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성경신학의 정의와 성경신학의 필요성/박원희 목사

하나님아들 2022. 1. 24. 22:58

1. 성경신학이 계시를 하나님의 신적활동으로 다루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에 의하면 성경신학 핵심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이며 유기적인 통일성과 언약과 계시의 점진성을 다루고 있다. 계시는 언약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신적활동이 언약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고 전개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신학을 성경해석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경신학의 분주 안에 주경신학이 들어가나 주경신학이 성경신학은 아니다. 문예적 성경해석이나 정경적 성경해석이나 역사적 성경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성경신학은 아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경신학은 개혁주의의 기본적인 성경관을 갖고 성경을 보는 것이다.

 

 

2. 개혁주의의 성경관은 성경기록방법에 유기적 영감설, 완전축자 영감설이다. 또한 성경의 속성은 충족성, 완료성, 통일성, 유기적점진성, 무오성, 그리스도 중심성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성경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이란 이런 개혁주의 성경관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 안에서 구원을 계시하셨고 점진적으로 그 계시를 드러내 보였으며 그 계시는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도리가 충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점진되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는 성경해석이 성경신학이다. 이러한 성경신학의 토대 위에서 성경해석이 이루어져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의 바탕이 없는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곡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인류의 최초의 타락은 하와의 하나님 말씀의 곡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경신학의 기초는 조직신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조직신학은 사실의 교의학의 체계인데 교의학이란 여러 교리를 유기적으로 엮은 것으로 신앙고백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신학 기초 없이는 조직신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3.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신적 활동이다. 하나님의 신적활동은 성경 속에서 계시와 구속사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계시하신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맺는 언약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계시한대로 역사 속에서 구원의 행동을 하신다. 또한 그 구원의 행동에 관한 계시의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시편 혹은 지혜서 그리고 신약의 성경들은 구속사를 통한 하나님의 신적 행위들에 대한 해석된 계시이다.

 

성경의 완료로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 그러나 구속의 행위는 계속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무시하거나 교회를 통해 행하시는 구원의 일들을 도외시하는 것은 비신앙적 태도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열매들, 구속의 열매들을 갖고 산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신적 행위 속에서는 계시행위와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함께 가고 있다. 이것을 나는 언약과 언약의 전개, 그리고 언약의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적 행위를 다루는 것이 바로 성경신학이다.

 

지금까지 개혁신학은 이러한 계시행위와 구원행위를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약을 단순한 자구적인 언약의 행위에 메이는 것, 협의적 형태를 취하므로 성경신학의 해석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언약은 그 언약을 맺는 배경과 언약의 형성과정, 언약맺음과 언약의 전개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행위와 구원행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형성과 전개과정 속에 드러나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계시적 해석이 신앙고백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언약을 보지 않는다면 시편이나 혹은 지혜서등을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지금까지 개혁신학은 이러한 각도에서 언약을 해석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시행위와 구원행위(구속사)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성경을 통해 하지 못하였다. 또한 계시행위를 편협하게 보므로 구속사 자체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기계적으로 보므로 그 속에 있는 수많은 군상들과 우리의 여러 구원에 대한 도리와 삶을 간과하는 실수를 가졌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한다고 해서 구속사는 아닌 것이다. 그 수많은 언약의 전개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 언약의 전개를 무리하게 그리스도에게 짜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 언약의 전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반응과 죄성, 고백 등이 얽혀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성경신학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더 보충하고 세워나가 한국교회 위에 올바른 성경신학적 태도를 갖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는 이성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이해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회심된 이성, 즉 말씀을 사모하는 이성은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가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라는 것이 그의 자기 이해와 삶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행함이나 업적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 또한 교회됨을 구성하는 것은 사람의 목적추구나 의기투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말씀의 토대 위에 설 때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신학을 통해 교회 회복과 성도의 회복이 우리에게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4.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 성경의 신적권위가 사라지면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한 집단이 만들어 놓은 신앙고백의 역사에 불과하다. 계시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고백에 의존된다. 인간의 경험과 이성이 중심이 된다. 이것이 양식비평, 문예비평, 정경비평이라는 성경해석을 만들어놓았다. 그렇다면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의 권위가 사라지면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결별되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영광이 강단에서 떠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스펄전이 하강논쟁을 통해 영국교회에 경고한 바이다. 로이드존스는 성경의 권위가 사라지면 강단에는 문화와 여러 잡것들이 올라오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5.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게할더스 보스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광맥이 다시 21세기에 요청이 된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경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라는 기본적인 신학(존 오웬은 성경신학은 기본신학이라고 불렀다. 모든 신학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에 대한 토대와 반성 없이 성경해석을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신학교때 이러한 성경신학적 관점의 토대 위에 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6. 선교학적으로 성경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타문화권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회심을 하나 그 이후의 삶은 말씀의 토대 위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토대가 없으면 그의 세계관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민족이나 부족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서는 삶의 체계, 문화적 체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성경신학의 정립을 가져야 한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말씀에 굶주려 있고 교회개척 후 교회의 토대를 어떻게 말씀의 체계 위에 세워야 할지 몰라, 이리 저리 유명하다는 양육교재를 기웃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선교지의 교회들은 성장하면서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나가는 선교사들은 성경신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길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7. 우리는 이번 학기 소선지서와 대선지서 4권을 해야 할 것이다. 선지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는 성전이다. 즉 시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신의 처소에 들어가게 하여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처소가 시온이며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처소에서 쫓겨났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처소에 거할 수 없을 만큼 부패된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안에는 시온주의가 있게 된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을 갖고 있으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온주의는 멸망당한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외침이었다. 이때 신학적인 문제는 하나님은 예루살렘에게 영원한 처소를 만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졌단 말인가?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을 때 그들은 성전 없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말인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자신의 처소를 만들고 안식하길 원하셨다. 그것이 에덴동산이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으로부터 인간이 쫓겨나고 난 후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님이 거하는 영원한 처소를 만들겠다고 언약을 주셨다. 그래서 그 언약의 전개가 모세언약-제사장, 다윗언약-왕을 통한 전개였다. 그리고 이제 선지자를 통하여 영원한 성전을 다윗언약(후손)을 통해 짓겠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모세언약을 성취하는 마음에 율법이 새기는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영원한 성전에서 자신의 백성과 영원히 거하는 일을 분명히 이루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시온을 만드는 행위가 여호와의 전쟁이며 이 시온을 만드는 자가 여호와의 종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 시온을 만드는 것이,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이다. 시온을 만드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행위가 계시행위와 구속행위로 얽혀있는 것이 선지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지서 한권, 한권을 공부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