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1842. 1. 11, 뉴욕 시 |
1910. 8. 26, 뉴햄프셔 셔코러와 |
미국 |
요약 19~20세기 미국의 철학자·심리학자. 주요 업적으로 실용주의 철학 운동과 기능주의 심리학 운동을 주도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빌헬름 분트와 함께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유명한 헨리 제임스의 형으로, 어린시절 미술을 배우기도 했으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고 1872년 30세의 나이로 생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75년 심리학을 맡아 미국 최초로 실험적 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1907년까지 재직했다. 한편 12년간 <심리학 원리>라는 책을 저술했다.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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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윌리엄 제임스는 실용주의 철학 운동과 기능주의 심리학 운동의 주도자이다.
초기생애와 교육
헨리 제임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헨리 제임스는 특이한 기질의 유창한 말솜씨를 가진 사람으로 톡쏘는 재치를 보였고 활달한 문체를 잘 구사했다. 또한 철학에도 관심이 있어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연구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 헨리 제임스는 소설가·비평가로서 영어 사용권에서 소설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신학생으로 출발했지만,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회중심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 교회중심주의는 윌리엄 제임스의 후기 저작에서 줄곧 수많은 경멸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제임스의 육체적·정신적 삶 모두는 주로 유럽에서의 쉼 없는 활동과 여행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는 학교와 가정에서 자식들 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종교에서 진리와 이성의 새 시대를 열라는 신의 계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체계를 구축했다.
이 체계는 윌리엄 제임스의 영적 삶의 견인차 역할을 한 듯하다. 아버지의 철학은 제임스의 가정생활에 지속적으로 지적 분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뉴욕에서 프랑스의 불로뉴로, 스위스의 제네바로, 다시 뉴욕으로 이어지는 제임스의 불규칙적인 학교 교육을 상당한 정도로 보충해주었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견해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을 때 얻은 습관 덕분에 제임스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논의하는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매우 호의적이면서 동시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다.
18세 때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미국의 화가 윌리엄 M. 헌트의 지도로 미술 공부에 손을 댔으나 곧 싫증을 느끼고는 이듬해 하버드대학교의 로렌스과학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 화학·해부학 등을 공부하고 다시 하버드의과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명한 자연주의자 루이 아가시의 조수로 아마존 강 탐사에 참여하기 위해 의학공부를 중단했다. 거기서 건강을 잃고 일에도 싫증이 난 윌리엄 제임스는 다시 의과대학에 돌아와 한 학기 동안 공부한 뒤 1867~68년 독일로 가서 학업을 계속했다.
독일에서 윌리엄 제임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정식화한 물리학자·생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소,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의학 실험가 클로드 베르나르 등의 강의를 들었다. 동시에 제임스는 당시의 심리학과 철학 서적을 폭넓게 읽었는데, 특히 칸트 계열의 관념론자이자 상대론자인 샤를 르누비에의 글을 주의깊게 읽었다.
르누비에를 알게 된 것은 윌리엄 제임스의 개인사와 지적 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사춘기부터 예민하고 병약한 소년이었던 듯하다. 제임스가 독일에 체류한 이 시기에는 좌절로 말미암아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1868년 11월, 18개월간의 독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여전히 건강이 나빴다. 1869년 6월 하버드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개업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1872년까지 제임스는 아버지의 집에서 반쯤 병든 상태로, 독서를 하거나 가끔 비평을 쓰는 일 이외에는 거의 하는 일 없이 보냈다.
이 시기의 초기에 윌리엄 제임스는 일종의 공포증을 체험했는데, 이는 1870년 4월까지 지속되었다. 제임스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이 증상은 '자유의지에 따른 나의 첫번째 행위는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라는 자유의지와 결단에 관한 르누비에의 사상을 읽음으로써 촉발되었다. 결단은 모든 결정론의 폐기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윌리엄 제임스가 받은 교육과 체험이 그에게 심어졌고, 신경생리와 어떤 관련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적 결정론, 그리고 그가 후에 '블록 우주'(block universe)라는 개념으로 이에 대립시킨 신학적·형이상학적 결정론 모두를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심리학과 철학에서 제임스가 보여준 혁명적 발견, 과학의 방법, 사람들의 성질, 실재의 본성 등에 관한 견해 모두가 자신의 통렬한 개인적 문제들의 이러한 해결로부터 분명한 추진력을 얻었던 것 같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
1872년 하버드대학교 생리학 전임 강사로 임명되어 1876년까지 재직했다.
그러나 자신을 지배하는 열정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는 방향을 바꿔 생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전통적인 '정신과학'이 아니라 생리심리학)을 가르치기로 했다. 이는 혁명적인 결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결정이기도 했다. 이는 정신에 관한 기존의 관심, 특히 당시의 미국 대학들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신학적 관심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산타야나가 '우아한 전통'이라 부른 것과의 명백한 단절을 의미했다.
이제 심리학은 정신과학이 아니라 실험과학이 되었으며, 철학은 동의(同意)의 문법을 익히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방법론의 창출과 형이상학적 발견을 추구하는 모험이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1878년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사는 앨리스 H. 기븐스와의 결혼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맞았다. 신경쇠약증세도 없어졌으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열정과 정력으로 일을 추진했다. 마치 제임스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고동치는 듯했다. 독창적인 사상가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1880년 출판 예정으로 심리학 교과서를 집필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이 책은 〈심리학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라는 제목으로 1890년에야 나왔으며, 교과서가 아니라 두터운 2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저작의 요약본이 2년 뒤에 출간되었다. 심리학 분야에서 결정적이고 혁신적인 것으로 인정받았던 〈심리학 원리〉는 심리학의 기능적 관점을 확립했다. 이 책은 정신과학을 생물학과 동일한 분과로 놓고, 사고(思考)와 인식(認識)을 생존경쟁의 도구로 취급했다.
동시에 그것은 정신물리학(유기체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물리적 과정의 효과를 연구하는 학문)의 원리들을 최대한 이용했으며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종교에 대한 관심
〈심리학 원리〉가 완성되고 나자 심리학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미국 최초의 심리 실험실의 창설자이면서도 실험 작업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그것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윌리엄 제임스는 자유로운 관찰과 반성을 가장 좋아했다. 제임스에게 심리학은 철학과 종교의 문제들과 비교해 볼 때 '보잘것없는 고약한 분야'였던 것 같다. 그런 분야를 제임스는 기꺼이 견뎌냈다. 신의 본성과 존재, 영혼불멸, 자유의지와 결정론, 인생의 가치 등에 대한 제임스의 연구는 사변적이 아니라 경험적이었다(종교철학). 즉 제임스는 직접적으로 신의 본성에 대한 종교체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것에 대한 물리적 탐구,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믿음과 행동의 영역 등으로 나아갔다.
윌리엄 제임스는 기존의 결론들을 논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탐구했다. 제임스는 1880년대말에 윤리학과 종교학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나, 심령연구가들과의 공동연구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초심리학적 현상). 제임스는 사후의 삶에 대해서 결국 그것은 입증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신의 존재는 종교적 체험의 기록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신을 다수의 구원능력, 즉 어떤 개인 자신과 '동일한 성질 이상의 것'이라고 보았으며 개인의 인격은 위기에서 이 다수의 구원 능력, 즉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란 사물과의 연관 속에 있는 일종의 느슨함이며, 따라서 미래가 반드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형태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윌리엄 제임스에게 자유 또는 우연이란 다윈의 '자연발생적 변이'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893~1903년 각종 글과 강의를 통해 제시되었고, 이는 뒷날 전집에 포함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작은 〈믿으려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 and Other Essays in Popular Philosophy〉(1897)이다. 제임스의 종교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이 10년 동안에 그의 모든 연구는 종교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종교에 대한 제임스의 관심은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자연종교에 대한 기퍼드 강좌(Gifford Lectures)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깊어졌다.
윌리엄 제임스는 1901~02년 강의를 할 수 없었다. 제임스는 몇 년 동안 강의준비에 몰두했다. 무리한 강의 준비와 1898년 애디론택 지방에서의 휴가중 바깥바람을 쐰 탓으로 심장병을 포함한 육체적 장애가 일어났다. 대학에서 안식년 휴가를 얻어 가기로 했던 유럽 여행은 2년간의 투병생활로 바뀌었다. 제임스는 이 투병 기간에 기퍼드 강좌를 준비했다. 기퍼드 강좌는 〈다양한 종교체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1902)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큰 찬사를 받았다.
조심스럽고 시험적인 것이었지만 구체적이고 풍부한 자료를 요약한 논증은 종교학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으며 적어도 그들에게 과학 및 과학적 방법과 양립이 해명자료를 제공했다. 윌리엄 제임스가 제시한 논증은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란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특별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의식과 유사한 에너지의 특수하고 다양한 저장고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심리학에 대한 관심의 정점이었다.
철학에서의 업적
윌리엄 제임스는 궁극적인 철학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윌리엄 제임스는 그동안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철학 문제에도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 1898년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행한 철학적 견해와 실제의 결과에 관한 강의에서 실용주의로 알려진 방법론을 정식화했다. 1870년대 중반 찰스 S. 퍼스가 수행한 과학의 논리에 대한 엄격한 분석에서 비롯된 이 방법론은 제임스의 손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일반화되었다. 제임스는 어째서 어떤 관념(과학적·종교적·철학적·정치적·사회적·개인적이든)의 의미가 그 관념이 인도하는 계기적 실험결과 이외에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것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가를 밝혀냈다(형이상학).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이 진리와 오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진리와 오류는 이 실험 결과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종교체험에 관한 연구에 실용주의의 규칙을 사용한 바 있던 윌리엄 제임스는 이제 그것을 변화와 우연, 자유, 다양성, 다원론, 참신함 등과 같은 관념들에 적용했다. 이 관념들은 제임스가 르누비에를 읽었을 때부터 확증하고자 했던 것들이었다. 실재하는 것은 1개(함께 뭉쳐 있는 1개)라고 주장하는 일원론과 '블록 우주'에 반대하는 논쟁에 이 르누비에 실용주의의 규칙을 사용했다. 제임스는 또한 내적 관계(모든 것을 갖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관념)에 대항해서, 그리고 최종성·정태성·완전성에 대항해서 그 규칙을 사용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강의실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논박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새로운 활력이 일단의 미국의 철학자들에게 스며들었다. 실로 실용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까지의 반복과 타성으로부터 전문성을 되살려놓았다.
한편 윌리엄 제임스는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대학교로부터 강의를 요청받았는데(1906), 여기서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의 파괴시킨 지진을 체험했다. 같은 해 보스턴에서 로웰 강좌를 맡았으며, 이 강의 내용은 후에 〈Pragmatism : A New Name for Old Ways of Thinking〉(1907)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다양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예를 들자면 '의식은 존재하는가?','사물과 그 관계', '활동의 체험' 등으로 주로 〈Journal of Philosophy〉에 실렸다. 이 글들은 경험론과 실용주의의 연장전상에 있었고, 윌리엄 제임스가 죽은 후 〈근본적 경험론 Essays in Radical Empiricism〉(1912)이라는 제목으로 묶여나왔다. 서로 합쳐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사물들 그 자체만큼이나 실재적이고 그 기능 또한 실재적이며, 세계의 불일치와 일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감추어진 기체(基體)도 불필요하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요지이다.
이러한 경험론이 근본적인 까닭은 지금까지 경험론자들조차 감추어진 기체(마치 힌두교 신화에서 우주인 코끼리가 올라타 있는 숨겨진 거북과 같은)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믿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제 영어 사용권의 철학을 위한 새로운 삶의 중앙에 있었다. 대륙에서는 실용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의 반대자들이 실용주의를 잘못 이해했다면, 이탈리아 지지자들(이들 중에는 비평가이자 열렬한 미신타파주의자인 조반니 파피니도 있었음)은 그것을 희화화했다.
영국에서는 F.C.S. 실러, 미국에서는 존 듀이와 그 학파, 중국에서는 후스[胡適]가 지지를 보냈다. 1907년 윌리엄 제임스는 하버드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다. 그해 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실용주의에 대한 강연을 반복했다. 마치 새로운 예언자가 탄생한 듯했다. 강의실은 첫날이나 마지막날이나 만원이었고 강당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제임스를 환영하고 사진을 찍었다. 제임스는 스스로 이때의 방문을 '내 존재의 절정기'라고 묘사했다. 뒤이어 제임스는 옥스퍼드 맨체스터 칼리지의 히버트 강좌에 초빙을 받았다.
이 강의는 1909년 〈다원적 우주 A Pluralistic Universe〉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근본적 경험론〉보다는 더 체계적이고 덜 기교적이지만 근본 입장은 같다. 또한 이 저서는 윌리엄 제임스 자신이 갖고 있는 일종의 종교적 과신을 드러내는데, 사후에 나온 〈철학의 제 문제 Some Problems in Philosophy〉가 담고 있는 내용이 믿을 만하다면, 이 저서의 더 앞서가는 사고는 완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과신은 근본적 경험론과 실용주의의 규칙을 넘어서 상투적인 형이상학에 빠져드는 범심론적(汎心論的) 존재해석(모든 자연물에 심적 측면을 부과하는 것)과 관련된다.
윌리엄 제임스는 귀국하여 육체적 고통을 무릅쓰고서, 특히 사후에 출판된 〈철학의 제 문제〉(1911)의 자료를 정리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또한 그때그때 써둔 실용주의 관련 글들을 모아 〈진리의 의미 The Meaning of Truth〉(1909)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끈질긴 인내심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장애는 계속되었다. 요양차 떠난 유럽 여행도 효과가 없었고 다시 귀국하면서 곧바로 뉴햄프셔의 고향으로 가 그곳에서 죽었다.
의의와 영향
윌리엄 제임스의 의의와 영향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심리학에서의 윌리엄 제임스의 업적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아주 다양한 새로운 발전의 기원이 되는 준칙이 되었기 때문에 물리학에서의 갈릴레오나 생물학에서의 다윈에 버금갈 만큼 확정적이다. 철학에서 제임스의 긍정적 업적은 아직 예언적이다. 제임스가 논의했던 세계는 찰스 퍼스의 반향과 함께 새로운 물리학에 곧바로 반영되었는데, 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덴마크의 양자물리학자 닐스 보어 등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같은 계열의 근접해 있는 관계들에 의해서 서로가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의 세계, 다양하면서 다면적이고 가변적이며, 우연 속에서 생기고, 습성(과학자들은 법칙이라 부름)에 의해 영속화하고, 파괴, 자연발생, 자유에 의해 변화되는 세계 등의 세계해석이 그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의 본성상 가시적인 세계의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똑같이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재의 특수한 사건은 개별적이며, 역사에 대한 개별적 개입은 어떤 경우나 그 사건에 새롭고 예기치 않은 전환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연에서와 같이 역사에서는 연속적인 변화와 우연의 흐름이 모든 존재를 변형시키고 모든 법칙을 무효화하며 모든 이상을 바꾸어놓는다.
윌리엄 제임스는 자신의 철학으로 살았다.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은 풍부하고 생생한 문체의 질감과 리듬 속에 들어 있다. 제임스의 철학은 크리스천 사이언스나 정신치료 등과 같은 과학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치료법, 군국주의 같은 혐오스러운 이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했다. 제임스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반제국주의자가 되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출현하는 작은 것, 기형적인 것, 예기치 못한 것, 약한 것에 대한 수호자가 되었다. 제임스의 철학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미묘하며, 지나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일시적이어서 어떤 학파의 교의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은 다른 사람들이 반복하는 낡은 체계에 하나의 표준으로 봉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고의 씨앗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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