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용어들의 문제
(삼위일체 교리의 해명을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의 문제. 1-6)
1. 하나님은 본질이 무한하시고 영적임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적인 본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일반 사람들의 헛된 망상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물론 세속 철학의 교묘한 이론들을 반박하는 데에도 충분하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은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거처(居處)로 자주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셔서, 동시에 땅 위에도 충만히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더딘 마음들이 땅 위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흔들어 깨우시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 저 너머로 높이 올리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원리를 상정하여 마귀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마니교도들의 오류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유일성을 무너뜨리고 그의 무한하심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몇몇 증언들을 왜곡시키려 하나, 이는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본질이 그릇되어 있으므로 그런 몹쓸 미친 짓이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神)의 의인화(擬人化)를 주장하는 자들(Anthropomorphites)도 성경이 마치 하나님께 입과 귀와 눈과 손과 발이 있는 것처럼 자주 묘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형체를 지닌 하나님(corporeal God)을 꿈꾸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들의 그릇된 사고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형식의 말씀들은 우리의 연약한 역량에 맞추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맞추시기 위해서, 그렇게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무한히 낮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신 것이다.
2. 삼위로 계신 하나님
그 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또 다른 특별한 표지로써 지칭하셔서 자신을 우상들과 더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분명히 삼위(三位: three persons)로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만 그저 헛되이 우리 머리에 맴돌 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얻을 수가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삼중적 존재시라거나 하나님의 단일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는 식으로 상상하면 안 될 것이므로, 여기서 모든 오류에서 지켜 줄 수 있는 간단하고도 손쉬운 정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하므로, 먼저 그런 비난이 정당한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히 1:3)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성자(聖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聖父)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밀초 위에 찍혀진 인(印)처럼 그 자신이 성부의 본체를 자기 속에 나타내셨다는 식으로 해석했는데, 이를 따라서 본체(휘포스타시스)를 본질(essence)과 동등한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잡스럽고 어리석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요 나뉘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 자신 속에 전체를 - 어떤 분할이나 축소나 없이 완전한 상태로 - 포괄하고 계시므로, 성자를 그런 의미에서 성부의 “인”(印: stamp)으로 본다는 것은 부당하며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그의 정당한 본성 속에서 구별되어 계시면서도 성자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시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본체(휘포스타시스)를 성자 안에서 나타내신다고 말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 앞에 있는 말씀 - 곧,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는 것(히 1:3) - 도 이와 일치한다. 사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자에게서 비쳐 나오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가 성부 안에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또한 이 사실에서 성자의 본체가 그를 성부와 구별지어 준다는 것도 쉽게 확인하게 된다.
성 령의 경우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는 이제 곧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란 여러 가지로 분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휘포스타시스)가 계신 것이 되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도 persona(위[位]: person)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처럼 분명한 사안에 대해서 이리저리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부당한 결벽증이요 심지어 완고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subsistence”(실재)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많은 이들은 “substance"(본질)를 이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왔다. 뿐만 아니라 “persona”도 라틴 교부들 사이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희랍의 교부들도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가 계시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들도 동일한 의견임을 입증하고 있다. 라틴 교부든 희랍의 교부들이든, 단어 사용에 있어서는 다소간 서로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나 "위" 등의 용어 사용의 정당성
이단적인 사람들이 “위”(位)라는 단어에 대해 아우성치고, 또 쓸데없이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그 용어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반대하며 떠들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거명되며 또한 그 각 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러면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는 안 계시다는 우리의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성경이 선언하고 확증해 주는 것을 그저 설명해 주기밖에 달리 하는 것이 없는 이 단어들을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성경과 이질적인 용어들을 이리저리 사용하여 분란과 논쟁의 온상이 되게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용어까지도 완전히 성경의 테두리 안에 제한시키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한다. 말싸움에 지쳐서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서로를 혐오하여 언쟁하느라 사랑이 깨어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음절 하나하나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용어들을 가리켜 “이질적”(異質的)이라 칭한다면, 분명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지 않는 모든 성경 해석들을 다 정죄하는 그런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다. 만일, 한가롭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며, 그리하여 덕을 세우기보다는 분쟁을 조장하고, 사리에 맞지도 않고 아무런 유익도 없이 사용되며, 경건한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함을 오히려 흐리게 만드는 그런 것을 “이질적”이라 부른다면, 나도 전심으로 그것을 건전한 판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경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이란 한결같이 아둔하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쓰는 우리의 언어 역시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무언가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곧, 생각과 말에 대한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아서 그것에 준하여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난해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 그것들을 좀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지 - 성경의 진리를 높이고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그것도 지극히 삼가는 자세로, 필요한 경우에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실례들이 있다. 더욱이 “삼위일체”나 “위” 등의 용어들을 교회가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된 마당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누구라도 그 용어들의 색다른 점을 책잡는다면 그것은 진리를 쉽고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을 책잡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리의 빛을 거스르는 자로 판단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4. “삼위일체”나 “위” 등의 용어 사용의 필연성
그러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된 비난을 늘어놓은 자들을 대적하여 진리를 바로 세울 때에는, 이런 색다른 용어들(이를 색다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이 매우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결하고 건전한 교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일에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경험을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은 담대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분쇄하지 않으면, 민첩하게 요리조리 빠져 도망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이단들이 만들어 내는 논쟁들로 괴로움을 겪을 때에, 불경스러운 자들에게 조금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 그들은 표현상의 애매함을 일종의 은신처로 삼기 때문에 - 조금도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이 완벽한 용어들로써 자기들의 입장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증거가 너무도 명백하여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였고, 자기의 처신이 올바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척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피조물들처럼 창조되셨고 그가 존재하게 된 시발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그의 다재다능한 간교함을 그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시오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consubstantial)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라는 단어를 지극히 사악하게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의 불경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진정으로 전심으로 고백했더라면, 그가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연 누가 감히 이 옛 사람들을 향하여 지극히 하찮은 한 단어 때문에 뜨겁게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혔다고 하며 그들을 분쟁과 싸움을 조장하는 사람들로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하찮게 보이는 작은 단어 하나가 순전한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과 불경스러운 아리우스주의자들을 구별 짓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가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이름들은 어떤 구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이며, 그 비슷한 경우들을 다른 것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말을 바꾸어 자신은 하나님이 권능이 있으시고 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시다는 뜻으로 말한 것 이외에는 전혀 말한 바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성부가 성자요, 성령이 성부이시니 계급도 구별도 없다고 하여, 옛 노래를 다시 부른 셈이다. 그 당시 마음에 경건을 지닌 의로운 학자들은 그 사람의 사악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특성의 존재들이 있음을 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분명하고도 단순한 진리로써 그 교활한 간계를 대적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은 한 분 하나님 안에 - 혹은, 결국 같은 의미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 삼위가 일체로 계심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5.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그 한계 그러므로 이 용어들이 경솔하게 만들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을 거부하여 경솔하며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고, 성령도 성자가 아니시며, 그들이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신다는 이 믿음에 동의한다면, 위의 용어들이 차라리 묻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이지 하찮은 단어 따위에 문제를 삼고 격렬하게 싸울 만큼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다. 살펴보건대, 고대 교회의 저자들도 이 문제들에 대해서 지극한 경건으로 통일성 있게 논하면서도, 자기들끼리 견해가 다르고, 그들 개인으로도 항상 일관성 있게 진술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의회들이 채택하고 힐라리우스(Hilary)가 변호한 문구들을 보라. 그 얼마나 이상스러운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때때로 이에 대해서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의견을 토로하고 있는가?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의 견해가 서로 얼마나 다른가? 여기서 그런 차이를 보여 주는 실례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라틴 교부들은 호모우시오스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consubstantialis(영어로는 consubstantial, “본질이 동일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부와 성자가 한 본질이심을 나타냈고, 그리하여 “essence” 대신 “substance”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제롬(Jerome)은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안에 세 본질(substances)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성모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힐라리우스의 글에는 하나님 안에 세 본질이 계시다는 말이 백번 이상이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제롬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에 대해 얼마나 혼동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는 진술에 무언가 독(毒)이 숨겨져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시 경건한 의미로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런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믿었고 또한 그런 신념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혐오하던 동방의 감독들을 상대로 순전하게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였다면 - 고의적으로 부당하게 비난한 것이 아니라 -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모든 세속 학파들이 우시아를 휘포스타시스와 동등한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주장했는데 - 이 주장은 일상적인 단어의 용례를 통해서 사실이 아님이 완전히 드러난다 - 여기서 그는 분명 거의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신중하고 정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휘포스타시스가 이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라틴 교부들에게는 전연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그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라틴 교부들이 그 헬라어 용어를 모방했던 것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Socrates)가「삼부작」(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휘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식한 사람들이 그 단어를 이 문제에 잘못 적용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그 힐라리우스는 이단들이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있다. 곧, 그들이 잘못 처신하여 마음속에 경건하게 담고 있었어야 옳을 것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처신하는 자들은 부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들이요, 또한 금지된 것들을 파고드는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 그는 감히 새로운 용어들을 도입하는 것에 대하여 길게 변명하고 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자연스러운 이름들을 열거한 다음, 이 이름들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언어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요, 인간의 지각의 범주와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의 경우에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였던 고대의 매우 간결한 신앙고백 이외에 다른 어떠한 신앙고백도 작성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알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들을 칭송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변명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인간의 언어가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므로, 어쩔 수 없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 본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기 위한 것뿐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거룩한 사람들이 보여준 이런 신중한 자세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곧, 혹시 우리가 고안해 낸 용어들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교만과 완악함과 어울리지 않는 혈기로 그렇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그런 반대의 태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마구 독필(毒筆)을 휘두른다든지 가혹하게 비난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그런 용어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그 사정을 깊이 생각하도록 하며, 점점 그런 표현 형식의 유용성에 익숙해지기를 기꺼이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 편으로는 아리우스파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를 대항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에 그 문제를 피해 갈 기회가 없어지는 것에 격분한 나머지 경솔히 처신하여 아리우스나 혹 사벨리우스의 제자들로 오인 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지으심을 받았고 따라서 그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고는 자기 파 사람들의 귀에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신자들과 똑같이 - 물론 특별한 특권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 성부와 연합되어 계시다고 은밀하게 속삭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consubstantial)고 말하라. 그러면 성경에 아무것도 첨가시키지 않으면서, 이 변절자가 쓰고 있는 가면(假面)을 완전히 벗기게 될 것이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 안에 어떤 구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삼위가 계시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는 여러분이 삼신(三神)을 거론하고 있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요, 그것으로 그의 공허한 장광설이 그쳐질 것이다. 혹시 미신적인 염려에 빠져 있어서 이런 용어들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한 분”을 이야기 할 때에는 그것이 “본질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한 그 사람이 “한 본질 안의 세 분”을 말할 때에는 이 삼위일체의 각 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꾸밈이 없이 순전하게 고백한다면, 구태여 단어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나는 단어들에 대해서 문제를 삼으며 고집스럽게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모두 은밀하게 독(毒)을 조장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해왔다. 그러므로 희미하게 진술하여 그들을 기분 좋게 해 주기보다는 의도적으로라도 그들에 도전을 하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6. 위격의 구별성 그러나 단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고, 이제는 그 단어들의 의미하는 그 실체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겠다. “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하나의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른 위격들과 관계하는 동시에, 비공유적(非共有的)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subsistence)라는 용어를 “본질”(essence)과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만일 말씀이 그저 하나님이시고, 그러면서 그 외에 다른 특징적인 표지가 전혀 없었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의 말(요 1:1)은 잘못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곧바로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덧붙임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의 단일한 본질이심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성부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가 없으므로, 실재의 개념이 제기된다. 그런데 그 실재는 본질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본질과 구별되는 것이다. 자, 내 말의 뜻은, 세 실재들이 각기 다른 실재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의 특성을 통해서 다른 실재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 “관계”가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저 하나님이라고만 언급되고 그 외에 다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을 때에는, 그 이름이 성부에게는 물론 성자나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를 성자와 비교하게 될 때에는 각자의 특성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위에게 개별적으로만 해당하는 것은 상대방과 공유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부를 구별하는 하나의 표지로서 그에게 속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성자에게 적용될 수도 없고 또한 성자에게 전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로 취하기만 한다면 다음과 같은 터툴리안의 정의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하나님 안에 있다.” [기독교강요,제1권,크다사,pp.144-153]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0) | 2021.10.18 |
---|---|
삼위일체론의 '최소합의선'을 찾아서 (0) | 2021.10.12 |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성경 말씀 (0) | 2021.09.08 |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가? (0) | 2021.09.08 |
삼위일체(三位一體) (0) | 2021.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