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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참된 의미와 그 실현

하나님아들 2022. 12. 4. 20:09

영성의 참된 의미와 그 실현

 

기독교회는 영성이라는 말을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해 왔다. 시대가 어지럽고 영적인 혼란이 가중될수록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을 추구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경우일수록, 영성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일정하게 규정된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대부분 시대나 지역의 분위기 또는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이용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영성이라는 말이 때로는 상당한 수준의 경건 생활을 바라는 사람 또는 신비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성이란 말의 의미를 일정하게 규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하게 되면, 상당한 혼란이나 오해를 피하기가 어렵게 된다. 지난 10여 년 전부터 우리 주변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영성이라는 말이 가지는 참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영성의 의미
교회역사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어떤 사람은 영적 생활이라는 의미로 사용을 했고, 다른 사람은 경건 생활, 내적 생활, 신비적 수련, 그리스도인의 완전함, 관상수도자적인 삶,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특성 등의 의미로 사용을 했다. 그밖에도 고행이나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금욕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을 하거나, 종교적인 열광상태나 심령술 또는 특수한 심리상태를 의미하는 신비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영성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 되어왔기 때문에, 그 분명한 개념을 갖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성의 개념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에는 영성이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 영 또는 영혼이라는 말은 매우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영이나 영혼이라는 말은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있다. 영성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성경의 단어는 형용사형으로 된 "영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영적"이란 단어는 로마서 12장 1절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기독교적 의미의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어, 자기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서 가지는 모든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창조 때에 부여받은 본래적인 영성, 상실된 영성과 그 회복, 그리고 참된 영성의 실현과 완성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자.


창조 때 부여받은 본래적 영성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를 하셨다(창 1:27).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생령으로 지음을 받았다(창 2:7). 바꾸어 말해서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성을 지닌 존재가 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의무가 있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것을 사람의 본분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었다(전 12:13).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 세계에 충만하여, 그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려서 하나님의 섭리가 실현되게 하는 것이었다(창 1:28).

과연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영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자연계 속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으로 찬양할 수 있었다. 천사와 더불어서 말하며 뜻을 통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며 사랑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의 생활은 영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실로 부족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요, 기쁨과 풍성함이 가득한 삶이었다. 영성이 충만한 삶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두 가지 계명으로 나누어 설명하신 일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40). 그러므로 영성의 의미에는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창조적인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의 본래적인 영성이란, 사람이 신령하신 하나님과 더불어서 신령한 교통을 가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여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죄악으로 인한 악 영향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염세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의 적극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영성의 상실과 회복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참된 영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증거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사람은 자연계를 들여다 보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솜씨와 의도를 찾아내지 못한다.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앞에서 굴복을 당하거나 오히려 그것들을 경배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대신에 자기의 배로 그 자리를 채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하기보다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 든다.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은 악령들의 노리개가 되어 허망한 것을 쫓는다. 기쁨과 감사는 사라지고 모든 생활은 온갖 근심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다.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기보다는 보잘것없는 이해관계로 피차 원수가 되어 다투고 싸우기를 잘한다.

이처럼 안타까운 영성 상실의 현상들은 반드시 회복이 되어야 한다. 영성의 회복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을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신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로 인류 중에는 완전한 사람, 즉 참된 영성의 소유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만은 달랐다. 그는 본래 완전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성의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져야 할 영성을 온전하게 가지신 분이셨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속에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느끼셨다(마 6:25~30). 그 마음속에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통이 계속되었다(요 14:10).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요 5:17). 인성의 한계를 느끼는 상황에서까지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셨다(마 26:39).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셨다. 따라서 영성의 회복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참된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의 구원, 즉 사람들로 하여금 온전한 영성의 수준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요 10:10).
 
 
영성의 실현
사람의 진정한 영성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영성을 상실해버린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성 회복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이를 위한 모든 조건들이 다 이루어졌음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선언하신 바 있다(요 19:30).

그러나 영성 회복의 구체적인 실현은 성령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보면,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모습으로 변화를 시키시고,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적 인간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와 같은 역사로 우리의 전 인격은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영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생활은 그 자체가 영적 예배가 되도록 행동을 한다(롬 12:1).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영성 회복이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내주를 하시면서 영성을 회복하게 하시면, 그 사람은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되고, 구하지 못했던 것을 구하게 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되고,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게 된다. 각종 부조리와 역경 중에서도 충만한 기쁨을 가지며,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욕심과 아집을 쳐 복종시키고 원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거센 미혹에도 불구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안을 유지한다. 그래서 회복 이전의 상태와 비교를 해 볼 때. 그 모습은 마치 전혀 새로운 피조물과도 같이 여겨질 만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모든 역사들은 그리스도인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가는 것, 즉 성화(聖化)라는 한가지 것으로 요약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관련된 영성이란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성화의 모습 또는 제자화의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영성 회복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에서 때로는 신기한 은사들을 베푸시기도 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침, 영 분별, 투시(透視) 등의 현상을 체험하거나 행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수반하는 은사들을 영성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다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은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성과 은사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서 영성과 은사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자칫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가 쉬운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처럼 특별한 은사들은 영성 실현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영성의 기준을 이러한 현상에만 묶어두는 것은 영성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성령이 아니라 악령들도 이러한 현상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악령도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였고, 물이 피가 되게 했으며, 예언을 하게 하기도 하고,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생겨나게도 했다. 지금도 악신에 붙들린 사람이나 심령술사들은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서 영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서 예외가 없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죄를 멀리 하고 의인된 새 사람의 모습을 입어 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은 성화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성화의 수준이 높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영성이 풍성한 사람이다.


영성의 완성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한 영성에 이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육체와 정신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주님께서 재림하여 사탄을 무저갱에 가두시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여 우리의 완전한 영성 회복을 방해하도록 묵인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영성의 완성은 죽음과 동시 또는 죽음 직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성도는 죽음과 동시에 죄와 관련된 인간의 모든 불완전함과 사탄의 사악한 영향에서부터 완전하게 해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신령하신 성부 하나님, 그리고 완전한 영성의 소유자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완전한 영성의 소유자, 즉 온전히 거룩하여진 사람에게만 허락이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성의 완성이 죽음과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지금은 그 때를 소극적으로 기다리고 있기만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적극적으로 죽기를 연습하여, 영성의 완성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연습은 영성의 실현에 매우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명령하면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을 따름이지만 경건에 이르기를 위한 연습에는 금생과 내생에 주어질 약속이 담겨져 있다고 했다(딤전 4:7~8). 이런 이유 때문에 영성은 종종 금욕주의나 자기부정의 고행과도 연결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적 의미의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어 자기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서 가지는 모든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의미의 영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피조물을 잘 다스리며, 이웃과 화목을 이루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참된 영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참된 영성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완전한 영성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완전한 영성을 회복하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실제적인 역사를 하신다. 하지만 영성의 완성은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말고,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 안에서 날마다 죽기를 연습함으로써 영성의 풍성한 수준에 도달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분명히,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를 할 수 있는 영성 있는 성도가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