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주의의 원인
Andrew Stenhouse
우리는 앞에서 주요한 교파 체계의 기원과 발전을 검토하고, 최초의 성경의 터로 돌아가려는 근대의 시도를 설명했다. 이제 몇 가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교훈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분파주의의 원인을 분별하고, 그 다음에 개선책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실패한 이유들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모든 분파주의의 원인은 하나님의 눈앞에 흠이 없이 존재하는, 신성한 하늘에 속한 개체인 교회에 관한 성경적 개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그분의 교회는 결코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단체로 사람의 책임에 맡겨진 적이 없었다. 교회는 공공 단체를 조직하거나 관리하는 것처럼 세워져서는 안 되었다.
둘째로, 분파주의의 주요한 원인은 완전한 안내자인 성경의 권위를 따르는 대신에 인간 지도자를 따른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과시하는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과는 반대로 그러한 인도자들은 처음부터 소위 “가톨릭” 교회에서 고상한 칭호와 특권을 갖는 성직자 그룹으로 조직되었다. 모든 다른 분파 조직의 인도자들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양식을 따랐다. 우리가 진리로부터 떠내려 갈수록, 인간의 권위를 필요로 한다.
모든 이단적인 조직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권위를 인정한다. 그들은 모두 성경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른 권위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 권위는 항상 최종 결정권을 갖는 권위로 입증된다. 어떤 가르침이 확실하게 정통인 것은 그것이 성경의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정통이라면, 어떠한 다른 권위의 지지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어떤 권위를 지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추가적인 권위에 호소해야 한다면 그 권위는 성경의 지지가 부족한 것이 분명하다. 로마교회에게 그것은 교황권과 교황제도의 전통이다. 몰몬교에서 그것은 요셉 스미스와 몰몬경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그것은 에디 부인의 “과학과 건강”이다. 제7안식교에서 그것은 화이트 부인의 “증거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그것은 러셀 목사와 요셉 프랭클린 러더포드의 저술들이다.
어떠한 이단 종파도 오직 성경의 증거만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할 수 없다. 이는 정통으로 불리는 교파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추종자들보다 오류가 적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작성한 신앙고백서, 신조, 신앙개조(信仰箇條)에 호소한다. 실로 오늘날의 신자들은 참된 성경의 가르침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선조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신조들과 교리들은 영적인 비평을 받았으며, 그것들을 체질하고 알곡으로부터 껍질을 분리하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신조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된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성경 교리의 전 영역에 걸쳐 정통(精通)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가 이 신성한 안내자를 의존할 경우, 그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2장 18-27절의 가르침이다.
다른 한편으로 분파주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그들의 한 가운데 계신 그분의 임재를 의존하는 무리(적게는 두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로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정의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지역모임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러한 모임은 징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임은 다른 모든 지역모임과 행정에서 독립된 자율적인 지역모임이다. 이와 다른 형태로 세워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분파적인 조직이 된다.
주님을 직접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중앙집권적인인 모임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자신들의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상급 기관을 의지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 예비된 이러한 단순한 성경적인 형태(역자주-지역모임의 독립성과 자율성)를 취하는 것은 기독교(Christianity)의 전체 계획 및 특성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한 형태를 인지하고 택할 경우, 기독교계(Christendom)를 괴롭히는 많은 악한 것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파주의에 기여한 다른 원인은 사람의 이름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적인 이름들을 남용할 수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이름으로 모이는 것 같이 성경적인 단순한 방식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그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은 상반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이름은 인간의 고안품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은 분파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자들이 기독교의 공통된 터 위에 모이는 곳에서는 그들을 구별 짓는 특별한 호칭이 필요 없다.
그러나 분파적인 지위와 이름을 포기하고 성경적인 터로 돌아가려고 하는 곳에서조차 그러한 시도가 어느 정도 실패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실패는 다름 아닌 우리의 본성의 일부로 여겨지는 분파주의 성향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원칙만을 인식하거나, 또는 지역모임의 문제에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줄 올바른 성경적 질서를 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교만, 지위를 사랑함, 편협, 분열의 영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육신의 죄들이 우리 가운데서 정죄 받지 않을 경우, 곧 우리 자신이 분파적인 터로 돌아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지역모임의 문제에 관한 첫 번째 교훈에서 형제에 대한 태도를 다루셔야 했던 이유이다(마 18장). 이 분파주의의 원인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다른 원인들을 분별하는데 필요한 은혜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 함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과 실행의 완전한 일치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일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스스로 분리되어 다른 무리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동료 신자들과의 일치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같은 것을 말하고(고전 1:10) 같은 생각을 품으라고(빌 2:2) 권면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증거를 준 모든 문제에서 이것은 가능하며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필수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확실한 지침을 주지만, 일반 원칙들과는 별도로 전혀 지침을 주지 않는 문제들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형제들이 주님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에 따라 달리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방식과 일치하기를 원하며, 그러한 사람들과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의 일치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해석과 적용의 문제이며, 전통과 정착된 관습이나 또는 단순히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우리는 성경이 아무 선언도 하지 않는 곳에서 서로가 자신들을 위한 규정을 만들도록 부름 받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사도 시대에 다양한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생각이 많이 달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서 14장의 구절들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바울조차도 음식을 먹는 것과 날들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다른 판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규정을 만들지 않았다.
이 문제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분명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세기 신자들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이들은 이방인들인 상황에서 사도는 인내하며 서로 참을 것을 간청하였다. 사역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기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기회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교제의 터로 자신들의 견해와 의견을 수용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경고한다. 디도서 3장 10절의 “이단인 자”는 그들의 견해가 그들이 성도임을 추천하지 않으며, 신성한 계시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성도들을 하나가 되게 하기보다는 나누는 성향이 있는 견해를 가진 완고하고 분쟁을 일삼는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
교회에서의 사역은 항상 인간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나누지 않고, 그들을 강하게 하며, 그들을 세울 것이다.
또한 그 사역은 다양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진리의 노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분파주의를 초래할 것이다. 실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높이며 성도들을 풍성히 먹이는 편견 없는 사역이 주관적이며 자신들의 성취에서 만족을 얻기 위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의지하게 하는 사역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일에서 같이 사역에서도 하나됨이나 조화를 파괴시키지 않는 많은 다양성의 여지가 있다고 가르친다. 은사와 사역과 활동에서 다양성이 있지만, 같은 한 성령께서 계시며(고전 12:4-11), 이 다양성은 개인으로서 또는 모임으로서 우리를 위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심오하며 광범위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에 관한 신선한 지식과 신선한 비전을 얻어야 한다. 분파적인 마음의 성향은 모든 진리나 또는 어떤 진리를 고정된 틀에 넣고, 그것을 무미건조한 형태의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것은 참된 영적 은사가 발휘되었거나 모든 성경의 가치를 잘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파의 양식은 교리 진술문, 신앙고백, 일련의 조항들이나 모든 회원들에게 권위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완전하고 충분한 권위인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문화된 신조(信條) 선언서가 없을지라도,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강조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서 방향이 다른 동료 신자들로부터 떨어지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르침이나 실행의 특별한 노선에 관해 합의나 공통된 인식의 기초 위에서 함께 모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그러한 개념들을 성도들 가운데 배부되는 새로 발행된 찬송가집이나 월간 잡지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찬송가집이나 잡지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개인들과 모임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의 본래의 터를 떠나는 성향이 모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기초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파나 파당의 영이 존재하는 곳에서 말씀의 사역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배경과 학력 때문에 청중들의 마음을 끄는 노선을 강조함으로 신실한 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역의 노선은 가장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실한 형제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인기가 없는 진리를 사역하는 자이다.
우리가 설교자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역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모이는 모임은 하나님의 영께서 모임을 위하여 은사를 받은 자들 가운데서 그분이 원하시는 자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분파적 입장을 강하게 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자주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비성경적인 성향들을 보지만 그러한 성향들을 바로 잡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역하는 대신에, 바로 잡는 사역이 필요한 자들과의 연합에서 물러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 있으려는 생각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은 식으로 처음에는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파당이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것은 특성에서 분파적이다. 어떤 파당에 속하는 것은, 심지어 진리를 지키기 위해 형성된 파당이라 할지라도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교회의 진리는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파당을 형성함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옳게 말했다. 왜냐하면 파당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견해와 실행을 가진 이들과 연합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은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요구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데 있다. 우리 중 누구도 모든 진리를 독점하지 못한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을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방해야 할 양식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이 채택하도록 인도하지 않는 견해나 실행을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혹자가 말했듯이, “(견해나 실행이 다른 사람들을) 반대하기 위해 파당을 형성하고, 반대하는 파당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어려움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하나님의 영 안과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영적 자원들...은혜와 형제의 친절의 자원들, 기도하는 마음의 간구와 성경을 사용하는 자원들....이 세상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자원들이 있다. 우리는 이 자원들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철저히 올바르게 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말씀 안에 어떤 권위도 갖고 있지 않는 편법을 사용하는 대신에, 이 자원들을 사용하도록 은혜를 구하자. (F. B. Hole의 “신비의 경륜”)
- Andrew Stenhouse 『The Sin of Sectarianism』에서 발췌, 번역 -
[출처] 분파주의의 원인|작성자 Truth and Testi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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