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신앙고백! 구원 경륜!

클라우스 펠빙거의 신앙고백(2)

하나님아들 2022. 6. 14. 12:24

클라우스 펠빙거의 신앙고백(2)

란츠후트(Landshut) 의회에 부침, 1560년

클라우스 펠깅거 씀 / 전영표 옮김

침례

 

또한 우리는 침례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몇 번 침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단 한 번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내가 형제들에게서 또 침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내게 침례를 준 경건한 형제들은 먼저 내게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나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나의 믿음에 근거하여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의 믿음을 인(印)치시고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지금까지 나를 진리 안에 머물도록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제 생명이 다하기까지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거두어가지 않으시기를 소망합니다.”(시 51:11).

 

그러나 나는 유아세례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금전을 목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부(富)를 축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뽑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과 신약 어느 곳에서도 유아세례에 관한 어떤 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거나 혹은 제자들이 그것을 실행하였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에겐 오직 하나님의 참된 침례만 있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연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나이에 도달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이 세상 죄악의 즐거움을 버리고, 마귀에 대한 섬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이 진정한 침례의 계시를 방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적(敵) 그리스도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인 교황은 유아세례를 대단히 강조합니다. (주: 적그리스도는 루터를 포함한 개혁자들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그들은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동시에 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적대자, 곧 이 세상의 지배자,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교황권과 성직자들은 당시에 그들의 부패에 관한 잘 알려진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아세례는 단지 진정한 침례와 하나님의 명령에 손상을 입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복종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침례는 하나님과의 선한 양심의 언약(covenant of a good conscience with God)이기 때문입니다(벧전 3:21). 그리고 침례는 그 사람이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상속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골 1:12). 그런데 어떻게 한 어리아이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에 대해 알겠습니까? 이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 옆에 서 있는 대부(代父)가 자신은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마도 술주정꾼이거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혹은 간음하는 자, 멸망의 자녀일지라도, 그가 아이를 위한 믿음을 대신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약하면, 이는 하나의 어리석고 눈먼 생동일 뿐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온갖 악한 방법과 사악한 사람들이 존귀한 이름을 얻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악을 감추기 위한 겉옷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침례를 통하여 그의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처럼 사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왜곡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하게 손에 칼을 쥐고 있어서,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려 합니다. 그때에 바알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조심하라! 지금은 대환난의 시대다! 늑대들이 양 우리를 부수고 그 가운데 들어오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그들에게 어떤 양들이 있습니까! 목자들이 양들의 가죽을 벗기고 그 피를 빠는 지경이니, 이제는 양들이 늑대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자기의 목자들이 여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목자들을 메신저로 인정합니다. 그들이 악할진대, 그들이 어떻게 선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말씀을 이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진실한 사람들에게 위탁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명백하게 말하였습니다. 목자는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고, 냉철하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대접에 힘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자기를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인내하며, 말다툼하지 아니하며, 탐욕스럽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모든 엄위로 자녀들을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외인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신중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합니다(딤전 3장, 디도서 1장).

 

여러분의 성직자들을 이 거울에 비추어 그들 안에 이러한 덕목들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오히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반대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들의 가르침으로는 어느 누구의 삶도 개선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입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생각, 그들 자신의 마음의 거짓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도 파멸시킵니다. 그들의 말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며, 아무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죄악의 낡은 부대 상태로 있습니다. 성령님은 죄의 도구가 된 사람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먼 인도자들입니다.

 

주의 만찬

 

나는 또한 거룩한 성례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에게 성직자들의 성례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들의 축복은 하나님의 눈에는 단지 하나의 저주일 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만찬과 그분에 대한 기억이 합당하게 거행된다면, 나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이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질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던 그 몸과 피의 상태로 빵과 포도주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믿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죄인의 손에 이용되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악인들의 원수이십니다. 악인은 그분의 눈을 견디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한 미친 성직자는 그분의 면전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내 살이며, 내 피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 위로의 식사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신비의 의미를 압니다. 주님은 이 빵과 포도주로 그분의 몸인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자연의 빵이 많은 밀알을 하나로 모아, 맷돌에 갈아, 각각의 낟알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것에 내어 주어서 하나의 빵이 되는 것과 같이,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포도주 또한 많은 포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각각의 포도 알이 다른 포도 알들과 함께 자신의 즙을 내어줌으로써 하나의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삶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성찬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재침례교도의 해석들 가둔데 하나입니다. 각각의 밀알과 포도가 빵과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해야 하는 이 빵과 포도주의 비유와 같이, 각각의 형제가 자신의 개체성과 자기 의지를 버려야 한다는 공동체적 삶에의 적용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선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아미쉬 형제들이 비록 재산공유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도 이러한 해석을 그들의 성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의 기원은 초대교회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디다케 혹은 열두 사도의 교훈에 처음으로 언급됩니다(주후 120년경). 그리고 그 후에 시프리앙의 세 번째 편지에서 언급됩니다(주후 240-250년경). 이러한 해석의 출발점은 고린도전서 10:7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은 가지의 특성에 맞는 열매만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가지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지 않으며,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으로 감동하시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영혼을 모든 지체와 함께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놓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성령님께 내어 맡기고 주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며 바른 신앙으로 인도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인내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오직 영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그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십니다.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신실한 형제 사랑의 영 안에서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믿는 말씀 때문에 깨끗하다고 인정한 제자들과 함께 이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유다가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 가볍고 경솔하게, 주님의 진지한 말씀을 멸시하면서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그들 가운데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으로 경고하셨지만, 유다는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른 제자들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이 말씀은 그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그 빵을 받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귀는 그에게로 들어갔고, 그를 충동하여 스스로 자신의 심판을 불러오도록 자초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스승을 공격해야 했고, 그분의 무고한 죽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지체로서 자신을 온전히 그분에게 헌신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부정한 마음으로 주님의 식탁에 앉는 사람들 모두가 상기해야 할 전례가 되었습니다.

 

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아십니다! 그분은 속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대항하고 시험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 각자에게 엄하게 경고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자신이 깨끗한 마음의 상태인지, 그리고 거룩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순복하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분의 몸의 참된 지치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먹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번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고전 11:27-29)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육신적 사랑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부정한 지체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당신의 지체들도 깨끗하고 거룩하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 자신만 의지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

 

나는 또한 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어디서도 용납되지 않고, 황제, 왕, 제후들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종파에 투신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제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단지 진정한 침례를 통해 참된 교회에 가입했고, 그 교회의 지체가 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참된 교회와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 교회 안에는 죄의 용서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묶고 푸는 이러한 용서의 권세는 성령에 의해 주어졌습니다(마 16:19, 18:18). 저는 다른 어떤 교리에 의해서 제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과의 평화와 참된 평안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제 영혼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소망과 확신 가운데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저의 죄를 멀리 옮기셨으며, 제 죄를 더 이상 보지 않으시고, 생각하지도 않으실 것을 확신합니다(시 103:12). 주님은 제가 만일 계속하여 신실하게 그분 앞에서 행한다면, 모든 죄를 저에게서 옮기셔서 그리스도의 정결하심 속에 묻어버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제가 이전에 눈멀고 무의식적인 유아세례를 계속 주장했더라면 어디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믿음과 확신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회중, 즉 죄인들, 불의한 자들, 창기들, 음행하는 자들, 도박하는 자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 폭식가들, 술 취하는 자들, 거짓말쟁이들, 탐욕을 부리는 자들, 우상 숭배자들의 모임을 떠난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이러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떠나왔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불경건한 삶을 떠나지 않는 한, 그들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 위에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충격을 주시고 놀라게 하셔서 자신의 죄로부터 떠나도록 하신 사람들, 곧 성령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그분의 거룩한 이름으로 불러 모으신 경건한 사람들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이 의의 길로 걷고, 그 능력과 덕을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정결한 옷을 입으며, 의(義)의 겉옷을 입고, 항상 의로운 행위의 흉배로 무장합니다(엡 6:4)(살전 5:8).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보게 되며, 자신의 불경건한 삶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목격한 증인들을 반드시 세워두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분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롬 1:20).

 

세상 사람들은 이 ‘종파’가 왕들과 제후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저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어떤 사람도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더욱 굳게 믿습니다. 이는 말씀과 행위가 서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노인 시므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팔로 안았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과 땅 끝의 구원이 되며, 세상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대언하였습니다(눅 2:25-35). 그런데 시므온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도 그러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집 주인을 바알세붑이라 하였거든 그의 집안에 속한 자들은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 10:25). 그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여러분의 이름을 욕하고 여러분을 박해할 것입니다.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온갖 종류의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당신들은 여기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사람들이 의롭게 살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구원은 모라비아에만 있다는 말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구든지 이곳에서 올바르게 살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합당하게 살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르게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선을 행하는 사람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은 강제로 우상 숭배를 강요받으며 자기의 재산을 빼앗깁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 3:1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혼은 잠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혐오스러운 삶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경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미움을 불러일으키며, 그들로 하여금 그 즉시 이렇게 외치게 합니다. “이 악한 자들을 쫓아버려라!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살 권한이 없다!” 그때에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처럼 불안정한 에서와 그의 자녀들로부터 도망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그의 친척들과 믿음의 동료들에게로 갑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구원은 어느 나라나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한 곳에 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함께 모이며,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으로써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이웃에 대해 사랑의 빚을 진 것 같은 의식을 갖게 되고, 온 힘을 다하여 기쁨으로 그들을 섬깁니다. 경건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합니다. 이 몸은 그분의 거룩한 교회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결속되어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간 경건한 사람들의 거룩한 본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어 그들의 삶을 본받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금도 있고 루비도 많거니와 지식의 입술은 귀중한 보석이니라.”(잠 20:15).

 

경건한 다윗은 시편에서 그것을 열망하였습니다.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그것은 마치 수염 곧 아론의 수염 위로 흘러내려 그의 옷자락까지 내려간 머리 위의 귀중한 기름 같고 헤르몬의 이슬과 시온의 산들에 내린 이슬과도 같도다. 주께서 거기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원한 생명이로다.”(시 133:1-3) 그는 또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허탄한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아니하였사오며 위선자들과 함께 다니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회중을 미워하였사오니 사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아니하리이다. 오 주여, 내가 무죄 안에서 내 손을 씻고 이로써 주의 제단을 두루 돌며 이로써 감사의 목소리로 주의 놀라운 모든 일들을 널리 알리고 말하리이다. 주여, 주의 집의 처소와 주의 존귀가 거하는 곳을 내가 사랑하였사오니.”(시 26:4-8) “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언제나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84:4)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찬양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선을 행하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순수한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적대하심을 보이시리니”(시 18:25-26). 그러므로 시락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들은 같은 종류끼리 모인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넘어졌을 때 홀로 있는 사람에게는 화가 따릅니다! 누가 그러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하나됨,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공동체적 삶은 단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나라에서만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분리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새 언약을 세우셨고, 모든 진실한 신자들을 진리로 인도하실 성령님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 성령님은 그들 가운데서 공동체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처음 다섯 장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습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빵을 부수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었고 아무도 감히 그들에게 끼어들지 못했습니다(행 2,4,5장).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교회, 곧 그분의 법에 따라 살아가며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은사와 재물도 함께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 땅위에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과 같은 성품을 소유한 거짓 없는 자녀들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이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모두 함께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형제자매들의 경우에도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 “클라우스 펠빙거의 신앙고백”(KAP 발행)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