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예배의 정신

하나님아들 2021. 9. 24. 20:16


예배의 정신









A. 예배 공동체로서 교회

1. 서론

현재 한국인 교회는 예배를 지나치게 중요한 나머지 모든 기능이 예배 기능에 종속되어 버린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예배란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기능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교회에서는 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바른 신학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형식의 예배를 채택하고, 다른 교회는 저런 형식의 예배를 취합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상황에서 예배는 한마디로, 미국의 실용주의를 교회에 도입하여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예배와 그 형식을 ‘자신들이 좋을 대로 개조하고, 자신들에게 은혜받기 좋은 형태를 그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경험이란 찬송이나, 성경봉독, 설교, 기도로 하는 봉사들이 예배의 촛점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흠향할 만한 예배를 드린 아벨과 자기가 좋을 대로 예배드린 가인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는 제사와 하나님이 열납치 아니하시는 제사입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4:4-5을 찾아서 읽어 보면서 그들의 예배속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같이 설명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무엇이 예배이고, 그 예배에서 찬송이나, 설교나, 기도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어떤 분으로 부터, 예배에서 감격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깊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격해 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예배. 그런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2. 예배란 무엇인가?

A. 하나님과의 만남 감격이 있는 예배란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기다리고, 정결케 하고, 성산에 올라가고, 그래서 하나님과 만나 계약을 체결하는 전 과정을 우리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이런 예배의 정신은 출애굽기 19장과 신명기 9:10-14에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교회로 부르시며,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주님께 모이고, 주님을 기다리고,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주님이 임재하여 그들과 아름다운 계약, “곧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고 하는 놀라운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런 과정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 사도는 "너희의 몸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하면서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1-2) 고 권면합니다. 여기에는 드림이라는 예배의 기본 틀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구약의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드림과 받음과 나눔의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만남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계약”입니다. 예배의 가장 최상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 곧 하나님이 우리의 드림속에 임재하는 것이고, 이런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무엇-말씀과 은혜-를 받는 것이고, 이렇게 받아진 은혜를 공동체 속에서 나누는 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의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계약관계를 맺게 됩니다. 웨버는 예배를 정의하기를 "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만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한 예배,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근거한 '예배의 갱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오늘의 복음주의 교회는 실제로 실패한 예배 증후군의 병마로부터 고통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실패한 예배 증후군의 한 단적인 예들을 보면, 어떤 교회들은 지나치게 드림에 신경을 씁니다. 어떤 교회들은 지나치게 받음에만 집중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지나치게 나눔에만 치중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의 병마로 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드림과 나눔과 받음이 균형을 이루는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이런 만남을 통해 내가 그분의 백성임을, 또 그 분이 나의 하나님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의 복음속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예수님을 바라다 봅니다 (요 4장). 이런 만남 속에서 에배라는 단어는 약 10번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의 총 복음서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13번 언급되는 것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요한복음 4장의 사건속에서,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와 더불어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언급된 예배자는 숨겨진 하나님을 찾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나타내신 하나님을 찾아 예배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B. 드림과 받음과 나눔의 형식

1) 드림

예배란 이런 하나님의 만남이 ‘드림이라는 형식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드림을 통해서 지난 한 주일을 돌아다보면서 세속에 묻은 때를 과감히 죽여 씻어 내 버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보혈로 우리가 거룩하게 정화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가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은 곧 얻는 것이다"(빌1:21) 라는 말씀과 같이,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짐으로 거룩하게 정화시키는(Holistic Mind Setting) 것입니다 (빌 2:1-13).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성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며, 하나님을 만나며, 그 분이 주시는 놀라운 변화와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예배를 통하여 성도를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인으로 변화(Transformation)시키시는 것입니다.

(1) 송축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일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송축과 그 분의 구속에 대한 기쁨이 포함됩니다. 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은 ‘그의 지으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반응하는 적절한 신앙’입니다. 고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배의 순간에 그 백성들은 축제의 심정으로 나아오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느헤 미아 8:9을 읽어 보십시오. “그 때 느헤미아, 그 주지사와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와 레위인들이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날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슬퍼하지 말며, 눈물흘리지 말라. 모든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울었기 때문이며, 느헤미야는 말하되 가서 선택된 음식과 달콤한 음료수로 즐기며, 준비되지 아니한 이들에게 그것을 보내라. 이 날은 우리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다. 슬퍼하지 말라.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의 힘을 즐거워하라” (느 8:9-10).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바들에 대한 감사와 그로 인한 축제와 송축들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종종 교리의 역사를 살펴 보면, 예배는 모든 것을 가지신 이에게 무엇인가를 드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으로 비추어질 때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배란 우리가 전혀 하나님을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곧 믿는 자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이런 드림은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하여 적절한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숭상이 기독교의 우선되는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드림이라는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러면, 우선 송축을 우리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무엇을 송축해야 합니까?

(ㄱ).송축이란 하나님이 지극히 지고하신 분으로서, 그 분이 누구시며 그 분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확신함을 가지고, 이것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영예를 돌리며,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ㄴ). 송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분이 지으신 세계, 그 자연과 인간과 특별한 계시를 향하신 위대한 계획에 내 자신이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구속사역을 이루셨다면, 내 자신이 그 구속사역의 혜택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ㄷ). 송축함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시편 93편).

(2) 섬김과 봉사

이런 몸의 드림은 ‘섬김’으로 연결됩니다. 독일 사람들은 Gottesdienst 라는 말로 예배를 나타내는데, 문자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섬김” 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섬김의 신약적 개념의 중심은 헬라어 “디아코네오”라는 단어로서 이것으로부터 영어 단어 “집사”가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종의 상태보다는 섬김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22:27, 벧전 1:12, 히 6:10). 이런 섬김의 행동은 신약 신학에서 서로에 대한 섬김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예비의 밤에 제자들에게 행하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그 분의 초대자인 제자들에게 참된 손님으로서 웨이터의 역할을 취하셨습니다 (눅 22;24-27). 바울은 성도를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건축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3:9).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섬김는 이 건축물을 서로 짓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그 몸과 그 가족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예배를 하나님에 대한 섬김, 자신에 대한 섬김, 이웃에 대한 섬김이라고 강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섬김이라고 표현합니다. 섬김으로서의 예배는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영적인 공동체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일하시도록 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예배를 통한 드림의 봉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 공동체, 한 건축물을 일으켜 세웁니다.

(3) 드림의 형식

이런 드림의 형식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정의가 되고 있습니다 (요 4:23). 여기서 “영” 이란 성령을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영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예배의 자세는 무릎을 꿇거나, 서 있거나, 절을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님은 예배하는 행동에 앞서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잘못된 태도는 잘못된 행동을 가져옵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앞에서 정직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받음

(1) 받음의 형식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 예배

성도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런 만남속에서 성도는 무엇을 받을 것인가? 그 분의 말씀이며, 그분의 은혜이며, 그분의 용서이며, 그 분의 사랑입니다. 이런 받음이 없는 예배란 죽은 것과 같습니다.

(2) 받음의 내용

유월철 만찬 석상에서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이며, 그들이 누구의 것인가를 회상합니다. 비록 주의 만찬이 그리스도인들의 유월절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그 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또, 동시에 그분이 우리를 섬기시는 그 섬김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요 13장). 이런 받음이 없이는 우리는 진정한 만남이 일어나지 않고,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실로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가진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의 기초가 되는 ‘몸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고대 영어에서 “Lord”는 “loaf”(빵 덩어리)와 “지키는자” 라는 단어가 묶어져서 된 단어로 “빵을 지키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주님은 신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그의 몸과 피는 말씀속에서 우리 영에 역사합니다. 말씀은 곧 그 분의 성육신된 몸입니다.

(3) 받음의 결과

이런 받음 속에서 성도가 기대하는 결과는 성도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곧 정결함과 성화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나눔

(1) 나눔의 형식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예배

이런 받음을 통해 성도는 서로 나누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동물들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먹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혼자 먹는 것 만큼 고통 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고 씹지만 말이다. 믿는이들의 교제는 함께 영적으로 육적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다. 이것을 우리는 나눔이라고 말하고, 이렇게 함께 나누는 형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규칙적으로 모여 그들의 집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식사, 곧 주의 만찬만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고전 11:23-25을 찾아 읽으십시오.

(2) 공동체로 만나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런 성만찬 속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T. S. Eliot 는 그의 시 "The Rock,"(바위)에서 “ 바위에는 생명이 없다”고썼습니다. 바위에는 공동체가 없으며 하나님의 찬양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함께 모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으로서 모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었습니다. 확실히 거기에는 장소적 개념이 있었습니다 (장막 혹은 성전). 거룩한 성소와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성경적 예배의 필수적인 성분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아래 모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백성의 모임은 그 국가가 실제로 형태를 갖추는 시내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명기 9:10,14, 출 19장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많은 신약의 구절들은 함께 모이는 행위들과 공동체적 연대감이 바울의 가르침에 중요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이단어는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백번 이상이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모아진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 성경에서 행한 공동체적 강조점이 많이 지워지고 제거되었습니다. 경건은 개인이 하나님께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많은 종교적인 문제점들, 곧 예배란 내가 선택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오늘 현대 예배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지게 되었다. 그분을 만나 그분으로 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면, 받은 그것을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올라간 이들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구원의 공동체의 공동체적 연합이요, 회합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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