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고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생이다 ㅡ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1832년 영국 요크셔 반즐리에서 태어난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 아멜리아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가정에서 자라났다. 테일러가 17세 무렵에, 어머니와 누나는 테일러의 거듭남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 시각에, 테일러는 헛간에서 전도 소책자를 집어들고 지루한 시간을 달래는 중, ‘예수께서 다 이루셨다’는 표현에 엎드러져서 회심을 한다. 그는 은행에서 사무직원으로, 아버지 가게에서 약제사 조수로 지내는 동안 ‘나를 위해 중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중국은 아버지의 기도 속에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나라였다.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생긴 테일러는 이후 평생에 걸친 순종의 여정을 출발하는 첫 순종을 했으니, 곧 안락하고 편한 생활 대신에 절제와 육체의 단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빈민가를 돌며 전도를 시작한다.
의학을 공부하고 싶던 테일러는 의사 하디 박사 밑에서 조수를 할 기회를 얻었다. 테일러는 그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안락한 이모 집에 머무는 대신에 하수와 오물이 흐르는 빈민가 하숙집을 택하여 스스로 믿음의 단련을 한다. 테일러는 의사 하디의 조수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자의 자질을 스스로 강력히 단련해갔다. 그것은 곧 순종과의 싸움이었다. 그가 선교사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을 상처를 안고 떠나보냈으며, 월급도 하디 박사가 때가 되면 말하라고 했지만, 믿음을 단련하기 위해 기도만 할 뿐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육신의 좋은 것을 포기하는 순종의 훈련, 소중한 것을 주를 위해 떠나보내는 순종의 고된 훈련을 했다. 그러는 중에 돈이 바닥났지만, 그는 죽어가는 가난한 심방 가정을 위해 남은 돈 은화 한 개를 결국 내어주고, 마음의 큰 기쁨을 얻기도 했으며, 그 다음날로 하디 박사가 찾아와 미지급된 봉급을 다 지불해주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마침내 중국 선교회 소속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지급받으며 본격적인 중국선교 준비를 한다. 의과대학에서 실습할 기회를 얻어 훈련을 했지만 중국선교회의 지침에 따라 중국으로 파송되기 위해 학위를 중단하는 순종도 감행한다. 그는 집안으로부터 오는 지원을 일부러 받지 않고 모든 필요를 주님만을 의지했다. 그래서 일부러 모든 공급원을 차단시켰다. 그것이 선교사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21세로 중국에 파송될 때, 중국은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 운동에 돌입해있었다. 이 운동은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 주축이 된 복음의 행진이었으나 이후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정치운동으로 변질되어갔다.
테일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상하이. 이곳은 홍건적들과 정부군이 전쟁을 벌이고 있어 매일 생명의 위협이 있었지만 그는 생명을 걸고 전도여행을 했다. 중국인들은 죽어나가고 있었고 물가는 너무도 높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한가운데 셋방살이를 하며 10여 차례 선교여행을 했다. 테일러는 점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내륙지방으로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한 보트여행을 하며 수로를 통해 1,800여권 중국어 신약성경과 2,000여권의 전도책자를 배포했다. 마침내 정부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고,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영혼들을 돌본다. 그러던 그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이질적인 양복을 벗고 중국인에게 친근한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는 것! 이는 유럽인의 특권 상실과 외국인 공동체에서의 따돌림을 의미했지만 그는 감행했고, 바로 이 작은 순종의 기적은 중국인들에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 주민들이 자유롭게 모여들고 말씀을 듣게 했다.
그러던 중 테일러는 닝보에 머물면서 그곳 선교사 가정의 둘째딸이던 마리아와 사랑하게 되어 하나님의 섭리 안에 결혼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은 부부는 사람들과 더 넓고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주안에서 연합된 이 부부는 어딜가나 사랑을 받았다. 이들은 동료들과 함께 노방전도, 설교, 선교여행, 초신자 교육 등, 무엇이든 했다. 마침내 텐진조약이 맺어져 외국인의 내륙 여행이 가능해짐으로 테일러의 꿈이 앞당겨진다. 그러나 테일러는 병원을 돌보면서 몸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건강이 무척 악화되어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5년간의 은둔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그동안 닝보 성경을 개정하고, 의학공부를 더 했다. 그리고 맏딸 그레이시 밑으로 3형제를 더 낳았다. 그리고 중국의 미개척 광활한 땅들을 모조리 조사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겼다. 그러나 그는 중국을 사실상 회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자신의 불신앙과 싸웠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선교사들의 중도 실족 문제였다. 중국에선 한 달에 100만 명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며, 테일러는 중국 선교 일꾼들을 모집하기 위해 기도만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다시 중국에 들어가야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그러는 중에 테일러 부인은 큰 힘이 되었다. ‘선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그녀는 남편을 격려했고 중보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테일러 부부는 결국 코본가 30번지 응접실에 중국 선교 지망생들을 모으고 ‘중국내륙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의 모태를 시작했으며, 요청하지 않아도 CIM의 계좌는 수백달러가 넘기 시작했다. 테일러 부부는 함께 기도하며 ‘중국의 영적 필요와 요구’(China's spiritual need and claims)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으며, 책은 불티나게 팔리는 동시에 교파를 초월한 전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선교사 지망생들을 불어나게 했다. 중국내륙선교회는 선교사들의 자금을 책임지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은 무보수로 동참했고 모금운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기도의 응답으로만 선교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선교사 제1진이 출항하기 전 모든 것이 채워졌다.
테일러 부부와 함께 이들은 중국으로 떠났다. 11개 성과 중국령 타타르지방을 향해. 그 중에는 나중에 제2의 테일러 부인이 될 폴딩 양도 있었다. 그녀는 중국어가 능통한 매우 유능한 어린 숙녀 선교사였다. 중국인들은 하루 200명씩 병원에 왔고, 이 숫자가 예배에 왔다.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1500명 넘는 현지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나 그런 중에 어느 뜨거운 여름, 맏딸 그레이시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테일러 부부는 큰 슬픔 가운데도 중국 내륙 선교에 계속 헌신했다. 그러던 중 선교사들이 영국 군대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오해를 산 ‘양저우 사건’으로 선교회는 큰 곤란을 겪었고,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혔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조지뮬러였다. 그는 모든 선교사들의 명단에 후원했다. 그러나 테일러 부부는 텐진 대학살 이전 막내 아들을 병으로 또 잃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 더 낳았지만, 콜레라로 테일러 부인이 쇠약해졌고 갓난아기는 생후 일주일만에 죽었으며, 급기야 테일러 부인도 천국에 갔다.
테일러는 가족을 줄이어 떠나보내는 비극적인 슬픔 속에서도 사역을 놓지 않았다. 그는 30년 동안 중국내륙선교회 회장직을 완수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선물, 두 번째 부인이 된 제니 폴딩 양이 동역자가 되었다. 폴딩 양은 항저우에서 여성 사역을 책임져 왔었는데, 결혼 이후 33년간 테일러 부인으로 헌신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제니 폴딩 테일러로 인해 선교부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젊은 선교사들은 신혼 가정을 이루어 내륙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반대와 비난이 있었지만, 폴딩 테일러는 앞장서서 위험한 내륙 속으로 혼자 들어가는 믿음의 감행을 한다.
중국 북쪽 지방에는 600만명 이상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백인여성 중에 이곳 해안과 산시성을 나누는 산맥을 넘은 사람이 없었지만 그녀가 자원했다. 테일러 부인이 최일선에 나가 있으니 테일러도 리더십을 발휘하기 쉬웠다. 폴딩 덕분에 내륙 지방 곳곳에 여성 사역의 문이 열렸다. 폴딩은 중국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기절하기도 했지만, 이들 선발대 여성 선교사들은 중국 여성들의 마음을 열었고, 복음을 전했다. 2년쯤 지나자 60~70명의 구원받은 중국인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결실을 맛본다. 테일러의 생애에서 640명의 선교사가 중국으로 동원되었고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호주, 독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허드슨 테일러는 마지막 선교여행을 하던 후난성에서 7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첫 번째 부인 마리아 제인 테일러도, 두 번째 부인 제니 폴딩 테일러도 허드슨 테일러에게는 선물 같은 배우자였고, 순종의 동역자들이었다. 특히 33년을 동역한 제니 폴딩 테일러는 ‘공격적인 순종’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중국내륙선교회 여성사역의 기초를 놓았으며, 단지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남편도 없이 몸소 앞장서서 험한 내륙으로 혼자 들어갔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금 문제로 영국에 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십자가를 붙든 순종의 사람들이었는지는 허드슨테일러가 폴딩에게 전한 편지에 나타나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에게 먼저 이런 마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아이들이 멸망해가는 수백만의 이곳 영혼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영생을 누릴 사람들 아닙니까?”
허드슨 테일러 부부가 중국 땅에서 했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고생은 모두 순종의 여정이었다. 그들은 편하게, 세상적으로 안락하게 지낼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기쁨으로 거절했다. 하나님을 위해 좋은 것을 떠나보내는 순종의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허드슨 테일러 부부의 생애에 4만 중국인이 복음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CIM은 지금도 불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테일러 부부의 순종은 현실적인 험한 고생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홀로 험한 내륙 산간으로 들어가는 아내에게 쓴 테일러의 편지처럼, 영생이었다.1)
1) 하워드 테일러 부부 지음, 오진관 옮김,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생명의 말씀사, 참조
[출처]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작성자 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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