유 자체이다. 그리고 적용과 성구 인용이 흔히 빠진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대개 처음의 세가지 요소들이 포함되며, 첫 요소인 예증이 대체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랍비 문서의 비유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공식들을 사용하여, 비유는 랍비 문서를 통하여 공식화된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동시에 고정된 구조와 특성을 발달시켰다.
  이렇게 볼 때에 언어 자체의 연구를 통해서는 예수님의 비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헌터(A. M. Hunter)는 "비유란 어느 한 영역에서 타당한 것이 다른 영역에서도 타당하다는 전체 위에서, 어떤 영적인 진리를 밝혀주기 위해 자연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도출해낸 비교이다"라고 말한다.
  다드(C. H. Dodd)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 있어서 비유는 자연이나 일상생활에서 끌어낸 일종의 '은유' 혹은 '직유'이다. 따라서 비유는 생생함과 기이함을 그 특징으로 삼아 청중들을 단숨에 사로잡는다"라고 말한다.
  스타인(R. H. Stein)은 "비유는 짧은 혹은 확대된 비교의 형식을 지닌 언어형태이다"라고 파악하고 있다.
  스코트(B. Scott)는 "비유는 천국이라는 상징과 관련되어 있는 예수님의 짤막한 설화체 이야기이다"라고 파악했다.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예수님의 비유를, "현대 사회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수님 자신의 특수한 대화의 형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 vox Jesu)을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파악한다.
  도나휴(J. R. Donahue)는 비유를 "답을 기다리고 있는 질문이며, 반응을 기다리는 초대장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비유는 인간의 상상력을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은유이며, 놀람과 역설과 자유를 자각하게 하는 일종의 이야기이다"라고 한다.
  크로싼(J. D. Crossan)은 비유를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기존 세계에 대해 강한 충격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방어력을 제거하여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사로잡아간다. 바로 이러한 비유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접촉하신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다."라고 한다.
  와일더(Amos N. Wilder)는 비유를 "사람들에게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생동력있게 하고, 그들을 어떤 것에 직면하게 한다. 비유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일을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기쁨의 순간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역사하고 미래의 약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이 확신을 증거하여 우리에게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며, 이 결단은 때때로 인내와 고통을 포함한다."고 한다.
  이와같이 볼 때에 비유라는 것은 성경상의 용례나 학자들의 견해를 보아서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비유에 대한 몇가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비유는 자신의 독특하고 생동적인 언어 형태라는 점이요. 둘째, 그것은 예수님이 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하거나 그들의 반응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그 무엇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예수님은 이것을 일종의 직유나 은유, 혹은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예수님)와 나와의 만남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간단한 이야기, 비교, 직유, 은유 등의 언어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예수님 자신이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주된 메시지, 곧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유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주된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된다. 곧 예수님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며, 오고 있으며, 또 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울이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자기 계시라고 할 수 있다.

    2. 비유의 사용 목적

  예수의 비유 사용의 목적은 하늘 나라의 진리를 지상의 이야기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인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유를 사용한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교훈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그 내용을 감추기 위함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데 있다. 비유는 그 의미하는 바가 노골적이 아니고 완곡하며 감춘다는 성격이 있으므로 그대로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제자들도 당시에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물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자들은 마태복음 13장 10절에서도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독특한 교훈 방식을 사용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태복음의 구조를 살펴보면(마가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좀처럼 비유를 사용하시지 않았는데 13장에 와서 갑작스럽게 비유를 사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 비유를 자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구분하실 때, 예수님 자신의 청중을 "너희들"과 "저희들"로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분하는 대상에 따라 그들에게 해당되는 상황도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비유의 두가지 기능, 곧 너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의 기능"과 "저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닉의 기능"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마가복음 4장 11-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비유의 사용 목적을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였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우리가 비유를 사용할 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4장 33절에서 예수는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목적에 관한 학자들의 대표적인 견해를 살표보자. 먼저 다드(Dodd)는 비유의 사용 목적을 논할 때에 마가복음 4장 11-12절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가르침을 삽입한 구절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그는 언어학적으로 이 구절에서 바울의 어휘가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발생했던 문제와 유대인 선교에 대한 실패의 답변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드의 이런 해석은 마가복음 4장 11-12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맨슨(Manson)은 이 구절에 대해 다드와는 반대로 순수한 예수님의 말씀이며, 단지 12절이 아람어로부터 잘못된 번역이라고 했다. 그는 12절에 나타나는 이사야 6장 9-10절의 인용이 히브리어 성경이나 70인역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탈굼(구약 성경의 아람어 의역본)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도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가 관계대명사 who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12절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돌이켜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외인)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맨슨의 해석에 의하면 결국 이 구절은 '인간의 통찰력'(insight)에 대한 문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 스스로가 비유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은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한 목적을 말하고 있다기 보다는 '외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으며, 예수님 말씀의 진정성은 부인하지 않지만 마가를 희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 마가가 예수님의 아람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오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의 해석에 의하면 마가복음 4장 11-12절은 제자들에게는 비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가 대조적으로 주어졌다고 언급한다. 여기에서 '비유'는 오히려 '애매한 말씀, 수수께끼'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11-12절은 비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전반에 관한 것으로써 그 의미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제자들에게는 주어졌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리어 그들에게는 애매한 수수께끼처럼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사야 6장 9-10절의 무서운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회개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의 해석대로 11-12절의 말씀이 비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전반적인 말씀의 의미라면 이 구절은 예수님이 비유로 사용하신 목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상의 학자들의 견해를 살핀 이유는 그 학자들이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논의를 마가복음 4장 11-12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타인(Stein)은 이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넓은 의미로써 예수님이 왜 비유로 가르치셨는가라는 이유에 대해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외인들을 향해 자신의 가르침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즉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이 자신을 정죄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인들의 오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둘째는 자신의 제자들 및 다른 사람들(외인)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계시하고 예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들로부터 적대심과 완악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하고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는데, 필자는 스타인의 견해에 더 공감을 갖는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목적은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들의 유형에 따라 달라졌다고 본다. 즉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어 예증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자신의 적대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의 성숙한 해결을 위해서는 비유와 계시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즉 비유 사용의 주된 기능은 어디까지나 천국을 보여주는 계시로서의 기능임을 알게한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전하는 자들은 그들의 불순종하는 마음 자세 때문에 비유를 통하여 주어지는 이 계시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편에서는 이 계시를 목표로 하는 비유가 저희들로 하여금 이 천국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비유는 저들에게 일종의 심판의 수단이다. 예수를 통하여 주어지는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만이 살아갈 수 있는 저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계시가 은폐되어질 때 저들은 스스로 영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는 예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의 수단이 되지만, 반대로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선언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3. 비유의 특징

  비유는 예수께서 처음 사용하신 교육방법은 아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비유 사용을 찾아볼 수 있으며 유대교의 랍비들도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유대 나라에 있어서 비유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가르침의 방법이었다. 이런 문화권에서 사시던 예수는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칠 때에 그의 청중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비유는 위의 비유와는 구별되는 독특성이 있다. 그 독특성은 형식보다는 비유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의미의 적합성, 자각성, 아름다움과 호소 등에 있어서 다른 비유들과 비교할 때 탁월하다. 비록 예수께서 비유적 유형을 창안한 분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예수께서는 비유 유형의 가르침에 높은 독창성을 부여했고 예수는 비유적인 가르침을 한 가장 전형적인 분이다.
  헌터(Hunter)는 비유가 사용되어진 삶의 자리를 분석하면서 비유가 갖는 특성을 세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해준다. 첫째로 비유는 이야기의 표본으로서 다른 이야기들처럼 반복과 대조가 나타난다. 둘째, 비유란 삶의 현장에서 즉시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로 비유는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비유를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죠스(G. V. Joes)는 비유의 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간결하게 필요한 인물만 등장하며 그들은 개별적으로 접촉한다. 둘째로 세사람 이상 등장할 경우는 차례로 등장한다. 셋째로 성격묘사는 등장인물의 언행으로서 대체된다. 넷째로 감정의 표현이나 사건의 계기가 거의 생략된다. 다섯째로 이차적인 인물은 필요할 때에만 등장하며 극단의 대립 속에 끼어든다. 여섯째로 목적만 달성되면 이야기가 즉시 중단되면서 사건의 결말은 생략된다. 일곱째로 직접 화법을 사용하며, 여덟째로 반복적 요소가 많다. 아홉째, 중요한 것은 말미에 나온다. 열번째, 청중의 판단이 나타난다. 열한번째, 비유는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이어서 그 속에 움직임이 있다. 열두번째로 비유의 무대 위에는 다음과 같이 울려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21: 43)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라"(눅 11: 37).
  내용 면에 있어서도 예수의 비유 메시지는 특별하여 그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라고 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게 된다. 곧 예수를 통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며, 오고 있으며, 또 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예수의 비유는 내용면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울이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을 보여주는 자기 계시라는 특징을 지니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말씀하신다.

    4. 비유에 대한 해석

  가장 오랫동안 지배적으로 사용되어왔던 비유 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은유)였다. 초대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19세기 말까지 알레고리적인 해석방법이 성행하였다. 오리겐은 비유 가운데는 세가지 의미가 숨어있다고 했다. 첫째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고, 둘째는 도덕적인 의미이며, 셋째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이 영적인(신비적인)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 알레고리적인 해석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예수께서 그런 의미를 의도하였겠는가하는 것이다. 대답은 물론 "아니"다. 이런 해석은 성서 자체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으로 해석자의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의 본래의 의미는 묻힌 채, 이런 모호한 영적 해석이 교회사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비유 해석사의 큰 획을 그은 사람이 율리허(A. Julicher)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서 알레고리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다시는 그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 않도록 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공헌이었다. 율리허보다 앞서서 영국의 부루스(A. B. Bruce)는 자유주의 신학의 정신으로 비유를 연구했다. 그는 알레고리적 방법을 반박하고 비유에서 취재한 인간 사회의 여러 정황은 무슨 영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사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과오는 뒷 문으로 알레고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비유를 자연적인 이야기로서 읽으면서 거기서 인간 정서를 얻으며 그 정서로써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유대를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큰 공헌은 당시의 갈릴리의 생생한 배경을 비유 연구에서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율리허(Julicher)는 더 이상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매어달리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모든 비유는 하나의 포인트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예수님도 오직 하나의 포인트만을 갖고 비유를 말씀하였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숨겨진 진리를 찾는 것이나, 예수는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비유를 말씀하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알레고리를 배제한 비유 속에서 "도덕적 교훈"만을 찾았다. 그래서 비유는 한가지 점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판단은 옳으나 비유들이 그 원리만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너무나 천박한 이해이다.
  비유 해석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분기점은 다드(Dodd)이다. 그는 율리허의 이론을 따라서 예수의 비유는 우리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비유의 본래 삶의 자리에서 이해를 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므로써 그는 올바른 성서 해석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의 초점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발견하고, 예수의 비유도 이러한 관점(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 안에 있는 종말론적인 강조를 지나치게 평가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 예레미야스(Jeremias)는 예수의 삶의 자리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예수의 청중의 비유 이해와 초대교회의 비유 이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비유가 구전되는 과정에서 변형되었으며, 복음서 기자들의 비유 기록 과정에서 비유들의 컨텍스트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는 본래의 비유와, 그리고 현재의 복음서에 기록되어진 비유를 구분하여 이해하도록 하는데 공헌을 했다.
  그러면 이런 학자들의 견해를 기초로 하여 예수의 비유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몇가지 중요한 지침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예수의 비유를 그것이 원래 주어진 주후 1세기의 유대 팔레스틴 문맥에서 보도록 해야 한다. 즉 예수의 삶의 정황에서 예수께서 전한 비유의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의 비유와 관련되어 있는 주후 1세기 중동 팔레스틴의 지리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의 비유가 당대의 청중들에게 얼마나 실제적이고 생동적이고 또한 충격적이었던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예수의 모든 설교의 중심주제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상 예수의 모든 비유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예수의 비유를 수록하고 있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와 문맥 및 문학적 구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복음서 저자의 목회적, 신학적, 선교적 동기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로 예수의 비유로부터 하나의 주된 요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유 속에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중심적인 주제를 찾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래서 비유 본문 그 자체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고 그 비유 자체의 흐름 및 리듬과 비유의 구성과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결단으로 이끌어가는 언어적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비유의 원래적 의미가 생생하게 돋아날 때에 비로소 청중은 그 비유의 메시지로부터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런 여섯가지의 지침을 예수의 모든 비유 해석에 기계적으로 적용한다고 해서 비유를 잘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를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비유 해석 법칙에 정통하되 그 법칙에 기계적으로 노예가 되지 말고 비유에 따라서 그 법칙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의 비유를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C. 하나님 나라의 비유법적 이해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실현된 하나님 나라)과 앞으로 임할 것(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unrealizeed")을 나타내는 특수한 양식(the specific modality)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때부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분별할 수 있으며,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은 자들만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내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오심으로 임하기 시작한 그 사실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가 오신 역사적 사실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사실임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 비밀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insight)이다. 이 통찰력이 예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이해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필요 조건"(the great prerequisite)이다.
  비유 해석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비유들을 이해하여 분류하고 있다. 헌터(Hunter)는 주제별 분류를 사용하여 ①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묘사한 비유, ②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밝히는 비유, ③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그리는 비유, ④ 하나님 나라의 위기를 취급하는 비유이다.
  다드(Dodd)는 비유를, ① 삶의 정황(the setting in Life) 카테고리, ② 위기의 비유들(parables of crisis) ③ 자라는 비유들(parables of growh)로 분류했다.
  예레미아스(Jeremias)는 ① 지금이 오늘이다. ② 죄인을 위한 자비, ③ 큰 확인(great assurance), ④ 큰 재해(immense of catastrophe), ⑤ 너무 늦었다(may be too late). ⑥ 도전(challenge), ⑦ 제자의 신분(discipleship), ⑧ 인자의 높임(exaltation of the Son of Man), ⑨ 완성(the consummation)등의 아홉가지 일반적인 주제를 가지고 분류했다.
  스코트(B.B. Scott)는 현시대의 사회생활과 문화의 기본적 모습들을 기초적 카테고리로 삼고 비유를 분류했다. 그는 고대 지중해 사회가 두가지 축(axes)인 수평축과 수직축에 따라서 나누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① 수평축 즉 가족, 마을, 도시와 도시 주변에 관계된 비유로서 가족 비유, 마을 비유, 도시와 도시 주변 비유. ② 수직축 즉 피보호자-보호자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능력 교환의 수단이 되는 비유. ③ 일상생활의 가공품, 그리고 집과 농토 등으로 은유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로 분류한다.
  구조학(structuralism)자들 중에 크로산(Crossan)은 비유들의 구성들(plots)을 검토하고 세 가지 구조들, 곧 "도래"(advent, 출현)와 반전(reversals)과 행동(action)으로 구분하고 이 세 가지 구조들이 일련의 "위기"(crisis)와 "응답"(response)과 비난(denouncement)에 의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세가지 구조들에 따라 예수의 비유들을 분류했다. "도래" 혹은 "출현" 비유는 장래를 개조(recasting)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규칙을 강조하고, "행동" 비유는 결정적 행동을 요구하는 중대한 환경을 포함하며, "반전" 비유는 사회적 지위, 혹은 특권에 대한 일반적 전망을 뒤집고 있다.
  비아(Dan Via)는 비유의 구조(plots)를 "희극"(comic)과 "비극"(tragic) 구조로 분류했고, 이와 같이 구조들을 분류한 것은 비유의 스토리가 구원 혹은 심판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비극과 희극의 주인공으로 구분되는데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짐이되고 당황하게 되었지만, 희극의 주인공은 인류적인 현실(human actuality)의 현상이다. 희극의 주인공은 인간이 된 것에 갇힌 것(imprisoned)도 아니고, 인간이 된 것에 분개하지도 않고 희극 자체가 인간이 몸을 소유하고 음식과 잠자는 것이 필요하고 열망도 소유한다는 모든 진리를 나타내 준다.
  희극적 비유는 다음 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① 비극적 행동, ② 실패, ③ 인지 장면(recognition scene)이다. 비극적 비유도 다음 세요소들로 구성되는데, ① 비극적 행동, ② 인지 장면, ③ 실패이다. 비극적 비유에서 둘째 요소인 인지 장면이 하나뿐이면 셋째 요소인 실패가 먼저 나타난다. 그 이유는 실패가 그 장면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희극 비유에서는 인지 장면이 실패 뒤에 와서 비극을 희극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희극이 끝인 인지 장면이 한계를 뛰어 넘는다(transcend).
  "비극"이란 것은 비극 비유에서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주인공을 파국(catastrophe)과 고립(isolation)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구도(a plot)를 가지고 있다. 비극적 비유는 생활의 불안정과 우연성에 대한 주제에 주의를 기울인다. 비아나 스코트는 예수님의 비극의 비유에서 주역들이 어떠한 심각한 목적으로 말미암아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동은 일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주역들의 실패가 어떤 "인물"(character)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이 거스린 인물이 그들을 실패(downfall)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까닭이라고 했다. 그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인물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이와 같이 하여 비유 안에 놓인 인간의 상호관계가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및 죄의 성격과 심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를 분류하고 달리 해석하는 "천국-문화적 해석 방법"에서 기본으로 삼은 전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비유"라는 언어양식은 구약성경과 랍비 문서에 사용된 '마샬'(   , mashal)과 같이 "은유적(metaphorical)", "현실주의적"(realistic), "역설적"(paradoxicl), "풍유적"(allegorical)인 것인데 이 네가지를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동화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이 "비유"란 용어 자체가 포괄성을 가졌고, 의미가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의 요점을 나타내고 있다. ② 예수의 비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제자들에게는 "나타내는 것"이고 불신앙의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진 대로 남게하려는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다.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오심으로 임하기 시작했다는 이해 혹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으로 되어진다. ③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다음 세가지 범위에 명백하게 역사하고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구원-능력의 범위, 의의 범위, 축복의 상태의 범위이다. "천국-문화적 해석"에서 "천국"이란 이런 의미를 표시하고, "문화"란 팔레스타인 문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 살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활하고 체험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모든 문명생활을 의미한다. ④ 예수의 비유를 예수와 청중 사이에 일어난 연극과 같은 것으로 보고, 청중을 파악하는 것을 비유 해석의 첫 단계로 삼는다. 다음 단계는 청중이 소유한 "문화"를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다음으로 비유가 사용한 모든 문학 양식들을 확인한다. 마지막 단계로 각 복음서에 나타난 신학적 개념과 비유의 문맥에서 비유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제 이런 맥락 하에서 가라지 비유의 구조와 내용을 분석해보겠다.

 

 

 

 

 

 

 

 


Ⅲ. 가라지 비유의 구조와 내용 분석


  A. 마태복음 13장의 구조와 가라지 비유의 위치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12장의 사건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시야가 와서(1절) 자신을 "다윗의 아들"로 동일시한다(3절). 그리는 그는 표적들과 이적들로 그것을 증명한다(13절). 그러나 그는 거절당했고 마귀라고까지 불렸다(24절). 그리고 12장의 중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다루겠다는 경고를 한다(21절). 12장의 후반부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언급되고(31절), 예수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40-42절). 마귀에게 사로잡힌 한 사람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같으며(45절), 자기들의 메시야를 거절한 그 이스라엘은 악한 일곱 영이 들어간 사람처럼 황폐하게 된다.
  13장에서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설명하는 것이 예수께서 거부당한 이후에 바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건들이 예언된 왕국의 도래와 거부라는 천국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13장의 천국의 비유는 거부된 왕국 이후에 펼쳐지는 새로운 경륜의 모습이다. 왕국의 거부 이후에 새로 시작되는 경륜은 교회의 경륜, 즉 교회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교회 시대에 적용된다. 하지만 "천국"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 이 비유들은 시대적으로는 교회 시대이지만 교회가 아닌 또 하나의 세계, 즉 "기독교계"(christiandom)에 적용된다.
  이제는 13장의 구조와 가라지 비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마태복음 13장의 구조

   마태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교차 대칭 구조'로 볼 때 13장은 마태복음 전체의 중심점이다. 로어(C. H. Lore)가 마태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말하면서,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커다란 대칭구조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지적한 이후, 마태복음의 교차 대칭 구조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중요시되어 왔다. 마태복음의 교차 대칭 구조란 마태가 자료를 편집할 때에 애용하고 있는 방법의 하나로써, a, b : b, a로 배열하는 방법이다.
  특히 13장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마태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도 자신의 복음서를 "천국복음"이라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으며(4: 23, 9: 35, 24: 14, 26: 13), 또한 세례 요한(3: 2)과 예수(4: 17) 그리고 제자들(10: 7)의 설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중심점이요 핵심인 13장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3장은 구조상으로 두 개의 구획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 구획은 1-35절이고, 제 2구획은 36-52절이다. 이 두 구획을 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각기 독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1-3a절, 36a절). 둘째, 각 구획은 하나씩의 부기(附記)가 있다(10-23절, 36b-43절). 셋째, 제 1구획에 네 비유들(씨 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 누룩)이 있고, 제 2 구획에도 네 비유들(감추인 보화, 진주, 그물, 집주인)이 있다. 마지막으로 각 구획은 특유의 결론을 가지고 있다(34f절, 51f절). 마태복음 13장이 이런 배열을 갖게 된 것을 다수의 학자들은 원천비평(source criticism)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러나 본문을 검토해 보면 마태 자신이 13장을 구도했다(design)는 것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마 13: 1-35절을 검토해보면 16절 이하의 절들(원천 말씀(a Q logion)인 Q는 크벨레(Quelle)의 약자로서 "원천"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logion은 예수 말씀의 짤막한 단위를 말한다.)을 제외하곤 첫머리와 끝에서 모두 마태가 그의 원천들 중 하나를, 즉 마가복음을 따른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나 재료의 중간 구간(24-33절) 전반에 걸쳐서의 그 단락들(pericopes; pericope는 짧은 단락(short paragraph)을 뜻하는 양식비평 등에서의 술어다.)의 배열은 그 기본 틀을 이루는 재료(framework material)의 분석에서 입증될 수 있듯이 전적으로 마태의 작업이다.
  먼저 제 1구획(1-35절)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한 자료의 하나로써 마가복음을 따르고 있다. 그 예로 마태복음 13:1-23절과 마가복음 4:1-20절, 마태복음 13:34절과 마가복음 4:33절을 서로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제 1구획의 중간 부분인 24-33절은 전적인 마태의 편집이다. 마태는 24-33절에서 기본 틀을 이루는 재료인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들을 함께 묶어 일련의 전이적 진술들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전이적 진술들은 "또 그들 앞에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시되…"라는 단일 공식의 형태로 삼중의 반복(24a, 31a, 33a)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공식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이 공식이 마태에서 기원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예로      (다른)이란 단어는 마태의 어휘에서 선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마태는 이 단어를 29번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마가복음과의 병행구로써 아홉번, 누가복음과의 병행구로써 두 번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단지 마태복음 비유의 전이와 관련하여 네 차례 사용하고 있다(13: 24, 31, 33; 21: 33).
  비유들에 있어서도 마태는 그 비유들을 듣는 유대 청중들에 대한 공식적인 지칭으로        (그들에게)를 사용한다(13: 3, 10, 24, 31, 33, 34). 하지만 마가는 대조적으로 그의 비유에서       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어느 때는 군중들을, 어느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태는 그 단락들을 마가복음과 그 특유의 전승들을 수집하고 적합하다고 여겨진대로 배열하고, 그것들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해주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제 2구획(36-52절)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제 2구획에서도 마태의 개인적 편집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가라지 비유에 대한 해석에 있어 36a절은 13장 10a절과 관련이 있고, 36c절은 15장 15b절의 유형을 따르는 것을 보아 마태의 편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가라지 비유의 해석에 이어 등장하는 세 비유(감추인 보화, 진주, 그물)들을 결속시키는 연결사      (또, 게다가)는 마태가 마가와는 다르게 비유들을 한데 묶는 연결사로 사용한다. 그리고 마태는 이 단어를 특별히 마가에 의존하지 않고 규칙적으로(열한 번) 문장의 첫머리에 왜 두는지를 설명해준다. 이것은 13장 45절과 47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13장 45, 47절의      는 마태의 독특한 편집 의도를 보여준다.
  둘째는 세 비유들의 표준적 특징인 "비유 공식"이다. 마태는 "천국은 마치 "…와 같으니"라는 비유 공식을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같이 마태복음 13장의 두 구획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마태는 13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을 구성함에 있어 마가복음의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본문의 기본 틀을 이루는 재료들은 자신의 독특한 편집 방법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나 문체적으로도 자신만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한다.

    2. 마태복음 13장에서의 가라지 비유의 위치

  마 13: 1-35절에서 마태는 마가의 원천을 다소 긴밀히 따르고 있다. 학자들은 이 호기심이 가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다수의 설들을 제의해 왔으나, 상당한 정도의 인정을 누리기에 이른 것은 단지 한 설뿐이다.
  13장에서의 첫째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언급이 없이 단순히 씨뿌리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현세대에 걸쳐서 그것이 자라나는 사실들을 언급하기 위해 일련의 다른 비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라지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로서 밤중에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막 4: 26-29)와 유사하지만 별개의 비유로 여겨지며, 도마복음에도 가라지의 비유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가라지 비유는 앞에 나온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도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어, 아마도 마태는 그 유사성 때문에 이 두 비유를 나란히 편집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B. 가라지 비유의 구조와 해석

    1. 가라지 비유의 구조

  이 비유를 분석할 때, 이야기의 내적 논리를 따르면, ① 그 상황, 24b-28a절; ② 그 상황에 대한 종들의 반응, 28b-c절; ③ 종들에게의 그 주인의 지시, 29f절.로 되어있다. 양식적으로 가라지의 비유는 과거로 이야기 되어진 이야기(a story Narrated in past time)이고 대화가 산재되어 있다. 율리허의 술어로 그것은 우화(fable), 혹은 엄밀한 의미로의 비유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한 일련의 은유들도 포함돼 있으므로, 이 단위는 보다 타당하게는 혼합 양식, 혹은 보다 특별한 알레고리적 비유이다.
  이 비유의 전반적인 문맥은 반대되는 모습(opposing image)들을 한 쌍으로 짝을 짓는다.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가 한 쌍을 이루는데, 이렇게 만든 것은 마가복음 4:10-12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준 제자들과 주지 않은 "외인들"로 구분한 것과 조화가 된다. 이렇게 반대된 이미지로 한 쌍을 이룬 문맥은 심판이 올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권고한다. 이와같이 실제로 심판이 올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인내할 것과 죄사함에 관한 대중적인 넓은 문맥 가운데 이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의 도입부를 보면 24b절은 마태의 문학적 구성이다. 24b절에서 언급돼야 할 또 다른 한 특징은 축어적으로 취해질 때 그 본문은 천국이 "사람"(a man)에게 비겨 말해질 수 있다(may be compared to)라고 되어 있다. 이 점이 비유의 초점이 아닌 건 분명하다. 이 도입부에는 상당한 모호성이 있는데, 휘비그는 그것을 "Inkonzinnitat" 혹은 불일치(incongruence)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이를 번역하면 : "…한 어느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천국의 경우도 그래 왔으니…."
 비유의 무대적 배경은 "그의 밭"(24b절), 즉 "그 집의 주인"의 소유인 밭이다(27a절). 38절에서는 그 밭이 세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먼저 지적했듯이 13장 36-44절의 상황은 본 비유의 그것과는 다르다. 36-44절에서는 예수께서 교훈적으로 제자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며, 본 비유에서는 해변에서 변증적으로 유대군중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계심이다.
  그러므로 밭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시사되며,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을 지나 온 세계에 미칠 선교사역을 전제하게 된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본 비유가 완전한 균형이 잡힌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원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씨 뿌리는 일을 감독하는 24절에서의 그 "사람"은 23절에서의 "그 집의 주인"으로 판명된다. 이것은 예수께(10: 25), 하나님께(20: 1, 11; 21: 33), 그리고 기독교인들(13: 52; 24: 43)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24절에서의 그 집의 주인은 마태 당시에는 승귀되신 큐리오스이신 예수께 대한 투명한 상징임을 보여준다.
  이 비유의 끝에서 마태는 우리에게 그 집의 주인이 그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추수꾼들"(        , 30b)을 두고 있음을 알려준다. 추수꾼들은 천사들을(cf. 13: 39) 즉 마지막 날에 인자인 예수를 수행하도록 돼 있고, 최종심판을 수행하는 데 그와 더불어 그를 위해서 행동하도록 돼 있는 그의 수하의 대행자들로서의 존재로서 상징한다.
  그 집의 주인은 "종들"(      )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추수꾼들과는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마태의 견지에서 그 "종들"은 예수님의 그 제자들을, 포괄적으로는 교회를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있다.
  그 집의 주인에 대하여 "주인의 원수"(             , 25, 28b)라는 적이 나타난다. "그 원수"는 마귀, 혹은 사탄에 대한 시사이다(cf. 13: 39). 이때 마태가 마귀를 원수로 지칭할 때에 마귀는 기독교인들의 주께 대한 충성을 파괴시키려는 계산된 시도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귀는 예수는 물론이요 교회의 우두머리격인 원수(arch-enemy)이다. 그러나 가라지 비유에서의 원수의 공격대상은 그 주인 자신이라기 보다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다.

    2. 가라지 비유 해석

      ⑴ 초대 및 중세의 해석 방법

  초대 교부 시대(주후 540년까지)에는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과 같은 교부들은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즉 이 시대의 비유 해석 방법은 "우의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이 성행하였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는 사람들이 잠든 밤중에 가라지 씨를 뿌린 이를 마귀와 동일시한다. 원수는 하나님의 일을 시기하여 하나님께 반대하여 일을 꾸민다. 그리하여 원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마귀가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려고 이용한 적개심을 악마에게 돌아가게 했다.
  오리겐(Origen, 184-254)은 좋은 씨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나 사람들이 잠든 사이 그들은 예수의 깨어 기도하라는 권면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유혹에 빠진다. 인자는 좋은 씨를 뿌리나 악마는 가라지, 즉, 악한 밀을 씨뿌린다. 밭은 교회가 아닌 세상 전체를 뜻한다. 마지막 혹은 추수 때가 되면 이일을 위해 지명된 천사들이 죄를 짓게 한 영혼이나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자란 악한 생각들을 거두어 타오르는 불못에 던질 것이다. 결국 오리겐은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50)은 문자적, 역사적 의미를 기본으로 여기는 한편, 문자적 의미가 모호한 경우에는 영화시키거나 알레고리시켰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에는 우의적인 방법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서도 안디옥 학파는 이런 해석법에 반대하여 성서 본문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지 않고, 저자가 의도한 문자적 의미를 설명하려고 힘썼다. 뛰어난 해석가 중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349-407)이다. 그는 비유가 한 단어 한 단어씩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알레고리화에 대한 거부를 암시하며, 오히려 비유의 중심 사상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가라지 비유 해석에 있어서 그는 "그래서 예수는 주인에게 온 종들이 누구인가를 전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어떤 질서를 위해 주인이 종들을 데려왔음을 암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부분을 생략하고 가장 긴요하고 근본적인 부분만을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모든 이의 심판자와 주로 의미하고 있다.
  중세시대(540-1500)에는 초대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으나, 오리겐의 성서의 세가지 의미 해석법에 신비적 해석(the anagogical)이 하나 더 첨가되었다. 이것은 본문의 종말론적 의미를 몹시 중요시한다.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6-1274)였다. 그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여 알레고리적 해석을 극소화했다. 가라지 비유에서 악인의 세 형태, 즉 악한 카돌릭 교도, 종파 분리주의자, 이교도를 상기시킨다. 선인은 악인 없이 존재할 수 있으나,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결국 중세시대에도 실제 비유 해석에는 알레고리적 방법이 이어졌다.

      ⑵ 종교개혁과 그 이후 시대(1500-1888)

  종교개혁은 성서 해석법에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왔다. 존 칼빈(John Calvan, 1509-1564)은 가라지 비유 주석에서, 문자적이며 직접적인 해석을 강조한다. "교회는 이 세상의 순례 여행 중에 있는 선한 자와 진실한 자 뿐 아니라 악한 자와 이교도들도 함께 섞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공격들로부터 넘어지지 않는 일관된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도나투스(John Maldonatus, 1534-1583)는 교회 안에는 좋은 씨와 나쁜 씨가 함께 존재하며, 그리스도는 나쁜 씨의 창조자가 아니라 좋은 씨의 창조자이고, 나쁜 씨는 마귀가 뿌렸으며, 그리스도는 마귀가 뿌린 씨를 추수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실 것이며, 그 전까지 나쁜 씨는 결코 뽑히지 않은 것을 예수께서 특별히 가르치시고자 하셨다고 했다.
  그 후, 19세기 비유 해석에서 가장 영향력있었던 트렌치(R.C. Trench)는 알레고리화에 반대했으나 실제로는 이 방법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비유를 속박하고 있었던 우의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⑶ 현대적인 해석 방법(율리허에서 현재까지)

  율리허는 가라지 비유에서, 마태는 하늘 나라와 인간보다는 진행되는 역사를 유사하게 관계를 설정하며, 무엇보다도 명령의 성취가 자명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마태는 자기의 의도를 추수(       s)의 의미에서 분명히 한다.        s는 세계의 완성을 의미하며, 이때 명령이 완수될 것을 주장한다. 마태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드러내는데 있어, 가능한 모든 것을 독자에의 요구와 연결시키고 있다. 악마는 메시야에 대한 증오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마의 자식들을 보게 되나 미리 그 양자의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올 때에야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 속에 떨어지게 되며, 선인들은 빛과 기쁨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해석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발전이 보다 강조되어 있다.
  슈바이처는 철저 종말론을 고수하면서, 예수가 너무 물질적이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동시대 유대인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보다 영적인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가라지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 및 성장과 관계있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영적 견해를 지지해준다.
  글래든(Washington Gladden)은 하늘 나라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점차 발전해가는 한 조직'이라 하였으며, 가라지 비유는 정의의 나라가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사회 생활 속에서 질서있게 발전되는 것이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카둑스(A.T. Cadoux)는 가라지 비유는 비유들의 여러 범주 중 '변명의 비유'로 예수가 비난받거나 혹은 자기의 제자들이나 무리에게 어떤 설명 내지 정당화가 필요할 때,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드에게 있어서 가라지 비유는 '성장의 비유'들 중의 하나로 실현된 종말론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비유의 교훈은 교회에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있으며, 최후 심판 이전에 악한 사람들을 쫓아내려는 어떤 의도도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는 죄인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즉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있으므로 농부가 추수때가 왔을 때 수확을 늦추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이스라엘에 죄인들이 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자체가 가려내는 심판의 과정이다.
  예레미야스는 가라지 비유는 마지막 심판을 다룬 종말론적 비유로써 왜 죄인들을 골라내고 순수한 메시야 공동체를 세우지 않는가 하는 열광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미리 갈라낸다는 사상을 명확히 거부하고 추수 때까지의 인내를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은 결코 갈라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으며, 숨은 메시야의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 신앙인들 사이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갈라낼 때를 정해두었고, 그때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는 모든 악한 자들과 거짓 신앙자들, 입술만의 상앙고백자들에게서 해방되어 종의 형상을 벗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맨슨(Manson)은 가라지 비유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설명하는 비유로 본다. 헌터(Hunter)는 가라지 비유의 요점을 악한 사람들을 선한 사람들로부터 가려내는 일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으로 본다. 무쓰너(Mussner)는 가라지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써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순수한 교회"를 거부하고 가라지가 밀 옆에 자라는 것을 허용한다. "추수" 때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하여 서로 갈라질 것이니 "잠깐동안 인내하라"는 것이다. 한편 원수, 즉 마귀는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 범인으로 하나님은 원수에게도 얼마간 시간과 장소와 여유를 허락하고 있다.
  킹스베리(Kingsbury)는 가라지 비유가 마태복음 13장의 성장에 관한 다섯 가지 비유들 중 두 번째 비유로 원래 예수의 것이 아니라 후에 편집된 것이며, 혼합된 형태의 알레고리적 비유인 우화(fable)라고 한다. 참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이 섞여 있는 마태 시대의 상황과 이 둘이 분리될 심판의 날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30절의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말은 마태에게 있어서 교회는 지금 거짓 이스라엘에게 공식적인 철수를 요구하므로써 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말씀의 선포 속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에 직면했지만 모든 이스라엘이 믿음과 순종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도티(Willam G. Doty)는 가라지 비유에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혹은 초대교회의-이 행해진 두가지 상황이 나타나 있다고 본다. 분분적으로는 예수와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죄인들과 동일시 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가라지가 누구며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며 서로 책망하는데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된다. 교회는 알곡으로부터 가라지가 분리되어 멸망하는 마지막 과정을 거쳐서 세워질 하늘 나라의 예비적인 왕국이므로 경건한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필요가 없다.
  크로싼(Crossan)은 가라지 비유는 언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아는 주인(농부)의 단호하고 신중한 행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하늘 나라의 도래에 따라 요구되는 반응에 관한 비유들로써 모두 대조되는 이미지 가운데 하늘 나라의 현존에 대한 계시와 이에 따른 결단을 내포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의 문제점은 추수를 거두어 들이는 것 뿐 아니라, 그의 원수를 속이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알곡을 보호하고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연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원수의 행동은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인에게 이익을 가져왔다.
  스미스(Smith)는 가라지 비유가 하늘 나라의 때와 시기는 하늘 나라의 고유한 성격에 의하여 정해지므로 문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스타인(Stein)은 가라지 비유를 최후의 심판 비유의 하나로 분류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직 임하지 않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참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라는 예레미야스의 논의에 동조한다. 이런 논의가 다음과 같은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명백히 입증되고 있다. 첫째는 열심당원들은 참을성이 없었다. 그들은 가라지로부터 밀을 즉각 분리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파괴를 의미했다. 둘째, 쿰란은 스스로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떠나 "잡초"(가라지)를 제거함으로써 광야에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공동체를 세웠다. 셋째, 제자들조차 그와 비슷한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밀과 가라지가 최종적으로 분리될 심판이 임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이 할 일이 아니라 "추수꾼"들이 행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퍼디(Purdy)는 일상생활을 예로 들어서 가라지 비유를 쉽고도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가라지 비유가 선과 인내를 함께 행할 때, 우리의 잔이 넘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은 거센 대립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수(사탄, 마귀)의 정체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일 것이라고 속삭이는 뱀처럼 악한 존재, 혹은 신앙을 시험하는 욥기의 유혹자,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는 유혹자, 가라지 비유에서 진짜를 혼란시켜 좋고 유익한 것을 뒤섞는 자, 예수를 배척하고 못 박는 악한 자라고 밝힌다. 그래서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라고 말했던 것이다.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추수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인내의 본을 보였던 것처럼, 신실한 기독교 일군은 탁월함이나 정의에 대한 대립과 맞서서 인내를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대립에 대한 인내가 악을 용인하는 것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가라지 비유에서 선과 탁월함에 맞서는 대항 세력을 다루는 전략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악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추수의 때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도나후(Donahue)는 문맥에 따라 가라지 비유의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비유에서 놀라운 요소는 가라지가 알곡과 함께 자라도록 주인이 허락한 점이며, 중심적인 공격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주인과 보자마자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는 종들과의 대조에 있다. 또한 밭의 주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원수의 행동이 가라지가 연료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13: 30) 주인의 자비로 끝난다는 역설도 포함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해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루는 율리허를 중심으로 초대 및 중세의 해석 방법과 현대적인 해석 방법으로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가라지 비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 방법을 고찰해 보았다. 요약하면 비유 해석사는 초대 교부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알레고리적 해석이 종교 개혁 때,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문자적 의미가 새롭게 강조되면서 도전을 받았지만, 여전히 깨뜨리지 못했다. 그후, 1888년 율리허에 이르러서야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탈피하여 비로소 현대의 비유 해석에 기점을 이루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었다. 한 마디로 탈 알레고리제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C. 내용 주해

    1. 본문 비유의 배경

  가라지를 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 히브리어로는 zoun, 아람어로는 zouna 혹은 zanah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이다. 이 단어의 뜻은 '간음하다', '연애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헬라어에서는        를 번역한 말인데, 이것은 밀과 흡사한 털이 있는 독보리(darnel)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는 lolium temnlentum이라 번역한다.
  가라지의 특성을 살펴보면 길이는 60센티미터 정도이고, 풀 같으며 검은 이삭을 낸다. 씨앗의 크기는 밀 이삭보다 조금 작다. 그리고 밀과 매우 흡사할뿐더러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뽑을 때, 밀도 함께 뽑힌다. 또한 가라지를 먹었을 경우, 역겨움과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설사가 나고 심하면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다.
  팔레스틴의 밀농사에서 밀밭에 가라지가 드물게 자라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농부들이 때때로 밀이나 보리 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을 본다. 농부들의 눈에 띄지 않거나 바빠서 미처 뽑아내지 못한 곡식과 더불어 익은 가라지는 탈곡이 끝나면 알곡에서 가려내어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불에 태운다.
  그런데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두는 이유는, 초기에는 밀과 가라지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분별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밀과 가라지가 이삭이 피어날 때는 분별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그 때는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너무나 한데 얽혀 있어서 가라지만 뽑아낼 수 없고, 가라지를 뽑으면 밀도 상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주신 본 비유에 대한 의미 해석(13: 37-43)

  가라지 비유는 13: 24-30에 실려 있고 13: 36-43에 주님에 의해 직접 해석되어 있다. 그런데 해석된 말씀은 성격이 다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37-39절에 이르는 '알레고리적 소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40-43절에 이르는 '소묵시록'이다. 먼저 37-39절에 나오는 일곱가지의 요소는 다음과 같이 알레고리화 되어 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 - 인자', '밭 - 세상', '좋은 씨 -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 -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는 원수 - 마귀', '추수 때 - 세상 끝', '추수꾼 - 천사'이다.
  여기서 좋은 씨와 가라지는 세상 안에 있는 두 종류의 사람, 곧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킨다. 킹스베리는 이 비유를 당시 믿는 참 이스라엘과 믿지 않는 거짓 이스라엘간의 구별로 해석하면서 마태의 교회가 당시 바리새적 유대교와 외면적으로는 제휴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 '소묵시록' 부분에서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들과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 40절의 '세상 끝날'에 대한 언급과 41-43절의 유대의 영광에 대한 재현의 표현이다. 세상 끝날에 천사들을 보내어서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모든 거치게 하는 것들"은 가라지들을 다시 다른 비유로 표현한 말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가라지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풀무불"은 종말적인 형벌의 상징이다.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계속 살아있으면서 고통을 겪는 참혹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가라지들과는 대조적으로 알곡들은 "의인들"로서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의인들은 현세에서 세상의 빛으로 비추다가 그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내세에서는 완전한 빛으로 빛을 내면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비유 자체에서보다는 주님의 해석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최종 운명이 더 예리하게 대조되어 있고, 알곡의 성격과 가라지의 성격이 의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본문과 또한 그 비유에 대하여 해석한 의미의 말씀과 강조점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는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비유가 가지고 있던 강조점이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나 복음서 기자의 삶의 자리에 와서는 다른 데로 옮겨졌다는 뜻이며, 따라서 삶의 자리가 달라짐에 따라 달라지게 된 비유의 강조점을 잘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맨 처음에 예수가 이 비유를 말씀하였을 때, 그 강조점은 29-30절에 나오는 주인의 말에 있었을 것이다. 즉 제자들은 사람에게 대한 심판이나 판단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 끝날에 직접 사람을 심판하실 때까지 보류하여야 하며, 그런 일은 하나님이나 그의 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36-43)을 통해 이 비유를 이 세대의 종말에 있을 심판에 대한 비유로 바꿔놓았다.
  이런 차이점에 대하여 예레미야스는 이 비유가 그물 비유와 마찬가지로 그의 청중들에게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인내의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는 인내의 필요성이 강조될 필요성이 있었고 그것을 가르쳐야 했다는 것이다. 열심당원들의 경우 그들은 당장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려고 조급해 했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 땅으로부터 로마인들을 뽑아내고 쫓아내는 것을 뜻했다.
  군드리(Gundry)도 바리새인, 엣세네파, 그리고 열심당원 혹은 그들의 선구자들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당장에 구별지으려고 했던 시도들이 예수의 활동 가운데서 이 비유의 자연스러운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려고 했던 점은 구별할 때가 어쩔 수 없이 오게될 것이지만 천국은 모든 종류의 인간들, 율법을 어기는 자나 율법을 지키는 자나, 열성적인 열심당원이나 묵시문학적 몽상가나, 버림받은 자나 존경받는 자를 모두 거두어 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가 가르치는 주된 강조점은 마침내 분리가 일어날 종말의 때까지 선인과 악인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완성 전에 그런 분리를 시도하려면 사회 자체를 뿌리뽑아야 할 것이다. 정확히 여기에 비유의 핵심이 있는데, 천국은 인간을 분리시키지 않고 세상에 들어왔다. 종말론적 완성 때에야 이 분리가 있을 것이다. 즉 심판의 날은 임하고 있지만 지금은 심판의 날이 아니므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이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마지막 때, 추수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3. 본문 주해
 
  가라지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심판을 경고하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모든 청중을 대상으로 가르치며, 인내 사상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 안에도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분리시켜서는 안되다는 사실을 내포하며, 초점은 '심판날'(Judgment day)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의 왕국은 최후의 심판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랄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대면하여 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 가라지 비유의 강조점이다.
  가라지 비유에서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분석해 보고, 본문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

      ⑴ 씨

  하나님 나라의 시작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은 그 넓은 의미에 있어서 씨를 뿌리는 행위에 비유된다. 이때에 씨는 복음의 진리를 영접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곡식은 바로 변형된 형태의 씨이다. 그 씨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영접함으로써 인간 본성이라는 땅에 생겨난 새로운 생활과 성품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새로운 생활과 성품은 그가 받아들인 진리의 도덕적인 산물이다.
  집 주인이 밭에 뿌린 씨(      )는 "좋은"(     ) 것이었다. 이때       가 갖는 표현력은 뿌려진 씨만이 아니라 사람들(people)도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적으로 그것은 그 말씀이 착근되는 그 개인(cf. 13: 38, " 그 나라의 아들들")에도 적합할 수가 있다. 또한 그 씨는 24절, 27절에서도 "좋은"(     )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이것은       (선한, 7: 17f; 12: 33-37)와 동의어적이며, 이 단어에 상응하는 도덕적, 윤리적 함축성들도 갖는다 이때 마태에게는      가 그 마귀의 지배를 받는 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나라의 아들로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은 본성적으로 그 개인이 갖고 있는, 혹은 소유할 수 있는 본유적, 혹은 정적 질이 아니다. 그것은 회개와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로 초치하는 그 말씀에 달렸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또한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선한 자는 의로운 자의 수에 들게 되며(13: 48ff; 13: 43), 마지막 날의 정죄와 심판의 불에서 면제되고(3: 10; 7: 19; 12: 33-36; 13: 48ff), 또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도 한다(13:43; 25:34).
  중요한 것은 선은 인간 본성에 있어 생득적(生得的)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 본성 내에는 선의 어떤 씨앗도 내재해 있지 않다. 그러나 인자에 의하여 좋은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수가 뿌린 씨는 좋은 씨 가운데에서 자라는 가라지였다. 동사            속의    는 그가 다른 종류의 씨를 뿌렸음을 나타낸다. 복합 전치사          은 새 씨가 좋은 씨 사이에 뿌려졌다는 생각을 추가한다.

      ⑵ 밭

  인자가 그의 곡식이 익을 장소로 정한 "밭"은 세상을 의미한다. 이 말의 분명한 두가지 의미를 생각해보면, 첫째, 그리스도의 나라를 의미하는 이 밭은 크기에 있어서 전 인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어느 한 민족의 제한된 영역이 결코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밭은 세상을 뜻한다. 그 밭에는 그의 곡식들이 자라면서 익고 있다. 그는 씨앗을 단순히 모든 세상에 넓게 뿌리신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현 세상에도 뿌리신다. 기독교를 온실의 식물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감상적인 생각이다.
  인자가 그의 곡식이 익을 장소로 정한 "밭"은 세상이라고 해석된 점을 강조하여 래드는 밭이 교회라는 해석을 비판한다. 이 비판은 심판 때까지 교회 안에서 책벌을 반대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도 선인과 악인,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함께 공존하므로 가라지는 뽑다가 천국의 아들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으므로 책벌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지만, 밭을 세상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라 여겨진다. 밭을 세상이라고 했으니 밭에도 가시적 교회가 있고 가시적 교회에도 가라지와 좋은 곡식이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넓게는 세상 안에는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고 있으며 좁게는 교회 안에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독보리)를 모아서 불에 태울 때까지 이 세상은 악할 뿐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순결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신부이기 때문에 모두 거듭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⑶ 원수

  밤중에 몰래 씨를 뿌리는 자가 있다. 이런 실례는 성경이 인간 범죄의 창시자로 기술하는 인물에게 완전히 부합된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공정한 계획의 방해자이다. 선하게 창조된 것에 대한 약탈자요 비난하는 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어떤 유익도 가져오지 않는다. 악은 오직 파괴하고 방해하고 소모시킨다. 선이 본래부터 우리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지 않았듯이 그래서 인자에 의하여 우리 본성에 심겨졌듯이, 악도 본래부터 우리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수 마귀에 의하여 우리 안에 심어진 것이다.
  공관복음 전승은 본질적으로 사탄이 세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자이다(눅 10: 18; 욥 1: 6). 둘째, 그는 어떤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험하는 자이다(막 1: 13; 마 4: 1-11; 막 8: 33). 셋째, 사탄은 귀신들의 주인으로서 귀신들을 통하여 자기 세력 하에서 괴로워하는 자들의 몸과 영혼에 해를 가한다. 이런 이유로 사탄은 악한 자, 부패케 하는 자라고 불린다(막 3: 26; 마 12: 26, 29; 눅 13: 16). 그래서 한마디로 사탄은 예수의 가장 큰 대적이며, 복음서 기자인 마태는 비유들 속에서 사탄을 "원수"라고 지칭한다(13: 25, 28, 39, 눅 10: 19).
      ⑷ 가라지

  가라지를 덧뿌리고(                     )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위에  뿌리다", "다시 뿌리다"는 뜻이다. 원수가 고의로 "곡식 가운데", 곡식 그 "위에"(   ) 뿌린 것은 "독보리, 깜부기"(       는 '가라지'가 아니라 '독보리' 또는 '잡종밀'을 가리킨다)이다.
  가라지(       )는 "독보리"로써 밀과 보리의 잎새를 닮은 풀같은 잎새를 갖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에 매우 흔하고, 알곡이 검은 곳을 제외하고는 곡식과 유사하며, 몰래 뿌려진 독초는 알곡보다 먼저 싹을 내밀고, 알곡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또한 이른 철에는 곡식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흙 속의 곡식의 뿌리와 가라지의 뿌리가 서로 엉켜있으므로 추수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근절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현대 농부들은 기술적으로 이것을 뽑아낸다.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일은 불행을 일으키는 새로운 방법을 야기시켰다. 이 새로운 방법의 주안점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의 모방에 있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말을 하고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성장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참 본성에 있어서는 불변적인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쓰거나 전혀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41b절에서는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기술하고 있다.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란, 윤리적-종말론적(ethico-Eschatological) 술어인          (실족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영적 파멸을 잠재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person), 혹은 사항을 가리켜 말한다. 또한 소극적 방식으로 비신자들이 예수께 대한 믿음에로 접근해 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것을 저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예의 사람들로서 유대주의 지도자들을 지목할 수 있다(마 23: 13). 또한 그들은 마태 교회 내의 기독교인들도, 즉 그들의 품행이 나빠서 다른 이들의 신앙에 위협이 되는 구성원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진다(cf. 마 7: 15; 18: 35; 24: 10ff; 25: 26, 30).
  그러나 마태는 결코 자기 교회의 한계들 내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18: 7절에서 알게 되는데, 거기서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라고 언명한다. 이 경우 "세상"은 인간(mankind)이고 이 "실족케 하는 인간"(mankind of offence)의 구체적 대표자들은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이방인들도 망각되어서는 안되며(13: 21), 그러나 이는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을 뜻한다(23: 13). 그러므로 "실족케 하는 자들"은 교회 내의 의사(擬似) 기독교인들(pseudo-Christians)과, 그 교회 영역 밖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에서, "불법"이라는 술어는 마태복음에서 네 차례만 나온다(13: 41; 23: 28; 24: 12; 7: 23). 마태는 "불법"을 설명하길,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는 것과 동일시한다(cf. 7: 15; 15: 21ff). 다른 하나는 불법을 야기시키는 것으로서의 불법을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종말이 다가올 수록 더욱더 극심해져 가는 것으로 보는 제반사의 상태들이다(24: 12). 그러므로 "불법"도 윤리적이고 종말론적인 술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중심에 놓인 사랑의 일들을 행치 않는 것을 뜻한다. 또한 도덕적 혼란의 만연을 시사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엄청난 범칙들을 뜻한다. 불법은 "의로움"(          )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특히 마태는 두 그룹의 불법을 단언한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7: 22). 두번째 그룹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외면적으로 보면 그들이 의로운 것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위선이 불법으로 가측 차 있다는 것이다(23: 28).
 
      ⑸ 잠을 잘 때에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 사람들은 밭의 일군, 주인의 일군이다. 그러나 일군의 잘못은 없다. 그들은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고 곤히 잠들었으나 이 때가 원수가 엿보는 때였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그들의 밭과 가축을 매일매일 찾아가 보살펴야 한다. 곡식이 무성할 때 그 속에서 기쁨을 맛보면서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축복하여 번성케하시고 그들이 심은 것을 배가시켜 주는 기쁨을 맛봐야 한다. 동시에 가라지가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슬픔 속에서 경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오류, 이단, 위선, 교인들 가운데에 점점 확장되어져 나가는 형식적인 신앙을 볼 때,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고 그들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행해야 한다.

      ⑹ 추수꾼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이 사실은 이 비유들이 제시한 기간의 종점을 보여준다. "세상 끝"이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왕국을 확립하시기 이전인 현세의 종말을 말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예수의 지상 사역으로부터 그의 재림시에 있을 심판까지를 포괄한다. 그의 재림시에 천사들이 악한 자들을 모아 심판대에 던져 넣을 것이다. '끝'을 얘기할 때에 성경은 항상 "대환란의 끝"을 가리킨다.
  추수때까지 선은 계속해서 더 좋게 성장할 것이요 악은 더 악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들이 계속하여 더해가고 증가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악은 더욱 격렬하게, 더욱 극심하게, 더욱 음흉하게, 더욱 악독하게 자랄 것이다(살후 2: 6-10). 선과 악이 충분히 성숙하게 되면 그 때에 선과 악을 분리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바로 그 때가 세상 끝인 대환란의 끝이다.
  환란 끝에 천사들은 두 가지로 "추수"를 하게 되는데, 하나는 곡식을 하나님의 창고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보리를 묶어 불에 태우는 것이다. 독보리를 태우는 모습(마 13: 39-40)은 계시록 14: 17-19에서 "땅의 포도"를 거두는 모습과 같고, 마태복음 3: 12에서 쭉정이를 불로 태우는 모습과 같다.
  곡식을 모아들이는 곡간(                )이란 "곡물창고, 저장창고, 어떤 것을 넣어두는 곳"의 의미이다.

  이상의 것을 바탕으로 24b절이 갖고 있는 사상의 윤곽을 그려보면, 그 사람, 즉 그 집의 주인은 예수시며, 그 밭은 이스라엘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왕적 통치 하에 살아갈 그리고 순종과 사랑의 일들로 그의 뜻을 따를 한 백성을 낳으려는(beget) 의도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그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오셔서 그 고유의 메시지와 그의 교회의 케리그마라는 전달수단을 통해 그 말씀을, 즉 하나님의 뜻 아래 살며, 또 그것을 행하기도 하는 한 민족을 창출할 의도인 그 말씀을, 이스라엘 안에 전파했다는 관념이 놓여 있게 된다.
  그러나 밤중에 몰래 씨를 뿌리는 자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발견되거나 잡히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깊이 잠들기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린다. 성경은 그를 인간 범죄의 창시자로 지목한다. 처음부터 그는 하나님의 공정한 계획의 방해자이다. 선하게 창조된 것에 대한 약탈자요 비난하는 자다. 그가 밤중에 몰래 뿌린 씨앗은 어떤 유익도 가져오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방해하고 소모시킬 뿐이다. 이 가라지는 착한 행실이나 선한 지식을 좀먹는 이기적인 동기, 거짓된 생각을 상징한다. 영적인 믿음을 해치고 의로운 가르침을 훼방하는 이기적인 욕망, 그릇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유전된 악을 상징한다.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일은 불행을 일으키는 새로운 방법을 야기시켰다. 이 새로운 방법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의 동참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말을 하고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 본성에 있어서는 불변적인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쓰거나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극도의 대조 가운데 있는 인간 성품은 초자연적인 배경에 의존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종들의 질문 - 주인이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질문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것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느끼는 것은, 메시아의 도래와 그 교회의 선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순종과 믿음으로 그 말씀에 호응치 않아 온 선민의 그런 큰 옹이(segment)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 그리고 그것의 중심이 예수님 안에 있는 그 길에로 유대인 전체가 이끌어져야 한다는 진정한 열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개종의 실패는 마태와 그의 교회가 볼 때에, 사탄이 이 백성들 가운데서 활동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28a). 이 때문에 "이스라엘들"의 두 진영들 간에는 균열이 존재했다. 밀로 표상되고 종들로 기술되는 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살고 있었고, 독보리로 표상되는 또 하나의 공동체는 사탄의 지배 하에 살고 있었다.
  이 비유의 관심은 신속하게 역사의 종말로 옮겨간다. 이 사이에 놓여있는 모든 것은 자연적인 발전이다. 발전하는 시간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라게 두어라"는 소극적인 명령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은 선인과 악인이 나란히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셨다. 신앙공동체로서 교회가 악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그 성도들로부터 추방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의무이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부당하거나 강제적인 분리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에 있을 사람들에게 대한 교훈으로서 본문의 중요함은 그 나라의 왕의 과실이 없는 종들에 의한 참과 거짓 사이의 최종적인 두려운 분리에 있다. 가라지를 뽑지말라는 명령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 선인과 악인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를 뽑다"(uproot,        )라는 동사는 신약에 네차례 나오는데, 제 1복음서에만 두차례 나타난다(13: 29; 15: 13). 마태는 15: 13절에서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리한 변해에, 그리고 13: 29절에서는 유대군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변해(a parable apology)에 사용함으로써, 가라지 비유에서의 중요한 문제가 바리새적 유대교에 정반대되는 것으로서의 교회라는 또 하나의 시사를 갖는다. 교회에게는 큐리오스 예수의 그 반응이 믿지 않는 이스라엘로부터 최종적 철수를, 그렇게 해서 그것에 심판의 촉발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걸 뜻하는게 분명하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일은 일의 특성에 따라 전문가들 즉 추숫군들에게 맡겨질 것이다. 그 때에 주인은 추숫군들에게 먼저 가라지들을 불사르게 모으고 그 후에 매우 조심스럽게 곡식을 모아 창고에 넣으라고 명령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뜻한다.
  이 비유의 주요 배역은 씨가 아니고 집 주인, 종, 가라지, 원수 등이다. 씨의 운명이 관찰의 중심이 아니고 주인의 처사가 중심이다.
  '좋은 씨'라고 한 것은 '가라지'를 예상하고 말한 것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이다. 이 비유에서는 가라지가 처음부터 다른 씨에서 난 것이라고 하여 악의 근원이 선과 다르다는 것을 지시하게 한다. 그것은 미숙한 곡식이 아니고 곡식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독한 것이다.
  38절에서는 가라지를 '악한 자의 자손들'이라고 한다. 악마가 가라지 씨를 뿌린 때는 사람들이 잠을 잘 때라고 하여서, 악마의 행동이 사람의 주목을 넘는 사건인 것을 말한다. 그 악마는 '원수'라고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성장에 대한 반항자인 것을 표시한다.
  가라지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일하는 종들이었고 주인은 무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종들이 누구란 해석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복음의 일군들을 지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라지가 좋은 곡식에 해를 끼치고 일하는 사람을 괴롭게 하므로 곧 뽑아버리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의 표현은 사람들의 상식이나 종들의 소원에 배치되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비유의 주안점(主眼點)으로서 예수께서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Ⅳ.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예수의 비유들에서는 한 가지가 아닌 한 가지 이상의 요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유들은 대단히 복잡하게 묘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단지 하나님의 현현과 주의 날, 마지막 심판의 위엄에 견지에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해있는 인류 가운데에서 장래의 복을 예비하여 둔 현재의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신적 주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와 관련된 비유들은 종말에 권능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의 삶 속에 돌진해 오는 하나님 나라도 가르치고 있다.
  가라지 비유에서는 나름대로 독특한 줄거리와 메시지를 갖고 있다. 즉 마태의 독립적인 것으로서 매우 명확한 상황을 특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씨뿌림에 대한 묘사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주권의 개시를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아울러 반대 세력이 존재하며 그것은 미래의 약속을 위협할만큼 만만치 않는 상대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이 비유의 핵심적 요소인 "원수의 행위"는 예수의 사역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가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였으며(마 11: 12), 많은 경우에서도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의 견지에서 자신의 사역을 말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마귀를 내어 쫓았고(마 12: 28),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강한 자보다 더 강했다(막 3: 27). 그러나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능력을 덧입었다면 왜 그는 서둘러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여 핍박받는 의인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가 만들었던 걸림돌을 반영한다. 그리고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가졌다면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악한 자들에 대해 왜 그냥 방치하고 있는 지를 의심하고 비방했을 것이다.
  이런 이해 관계들의 배경 안에서 비로소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묘사는 생생하게 된다. 그 목적은 예수와 함께 세상에 탄생하게 된 새로운 것과 아울러 악, 즉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원수들도 사람들 가운데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라는 명령은 예수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해결책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구속적 권능을 현재에서 활동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중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권능의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어라"라는 명령은 의인의 참지 못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인내를 위한 요청을 나타낸다. 또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주권의 출발점을 현재로 삼는다. 하지만 다른 비유들보다 이 비유에서는 신적 주권의 역할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은 또한 심판에서 명백히 드러나지만 심판은 하나님의 때에 드러날 것을 강조한다.
  "원수의 행위"는 예수 안에서 신적 주권의 활동에 반대하는 움직임, 또한 마태복음 11-12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탄의 방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의에 대한 응답은 마태복음 3:7-12절에 나오는 "추수를 서두르고, 잡초를 태우며, 알곡을 모아들이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이다. 그는 메시야가 와서 최초로 이런 일을 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이것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례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이 비유의 마지막 말들은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마태의 기록의 결론적인 진술과 흡사하다(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30절/마3: 12 참고). 예수는 이 비유에서 요한의 설교를 의도적으로 재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을 묶고 태우는 때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으며, 추수는 밝혀지지 않은 미래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Dall)은 이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시기와 둘이 서로 분리되어 가라지는 태우고, 곡식은 묶어 곡간에 넣는 추수의 시기와의 대비를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추수 시기가 오면 분리의 시기가 명백히 온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달의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 이전 시기와 하나님 나라의 시기 사이에 대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신적 주권의 개입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서 핵심은 현재에서 신적 주권의 활동의 방식과 추수와 언급된 미래에서 그 표출 사이의 대비이다. 즉 예수님의 사역의 현재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직면하는 적의와 반대를 침묵시키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반면에 미래의 대단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은 결정적인 심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가 악의 세력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없다. 도리어 종말의 심판에서 드러날 신적 주권은 예수 안에서 구속의 은혜로 작용하는 동일한 주권이다.

  A. 하나님 통치 실현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은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고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적대적 세력들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단과 악의 세력들을 멸하시고 사람들을 악의 지배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적인 통치를 가리킨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있는 활동이 예수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그 나라는 역사 속에 임하여 있다.

    1. 복음 전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그가 행하신 이적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다. 근본적으로 이 말씀은 메시야 도래와 그 나라 도래에의 약속이 예수의 이적들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 가운데에서도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복음의 전파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임하였다는 증거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사 61: 1f.)는 예언의 말씀 중 euangelizesthai(복음을 전파하다)는 선포 그 자체 속에서 동터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복음 선포와 함께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 7)라고 했다. 이러한 종말론적 기쁨의 포고자에 대한 기대는 예수 당시의 유대적 정황에서 매우 활발하게 유포되어 있었고 예수는 설교와 가르침, 자신의 삶과 인격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막 1: 15; 마4: 17)라는 말은 예수 당대의 그 어떤 유대 문헌이나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혹은 바로 눈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는 예수 안에서, 또 시간적으로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도래한 나라이며, 사람들은 가까워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때가 찼고"로 시작하는 것은 종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할당된 때의 분량이 찼으며, 때가 한계에 도달했다면, 더 이상 기다림은 없다. 트릴링(Trilling)은 이점을 강조하여 때가 확실히 찬 것이며, 대부분이나 거의 찬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시작되고 있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미래에 있을 어떤 사건을 선포한 것을 예수는 현존하고 실제적인 실재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즉 요한이 요약한 바 미래에의 한 거대한 사건에의 비젼이 예수의 설교 가운데서는 이미 성취된 '현존'으로 묘사되고 있다.

    2. 축귀(逐鬼) 현상
  이런 현상이 예수의 축귀(逐鬼) 보도(마 12: 28; 눅 11: 20)에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사탄의 나라와 대립되는 영적이며 구속사적인 나라요 자신은 사탄과 싸워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신자라는 점,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맨슨(Manson)은 이 구절을 "이것은 악령들의 퇴장이 신적 임재의 결과이며, 신적 임재의 준비가 아니다. 이것은 복음과 다른 종교들간의 차이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로빈슨(J. M. Robinson)은 이런 귀신 축출들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가져오기 위한 역사 속에서의 우주적 투쟁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예수의 마귀 축출의 의미는 정확히, 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정복과 사탄의 멸망 전에 하나님 나라가 사탄을 예비적으로 다루나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기 위해 사탄의 영역에 쳐들어왔다(마 12: 29). 이때 예수가 말한 최종적인 목표는 사람들을 사탄의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귀신 축출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목표나 그 최종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가 귀신 축출이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경고한 것에 의해 입증된다. 사람을 사탄의 종됨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집을 비워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거주자가 들어가 재산을 취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종적 행복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진공상태가 생긴 것뿐이다(마 12: 43-45; 눅 11: 24-26). 어떤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다면 사탄으로부터의 구출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같이 마귀 축출은 단지 내적인 영적 실재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 양상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의한 이 사탄에의 정복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전, 이 세대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사탄의 완전한 패배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레베스타드(R. Leivestad)는 "가장 단순한 설명은 귀신 축출들 자체가 악마와 그의 나라에 대한 전투의 승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몸에서 쫓겨날 때마다 그것은 사탄이 패퇴된 상태이며 자기의 세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오는 세대에 앞서서 하나님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보내어진 70인 제자의 사명에 의해 다시 한 번 예증된다(눅 10: 9). 그들은 예수께 돌아와 자기들이 마귀를 이기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기쁘게 보고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 18). 오토는 이에 대하여 "예수는 하늘에서의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환상을 보았다. 이 하늘의 승리가 거대한 파도와 같은 능력을 일으켜서 땅에까지 밀려들게 되었다. 예수는 이 종말론적 능력의 격동(surge)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사역은 이 감동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자는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그에게 자신을 가져다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이스(J. Weiss)는 예수가 환상 속에서 사탄이 정복되는 것을 보고 그러므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확신하게 된 황홀경의 체험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건 초인간이건 자기를 반대하는 실제적인 영적 적들이 있기 때문에 '와야만'(come)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coming)로 사탄의 능력이 침범을 당해 그의 나라는 전복될 것이다.
  보우맨(Bowman)은 사탄의 추락은 단지 영원한 질서 속에서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평면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예수의 인물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되며, 그의 사역을 하늘의 능력이 넘쳐서 나온 일종의 반영(reflex)으로 보아서도 안된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예수의 인물과 사역 안에 두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 예수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다. 마귀들에 대한 승리는 영적 영역에서의 승리이며, 그것은 예수가 악을 전복시키고 인간을 노예상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역사 평면에 왔기 때문에 생겨났던 것이다.
  언제 사탄의 추락이 일어났는가? 잔(T. Zahn)은 예수의 시험 때 사탄의 추락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사탄의 추락이 마귀 축출을 행할 수 있었던 제자들의 사역에 앞서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옳지 않은 것 같다. 누가복음 10: 18과 마태복음 12: 28과 같은 말들은 사탄이 예수에 의해 공격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말들은 바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사탄에 대한 영적인 패퇴로 해석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하늘로부터의 사탄의 축출은 구속적(redemptive)인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의 패퇴, 곧 어린 양의 피로 사탄을 이긴 것을 의미한다(계 12: 10, 11). 유대 사상에서 전적으로 이 세대의 종말에 일어나리라 생각했던 사탄에 대한 승리가 어떤 의미에서 역사 속에서 예수의 인격과 사명 안에서 일어났다. 사탄의 추락을 초래한 것은 제자들 자신이 아니라 예수가 그들에게 준 권위(눅 10: 19)였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자기들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의 권위는 위임된 권위였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악의 세력의 패퇴는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 나라의 싸움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 나라의 싸움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한 여지를 만들어 놓는 것뿐이다. 악의 패망은 인간 구원의 일부분이며 한 조각이다. 기뻐해야 할 참된 이유는 성취되고 있는 구원때문이다.

    3. 이적 행위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의 이적 행위의 사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의 자신의 치유 행위를 구원의 때의 표적이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이적들 사이의 사실적 관계는 귀신들을 내어쫓는 사건들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이적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이 모든 것들이 사탄의 권세가 파하여졌고, 그러한 까닭에 그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질병이란 것은 사탄이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고 일반적으로 간주하고 있고, 악한 자(the evil one) 곧 마귀에 대항하여 예수께서 싸우시는 것은 윤리적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육체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런 까닭에 몇군데에서 귀신들린 것은 육체적 질병을 낳게 하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마 9: 32ff; 12: 22ff; 막 9: 25). 혹은 귀신들린 것은 곧 일련의 육체의 질병들이라고 언급되기도 하였다(마4: 24). 동시에 사탄은 어떤 귀신들린 것에 대한 언급이 없이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통의 원인으로도 불린다(눅 13: 11, 16).
  이것과 연관시켜서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은 예수께서 육체적인 병을 고치고 다른 이적들을 행할 때 사용한 '꾸짖다'(rebuke)는 말의 특이한 용례이다. 귀신들은 예수께 꾸짖음을 받았다(막 3: 17ff; 9: 25). 동일한 표현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되었다(눅 4: 39). 그런데 '꾸짖다'의 단어는 자연계에 있어서의 예수의 절대적 권위가 죄와 세상에 임한 저주의 결과로 자연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파괴적인 영향력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현시(顯示)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주권자가 지배하고 있는 영역에 들어와서는 창조를 유린하고 있는 적대 세력들을 일소하신다. 그는 다시 통치자가 되시고 자연의 주와 왕이 되신다. 그는 자연계에 있는 원수의 세력을 대항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풍요로움을 마음껏 발휘하신다. 그 한 예로써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 수 있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 능력을 지시하는 명칭을 표시하는 전문적인 용어를 두나미스(       :능력)라 할 수 있겠다(막 6: 14; 5: 30; 눅 5: 17; 눅 4: 36; 막 6: 5; 마7: 22; 11: 20). 이 능력은 완전히 신적 능력의 절정을 의미한다. 예수는 두나미스라고도 표현되고(마 26: 64)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결정적인 임함(cf. 막 9: 1; 13: 26)으로 알려져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실현된 바로 그 분이다. 이 종말론적인 능력은 세상과 역사를 그 목표에로 이끄는 역사적인 힘이다.
  이런 모든 것은 바로 예수의 인격과 그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현재적인 실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B. 하나님 나라가 갖는 심판 사상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선포하면서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에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잇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교훈에서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를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곳에서 예수는 장차 인자의 영광스러운 오심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즉 역사의 종국적인 완성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인격과 독특한 사역에 근거를 두고 말씀하신 반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인자의 모습으로서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가라지 비유는 최종적인 선별이 이루어질 심판의 정경을 기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본문은 심판의 최종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청중들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촉구하신다. 예수의 삶의 정황에서 그런 가르침의 필요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 한가지가 열심당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가라지로부터 알곡들을 가려내려고 했으며, 바리새인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도 없이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이미 임했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마지막 심판의 때를 말씀하였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의 심판 아래 서야만 한다.

    1. 주의 날

  일단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오랜 사용 역사를 가진 용어인 "그 날"에 관한 불길한 말들을 듣는다. 아모스 5: 18 이하 이래로 구약의 예언은 "주의 날"을 가리켜 왔다. 묵시문학들은 모든 날들의 끝을 의미하는 다가오는 날을 선포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 날"은 종말의 날이 될 것이다. 예수 전승에서 세 가지 개념이 이 용어와 결합되어 있다.
  첫째, 지배적인 개념은 누가복음 10: 12절에 나온다.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 - 예수를 거부한 갈릴리의 성읍들 -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태의 병행구(10: 15)에서는 이를 "심판 날에"라고 더 자세히 해석해 주고 있다. "심판 날"이라는 흔한 묵시적 표현은 공관복음서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 표현들이 전승사적으로 문제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가 역사를 종말로 이끌 심판 때에 하나님이 출현할 것임을 선포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둘째, "그 날"은 심판의 기대와 결합되어 있는 것과 아울러 인자의 오심과 결합되어 있다. 마태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 27)"라고 표현함으로써 인자의 '파루시아'가 인자의 오심이지 귀환이 아님을 나타낸다. '파루시아'라는 말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신들 및 통치자들의 오심을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인자의 미래적 오심은 가장 오래된 전승층에서 친숙한 개념이었다. 셋째, "그 날"은 마가복음 14: 25에서 하나님 나라와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예수의 말씀들과 비유들의 가장 오래된 전승층에서 하나님 나라, 심판, 인자의 미래적 도래는 나란히 선포되었고, 그것들이 함축하고 있는 풍부한 모든 시간적 의미와 함께 예수에 의해 훨씬 더 구체성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 임박한 도래

  예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출현이 시간적으로 근접해 있음을 "선교적" 형태로 선포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막 13: 28)로부터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시대의 징조, 즉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일종의 가상 나팔이다. 근접성에 대한 이런 언급들 이외에도, 다른 언급들이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의 형태로 등장한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마지막에 나오는 설명의 말씀(눅 18: 8a)은 하나님은 자기에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곧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한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간구하였던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세 개의 말씀들이 동일한 케리그마적 의도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짧은 기간의 유예를 언급하고 있다(막 13: 30; 막 9: 1; 마 10: 23b).
  임박한 기대에 관한 이런 진술들은 첫째, 그 수가 결코 많지 않다. 또한 전승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한 비유들만큼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심판의 날과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자기 세대에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였을 것이다.
  둘째, 예수는 묵시론적 견지에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는 근본적으로 묵시론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던 시대 구분의 계산들을 거부했고, 따라서 역사 진행에 관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17: 20절 이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비적인 지표들(meta paratereseos)을 토대로 계산될 수 없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늘의 아버지만 아신다.
  셋째, 묵시론에서는 세상의 시간을 분침까지 가리켜서 임박한 도래를 예고했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도래를 예비하라고 긴급하게 경고했다. 기다릴 시간이 있느냐 또는 시간이 촉박하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기 위하여 사람들과 하나님의 오심 사이에 간격을 두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고 사람들을 기약없고 계산할 수 없는 도래 앞에 정면으로 세워놓았다. 기간의 유예는 오직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다.

  C.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한다. 하나는 직설법형으로 "때가 차매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임하였다"이고, 다른 하나는 명령형의 외침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구원의 선물이란 죄의 용서, 하나님의 자녀됨, 의로움, 영생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회개와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고 이러한 선물들을 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가 산상수훈을 선포하실 때 소위 팔복의 복음으로 논리 정연하게 전개하였음을 주목한다. 그 복은 물질에 관한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사는 공동체에 대한 전제 조건을 세운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스로의 종교적-윤리적 자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의 진짜 자격은 예수가 그들에게 주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는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그 앞에 설 때에 구원과 메시야적 기쁨이라는 종말론적인 선물을 주었다. 이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룬다. 처음의 4가지 복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적인 삶의 기준을 묘사한다. 후반부의 4가지 복은 앞의 4절에 제시된 바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비와 평화를 가져오는 무리라는 개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의무화된 몇 개의 윤리적 노력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은사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당연한 귀결이 되는 삶의 양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새로운 의

  이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능가하였다(마 5: 20).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모든 시대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형상을 따르는 삶으로 부름 받았으며, 또 예수가 성취하신 계명과 일치하신 삶에로 성장되어 간다. 이렇게 예수의 새로운 삶은 그분의 구원 사역 안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의 선물은 생명이며, 그 생명은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일깨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적 본성이며 그 본성은 외부적 행위의 기초가 된다. 의로운 마음은 의로운 행위로 나타나진다. 그것을 듣고 행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 의의 날에는 의로운 행위가 인정받는다.
  이 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주시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수는 구원을 선포하고 인간을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며, 그에게 죄에 대한 무상의 용서를 베풀어주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에 있으며, 그럴 자격과 공로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구원이란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요 이웃에 대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기쁨으로까지 번져가는 것이다.
  인간의 회개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회개(        )의 문자적인 의미는 생각(혹은 목적)을 바꾸다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나함(naham)을 번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나함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숨을 헐떡이다, 한숨짓다, 신음하다(pant, sigh, groan)이다. 이 두 단어는 자주 마음의 변화 혹은 도덕과는 무관한 의미로 한숨짓는 것을 의미하였지만 예레미야서 6: 8; 31: 19과 욥기 42: 6과 같은 구절에서는 도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예레미야서 31: 19에서 '나함'의 그리스어 동의어인 '메타노에오'라는 말로 표현된 진정한 회개의 요소를 본다. 이런 의미가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라는 라는 말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메타메로마이'라는 동사는 후회하다, 뉘우치다 라는 뜻을 가진 수동형 데포넌트(deponent) 동사이다. 이 동사는 후회와 자책, 즉 문자으로 표현하면 '영혼의 자기 자신에 대한 험담'의 감정적인 요소를 표현하였다. 이때 감정적인 측면은 '메타메로마이'라는 단어에 기초를 두고 있고, 반면 마음과 목적의 완전한 변화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에서 표현되고 있다. '메타메로마이'는 '나함'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 편에서든지 백성들 편에서든지 간에, 도덕적인 의미와는 무관하게 후회하거나 뉘우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일번적으로 회개(repentance)라고 부르는 것의 넓은 범위에 속한다.
  회개라는 의미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세 번째 헬라어 동사는 '에피스트레포'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돌이키다, 방향을 바꾸다'(마 9:22; 12:44)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로 돌이킴 혹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함이라는 은유적인 의미로 쉽게 이어진다. 그런데 70인역 성경은 '아포카티스테미'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그 동사는 회복하다(restore) 혹은 되찾다(bring back)의 의미이다. 예수가 이 동사를 사용한 의미는 마음을 살핀다는 뜻이 포함된다.
  회개의 본질은 첫째, 회개할 책임이 사람에게 있음이며, 둘째, 회개는 믿음 및 사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셋째, 세례 요한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마 3: 8)을 요구하였다. 넷째,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다섯째, 회개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여섯째, 회개는 절대적인 자기 부인을 포함한다. 사람이 종교적이 되려면 그는 그의 모든 죄악됨과 함께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회개(        ) 역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태도를 드러낸다. 그 나라는 단순한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를 요구한다. 신앙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수용적 자세를 요구한다. 인간은 '복음을 믿는 한'에서 회개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불가분의 긴밀한 관련을 지닌다. 그분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즉 메시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고유한 사명이며, 백성들은 그분을 믿어야 하고 그분을 통하여 회개하여야 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

  예수는 마태복음 5: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요구하였다. 모든 계명은 바로 이 요구, 즉 순전하고 온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는 요구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내적 행동, 즉 하나님과 그의 이웃들에 대한 행동에 있어서 완전하고 온전하며 흠 잡을 것이 없음을 뜻한다. 온 갈증, 성적 욕구, 부와 권력 등의 욕구와 삶 자체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복속시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삶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그 삶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이 요구된다.
 '자기 부인'(마 16: 24)은 계속 반복되는 주제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를 진다'(마 16: 24)는 것은 인간의 명예심과 스스로 택한 모든 삶의 목표를 죽이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설정한 목표 - 설령 그것이 이타적이며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했다. 또한 스스로 낮아져서 죽기까지 복종하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 예수의 최상의 반응이었다. 이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으라고 명하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성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순종을 들어서, 우리가 사랑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인간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반응할 것을 깨닫도록 이끈다(히 5: 8).

    3. 필수적인 이웃 사랑

  예수가 유대교와 충돌한 것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데 그 동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철저화 때문이었다. 또 예수의 종말사상에서, 지금 여기에서 사람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 역시 이웃 사랑이다. 또한 예수의 하나님 이해는 언제나 이웃 사랑과 직결되어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너와 더불어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웃이란 개념은 '나'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웃 사랑에서 원수에 대한 개념을 살펴야 한다. 원수란 개개인에게 생긴 적대자와 집단적으로 발생한 원수를 말한다. 이 사랑은 먼저 화해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웃'이란 따로 없고 사랑하는 자 자신이 '이웃'이 되는 것이며 '원수'도 내가 사랑하므로 그는 더 이상 나의 '원수'가 아니고 또 나는 그의 '이웃'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이웃에 이익을 베푸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인의 참사랑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았다(눅 10: 25-37). 그리고 사랑해야 할 이웃은 자기 친척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라고 말씀하였다(마 5: 42-46).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모범 -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이고 섬기는 자세의 사랑과 자비라는 모범을 제시해주었다(마 16: 24; 요 13: 13 이하; 13: 34; 15: 13; 고전 13장; 고후 8: 9; 빌 2: 5-9). 그런즉 인자가 최후의 심판 때 재어(尺)볼 규범은 사랑과 자비 - 실천적인 자비 - 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윤리질서의 바른 순환을 위한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명령이며 따라서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요구된다. 이 사랑에는 철저한 자기 극복만이 요청되며 자신의 어떤 흥미나 목적 따위는 전혀 고려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그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뵙고자 하는 갈망이 요구된다. 그러한 갈망과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4. 성령의 도움

  예수의 역사적 도래는 성령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성령은 예수의 존재와 사명 안에 현존하여 작용하고 있다. 이 영은 예수로 하여금 구원 약속을 선포하게 하며, 선포하는 구원 현실을 이루어주었다. 구원 역사 전체 안에 현존하고 작용하는 성령이 예수 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여 계심은 구약에서 이루어졌던 성령에 대한 약속이 예수의 도래와 함께 성취되고 있으며, 성령에 의한 새로운 구원 시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나타내는 중요한 구원론적 표징이다. 이러한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예수의 지상 삶 동안 감춰져 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결정적인 방법으로 역사 안에 나타났다.
  만일 우리가 매번 새로이 우리의 전 삶에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의식·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본질과 사상들 속에서 거룩하게 되었으면, 이렇게 순수하고 거룩하게 된 그릇을 채워야만 하며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 안의 기쁨으로 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신약의 진술에 따라 예비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 왕국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왕적인 통치의 삶의 근본 요소인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령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의 영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배움의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위로자, 돕는자, 변호자가 되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예수의 말씀을 상기하게 하고 그 말씀을 살아있게 한다. 성령은 예수를 영화롭게 하며 신자의 실제적 삶에서 승리하게 한다.

    5.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결단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명령은 급진적이고 무조건적인 결단에 대한 것이었다. 그 결단은 하나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의 두가지 필수적인 요소는 지식(knowledge)과 신뢰(trust)이다. 이때 믿음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지식이다. 자신의 믿음을 세울 적절한 근거들이 없이는 믿을 수 없다. 이것은 믿음의 토대가 되는 증거들을 이해할 능력과 의지를 전제한다. 두 번째 요소인 신뢰는 이 지식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말씀과 행위들과 이적들을 통하여 어어진 예수에 관한 이런 지식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를 신뢰하도록 고무된다.
그것은 너무나 급진적인 결단을 해야 하므로 모든 다른 관계들에 등을 돌려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가정을 포기하게 할 수도 있다(눅9: 58).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정상적인 인간 책임을 훨씬 넘어서야 한다(눅9: 60). 그것은 가장 친근한 가정관계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눅9: 61). 사실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이 다른 충성들과 충돌할 때, 그것이 삶의 가장 소중한 관계를 포함한다 할지라도 이차적인 충성들은 포기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위한 결단의 길에 방해되는 어떠한 끈이나 인간적인 애정도 파괴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결단을 내릴 때 모든 애정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눅14: 33). 이런 포기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눅 14: 26).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운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은 이와같은 결단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자들은 오는 세대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Ⅴ. 결론

  구약시대의 백성들이 생각하던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현재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함과 동시에 예언을 통하여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와 1세기 때의 그 의미는 변형을 가지고 온다. 하나님께서 왕적 통치자로서 지상에서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신약시대 즉 예수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가 어떠한가는 필자가 필두로 제창한 가라지 비유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현재의 삶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그리고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되면 완성되어질 것이라는 의미에로의 전환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실재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이지만 완성은 아니다. 구약 성경 약속의 성취인 예수의 인물과 사역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다. 이 성취의 메시지는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견해와 동행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으로 소개된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로 나타나고 있다.
  가라지 비유 그 비유 속에 나타나 있는 언어만으로는 예수께서 의도하신 뜻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이에 예수의 비유의 특색을 말하고자 한다.
  가라지 비유는 첫째, 하나님의 나라와 나와의 만남을 마련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거울임과 동시에 그 나라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계시적 기능이 있다. 셋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지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가르치고 알게 하려함과 동시에 그 진리를 은닉하려함도 있다.
  이 세가지의 특색을 조건으로 하여 가라지 비유는 현시대의 교회와 제자된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나의 위치, 예수의 인자함과 오래참음의 사랑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로의 천국을 보여줌과 보여주지 아니함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제자된 나의, 그리고 현 교회의 위치는 비유상의 종들에 해당한다. 이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인에게 그 일을 물어오지만, 주인은 그 종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만두라는 명령으로 일축한다.
  현 시대의 우리들이 세상의 악이 성행하니 이 세상을 저희들 스스로 심판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말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하겠다. 세상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확인하고 순종과 그 뜻에 복종으로 행하는 종된 자녀임을 확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 현재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나라는 이제 영광 중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선인과 악인이 섞여 사는 사회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참을 것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충고해준다. 또한 가라지와 알곡으로 변화되는 것은 기독교의 신비에 속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모셔서 우리의 생활을 알아서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도 잡초를 뽑기 보다는 알곡을 가꾸는데 힘써야 함을 예수의 가라지 비유에서 결론으로 밝힐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길은 그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며, 사랑하며 기도하는 일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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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ing of the Kingdom of God
to be disclose at the parable of the weeds(MT 13:24-30)

Young- Seon Kim

Department of Theology, The Graduate School
Hoseo University
Asan, Korea

(Supervised by Professor Yong- Won Suh)


  The meaning of the Kingdom of God that the people of Old Testament had understood had involved it that will be complete in the future and had meaned it that God rule at present.
  The meaning in the 1st century have got transformation. God was ruler of it.  Therefore the people had believed that it means the Kingdom of God construct on the earth. 
  Now, in the age of New Testament, in the age of Jesus, the meaning of it signify to had come already it at present life as if indicate at the parable.
  And it was transfered to the meaning of to be complete at the day to God decide. The Kingdom of God has beginning already in Jesus.  But the completion of it is reality waiting still it.  It is to be accomplish but is not to be complete.
  It happened some event in the activity and personality of Jesus who is accomplish of promise of Old Testament.
  The message of the accomplishment agree with opinion to the Kingdom of God is eschatological and futural.
  In the teaching of Jesus is made relation of tension between at present and future. It is introducing to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at the present in which. Or it is disclosing that it has not come.
  We cannot understand the meaning that Jesus intend to words only mentioned in the parable of the weeds. Therefore I want to treat to distinctive feature of parables of Jesus.
  The parable of Jesus, 1st, it prepared to meet the Kingdom of God and me 2nd, it is ability of revealation that reflect oneself who is master in the Kingdom of God. The 3rd, it teach and is understood truth of the Kingdom of heaven through earthly story and intend to secrete the truth.
  In condition of these three distinctive feature, the parable of weeds suggest to love in endurance and mercy of Jesus and our position in the Kingdom of God to us to be disciple and church at present and also indicate to let one who believe and one who doesn't believe Jesus see or not see.
  The position of church at the present and me who is disciple in the Kingdom of God come under to servants in the parables.  These servants who think that must select weeds ask the work to their master. But the master assert an order to leave the work as it is differently think of the servants.
  It prove that we, have living in this age, cannot tell to God about that let us judge this world that sins prevail. We can confirm! to the world belong to God and can confirm! His child who obey and submit to God's Will.
  The Kingdom of God is in the world, but the country that is hide will be indicate in the glory soon. At that time, the world that live together christian and non-christian will come to an end. Therefore it advise us to endure patiently and to entrust the judge to God.
  We realize deficiency of ourself and accept Lord and we must impute that He lead our life responsibility.
  I indicate that we must endeavor to cultivate wheat above to select weeds in the parable of weeds in conclusion.
  Therefore the work that we must do to the Kingdom of God is praying, loving each other and waiting for coming it.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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