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

하나님아들 2022. 11. 30. 16:22

 

에드워즈는 이 저서를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과 함께 출판하기를 원했다. 에드워즈는 생애 말년 스톡브리지 선교사 시절에 이 두 권의 책을 저술하는데 집중했으나 생전에 출간하지는 못했고, 1765년에 이르러 Two Dissertations이라는 이름으로 새무얼 홉킨스와 조셉 벨러미의 편집으로 출간되게 된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은 에드워즈의 모든 작품에 대한 예고편이자, 그의 모든 사상의 논리적 출발점이다. 존 파이퍼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이 책에 담겨 있는 신학적 위대함과 더불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에 사로잡히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파이퍼,37)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다루는데 에드워즈는 창조에 있어서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다.

제1부는 이 문제에 관해 이성은 무엇이라 가르쳐 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결론이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철학적 노력이다.

제2부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에 대해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서론 : 용어 설명

 

에드워즈는 본서를 연구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일을 수행하는 최고의 목적(chief end)과 궁극적 목적(ultimate end)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에드워즈는 궁극적 목적과 최종 목적(last end)을 계속 상호 교환해서 사용한다]. 최고의 목적은 언제나 궁극적 목적이지만, 모든 궁극적 목적이 최고의 목적은 아니다. 최고의 목적은 보다 낮은 하위 목적에 대한 반대개념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보다 종속적 목적에 대한 반대개념이다.

 

종속적 목적(subordinate end)은 행위자가 독립적이 아닌 전적으로 더 상위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목적을 말한다. 궁극적 목적이란 행위자가 자신을 위하여 추구하고 행하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사랑하고 가치있게 여기고 즐거움을 얻는 것은 독립적인 것이지 다른 목적의 수단이 아니다. 어떤 목적이 종속적이라는 것은 그 목적이 궁극적 목적에 부차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다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며, 다른 목적을 위해 추구되지 않는 목적이 궁극적 목적이다. 행위자의 목표는 궁극적 목적 안에서 중단되고 끝나게 된다.

 

하위 목적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의 최고의 목적은 궁극적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고의 목적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행위자에 의해서 최고로 추구되는 것이다. 1) 두 개의 다른 목적이 궁극적 목적이기는 하지만 최고의 목적이 아닐 수는 있다. (예) 신부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광학 안경을 보려는 호기심에서 여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 두 가지는 모두 궁극적 목적이 되지만, 전자는 그의 최고의 목적이며, 후자는 그의 보다 낮은 목적이 될 수 있다. 2) 궁극적 목적이 언제나 최고의 목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속적 목적은 어떤 궁극적 목적보다 더 중요하게 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 친구를 방문하고 돈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자는 그의 궁극적 목적이지만, 그래도 후자를 더 중요하고 높은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9가지 요점이 있다.

 

(1) 어떤 종속적 목적이 어떤 궁극적 목적보다 더욱 가치 있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이 종속적 목적이 지향하고 있는(즉 이 종속적 목적이 종속되어 있는 상위의) 궁극적 목적 보다 더욱 가치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2) 만일 궁극적 목적이 종속적 목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종속적 목적에 대해 상위 목적이며, 행위자에 의해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만일 최종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다면, 이때 종속적 목적은 최종 목적만큼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최종 목적은 완전히 종속적 목적에 의존하고 있고, 전적으로 종속적 목적에 의해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속적 목적이 최종 목적과 동등하게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들은 아주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최종 목적을 이루는 것이 단 하나의 대체할 수 없는 종속적 목적에 의존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최종 목적(last ends)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목적(highest ends)이다.

 

(3) 만일 어떤 존재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최종 목적은 분명히 그의 최상의 목적(supreme end)으로 간주될 것이다[이 문장에서 최종 목적은 궁극적 목적과 최상의 목적은 최고 목적과 교호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이러한 이미에서 모든 다른 목적은 이러한 최종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최종 목적 보다 하위 목적이 된다.

 

(4) 어떤 행위자가 행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본질적으로 그에게 좋은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그 행위자에 의해 최종 목적으로 간주된다.

 

(5) 만일 어떤 행위자가 본질적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단 하나 밖에 없다면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최종 목적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189). 에드워즈는 이 문장 다음에 갑작스러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행위자에게 본질적으로 일치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구별해야 한다. 1) 행위자에게 본질적으로 기쁨이 되는 것, 독립적으로 가치 있으며 단순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것, 즉 모든 상황에서 선행하거나 독립적인 것이 있다. 2) 행위자에게 가정적으로나 결과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즉 어떤 환경이나 특수한 경우에서만 행위자에게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190).

이 어려운 문단의 내용을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핵심은 절대적 궁극적 목적(absolute ultimate ends)이 있고, 결과적 궁극적 목적(consequential ultimate ends) 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 모두 궁극적 목적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자체로 그들을 추구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며, 다른 것에 대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 궁극적 목적을 위한 기회는 어떤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결과로서 발생한다. 이것은 아주 심오한 구별이다. 이러한 구분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에드워즈는 후에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하나며, 이러한 하나의 궁극적 목적은 결과적이 아니라 최고의 목적이며, 본래적(original)인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자신의 글에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공의와 신실하심의 행동을 기뻐하신다고 말할 때가 있다. 이러한 행동은 창조에 근거한 결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인 궁극적 목적의 범위의 창조는 하나님이 어떤 것을 그 자신을 위해 기뻐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높은 의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고 단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에드워즈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말할 때는 보통 고차원적 의미에서, 즉 본래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려고 한다(193).

 

(6)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의 본래적인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지배한다.

 

(7) 만일 우리가 최종 목적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최고의 목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사역, 즉 하나님께서 창조나 섭리의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이 최종 목적으로 삼으시는 것과 틀림없이 똑같은 것이다.

 

(8) 어떤 의미에서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최종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틀림없이 창조 사역의 최종 목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사역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목적과 동일한 것이다.

 

(9) 단 하나의 목적만이 좋은 것이라면 단 하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There is only one ultimate end of creation if only one end is agreeable in itself).

 

 

 

제1부 하나님이 천지 창조 목적에 대한 이성적 고찰(Wherein is considered what reason teaches concerning this affair)

 

제1장. 이성이 말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관찰

 

에드워즈는 이제 하나님의 천지 장조 목적으로서 무엇이 추측될 수 있고, 또한 추측될 수 없는지를 고찰해 보려고 시도한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 우주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어떤 목적으로 설계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건축자(the architect)였던 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에 귀 기울이고 또한 의지해야 한다. 그가 만든 놀라운 작품에 있어, 건축가인 그가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목적과 설계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이성이 하나님 계시의 인도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최종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에 관해 지침을 담고 이는 계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론들이 주로 잘못된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에드워즈가 성경이 참으로 계시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주장되어 왔기 때문에 먼저 이 문제에 관해 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자명한 이성적 판단(the dictates of reason)이라고 생각되는 여섯 항목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종 목적을 위해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불충분한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무한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며, 독립적인 영광과 행복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성경과 이성 모두에 의해 명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거나 유익을 받으실 수 없다. 또한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어떤 고통이나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지복의 손상을 받으실 수 없다. 따라서 피조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본성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의 행동보다 선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동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무한한 완전함이 어떤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어떤 사역의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가치있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가치 있으며 추구되거나 획득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활동의 마지막 목적이 된다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3) 본질적으로 가장 가치 있으며 창조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이다.

 

(4) 하나님의 도덕적 올바른 행동은 가장 가치있는 것 즉, 자신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천지 창조의 목적으로 삼으실 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천지창조의 최종, 최고의 목적으로서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히 가장 위대하고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덕적 정당성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존중받을 만한 것 즉, 도덕적 행동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지성적인 존재에 대해 합당한 존중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존재에게 합당한 존중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히 가장 존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주가 무한하며, 모든 가능한 존재와 완전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존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첫째요 최고인 만큼 또한 하나님의 탁월함이 모든 면에서 최고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본래적인 선과 모든 선의 원천인 만큼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존중을 받으셔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 종속적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적이며,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주권을 가진 최고의 머리로서 통치할 자격을 가진 분인 만큼,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의해 그리고 온 우주를 통해 진행되고 결과가 생겨나는 모든 것을 통해 존중받으셔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자신을 위해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6)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통해서 달성하신 것은 하나님이 목표로 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다.

 

 

제2장. 이성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천치창조 목적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하여 무엇이 천지 창조의 실제적인 효과 혹은 결과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진행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추정1] 만일 하나님이 위대한 결과(effect)를 만들어 내실 수 있을 만큼 충분하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이다. 어떤 행동이나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지혜, 의, 선하심등을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속성들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즉 하나님의 능력, 지혜, 신중함, 선함과 자비와 은혜 공의등). 하나님은 이러한 속성들을 자체를 가치있게 생각하고 이것들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추정2] 하나님이 자신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는 것을 알기 위해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합리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광스러운 피조물 집단에게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피조물에게는 가장 합당하고 좋은 것이다. 가장 탁월한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가장 실제적이며 본질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이며 비실재와 결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추정3] 하나님의 영광이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이 알려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 존귀함에 합당한 정도로 존중받아야 되고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이다. 지성에는 영광스러운 대상에 대한 합당한 생각이 있어야 하듯이 의지에도 영광스러운 대상에 대한 합당한 감성(affection)이 있어야 한다. 만일 지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도덕적 아름다움이 특히 마음의 성향과 경향(the disposition and affection of the heart)이기 때문에 마음의 사랑은 더욱 특별히 가치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정4] 하나님 안에는 모든 가능한 선이 무한한 충만-즉 모든 완전함, 모든 탁월함과 아름다움, 무한한 행복의 충만이 있듯이, 또한 이런 충만은 전달 즉 밖으로의 발산이 가능하듯이, 이러한 무한한 선의 원천은 풍부한 지류를 흘려내야만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정할 만하고 가치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의 발산은 선의 증식(multiplication)이다. 지류가 원천에 덧붙여진 것만큼이나 선의 발산은 선의 증가(increase)로 간주되어야 한다. 또한 원천 안에 있는 선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탁월한 것이라면, 선의 발산 즉, 선의 증가, 재현, 증식도 탁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즉 하나님 외부로 하나님의 무한한 선의 충만을 영광스럽고 풍성하게 발산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었으며, 하나님 자신을 전달하려고 하는 성향 또는 하나님 자신의 충만을 발산하려는 성향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세상을 창조하려는 동기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217).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충만을 발산하려는 하나님 안에 있는 성향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고유한 특성으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천지를 창조하도록 움직인 원동력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발산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천지창조의 모적으로서 의도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218).

 

제3장. 하나님은 자신을 천지창조의 최고, 최종 목적으로 제시하심(Wherein it is considered how, on the supposition of God's making the aforementioned things his last end, he manifests a supreme and ultimate regard to himself in all his works)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의 최종 목적으로 삼으신 것 또는 하나님의 활동과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에 궁극적인 존중을 나타내는 것과 일치하는지를 탐구해 나간다. 어떻게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이런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가치있고 즐겁게 만드는지 또는 어떻게 이러한 것에 대한 가치가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선의 충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 한다.

하나님의 자신과 자신의 성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러한 성품이 사용되고, 실행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하심을 존중하고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표현되고 참된 결과를 맺는 것을 기뻐하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표현을 기뻐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완전하심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가 있는 자질을 존중해야만 하는 존재가 있다면 자신의 탁월함이 보여지고, 인식되어지고, 존중되어지고, 기쁨이 되어지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하다.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완전함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완전함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을 자기 목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무한한 선의 충만 즉 하나님 자신의 지식, 탁월함, 행복을 풍성하게 나누시며, 영광스럽게 확산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진 분이시다. 그리고 이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일반적 성향은 피조물들의 실존보다 선행하며 또한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호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행복 같은 자신의 충만을 전달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본성 속에 있는 선한 성향을 말하는데, 이러한 전달을 위해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실존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엄격하게 특정한 대상을 향해 선을 나누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비가 비참하게 고통받고 있는 대상의 실존을 전제하는 것처럼 사랑 또는 호의도 엄격하게 말해서 존재하는 대상을 전제로 한다.

 

에드워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진술을 한다. “자신에 대한 존중 또는 자기 자신의 영광에 대한 무한한 성향과 기쁨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풍성하게 확산되는 것과 또한 자신의 영광이 발산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경향이 있으시다...하나님은 자신의 전달과 자신의 무한한 영광의 발산을 자신의 충만함과 완전함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전달과 자신의 무한한 영광의 발산 없이는 하나님 자신이 최고로 영광스러운 상태에 계시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다”(223-4).

 

하나님이 자신의 선을 베푸시고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푸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확산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성향을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정하신 방식으로서, 하나님이 우주를 통해 활동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 활동 즉 자신을 자신의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것과 하나님의 피조물을 위한 활동은 상반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서로 일치하며 다른 하나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심의 처음이요 원천이며, 피조물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결과적으로 피조물은 의미상 하나님 안에 포함된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consequently, and by implication, as being as it were comprehended in God)고 말한다.

 

(1) 전달되는 하나님의 충만의 한 부분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러한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식은 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다. 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의 자신에 대한 지식의 형상(image)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지식의 대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에, 피조물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2) 또 다른 하나님의 충만의 발산은 덕과 거룩을 피조물에게 전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의 전달인데, 이를 통해 피조물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인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탁월함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일치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피조물의 거룩을 틀림없이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피조물 안에는 이러한 거룩은 모든 참된 덕을 포함하는 사랑인데,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최고로 존중하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존경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3) 하나님이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의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행복이다. 하나님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의 행복의 객관적인 기초다. 피조물의 행복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의해 존귀하게 되시며, 높임을 받으신다. 기쁨 즉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은 찬양의 일부다[Piper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 창조와 우리를 위한 창조가 모순되지 않고 사실상 하나가 다른 하나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돈이나 성이나 가족이나 직업이나 건강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은 존귀하게 되시고 높임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함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무관심하게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우리의 최고의 의무로 추구해야 함을 함축한다. 파이퍼 목사는 이러한 생각을 Christian hedonism이라는 이름으로 펼치려고 노력해온 사람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은 영원히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하나님 자신을 점점 더 많이 나누어 주시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에드워즈가 하나님이 자신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준다고 말할 때, 또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완전한 연합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사랑과 기쁨은 주로 마음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이 문장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누어 주심이 피조물에게 증가될수록 피조물은 더욱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하나님과 하나(one)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일치9conformity) 되며 연합(unio)되는 것이지, 인간과 신의 본질이 하나로 융합(merging)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더욱 더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만큼, 피조물은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의 연합은 더욱 단단해지고 친밀해지며, 동시에 더욱더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다. 형상은 더욱 완전해져서, 피조물 안에 있는 선이 영원히 하나님 안에 있는 선에 더욱 더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원히 증가하는 연합과 일치를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연합은 틀림없이 무한히 완벽한 가까움과 일치와 하나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연합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확고하고 완벽한 연합에 점점 더 가까워 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 존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존중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존중과 일치하며 하나가 되고 동일한 것이 된다. 말하자면, 성도의 관심은 성도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합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심이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만물이 첫 번째 원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만물이 하나님께로 가며, 영원토록 하나님께로 더욱더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첫 번째 원천이시며, 만물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을 논증한다.

 

 

제4장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삼으시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대한 몇 가지 반론에 답함(Some objections considered, which may be made against the reasonableness of what has been said of God making himself his last end.)

 

[반대1]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함을 위해서 피조물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하게 가지고 계시며, 또한 영원 전부터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이 더 이상 없으신 분인데 이미 소유한 것을 얻기 위해 천지창조의 위대한 일을 하셔야 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 답변1.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복한 상태를 보심으로써 실제적이며 정당한 기쁨 또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의 행복 안에서 누리시는 이러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서 행한 사역의 결과이며 또한 피조물에게 자신의 충만함에 참여하도록 만들며, 자신의 충만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는 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이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의 주입이라고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거룩을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시는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이며, 피조물로부터 기인하는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능력을 가지고 행하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 독립적인 분이며, 우리로부터 비롯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릴 아무 것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행복의 어떤 부분도 사람에게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유익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기쁨은 피조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게 확산시켜 주고 나누어 주는 것을 기뻐하는 기쁨인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충만을 나누어 주려는 성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From what has been said, it appears, that the pleasure God has in those things which have been mentioned, is rather a pleasure in diffusing and communicating to, than in receiving from, the creature. Surely, it is no argument of indigence in God, that he is inclined to communicate of his infinite fullness).

 

☞ 답변2. 하나님은 완전하게 자신에 대해 만족하시지만 창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 답변3. 하나님이 구하시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모든 것이시다. 하나님은 무엇을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반대2] 하나님은 이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행하시는가?

이기심은 피조물에 있어서 비열하고 야비한 것으로 간주되며, 인간과 같은 먼지로 된 벌레 같은 존재에 있어서도 합당치 않은 것이며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최고의 존재이시며, 복이시며, 유일한 주권자이신 분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이기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로 묘사해야 하지 않는가?

 

☞ 답변1. 피조물 중에서 자아를 더 선호하는 성향 즉 마치 모든 것보다 더 자아중심적인 것은 아주 악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떤 것의 본질과 또한 참으로 가장 위대한 선과 일치하지 않는 성향도 악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가장 위대하며, 가장 탁월해서 모든 다른 존재는 하나님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다른 탁월함은 하나님과 비교해서 아무 것도 아니며, 없는 것 같으며, 또한 만일 하나님이 전지하시며 오류가 없으시며, 자신이 무한히 가장 가치있는 분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자신의 피조물보다 더욱 무한히 가치있는 분으로 여기시는 것은 당연하다.

 

☞ 답변2. 하나님이 자신을 최고로 존중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존중하시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인간의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 답변3.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관심은 곧 자신을 나누어 주고 확산시키려는 성향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내적인 충만과 영광을 기뻐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영광을 풍성하게 확산하고 발산시키려는 성향이다. 자신의 영광을 기뻐하는 성향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드러내고,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한다.

 

[반대3] 하나님이 사람들의 찬양과 박수를 받기 위해서 사역을 하신다는 것은 천박한 것이 아닌가? 먼지로 된 벌레같은 인간의 주목과 찬양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 즉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다는 것은 위대한 하나님께 얼마나 더욱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라는 반대는 아주 그럴 듯하다.

 

☞ 답변1.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히 가치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과 찬양하는 것은 탁월한 것이다. “만일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본질적으로 어떤 더욱 합당하고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존중과 사랑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성과 의지는 창조된 것 중에서 가장 최고의 것이다. 만일 지성과 의지가 가치 있다면, 틀림없이 이것들이 사용되어질 때 가치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의지의 가장 최고, 가장 탁월한 사용은 어떤 실제적인 지식과 의지의 사용에 달려있다. 또한, 분명히 피조물 안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실제의 지식과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참되고 탁월한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 또는 도덕적 탁월함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의지의 사용은 하나님의 영광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기뻐하는 것이다”(246).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사랑과 존중과 존경을 기뻐하시듯이, 하나님에 대한 경멸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자기 친구나 공동체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신다( it becomes God to love himself as it does men to love a friend or the public)”(248)고 말하면서 두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한다. 1) 하나님은 사람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 사이의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실존은 무한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보편적인 실존이시다. 동일한 이유로 피조물 안에 있는 공적인 관심이 합당하고 아름다운 것이듯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이다. 2) 하나님에게 있어서 합당하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과 구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모든 거룩의 내용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 자신의 거룩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하나님의 거룩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거룩은 다른 존재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일 고차원적 의미에서 보편적인 사랑이 사실 보편적인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라면, 덕 자체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전혀 덕스러운 것이라 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덕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내포한다. 피조물의 거룩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향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 답변2.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더 낮은 피조물에게서 행해진다는 것은 은혜의 영광을 더욱 높이는 것이 된다. 사랑의 본질상 위대한 사랑은 사랑 받는 사람에 대한 존중도 사랑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피조물의 정당한 사랑과 존중을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 양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피조물을 사랑하고 존중하신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피조물의 상호사랑과 존중을 가치있게 여기시며 기뻐하실 것이다.

 

☞ 답변3. 에드워즈는 위인의 행동과 업적이 대중의 칭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주 존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혜와 존귀함을 정당하게 평가해 준다면 그것이 그 사람보다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평가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But it is not beneath a man of the greatest dignity and wisdom, to value the wise and just esteem of others, however inferior to him).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존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합당하고 사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4]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행하시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의무는 별로 없다. 즉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전달하면서 자신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고 피조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지 피조물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 답변.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의 유익은 마치 반대의견이 말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자신의 피조물의 영광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발산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누어 준 피조물의 탁월함과 행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충만함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것을 자신을 위해서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피조물의 유익은 하나님 자신과 아주 많이 연합되어 있고, 하나님 자신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탁월함과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과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영광과 행복을 구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며, 또한 자신 즉 전달되고 드러난 자신을 구하면서(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충만함을 기뻐하실 때, 자신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피조물의 영광과 행복을 구하신다“(252-3).

피조물은 영원히 하나님과의 교제로 더 가까이 나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관심은 자신과 관련하여 더욱 완전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기뻐하시며, 자신이 나누어 주는 선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무한한 충만을 흘러 넘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성향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서는 안된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유익을 나누어 주려는 하나님의 성향 또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기뻐하는 성향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감소시키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자비롭고 관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유익 속에 두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아주 넓어져서 타인을 자신 속으로 데리고 오며,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 자기도 행복을 느낀다. 사람 안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은혜는 유익을 주는 것이며, 제한된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은혜 또는 보편적 존재에 대한 사랑의 성향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 안에는 제한적인 이기심이나 보편적인 은혜에 반대되는 자신에 대한 사랑같은 없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 안에 모든 실재와 모든 탁월함을 다 포괄하여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사실상 보편적인 존재이며 우주적 실존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은혜 줄 대상을 찾는 대신 만드신다. 하나님은 자신과 구별된 어떤 것을 찾아, 그들의 유익에 함께 참여하며, 그들 안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들 안에 부어 주고 나타내 주어 그들을 자신의 유익속에 참여시키며, 그런 다음 그들 안에 나타나고 전달된 자신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 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달 성향의 실행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대상에 있어서의 선과 가치 그리고 대상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충만함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신다는 가정이 피조물들이 자신들이 받은 유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의무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드워즈는 이성적 고찰을 마감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무한히 장엄한 주제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다룰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해불가능성의 한계 때문에 이 주제를 마감함에 있어 많은 불분명한 점과 모호한 점이 있으며, 이 주제를 다루면서 사용한 용어의 표현에 있어서 많은 불완전함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계시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안내자다. 우리는 계시가 가르쳐 주는 것을 다음 장에서 고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성의 목소리가 가르쳐 주는 것을 들어보려고 한 노력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트집을 제거함으로써 계시의 음성을 들을 길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258-9).

 

I confess there is a degree of indistinctness and obscurity in the close consideration of such subjects, and a great imperfection in the expression‎‎!s we use concerning them; arising unavoidably from the infinite sublimity of the subject, and the incomprehensibleness of those things that are divine. Hence revelation is the surest guide in these matters: and what that teaches shall in the next place be considered. Nevertheless, the endeavors used to discover what the voice of reason is, so far as it can go, may serve to prepare the way, by obviating cavils insisted on by many; and to satisfy us, that what the Word of God says of the matter is not unreasonable.

 

 

o. 본서의 초판 출판 경위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의 원고를 스톡브리지에 있을 때에 완성하였다. 그의 제자이자 훗날 본서의 출판을 맡게 되는 사무엘 홉킨스의 일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1755년 2월 12일. 벨라미씨가 지난 목요일 우리 집으로 왔다. 그와 함께 스톡브리지로 갔다. 이틀 밤과 하루 낮을 거기 머물면서 에드워즈씨가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이라는 논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에드워즈 사후 에드워즈의 모든 육필 원고들은 홉킨스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는 에드워즈 전기를 준비하는 한편, 에드워즈의 저작 출판을 서둘렀다. 그가 처음으로 간행하고자 한 것이 본서와 『참된 미덕의 본질』을 한권으로 묶은 Two Dissertations이다. 그러나 홉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책을 사겠다고 예약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1765년에 본서를 간행하기에 이르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영 형편없었다. 그래서 홉킨스 목사는 에드워즈의 저서를 간행하려고 하던 계획을 모두 포기하였다(머레이,『조나단 에드워즈』,pp.638-644).

 

 

제 2 부.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에 대한 성경적 고찰

 

제1장.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천지창조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며, 만물의 최초 원인이신 동일하신 하나님이 만물의 최고, 최종 목적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한다(사44:6,48:12,계1:8,17,21:6,22:13).

성경이 하나님을 종종 처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이요, 시작일 뿐 만 아니라 끝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하나님이 만물이 생겨나는 최초의 원인이요, 원천인 것처럼 하나님은 만물이 만들어지는 마지막 최후의 원인이시라는 뜻이다(When God is so often spoken of as the last as well as the first, the end as well as the beginning, it is implied, that as he is the first, efficient cause and fountain, from whence all things originate; so, he is the last, final cause for which they are made; the final term to which they all tend in their ultimate issue. 롬11:36,골1:16,히2:10,잠16:4).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이라고 말해지는 방식인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의 한 부분으로서 적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언급된 것이다. 즉, 이것은 위대하고, 무한하며, 영원한 존재에 합당한 특권이며, 다른 모든 존재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의 존엄함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했으며, 하나님에 의해 만물이 유지되며, 하나님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은 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제2장. 이 문제에 대한 바른 논증 방법에 관하여 성경에서 발견한 몇 가지 요점을 제시함(Wherein some positions are advanced concerning a just method of arguing in this affair, from what we find in the Holy Scriptures)

 

에드워즈가 수행하고자 하는 다음 과제는 하나님 자신이 창조 목적이라는 것을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존 또는 존재를 창조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나 혹은 어떤 성품이나 완전함을 가지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실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신 결과 또는 하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고 그는 질문한다. 그는 몇 가지 요점으로 대답을 시도한다.

 

[요점1]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 창조 사역의 최종 목적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다(That which appears to be God‘s ultimate end in his works of providence in general, we may justly suppose to be his last end in the work of creation).

 

[요점2] 성경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특정 사역의 최종 목적인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역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특정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다.

 

[요점3] 빈번하게 언급되는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다.

 

[요점4] 도덕적 세상 혹은 세상의 지적인 영역과 관련해서(with respect to the moral world, or the intelligent part of the system)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언급된 것은 일반적으로 창조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의 구조로 볼 때도 분명한 사실은 도덕적 부분은 창조의 나머지 모든 부분의 목적이다. 창조의 어느 한 부분의 최종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이 나머지 모든 것들의 목적이고, 이 부분을 위해 세상의 나머지 모든 것들이 만들어 졌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전체의 최종 목적이다.

 

[요점5] 성경에서 하나님의 최상의 섭리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용 목적이다(But God's providence is his use of the world he has made). 또한 만일 분명히 하나님의 주요 사역인 하나님의 어떤 섭리 사역이 있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요 사용 목적이 나타난다. 이러한 앞의 두 가지 요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요점6] 도덕 세계(moral world)는 창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나머지의 목적이다. 그래서 세상의 도덕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모든 세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도덕적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섭리 사역의 목적 혹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만드신 도덕적 존재의 최종 목적을 보여 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만드신 중요한 목적을 보여 준다.

 

[요점7] 하나님의 계시가 보여 주는 선한 도덕적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궁극적 목적이다. 하나님이 도덕적 존재로 만든 목적에 맞는 자들은 선한 도덕적 존재들(good created moral agents)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선한 도덕적 존재의 최고 목적은 창조된 모든 도덕적 존재의 목적이며, 또한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모든 창조의 최고 목적이다.

 

[요점8]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에게 그들의 최종적이며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를 만드신 최종 목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 요점4에 의해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만드신 최종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적이며 도적적인 존재와 나머지 존재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는 자신의 창조주와 창조자가 자신들을 만드신 목적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능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과 부합된 행동을 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수동적이고 조건적으로 밖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든 목적에 부합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가 자신의 최종 목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의 의지는 반드시 창조주의 의지에 부합해야만 한다. 이것은 지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본성과 이성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계시된 법칙과 자연의 법칙이 일치하며, 입법자로서의 하나님의 의지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하나님의 계시된 법이 지성적인 피조물에게 그들의 최종적이며 가장 위대한 목적으로 추구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지성적인 피조물에게 최고 목적으로 정해 놓으신 모든 피조물의 최종 목적과 동일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요점9] 도덕적 존재의 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말해진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존재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며, 요점 4에 이해서 모든 세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선의 목적은 그것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요점10] 성경에서 인정받은 성도들로 묘사되고, 경건의 모범으로 제시된 사람들이 그들의 선하고 인정받은 행동에 있어서 최종의 그리고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은 반드시 그들이 자신의 최종 목적으로서 추구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전의 요점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의 최종 목적과 동일하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요점11] 성경은 성도들이 최고의 바람직한 상태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으로 선을 행할 때 가지고 있는 목적이 있으며, 이러한 목적은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their respect to God)이라는 말로 가장 적합하고도 직접적으로 표현됨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이 경건하고 선한 영혼의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만드신 최고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성도들의 진실한 선의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선의 최고 목적이며 또한 인간 창조의 최고 목적이다. 또한, 하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성도가 간절히 품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다른 것들을 만드신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과 동일할 수 밖에 없다.

 

[요점12] 도덕적 존재의 머리이시며, 특히 도덕적 존재의 모든 선한 부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추구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이다.

 

 

제3장.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의 최종 목적임을 보여 주는 성경 본문

 

1.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신의 사역 목적으로 만드시거나, 자신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사48: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름과 영광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강조와 반복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놀랍게 조직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2. 선한 도덕적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성경은 선한 도덕적 존재(the good parts of the moral world)가 만들어진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사 43:6-7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사60:21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사61:3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을 창조하시거나 성도들을 창조하시며 혹은 둘 다를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모든 비참한 상태에서부터 건져내어 주시어 행복하게 하시는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이고(사43:1-7), 교회의 탁월한 행복을 약속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신다(사60:19-21). 사61:3,렘13:11,엡1:5-6,사44:23,49:3,요17:10,살후1:10-12등도 보라.

 

3. 도덕적 행위자의 선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은 도덕적 피조물의 선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또한 도덕적 피조물의 도덕적 가치는 주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의의 열매를 맺는 궁극적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며(빌1:10-11), 과실을 많이 맺으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요15:8), 모든 신앙적 행동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벧전4:11).

또한 종종 참된 신앙의 실천, 죄의 회개, 거룩한 생활로 돌이킴 등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표현된다(계11:13,14:6-7,16:9,시22:21-23,사66:19,24:15,25:3,렘13:15,단5:23,롬15:5-6).

다른 사람에 대한 선한 행위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벧전2:12). 도덕적 선과 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것이다(롬3:7). 하나님의 영광은 특별한 은혜들 가령, 믿음 같은 것의 가치와 목적을 구성하는 것으로 말해진다(롬4:20,빌2:11,수7:19,고후8:19,눅7:16,시50:23).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 몸 즉 우리 영혼의 기능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함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자신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행하는 최고의 그리고 최종 목적으로 바라며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마6:9-13). 우리의 최종 목적, 최고 목적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기도에서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는 주기도에서 언급된 첫 번째 두 가지 기도 제목이며, 주기도 전반부의 주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는 주기도의 결론에서 언급된 마지막 두 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은 주기도의 알파와 오메가다.

 

5.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들이 가장 최고로, 가장 자연스럽게 자기 마음의 참된 선과 덕성과 경건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바라며, 기뻐하는 것이다. 거룩한 사도들이 때로 그들의 경건을 열정적으로 표시하며,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존중을 표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롬11:36,16:27,갈1:4-5,딤후4:18,엡3:21,히13:21,빌4:20,벧후3:18,유25,계1: 5-6).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시인인 거룩한 다윗이 자신의 경건한 마음을 열렬하게 쏟아 붓고 바랐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대상16:28-29,시29:1-2,57:5, Cf. 시72:18-19,115:1,사42:10-12).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의 경건을 표현한다(계4:9,11-14,7:12,사6:2-3). 그리스도의 탄생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눅2:14).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이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종속적인 목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최고의 가치있는 목적으로서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6. 그리스도 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최고,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셨다(요7:18).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을 지탱해주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최고의 목적이었다(요12:27-28).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자신의 고통의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요약해서 표현한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의 저 주목할 만한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궁극적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요17:1).

 

7.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위대한 섭리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있다(요7:18,12:27-28,17:4-5,13:31-32). 천사들도 하나님의 영광이 구속 사역의 최고, 최종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눅2:14).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구속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구절들도 있다(요13:23-24,빌2:6-11). 엡1:3-6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을 구속 사역의 목적으로 말한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구속의 목적임을 말한다(시79:9,사44:23,48:10-11,49:3).

 

8. 진노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공적 예배와 제도를 세우신 목적이다(학1:8).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약속과 성취의 목적으로서 언급된다(고후1:20).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죄에 대한 형벌을 시행하는 목적으로 말해진다(민14:20-23).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목적으로 말해진다(출14:17-18,겔28:22,39:13).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진노의 시행과 영광스러운 자비의 시행 양자 모두의 목적으로 말해진다(롬9:22-23).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최고로 행사하도록 정해진 날인 심판 날의 목적으로 말해진다(살후1:9-10).

 

9. 하나님의 자연계 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 목적으로 말해진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와 세상 창조 사역의 결과라는 것이 분명하다(시8:1,9,148:13,104:31,사6:3).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언급한 섭리 사역의 결과인데, 사실상 창조의 결과이다. 어떤 것을 사용함으로 얻어진 유익은 그것을 만든 결과다(The glory of God, in being the result and consequence of those works of providence that have been mentioned, is in fact the consequence of the creation. The good attained in the use of a thing, made for use, is the result of the making of that thing).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세상 창조의 결과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유익하고,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틀림없이 창조 사역의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결과이다.

 

 

제4장.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했음을 보여주는 성경 본문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과 하나님 자신의 최고의 관심사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구원의 목적으로 말해진다(삼상12:22,시23:3,31:3,109:21,요일2:12,시25:11,79:9,렘14:7). 애굽에서의 구속과 바벨론에서의 구속의 목적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해진다(삼하7:23,시106:8,사63:12,겔20:9,14, 22,수7:8-9,단9:15,사48:9-10,겔36:21-23,39:25,단9:19). 하나님이 백성을 구속하시며, 값주고 사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다(삼하7:23,렘13:11,행15:14).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들의 윤리와 신앙과 거룩한 행동의 목적으로 말해진다(롬1:5,마19:29,요삼7,계2:3). 또한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바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즐거워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삼하7:27,시76:1,148:13,145:13,사12:4). 악인들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해진다(출9:16,느9:10).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창조 사역의 결과로 언급된다(시8:1,9,148:13).

 

2. 하나님의 완전하심, 위대하심, 그리고 탁월하심[의 현시(the manifestation of God's perfections, his greatness and excellency)]은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 목적이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완전성, 위대성, 탁월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위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그는 주의 의(시88:12-13), 주의 진리(시30:9), 주의 신실(사38:18-19)등을 지적한다. 이것들은 도덕 세계의 좋은 부분 즉 하나님 백성의 목적이다(사43:21,벧전2:9). 하나님 백성들의 가장 귀중한 것, 가장 적합한 열매, 윤리적 행동의 목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사60:6,시66:19,대상17:8,23-24).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특히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행하시는 목적으로 말해진다(출9:16,단4:17).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호의와 자비의 위대한 목적으로 말해지기도 하고(왕하19:19,왕상8:59-60), 악인들의 영원한 멸망과 의인들의 영원한 행복의 목적으로 말해진다(롬9:22-23). 이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위대한 목적으로 말해진다(출7:17,8:10,19:2).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의 목적이고(출29:44-46, 31:13,겔20:12,20). 애굽으로부터의 구속과(시106:8,출7:5,신4:34,35) 바벨론으로 부터의 구속의 목적이기도 하다(겔20:34-38,42,44).

이것은 또한 값주고 사는 것과 적용하는 것 양자 모두를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위대한 목적으로 말해진다(롬3:25-26,엡2:4-7,3:8-10,시22:21-22,히2:12,요17:26,사64:4 ).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값주고 구속하는 위대한 구원의 목적으로 말해진다(사49:22-23).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의 목적이기도 하다(욥37:6-7). 심판 날 만물이 정해진 대로 되어지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완성되는 목적으로 말해지기도한다(롬2:5). 하나님의 탁월함의 선언 또는 공적인 나타남은 창조 사역의 실제적이고 행복한 결과로서 언급된다(시19:1-4).

 

3. 하나님을 찬양함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렘13:11).

하나님을 찬양함은 도덕적 존재의 목적으로 말해진다(마21:16). 하나님을 찬양함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행위의 목적으로 말해진다(빌1:11).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구속 사역의 목적이기도 하다(엡1:6,12,14,빌1:11).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함은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용서와 구원의 목적으로 말해진다(사48:9-11,렘33:8-9).

성도들이 힘껏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한 성향을 가지고 도달해야 할 목적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아주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모든 나라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청한다. 또한 서로 서로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영원히 그를 찬양하라”고 외친다. 모든 세대를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결심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며,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를 말한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모든 창조 사역의 바람직하고 영광스러운 결과(the desirable and glorious consequence and effect of all the works of creation)라고 말해진다(시145:5-10,148편,103:19- 22).

 

 

제5장. 피조물에게 선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임을 보여 주는 성경본문(Places of Scripture from whence it may be argued, that communication of good to the creature, was one thing which God had in view, as an ultimate end of the creation of the world).

 

1. 피조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지만, 손해를 끼치는 것은 단지 특정 부분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피조물에게 선을 전달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기쁨이다. 하나님이 심판을 집행하는 것은 더 큰 목적과 관련해서 가치있게 여겨질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하시면서 행하시는 것으로 말해진다. 즉 피조물의 불행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는다(신28:63,겔5:13등의 본문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이러한 부득이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신다(느9:17,시103:8,145:8,욘4:2,미7:18,겔18:32,애3:33,겔33:11,벧후3:9).

 

2.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서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전달 추구와는 일치하지 않고, 단지 종속적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요3:16,요일4:9-10,엡2:4등은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 성경은 도처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위대한 일이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진다(갈2:20,엡5:25,요17:19). 그리스도는 가장 진실되고 적절하게 자기 교회의 구원을 기뻐하신다. 즉 단순히 수단으로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적절한 목적으로서 기뻐하고 만족하신다(사53:10-11). Cf.사62:5,습3:17,잠8:30-31,요12:23-32

 

3.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과 자비를 보여 주시는 동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특히 죄용서와 구원은 때때로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위하여라고 말해진다(시25:7,11,느9:31,시6:4,31:16,44:26)

 

4.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는 하나님 백성의 선을 위한 것이다.

막2:28에서 그리스도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 된 이유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렇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인자가 만물의 주인이기 때문에 만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

 

5.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함에 있어, 하나님 백성의 유익을 위해 모든 창조물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신33:26에 훌륭하게 언급되어있다(“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온 우주는 에스겔의 환상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 혹은 수레다(겔1:22,26-28).

 

6.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에 이바지한다.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다가올 세상에서 악인의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해진다(사43:3-4).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원수 갚는 정의와 진노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자비로 언급된다(시136:10,15,17-20). 롬9:22-23에 의하면 악인들의 멸망에 대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긍휼의 그릇에 대해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란 점이다.

 

7.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며 또한 하나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전3:22-23).

 

8. 모든 섭리는 하나님 백성을 위한 사랑이다.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시136편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사역으로 언급된다.

 

9.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마25:34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후로 의인들을 위해 나라와 영광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말해진다.

 

9. 인간 관계에 있어 윤리의 최종 목적은 서로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롬13:8-20,갈5:14,약2:8. 성경은 하나님 백성의 복지를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모든 참된 성도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 사도들은 하나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했다. 천사들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고용되고 있다고 말해준다(히1:14)

 

 

제6장.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

 

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kabod는 ‘무겁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kabad, ‘무거운’을 의미하는 kaved에서 왔다. 이 단어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겁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명사 kabod는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을 의미한다(잠27:3,삼하14:26,와상12:11,시38:4,사30:27). 물체의 무게는 밀도나 크기에서 발생하는데 밀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출19:6에서 볼 수 있고, 크다는 의미로 아주 자주 사용되는데, 사32:2,창5:9,왕상10:2등에서 볼 수 있다.

kabod는 보통 영광으로 번역되며,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때로 이 단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내적이며, 고유한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내적 영광의 발산, 전시 또는 전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전시된 것을 보거나 전달받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느낌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지식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kabod는 신약의 doxa로 번역되었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이 말들이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례들을 고찰하는 데로 나아간다.

 

[정의1] 영광은 내적인 탁월함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때로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영광이 내적인 것 혹은 주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탁월함, 존귀함 혹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크기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혹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탁월함을 지칭하기 위해 아주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때로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이며, 크고 탁월한 선은 선천적인 것보다 후천적인 것에 사용되기도 한다. 부유함이 때로 영광으로 불리우며(창31:1,에5:11,시49:16-17,나2:9), 크게 번성하고 일반적으로 충만한 선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창45:13,욥19:9,사10:3,16,17:3-4,21:16,마4:8,눅24;26,요17:22등).

 

[정의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

(1) 영광은 내적인 위대함이나 탁월함의 외적 발현이다.

영광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내적 영광의 전시, 발산 혹은 전달해 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로부터 영공은 종종 빛의 발산에 의한 광휘 혹은 빛남을 의미한다. 고전 15:41에 해와 달과 별들의 빛남이 이들의 영광이라 불린다. 특히 영광은 빈번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어진다(겔1:18,10:4,사6:1-3,요12:41,겔43:2,사24:23,60:1-2, 눅2:9,행22:11,고후3:7-8,3:18,4:4,6,히1:3,벧후1:17,계21:11,23).

 

(2) 영광은 때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선과 은혜를 말한다.

영광이란 단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때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충만의 전달을 의미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과 은혜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엡3:16,1:7,2:7; 빌4:19,롬9:23,출33:18019). 에드워즈는 특히 요12:12-32를 주목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앞에 높여있는 기쁨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이겨내셨다(히12:1-2). 하나님의 영광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혼이 추구한 목적이며, 그리스도께서 얻기 원한 기쁨의 목적이었다(사53:10-11). 또한 동시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수난의 목적으로서 언급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산과 열매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하나님의 영광이 아주 빈번히 발광체 혹은 빛의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발광, 발산, 전달로 표현되는 것은 지금 살펴 본 것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발산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또는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히 충만한 선하심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고, 풍성하게 전달되는 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빛은 성경에서 아주 종종 일반적으로 위로, 기쁨, 행복, 선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정의3] 영광은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영광의 전시는 보는 사람의 관점을 포함한다. 영광의 나타남, 발산 혹은 발광은 눈과 관계가 있다. 빛 혹은 밝음은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빛에 의해서 발광체를 본다. 또한 지식은 성경에서 가끔씩 빛으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영광이란 말은 아주 빈번하게 존귀를 의미하거나 함축한다. 그러나 존귀는 존귀함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과 탁월함에 대한 지식을 함축한다.

 

[정의4] 영광은 찬양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영광과 찬양은 빈번하게 동의의로 사용된다. 찬양이란 말과 행동으로 존경 혹은 존귀를 표현하는 것이다(시50:23,22:23사42:8,42:12,48:9-11,렘13:11,엡1:6,12,14,빌1:11,고후4: 15). 영광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탁월함과 완전하심을 기뻐하는 마음의 존중과 사랑을 함축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즐거워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찬양은 보통 기쁨의 표현이다. 찬양은 기쁜 소리로 불린다(시66:1-2,96:4-5).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1)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에서 아주 흔히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삼위일체의 제2위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출33:18-19). Cf. 시8:1,79:9,102:15,148:13,사48:9,11,59:19,렘13:11. 영광이 종종 나타냄, 드러냄, 탁월함에 대한 지식, 어떤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영예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름도 마찬가지다(창11:4,신26:19).

 

(2)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 찬양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사48:9,렘13:11,신26:19,렘33:9,습3:20).

 

(3)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출33:19,34:5-6).

 

(4) 광야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에 보여졌으며, 성막과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에 있었던 밝음과 광채가 종종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렘14:21에 의하면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는 하나님의 이름 또는 영광의 보좌로 불린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은 동일한 것으로 말해진다.

 

 

제7장 천지창조의 최종 목적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줌(Showing that the ultimate End of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but one, and what that one end is)

 

1.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에 관한 다양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양한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거나, 한 가지에 대한 전체의 다른 부분에 대한 이름이거나, 동일한 전체를 다양한 빛이나 다양한 측면과 관계로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문구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문구는 성경에서 하나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고 또한 가장 적절한 말인 것처럼 보인다.

 

2.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외적 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 사역의 최상의 목적과 궁극적인 목적으로 표현될 때,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충만의 외적 발현이요, 외적 표현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참되고 정당한 외적 전시 혹은 내적 영광의 외적 발현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드러내는 것과 피조물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적절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이 행사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이 이성적으로 창조된 존재에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최고로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이러한 것들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 즉 신성의 탁월한 광채와 충만함이 확산되고, 흘러넘치는, 또는 확장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외부를 향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함을 사용해서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함의 발산 또는 전달과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출된 결과는 즉 전달된 하나님의 충만함이며, 결과의 산출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효과적인 사용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발산이다”(345-6).

 

4. 모든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하나님의 지성과 덕과 행복으로 요약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하나님의 지성이나 의지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성의 영광 혹은 충만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적 영광 혹은 충만은 하나님의 거룩과 행복이다. 하나님의 내적 선 혹은 영광의 총체는 이 세 가지 즉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 하나님의 무한한 덕과 거룩, 하나님의 무한한 기쁨과 행복이다. 신성의 충만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이해의 충만함이며, 하나님의 덕과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지의 충만함이다.

 

5. 하나님의 외적 영광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외적 영광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을 전달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지식의 전달은 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된다. 지성을 가진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의 발산 혹은 전달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2) 또한 하나님의 거룩의 전달은 주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탁월함을 보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충만의 전달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

3)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전달하는 것은 주로 피조물에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함을 기뻐하는 이러한 기쁨과 행복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탁월함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러한 것이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행하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발산인 하나님의 외적 영광 안에는 분명히 이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And in these things, knowing God's excellency, loving God for it, and rejoicing in it; and in the exercise and expression‎‎! of these, consists God's honor and praise; so that these are clearly implied in that glory of God, which consists in the eman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