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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한계 / 정승태교수

하나님아들 2012. 10. 17. 15:37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한계/정 승 태 성서해석학

2004/12/13 19:19

 http://blog.naver.com/sosin279/8366476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한계

정 승 태
침례신학대학교 교수, 종교철학


I. 들어가는 말

1970년대 이후 미국 신학적 스펙트럼을 통해서 이른바 "예일 학파"라고 명시화되었던 후기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이 생동감 있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발전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19세기와 20세기의 신학적 흐름을 통하여 어거스틴에서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적 해석이 일반적으로 유형론적 방식을 고수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전승되어 온 사건들이 해석되었던 성서의 이야기에 우위성을 둔다. 성서의 이야기는 해석자가 성서 밖의 실재에 관한 해석학적 상황을 전도시킨다. 조지 린드벡이 언급하고 있듯이, "[유형론]은 우리 시대에 종종 말해 지고 있듯이, 믿는 자들이 성서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발견한다는 것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로 만든다." 후기 종교개혁 시대에서 이와 같은 해석의 방향이 합리주의적, 신앙주의적, 그리고 역사-비평주의적 발전들에 의해 강조되었다고 밝히는 프라이는 성서 연구에 대한 지난 2세기 동안에 있었던 혼란이 근대 이전의 해석의 엄청난 오해와 오류들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역사-비평적 주석과 근대 이전의 주석간의 입장이 단순히 잘못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프라이가 보여준 대로, 성경을 성서 밖(extrabiblical)의 사상에 종속시키고 있는 후기-계몽주의 시대와는 다른 정반대의 견해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참고적 근거를 성서 이야기들의 문자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로 혼동했다는 것이다.
프라이는 슐라이에르마허에서 딜타이에 이르는 낭만주의 해석학적 전통에 서 있는 "텍스트 배후의 의미" 개념을 거절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이야기는 동인인 예수의 정체성의 묘사를 허용하는 환경과 목적의 상호작용을 이용한다. 따라서 주어진 것으로서의 예수의 정체성이지 그의 역사성 혹은 형이상학적인 상황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는 문자적이며, 신학적으로 이야기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서문에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복음서들]은 엄밀히 말하면 역사와 같은(history-like) 것인데, 왜냐하면 역사-저작이나 전통 소설과 같은 그리고 신화와 우화들과는 다른 복음서들은 문자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표상(representation)과 그것에 의해 표상된 것간의 어떠한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프라이의 작품은 성서 해석의 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크 월러스(Mark Wallace)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프로그램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예일 학파는 린드벡과 프라이의 비애가 성서적 세계를 외부의 실재들로 흡수시켰던 그 반대를 역행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또한 기독교 신학을 위해 실재를 지배하여왔던 성경에 우위를 두면서 기독교 공동체의 내부의 요구에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린드벡의 영향력이 있는 {교리의 성격: 후기자유주의 시대에서의 종교와 신학}의 작품을 통하여 주로 예일 학파의 후기자유주의 신학 운동을 살펴봄으로써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나타난 해석적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II. 인식론적 근거

성서의 내적인 신학을 옹호하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은 반정초주의 입장과 언어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으로부터 전개한다.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이야기 신학 운동의 방법과 해석을 형성하고 결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인식론적 전제조건들에서 출발한다. 첫째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정초주의적 인식론(foundational epistemology)을 부정함으로써 반정초주의적 신학을 정립한다. 특별히 한스 프라이의 제자였던 로날드 씨이만(Ronald Theimann)은 계시의 정당성을 추구하기 위해 근대적 망상은 하나의 불가능한 임무라고 믿는다. "계시의 근대 인식론적 교리는 하나의 실패로 판결해야만 하는데, 이는 계시의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부적절한 실행이나 불충분한 상상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기획(project) 자체의 불가능한 논리적 주장들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정초주의가 지속적으로 주장되는 한, 신앙은 이해가 아닌 기초를 추구하게 되며, 그 같은 기초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행하게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반정초주의적 인식론을 무의식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한 양태로서 받아들인다. 반정초주의 신학은 기초적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정당성을 갖는 "기술적 신학"(descriptive theolog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적 정당성들은 "논의된 신념들과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상호 연관된 신앙들의 상호 연관된 관계성"에 중심을 둔다. 따라서 반정초주의 신학(antifoundational theology)은 "정정당당히 기독교 전통과 공동체 속에 위치시키면서 기독교 신앙의 내적 논리를 '재 진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알려진 조지 린드벡(Goerge Lindbeck)은 보다 분명히 반정초주의적 인식론을 정립시켰다. 비록 린드벡이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이 "형이상학적 영지주의자" 및 "신학적 실용주의자"와 같이 다양하게 인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이론의 신학적 유용성으로서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방식"(the way things really are)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는 형이상학적 사변을 위한 그의 예견이 잘 알려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속에 주로 놓여 있는 예일 학파의 철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적 철학에 의존된 인식론은 언제나 실재에 대응하는 언어를 발견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린드벡의 기본 전제들 중의 하나는 만일 언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가 언어를 형성하고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 그 자체가 실재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어가 실재에 선행한다. 한 종교의 전망을 결정하는 종교적 경험은 그 종교에 의해서 사용된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근거는 "세계의 제한은 언어의 제한이다"라고 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진술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린드벡과 예일 학파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들 중의 하나는 상대주의적 인식론에 관한 것이다.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리 주장의 쟁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되겠지만, 우리 시대에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가는 아마도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인데, 그는 이러한 반정초주의 속에 있는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한다:
합리성의 "순수한 중립적" 이론이 결코 "순수한 중립적"이지 않다는데 동의하는 이 들과 기술(skill), 실천 등이 모든 신학적 주장들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어 떠한 시도에서 결정적인 성분요인들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이들조차도....린드벡의 "인식론적 실재론"이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상대주의이거나 아니면, 신학을 위한 그의 "문화-언어적" 문법적 모델이 일상적인 "특별한"(ad hoc) 변증론적 논증 들을 갖고 있는 고백주의(confessionalism)일 것이다.

트레이시와 같이 윌리암 플레이커(William Placher)도 예일 학파의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그에 의하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요점은 기독교 교리들이 단순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전달하고 의미 있는 규칙들의 표현이기 때문에 급진적인 상대주의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으며, 또한 이는 다른 공동체나 전통들이 다른 규칙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떤 다른 존재론적 주장들이 없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공동체의 규칙들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진리이면서, 동시에 다른 규칙들의 체계를 갖고 있는 다른 공동체들도 그들을 위한 진리가 된다. 게다가 성서 이야기는 어떤 지시대상(the reference)을 역사적 사실이나 존재론적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의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린드벡은 반정초주의가 지식의 토대를 요구하는 정초주의의 비판처럼 비합리주의(irrationalism)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쟁점은 합리성(reasonableness)의 보편적 규범들이 존재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합리성의 규범들이 어떤 중립적이고, 구조틀에 의존된 언어로 형식화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린드벡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위한 이유들을 제공하는 어떠한 선험적 논증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예일 신학에서 사회학과 인류학과 같은 다른 학문들과의 대화를 위한 여유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과의 대화는 체계적이고 단정적이라기보다는 특별한 변증론(ad hoc apologetics)을 의미한다. "실제로, 비정초주의적인 '특별한 변증론'에 대한 요청이 신예일 신학의 슬로건이었다." "특별한 변증론"은 기독교 전통의 진실성에 신학자의 우선적 헌신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신학의 외적 언어의 주의 깊은 사용을 통하여 신앙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전형적으로 신학적 주장들이 근거 지울 수 없는 이성의 보편적 기준들에 호소해왔지만, 그같은 기준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이해하게 할 수는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는 의문시될 수 있다.
둘째로, 린드벡이 이러한 반정초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상징체계의 우선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종교 경험이 텍스트에 의해서 축적되어지거나 아니면 실재가 텍스트 내에서 해석되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적 경험보다는 외부의 문화적, 언어적 유형의 우선성이 그들의 논의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내적인 경험에 비해 외적인 종교적이고 문화적 요인들의 우선성을 논하기 위해 린드벡은 "헬렌 켈러와 가정된 여우 아이들"에 대한 경우들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호와 상징들의 사용이 없이 경험으로서의 경험을 입증하고, 기술하고, 혹 은 인식할 수 없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한 경험을 표현하 는 수단들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우리의 표현적, 및 언어적 체계가 풍성 하면 할수록, 우리의 경험은 더욱 더 미묘하고, 다양하고 그리고 차이가 있다.

이처럼,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세계의 경험이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 표현되어진다는 해석학의 문제를 반대한다. 이와 유사하게, 종교적이 되기 위해서도 우리가 언어의 기술이나 주어진 종교의 상징체계를 일차적으로 요구한다. 린드벡은 "이 견해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적용은 한 개인이 언어를 배움으로서 인간이 되는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언어를 듣고 내면화함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린드벡의 이러한 주장은 경험을 가지기 위해 언어의 필연성에 대한 대담한 주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린드벡이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가 어떤 인간의 능력들의 현실화를 위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언어, 문화, 그리고 종교의 기원을 해명하려고 들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언어, 문화, 종교와 같은 이러한 외적 체계들이 주변에 있는 다른 방식과는 달리 인간 경험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자명하다. 예를 들면, 린드벡은 두 가지 색상들, 즉 초록과 파랑간의 차이가 없는 어떤 부족 언어들의 한 보고를 인용한다. 이러한 부족 사람들은 생화학적인 차원에서의 색맹은 아니다. 하지만 린드벡은 "....그들은 자극의 이러한 차이들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어휘적 범주들이 부족하다"고 단순히 지적한다.
린드벡은 종교의 성격에 대한 전통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접근들을 인식적 명제주의와 경험적-표현주의로 제각기 정의한다. 이 두 접근들은 보편적 주장들 속에 있는 그들의 이론들을 근거 짓는다. 전자의 경우에는 보편적 명제적 진리들을 말하고, 후자의 경우는 보편적 종교 경험을 말한다. 린드벡은 종교적 전통에 있는 교리의 변화와 영속성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같은 부적절성에 비추어서 린드벡은 인식주의자와 경험주의적 표현주의의 접근들을 비판하면서 문화-언어적 모델(cultural-linguistic model)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논증한다. 이 견해에서 린드벡은 "종교들은 흔히 신화들이나 이야기들 속에 구체화되었고, 매우 공식화된 포괄적인 해석적 체계들로서 보여지는데, 이 포괄적 해석체계들은 인간의 경험과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한 종교는 문화적 구조틀의 유형이다. 그것은 또한 전체적인 삶과 사고를 형성하는 언어적 구조틀 혹은 매개가 된다. 문화와 언어처럼, 종교도 개개인에 의해 하나의 공동체의 배경 속에서 기술과 태도의 체계를 학습하고 습득한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경험적-표현주의 접근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경험적-표현주의 접근은 종교의 힘을 형성하는 일차적인 "내적 경험"(inner experience)을 강조한다. 하지만, 린드벡의 이론은 외연적인 종교-문화적 요인들의 규정하는 힘을 일차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문화-언어적 모델은 인간의 경험이 문화, 언어, 그리고 종교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 언어, 그리고 종교가 인간의 경험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린드벡은 언어와 경험간의 인과율에 대한 그의 견해가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내적 경험"과 "외적" 종교적인 요인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이끌어 가는 동반자"(a leading fellow)라고 논증한다.
특별히 린드벡이 문화-언어적 전망이 인식주의자와 경험-표현주의자의 접근들보다 탁월하다고 믿는 이유는 이러한 양자의 명백하고 경쟁적인 강조들을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경험-표현주의의 견해와의 합의로 문화-언어적 접근은 종교 경험이 문화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문화의 궁극적인 차원으로서 종교를 긍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강조점을 바꾸어놓은 "보다 복잡한 형식"을 제시한다. 종교 경험은 오직 문화적 형식에 의해서만 인정되어질 때만이 존속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식적 견해와의 합의 속에 있는 제한된 문화-언어적 접근이 종교의 성격 속에 있는 외부를 강조하지만, 경험-표현주의적 "지성주의"(intellectualism)는 없다. 종교가 제공하는 포괄적인 체계는 명제들의 체계를 주로 믿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종교는 누군가를 움직이는 매개체이다. 린드벡이 한 특정 종교에 대해, 특별히 기독교의 경우에 진리주장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의 개념적 언어의 내적 논리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종교가 주장할 수 있는 진리 요구의 유형은 이 언어의 내적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종교가 인식적 측면의 주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린드벡은 의례, 기도, 그리고 예증들이 명시적으로 신념들의 공식화된 진술들 보다 더 규범적으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제안이 다른 두 접근들, 즉 인간 존재의 비반성적 차원들에 대한 경험-표현주의자의 관심과 종교 언어의 외적 영향력의 인식주의자의 인식론보다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

III. 텍스트 내재성(Intratextuality)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또 다른 중심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텍스트 내재성의 개념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 린드벡에 의하면, 신학은 텍스트 내재적(intratextual)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텍스트 자체의 언어적 세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텍스트 내재적 신학은 외부의 성서적 범주들 속으로 성서를 해석하기보다는 한 성서적 구조틀 속에 있는 실재를 재 서술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린드벡의 텍스트 내재성의 개념은, 첫째로, 이야기의 비환원성(irreducibility)을 전제로 한다. 댄 스타이버(Dan R. Stiver)의 지적대로, 비환원성은 실제로 메타포의 철학과 이야기 신학에서 뜨거운 쟁점이다. 그렇다면, 종교 언어에서 환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 명제주의자들은 진리도 거짓도 아닌 하나님과 실재에 대한 명제들이라고 주장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보편적으로 공유된 내적 종교적 경험들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는 성서적 이야기들이 기독교적 발화 혹은 명제들을 위한 비환원적 기반들이 된다.
성서적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정점으로서의 예수의 이야기로서 보여진다. 프라이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는 린드벡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의 담론 속에 있는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종말로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우주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능가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실마리로서 한 특별한 인간과 동일시하고 특징짓는 기능을 한다.... 예수의 이야기는 창조, 선택, 그리고 구속의 전반적인 성서적 이야기들을 성취하고 변혁시키며, 그로 인해 메시 아 사상, 고난받는 종, 로고스, 그리고 아들 되심과 같은 개념들과 이미지들의 의미 들을 일일이 열거한다. 그가 주제이며, 모든 것이 예견된다.

따라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동인(動因)으로서 성서적 이야기들의 중심적 요지로서 간주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주장이 그것이 성서적 이야기들에 의해 알려져야 하듯이 기독교 공동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동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들은 성서 속에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동인이 종종 다른 동인들의 행위들-대부분 구약 성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성경에서의 예수-을 통해 묘사한다. "만일 성서적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정체성-묘사'(identity-descriptions)로서 기능 한다면, 동인들의 이 상호작용과 숨겨짐과 현존의 패턴은 성서적 이야기의 신학적 재 진술 속에 반영되어야만 한다."
둘째로, 텍스트의 내재성의 개념은 화행으로서의 이야기(Narrative as Speech-act)를 의미한다. 특별히 씨이만이 복음서가 이야기화된 약속이라는 사실을 설정하고자 시도하면서 그는 우리가 하나의 약속으로서 기능화 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이해 가능하게 말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 그는 이야기에 화행론을 적용함으로써 대답을 추구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약속은 하나의 화행의 형식이다. 씨이만은 이야기가 또한 화행의 어떤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행론(speech-act theory)에서 하나의 발화의 수반적 요소(illocutionary component)는 주로 그것의 상황에 의존한다. 단순히 상황에 없는 "비가 온다"라고 하는 한 문장은 사태를 기술하는 단순 명제가 되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보고이며, 당황하고 있는 표현이며, 어떤 행위를 위한 방향 혹은 내기의 경우에 환호적인 울음일 수도 있다. 이야기들도 또한 다양한 발화수반적 힘들을 가질 수 있다. 보다 복잡한 이야기들은 많은 다른 발화 수반적 행위의 힘들을 가질 수 있으며, 가능한 해석들의 넓은 범위들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적어도 신약성경의 이야기들을 약속으로서 기능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것들을 약속으로서 해석가능한 일인지 하는 것은 더욱 복잡한 문제가 있고 또 이러한 이야기들의 내용과 상황의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이야기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야기되어진 사실들(narrated facts)에 초점된 것은 성서 해석의 요지를 놓치는 것이라고 씨이만은 보여주었다. 우리는 텍스트 그 자체 안에 있는 이야기를 보아야 하며, 그리고 어떤 행위가 이야기의 전달 속에 수행되어지는 지를 보아야 한다.
만일 신학이 텍스트 내재적이라고 한다면, 신학자의 임무는 세계 속에 흡수되어 있는 텍스트를 지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 견해가 현대 문화를 텍스트와 함께 상호 비판적 대화 속으로 이끌어 가는 자유주의적 전통을 대항하면서 성경의 "강경한 견해"를 보인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은 보수 명제주의가 하는 것처럼 이야기의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린드벡은 실제적이고 사실적 이야기로서 성경을 보여주는 것을 제시한다. 이야기들은 "역사와 유사한 것"(likely-history)이 아니라 "역사와 같은"(history-like) 것들이다. 린드벡의 텍스트 내재적 신학이 복음서에 나타난 대표적인 인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정체성간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프라이의 확신을 반영한다.
폴 리쾨르를 따르는 씨이만은 이야기가 구성의 전개를 통해서 우리의 경험을 정돈시킨다고 말한다. 이야기들은 시간적으로 움직인다. "비정초주의 신학이 인간의 삶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조직하고 구성하는 범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이야기는 또한 인물을 통하여 인격적 정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범주를 제공한다. 따라서 씨이만은 이야기는 후기자유주의 비정초주의적 신학의 우선성을 제공하는 인격적 정체성의 인물화와 역사성이라고 주장한다.

IV. 진 리

종교의 각 이론은 그 자체의 기준에 비추어서 종교들을 비교한다. 인식적 모델은 명제적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 주된 물음은 가장 중요한 참된 진리 주장을 하는 것은 어떤 종교인가? 이다. 경험-표현주의적 모델은 상징적 효능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 모델은 종교들을 어떻게 그들이 효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공통된 내적 경험을 나타내며 교통할 수 있는지를 비교한다. 린드벡은 대응론에 의한 진리 이론이 명제적이어야 한다는 공통된 가정을 위한 중도주의의 "체계적 의식의 차이성"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서구 문화를 비난한다. 초대 교회 시대에서, 대응론에 의한 존재론적 진리는 명제주의에 제한되지 않았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두 가지 의미의 진리관을 서술한다.
첫째는 범주적 진리(categorical truth)이다. 인식주의자와 경험-표현주의자가 제각기 명제적 진리 주장들과 상징적 효능성에 초점을 맞춘 데 비해, 문화-언어적 모델은 범주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진리 주장들과 표현적 상징주의는 범주들에 비추어서 만들어졌고 전개되어진다. 린드벡은 이 개념을 다음과 기술한다: "적절한 범주들은 비록 그것들이 명제적, 사실적, 그리고 상징적 진리를 보장하지 않아도 사실로서 취급되어지는 것에 적용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가능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같은 범주들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특정 종교는 '범주적으로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린드벡이 논증하고 있는 것은 범주들이 진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크기의 범주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크다고 의미론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필수적이다. 진술 그 자체는 진리일 수도 있고, 진리가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의미를 갖고자하는 그같은 진술들은 완전히 크기의 범주를 요구한다. 한 범주적으로 진리인 종교는 중요한 진리들의 의미 있는 표현들을 허용할 것이다. 범주적 진리는 명제적 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진리를 만들기도 하고 또한 오류가 생기게도 한다. 린드벡은 범주적으로 참된 종교에 해당하는 것을 예증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유추를 사용한다.
한 지도의 걸작품이 어떤 도로를 취하는데 정당화하기 위해 잘못되고 부주의한 방 랑자에 의해 전개되어질 수 있는 반면에, 한 부정확한 스케치는 만일 그것이 동부 보다는 서부로, 남부보다는 북부로 이끈다고 해도 가장 바른 길로 이끄는데 호소력 을 지닐 수 있다. 유사하게, 메타포의 도덕을 기술하기 위해, 범주적으로 그리고 탁 월하게 참된 종교는 올바르게 유용하게 되어지고, 궁극적 실재와 대응하는 방식으 로 사고, 열정, 그리고 행위를 인도하며,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명제적으로) 진리가 되는 능력이 되지만, 항상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전개되어질 수는 없다.

여기서의 강조는 종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떤 참된 종교는 잘못 사용되어 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린드벡은 용어 혹은 지지자들에 의한 오용에 의존된 궁극적 실재에 반응하는 객관적 명제적 진리를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다 앞서 그는 실제로 살아있는 종교는 한 유일한 거대한 명제로서 보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도에 대한 메타포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는 하나의 지도가 여행의 과정 속에서 실제로 유용한 것이었을 때만 한 명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 적용에 있어서 종교의 진리를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종교에 대한 그의 이론에서 명제적 진리의 개념을 설명할 때, 린드벡은 종교적 진리 주장들의 적용적 혹은 수행적 역할에 관한 그의 견해를 분류하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는 확증이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주체의 헌신 없이 발화되어질 수 없음을 지적한다. 명제들의 의미와 진리는 그들을 발화하는 믿는 자들의 주관적인 성향들에 필연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린드벡은 종교적 발화들의 객관적 대응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종교발화들이 수행적 사용을 통하여 명제적 힘을 얻는다는 것을 제안하고자 했다. 따라서 린드벡의 입장에서 "명제"의 의미가 전통적인 개념과는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종교적 진리의 "수행적-명제적" 이론(performative-propositional theory)이라고 부른다. 분명히 다음의 말들은 린드벡이 "명제적 진리"의 의미로서 표현한다:
....명제적 참과 거짓은 그것이 기도, 찬양, 설교, 그리고 권면을 통하여 삶을 형 성하는데 사용할 때 일상적인 종교 언어를 특징 지운다. 오직 그것은 인간 존재들 이 언어적으로 그들의 진리 혹은 거짓, 궁극적 신비에 대한 그들의 대응 혹은 대응 의 결여를 나타내는 이같은 단계에 있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린드벡의 개념은 "진실성"(truthfulness)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 "진실성"은 명제적 개념들과 정상적으로 연결된 "진리"보다는 한 수행적인 힘을 암시한다. 진리에 대한 린드벡의 수행적 강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씨이만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기독교적 진리주장들을 위치시킨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주장들의 정당성이 그의 약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성으로 기독교인의 신뢰의 정당성에 놓여 있다고 논증한다:
만일 한 약속한 사람이 그 신뢰를 보증하고자 행위 한다면 그 약속한 사람을 신뢰 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보장된 확실성(warranted assertability)의 탐구는 그들의 성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장되었던 약속자의 정체성, 약속들의 성격과 상황 그리고 요구들은 검토해야만 한다. 이는 진리에 대한 기독교적 주장들 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그 관계의 상황 속에 놓여 있다.

물론 그같은 정당성은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어 질 때까지 완전히 확증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거기에는 씨이만의 진리 개념 속에 있는 한 종말론적 차원과 기독교 신앙에서의 정당성이 존재한다.
둘째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에서 옹호하는 진리관은 체계내의 진리관(intrasystematic truth)이다. 특별히, 린드벡은 종교들 안에서, 아니면, 적어도 기독교 안에서 명제적 진리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종교의 인식적 명제 이론의 가장 위대한 힘은 순전히 경험-표현주의 이론과는 달리 그것이 그같은 [명제적] 진리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한 문화-언어적 접근에 대한 결정적인 신학적 도전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이다." 게다가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진리이해는 "존재론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적 체계의 진리"를 설명한다. 존재론적 진리가 실재에 대한 대응하는 반면에 체계내의 진리는 정합성을 언급한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적 진리는 인식론적 실재론자에 대한 관심이다. 린드벡의 입장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식론에 있어서 그는 보다 널리 적용할 수 있도록 제의한 그의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인식론적 실재론자에게 있어서 내적 체계의 진리는 필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와 같은 진리 주장들의 유형에 대하여 충분하지는 않다. 이러한 발화는 오직 기독교 신앙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개념이 주되심의 범주를 요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참인데, 이야기가 전해진 특별한 개인이 있고, 있었고, 그리고 확고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주님이 되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는 그것이 참이 되기 위해서 존재론적으로 실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체계 내적 진리의 최종적인 분석에서 린드벡은 다른 예일 학파의 이야기 신학자들과 더불어 객관적 대응론의 쟁점을 피하고 싶어한다. 신학적 진술들이 그들의 입장에 의하면 참이지만, 그것들은 실재에 대응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적 텍스트들의 세계와 일관적이고 정합적인 "삶의 양식"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합성은 오직 진리를 위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 자아, 그리고 세계의 지시대상에 대한 주장들에 비추어서 신학을 평가하는 범주적 오류인 것처럼 보인다.

V.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평적 평가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들은 두 가지 전형적인 측면에서 취급되어져왔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과 관점들로부터 제기된 이러한 두 가지 전형적인 비판들은 만족스러운 비판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의 방법들과 전제들에서 출발하여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한 극단적인 입장만을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잘못된 비판들을 수정하면서 우리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야기들의 한계성들을 평가하고자 한다.
첫째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비판은 진리의 상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만일 신학이 어떤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지시대상을 무시한다면, 어떤 신학이든지 해석의 상대주의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신학의 흐름 속에서 신앙공동체가 언제나 자신의 내적 규칙들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이른바 "수정주의 신학"(revisionist theology)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도전에 직면해있다. "수정주의 신학"이란 용어를 최초로 도입하였고 현재 이 진영의 가장 활동적인 해설가로 간주되고 있는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에 의하면, "현대 기독교 신학이란 인간의 공동경험 속에 현존해 있는 의미들과 기독교 전통 속에 현존해 있는 의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philosophical reflection)이다." 여기서 철학적 성찰이란 신학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이해되며, 모든 이론과 해석의 "보편적 의미" 혹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 간주된다. 결과적으로, 트레이시는 신학이 신학으로서 인식하고자 한다면 어떤 보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정초주의적 진리관(foundational truth)에 의존된 실재의 객관성을 신학에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즉 무엇이 본질적이며 무엇이 비본질적이며,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오류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해석의 정당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그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나타난 해석학의 일반성을 지적하고 보다 보편적이 되기 위해 다양한 전통들간의 해석에로 서로 개방하고 대화할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해석이 다소 사소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행위하고, 숙고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혹은 심지어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해석한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 되며, 그 행동을 위한 정확한 방식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반성적으로 행위 한다는 것이며, 신중하게 결정한다는 것이며,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완전히 경험한다는 것이 다. 우리가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한 숙련된 해석자(a skilled interpreter)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한 특정한 신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순수한 독창적인 것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심지어 자연과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적 영역들과 인간경험들과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관관계"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트레이시가 주장하듯이, 신학이란 결국 "기독교 전통에 대한 해석과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석간의 상호 비판적 상관관계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일 학파의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의 신학"(Theology after Enlightenment)에서 신학적 방법론과 그 정당성을 추구하고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신학으로서의 정당성을 얻고자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의 근거를 가져야한다는 정초주의적 인식론의 합리성과 보편성의 기준에 대해 오히려 회의적이며 비판적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텍스트와 세계의 경험을 해석해왔지만,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신학이 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암시한다. 린드벡은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받는 이유가 인식론적 "정초주의적 입장"에서 세계와 텍스트를 보고 있다고 밝히고, 이러한 근대주의의 유산인 "정초주의적 기획"(企劃)이야말로 하나의 "치명적인 오점"(fatal flaw)을 남겼다고 논박한다. 정초주의적 인식론과는 달리,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그 해석의 준거틀을 갖고 있는 "이야기" 혹은 "성서적 텍스트"의 성격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 린드벡에 의하면, "합리성의 기준들에 대한.....증가하는 인식이 그같은 언어의 발견을 더욱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정초주의적 학문들의 가능성을 의문스럽게 한다." 다시 말해, 이야기 신학에서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지를 합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으며, 어떻게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신학이 참과 거짓 혹은 부적절성을 밝힐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긍정적인 공헌은 필자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보편적 합리성과 정합성의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을 신학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데 있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신학적 보편성을 추구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를 다른 종교들 혹은 철학들간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의 개념에서 찾는다. 기독교 신학의 체계들이 진리, 경험, 그리고 범주적 적절성의 완전히 다른 개념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대단히 결정적인 어떤 것임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불가공약적 판단들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제임스 멕글랜돈의 제자이면서 이른바 캘리포니아 학파(California School)를 이끌고 있는 테렌스 틸레이(Terrence Tilley)도 "종교적 교리들과 행위들을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전통, 즉 중립적인 입장은 없으며....종교적 믿음의 정당성이 아르키메데스적 기반으로부터 취급되어질 작업은 아니다. 또한 정초주의 신학에 의해 도매급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불가공약성의 개념을 옹호한다.
종교들의 범주들을 예로 들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데, 만일 다른 종교들의 범주들이 기독교의 범주와는 다르다면, 비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도 구원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린드벡이 지적하듯이, "누구나 자신이 [구원]을 거절하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지식적으로 메시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기 전에 신앙의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다른 종교들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린드벡의 견해와 동의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다른 종교 전통들 가운데 있는 진정한 다양성을 인정하는데 하나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종교와 신학을 해석하는 그의 방법에서 우리는 많은 에큐메니칼 노력들이 협력과 상호 관계성의 이름으로 행하고자 시도해 왔던 것처럼 다양한 전통들을 어떤 일반적인 종교 경험들로 해석하고자 시도하는데 대한 불가능한 임무라고 체념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단히 상이한 종교들 혹은 종교적 교리들이 동일하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기독교적 전통과 다른 전통들이 서로 불가공약적이라고 한다면 린드벡이 너무 많은 관심을 가졌던 에큐메니칼 노력들이 실제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그의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회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예일 학파의 "문화-언어적" 세계 안에 있는 "안으로부터"(from within) 경험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비판적으로 대화할 수 있 을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우리의 입장들을 심지어 "번역"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 는 여기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이해하지만, 나는 우리가 시도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반대로 번역에 대항하는 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지 린드벡은 그렇게 하 고 있다. 그것이 왜 그가 그의 책을 저술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것이 내가 그것 을 읽은 이유이다. 그것이 다른 이들은 그 책을 따라 이와 같은 서평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전체 비판적이고 대화적인 과정이 마지막으로 해석학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의 이유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적 관점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궁극적인 관심이 기독교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 속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적합한 시도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다른 전통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합리성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근거한 진리주장을 요구하지 않고도 가장 기독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콤스탁이 지적하듯이,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수정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었던 것처럼 형이상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독교의 정당성에 적용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일의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오히려 포스트모던적 신학적 양태로서 간주될 수 있는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두 번째 비판은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너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의존된 "신앙주의적 딜레마"(fideistic dilemma)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평가들은 신앙주의가 독단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로서 이성의 역할을 배제한 주관주의적인 신앙에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자유주의 신학 속에 나타난 신앙주의에 대한 이해와 비판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신앙주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론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린드벡 자신도 "계시가 철학적이고 경험론적인 고려에 대한 이차적인 사용을 제거함이 없이도 신학적 기획의 모든 점들을 지배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린드벡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이성의 무가치성이 아니라 신앙의 언어(the language of faith)의 우선성이다. 다시 말해, 신앙을 지지하기 위한 이성은 신앙 이전에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 이후에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린드벡은 "신앙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논쟁이 가능하게 된다"는 진술 속에서 누군가가 한번 신앙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논쟁의 형식이 수반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이방인의 개종자를 예를 들면서 아래와 같이 신앙이 이성에 선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방 개종자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먼저 신앙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기독교인이 되 지 않았다. 그 과정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우선 결정하였고, 그런 다음 그들은 이해 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매혹되는 이유들이....그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들이 행동의 새로운 양태들을 실천하였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야기들과 그리스 도 안에 있는 그들의 성취를 배워왔던 오래된 신앙교리문답의 강령(catechetical instruction)에 자기 자신들을 복종시켰다. 그들이 기독교 언어와 삶의 양식을 숙련 한 후에 그들은 지적으로 그리고 책임적으로....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다.

스타이버의 지적대로, 아마도 린드벡의 가장 중요한 제안은 그의 "교리의 규칙이론"(rule theory of doctrine)일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단서를 고려하는 린드벡은 신학적 교리들이 종교언어를 위한 규칙들과 같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린드벡에 있어서 신학이 문법이기 때문에 신학은 "존재론적 진리주장들을 요구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그것보다는 오히려 언어를 정돈하는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가 이차적인 문법인 반면에 성서적 이야기야말로 환원할 수 없는 일차적인 언어, 즉 신앙의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을 제시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진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성서 이야기들이 하나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자료로서 이해하지 하나의 픽션으로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에 근거한 어떤 입증의 원칙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사실적 객관성을 옹호하는 독특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복음주의 진영(evangelical circle)은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신앙주의적 모순성을 지적한다. 특별히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그의 "An Evangelical Eval!uation of Postliberalism"에서 린드벡의 입장이 역사적 근거와는 다른 신앙주의적 열정에서 성서적 이야기나 텍스트를 내적인 정합성(internal consistency)으로 축소한다고 비판한다. 상호체계적 정합성이 한 존경할만한 질적 요소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맥그라스는 현실세계와의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고서도 완전히 정합적인 논리 체계를 갖는 신앙주의가 가능하지만, 성서 이야기들 혹은 텍스트들이 역사적인 증거나 입증에 근거될 때만이 내적 체계의 해석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음주의는....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이야기의 형식(진리를 말하는 것)이나 교리적인 구조틀(한 이야기 는 개념적 형식들로 변형해왔음) 혹은 하나님의 진실성과 신뢰성에 대한 단순한 확 증을 참조한다. 하지만, 진리의 개념은 기독교 언어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언 어의 밖에서도 위치되어야하는 확고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 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분이신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규 칙적이며 그리고 정합적인 이해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즉 기독교적 언어놀이의 근거와 기준으로서 기능하는 외적 체계의 지시대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맥그라스에 동조하고 있는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 신학자인 칼 헨리(Carl Henry)도 신앙주의적 문제와 관련하여 린드벡의 이야기 신학이 성서의 포괄적인 권위에 대해서는 긍정하지만, "이야기 신학의 존재론적 진리와 역사적 실제성(historical factuality)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한한다"는 한 해석학적 모순을 제기한다. 이와 유사하게, 도날드 블레쉬(Donald Bloesch)의 경우에서도 후기자유주의의 이야기 신학은 "진리주장보다는 담론이나 행동의 공동체적인 권위적 규칙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된 언어가 더 현저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모든 인간들이 진리와 참이라고 주장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요구하고 있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해명보다는 한 특정한 종교적 전통의 현 상학적 성격이다.... 만일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면, 절대적 진리에 대한 어떠한 주 장도 종족조직주의, 자민족중심주의 혹은 근본주의의 표현으로서 포기해야만 한다. 다원주의 그 자체는 경쟁적 [절대자]들을 용인할 수 없는 한 새로운 절대가 된다.

하지만 린드벡은 우리의 신학 혹은 신학적 교리들 및 진술들이 참이냐 오류냐 하는 판단의 기준을 갖는 규칙을 의미하지 않으며,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양식(form of life)에 근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판단, 정의, 행동까지도 이미 삶의 양식 속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나 궁극적 실재와 같은 "지시대상"과 지시대상에 관한 이야기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비판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시대상이 우리의 신념, 행동, 판단과 같은 삶의 양식에 의존한 것인지 아닌지는 구획해야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진영에서의 비판의 제한성은 여전히 진리의 환원성의 전통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여전히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이냐 하는 인식론적 차원에로 환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당하는 오류는 신학이 언제나 옳고 그름의 판단의 "인식적-명제적" 기준에서만 후기자유주의 사상을 논박해야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후기자유주의 사상을 괴롭히는 결정적인 문제가 진리의 인식론적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라고 본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신념들과 교리들, 혹은 신학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 신념이 결국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결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적 경험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우리는 누구나 경험하지만 그 경험된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경험된 내용이나 해석에 대해 문제 삼는다. 우리는 앞에서 자유주의 혹은 계몽주의의 유산인 합리성과 보편성의 기준에 충족되는 정초주의적 인식론을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논의해왔다. 실제로, 어떤 공동체이든지 그 공동체는 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 공동체의 삶의 양식에 따라서 진리, 판단, 정의, 행동, 그리고 심지어 진리까지도 결정하는 규칙들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의 규칙들이 우리의 삶의 행동과 실천을 규정한다고 한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신앙주의적 입장은 오히려 해석의 새로운 지평이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자유주의 신학에서의 해석적 한계는 언어의 선재성 혹은 텍스트의 내재성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경험구조를 경시했다는 데 있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에 서 있는 테렌스 틸레이(Terrence Tilley)조차도 성서적 텍스트가 그 자체에 의해 어떤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항하면서 텍스트 속에 이미 삶의 양식의 보다 광범위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나 해석자의 공헌이 없이는 어떤 세계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과 "내적-텍스트성"(intratextuality)의 이분법적 이해구조를 설정하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전제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해석학이 텍스트, 전통, 혹은 경험에 대한 "이해의 기술"로서 인식되어져 왔다면, 필자는 이야기의 일차적 언어에 대한 예일 학파의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강조점은 틸레이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순수한 내면적 텍스트"(pure intratextuality)가 아니라 "혼합된 내면적 텍스트"(impure intratextuality)로 전환해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것은 언어와 경험의 일차적 혹은 이차적인 의미로 양분해야하는 문제이기보다는 상호 변증법적인 의미 문제이다. 따라서 린드벡의 이야기 신학의 한계는 언어가 경험을 형성한다든지 아니면 경험이 언어를 결정한다든지 하는 해석의 우열성을 구분하는 쟁점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언어와 경험의 개념들이 진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본질들이 아니라 진리를 설정하는 충분조건들이라고 한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에 나타난 해석의 결정적인 제한성은 다름 아닌 텍스트의 "전유성"(appropriation)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언어는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세계의 경험은 언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면,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은 언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언어 그 자체가 세계를 결정한다는 해석만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실제적으로, "성서 이야기" 혹은 "공동 인간경험"이든지 간에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어떤 "우열"을 가리고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기독교의 "자기-이해"의 문제이다. 기독교 신학이 자기-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통들간의 삶의 양식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며, 그리고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학은 다른 신학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독특한 신학의 양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이나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증거하는 일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텍스트, 성경, 교리(물론 이차적인 언어이지만)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성서적 이야기 속에 포함시킬 수는 있지만 성서적 이야기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대적인 규범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그러한 기준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린드벡은 삶의 양식인 신앙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가볍게 처리한 사실은 이러한 공동체의 자기-이해보다는 자기 변호적인 성격이라는데 있다. 누구나 공동체는 자기에게 맞게끔 해석하고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해가 전이해의 연속적인 과정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의 이야기 혹은 성서적 이야기도 하나의 해석이며 재구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진술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마이클 폴라니의 용어를 빌리면, 이야기 속에 있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함축성을 배제하는 이러한 해석은 신앙 공동체의 속에 있는 의미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해석이 된다. 이야기들은 이해하고자 하는 주체와 이해의 대상간의 엄밀한 분리나 상이한 유형의 언어놀이들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상호 의존적이고 통합된 개념이다. 이미 언어 속에 신앙인들의 개별적인 경험적 복잡 구조와 의미들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석은 언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언어에 의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통찰력은 높이 평가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석의 전체적인 행위가 경험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를 이중적으로 폭로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기-계시나 성서 텍스트의 보다 타당하고 온전한 해석을 위해서는 언제나 언어와 경험의 이중적인 충분조건들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V. 나오는 말

우리는 이제까지 린드벡과 다른 이야기 신학자들을 통해서 나타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특징들을 이해해보고자 시도했으며, 그리고 다른 신학적 전통들에 의해서 제기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우선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 신학의 세 가지 주요한 특징들을 열거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반정초주의적 인식론적 입장에 서 있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진리를 위한 타당한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정초주의의 인식론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둘째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세계의 경험보다는 언어의 선재성 혹은 텍스트 내재성을 우위에 위치시킨다. 즉 텍스트 혹은 언어밖에는 아무런 실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를 만들고 형성하는 것이지 세계가 언어를 만들거나 형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텍스트-상호성보다는 오히려 텍스트 내재성을 옹호한다. 셋째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종교, 문화, 언어와 같은 이론들이 불가공약적이라는 것이다. 한 이론이 다른 이론과 비교할 수 없으며, 번역 불가능하다. 한 이론이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만 정당성을 지닌다는 불가공약성의 개념에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서술할 수 있다.
이러한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적 근거들 위에서 우리는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해석적 한계들을 검토하고 비판했다. 가장 두드러진 해석적 한계는 경험과 언어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린드벡의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언어를 일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경험을 이차적인 것으로 양분하고 우열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러한 해석학적 한계성을 바로 잡고 우리의 이해의 지평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고자 경험과 언어의 지평들을 향해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게다가,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교리들을 다른 언어의 문법적 범주 및 규칙들을 사용하여 설명하려고 들지 않고 자신의 체계 내부적 용어들을 서술하고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의 지평에서 지시대상을 제한시킨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 또한 지시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객관적 실재가 우리의 인식적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학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비록 다양한 언어들이나 언어놀이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대응이라는 사실을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의 지평과 언어의 지평이 확장되면 될수록 객관적 실재의 이해와 그 실재가 드러나는 신앙 공동체의 삶의 양식이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 속에서 노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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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rmeneutical Limits of Postliberal Theology

Chung, Seong Tae
Assistant Professor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
Taejeon, Korea

Narrative Theology, as articulated by the so-called Yale School, has generated lively discussions across the Anglo-American theological spectrum. Unlike the near incommensurable stances between traditional conservatives and liberals, the narrative or postliberal approach touches on issues that concern both the right and the left. Hans Frei is widely considered to be the goundbreaker for the development of postliberal theology. He points out that from Augustine up until Reformation, Christian interpretation had typically adhered to typological method. This method gave priority to the biblical narrative through which subsequent events were interpreted. The biblical narrative acted as a lens through which the interpreter saw the whole of extrabiblical reality. Following Frei, Goerge Lindbeck developed the postliberal theology in its full length.
In this article, there are three typical characteristics of postliberal theology. First, the Yale School is characterized by the rejection of foundational epistemology. The postliberal insistence on intrabiblical theology stems from an antifoundational stance and a Wittgenstein emphasis on the priority of language. For Lindbeck, an antifoundational theology is a "descriptive theology" in which justifications are holistic rather than foundational. Second, the postliberal theology should be "intratexual," rather than inertextual, that is, inhabiting the texts' own semiotic world. Intratextual theology redescribes reality within a scriptural framework rather than translating Scripture into extrascriptural categories. Third, the postliberal theology can be characterized by the notion of incommensurability which offers no common framework with which to compare religions, cultures, or theories. Acknowledging the possibility of incommensurability between different religions, cultures, or philosophies, Lindbeck strongly rejects the propositional truths in which the universal revelation is described in experiential terms.
In particular, this article criticizes two the most serious charges against Lindbeck and his postliberal theology: relativism of truth and fideism of meaning. But these criticisms are superficial and typical in judging the hermeneutical problems of postliberal theology. What this article argued is that since the foundational enterprise cannot provide the a universal and rational criterion of what is right and wrong, the postliberal theology, which antifoundational epistemology, detaches from the "Cartesian Anxiety" in theology which we can appeal in order to decide what is logical and rational and what is not. Also this article attempts to show that the problem of fideistic or confessional dilemma is based upon the notion of "form of life" rather than a matter of subjectivist and blind faith.
Nevertheless, the postliberal theology cannot be freed from the limits of prioritization between language that is first order, and experience that is second order, and the vagueness of the referent which implies the Ultimate reality or God. Despite the limits of postliberal narrative theology, since the postliberal theology in the post-Enlightenment era which subjugates the Bible to extrabiblical thought stems from the confusion of the literal, realistic meaning of the biblical narratives which their reference to actual, historical events, the postliberal theology of Yale School can offer the hermeneutical possibility for the new understanding of texts, experience, and the world.

출처 :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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