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45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장 흥 길

I. 들어가는 말

신·구약 성경을 연결하는 '성서적 신학'(biblische Theologie)의 중요한 주제중 하나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전하신 선포의 중심 주제이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의 모든 저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활동에 대한 서술을 바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로부터 시작할 뿐 아니라(막 1:14-15; 마 4:12-17; 눅 4:14-30 참조),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내용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종말론적인 시대의 전환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과 시작에 관한 예수의 선포는 그의 전체 활동과 사역의 전조(前兆)이자 그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지평을 열어주는 시계(視界)이다. 게다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가 하늘로 올리우신 이래로 모든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전파된 케뤼그마(khvrugma)와 사신(使信)의 전제이며 그 기초와 토대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과 신약성경의 주된 메시지를 이해하려는 자는 그 전제와 출발점이 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용어는 그의 이전에 또 그의 주변에서 사용되던 '하나님 나라' 용어와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장차 다가올 미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미 와 있는 현재적인 것인가? 그것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공간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통치적인 것인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이면서 공간적인 의미로, 그와 함께 현재적이면서 통치적인 의미로 선포한다면, 예수 자신은 그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또 이 둘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살펴보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선포의 출처자료가 되는 공관복음서를 조사해야만 한다. 본 논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예수의 진정한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 표준적인 구절과 단락(locus classicus)을 조사하여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답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성격과 특징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본 논문의 주제 이해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을 간단하게 일별하고, 그리고 나서 위에 열거된 질문의 순서를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II.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이해에 있어서 상이한 입장들

1. 오직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

혹자는 예수가 지상에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단지 미래적인 나라였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공관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에 관한 모든 진술들은 교회형성문(Gemeindebildung)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철저한 종말론 견해의 대표자"인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예수 역시 초기 유대교처럼 장차 올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고 여기는 바이스(J. Weiß)의 입장을 따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초기 유대교의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삼았으며, 단지 예수는 그것을 변형하고 강화하였을 뿐이다. 불트만(R. Bultmann) 역시도 슈바이처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을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으로 본다. 물론 두 사람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 예컨대 슈바이처는 세상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종말론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불트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안에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종말론을 해석하려 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슈바이처와 불트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진술에서 단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만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2. 전적으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적 이해와 다르게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만을 전하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올 것이라는 공관복음서의 진술들은 단지 교회에서 생겨난 이차적인 사상에 불과하다.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이란 표현으로 공식화한 도드(C. H. Dodd)는 갈릴리에서의 예수 선포에 대한 요약 진술인 마가복음 1장 14-15절 가운데 있는 "가까왔다"(h[ggiken)는 동사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에 사용된 동사 ejggivzein의 용례를 인증하여 "왔다"(has come)로 해석하였다. 도드는 칠십인역에서 동사 "가까이 오다"(ejggivzein)가 "이르다," 혹은 "도래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ࠒ࡬ह나 아람어 ࠀ৞ࠀफ 동사에 대한 역어(譯語)로 때때로 사용되었고, 이 두 동사 모두 마태복음 12장 28절과 그 평행절인 누가복음 11장 20절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구절에서 "임하다"(fqavnein) 라는 동사로 번역되었다는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h[ggiken hJ basileiva tou' qeou')"(막 1:15)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e[fqasen ejf! uJma'" hJ basileiva tou' qeou')"(마 12:28 // 눅 11:20)의 의미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도드는 이 두 구절을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The Kingdom of God has come)"로 번역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위에 언급된 상반된 두 입장과는 다르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인정하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H.-D. Wendland, W. G. Kümmel, E. Gräßer, R. Schnackenburg, W. Schrage 등)은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 공관복음서에 함께 나타나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진술과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진술에 있어서 예수 선포의 진정성을 인정한다면 이 둘은 각각 어떤 의미로 선포되었으며, 양자는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우선 '하나님 나라'의 용어가 조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용어는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만 독점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이전에도 발견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III. '하나님 나라'의 용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용어는 예수 이전에 구약성경과 초기 유대교의 묵시문헌과 랍비 문헌 그리고 헬라 세계에서도 발견되는 전승사적· 종교사적인 전제를 가진 용어이다.

1.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

예수 선포의 핵심 개념인 '하나님 나라'(basileiva tou' qeou') 용어에 가장 가까운 구약의 용어는 '야훼의 나라'(ࠄࠅࠄࠉ ࠛࢮࠊञऩ)이다. 이 '나라'(ࠛࢮࠊञऩ) 라는 용어는 동일한 어근(語根)을 가진 '왕'(औछब)이란 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구약에서 '왕'(औछब)은 삼중 의미로 '백성이나 성읍의 왕'(삼하 7장과 23:1-7), '구속자'(렘 23:5f; 겔 17:22ff; 34:23f; 37:24f; 사 45:1ff; 슥 6:9ff 등), 또는 '야훼'(사 6:5 등)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나라'(ࠛࢮࠊञऩ)는 "왕국"(Königtum) 또는 "왕권" (Königsherrschaft)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몇 안 되는 오래된 추상명사로 대개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왕국을 의미하였다(삼상 20:31; 왕상 2:12). '나라' 라는 용어가 의미 있게 나타나는 다윗의 나라는 야훼의 나라로 이해되며, 다윗의 왕위는 야훼께서 주신 것이다(대상 29:23; 대하 9:8).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나라는 야훼의 나라 안에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묵시가 출현하기 이전 왕정 시대에는 그 용어가 아직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후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사 안에 그리고 현 세상 영역 안에 나타난다(사 52:7; 슥 14:9; 옵 21). 그리고 현 시대와 다가올 시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구약의 묵시서인 다니엘서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한 '나라'(ࢮࠊञऩ)를 세우시며(단 2:44), 그 나라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라는(단 7:22)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이 나타난다.

2. 초기 유대교에서의 하나님 나라

구약의 묵시서에서 아주 민족적으로 고려되었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초기 유대교의 묵시문헌에서도 나타난다(에디오피아 에녹서 84:2; 90:30; 92:4; 103:1; 모세의 승천기 10:1ff 등). 특히 에디오피아의 에녹서에서 '메시아'와 '인자' 개념이 서로 만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곧 '나라'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인자'와 결합하게 되었다. 이처럼 초기 유대교의 묵시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한편으로는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옛 다윗 왕국의 재건에 대한 희망(타르굼과 18기도문인 ࠄণীॢ ࠄऽभ৑)이란 의미로, 다른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시대와 결합된 내세적인 기대라는 초월적인 의미로(에디오피아 에녹서) 나타난다".

3. 랍비 문서에 나타난 하늘 나라

초기 유대교의 랍비 문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여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ࠎࣴऩ৊ ࠛࢮࠊञऩ)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 왕권의 멍에를 메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다" 라는 신앙고백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에디오피아 에녹서 9:4f 등),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에 나타날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늘 나라를 뜻하는 종교적·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특히 소위 ࠚࠉࢇঐ 기도문과 ࢮࠏࠉचࡏ 기도문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님의 왕권통치 사상이 '이스라엘 백성' 보다도 개인에게 있어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 나라가 율법(ࠄঠࢫৣ)과 관련됨으로써 그 나라는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 안에 순전히 종교적인 종말(e]scaton) 개념도 나타난다. 요약하면, 초기 유대교의 묵시서처럼 랍비 문서 역시 한편으로는 현재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적인 "하늘 나라"를 알고 있었다. 즉 랍비 문서에는 율법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고려하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온세상에 최종적으로 권세 있게 나타나게될 하나님 나라가 함께 나타난다.

4.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 용어

신약성경에서 대략 162회 사용된 '나라'(basileiva) 용어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나라'( basileiva tou' qeou'), '하늘 나라'(basileiva tw'n ouj'ranwn) 또는 '아버지의 나라'(basileiva tou' patrov")라는 어구로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말씀과 그와 관련된 교회형성문에 있어서 전형적인 관용구이다. 그래서 후기의 신약성경 본문에서 유대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게 단지 basileiva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언급된다.

basileiva 용어를 등가(等價)적으로 옮길 수 있는, 한 단어로 된 우리말은 없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basileiva 용어는 구약의 ࠛࢮࠊञऩ 용어처럼 영역적이며 공간적인 '왕의 나라'(Königsreich) 라는 의미 뿐 아니라 기능적인 '왕의 통치'(Königsherrschaft) 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를 '나라'로 옮기면 기능적인 면이 뒤로 물러나고, '통치'로 옮기면 공간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없다. 어떤 용어를 선택하든 basileiva를 한 단어로 적절하게 옮길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basileiva를 '통치'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 '나라'로 옮기고 '통치'를 염두에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으나 그 용어에 대하여 어떤 정의(定義)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규명하려면 그의 하나님 나라 진술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진술은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미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진술과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진술로 나누어진다. 그 각각에 대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진술 가운데 그 진정성에 있어서 비교적 논란이 적은 대표적인 본문을 택하여 다음 단락에서 조사하기로 한다.

IV. 예수의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

전술한 바와 같이(II,2)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를 부정한다. 정말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기다렸는가? 그것도 그 나라가 가까운 장래에 올 것을 기다렸는가? 그리고 예수가 그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는가?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근접기대'(Naherwartung) 사상을 찾아낼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그 '가까움'을 언급하는 진술들과 이와 관련되어 있는 진술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직접 언급하는 예수의 선포를 살펴보자.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요약이라는 것에 대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마가복음 1장 15절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h[ggiken)"(막 1:15 // 마 4:17; 마 10:7 // 눅 10:9, 11) 라는 표현과 마가복음 13장 29절 하반절인 "그(한글성경에서는 '인자' 또는 '때')가 가까이(ejgguv")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표현을 들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그의 '근접기대'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미래성을 부인하는 이유를 ejggivzeinejgguv"가 "가깝다"는 의미뿐 아니라 "존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ejggivzein이 시간적인 가까움 뿐 아니라 공간적인 가까움도 나타내기 때문에, 즉 h[ggiken이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까이 왔다"(h[ggiken)라는 완료 동사가 "이르렀다"로 번역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부정적으로 대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완료 동사 h[ggiken은 신약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분명하게 '가까이 왔다'를 의미하기(마 26:45; 막 14:42 // 마 26:46; 눅 21:8, 20; 롬 13:12; 약 5:8; 벧전 4:7)" 때문이다.

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가 시간적으로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마가복음 1장 15절과 그 평행절의 공식적인 표현이외에 '무화과나무 비유'(막 13:28f // 마 24:32f // 눅 21:29-31)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무화과나무 비유가 문맥과 떨어져 있어 "그가 문 앞에 가까이 있다"(ejgguv" ejstin ejpi; quvrai")의 주어가 '인자'인지 아니면 '때'인지 결정하기 쉽지 않으나, 여름이 가까우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종말론적인 완성의 전조(前兆)이며 그 시작을 알리는 것 이외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포가 그 임박한 실현이라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구원은 미래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나라가 임하시오며"(ejlqevtw hJ basileiva sou)라는 주기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구(눅 11:2 // 마 6:10)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예수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될 것을 약속하셨고(막 11:24), '주기도'의 가르침(눅 11:2)과 '간청하는 과부' 비유(눅 18:2-5)에서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의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는 '복선언'(Makarismen)의 부(副) 문장에 서술된 약속이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누가복음 6장 21절의 예수 말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cortasqhvsesqe)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gelavsete)"에서 약속은 모두 미래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 역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V. 예수의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II,1)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만을 인정하려 한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그 미래적인 진술뿐 아니라 초기의 교회로 그 기원을 돌릴 수 없는 예수의 현재적인 진술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진술로는 누가복음 11장 20절("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과 17장 21절("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을 들 수 있다.

우선, 누가복음 11장 20절(// 마 12:28)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은 "임하였느니라"(e[fqasen)라는 동사에서 드러난다. e[fqasen은 '임하다'(fqavein)의 과거동사(aorist)로 단순하게 '가까이 오다/가다/접근하다'(ejggivzein)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이르다," 혹은 "도래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ࠒ࡬ह나 아람어 ࠀ৞ࠀफ 동사에 대한 역어(譯語)일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구체적인 사건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축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의 말씀(눅 10:18)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는 누가복음 11장 20절 바로 다음 구절인 예수의 수수께끼 말씀(눅 11:21-22)으로부터도 그 정당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

예수는 전술(前述)한 대로 누가복음 11장 20절 말씀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하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축귀 행위가 하나님 나라와 실제로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종말론과 이적의 결합은 종교사적으로는 예수에게서만 유일하게 발견된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이적 행위를 이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세계의 사건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또 예수의 말씀(Logion) 전승에 속하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ejnto;" uJmw'n) 있느니라"는 구절(눅 17:21) 역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 도래의 때와 함께 그 장소를 알려고 하는 모든 생각을 차단하며 그러한 문맥을 고려할 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희 안에"(ejnto;" uJmw'n)는 "너희 내면에," "너희 가운데," 혹은 "(그 나라가 올 때) 너희의 손 안에" 라는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여기서는 "너희 가운데"가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질문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고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또 예수와 함께 마땅히 멸망 받아야할 인간에게 다가와 그 인간을 구원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VI. 예수의 미래적이고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공관복음서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미래적인 진술들이 '실현된 종말론'의 견지에서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교회의 묵시주의에 의한 이차적인 형성문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또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든 현재적인 진술들이 '철저한 종말론'의 관점에서 예수의 부활 이후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 형성문으로 여겨져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현재성과 미래성의 공존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 선포의 특징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현재진술과 미래진술의 공존은 유대교에서도 인지될 수 있다. 랍비들 역시 역사 안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였으며 신앙고백을 낭송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였고 율법을 준수하는 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歷史)적으로 역사(役事)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18기도문의 여러 간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의 때 이스라엘의 해방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초기 유대교의 묵시서에서 현재진술은 배제되지 않으나 그보다 종말론적인 미래진술이 더 강조된다. 또 젤롯인은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시작을 고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려하였다. 그에 비해서 예수는 형태적으로는 묵시주위나 젤롯인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이들과 아주 달랐다. 즉 예수는 세상과 대립적으로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현재함을 말하였으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다가오는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나라를 말하였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이 언급되고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할 것이 요청되고(주기도의 두 번째 간구),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와 함께 일어나는 시작과 현재로 들어옴이 선포되는(마 12:28 // 눅 11:20; 눅 17:20) 하나님 나라는 "미래와 현재의 시간적인 변증법" 관계 안에 놓여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제 더 이상 단지 이 세상에 곧 나타날 것으로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는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자신의 활동을 앞당겨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의 징조와 표지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역하신 예수의 활동은 "미래적인 것을 선취(先取)한 현재"이다.

요약하면, 공관복음서에 진술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서 그 나라는 "공간과 통치개념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면에서도 현재와 미래사이에 어떤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관계는 예수의 활동을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의 선취로 이해할 때 해명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미래적이면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VII.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특징

1.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일어난 사건'(Geschehensereignis)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단락 V를 참조) 무엇보다도 예수의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진술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눅 10:18; 11:20, 21-22; 17:21 등). 예수에 의해 알려진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사역 안에서 마지막 때의 것이 앞당겨 일어나는 선취적 사건이며, 예수 안에서 현실화되는 현재적인 사건이고, 종말의 완성을 향한 시발(始發)적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의 이적행위와 비유에 잘 나타난다.

앞서 다루었던 예수의 귀신 축출 말씀(눅 11:20)에서 축귀의 의미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표적 이상이다. 오히려 예수의 경우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미래가 현재를 붙잡고 있는 한 사건을 보여주는 역동적인 개념"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지향하는 종말시의 목표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시작되는 개시(開始)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 안에서, 특히 그의 이적행위 안에서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현재적인 사건이 된다. '양적인 시간'(crovno") 개념이 예수 안에서 '질적인 시간'(kairov") 개념도 가지게 된다. 예수 안에서 양적 시간에 있어서 목표지점에 있던 하나님 나라는 질적 시간의 출발지점에 놓이게 된다.

'일어난 사건'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겨자씨와 누룩 비유'(마 13:31-33 // 눅 13:18-21)에서 그러하다. 이 두 비유에 표현된 '겨자씨'와 '누룩'은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가리킨다. 이 비유가 의도하는 것은 예수의 비유 선포가 지금은 볼 수 없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암시일 뿐 아니라 현재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청중에게 원하신 것은 그 "청중이 비유의 언어 사건을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은유'(Metapher)인 '겨자씨'와 '누룩'은 이 비유를 들은 청중들을 그 비유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사건에 연루되게 하는 거대한 암시적인 능력이다.

2.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도움 없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일어나는 한 이적적인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 제공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스스로 다가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한 선포 요약인 마가복음 1장 15절 상반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 나라"(hJ basileiva tou' qeou')이다. 가까이 오는 하나님 나라의 원인(causa)이 하나님 자신 이외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은 복음서에서 마가복음에서만 나타나는 비유인 '스스로 자라는 씨앗'(막 4:26-29) 비유가 보여준다. 자주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 문제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참여와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로 해석되었다. 이 비유에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절대은총과 인간의 행위 중 하나를 택일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비유의 '제 3의 비교일치점'(tertium comparationis)은 반(反) 신인협력설(antisynergism)이나 반(反) 행동주의(antiactivism)이나 정적주의(quietism)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29절의 "추수"(qerismov") 때 인간의 활동과 참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비유가 말하려는 요점은 28절("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의 "스스로"(aujtomavth)에서 찾아야 한다. 이때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게, 놀랍게, 가시적인 원인 없이"로 옮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스스로 자라는 씨,' 곧 하나님 나라 도래의 주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나라는 스스로 행동의 주체가 되며 인간의 행동 목표가 아니다.

3.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이다.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비교해 볼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서 멸시 당한 자, 가난한 자, 여인들, 사마리아인 등의 약자들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한계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는 내용적인 해석"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심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 하나님 나라의 심판적인 성격을 배제하거나 도외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도래 자체가 심판, 곧 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심판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심판은 구원을 위해 작용한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전체 인간을 위한 구원을 가지고 온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설교와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세례 요한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그 설교의 중심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눅 3:7 // 마 3:7). 그 반면에 예수의 선포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그 선포의 중심에는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 예수는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심판의 메시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오는 하나님 나라 선포 안에 심판의 메시지와 구원의 메시지를 통합하였다. 이로써 예수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심판적인 성격이 아니라 구원적인 성격이 강조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성격은 특히 예수의 죄용서 선언에서, 예수의 치유 이적에서, 귀신의 권세를 제압하는 예수의 권세에서, 세리나 죄인과의 식탁교제에서, 예언자적인 약속의 성취에서 잘 드러난다.

4.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선물적인 은혜의 사건 내지는 복음적인 사건이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율법에 앞서는 은혜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은혜의 나라"(regnum gratiae)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요약인 마가복음 1장 14-15절은 이러한 복음의 성격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 두 절에 공관복음서에서 드물게 사용된 "복음"(eujaggevlion)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이를 직접적으로 지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h[ggiken hJ basileiva tou' qeou': metanoei'te kai; pisteuvete ejn tw'/ eujaggelivw/)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유대교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유대교가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이 회개와 믿음 앞에 놓인다.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회개와 믿음의 전제이다. 회개가 구원의 전제가 아니라 구원의 선포가 회개의 전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에 의해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 없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 성격은 '산상설교'(마 5-7장)의 서두(마 5:3-12)에 놓인 '복선언'(Makarismen)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여덟 개의 '복선언' 중 누가복음에 평행절(눅 6:20-23)을 가지고 있는 최소한 네 개의 복선언은 확실히 예수 전승에 속한다. 이것은 분명히 '교훈'(didachv)이 아니라 '선언'(khvrugma)이다. 왜냐하면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얻어지는 산물(産物)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膳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선언'의 이유를 대는 부(副) 문장에 사용된 '신적 수동태'(passivum divinum) 동사가 보여준다. 그러므로 '복선언'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조건을 제시하는 "입장조건"(Einlaßbedingungen)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 하는 '덕목록'(Tugendkatalog)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은혜의 선물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자를 찾는 '복선언'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3절에 언급된 "가난한 자"는 사회학적인, 물질적인 가난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자로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령에 있어서 가난한 자"(oiJ ptwcoi; tw'/ pneuvmati)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을 선포하시는 예수의 선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5.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그 메시지를 들은 개인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실현되지만 그 미래는 현재의 인간을 결정한다.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 선포를 들은 사람은 그 메시지 앞에서 결단해야하는 회개로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는 과감하게 하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자신의 멸망을 알고 있는 죄인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실 때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선포하셨다. 예수의 갈릴리 선포 요약인 마가복음 1장 15절의 상반절인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h[ggiken hJ basileiva tou' qeou')는 '선포'이며 그 후반절은 예수께서 그와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은 자들을 부르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metanoei'te kai; pisteuvete ejn tw'/ eujaggelivw/)는 '요구'이다.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은 자에게 반쪽이나 부분적인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있는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 그것도 온전한 인간을 원하신다. 유대인이란 선택받은 집단 속에 있다는 것, 선민(選民)이라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마 3:9 // 눅 3:8). 선택받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에게는 더 이상 구원이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은 자 누구나 각자가 이 선포 속에 다가온 종말론적인 구원의 선물을 받을 것인지,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을 받을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6.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아람어 '아바'(막 14:36; 참조, 롬 8:15; 갈 4:6)는 예수의 육성(ipsissima vox)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아버지여"라는 '기도부름말씀'(Gebetsanrede)으로부터 시작하셨다(눅 11:2 // 마 6:9). 예수는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친밀한 가족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것을 기도로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심판을 목표로 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인 자들을 자녀로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의 일원이 되게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신 것은 결코 하나님을 비하(卑下)하는 호칭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알림말이다. 예수께서 부르신 이 하나님의 호칭은 하나님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르고 기도해도 되는 인간의 변화를 보여준다(마 6:25-34 // 눅 12:22-32 참조).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종말론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은 새로운 관계의 신론(神論)이 된다. 즉 미래에 관한 질문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된다.

7.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윤리를 요구하는 사건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계관이나 신학적인 교리를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무조건이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인 하나님 나라의 시작됨을 보여주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영접한 자에게 지금 여기서 사랑으로 사는 삶을 요구한다. 예수는 그 이전의 예언자들처럼 단지 하나님 나라를 알리고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지니고 있는 담지자(擔持者)요, 그것을 현재로 가지고 오는 운반자이다. 이로써 미래적이고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 상(像)이 이전의 하나님 나라 선포자의 경우에 비해 철저하게 후퇴하게 되었으며, 미래에 대해 질문하는 종말론이 예수 안에서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질문하는 신론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들은 사람은 예수 안에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을 가지고 오신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신(信)· 불신(不信) 내지는 추종과 거절의 결단 앞에 서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은 자에게 그에 부합된 삶을 살 것인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to; qevlhma tou' qeou')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자는 그에 부합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삶의 요구를 받는다(마 18:21-35). 예수의 하나님 선포에 포함된 윤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상응하는 윤리이며, 구원 시대의 윤리요, 새 언약의 윤리이다.

VIII. 나가는 말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용어에 있어서는 전승사적으로 구약·초기 유대교 전승에서 전해 받은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수 안에, 그리고 예수와 함께 도래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종말의 때 일어날 미래적인 구원의 현재적인 선취(先取) 사건이며, 지금 여기서 역사(役事)하게 되는 역동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선물(Gabe)이며, 동시에 시작되었으나 아직 목표에 이르지 않은 구원의 도상(途上)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된 과제(Aufgabe)를 내포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구원재(救援財, Heilsgut)이다.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초기의 기독교 이래로 지금까지 모든 기독교 선포의 기초이며 토대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성격을 자세하게 규명하려고 한다면 예수의 윤리, 예수의 죽음 이해, 예수의 자기 이해와 같은 인접 주제들이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복음적인가? 참으로 '회개가 하나님 나라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회개의 전제'라는 복음적인 감격이 아직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가? 그리고 이 복음을 통해 종말론적인 구원을 받은 자로 구성된 교회가 자신에게 요구된 하나님 나라에 부합되고 상응한 삶을 살고 있는가? 참으로 단번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무엇이 복음적인 '진정한 교회의 표지'(notae verae ecclesiae)인가? 그것은 참된 복음을 전하고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는 '전함'과 '섬김', 곧 '선교'와 '봉사'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빌 1:27)하고,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빌 1:29), 그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가 귀 기울여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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