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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이해

하나님아들 2022. 1. 12. 15:23
기독교 영성이해
*출   처|  믿음의 교회
            

I. 시작하는 말

구약시대의 예언자나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에서 그 분의 직접적인 계시를 체험하면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도행전 27장에서 사도 바울은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사색이 된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제 밤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이러한 계시를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같이 성서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교리나 전통에 의지하거나 성경말씀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저 머리 속에서 인정하는 정도로만 그친다거나 아예 그러한 간접 체험도 없는 매우 메마른 영적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삶이 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분과의 생생한 관련에서 생활할 수 없을까 하는 데서 오늘날 영성의 문제가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마치 경제적인 광풍을 만난 것과 같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으며, 난국에 처한 국가, 기업, 직장, 가정, 그리고 개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는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역사를 체험하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가지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II. 영성(靈性, spirituality)의 정의

{기독교 영성사전}에는 영성이란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초감각적 실재, 곧 초월적인 절대자들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태도나 실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개념, 즉 사람들의 삶에 주어지는 활력, 초월적실재와의 만남, 그리고 이를 위한 태도와 실천이 영성의 정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영성의 정의는 상당히 포괄적인 것이어서 다른 종교에도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전통적으로 혹은 좁은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은 중세 신비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뜻한다. 그 핵심은 인간이 자신의 죄성을 떨쳐버리고 그 영혼이 성숙하여 하나님과 신비적으로 합일(union with God)하는 것에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는 이러한 영성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는 신비주의로 간주하면서 위험시하면서 도외시하였다.
개신교회는 이러한 좁은 의미의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경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왔다. 경건이라는 개념도 세 방면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먼저 중세 신비주의와 유사한 고대 경건이 있고, 다음으로는 15~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자는 근대 경건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17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하고 초대 기독교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경건주의 운동이 있다.

어떤 이들은 영성과 경건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양자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령운동과 영성을 혼동하기도 한다. 성령운동이란 성령의 은사를 받고 또 그러한 은사활동을 중시하는 운동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운동이 영성운동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영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으며 이는 그만큼 영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으나 가장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그러면서도 깊이를 가지고 정의한 어밴 홈즈(Urban Holmes)의 정의를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영성을 다섯 차원에서 서술한다. 첫째, 영성이란 인간의 관계형성의 능력이며 둘째, 그 관계 형성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각현상을 초월한 실재라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초월자와 관계를 맺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노력을 능가하는 어떤 큰 깨달음 혹은 새로운 자기이해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넷째로 이러한 일들을 경과하면서 역사 안에 어떤 형태를 갖춘 실체( 예컨데, 실천이나 운동 등)가 나타난다는 것이며, 다섯째 이러한 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계 안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하도록 헌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기도 중에나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현존체험을 하였다고 하자. 물론 이러한 체험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은 많은 고뇌로 하였을 것이요, 성경도 읽고 기도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에 압도당하여 신비적인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직관과도 같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죄인 중의 괴수라는 깨달음을 가진 것이라든가, 바로 그러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러 세우셨다는 깨달음은 새로운 자기 이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그 사람은 이 역사 안에서 어떤 운동을 서서히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전도운동이나 수도원 운동일 수도 있으며 여러 가지 형태를 띤 구체적 실체가 나타나게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업에 동참하여 자신의 모든 생애를 헌신하는 것이다.

III. 영성의 기독교적인 이해

영성에 있어서 항상 관건이 되는 것은 초월적인 실재와의 만남이다.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며 궁극적인 주제가 된다. 이러한 하나님 현존체험을 향하여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첫째 수준의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겠다. 초월자 하나님과의 만남은 초월성과 동시에 내재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 존재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시나 이미 '나' 안에서 찾아오셨고 만나고 계시는 내재적인 분이시다.

기독교 역사를 개관해 볼 때, 이러한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현존체험은 절대 무(無)라고 하는 전적인 심연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 있으며, 한편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과 구름과 같은 이미지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길이 있다. 둘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고 영성을 풍성케 하는 길이다. 이는 특히 경건주의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묵상함을 통해, 그리고 예배와 성례전에서 말씀과 설교 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적인 삶에 참여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것과 같이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는 길이다. 셋째로, 성령체험이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세례, 내주 등의 비가시적(非可視的)인 면과 성령의 열매나 은사와 같은 가시적인 면이라고 하는 두 측면, 즉 초월성과 내재성이 어우러져 초월자 하나님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한편, 기독교 영성은 이러한 길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기 이해, 즉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동반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자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을 새롭게 긍정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기독교 영성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로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현세 참여와 현세 초탈이라고 하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현세참여란 복음을 전하거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등의 제자와 헌신의 길을 의미하며, 현세 초탈이란 이러한 외적인 활동에서 잠시 물러나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혹시 내 자신이 자만했거나 좌절하지 않았는지 등등을 살피면서 때묻은 자신을 정화시키는 퇴수(retreat)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자주 세상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머물러 퇴수했던 것을 볼 수 있다.

VI. 맺는 말

이러한 기독교 영성 이해가 실제 영성생활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진수를 맛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영성은 또 하나의 뜬 구름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영성 훈련이니 혹은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영성생활은 물론 훈련과 관계도 되지만 우리가 마치 호흡을 하듯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닦아지고 형성되어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생은 기나긴 영성 여정이 되어 희미하던 하나님의 현존의식이 보다 분명해지는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분명해지고 이웃 혹은 사회 관계에서 사랑과 평화를 보다 더 풍성하게 이루어 가는 소위 성화(聖化)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 생활의 과정을 도표로 나타내려 한다면 그것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八福)의 여덟 단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영성 생활의 시작이 마음의 가난에서 출발한다면 그 가장 성숙한 단계는 의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와 천국을 위하여 받는 핍박인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수 많은 순교자들의 삶이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나의 필요만 구하는 일방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계시에 접하려는 관상적인 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더 자주해야겠고, 이와 함께 그간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말미암은 꿈과 비전에도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것이다. 또한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그들의 아픔, 가난, 질고 등을 함께 나누는 의미있는 삶을 확장해야 하겠다. 나아가서 비록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죽음 너머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마더 테레사 수녀가 한 말처럼, "하나님, 진작 부르시지 않고 이제야 부르시나이까"하며 기꺼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소망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