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조직신학에서 바라본 교회관 (최홍석 교수

하나님아들 2022. 9. 21. 18:23

 조직신학에서 바라본 교회관 (최홍석 교수, 본교 조직신학 교수)

 

올바른 교회관을 가진다는 것은 평생 교회를 섬겨야할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제목의 함축하는 바는 교회에 대한 바른 관점을 조직신학적 접근에 의해 제시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사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라는 표현의 의미를 무슨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 역사, 실천신학 없이는 결코 조직신학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올바른 성경이해에 근거해야 하고, 역사적 통찰을 가지고서 바른 해석을 이끌어내어야 하며, 과거의 교훈이 아닌, 현재적 진리로서 적실성(適實性)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마침내 그 결실을 얻게 된다. 따라서 조직신학적 관점이란 이 모든 지평들을 아우르면서 교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세워 가는 일이다.

교회의 본질과 다중적 성격

교회의 설립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우연히 발생한 돌발적 사태가 아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구원 경륜의 결과로서 구약시대로부터 그 뿌리를 지니며, 언약개념 속에서 신약의 교회로 연결된다. 신약의 교회(ecclesia)는 원래 예루살렘에만 존재했었다. 그 후, 사마리아, 안디옥,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들에서 계속 생겨났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다. 그래서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으로 불려져왔다. 이 “교통” 혹은 “교제”(communio)는 본질상 신앙의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서의 “성도”는 신앙으로 거룩케 된 자들이다. 교회의 교회 됨, 곧 교회의 본질은 그 깊은 차원에 있어서 영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한 것이다. 누가 이 신비적 연합에 포함되었는지를 육안으로써는 온전히 식별해 낼 수 없다. 오직 주께서만 궁극적인 판단을 하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무형적인 면을 지닌다.

이 무형적인 면은 필연적으로 유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신앙고백과 기독교적인 삶을 통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외형적인 조직과 정치를 통해 유형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두 면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형적인 면에 속한 이들이라고 해서 다 유형적인 조직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유형적 기관으로서의 교회 안에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

교회는 위의 국면들 외에도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을 지닌다. 전자는 성령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며, 후자는 그 신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구원의 수단으로서 교회의 조직과 연관된다. 전자는 그 목적이 각종 은사와 재능을 통한 봉사(apparitio)에 있다. 후자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정하신 직임과 수단을 통해 질서(institutio)를 유지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데 있다. 이 둘은 모두 교회의 본질적인 면에 속한다. 만일 두 국면을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본다면, 그것은 오해다.

제도적인 면과 유기체적인 면을 대립시키는 경향은 문제가 있다. 은사는 직분을 향한다(막16:17,20, 히2:4, 고전1:6, 14:13-19). 또한 직분은 은사를 도우며 확장시키며(딤전4:14, 딤후1:6), 전체로 통합시킨다(고전14:40). 그렇다면 은사와 직분의 관계는 대립적일 수 없다.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도 상충적일 수 없다. 교회는 은사적일 뿐 아니라, 제도적이다. 그리스도의 소유일 뿐 아니라, 성도들을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하도록 섬긴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coetus fidelium)일 뿐 아니라,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다. 유기체일 뿐 아니라 제도다.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비한 몸이다. 그럼에도 일체를 경험하기란 힘든 일이다. 사도는 책망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cf., 6:9, 고후6장). 분쟁과 성적 문란, 우상숭배와 관련된 일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성령을 근심되게 한다. 교회를 분열시킨다. 회중의 하나 됨을 깨뜨린다.

신자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도 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도 한다(고후5:17, 갈2:20).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두 개념을 동시에 말하기도 한다(요6:56).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또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될 수 있다니! - 실로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신비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은 실제적인 연합을 가능케 하는 근거다. 땅 위의 교회는 항상 파당과 분열의 위험을 안고 있다. 혈연과 지연과 문화적 수준과 관심의 차이, 그리고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 항상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가능성을 제거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하나 됨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신자와 신자 사이의 참된 결속은 자신의 상대편 속에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에만 가능하다.

섬김의 직분

그럴지라도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형제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써 그와 하나 됨을 확인하는 단계를 넘어 그 형제를 섬기는 일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 안의 직분들은 권세를 부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섬기기 위한 것이다. 발은 몸을 섬기고 손은 온 지체들을 섬긴다. 어느 하나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지체는 없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교회 안의 직분을 언급할 때 언제나 ‘섬긴다’는 의미의 ‘디아코니아’(diakonia)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디아코니아란 ‘식탁에서 봉사한다’는 본래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다. 이 말과 관련되어 있는 교회 안의 직무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고귀한 일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섬김이란 근본 의미를 지닌다(행20:24, 고후5:18).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다. 교회 안의 직분이 섬김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로 오셨다(눅22:27). 그의 전 생애는 섬김 자체였다. ‘여호와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언약의 성취자인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눅4:18-21).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2:7-8).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섬김에 동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일 수 없다.


참된 교회의 표지

2세기로 넘어 가면서 기독교회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많은 수의 이단과 다양한 종파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질문은 ‘이처럼 많은 교회들 가운데 과연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어느 시대에나 되물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이 질문은 특별히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다시금 심각하게 논의되어져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이비성의 불건전한 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며 가르쳐지고 있는가? 또한 성례는 합법적인 사역자에 의해 성경적으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기독교적 권징이 신실하게 집행되고 있는가? 하는 등등의 질문들이다.

말씀의 참된 선포, 성례의 합법적인 시행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집행은 이른바 교회의 진정성을 확증하는 세 가지 표지들로 불려져 왔다(Hyperius, Ursinus, Trelcatius).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에 연관시켜 참된 교회의 표지에 관한 논의는 좀 더 진전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리라’는 교훈과 관련해서도 교회의 순수함과 불순함은 판가름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참된 교회의 표지 개념은 객관성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어야 참된 교회라는 말은 백 번이라도 옳다. 그럼에도 생각해야 할 문제는 좀 더 남아 있다. 설령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올바로 가르쳐지는 교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듣는 회중이 그들의 영적인 귀를 막아 버리고 그래서 말씀이 의도하는 열매를 맺지 못해 거룩한 삶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들을 가리켜 참되고 순수한 회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참된 교회의 표지 개념에는 기독교의 객관적인 면과 더불어 신앙의 주관적 국면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향력이 삶을 통해 드러나는 회중을 가리켜 비로소 참된 교회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회중은 성경의 말씀과 같이 성령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하나 됨을 드러낼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믿음과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거룩한 백성임을 나타낼 것이며 그리고 외모를 따라 판단치 아니 하시는 하나님을 닮아 모든 계층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복음 안에서 포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회중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으로 그의 뜻을 준행하는 자들은 진실로 복된 자들일 것이다. 목회자 후보생들로서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섬길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준비하며, 오늘도 고된 신학 수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