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 기도를 위한 9가지 도구 9)통성기도와 방언기도
사귐의 기도를 위한 9가지 도구
9)통성기도와 방언기도 시편69:1-3 2021/8/25(수) 69: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69: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공)69:1 나를 구하소서, 하느님. 목에까지 물이 올라왔사옵니다. 69:2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발붙일 것 하나도 없사옵니다. 물 속 깊은 곳에 빠져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69:3 나의 하느님, 눈이 빠지도록 당신을 기다리다가 목 쉬도록 부르짖다가 지쳐버렸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도의 도구는 통성기도와 방언기도입니다. 이 두 축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흘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첫째 영적 공허함입니다. 열정에 비해, 기도가 영혼 깊은 곳까지 이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말과 행동의 불일치입니다. 유창한 기도와 달리, 그의 행실이 거룩함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보다는 독선과 거만함에 더 가깝게 비추어졌지요. 셋째 그릇된 믿음의 척도와 헛된 권위입니다. 통성기도와 방언기도가 마치 계급장이 되어, 교회의 덕(질서)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통성기도와 방언기도를 살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역시 사귐의 기도를 위한 참 좋은 도구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기도의 도구이기에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1. 통성기도 통성 기도의 전통은 한국 개신교회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죄를 참회하고, 함께 통곡하며, 합심으로 회개하는 통성기도는 한국교회 부흥의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통성기도는 1903(원산)-7(평양)년에 이른, 대 부흥 운동의 가장 중요한 힘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통성기도의 성서적 전통은 초대교회를 거슬러 올라 고대 이스라엘의 기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음은 구약 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 1933)의 이야기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러한 활기 없고 고분고분한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기도에는 실제적이고 긴급한 무엇이 달려 있다고 믿었다. 더욱이 우리 시대에도, 긴급한 그 무엇이 기도에 달려 있다는 동일한 의식이 절박한 기도에서 나타난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활기 없고 고분고분한 기도에서 물러나 무례하고 강하게 요구하는 격렬한 기도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아주 긴박할 때 만 이렇게 기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늘 되풀이되었다. 간구에 집중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소환하고 하나님의 주의 깊은 반응을 촉구한다. 이스라엘의 수사학적 전통을 보면, 이스라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적어도 기도를 계속하기에 충분한 응답을 받았다. 통성기도라고 할 때, ‘통성’의 정확한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두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通聲: 배속에서 뽑아내는 소리 痛聲: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종합하면, 내면에서 느끼는 개인의 아픔 혹은 공동체의 아픔 때문에 저절로 터져 나오는 기도가 통성기도입니다. 성서에는 이런 증거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뽑으라면, 어린 이스마엘과 함께 집에서 내쫓겨 광야에 놓인 하갈의 기도입니다. (공)창21:16 "자식이 죽는 것을 어찌 눈 뜨고 보랴." 하고 탄식하며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아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하갈은 이스마엘이 소리내어 우는데도 주저앉아 그저 바라만 보았다. 21:17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셨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통성기도를 ‘하소연의 기도’ 또는 ‘불평의 기도’라고도 부릅니다. 그만큼 감정에 정직한 기도이지요. 따라서 통성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 매우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아픔을 느낄 때,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빠른 개입을 요구하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앞에서 취할 당연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할 때, 통성의 끌림이 있으면 거부하지 말고 기도할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통성기도를 차원 낮은 기도나 광신자의 기도로 치부하지 말아야합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몰아세우는 통성기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하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도 처분을 호소하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왜냐? 기도의 응답은 통성 곧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느끼시는 아픔의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성기도를 인의적(주여 삼창)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응답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아픔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통성기도에 있어 꼭 하나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탄식입니다. 아픔이 너무 깊어 영혼의 탄식마저 막힐 때, 성령은 그런 우리 영을 대신하여 탄원하여 기도하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간구라고 했지요. (공)롬8: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8: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이런 통성기도는 종종 무의식의 방언 기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2. 방언기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즉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인의적인 훈련(세,빠,크)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방언이란? 다른 나라(민족)의 언어를 가리킵니다. 성령에 의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와 민족의 언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타국의 언어가 아닌 성령의 임재로 나타나는 방언현상도 있습니다. 에모리 대학교의 루크 존슨은 신약성서의 배경에 근거해 방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동안 살펴본 성경의 모든 증거는 방언이 강력한 감정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적 표현임을 의미한다. 방언은 실제 언어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질서를 가진 중얼거림이다. 특히 그것이 처음 나타날 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영적 능력에 힘입고 있음을 체험한다. 이 체험은 그에게 행방감과 기쁨을 선사한다. 개인에게 방언은 영적 실체에 대한 언어적 상징일 수 있으며, 공동체에게 그것은 강력한 영적 현존의 표현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며, 그 의미는 종교적 체험의 일종이란 데 있다. 따라서 모든 방언을 성령의 현상으로 보아서도 안 되고, 방언 자체를 하늘의 언어인 것처럼 신성시해도 안 됩니다. 흔히 모든 종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종교 현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합니다. 사실 방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습니다. 잘 사용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겠지만 잘못 사용하면 교회의 분란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방언 기도는 개인 기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무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언은 개인적인 경건의 도구로 사용할 때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끝으로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드리는 기도가 늘 방언과 통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향심과 침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계신 분이 나를 대신해 기도하시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 교통(교제)하심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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