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교 회 론

하나님아들 2021. 10. 1. 09:24

 교  회  론

 

1.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

2. 교회의 기초

   A. 말씀과 성례전

   B. 성령의 역사

   C. 인간의 믿음

   D. 이스라엘 민족의 “ 약속의 역사”

   E. 궁극적 기초 : 예수 그리스도

   F.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인가 ?

   G.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란 무엇을 말하는가 ?

3. 교회란 무엇인가 ?

   A. 에클레시아

   B. 하나님의 백성

   C. 그리스도의 몸

   D. 성령의 전

   E. 하나님 나라의 표징

4.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A.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

   B.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

   C.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카리스마적 공동체

   D.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E.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F.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 형태

   G. 기초 공동체의 이상

5. 사도 계승과 교회 제도의 문제

   A. 사도 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B. 사도 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C. 개신교의 교회관과 교회 제도의 갈등

   D. 근대에 있어 개인과 제도의 분열

   E. 제도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토의

   F. 교회 제도의 정당성

   G. 교직의 필요성

   H. 교직자와 교회의 공동체의 관계

   I. 교직의 본질

6. 특별사제직과 만인사제직

   A. 특별사제직을 폐기하는 예수의 죽음

   B. 히브리서의 사제직 폐기

   C.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D. 여자 사제직(목사직)의 문제

7. 참 교회의 표지

   A. 표지의 기능과 성격

   B. 전통적 네 표지와 종교개혁의 두 표지

   C. 자유와 다양성과 실천 안에서의 통일성

   D. 당파성 안에 있는 보편성

   E.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거룩성

   F. 사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사도성

   G. 하나님 나라의 표징

8. 관계 속에 있는 교회

   A. 이스라엘과 교회

   B. 타종교와 교회

   C. 국가와 교회

   D. 현대 사회와 교회

 

 

교 회 론

 

1.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에클레시아”는 본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뜻으로서, 사람들을 통해서 구성되는 회중을 뜻한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이 개념이 “하나님의” 혹은 “그리스도의”라는 소유격과 결합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구약성서의 “카할”의 개념에 상응하며 이 개념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영을 따른 이스라엘”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된 교회는 교직 기구로서의 제도 교회가 아니었다. 제도 교회로서 발전하는 현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과 동시에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도 계승이 나타났다. 사도 계승을 통하여 제도 교회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을 통해서 제도 교회의 이론이 거의 완성되었다.

 

칼타고의 씨프리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이를 표현했다. 주후 4세기에 이르러서 교회는 로마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 교직자들은 로마의 국가 공무원이 된 것이다. 니케아 신앙고백에서 교회는 교회의 네 가지 표식 곧 “단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 적인 교회”를 고백하였다. 이 표식은 이후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계급 제도로 형성된 구원의 기관이다. 그는 외형적인 가시적 교회와 그 속에 숨어 있는 참된 교회 곧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참 교회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이다. 1054년 filioque의 문제로 인하여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로 분열한다.

 

그 이후 동방 교회는 제의 종교로 발전한 반면, 서방 교회는 법적 성격을 가진 “구원의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서방의 교회는 아우구스틴의 예상을 벗어나 소위 교황주의라는 권한의 교회로 중세를 지배한다. 교황 보니파스 8세에 의하면 세속적인 검과 정신적인 검은 둘 다 교황에게 속한다. 종교개혁은 교회론을 반전시킨다.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만이 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조직이나 기구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적 사귐 내지 교통이다. 정신적 교회는 “ 성도들과 참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이후 종교개혁 신학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대변적 교회 2. 종합적 교회 1)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참으로 신앙하는 자들과 거룩한 자들의 모임 2) 가시적 교회 혹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그것이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 의하면 이 두 교회는  두 가지가 아니라 교회의 두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회중교회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개교회는 그 위의 통치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독립적인 회중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근대 구라파의 경건주의는 전통적인 국가 교회를 비판적으로 대했다. 이 비판적 태도는 계몽주의에 와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참 신앙은 교리에 묶인 것이 아니라 자율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의 신앙인 것이다. 제도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계속된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교회는 종교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귐이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비조직적인 모임이다. 리츨에 의하면, 교회는 정신적, 윤리적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활동이 계속되는 장소이지, 법적 질서와 권위를 가진 기관이 아니다.

 

바르먼 신학 선언에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형제들의 공동체로 정의된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제도 주의와 전통주의를 반대하고 교회의 영적, 카리스마적 성격과 사건의 성격을 강조한다. 1948년 결성된 WCC는 교회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주안점은 1.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의 일치성을 분명히 의식케 했고 2. 제3세계의 교회에 대하여 눈을 뜨게 했고 3.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실천과 신학적 사유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였다. 그러나 최근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타 종교들의 형식을 수용하는 방향을 취함으로서 혼합 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는 드센 비판을 받고 있다.

 

2. 교회의 기초

 

A. 말씀과 성례전

아욱부르크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의 기초는 복음의 말씀과 성례전이라 말할 수 있다. 말씀과 성례전 가운데 교회의 보다 저 본질적 기초는 말씀이라 말할 수 있다. 말씀 없는 성례전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탄생하여 말씀에 의하여 양육되고 유지되고 성장한다. 루터는 이를 계승하여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과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은 말씀에 있으며, 교회의 사명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성례전을 동반하는 말씀인 것이다.

 

B. 성령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성령의 역사 내지 활동에 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활동함으로써... 공동체, 참된 교회가 생성하고 존재한다. 성령이 사람들과 그들의 인간적 사역을 거룩하게 하며,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참 교회로 세우시기 때문에 교회는 존속한다.”

 

C. 인간의 믿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응답하는 인간의 믿음도 교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한 요소라 말할 수 있다. 단독 자의 믿음은 철저히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있음, 함께 나눔, 곧 공동체적인 삶을 뜻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유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없는 개인의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신앙적 결단과 그 결과로 얻은 그의 믿음은 성령의 사역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다 원초적 기초는 개인의 결단과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D. 이스라엘 민족의 “약속의 역사”

옛 계약은 그리스도의 새 계약을 통해서 지양되며, 구약성서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지양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들은 새 계약과 새 계시의 역사적 터전 내지 기초를 형성한다. 옛 계약과 새 계약, 구약성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계시, 이스라엘과 교회,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으나 연속성도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희망의 지평을 지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망의 지평 속에서 태어나 활동하였으며, 그의 교회는 이 희망을 함께 나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약속도 교회의 기초 내지 터전을 형성한다. 팔레스틴 땅에서 시작한 교회는 아무런 역사적 관련성 없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의 역사적 연관 속에서 형성되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는 참 희망은 온 창조를 지향하며,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과 행위의 목적과 완성을 지향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E. 궁극적 기초 :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교회의 기초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를 그 위에 세울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닦아 두셨고 이 기초 곧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베소서 2:20-22의 말씀은 교회는 먼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기초한다. 그러나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교회의 궁극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에서 교회론의 시작을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의 내용을 결정한다. 네 가지 기초는 교회의 궁극적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통합된다. 선포된 말씀은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으로서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기초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기초로 간주될 수 있다. 교회를 형성하는 성령의 역사도 성령 그 자체는 내용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성령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인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증거하고, 자기를 현재화시키며, 자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나누어주며 공동체를 형성한다.

교회는 다른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각 사람의 신앙적 결단과 믿음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본훼퍼의 명제,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이다”라는 칼 바르트의 명제는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 내지 근거가 무엇이며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함께 교회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궁극적인 기초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F.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기초인가 ?

역사의 예수가 교회를 세웠던가 ?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었던가 ? 최근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학자들은 예수가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16:18-19를 성서적인 근거로 본다. 그러나 콜첼만은 “예수의 종말론적 자기 의식은 오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배제한다”고 잘라 말한다. 위의 구절이 오늘날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보여지고 있다.

    1) 통계학적 논증 : 교회에 대한 두 번의 언급, 마태복음에만 기록, 이것은 매우 불리한 통계학적 수치인 것이다.

    2) 종말론적 논증 : 복음서의 예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는 교회를 형성하여 그것을 존속케 할 의도를 보이지 않는다. 요한네스 바이스는 이 구절을 “형성되어 가는 카톨릭 교회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3) 교회사적 논증 : 베드로는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방 선교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사람은 바울이다.

    4) 심리학적 논증 : 베드로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완전한 특성을 가졌다 그런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네 가지 외에도 최근 초대 교회의 연구에서 초대 교회에는 유대파와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16: 18-19는 바울 계열의 공동체와 긴장 및 대립 관계에 있었던 베드로 계열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의 법통과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관심에서 첨부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관심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에벨링 교수의 말대로 “교회의 설립자”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초”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복음서의 구절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사건 전체와 관련하여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삶의 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특별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고 먼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며 온 우주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에 대한 예수의 의지”에 있다.

    2) 온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던 예수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세워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보장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부르고 제자들은 따르는 여기에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가 있는 것이다.

    3) 예수의 죽음과 함께 깨어졌던 종말론적 공동체는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다. 새 인간성의 공동체는 그의 부활로 증명되며 교회의 기초는 여기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정초 되고 부활의 능력 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부활의 능력 속에서 실현되는 교회는 “십자가의 공동체”,“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하여 정초된 공동체”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자신을 십자가로부터의 교회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로, 그리고 십자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있는 교회로 이해한다.” 교회는 철저히 십자가의 교회인 것이다.

 

G.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란 무엇을 말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 내지 근거라는 이 명제는 교회의 존재와 삶과 미래를 결정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를 의미한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3) 교회는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한 마음 한뜻이 되고자 노력하고 그 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4)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이시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명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배타적 통치권을 뜻한다.

    5) 교회의 삶과 실천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함을 뜻한다. 기초는 규범의 기능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진위성을 검증하고 판단하는 규범이다. 이것은 교회는 예수의 삶에 비추어 언제나 자기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자기를 수정하고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6)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한 유대인으로 구약의 지평 속에서 생존하고 활동했다. 특히 묵시 사상의 지평 속에서 생존하고 활동했다. 이것은 교회도 구약의 메시야적 기다림과 희망의 지평 속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뜻한다.

 교회론이 그리스도론적 정초를 하는 의미는 교회의 존재와 삶과 미래는 철저히 그리스도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교회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분의 삶이 교회의 삶을 규정하고, 그 분의 관심이 교회의 관심을 규정하고, 그 분의 목적이 교회의 목적을 규정하며, 그 분의 교회가 미래를 규정한다.

 

3. 교회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의 교회를 표현하는 개념들을 분석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A.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는 교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본 단어이다.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1)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인 70인역은 ‘에클레시아“를 100번 사용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 세속적 의미의 모임, 모인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하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계약의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의미가 드러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2) 에클레시아는 신약성서에서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때는 본래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사자가 불러내어 모인 시민들을 가리킨다. 즉 EKKALEIN과 EKKLETOS로 결합된 어원으로부터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 안으로 파송을 받는 구조를 가진다. 즉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세상 안으로의 파송”의 긴장 관계가 있는 것이다.

    3)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합적으로 볼 때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인 동시에 신도들의 모임이요, 오직 하나님의 기관인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사귐이다.

    4)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를 “회상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기다리는 공동체”인 것이다.

    5) 에클레시아는 모여 있는 공동체를 뜻하는 동시에 모임의 사건 내지 과정을 뜻한다.

    6) 이 단어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단어는 가정 예배를 의미하기도 하고 한 지역의 예배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게 모든 교회들의 범 세계적 모임과 사귐을 가르키기도 한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다양성을 가진 개 교회로 나타나는 동시에 전체로서 한 교회인 것이다.

 

B.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는 구약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공동체 역시 유대인들의 민족 공동체와 여러가지 면에서 결합되어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구분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형식을 몇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회개의 죄의 용서의 표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며, 세례는 장차 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이 세례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옛 이스라엘로부터 구분되었다.

    2) 이들은 공동의 예배와 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옛 이스라엘과 구분된다.

    3) 예수가 거행한 성만찬은 회상의 만찬인 동시에 기다림의 만찬으로서 실행되었는데 이 만찬이 구분되는 예식이다.

    4)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 자신의 조직과 운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5) 최초 공동체의 사랑의 교통과 사귐은 그들을 구분해 주었다.

그러나 완전한 유대인 공동체와의 구분은 모세의 율법을 벗어난 자유로운 이방인교회의 설립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성전제의의 중단 사건을 계기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의 세력이 더 커진 사건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차 반 로마혁명을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옛 이스라엘로부터 공적으로 분리되고 (기독교인들은 불가담) 제2차 반로마 혁명에서 완전한 분리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을 하나님의 참 “에클레시아”, 참 “이스라엘”,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 하였다. 70인역과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백성” 곧 LAOS는 히브리어 AM에 해당하며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가르킨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개념은 에클레시아의 자기 이해를 묘사하는 가장 오래된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과 같은 개념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교가 육체의 혈통을 중시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의가 그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히브리서의 주요한 사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유리하는 이스라엘은 새 계약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형으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 위에 있는 나그네요 손님이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찾아 순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

    1) 이 명제는 교회는 모든 인종적 구별을 넘어서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가족”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민족적, 국가적, 지역적, 성적 제한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제적 하나님의 백성”이다.

    2)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3)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실체로 생각될 수 없다.

    4)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성을 가지며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숨어 있는 메시야적 희망과 기다림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한다.

    5) 교회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교회는 오류와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6) 교회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에 따라 예언자적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 곧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회개를 요구한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전하며 왕적인 백성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섬긴다.

    7)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라고 불리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루비” 즉 “법적 보호 영역 박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회에서도 ”하루비“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

    8)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궁극 목적”이 아니고 그것의 시작이요 매개체 됨을 말한다.

 

C.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

    1) 교회는 지교회인 동시에 세계교회라는 것을 말한다.

    2)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통일성을 말한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내적 결합과 통일성을 가르킨다.

    3)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교회가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형성되어야 함을 말한다.

    4)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의 한 몸 됨과 통일성을 말하는 동시에 그들의 다양성을 말한다.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지체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용이 서로를 향하여 필요하다.

    5) 이 명제는 모든 교인들과 교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은 주후 3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6) 이 명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된 관계를 나타낸다.

    7)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실 뿐 아니라 교회로서 실존한다. 그는 교회 안에, 교회로서 실존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 형식”이다.

    8)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배타적 소속성과 구분성을 내포한다. 이것은 교회가 철저히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의미하며 교회는 일종의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임을 드러낸다.

    9)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은 “신체적인 실존,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포괄되어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D. 성령의 전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명제는 다음을 의미한다.

    1) 이 명제는 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것은 말한다.

    2) 예수의 삶은 성령과 함께, 성령 가운데서 시작한다. 성령 가운데서 그의 아버지와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가 수행한 일을 교회가 계승해야 하며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 신약성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성령의 전의 “기초”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머릿돌 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4) 궁극적으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는 “돌들”로 구성되는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는 성직자들의 소유가 아니고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5)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그것은 각 지체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카리스마 곧 은사와 이 은사에 따라 각자가 행하는 봉사를 통하여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은사를 성직자 계층으로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은사 즉 카르스마를 가지고 있다.

    6) “카리스마적 공동체”인 교회의 구조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교회는 각자가 그 분량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2) 교회의 통일성과 질서는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3) 어떤 사람도 자기를 다른 사람 위에 세울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에게 예속시키고 지배할 수 없다.

     (4)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므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7)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전이 교회이지만 성령은 교회로부터 구분되며 교회에 대하여 자유롭다. 이것은 성령이 언제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가 성령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말하며 성령의 활동 영역도 성령 자신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떻게의 문제도 성령 자신의 것이다.

    8) 기존하는 제도교회와 카리스마적 공동체의 관계는 제도교회가 폐지 되어야 함을 뜻하지 않으며 제도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일어날 수 있는 “형식과 가능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그 속에 일어나는 “연속적인 것”이다.

    9) 바울의 성령론적 교회론 내지 카리스마적 공동체 이론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의식”에 근거하며, “성령의 능력에 대한 경험에서” 발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의 전망 속에서” 전개된다.

 

E. 하나님 나라의 표징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선포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이다. 제자들은 그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나타나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공동체는 흩어져 버리고 부활의 증명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던 예수가 이제 선포의 대상이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주권이 있는 그 곳에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미래 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데전2:12,데후1:5) 이와 동시에 그것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와 사도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통하여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당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통하여 생성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이지만 “전단계”는 아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이 세계에 선사되는 하나님의 은사인 동시에 과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과제를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자요 전령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에 있어서 몇 가지로 유의해야 한다.  첫째, 복음서의 예수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 같이 교회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회와 세계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둘째,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계 안이며 세속 안에서 세속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교회는 예수의 선포가 죄의 용서와 개인의 회개를 포함하듯이 사회 개혁이 전부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 가지 가야 함을 말하여야 한다. 넷째, 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죄인에 대한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사회의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교회,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선포한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4.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전통적인 입장은 교회는 교직자가 있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개신됴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내지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A.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성도들의 사귐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사귐인 동시에 성도들 위에 있고 그들 이전에 세워진 제도적 기구 내지는 교직기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인을 매개하는 매개체이다. 최근의 가톨릭 교회는 “원성례전”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것은 구원을 중재하는 교직 기구로서의 교회가 성도의 사귐보다 앞선다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중재하는 교회의 기능은 1. 성례전을 통하여 수행되며 2.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행되고 3. 교인들의 공동체의 삶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조정하며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한계를 명시하는 법적 통치를 통하여 수행된다. 그러므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엄격한 입장을 수정하고 교회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교회의 교직기구는 사도 계승의 표이며 교직기구는 주교, 사제, 복제의 세 계급으로 구성되며 성례전, 사법권, 교리권을 가진다. 교리권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은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회이다. 교회의 이 모든 권한은 로마주교의 “베드로 직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교회관의 핵심을 포기하지 않으나 몇 가지 면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첫째, 교회를 단순히 교직자들의 교직기구로 보지 않고 교직자와 평신도와의 사귐으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둘째, 지배체제적인 기관으로서 교직은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 사귐을 위한 봉사를 한다고 보고 교황도 전체 주교들과의 사귐 속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여야한다고 지적한다. 셋째로, 로마로부터 분리한 모든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그들도 구원에 참여한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B.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 제7장에 기록된 진술에 기초한다 : “교회는 복음이 그 속에서 순수히 설교되며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참된 하나 됨을 위하여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동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가서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루터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내지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교회를 철저히 성도들의 사귐 혹은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 공동체 위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도들을 중재하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 그리고 복음에 일치하여 베풀어지는 성례전이다. 복음선포와 성례전은 교직자들에 의해서 집행되나 여기서 그들은 주체가 아니라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교직기구는 신적질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적 지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직기구의 개념이나 사도계승을 반대한다. 교직기구는 단순히 교회의 삶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봉사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교직기구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는 통일된 것은 아니다. 각 교단마다 차이를 가지고 있다.

 

C.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커리스마적 공동체 -

신약성서에서는 단 하나의 완결된 교회의 질서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나타난다. 교회는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이 은사는 사적은사와 공적은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최초의 공동체는 이러한 은사들을 받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교회가 더 확장되면서 사목과 치리의 은사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사목과 치리를 담당하는 공적인 칭호 가운데 감독 및 집사의 직분과 장로의 직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직분은 법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은사가 직분의 권위를 세운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는 지배체제적 감독 제도를 발견할 수 없다.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장로 제도도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감독 제도와 장로 제도는 하나로 결합되는 현상이 신약성서에 나타난다. 즉 동일 인물이 장로로도 감독으로도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가 더 제도화되면서 장로 제도는 사라지고 감독 제도가 교회의 유일한 제도로 등장한다. 결국 감독들은 사도들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교직자와 평신도의 분리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수의 감독들은 단 한 사람의 감독으로 집약되기 시작한다. 이때 주교-장로직-집사의 세 계급으로된 지배체제가 발견된다. 이것이 사도계승을 주장하는 주교직의 승계로 이어진다. 물론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최초의 카리스마적 공동체와 주교를 중심으로한 교직기구로서의 공동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1. 두 공동체는 사도들의 원초적 증언과 원초적 파송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2. 복음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3. 그들의 봉사를 카리스마적 봉사로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4. 모든 봉사가 모든 신자들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에서는 1. 어떠한 군주적 감독직도 확정될 수 없다. 2. 어떠한 장로직도 확정될 수 없다. 3. 어떠한 교직자 임직식도 확정될 수 없다. 케제만 교수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교직기구로 표현될 수있는 기술적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적 공동체로서 교직자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스린다. 교직자들의 지배체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삶이라는 전체에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

 

D.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래 교회는 자유로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질서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를 “성도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도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통하여 근거되기도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제직 혹은 만인 제사직으로부터 근거될 수도 있다. Communio sanctorum이란 개념은 1. 인격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람의 사귐”을 뜻할 수도 있고 2. 성례전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물들의 사귐”을 뜻하기도 한다. 이 두개념은 결합되어 폭 넓게 이해된다. 1. 먼저 인격적 개념으로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사귐을 의미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간의 사귐을 의미한다. 2. 성례전적으로 이해되어 성례전 안에 임재하는 그리스도 자신에의 참여를 뜻한다. 이 집단은 폐쇄적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평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또 그것을 확장시키는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라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사귐을 뜻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귐을 가졌던 사람들 곧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사귐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E.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성도의 공동체” 내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는 “형제자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침구들의 사귐” 내지 “친구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는 평등과 신뢰와 자유가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F.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형태

교회 속에는 “아무런 지배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으며 아무런 지도의 요구도 없고 특권을 가진 직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없는 사귐”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가 되자 계급화된 것이다. “통일성의 지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모습에 어긋난다.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공동체는 최고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체제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우리 나라의 종신직 장로제도도 이 공동체의 모습에 비하면 어긋난 교회의 모습이다. 남자들만 장로, 목사가 되는 것도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어긋난다. 기독교 공동체가 이 사회에 제시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기능의 차이는 있지만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없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질서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 있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카리스마적 공동체”는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사회적 삼위일체”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G. 기초공동체의 이상

교회를 지배체제로 보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로 보는 개신교의 교회관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초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새롭게 실현될 수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기초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이상을 가진다.

    1) 기초공동체는 “공동의 삶”을 그 이상으로 가진다. 이 공동체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공간에 모이지 않고 가정이나 아니면 일반 세속적인 공간에 모여 말씀과 식탁의 사귐을 나눈다.

    2) 기초공동체는 물질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다. 성령은 인간을 소유욕으로부터 해방하여 베푸는 사람으로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은 여기서 먼저 실천되고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라는 본훼퍼의 명제가 구체적으로 체험된다.

    3) 기초공동체는 힘없고 가난한 작은 형제들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있는 공동체이다.

    4) 기초공동체는 소유 지향적 공동체가 아니라 봉사 지향적 공동체이다.

    5) 기초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베푸는 교회,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청빈한 교회,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 타자를 위한 공동체이다.

    6) 기초공동체는 비제도적, 비교권적 공동체이다. 평신도의 예배인도와 설교가 있다.

기초공동체도 나름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상은 기존의 교회 속에서 독립성과 자치권이 보장될 때 보다 성공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5. 사도계승과 교회 제도의 문제

 

A. 사도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사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은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변화는 있으나 고수되고 있는 것은 “사목적 내지 지배체제적 사제직”이라는 사도계승의 입장이다. 사도계승은 마 16:18-19을 기초로 한 신학적 입장으로 전통적 교회관의 본질이다. 이것은 주교직의 사도직 연장과 주교들의 법적 정당성과 존립 근거이며 평신도와의 구분점이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교회의 모든 권한의 승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주교들의 지배체제를 뜻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의 계승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사도계승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1) 부활의 주님이 가지신 사건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며 목격자인 제자들의 존재는 이후에 오는 주교들과 사제들과의 분명한 구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포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승될 수 있으나 목격자적 존재는 계승될 수 없다. 사도들이 죽은 다음에 남은 것은 사도직이 아니라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이다.

    2) 제자들의 권한을 승계 받았다고 하는 주교들이 사도들에 의하여 직접 세워진 사도들의 후계자들이었다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3) 주교 서품식에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자동으로 전이된다는 사고는 성령의 오심을 인간이 결정하거나 강요하는 행위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사도계승은 불가능하다. 복음의 진리는 머리에 손을 얻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물건처럼 보장되거나 전수될 수는 없는 것이다.

 

B. 사도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우리는 사도계승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하고자하는 것이고 사도적 전통을 지키고자 한다. 도한 사도들과 교회의 사귐과 연속성을 말하고자 한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정통성을 말하고 교회의 내적, 우주적 통일성을 지키고자한다. 우리는 사도계승의 숨은 동기에는 동의 할 수 있으나 사도계승의 방법에는 동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사도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르게 선포함으로 이루너진다. 그리고 사도들의 뒤를 따름으로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 사도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계승은 또한 사도들이 물려 준 성례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도계승은 단지 주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세우는 공동체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 사도계승은 단순히 교회의 여갓적 삶과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C. 개신교의 교회관과 교회 제도의 갈등

제도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며 개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이러한 제도는 개신교의 기본 교회관과 상응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교회관은 교회를 그 본질에 있어서 제도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성도들의 사귐 내지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것은 교직자가 주체가 되는 제도적 기구나 제도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요, ”친구들의 사귐“이며 ”식탁 공동체“이다. 소위 ”사도계승“은 교직자에게 제한되지 않고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하나의 객관적 제도와 기구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칭하여 서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와 ”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D. 근대에 있어 개인과 제도의 분열

전통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대표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급격히 권위는 약화되었다. 인간이 자기의 주체적 존재를 의식하게 되자, 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제도는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헤겔은 근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문제를 간파하고 개인과 사회적 제도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는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 되기 위해서 개인의 주체적 자유는 사회적 삶의 객관적 형태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개인이 사회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개방하고 사회적 제도는 개인에게 창조적 활동 영역을 열어 줄 때, 개인과 제도는 중재될 수 있다는 것이다.

 

E. 제도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토의

엘런에 의하면 인간의 결핍의 존재이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제도는 이러한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방향과 확실성을 부여함으로 그의 짐을 덜어 주는 기능을 가진다. 개인은 이 제도를 따름으로서 그 자신의 규정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완전히 자신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는 사회적 제도가 있는지, 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완전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에 대하여는 게엘런은 회의적이다. 쉘스키는 근대사회의 제도들은 개인의 욕구에 대하여 제도적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루만은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들에 있어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확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하여 이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도르노 등 프랑크프르트 학파는 제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제도는 억압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벨거와 룩크만은 개인과 사회가 중재되는 단계를 3단계로 보았다. 1. 외화 내지 소외의 단계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삶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의 자기 드러냄은 사회적 삶의 형식을 만들고 제도화 현상을 일으킨다. 2. 이 제도들의 세월을 지난 전승을 통해 객체화가 일어난다. 3. 개인들은 제반 제도로 구성된 그들의 삶의 세계와 사회적 현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내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F. 교회 제도의 정당성

오늘날 교회의 제도가 제도로서 그 필요성을 토의하게 되는 이유는 교회도 엄연한 제도이고 오늘날 신학이 교회를 교직기구가 아닌 공동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예수가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는 종래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제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의미와 타당성 내지 정당성은 과연 무엇일까 ?

    1) 교회의 궁극적인 근거는 소위 교회를 세우라는 예수의 명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뒤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제도가 아니다. 성도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삶을 따르며 이를 통하여 예수에게 근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사회 속에서 신빙성 있게 제시하는 한에서 하나의 제도로 존립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진다.

    2)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성령 가운데 일어나는 예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있다. 교회가 제도로서 존재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즉 교회의 제도는 예수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한에서 존립의 의미와 정당성을 가진다.

    3) 교회는 개인과 사회적 체계들의 불완전성과 잠정성을 드러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그들을 개방하는 한에서 존속할 의미와 타당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워 나가는 것이 교회의 제도와 모든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

    4)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자유와 자발적인 섬김이 있다. 이 공동체가 반드시 제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제도는 공동체의 자유와 자발적 봉사와 섬김을 가능케 하는 틀과 기반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즉 봉사 기관으로서 교회의 제도는 정당성을 가진다.

 

G. 교직의 필요성

교회제도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직제도 곧 공동체의 인도와 치리를 전문 직업으로 하는 교직자 제도이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의 과제와 사명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전문인력을 필요로 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가 필요한 몇 가지 이유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1)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순수히 지켜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교직이 필요하다.

    2) 공동체는 예배와 성례전의 효과적인 집행, 성도들의 친교, 교회교육, 교회행정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선교적 봉사활동을 위하여 오늘날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쌓은 교직자를 필요로 한다.

    3) 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지도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며,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교직자가 필요하다.

    4) 오늘날 교회가 담당하여야 할 과제는 과거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심각하며 범 세계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이 문제들에 대하여 범교회적, 또 범 세계적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곧 교직이 필요하다.

H. 교직자와 교회 공동체의 관계

우리는 교직자와 평신도가 서로 권위 다툼을 하는 실정에서 우리는 평신도, 교직과 교회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

    1) 공동체의 대리자로서의 교직자라는 의미는 교회공동체의 위임을 통해서 있게 된 봉사직임을 의미한다. 목사는 봉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MINISTERIUM에서 유래한다. 그는 공동체를 위하여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 부터 세워진 것이다. 공동체가 먼저냐 교직이 먼저냐는 양자가 동시에 함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생성되는 교직은 분명히 공동체의 부름과 위탁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직자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공동체를 통해서” 집행된다.

    2)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직자의 권위는 교직이 공동체의 부름과 위임을 통하여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은혜를 줄 수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러므로 교직자는 자기를 단순히 공동체를 통하여 불리운 존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를 교직자로 부르시고 세운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다. 그는 특별한 자가 아니나 그는 특별한 ‘카리스마’ 곧 세례 받은 자들이 갖지 모사며 오직 자기만이 가진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가 원하는 것을 반목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을 선포할 수 도 있는 권한을 가진다. 교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온 교직은 공동체 앞에 서게 되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일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공동체의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받은 카리스마와 교직자가 받은 카리스마가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고 말할 수 없다. 카리스마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직자의 카리스마적 봉사는 공동체의 특별한 부름과 위탁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봉사들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 이 권위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처럼 교직자가 소유할 수 없고 안수로 건내 줄 수있는 것도 아니다. 교직자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 가운데서 ”예수의 일“을 수행함으로서 언제나 새롭게 권위를 증명해야 한다.

    3) 결론적으로 교직과 공동체의 관계를 우리는 상호의존적 관계요 협동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후버 교수는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야 할”과제를 위하여 공동체 안에는 특별한 직분 곧 교직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직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복음의 증인이어야 할 사명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는 그 외적 형태에 있어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진 것이다 . 그것은 “인간이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있는 것이다. ” 라고 말했다.

 

I. 교직의 본질

오늘날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 교회의 많은 신학자들도 교직의 본질은 봉사 혹은 섬김에 있다고 말한다. 교직은 공동체를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다. 그 밖의 모든 지체들은 모두 평등하다. 교직은 섬김을 받음에 있지 않고 섬기는데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에 있다. 이것은 leitourgia라는 단어와 diakonia라는 의무와 섬김, 봉사를 나타내는 단어로 성서에서 확정되어진다. 교직의 본질은 섬김인 것이다.

 

6. 특별사제직과 만인사제직

교직자는 물론 공동체의 모든 신자들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교직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은 “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동등한 지체들이며 “하나님의 사제들”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만인사제직 혹은 보편적 사제직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 등은 교직자들만이 엄밀한 의미의 사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포기되지 않고 “사목적 내지 지배체제적 사제직”이란 명칭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공동의 사제직”으로부터 그 등급에 있어서 구분될 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는가 ?

 

A. 특별사제직을 폐기하는 예수의 죽음

    1)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교의 교직제도 내지 교직기구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했을 뿐 아니라 사제직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를 폐기한다. 예수의 죄 용서도 성전 제사의 폐기를 뜻하며 성전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직의 폐기를 뜻한다. 또한 예수는 그의 모든 선포와 활동에서 사제의 像이나 제사의 像을 전혀 사용하시지 않는다.

    2) 역사의 예수는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 여하튼 예수의 부활 이후 최초의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 자신이 마련한 희생제물로 생각하였다. 예수의 죽음이 유일하고 궁극적인 희생제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유대교의 모든 제사와 희생제물의 폐기를 뜻한다면 그것은 유대교 사제제도 곧 교직제도의 폐기를 뜻한다.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사제란 단어는 단지 두 가지 면으로 사용된다. 첫째, 그것은 주로 히브리서에서 종말론적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둘째,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지배체제적 사제제도 곧 교직제도에 해당하는 “사제”의 개념을 신약성서는 알지 못한다.

 

B. 히브리서의 사제직 폐기

히브리서는 공동체의 신앙이 회의에 빠지는 위기의 상황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전승된 신앙고백을 견지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구약성서의 속죄제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속죄제물로 대비시킴으로서 유형론적 성서해석을 시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의 사제직의 성취와 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시대의 사제직은 폐기되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제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2. 따라서 소위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은 신약 성서적 근거를 갖지 못하며, 신약성서를 통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3.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단지 받은 은사가 다를 뿐이다. 예수는 그 존재 자체를 제물로 희생한 것이다. 제물을 받치는 자 자신이 총체적으로 제물이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물이 필요 없다. 그는 교직기구를 폐기하는 동시에 완성한 것이다.

 

C.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모든 특별한 사제직은 폐기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직접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될 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뜻하는 아래의 몇 가지 표현에서 발견한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이다. 그들은  모든 평등한 “선택된 민족”이요 “거룩한 겨레”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요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지체는 그러므로 중요하며 평등하다. 각 지체는 나름대로 독특하며 기능과 가치를 가진다.

    3)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성령의 전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각 신자가 받은 성령은 “교직들”을 강조하지 않고 섬김 들을 창조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라고 말할 수있다. (루터)

에베소서 4:11에 의하면 특별한 사제직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의 은사에 불과함을 알 수있다. 그런데 만인사제직이라는 종교개혁의 명제는 주로 가톨릭 교회의 특별사제직을 거부하는 논쟁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명제의 적극적 의미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들이라면 사제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하나님과 직접적 관계 :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이를 수 있으며 (롬5:2)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게 되었다.(엡3:12, 히10:22)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엡2:18).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해서 직접적인 것이다.

    2) 중재자 직, 대리직 : 만인사제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직접성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중재자 직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고 대리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을 뜻한다.

    3) 말씀의 선포 : 말씀의 선포는 특별사제직의 고유영역 내지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선포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다. (행4:31, 8:4, 벧전2:9)초대교회의 복음전파는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 의해서 넓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4) 세례와 성찬의 집행 :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설교와 성찬 집행과 세례 그리고 축도가 특별사제직의 고유 권한으로 고정되어 진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어느 구절도 평신도와 교직자가 행할 수 있는 일이 엄격하게 나누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이요 공동체 전체에 부과된 과제인 것이다. 교직자는 단지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받아 공동체를 대리하여 공동체의 위임을 받아 수행할 뿐이다.

 

D. 여자 사제직(목사직)의 문제

여성이 사제로 안수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뜨거운 논쟁의 문제로 등장하고있다. 기독교도 사실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면 동등한 자격과 권리가 인정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여자의 목사직을 반대하는 논거는 대락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였다. 2. 그리스도는 12명의 남자를 택하였다. 3.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침묵할 것을 명령하였다 4.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졌으며 먼저 죄를 지었기에 남자를 다스릴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5. 교히 역사상 한 번도 여자 사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의 5가지 논거는 아래와 같이 반박할 수 있다. 1. 예수가 남자인 것은 역사적 우연이다. 2. 12제자가 남자인 겅은 사회적 상황의 고려이다. 3. 바울의 고전 14:34-35과 딤전2:11-12은 여자가 시민권 조차 갖기 못했던 당시의 사회정항 속에서 해석 되어져야 한다. 바울의 이 말을 시대적 이해 없이 영원한 신적 질서로 삼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근본 뜻을 그르치게 된다. 4. 여자가 갈비뼈로 지어졌다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는 남자의 노동력이 결정적 힘을 가진 농경사회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을 가르킨다고 보기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동질성과 한 몸 됨을 가르킨다. 또한 죄를 짓는 것에 있어서도 공범이지 한쪽이 한쪽을 유혹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들다 한 몸이기 때문이다. 5. 보프에 의하면 교회사에서 여성 사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여성 부제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여성 부제는 특히 4세기 말 이후로 안수에 의한 임직을 통하여 목회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의 성직제도에 소속되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점에서 여성 목사직은 지지되고 있다.

    1) 우리는 남자 여자를 다르게 본 구절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본 구절들도 고려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3:28-29을 보라.

    2) 성서에서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동참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3) “하나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규정은 사랑에 있다. 사랑은 양자가 구분되는 동시에 하나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특별한 성을 지배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4) 만인사제직에 의하면 남자는 물론 여자도 사제다.

    5) 교인들의 구성을 고려할 때 여자의 목사직은 당연하다. 교회는 구성상 형제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형제 자매의 공동체인 것이다.

 

7. 참 교회의 表識

 

A. 표지의 기능과 성격

교회의 표지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외적 특징과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하는 동시에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이리하여 “교회의 행동과 교회의 질서의 전망들이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가르키는 동시에 분열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모든 피조물을 하나 되게 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교회의 방향과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온 세계를 향하여 자기를 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할 교회의 미래와 참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나타내는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교회에 대한 비판이요, 자기 자신과 세계를 거룩하게 해야 할 교회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런 기능들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1) 교회의 존재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의 표지는 “그리스도론적 성격”을 가진다.

    2) 예수는 이스라엘과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던 메시야였고, 교회의 표지는 이 예수로부터 주어진다면, 교회의 표지는 “메시야적 성격”을 가진다.

    3) 교회의 표지는 “희망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의 물건처럼 언제나 소유할 수 있고 사도계승을 통하여 다음 세대의 교회에 물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언제나 기다리고 희망해야 할 교회의 참 본질과 모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B. 전통적 네 표지와 종교개혁의 두 표지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참 표지로 교회는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네가지 표지를 법적으로 파악하였으며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사도 계승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표지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네 가지 표지 가운데 “보편적”이란 말을 “그리스도적”이란 말로 대체한 것을 말고는 이 표지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참 교회의 표지는 법적으로 해석되는 이 네 가지 표지에 있다기 보다는 복음과 성례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자들의 생각은 오늘날 루터교회 신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초기 개혁교회의 신학은 이 두가지 외에도 교회 규율을 또하나의 표지로 제시하였다. 또 재세례파는 재산의 공유까지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참교회의 표지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네 가지 표지와 그 밖의 표지들은 참 교회가 무엇인지 완전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제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적인 네 가지 표지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뒤이은 개혁자들의 두 가지 표지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주목하여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C. 자유와 다양성과 실천 안에서의 통일성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 주는 성구들은 고전 1:10-31, 고전 12장, 갈라디아서 3:28-29, 로마서 12:3-8, 사도행전 2:42, 사도행전 4:32, 요한복음 10:16, 18:20-26, 에베소서 4:2-6 등을 들 수 있다.

    1) 신약성서는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여러 공동체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통일성은 획일성이나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 있는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통일성은 교회의 통일된 조직이나 법질서나 사도계승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 한 세례, 한 성찬,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공통된 신앙고백,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통된 희망, 한 마음 된 가운데 함께 나누는 사랑, 세상을 위한 봉사에 있다.

    2) 분열된 교회들의 현실적 통일성은 분열된 교회들이 그들을 분열시킨 원인들을 발견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면서 실제로 연합하여 공동의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실현된다.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배격하고 협동과 연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교회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기본 명제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순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공동체는 한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근거 위에서 이제 그들은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길 곧 통일성에로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각 교회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공동의 새로운 진리를 찾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모색함에 있어서 궁극적 기준은 각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3) 내용적인 면에서 교회의 통일성은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하나 됨에서 볼 수 있는데 이 통일성은 곧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모범이다.

    4)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 몸 됨 곧 통일성은 예수의 삶에서 구체화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교회를 가르키는 “표식”일 뿐 아니라 분열된 세계 속에 있는 교회의 “고백의 징표”이다. 달리 말하면 교회의 통일성은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결합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가르킨다.

 

D. 당파성 안에 있는 普遍性

    1) 보편성이란 용어는 6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 왔다. 그것은 본래의 교회론적 의미의 보편성, 논쟁적, 교의학적 의미의 보편성, 공간적 의미의 보편성, 문화-사회학적 의미의 보편성, 수적 의미의 보편성, 시간적 의미의 보편성을 가르킨다. 이 중에서 교회론적 보편성은 성서적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나머지의 보편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2) 그럼 보편성은 어디 있는가 ? 교회의 보편성을 보장하여 주는 것을 무엇인가 ? 첫째,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교회의 보편성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권세의 주요 만유의 주의 보편성이다.” 또한 이것은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공간적 크기, 사회-문화적 다양성, 공동체의 수와 교인의 수의 크기, 시간적 연속성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종말론적 사명과 그 미래를 가르킨다.

    3) 교회의 보편성은 기독교가 국가종교나 세계의 지배 종교가 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부적 관심을 넘어서는 교회의 보편적 관심에 있다. 그것은 피조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보편성에 있다.

    4) 교회의 보편성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 시작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질 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존의 세계질서 틀 안에서 기독교적 세계 국가나 하나의 세계 사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보편성을 실현하려는 제국주의적 환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 40:4-5,눅 1:51-53, 고전 1:27-28 등을 보면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낮은 자들,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믿음 안에서 일으켜 세움으로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함으로서 자기의 보편성을 실현해야 할 교회도 이들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 교회의 보편성은 이 당파성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삶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셨다.

 

E.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거룩성

교회는 물론 교회의 신자들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교회”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 달리 말하면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1)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도덕적 삶이나 도덕적 행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부터 결과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칭의는 물론 성화도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1. 인간의 죄를 예수의 몸 안에서 심판하고 2. 용서를 선언하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다 이 교회는 세계와 죄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의 “성소”이며 “성전”이다.  

    2) 신약성서는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거룩한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어떤 특정한 사물들의 거룩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정한 공간이나 기물이나 행사가 거룩한 속성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대물적 거룩”을 말한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는 “인격적 거룩”을 말하고 있다.

    3)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죄성으로 흐려지지않도록 항상 다시금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교회 밖에 있다기 보다는 교회 안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무신성과 불신앙이다. 이 적을 이기는 방법이 회개이다. 이것은 언제나 개혁되어야 할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에게 주어진 , 교회가 언제나 소유하고 있는 속성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회개와 개혁을 통하여 교회가 쟁취해야 할 종말론적 목적이요 과제이다.

    4) 거룩한 동시에 죄된 교회가 참으로 “거룩한 교회”가 될 수있는 길은 한 마디로 거룩한 하나님을 닮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이 거룩한 하나님을 닮을 때에 교회는 거룩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을 따라 교회도 1. 이 세계로부터 구분되는 데에 거룩성이 있다. 2. 그러나 세계로부터 교회의 구분은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구분된 존재로서 세계와 자기를 결합시키고 이 세계의 고난받는 피조물들과 연대함으로써 자기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3. 또한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예수를 따름에 있다. 그것은 자기포기요 하나님의 고난받는 피조물들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교회를 말한다. “청빈한 교회”, “청빈한 사람들의 교회”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5) 세계 속에서 교회가 “거룩한 교회”로 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구조적인 악을 예방하는 차원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본훼퍼와 정치 신학은 이것을 간파하였다.

 

F. 사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사도성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사도적인가 ? 사도적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1) 사도적 교회란 그의 가르침과 선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는 교회를 말한다. 여기서 사도성은 교회의 “사도적 근거”와 “사도적 연속성”과 “사도적 정당성”을 가르킨다.

    2) 전통적으로 사도계승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 사도성은 타당하지 못하다. 참 “사도적 교회”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과제를 수행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부르심과 파송을 받은 교회가 사도적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천 년 전의 교회의 형태와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반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뒤를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의 파송에 복종하느냐 하지않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3) 온 세계와 인류를 향하여 파송된 사도들은 이 세계의 영광스러운 존재들로 나타나지 않고 이 세계에 대하여 “죽은 자들”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주님의 종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교회가 참으로 사도들에게서 근거한 “사도적 교회”라면 교회는 종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4) 사도들은 온 세계와 인류를 위해 파송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온 세계와 인류를 향하여 파송 되는 교회요, 다른 교회들은 물론 다른 교파들과 함께 협동하여 세계를 섬기는 교회이다.

 

G. 하나님 나라의 表識

참 교회의 표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표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그곳에 참 교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참 교회의 표지로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예수의 멧세지에 상응하고 메시야적 전통 속에서 교회를 파악하게 하며 구교와 신교의 일치점을 제공하는 장점을 가진다. 동시에 이것은 복음의 선포에 관심을 가지는 종교개혁정신과 상응하며 이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나타난다.

 

8. 關係 속에 있는 교회

세계의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근거가 되었던 예수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존하였던 사회적 존재였다. 교회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동시에 메시야적 지평에 있다.

 

A. 이스라엘과 교회

교회와 이스라엘의 문제는 메시야적 희망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메시야적 희망의 종교이다. 그것은 생명은 온 세계 안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메시아즘에 있다. 따라서 교회가 이스라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교회가 구약성서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메시야적 희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사실 기독교는 서구의 국가종교로서 반유대주의는 물론 유대인 배척주의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독교가 침묵하고 구약성서에 대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유대주의를 취할 때 이것에 비례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을 상실하고 서구 사회의 시민종교 내지 문화종교로 전락한 역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고찰해 보면

    1) 기독교와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연결성을 갖는다. 최초의 기독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곧 유대교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특별한 종교현상을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 외에는 이스라엘 종교는 물론 그 사회와 결합되어 있다. 기독교는 자신을 “새 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한다.

    2)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내적 연관성과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관계는 예수의 신앙고백 속에 이미 정초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이방인의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자기를 분리시켰다. 이 분리는 이스라엘 자신의 적극적인 박해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 고백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후 2세기의 랍비들의 기도문에는 “이단자들과 나사렛파”라고 저주하는 말이 주요 기도문인 “Schmone 'Esre"에 삽입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더욱 심화의 과정을 거쳐서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황들은 유대인 배척주의를 주장하였다. 십자군 원정은 유대인들을  회교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하고 진행되었다. 이 전통은 루터와 칼빈에게 와서도 이어졌다. 약 1500년동안 기독교와 서구사회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3)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교회의 적대적 태도는 기독교의 절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의 약속의 성취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타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태도를 계속적으로 취한다면 양자 사이에는 불화와 갈등만이 있게 되고 이 불화와 갈등은 다시 반유대주의나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

    4) 로마서 9-11장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고전적인 본문이다. 이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동일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위치와 사명을 가진 존재로 존속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 때까지 교회를 자극하는 교회의 동반자로 존속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강요하여서는 안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일어났음을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와 자비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B. 타종교와 교회

세계는 단일 문화권이 될 정도로 가까워지고 국가의 벽은 무너져가고 있다. 그리고 지구적 위기와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입장에 서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 기독교와 가톨릭도 타종교에 대한 관계정립을 새롭게 재 편성하고 있다. 예전에 있었던 서구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정책이 과거의 상처로 남은 것도 이러한  변화를 주는 큰 요인이다. 또한 서구 교회의 약화도 기독교의 타종교와의 대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1) 칼 바르트, 본훼퍼의 종교 비판 : 이러한 추세 속에서 바르트와 본훼퍼의 종교비판은 타종교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생각해 보면 바르트는 종교와 계시를 구분한다. 종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 도달하며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활동의 총괄개념이며 계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종교,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의 형식을 분명히 구분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종교의 자기 비판과 개혁을 요구하지만 결코 기독교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종교란 종교 일반이 아니라 기독교에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기독교가 그 대상인 것이다. 이 비판은 “종교의 지양”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때 지양은 폐지라는 의미보다는 고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그의 방대한 문헌을 통해서 거의 타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신앙의 영역밖에도 다시 말하여 타종교의 영역에도 진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속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진리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르트를 철저한 배타주의자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혹은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본훼퍼의 명제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칼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공산주의의 종교 폐기 정책의 근거로 수용되었다. 그는 종교는 종교의 제반 형식 속에 사회적 소외와 비참이 표현된다고 보고, 그 소외와 비참에 대해 종교는 소극적인 저항, 환상적인 저항을 하며 환상적인 위로를 하는 것으로 소외와 비참을 더욱 더 심화하기 때문에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소외와 비참을 일으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사라지면 종교도 폐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그의 종교는 세상의 일반종교가 아닌 서구의 기독교를 염두해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교회도 모든 역사적 사회적 형태들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3) 가톨릭 교회와 칼 라너의 입장 :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제2바티칸 공회를 기점으로 배타적 입장에서 다소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누구든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원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칼 라너이다.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은혜로운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한다고 보며 하나님은 자기 존재와 의지를 모든 인간에게 알려주며 “하나님 자신을 향한 은혜로우며 초자연적인 역동성과 목적성”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누구든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의 궁극 목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역사와 파멸의 역사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서 그의 현존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에 대하여 항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같은 “보편적이며 익명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로부터 “명시적이고 공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를 구분한다. 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궁극적 자기 전달로부터 시작한다. 라너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타종교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잠재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함으로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타종교인들마저도 기독교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4) 타종교의 타당성

우리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도 인간이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 타락과 불안, 허무와 고독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죽음의 의미와 무의미,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2.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이 세계가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이 세계의 유한성과 허무와 타락과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3.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인간과는 다른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아는 신이 참 신이냐 아니냐의 문제점이 있지만 그들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들도 신의 자비와 은혜, 분노와 심판을 그들 나름대로 알고 있다.

    5)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 타 종교의 문제점 : 기독교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시되는 타종교의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연구함으로서 각 시대와 각 지역의 종교 속에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다른 종교가 그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에 있어서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길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가 미신이요 이단이라고 그저 정죄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보다는 기독교 자체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타 종교를 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독특성을 지키고 유지하면서 타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자기를 보완하는 일에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우기 이 대화의 주제는 교리적인 면에서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다. 교회는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존립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하기에 자기를 고착시키지 말고 정체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교회는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있어서 자가확대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른 종교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인류의 행복에 있을 것이다. 이 목적에서 교회와 타종교는 관심이 일치함으로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만남과 대화를 가질 수 있다.

 

C. 국가와 교회

국가와 기독교를 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항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취급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첫째, 교회는 어디까지나 국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요 국가의 국민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안에서 교회와 국가는 서로 관련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복음은 개인의 심령이나 교회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실현될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령과 교회는 물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와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1) 중세기까지의 발전 : 신약성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기 이전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381년부터 기독교는 로마의 국가종교 즉 제국종교가 되고 부터는 기독교신앙이 국가종교로 바뀌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결합된 하나의 기독교 왕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정교합일주의로도 교황정치주의로도 변모하며 시대를 다라 교차하는 형태로 관계되어 왔다.

    2) 루터의 두 왕국론과 루터교회 신학자들의 오류 : 중세기 전체가 교회와 국가를 교묘하게 결합 한데 반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소위 “ 두 왕국론”을 말한다. 이것은 루터가 아우구스틴을 계승한 것인데 갈등과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이 아니라 “논쟁적 구분”이다. 양자는 서로 분리된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두 가지 방편에 불과하다. 루터가 거부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합일주의이며 동시에 성직자들의 신정이다. 루터는 이를 통하여 교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교회로부터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 신학자들의 오해로 교회와 국가는 양자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영역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즉 하나님은 국가의 현실과 관계없는 소위 종교의 영역에 국한된 존재이고 국가는 하나님 없는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의 견해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1. 국가를 국가 되게 하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 양자가 구분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루터는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이런 의도가 오해되서 양자가 무관심 속에 나누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3)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의 입장 : 칼빈도 루터와 같이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지만 칼빈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독립된 영역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전통은 “바르먼 신학 선언” 제1명제와 제2명제에 잘 나타난다. 이 명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그러므로 불의의 동지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고 그것을 구원해야 한다. 

    4) 바르트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바르트는 국가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도 공동의 책임을 지며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뒤따름을 실천해야 한다. 이 양자는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공통된 근원을 가지며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양자는 하나의 구심점을 가진 두 개의 원과 같다. 교회는 안쪽 원이고 국가는 외적인 자유와 평화, 사회의 인간성을 이룸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섬기는 바깥쪽 원이다. 즉 국가는 루터나 루터교회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무질서와 죄를 억누르기 위한 권위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외적이고 지상적이며 잠정적인 방편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가 될 수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보면 교회와 국가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1. 교회와 국가는 영역과 형태를 달리한다. 2.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두개의 영역은 나누어질 수 없다. 3. 교회는 국가의 과제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국가를 돕기도 한다. 4. 교회는 국가를 돕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행사하기도 한다. 5.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국가는 교회를 돕기도 한다.  6. 이와 동시에 국가는 교회가 국가의 정당한 법질서를 따르도록 요구한다.

 

D. 현대사회와 교회

오늘날 과학 기술의 세 번째 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

    1) 교회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

    2)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외적인 제도와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無神性에 있다. 1.하나님 없는 인간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2.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자기 중심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3. 자기 중심적 욕망은 인간을 이웃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

    3) 오늘 한국의 사회에 있어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한국인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1. 먼저 교회는 지배체제적, 관료주의적 의식을 민주적 의식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2. 교회는 남자, 여자에 대해서 평등한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3. 윤회론적, 운명론적 의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4. 교회는 참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5. 동양인에게는 정신과 물질은 나누고 정신적인 것을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을 속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의식이 숨어 있다. 이 같은 구분을 바꾸어야 한다.  6. 교회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악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4) 현대사회는 이전의 어떠한 시대보다도 경제의 문제가 가장 큰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사회 정의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세계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 경제 정의는 공정한 부의 분배와 부의 기존적인 삶 유지를 위한 가난한 자들에게로의 환원이 관건이다.

    5)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의한 정치를 고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도록 권고하며 정치적 정의를 요구하여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등한 권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는 동시에 생명에 대한 경외와 보호와 장려가 실천됨으로써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닮게 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1. 인종주의의 철폐를 요구해야 하며 2.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별을 철폐하도록 촉구해야 하고 3. 장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는 앞장서서 일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적”, “순복음적” 교회이고자 한다면 영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그의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오늘의 그리스도론-

 

 

서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들

1. 우주론적 관점

예수에 대한 우주론적 관점은 초대교회의 희랍세계적인 우주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의 기본 틀은 세계는 대 우주이고 인간은 소 우주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와 신과 존재론적인 유비관계를 지니며 동시에 서로 구별되기도 한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신의 존재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한 분으로 예수는 이해되며 그러기에 구원이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신적 본질과 광채를 인식하고 인식을 통하여 이에 참여함으로써 신격화되는데 있다.

2. 인간학적 관점

사유하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과 지배자로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우주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에 대칭하는 주체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간학적 전환”에 힘입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일어났는데 이에 의해 예수는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인간으로 이해되고 구원 역시 인간이 의식을 통하여 구원자를 인식함으로써 일어난다.

3. 이 책의 관점과 기술 방법

1. 종말론적, 메시야적 관점: 구약성서의 메시아적 관점에서 예수는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말씀과 촛점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파악하고자 한다.

2. 성령론적 관점: 성령을 통하여 잉태된 예수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으로 또한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이 땅에 오신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아래로부터의 관점: 온전한 인간과 온전한 신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삶 곧 아래로부터 출발하여 이해되어야 하며 이 땅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4. 신학적 관점: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그의 말씀과 활동들을 해석할 것이다.

5. 물질론적 관점: 물질을 포함한 현실의 세계를 고려하면서 글을 써 나갈 것이다.

6. 여성신학적 관점: 예수의 삶에 함께 했던 여인들의 존재를 고려하면서 예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것이다.

7.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점: 인간은 물론 자연의 세계까지 포괄하는 관점.

8. 모든 관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통전되는데, 역사의 예수는 그의 모든 말씀과 활동의 주제를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두었기 때문이다.

 

제1편  예수의 역사적 배경

Ⅰ. 중간시대의 역사

1. 페르시아의 팔레스틴 통치

바빌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는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하고 율법을 페르시아의 속국의 법으로 인정하면서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결국 이 일로 유다와 사마리아는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게 되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예수는 바로 이 분열된 시대 속에서 태어났다.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통치

주전 333년 알렉산더대왕의 군대는 승승장구를 계속했는데 그의 힘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쉽게 굴복하였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자주권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희랍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미 왕에게 점령된 유다는 315년에는 안티고누스에 의해 팔레스틴이 지배되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산헤드린이 자주권을 갖고 제반 문제들을 결정하였다.

3. 시리아의 통치와 마카비 혁명

주전 175년에 시리아의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민족의 희랍화와 종교 탄압을 가속화시켰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의 정책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지만, 시골의 주민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조상의 신앙을 지켰다. 그 중 모데인에 사는 하스몬 일가의 마타티아스는 강렬히 저항하였는데 그의 아들들은 주도적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마카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들은 종교적 문제 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및 투쟁도 행하였기에 주전 140년에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대제사장인 동시에 세습적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하스몬 왕가가 세워졌는데 일군의 하시딤은 이것을 반대하고 은둔하거나 수도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하스몬 왕가의 통치

처음으로 왕으로 추대된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사두개인들과 친화하였다.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사망이후 그의 부인 살로메는 첫째 형인 요나단에게 정권을 위임하였고 그가 죽자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나라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제사장이 될 수없었기에 그의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봉하였다. 그녀가 죽자 차자인 아리스토불 2세가 왕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형제사이에 다툼이 일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려 로마의 환심을 얻으려다가 결국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점령되었다. 주전 48년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하자 힐카누스는 안티파터를 로마의 사절로 보냈고 그로인하여 안티파터의 아들 파사엘은 유다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 이후 정치적인 격변속에서도 교활한 헤롯은 살아남아서 주전 37년 로마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얻고 왕위에 올랐다. 헤롯은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시도를 좌절시키고 그 왕가의 마지막 공녀 마리암네와 결혼함으로써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바로 이 헤롯의 통치기간 말기에 세례 요한과 예수가 테어났다.

 

Ⅱ.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헤롯 왕은 죽기 직전 자기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켈라우스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의 분봉왕으로,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필립보는 북쪽의 요단강 동편 지역의 분봉왕으로 봉하였다. 이들은 비록 왕의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에기는 그들을 통치하는 자가 곧 그들의 왕이었기에 이것은 상관없는 문제였다.

잔인한 아켈라우스는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당하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병합시켰다. 그래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오게 되었는데 그는 부패하였고 간교하며 잔인하였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는 헤롯 안티파스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동생의 부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를 낳았는데 그는 이것을 이용하여 세례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간교함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헤롯 왕의 사망 시기인 주전 4년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예수가 살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탄압과 착취, 로마와의 결탁으로 인한 부패는 끊임없는 사회불안을 야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2. 반 로마 혁명

증가되는 로마의 탄압과 모욕은 여러차례의 저항운동을 낳게 하였는데 주후 66년 총독 플로토스에 의해 야기된 봉기는 유다전쟁으로 까지 치달았다. 결국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불길에 휩싸이고 제 1차 반 로마 혁명은 참패로 끝났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 의한 유대교 재건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주후 132년에는 제2차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의 실패와 함께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까지 나라와 영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3. 사회, 경제적 상황

엄청남 세금 부담, 고위층의 착복 등으로 중산층과 소산자층은 사라지고 왕을 중심한 관료들과 성전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나고 가난한 자들은 절대 다수를 이루는 시기였다. 철저한 계급 위계로 인해 사회적 신분 또한 이미 결정되어 버리고 가난과 소외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여 적들과 대결하였다.

 

Ⅲ.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

1. 배타적 유일신 신앙

포로귀환 후 그들은 모든 고통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라고 생각하고 배타적 유대주의를 세우기 시작했다.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의 헬레니즘화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끝까지 거부하였던 이유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타적 신앙에 있었다.

2. 율법과 성전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모든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계약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율법과 더불어 이것을 해석한 할라하도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가르쳤다. 또하나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을 형성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것은 야위의 “집”이었고,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대표자로서 이 민족의 명목상의 수장으로,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다.

3.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손들로서 포로기 이후 법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제사를 집행하였다. 대부분이 하스몬 왕가에 협조한 제사장들의 자손인 이들은 정치권력자의 편에서서 민중을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는 동시에 로마제국의 희랍화 정책에 협조하였다. 사두개파는 율법의 글자 자체의 뜻을 고집하였고, 냉철한 사고로 인해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허용치 않고 죽은자들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4. 바리새파

마카비 일가가 반 로마혁명을 일으켰을 때 율법에 충성하는 “경건한 자들” 곧 하시딤이 혁명에 가담하였는데 이들은 율법을 지키기위해서 가담하였기 때문에 하스몬 왕가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협조하지 않았다. 세속 안에 살면서 경건과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대 변혁을 준비하려는 바리새파는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별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5. 젤롯당원

이들은 바리새파와 같이 율법에 열심하는 자들이었지만 “철저히 지유를 지켜야 하며 하나님만을 그들의 주와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로마 통치를 거부하였다. 주후 66년 제1차 반 로마 혁명의 주동자들은 젤롯당원이었다. 이들은 마사다 요새에서 자결함으로써까지 로마의 통치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6. 엣세네파

엣세네파의 이름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데 필로와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그들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이들도 하시딤의 후손들로서 세속과의 관계를 피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엄격한 금욕생활을 한 이들은 반 로마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쿰란 문서에 엣세네파라는 이름이 아무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쿰란 공동체가 엣세네파의 중심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7. 쿰란 공동체

이들은 속세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생활을 하였고,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의 이원론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해 조금의 타협없이 율법을 지키고자 애썼다. 성을 불결하다 하여 성관계를 하지 않는 등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계급제도와 상급자에 대한 복종을 특징으로 가졌다. 엣세네파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자신을 참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그의 비밀을 계시한 거룩한 자, 선택된 자로 이해하였다.

8. 서기관들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치며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서기관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결정권자였다. 서기관의 직책은 세습제가 아니었고 성공적으로 선배 서기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랍비가 될 수 있었고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기관은 힐렐과 샴마이 였는데 힐렐은 온건하였던 반면, 샴마이의 가르침은 엄격하였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유대 공동체가 산산조각이 았을 때 랍비 예후다는 율법 해석들을 정리하는 일에 전력하여 주후 2세기 말에 미슈나(Mischna)가 완성되어 모세의 율법과 함께 유대교 공동체 생활의 규법이 되었다.

9. 묵시사상

고난의 현실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이 세계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게 되었다 하여 묵시사상이라는 것을 발전시켰다. 묵시사상은 이원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시대를 구원불가능한 시대로 단정지었다. 또한 비관론적이며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메시아의 오심과 최후심판을 믿으며 그 후에 다가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 시간의 수를 계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 시대의 역사 밖에서 기대하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생각들과 함께 묵시사상은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깨트려 버린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사상은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제 2 편  메시야 예수의 오심과 그의 인격

Ⅳ.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 메시야 예수의 오심

1.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본 예수의 탄생

약속과 성취의 틀에서 예수의 오심은 이해되어야 한다. 약속의 전통에서 볼 때, 예수의 탄생은 이 약속을 성취할 분의 탄생을 뜻하며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뜻한다.

2. 비천한 여자에게서 태어남

예수가 억압과 착취의 대상인 여자를 통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그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거부를 뜻하며 우리 인간이 비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하여 귀하게 쓰일 수 있음을 말한다.

3. 예수의 사회적 신분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사회적 신분이 비천하였다는 증거가 여럿 나온다. 첫째,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건 그리고 둘째, 예수 부모의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목수), 그리고 예수 자신도 본래 목수였다는 마가복음의 보도가 그 증거들이다. 그가 사용한 언어 또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유대교 신학자 샬롬 벤 호린은 예수의 사회적 신분을 가리켜 “다윗 왕가의 한 지류에 속한 가난하고 무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4. 동정녀 수태와 예수의 무죄성

동정녀 탄생이 예수의 무죄성의 근거라고 보는 신학자들은 이원론에 지배를 받고 있기에 원죄를 인간의 생리에 유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원죄는 1. 인간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죄의 불가피성과, 2.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어디서 오는지 해명할 수 없는 죄의 비밀성과, 3. 모든 인간은 죄에 있어서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무죄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죄를 법하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십자가의 자기희생을 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 성령의 능력 가운데 태어남

성령수태는 예수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메시야적 아들임을 말하고자 하며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임을 말하고자 한다. 또한 성령 수태는 예수의 사건이 한 인간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임을 시사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6. 율법 아래 태어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인 율법은 시대를 거치면서 율법주의라는 기현상을 낳게 되었다. 율법주의로 인한 사회 계층의 분열과 소외는 예수가 “율법 아래” 태어났기에 또한 그에게도 적용되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울법의 유혹과 고발과 저주가 다스리는 인간의 세계속으로 오셨음을 말하며 동시에 유혹을 이기고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뜻한다.

7. 하나님 나라의 물질화 -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

말씀의 성육신은 메시야 예수의 영원한 선재(先在)를 전제하며 예수가 인간의 모든 허무성과 제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말한다. 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이 되었고 이것은 육을 가진 인간과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되었음을 뜻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영적 세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 곧 물질을 포괄하며 물질의 세계 속에 구체화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8. 인간의 종이 되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기를 비워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고 무력한 십자가의 죽음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고난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을 찾으며 그들 안에 현존한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이기 대문이다.

 

Ⅴ. 되어감 속에 있는 예수의 메시야적 인격 -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1.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의식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메사야적 의식이 있었다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것을 형성하였다. 그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되어져 가는 과정 속에 있다.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져 있는 사회적 인격 개념에 근거하여 예수의 존재를 파악하고자 하는데, 예수의 존재는 그러므로 “관계들 속에 있는 존재”, 되어감 속에 있는 존재였다.

2.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

예수는 예언자로 인식되었지만 예언자와 동일시되지도 않았고 랍비로 인식되었지만 랍비로 동일시되기도 않는다.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지만 그는 그 권위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나타나지만, 결코 그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고 메시야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의 말과 행동 속에서 메시야적 자기의식은 발견된다.

3. 삶이 존재를 증명한다.

그의 정체성은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드러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관계 속에 실존하였고 그 관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의 메시야됨은 그의 고난으로 증명되기에 예수는 그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그는 메시야적 존재이기에 메시야적 삶을 살아갔고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기에 그의 삶은 그의 존재를 밝혀 준다.

4. “아빠”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이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믿는 사람은 예수와 같이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 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의 아빠되심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져오며 하나님상의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5.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 하나님상의 혁명

아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주 직접적인 현존, 임재하심, 자기를 현재적으로 드러내심을 표현한다. 그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가까이 계시며 어떤 조건도 없이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뜻하고 인자하며 용서하고 말 없이 섬기는 어머니의 상이 하나님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은 단순히 죄인을 영접하며 위로한다는 수동적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실된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다.

 

제 3 편  사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Ⅵ. 예수와 함께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1.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의 광야 유혹

복음서가 예수의 공적 활동을 이야기 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의 선포와 모든 활동이 세례 요한의 회개운동과 세례운동으로부터 유래하며 따라서세례 요한의 회개운동과 세례운동이 예수의 선포와 활동에 대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이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베푸는 세계이다. 또한 그 나라는 세무원들의 횡포가 없고 공직자들의 속임수와 착취가 없는 세계이다. 이 둘은 모두 기성 종교 밖에서 활동하였으며 제도화된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은 인간의 행위에 심판으로 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반면 예수는 죄인을 용납하는 은혜로서 오는 것으로 선포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은 광야에 기거한 반면 예수는 광야를 떠나 성읍으로 들어가 활동한다. 그리고 예수는 종말의 이론에 대하여, 묵시사상적 사변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수의 광야유혹: 세 가지 유혹은 그의 메시야적 선포와 활동의 틀을 형성하는데 첫째 유혹은 경제적인 것이요, 둘째 것은 정치적 유혹이며 셋째 유혹은 종교적 유혹이다. 그는 여기에서 “힘이 없는 메시야”를 보여주는데 이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의 모든 선포와 모든 활동의 틀을 형성한다.

2. 예수의 사역의 중심

“하나님의 나라” 선포로 시작된 예수의 공생애는 그의 사역의 중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즉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데 있음을 잘 나타낸다. 묵시사상적 분위기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존재와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의 자녀가 되는 종적인 면을 가지는 동시에 인간과 세계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변화되는 횡적인 면을 가진다.

3. 예수의 묵시사상적 전통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구약의 민족적, 역사 내적 메시야니즘에 속한다기보다 묵시사상적 보편적 메시야니즘의 전통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지금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데서 차이가 있다.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예수는 죄인과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선포한다.

4. 병고침과 귀신추방의 신학적 의미 - 기적의 사회적, 새 창조적 기능

병치료와 귀신추방의 기적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론적 기능”을 가진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낼 때, 거의 예외 없이 예수가 누구인지 고백된다. 병치료와 귀신추방의 기적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종말론적 기능”을 가진다. 또한 이 기적들은 메시야 예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신학적 기능”을 가진다. 구원은 피안의 구원과 동일시되거나 실존적 내면성이나 개체 인간의 본래성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자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하고 그들을 사회로 통합시키는 “사회적 기능”, “새 창조의 기능”을 가진다.

5.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자신의 존재와 함께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는 비유들을 통하여 설명한다.  이 비유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성장을 나타내는 비유, 고귀함을 나타내는 비유, 잔치의 비유, 청지기 비유, 분리의 비유,찾는 비유, 일꾼의 비유등이다. 

예수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동시에 초대된 인간이 어떤 결단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이것은 말의 형태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다. 그리고 비유 속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6.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현재”와 “현재적 미래”

한편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것임을 전제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현재적으로 말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피안의 것도 아니며 인간이 이룩한 역사의 어떤 단계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Ⅶ. 하나님 나라의 사회성

1. 종교의 일반적 특징

본훼퍼에 따르면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있다.  이것은 타계적인 신앙을 생성케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하여 종교는 이 세계 곧 차안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소위 말하는 물질과 대립되는 의미의 영성에 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 영적 문제와 관계할 뿐이다. 개인주의는 또 하나의 일반 종교적 특징을 형성한다. 그리고 내면주의를 형성하고 “문제의 해결책의 역할을 한다. 이리하여 종교는 현실 전체와 관계하지 못하고 소위 종교적 문제들의 영역으로 자기를 페쇄시키고 하나의 ”국부적“현상으로 전락한다.

2.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위에 기술한 종교의 일반적 특징은 예수에게서 거부된다. 역사의 예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까지나 구체적 현실 속에 있으며 이 현실 속에서 이 현실의 모든 불의하고 불합리한 것을 개혁함으로써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3. 사회개혁으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나라 - 예수의 희년 선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희년의 정신과 연속되는데 안식년과 희년의 계명은 가난한 사람들의 빚과 노예화와 자연의 착취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인 동시에 “생태계의 개혁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메시야적 시간의 시작”이요 하나님나라의 구체적 형태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은 희년법에 관한 그의 선포와 일치한다. 그래서 예수는 희년법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개혁을 요구한다.

4. 사회적 관계와 갈등 속에 있는 예수

역사의 예수는 모든 문제와 갈등 속에서 살았으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갈등이 있는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불을 주러”왔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종교적 존재”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 존재”이다. 이러한 제반 갈등 속에 실존하였던 예수의 사회적 관계 내지 사귐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여자 제자들과 남자 제자들과의 관계를 볼 때 예수는 남자 제자들은 물론 여자 제자들과의 공동체적 사귐속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에서 예수는 민중(ochlos)과 각별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예수와 그의 민족 이스라엘은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범위에 국한되어 있었던 사실로 예수는 사회적, 공적존재라는 것이 증명된다.

5. 하나님 나라의 생태학적 차원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와 물질의 세계, 동물과 식물도 창조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동시에 “생태계의 구원자”로서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계승적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Ⅷ. 약한 자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나라

1.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에게 먼저 전하여지는 까닭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4:8, 16). 부자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부자들의 부는 상당 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논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되어야 함에도, 부자는 대개 그것을 거부하기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가치와 권리를 상실한 가난한 사람들의 계층이 생성된다. 때문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파적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2. 예수는 사회주의자였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당파성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려는 데서 시작된다. 이 평등은 사회주의적인 소유공동체도 아니고 특정한 경제체제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것이 삶의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소유의 차이는 있으나 부의 과도한 독점은 사라지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생존권이 보장받는 사회를 이루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가난한 자도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회개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로”와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역사의 주체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마음이 가난함도 요구되어진다. 자기의 가난에 대한 원망과 가진 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삶들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빈 마음이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하며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게 된다.

4. 여자와 어린이의 인권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당시 유대인의 사회는 한 마디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여자는 이중 삼중으로 제약과 억압속에 있었고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남성 중신의 사회에서 예수는 여자들에 대하여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다녔고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들고 여자들이었다. 예수와 여인들의 이러한 섬김과 사귐은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하나의 혁명적인 일이었다. 

약한 자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의 권리와 존엄성을 회복하는 예수의 사건에도 나타난다. 어린이들은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교만하지 않다. 자기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는 열려 있는 것이다.

 

Ⅸ. 회개와 죄 용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 개인의 변화도 필요하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개혁의 성격을 강하게 띠지만 그것이 단순히 사회 개혁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개인은 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추상적 존재도 중립적 존재도 아니다.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개인의 존재와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회개하는 개인의 존재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2.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는 먼저 하나님을 자기의 생명과 온 세계의 주로 승인하고 그에게 자기의 삶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이웃을 향한 섬김의 삶또한 회개하는 자가 가져야 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참사랑은 자기와 상대방을 동일화시키며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완성”이 있다. 

3. 죄에 대한 예수의 침묵

개인의 죄에 대하여 예수는 복음서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 절대적 정의를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죄의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죄에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어려운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개인의 죄와 용서에 대하여 거의 말하지 않는다. 또한 허다한 경우 불의한 체제 때문에 죄가 일어나는 경우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는 사회의 통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는 한걸음 더 깊이 죄를 파악하여 죄된 행위만을 보지않고 인간의 죄된 본성과 마음을 보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가 무엇이며 누가 죄인인가를 상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는 소위 “죄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죄의 용서

예수는 개인의 죄에 대하여 별로 말하지 않지만 개인의 죄는 용서하여 주시는 분으로 행동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죄의 용서를 포함하며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개인의 회개와 죄의 문제, 윤리의 문제는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는 강조점에 있어서 사회의 불평등의 일차적인 원인을 부자들에게 두기에 복음서의 예수는 사회적 약자들의 죄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한다.

5. 죄 용서의 사회적 의미

예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병자들과 죄인들은 소외되었고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죄용서는 예수가 당시의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것을 뜻하며 기존의 판단기준을 뒤엎으며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예수의 죄용서는 당시 종교적 제도의 상대화를 내포하는데 이로 인해 예수의 죄 용서는 당시 이스라엘 지배층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수는 죄의 용서와 함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기에 사회의 부유한 지배계층의 미움과 배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지막 귀결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Ⅹ. 하나님 나라의 물질성 - 굶주림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  

1. 하나님의 나라는 굶주림이 없는 세계이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그의 뒤를 따르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을 자주 보도한다. 그 동기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함께 밥을 먹는 나라이다. 여기에는 자리의 높고 낮음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데서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2. 밥을 함께 먹은 사건의 의미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한 동아리에 속한다는 연대의식과 공동체의식을 나타낸다. 소외된 자들에게 이 식사는 그들이 형제들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표시이었다. 그리고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말한다. 운명 공동체로서 그들은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나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동시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여 준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므로 예수가 있는 곳에는 굶주림의 문제가 사라진다.  3.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가 주는 교훈

이 식탁 공동체의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물질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세계임을 보여준다. 때문에 이 사건은 세계의 모든 공동체와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들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물질적 차원을 시사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삶으로써 이웃을 향해 봉사하고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을 교훈으로 주고 있다.

4.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찬과 최후만찬

예수와 소외된 사람들이 함께 나눈 만찬에 대해 리마문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선포하고 드러낸다”고 말한다(성찬). 예수의 만찬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약속”의 지평 속에 있으며 “종말론적 만찬”이었다. 예수의 최후 만찬은 예수께서 평소의 만찬에서 현재화시킨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자신의 신체적 인격(Leibliche Person)으로 집약된다.   

5. 성찬식의 역사적 유래와 의미

성찬식의 일차적 근원은 이 예식을 반복하라는 예수의 “반복 명령”에 있다. 그러나 이 만찬은 평소의 가난한 자들과의 식탁과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성찬식의 근원은 쇠외된 자들과 함께 나눈 평소의 만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 성찬식은 교회들의 성찬식이 소외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사건이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또한 성찬식은 단순히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념의 만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나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찬식을 거행하는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한 형제 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Ⅺ.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 - 인간다운, 참으로 인간다운 하나님의 아들

1.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복음서의 예수는 부유한 상류층과 중산층의 사람들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그와 삶을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혈병, 문둥병, 간질병, 중풍 등 귀신들린 자들, 그 사회의 그늘 속에 사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는 소위 점잖은 사람,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회의 비도덕적인 자들, 불경건한 자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2. 인간의 기본 생존권이 보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마 20:1-16)는 우리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각도로 이해된다. 물가인상과 흉년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불황은 많은 날품팔이꾼과 거지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이 본문의 이야기에도 나타나는데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것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은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품삯을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기본 생존권을 보장받으며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인간적인 곳임을 이 비유는 시사하고 있다.

3.가치체계를 상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

율법주의로 인한 사회적 윤리의 통념을 예수는 상대화 시켰다. 그는 당시의 사회속에서 불의하고 악하며 더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이 일을 한다. 예수의 산상설교도 이 대립과 분리를 상대화시키며 결정적으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섬김과 섬김을 받음, 지배와 피지배, 높음과 낮음의 대립을 극복하는 궁극적 근거가 된다.

4. 지역적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당시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사마리아는 심한 대립 상태에 있었으며, 이 대립은 오랜 역사적 유래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 당시에도 두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곧 “미친 놈”이라는 말로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이 지역적 대립을 극복하며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들의 편에 선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지역적 감정과 대립은 물론 인간의 모든 파벌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대립과 분리에 있어서 약한 자의 편에 선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5. 구약의 하나님 상과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며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상대화 시키며, 지역적 대립을 무시하는 것은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인간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그의 나라도 인간적인 나라이다. 예수가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간성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하비루를 고통에서 불러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구약의 율법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자비를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이 전통에서 복음서의 예수도 먼저 그 사회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Ⅻ. 사랑의 구체적 실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사랑의 위대한 행위나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1. 서로 용서하여라

사랑은 용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용서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문다. 그러므로 예수는 서로 용서함으로써 화해하고 이웃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선포한다.

2. 자기를 낮추고 서로 섬겨야 한다 - 참 지배자는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자

복음서의 예수는 소위 위에 있다고 하는 자들의 착각을 깨어버리고 그들의 참 신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눅 22:26). 지배하는 자의 신분은 섬기는 자의 신분이다. 예수는 자기 낮춤과 섬김을 자신의 존재에 근거시키면서 그의 삶을 통해 불의한 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그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였다. 이 섬김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3. 자기의 소유를 베풀어야 한다 - 소유의 문제

예수는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며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고한다. 예수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소유를 얼마나 많이 베푸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지 구제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나누려고 하는 마음으로, 있는 것을 나누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다.

4. 예수의 궁극적 요구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소유의 포기와 베품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과 존재를 하나님에게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어 맡길 때 재산도 포기할 수 있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우리 존재를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그것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요구한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하는 궁극적 재료이다.

5. 부의 포기를 요구한 설교가들

주후 약 2세기 중반에 로마에서 설교를 하였던 헤르마스는 부자들도 그들의 재물들이 깎여지지 않는다면 주님께 유용하게 될 수 없다고 설교한다. 약 2세기 후에 암브로스는 부자들에게 혹독한 심판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중간 쯤에 위치한 다른 부유한 도시에서 요한 크리소스톰은 부자들의 원천은 부정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경고성이 가득한 설교로 부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설교자들은 부를 교회에 바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설교하면서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책임도 강조하였다.

6. 사회의 부를 재분재하는 사랑

우리 나라 국민 5%가 전 국토의 65%를 소유하고 있으며, 20%의 국민이 국토의 85%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권력 및 정치권력과 결부되어 있는 소수의 부유한 삶들과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도적의 무리”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참으로 돕는 길은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된 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사회 전체를 위하여 사용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희년의 정신은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법인 동시에 사랑의 구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삶 역시 섬김의 삶이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내어줌의 사랑이었다.

 

제 4 편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

예수가 자신의 몸으로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가르친 “주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궁극적 희망과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제사한다.

 

ⅩⅢ. 종교의 형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1. 종교적 관습에 대하여 자유로운 예수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던 예수의 이야기 솜씨는 매우 소박하였고 단순하였다. 그는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였고 어떤 고정된 원리들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비유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한다. 예수에게 있어 종교적 형식들은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2. 율법을 상대화시키는 예수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었다. 율법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회에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킨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었다. 때문에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율법은 해석되어야 하며 인간이 율법의 기준이 된다.

3.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의 상대화

예수는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 체계 곧 말씀과 성전을 상대화시킬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의를 상대화 시킨다. 이제 예수의 현존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믿음과 기도와 용서가 오히려 강조된다. 이런 예수의 정신은 성전 정화 작업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로써 예수는 성전의 상업적 기능은 물론 종교적 기능, 제사의 기능 마저 중단시킨다.

4. 이스라엘의 혈통, 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의 상대화

예수를 통한 종교적 형식과 제도의 상대화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혈연적 존재를 상대화시키며,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판단 기준을 상대화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물론 예수는 모든 종교적 형식들과 계명들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적 형식들과 계명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기준의 상대화는 예수의 구원선포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는 구원을 선포할 때 사회의 기준을 무시하고 에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선포한다.

5. 엣세네파, 쿰란 공동체와 예수의 차이

엣세네파 사람들은 이 세계의 모든 속된 것을 피하기 위하여 속세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만 예수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마을에서, 거리에서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쿰란의 수도사들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을 두가지 부류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또한 엣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다.  그러한 엣세네파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는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할 율법 위반자요 불경건한 자였다.  예수는 율법에 대하여 매우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연속선상으로 엣세네파 사람들은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음식과 성욕 같은 것들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기피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는 계급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에 반해 쿰란의 수도사들은 계급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철저히 계급에 의해 집단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쿰란의 하루 생활은 엄격하게 규칙화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규칙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에 비하여 예수의 공동체에는 수련기간이나 입잔식이나 입단의 맹세나 규칙적인 영성훈련이나 긴 기도의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그의 공동체의 규칙이나 규약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공동체에는 엄격한 규칙 대신에 자유가 있었고 강제성 대신 자발성이 있었다.

6. 종교의 형식들을 상대화시키는 이유

예수가 일체의 종교적 형식을 상대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가 선포하며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다림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이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종교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본훼퍼의 표현을 빌린다면, 종교의 모든 형식들과 제도들은 비종교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모든 절대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상대화시켜야 한다.  또한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을 구분하는 기준은 종교의 특정한 형식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적 관습이나 형식들을 지키는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에 그는 모든 종교적 관습과 형식들을 상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사회체제를 상대화시키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는 모든 관습과 형식들, 기존의 가치체계, 의와 불의의 기준을 상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의 행복을 우선시하였기에 율법의 체계를 상대화 시켰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의 목적 앞에서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ⅩⅣ. 율법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 - 율법과 예수   

1. 율법의 본래 목적과 전도(顚倒)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제의나 종교적 의식에 관한 종교법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회생활에 관한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율법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 경외와 사랑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동시에 가지며 기본적으로 연약한 자,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주어진 법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율법의 근본 목적은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삶의 세계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율법의 본래 복적을 전도시켰다. 그리하여 율법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어 교만과 소외를 조장케하는 것이 되었다.

2. 율법의 정치적 기능

일반적으로 구약의 율법은 먼저 종교적인 것임은 사실이지만 예수 당시 율법은 정치적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경합되어 있었기에, 율법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때문에 종교적 지도층이 수호하는 율법은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틴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특권층이 그들의 위치와 특권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던 율법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율법의 상대화 - 사회체제의 상대화 

이와 같이 종교적 기능과 더불어 사회적, 정치적 기능을 기지고 있었던 율법체계에 대하여 예수는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는 정결에 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키고 안식일에 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율법의 권위와 모세의 권위보다 자기의 권위를 더 높이 세우고 모세의 계명을 상대화시키는 입장을 취한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자유로운 태도와 율법의 상대화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제의와 모든 종교적 규정들을 상대화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사회였기에 종교적 규정의 상대화는 그와 결탁한 사회체제의 상대화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4. 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키는가

율법이 삶의 모든 것들을 규정하게 되면 그에 준한 인간의 행동은 규칙을 세우면 세울수록 정말 인간이 해야 하는 바는 감추어진다. 이리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계명들이 율법의 본래 의도와 목적을 가려버리며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예수는 이러한 함정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인간의 보상심리를 알기 때문에 율법을 상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요구를 철저히 하기”위하여 율법을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이기에 예수는 율법의 본래 목적, 곧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와 평화 속에서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뜻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상대화시켰다. 그리고 더불어 율법 없는 자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율법을 상대화시켰다. 

5.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는 사랑에 대한 이론이나 학설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흐뭇한 사랑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는 사랑의 일반원리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그 이웃이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하였다. 이런 사랑은 혈통과 인종과 민족과 국경과 종교와 교파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리고 생태계의 모든 것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6. 예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는 이처럼 율법의 상대화와 완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율법을 완성한다.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철저히 작은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의 삶 속에서 율법이 완성된다. 궁극적으로 율법은 에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다. 이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택한 예수는 그 자체로 율법의 완성 내지 목적(telos)이 되었다.

 

ⅩⅤ. 주의 기도 - 하나님 나라 자녀들의 기도

기도는 그 집단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요, 그 집단에 연대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신조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 곧 주의 기도는 예수의 목적과 사명의 정수를 요약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까우심, 땅 위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인자하심과 돌보심, 그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나타낸다. 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기에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새 창조의 희망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개방성과 이 미래를 향한 그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2. 첫째 간구 :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간구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과 구별성, 그의 초월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윤리성, 그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첫째, 인간이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와 하나님 조작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의 성품을 닮는 데에 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위에 있는 피조물과 온 우주가 거룩하게 될 때 거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이것은 모든 생명을 경외하고 생태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3. 둘째 간구 :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이 간구는 주기도의 핵심을 형성한다.  예수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이 여기에 나타난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미 앞당겨 현재화되고 있다고 복음서는 보도한다. 이 간구는 역사의 모든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래를 가리키며 이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가 올 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여지고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4. 셋째 간구 : 당신의 뜻이 …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희랍어 본문에 이 간구는 “당신의 뜻이 일어나소서”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간구는 인간과 이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행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가 말하는 “당신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 세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현실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은 물론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는 세상인 것이다.

5. 넷째 간구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삶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태도를 예시하는 이 기도는 나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을 간구하며 “매일의 양식” 곧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는 정도만을 간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의 양식”의 앞당겨 일어남이며 “본질적인 양식”, 즉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6. 다섯째 간구 :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갚아야 할 것을 면제받는 길 곧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길은 다른 삶이 우리에게 갚아야 할 것을 면제하여 주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삶이 우리에게 갚아야 할 것은 소위 말하는 “죄”일 수도 있고 경제적 “빚”일 수도 있다.  이것은 구약의 안식년벅과 희년법에 일치되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주기도를 “진짜 희년의 기도”로 간주할 근거를 제공한다.  이 간구는 인간의 공로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으나 우리가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아무 전제없이 용서했다는 사실에 전제하기에 인간의 공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7. 여섯째 간구 :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악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힘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다.

8. 일곱째 간구 :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은 그 이전의 간구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주기도의 정점을 형성한다. 이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간구는 궁극적으로 악을 폐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오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는 간구와 상통한다.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악한 일들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폐기하고 그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리라는 결단의 표현이기도 하다.

 

제 5 편 십자가와 부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ⅩⅥ. 십자가의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십자가 죽음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원인

1. “신성 모독자” = “사회체제의 혼란자”

예수는 그 당시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복음서는 보도한다. 그는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성전을 비판하였다. 성전 폐기를 선언하면서까지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 실패하였음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예수를 가리켜 대제사장은 “하나님 모독자”라고 정죄한다. 그리고 율법과 성전과 제의를 상대화시키는 것은 곧 그 사회의 기초와 전 체제를 뒤흔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단순히 신성 모독자가 아니라 “사회 체제의 환란자”요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자”로 기소될 수밖에 없었다.

2. 정치적 죄명으로 처형당한 예수

예수는 사회주의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그 사회의 종교적 권력과 대립함으로써,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권력과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치종교 상태에 있던 지배계층에 대한 도전은 로마의 정치 세려과의 갈등을 이미 그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정치적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다. 그는 또한 젤롯당과는 다른 차원에서 정치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종교적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할 때 당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귀결이었다.

3.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였는가 - Antisemitism 의 원인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일차적 원인이 없는 동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빌라도는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아주 간교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인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책임은 면하고 원하던 목적은 달성할 줄 아는 정치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빌라도가 호의적으로 그려진것은 기독교의 반유대두의를 보여주는 실례인데, 이것은 복음서가 편집되던 당시 기독교와 유대교는 정치적 입장으로 인하여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승인 되었고 유대교는 유대의 반 로마 혁명으로 인하여 로마는 물론 기독교와도 대치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유대인에게 예수의 피값을 돌리게하려고 빌라도를 예수의 죽음에 그리 큰 원인이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잇는 것이다.

4. 젤롯당원과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젤롯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 역시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사회가 정치,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을 너무나 억압하였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대하여 당파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 안에 깃들인 인간의 자기 의와 제한성을 알았기 때문에 폭력을 뛰어넘는 고난의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는 원칙상 폭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 앞에서 폭력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5.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의 죽음은 아름답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은 비참하였고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예수의 지상의 삶으로부터도 추상화되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상황으로부터도 추상화된다. 예수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능동적인 수난(passio activa)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한 것은 하나님의 옳으심에 대한 예수의 질문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하나님에게 맡기며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예수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고난의 모습을 보였지만, 깊은 단절로 보이는 이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양자의 분리를 보지 않고 양자의 깊은 하나 됨을 볼 수 있다.

 

ⅩⅦ. 왜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인가

1. 속죄제물 사상의 문제점과 타당성

물론 예수는 부활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그의 삶 자체는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이 어떻게 구원의 사건이 되는가? 신약성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단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지 않고 여러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그 중 중요한 몇가지를 든다면, 1.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해석된다. 하나님 자신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2. 예수의 죽음은 의로운 예언자의 운명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3.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속죄제물의 죽음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또한 속전(贖錢)으로 해석되는데 그의 죽음은 사탄의 세력 곧 죄와 죽음에 묶여 있는 인간을 해방하기 위하여 예수가 치룬 속전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로 해석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해석된다. 

이것들 중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속죄제물의 표상인데, 이것은 예수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희생제물의 죽음이요 이러한 뜻에서 구원의 사건이라는 해석이 교회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요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이다. 그러나 이 속죄제물 사상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졌다. 첫째, 속죄제물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죄의 용서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선포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응보의 원리에 근거하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약성서의 고백에 모순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속죄제물사상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깊은 고뇌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다른 차원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그것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 동시에 제한성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2. “이 시대의 악”과 “이 시대의 고난”을 계시하는 예수의 죽음

한 인간의 존재는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 예수의 죽음도 그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고난에는 힘 있는 자들의 힘 없는 자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 의로운 자에 대한 불의한 자들의 억압과 폭력이 나타나는 동시에, 힘 없는 자들과 의로운 자들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 나타난다.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이 시대의 고난의 거울이고, “묵시사상적 고난”을 대변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고난 속에서 악은 제 모습을 드러내며 결정적으로 극복된다. 그러기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악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의 사건이 된다.

3. 율법을 완성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과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죽음 속에서 결정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연대와 이 세상의 연약한 자들과의 연대를 그의 죽음 속에서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율법의 근본목적을 삶으로써 실천하였기에 구원은 이제 율법을 떠나 예수 자신에게로 옴겨진 것이다.

4.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예수의 십자가 서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그의 나라를 세움과 결합되어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참 흔적은 십자가에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5.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의 죽음

  - 속죄제물 사상의 새로운 해석과 수용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법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범주에서 “속죄제물”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예수의 “자기를 내어줌”인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서로 자기를 내어 줄것을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죄된 본성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심연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아들의 운명 속에 함께 하면서 참된 사랑의 제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 예수는 제물(victima)인 동시에 새 창조의 승리자(victor)이다.

6. 십자가의 사건은 단지 “민중사건”인가

민중사건이라고 말하는 동기는 이해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민중사건 이사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죄가 용서 받으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이리하여 죄인과 하나님이 화해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하나님의 사건”이요 “구원의 사건”이다.

 

ⅩⅧ. 부활의 능력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 부활의 정치적 해석학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을 신앙의 틀에서 기술한다. 그리고 그것은 묵시사상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심판 사상과 연결된다. 묵시사상의 기다림의 동기는 “하나님의 의”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승리에 대한 기다림과 생성되었으며 이 희망의 표현이었다. 이 신정론의 틀에서 예수의 부활은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역사의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앞당겨 일어났음을 말한다.

2. 묵시사상의 틀에서 본 부활의 의미

예수의 부활은 묵시사상의 틀로부터 유래하지만 그것은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의롭게 하는 의”로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게 진리가 있고, 그를 처형한 자들은 거짓이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뜻한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예수는 참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종말적 메시야로 밝혀진다. 궁극적으로 부활은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예수가 선포한 말씀의 육화(肉化, incarnation)였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계시의 사건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는 사건으로서 보편적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죄와 죽음을 그 특징으로 가진 이 세계 속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돌입”을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다.

3.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 역사적, 비판적 방법의 공헌과 문제점

신약성서 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분이 부활하였다는 사실 자체이지,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적 역사과학의 측면에서 볼때 예수의 부활은 검증받지 못하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게 된다. 근대과학은 인간에게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지닌다. 첫째,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역사를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이 있다. 사실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자체 속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사건의 생동성 가운데서 파악하지 못하기에 과거의 역사를 그의 의미 연관 속에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비판적 방법에 의해 조명된 대상은 현재에 대한 의미와 타당성을 상실하고 단순한 과거로 전락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은 내적 동질성을 가지기 때문에 유사성 혹은 유비성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사건은 역사가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사건으로부터 파악되고 판단된다. 이리하여 각 사건의 특수한 점은 무시된다. 그리고 이것은 객관적 검증만을 인정하기에 하나님의 역사활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4. 역사를 열어주는 예수의 부활 - 역사의 새로운 개념

역사적 학문들은 신적 현실을 부정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개연성을 가진 판단만 할 뿐이지만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개연성의 판단에 근거될 수 없다. 인과법칙의 상관관계 역시 예수의 부활에 적용될 수 없는데 그것은 부활은 인과관계의 고리에서 일어나는 서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예수 부활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에 그것은 역사의 “미래적인 것의 옴”인 일들의 연속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이 세계의 부정적인 것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세워지는 과정이다. 예수의 부활은 에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나는 죽음의 세력을 직시케 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역사와 그것의 미래를 보게 한다.

5. “아날로기아의 원리”와 “모순의 원리”

역사적 이해는 아날로기아의 원리를 전제하지만 부활은 모순의 원리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을 그의 다름과 함께 허용하고 상대방을 나와 다름 속에서 인식하는 모순의 원리는 자기와는 다른 부활의 사건 속에서 참 자기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6. 예수의 부활은 육의 재활인가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의 부활인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 양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더이상 죽음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철저히 변화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 개년들과 표상들을 가지고 예수의 부활을 적절히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일어난 사건이지만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사건으로 존속하는 것이다.

 

맺음말 : 예수는 누구인가

1.예수는 본질적으로 메시야다

예수의 많은 칭호들 가운데서 예수의 존재를 가장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칭호는 “메시야”칭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존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세우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자 메시야의 칭호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무력하심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는 생에 마지막에 답변될 수 있는 것이지, 삶의 과정 속에서 답변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침묵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메시야적 존재를 문제삼음으로써 그의 마지막 운명을 앞당기지 않는다.

2. 메시야의 기능 - 구원의 메시야적, 생태학적 이해

예수 메시야는 행위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는 묵시사상적 메시야라기 보다는 죽음과 희생으로 구원하는 구원자이다. 그리고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관심하였기에 그의 구원은 인간적 경계를 넘어서 생태계까지 포괄하는 구원론적 범주를 가진다.

3. 하나님의 아들

이 칭호는 예수의 존재의 유래를 나타내기보다 그의 법적 위치를 나타내는 기능론적 용어이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대리하는 자이다.

4. 주(퀴리오스)

이 칭호는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적, 인종적, 신체적, 생태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메시야 예수를 그들의 주로 가져야 하며 그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메시야 예수가 역사의 완성자이자 주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5. 사람의 아들 - 참 하나님, 참 사람 

이 칭호는 종말의 심판자와 구원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한 그분은 인류의 아들 혹은 인류에 속한 자 곧 “사람의 아들”로 계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6. 친구, 형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사랑과 존경의 관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 친구요 형제이다.

7.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부여한 삶의 규정 곧 “함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모든 인간의 삶의 규정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과 자연과 조화된 가운데서 산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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