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의 비결
어렸을 때, 나는 부흥집회를 좋아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집회에 다니고 또 방학이 되면 기도원에도 찾아 가곤 하였다. 이런 집회들이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적인 일에 투자한 만큼 그 사람의 영성은 깊어지고 강해진다.
집회가 끝날 때 쯤 강사 목사님들은 흔히 집에 돌아가면 받은 성령을 잘 간직하라고 권면하신다. 가는 도중에 길거리에 쏟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서 소멸되거나 닳거나 하는줄 알았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귀해서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버스를 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주로 할머니들은 질서의식이 약해서 버스가 오면 서로 타려고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 받은 은혜고 뭐고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혀를 끌끌 차며 길바닥에 은혜를 다 쏟아놓고 간다고 비아냥 거리곤 하였다.
확실히 집회에 참석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서 돌아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금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처음 마음이 많이 퇴색해서 신선한 감동의 맛이 떨어진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신령한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 집회에 또 참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시 은혜를 소멸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집회에 더이상 참석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성령께서는 우리가 은혜를 소멸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려 한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라(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은 내가 성령을 좇아가는 것에서 비롯된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면 가만히 혼자 앉아 있을 때 내 속에서는 육체의 욕심도 생겨나지만 동시에 성령의 감동도 생겨난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우리를 장악하려 하거나 종을 삼아서 우리를 강제적으로 통제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분명히 성령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결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는 주인행세를 하지 않으신다. 단지 선한 행동에 대한 감동을 주신다. 이때 내가 누구를 좇아 가느냐가 열쇠가 된다. 육체의 욕심을 좇아 갈수도 있고, 성령의 감동을 좇아 갈수도 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때는 내 안에 양심이 있어 나를 감시하지만 결국에는 육체의 욕심을 좇아가게 된다. 왜냐면 양심도 죄인의 양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내가 선을 택하도록 도우신다. 내가 성령의 감동을 택하고 육체의 욕심을 버리기로 작정하면 성령은 내 속에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신다. 또 나를 깨우쳐서 죄가 얼마나 나쁘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가르치신다. 그리고 죄의 속임수를 드러나게 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무시하지 않고 따라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세가지에 대한 믿음이다. 첫째는 나는 여전히 죄인임을 믿어야 한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거하심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성령은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내가 죄인임을 믿으라는 말은 이것이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을 믿지 말고 매사에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결재를 받으라는 뜻이다. 흔히 자신의 감정을 성령의 감동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운전이 서툴러서 주차장을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나의 감정인지 성령의 감동인지 분간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여전히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안에는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엉뚱하고 비현실적이고 부정확하고 잘못예측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성령이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존재가 바로 나다. 가르쳐 주어도 깨우치지 못하고 많이 의심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태도가 불손하며 너무 유혹에 약하며 잘못된 취향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열개를 던지면 한개나 두개 겨우 들어갈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를 성령께서 껴안고 계신다. 그러므로 제발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 한다. 영적으로 건강을 되찾고 온전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빨리 영적 초보 딱지를 떼고 당당히 대로에 나서야 한다.
영적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할때 마귀가 내 귀에 속삭인다. 야,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냐? 네 속에 죄가 이렇게 많은데 성령이 네 안에 거하시고 계실줄 아느냐? 하고 비아냥 거린다. 이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여전히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엎치락 뒤치락 할 때 말 없이 우리를 도우시며 기다리시는 분이시지 우리를 죄 가운데 내 팽개치고 우리를 떠나는 분은 아니시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시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장)
다음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한다.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내가 그만큼 무지하고 무능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행운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행운이 나의 인생을 역전 시킨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
행운이 나를 뒤따르는게 아니고 내가 행운과 기회를 만들어 낸다. (나는 컴퓨터를 썩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정말 많은 실패를 통해서 그렇게 하면 않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셨다. 내가 성령의 감동만 좇는다면 나는 항상 나에게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만나게 된다. 내가 성령의 감동을 선택할 때 나는 행운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리로 접어든다. 이번 거리에서 놓쳐도 상관없다. 다음 사거리가 또 있기 때문이다.
2. 육체의 소욕을 버리라(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에는 육체라는 말과 소욕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한다. 육체는 단순히 살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소욕이란 욕심을 말하는데, 정상적으로 생겨난 욕구나 필요가 아닌 비정상적이고 넘치고 지나친, 그래서 결과적으로 해악으로 작용하는 갈망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육체의 일, 즉 악한 일은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저하고 분명하다. 단지 육체의 소욕이 가지고 있는 최면력 때문에 그 해악이나 비정상적인 면들을 잘 깨닫지 못할 뿐이다. 욕심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마비시킨다. 욕심은 마귀적인 것이다. 마귀는 철저히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쓴 뿌리를 이용한다. 이 쓴뿌리에서 욕심이 잉태하게 한다. 욕심이 커가면 사악한 것들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럴듯하고 탐스럽게 보인다. 그 속에 사악함과 해악과 불행과 병듬이 있지만 화려함이 그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게 숨겨준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은 이 죄악의 실체를 깨닫고 버리는 것이다.
욕심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이지 사실은 이미 이긴 싸움을 계속할 뿐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국지전이 있을 뿐이지 이미 마귀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욕심은 가짜이다. 육체의 소욕은 속임수다.
3. 율법 아래 있지 말라(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며칠전 동작구청 도로정비과에서 나와서 교회 간판을 떼어 냈다. 이번이 벌써 두번째다. 첫번째는 떼면서 통보를 하길래 당장 다시 붙여놓으라고 호통을 쳤더니 투덜거리며 붙여놓고 갔다. 가로 간판은 불법이 아니어도 세로 간판은 불법이란다. 왜 그러는가를 따졌더니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란다. 법의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제발 로보트처럼 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법은 몇년전 라운드형 세로 간판 때문에 생겨난 법이지 싶다. 그러나 교회 간판은 매입등이다.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다. 나는 의례히 행하는 것처럼 빨리 빨리 해치우고 순간만 모면하려는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한번은 간판 때문에 과태료가 부과될 것이라는 예고성 공문이 왔다. 며칠후 담당 부서에 전화를 했더니 교회 간판이니 해당사항이 없는데 잘못 발송 되었단다. 이제 며칠 전에는 잠시 철거할테니 며칠후에 다시 설치하라면서 떼어놓고 갔다. 딴에는 교회 입장을 존중해 주는듯한 처사이지만 여전히 율법적이다. 자신이 담당하는 일을 주인처럼 행하지 않고 하인처럼 행한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력과 정당성을 스스로 버린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으로서의 이성, 또는 정당한 권리로서의 자의적 결단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을 집어 넣든지 욕심을 집어 넣든지, 쓸데없는 정보로 판단력을 흐리게 하든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 합리성을 찾고 정당성을 찾기 보다는 시키는대로 기록된대로 적당히 해치우고자 하는 죄를 범하게 한다. 법의 태두리 안에서 자의적 판단으로 법정신을 존중해서 행하는 것은 정당한 행동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어떠한 책임도 모면하려는 태도는 스스로를 무능력한 사람이며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그것이 율법적인 태도이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율법의 원리를 깨우치고 행동에 옮기게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율법에 얽매인다. 주위 시선 때문에 율법을 지키게 된다. 하나님의 벌을 주실까 무서워서 율법을 지키게 된다. 해치우듯이 율법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율법의 의미를 깨우친 다음에는 율법에서 말하는 의도를 알기 때문에 오늘에 알맞게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어려서부터 규칙을 교육 시킬때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주는 식으로만 가르치면 그 아이는 율법적인 사람으로 자란다. 그러면 아이는 규칙을 어겼는데도 들키지 않으면 대단히 이익을 봤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좀 더 성숙하면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양심에 가책이 된다면 그 아이는 그 범법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결국 죄인의 양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를 범죄함에 이르게 하고 만다. 나름대로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욕심으로 법조항을 적용한다. 이것이 율법 아래 행하는 죄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들이었다. 그들에겐 법이 없어도 죄를 짓지 않을만한 자기의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병자를 살리고 죄를 사하는 선행까지도 안식일의 법을 적용해서 예수를 죽이려 하였다. 나라를 전복 시키려는 단 하나의 의도나 행동을 범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이방사람이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총독 빌라도도 인정하지 않은 반역죄로 모함을 해서 그를 십자가에 넘겨준 장본인이 바로 자기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누누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는 군대도 없었고, 심지어는 칼자루 하나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율법이 그들의 질투와 욕심과 교만이라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막지 못하였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우리를 율법 아래에서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은 율법을 무시하고 그 법정신을 무효화하러 오시진 않았다. 진정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법의 의도를 깨우치게 된다. 율법이 얼마나 어떤 식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강약과 시간과 때를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내가 자유를 누리고 안식을 얻으며 행복을 누리게 된다.
교회생활이 율법적이 되면 성령충만은 사라진다. 예배드림이 마지 못해서 드림이 되고, 헌금이나 기도나 성경을 읽는 것들이 율법적인 의무감이나 액땜을 위한 것이라면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성령의 감동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 기도하며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며, 사랑하는 이웃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생명의 양식을 얻듯이 말씀을 읽으라는 뜻이다.
예배가 기쁘지 않고, 말씀이 지루하고,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는 듯한 감동이 생기지 않고, 성경말씀을 펼치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고 진단 내릴 수 있다.
성령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나에게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 힘들고 지쳐 있을때 교회에 와서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면 그는 새 힘을 얻고 안식을 찾는다. 이런 안식은 푹 잔다고 얻어지는게 아니다. 레져활동을 통해서 찾아지는게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 경건생활을 통해서 얻게 하신다. 율법을 벗어난 경건생활이 곧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비결이 된다.
율법적인 행동에서 벗어나야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이룬다. 모두 속임수에 불과한 분명하고 현저한 죄를 버려야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내가 죄인임을 믿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나와 함께 거하심을 믿고, 성령께서 분명히 나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심을 믿을 때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얻을 수 있다.
-
충만의 5가지 비결은
행 4장을 읽어보면 전문교육도 받지 못했던 어부 베드로와 요한이 얼마나 능력 있는 설교를 했던지 학식있는 사람도 놀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의 권세는 매일같이 수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했고, 수많은 병든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가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등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다 모인 곳에서 심문을 받았지만 오히려 담대했습니다(6절).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일을 행하느냐?”(8)고 물었습니다. 해답은 행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입니다. 권세있는 성령충만의 사람이 되는 5대 비결이 있습니다. READY 입니다.
1. 준비
성령 충만은 준비된자에게 임합니다. 오순절 날을 기다린 열흘은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한 새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약속의 성령을 마음에 모시기 위해 더러운 생각과 그릇된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받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듯 성령받기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신랑을 맞기 위해 신부의 준비가 필요하듯 성령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있는 시기, 위선, 거짓, 무례함, 불친절, 거친 말, 복수심, 무정함을 다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며 성결의 옷을 입지 않으면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버리십시요.
죄는 성도에게 임할 성령의 권능을 차단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딲는 방법은 “회개하여 죄 사람을 받는 것”입니다.
2. 갈망
우리 몸은 ‘목마름’ ‘갈증’을 탐색하는 경보장치를 달고 있습니다.
목이 타들어 가면 입술이 마르고, 혀 바닥이 깔깔해지고, 두통이 생기고, 창자가 뒤틀리고, 현기증이 나다가 결국은 쓰러집니다.
하물며 우리 영혼이 목마름을 모를까요?
영의 생수가 끊어지면 심통, 고집, 교만, 무정함, 인색함, 완악함, 말씀과 멀어지고, 감사가 떠나고, 공연히 툭하면 화내고, 별일 아닌 걸로 분이 나고, 근심 걱정, 조급함, 우울증, 교회와 예배가 멀어지고, 기도시간이 줄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토미 테니는 <갓 캐처스(The God Catchers)>라는 책에서 “교회와 나의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했습니다. 부흥은 영적 배고픔, 영적 목마름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들이 부른 노래인데 그들은 하나님 무척이나 갈망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인생 좌우명은 “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였습니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예수님은 요 7:37-38 에서 성령의 충만을 위해 단순하게 “갈급하라”했습니다.
A.W. 토저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는 영적 부흥도 영적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압도적인 임재를 갈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은혜와 능력을 갈망하십시요.
3. 구함
우리가 능력과 권세로 충만한 성도가 되려면 간구 곧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특히 통성기도가 중요합니다.
Torrey 박사, 박형룡 박사, 덤 라레이도 “성령충만하려면 눅 11:13을 기억하고 적용하라.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겠는냐?”
4. 받음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물을 마시는 자’로 표현하신 것과 바울이 ‘성령을 마시게’라고 표현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신다’는 의미는 구원의 물을 마시는 것 뿐 아니라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도 쓰이는 표현입니다.
고로 ‘마신다’는 의미는 ‘충만’ ‘흡족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시고”Drink라는 의미는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7:38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권세가 충만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단계는 믿는 것입니다.
케드린 마샬은 성령충만 하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성령의 능력은 믿는자에게 역사됩니다.
누구에게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겠습니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5. 순종
Torrey는 성령충만 받는 방법으로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순종이란 행 2:38 말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레만 스트라우스는 순종이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팀리헤이도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불 순종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말씀에 항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응하는게 능력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항복하라!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하십시요.
늘 성령 충만 받으려면
인간의 지혜와 능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도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신앙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늘 성령 충만을 받는것이 바른 신앙생활 할 비결입니다.
엡5:18절“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엇인가 취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뜻을 이루려 합니다. 이를 위해 술에 취하고 세상에 취해 살아 갑니다. 반면 신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며 사는 자입니다. 그러려면 신자는 오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부흥강사가 자꾸 성령세례를 강조하니 성도들도 성령세례를 자꾸 받아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다른 것입니다.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관계는 마치 결혼식과 결혼 생활과 같습니다. 결혼식은 일생 한번 올리죠. 그러나 결혼했다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죠? 결혼 후 결혼생활 즉 더 사랑해야 하는 삶이 있죠.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는 중생때 평생 한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 성령 충만한 삶 신앙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령충만한 삶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3장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신 후 성령충만으로 사는 삶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3:8절입니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누구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먼지가 날리거나 뺨에 와 닿는 감촉으로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바람, 성령, 영은 원어가 다 프뉴마인데 이는 성령은 마치 바람처럼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임하시는지,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우리 눈으로 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을 통해 바람을 볼 수 있듯이 내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면 내 속에서 역사 하사 내 삶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성령 충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충만하면 뜨겁고 시끄럽고 열심히 박수 치거나 소리 높여 기도하고 고개 흔들며 방언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때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면 불이 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순복음이나 기도원의 영향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도 성령충만의 한 단면 입니다. 그러나 단면일 뿐 전체적인 양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령충만을 회복할 수 있나요?
1. 성령충만은 먼저 욕망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요7:38-39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충만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진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죠? 인간의 배는 더러운 탐욕의 상징 아닙니까? 불의한 뇌물을 " 받아 먹었다.“ 표현하듯 배는 더러움, 욕망의 상징이지요
육체적으로도 인간의 배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모든 병이 무절제함으로 배 위장 각종 내장으로부터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 안에 더러운 욕망과 탐욕을 회개로 제거할때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것들에서 돌이켜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성령충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갈5:16-17절을 보십시오.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따라서 성령 충만과 육적 욕망은 절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육욕은 날마다 성령의 소욕 생명의 힘을 대적합니다. "야!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봐! 얼마나 재미있는데" 유혹하죠? 정면으로 전쟁을 걸어옵니다. 그때 우리는 갈등하고 번뇌합니다. 그러다 넘어집니다. 쇠 잡아먹는 것은 쇠에서 나오는 녹 인것 처럼 인간의 욕망이 우리안에 거룩한 소욕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박아야 합니다. 육신의 행실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영으로써 성령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육체의 행실을 끊어야 합니다. 속에 육체의 욕망이 이글거리는한 큰 소리로 찬송하고 부르짖어 기도해도 성령충만은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욕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내안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칩니다.
욕망을 버리면, 욕망에서 자유하고 성령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에 따르게 될 때 우리안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칩니다. 그 생수의 강은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복락의 생수요 우리 인생을 단물나게 하는 생수입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두 가지 물 - 늘 쓴 물만 솟는 마라의 쓴물 그리고 복락의 강수! 인생을 단물나게 하는 물입니다. 이 물이 창일하게 흐르고 이것이 나를 엄몰할 때 참으로 우리는 자유, 행복,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의 첫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생수의 단물이 흐르고 성령충만하면 무엇보다 우리는 기쁨이 넘치고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며 참된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회복이 있길 축원합니다.
2.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책망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요14:26절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6:8절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요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 말씀을 통하여 오늘 성령님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말씀하는지 귀 귀울입니다.
대부분 성령을 보혜사라 하여 자꾸 ‘위로의 소리’만 듣고자 합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도 많이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책망의 소리’도 많이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위로 소리만 듣고 책망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오만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부모 책망이 전혀 없이 자란 아들을 후레아들이라 부르지요? 비뚫은 길로 갈때 책망이 있어야 곁길로 안나가고 정도의 신앙생활을 할수 있지요. 성령님을 슬프게 하거나 노엽게 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인도하십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들이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리이까”예수님은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고 물었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답하자 예수님은 마22:21절에서 명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중 시민권자로서 우리는 이땅의 통치자에게 일반의무를 다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 피로 구속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신자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최고의 충성심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타협하는 대신 순교를 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최고의 충성심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충성심은 바로 예배입니다. 터키 괴레메 암굴교회와 데린쿠유 지하도시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삶으로 예배가 무엇인지를 후대 크리스챤들에게 생생히 보여준 것입니다.
마귀 사단은 우리 신앙을 흔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책망하는 소리를 들을때 살길이 열립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주님께서 성령 충만을 부어 주십니다.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엘리야가 450:1로 외칠 때보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때 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소리에 귀 귀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요란함, 폭풍, 지진, 불이 떨어짐. 그때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중 조용한 중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성령충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새벽기도와 예배에 나와 세미한 성령님 음성 듣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언제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고난을 이기고 주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요16:14절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 충만하면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 영광만 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내가 낮아져도 어떻게 하면 주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게 할까?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왜요? 주님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을 피할자 아무도 없지만 고난에 닥쳤을때 대처하는 방법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고난이 힘들게 하나 그 고난을 통해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발견하면 하나님은 커지고 나는 작아집니다. 그 깨달음이 우리를 영원한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위장된 축복이라고도 하고 세례와 성만찬에 이은 제3의 성례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환난중에도 기뻐하나니..(롬5:3,4)”“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고난은 믿는자들이 반드시 밟고 일어서야 할 발등상입니다. 각 사람에게 필요한 모양으로 주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과 생명을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늘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주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특징입니다.
4) 성령충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 곧 전도하는 삶을 삽니다.
요15:26절 “ 내가 아버지께로 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성령충만은 그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습니다. 자꾸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고 높이고 싶고 전도하고 싶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기회가 나면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나를 변화시키고 이기게 하신 예수, 나를 고쳐 주시고 나를 치료해 주신 예수님 자랑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전도를 통하여 성령님은 영혼구원, 복음의 지경을 확장하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해 나가십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불쌍하게 지옥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내 자녀 내 형제, 부모가 예수 안 믿고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만약 한번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내 신앙생활을 근본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전도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5) 충만 하려면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삶이 꼭 필요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1 .회개의 요소
(1) 지성적 요소 : 이것은 생각의 변화이다. 곧 죄에 관한 지식이다.(롬3:20)
과거의 생활이 죄와 오염과 절망을 안고 있는 죄의 생활이었음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현실을 직감했던 까닭이 아니었던가?
(2) 감정적 요소 : 이것은 감정의 변화이다. 곧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경건의 비애>(고후7:9-10)이다. 또 죄에 대한 통곡도 된다 (시51:7).
(3) 의지적 요소 : 이것은 목적의 변화이다. 곧 죄에서 떠나려는 내적 전환
사죄와 성결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뜻한다 (행2:38, 롬2:4). 그러니까
이것은 <의지의 결단>(눅15:18-20)이다.
2. 회개의 결과
(1) 기쁨이 생긴다 (눅15:7,10).
하늘에도 기쁨이요 땅에도 기쁨이다 (시126:5-6). 회개의 뿌리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마3:8).
(2) 사죄를 얻는다 (행3:19). 회개는 사죄를 가져오고 죄를 없이 한다 (시55:7,
눅24:47). 요일1:9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너의
죄가 멀리라 (시103:12).
(3) 성령을 받는다 (행2:38-39).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갈5:22-23).
그러니까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갈5:16).
결론
초기 사도바울이 산과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을 넘고 비지 땀 흘리며 걸어가 전한 복음! 제자 양성으로 복음을 받은 디모데가 이어받아 목회하던 발자취를 돌아봤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영광스런 그곳이 지금은 무너져 돌기둥 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버스 타고 그 먼 땅을 지나치는 마을마다 십자가 교회 대신 뾰쭉한 회교 모스크 사원이 웬 말이란 말입니까? 불과 100년전만 해도 기독교가 40% 였다는 터키가 왜 지금은 1%만 남아 있을뿐 이란 말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파수하며 후대에 복음전할 목회자 제자 양성을 포기하면 교회는 무너지고 남는 것은 돌무덤 뿐입니다.
죽어도 예수믿고 죽으면 지켜보는 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본인은 더 말할거 없죠? 이웃 사람 껍데기에 속지 마시고 그 속 영혼을 봅시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 한 영혼에 관심갖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 이도 내힘과 지혜로 안됩니다. 오직 성령충만 회복해야 예배에 성공하고 전도와 제자양성도 가능 합니다. 그것도 한번 받은 것으로 자족하면 안됩니다. 늘 항상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받아야 합니다. 주여! 이땅에 성령 충만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늘 성령충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 복된 성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익한 글! 명언! 단문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박해국가 순위에 나타난 5가지 추세 (0) | 2022.04.13 |
---|---|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0) | 2022.03.07 |
잭 R.테일러의 성령충만 받는 방법 (0) | 2022.03.04 |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르는 이유 (0) | 2022.02.22 |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5~16) (0) | 2022.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