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Power Encounter 신학의 문제점

하나님아들 2021. 9. 22. 00:50

   Power Encounter 신학의 문제점

 

I. 서론

 

와그너는 Power Encounter 가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숭배하고 두려워하는 어떠한 거짓된 신이나 영들보다도 예수님의 능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가시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와그너 1990:257)이라고 하였다.

선교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잃어 버려진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노력이며 성경은 이것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행26:18) 표현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긴장과 대치가 일어나는 전쟁터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한편 계몽주의 시대 이후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을 거부하고 과학주의 경험주의 합리주의에 기초한 서구 세속주의 세계관과 그 영향을 받은 서구 신학은 사탄의 실제에 대한 전투력을 상실해 왔다.

Paul G. Hiebert 는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서구 세속문명의 전달자로 봉사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Wagner 1987:52) 이런 이해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서구 선교신학은 동양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새로운 인식이 매우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동양의 사상을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초자연적 세계를 전혀 무시하고 있던 서구 세계관이 더 이상 자신들의 과학적, 경험적 가치 척도가 초자연적 문제에 대한 해석학적 기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비평적 상황화(Critical Contextualization) 기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서구 세계는 동양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 시작했고 그것을 또한 신학화(Theologizing)하여 능력신학(Power Theology) 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게 되었다. 

 

John Wimber 는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에서 선교 현장을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부딪혀 싸우는 전쟁터로 보고 현대적 개념의 ‘능력대결’(Power Encounter) 이라는 원리를 만들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는 상황을 만드시기도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과 사탄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탄과 대등한 관계로 전락시키는 엄청난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이 사탄마져 주관하신다고 말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주권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현상학적으로 이해하여 많은 위험을 내포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어느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는 지역신( Local-gods )으로 이해되는 문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J. I. 패커 1980: 5-15) 문제를 오해한 비 개혁주의적이며 오히려 혼합주의적 사상인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Power Encounter 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고 또한 개혁주의 진영의 “미온적 복음 전파”를 극복하여 “적극적 복음 전파” 개념을 연구하고 능력 있는 복음 자체의 역사를 현장에서 나타내고자 한다. 

 

1. 문제 제기

 

근래 한국에는 능력대결(Power Encounter)에 대한 많은 가르침과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Freedom in Christ” 나 죤 윔버의 Vineyard Church 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어 계속 교계 잡지, 신문에 이에 관한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아무런 길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지켜 보아야 한다’ 는 궁색한 말로 조심스럽게 문제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한국교회는 선교 제 2세기를 맞이하면서 벌써부터 둔화된 교회성장과 교회의 무기력증을 해결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성령론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능력 (Power) 이란 용어를 수입하여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적 상황이해가 가져온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학이야 어떠하던 교회만 성장하면 그것이 곧 바른 것으로 인정되는 영적 혼란기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수많은 이단들에게 복음의 아름다움을 더럽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다미선교회의 재림소동,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 탁명환 피살사건, 김기동 귀신론(류광수의 다락방), 영생교사건, 아가동산 등등의 이단들의 활개를 개혁주의 교회는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선교 현장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심지어 개혁주의 진영의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개혁주의 노선을 포기(?) 하고 오순절 신학으로 사상을 정립하거나 이단적 사상 [예: 귀신론, 류광수의 다락방 등에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교회(본 교단, 예장 합동-총신대학교, 기타 개혁주의 표방교단들) 가 엄청나게 많아 총회적 문제로 비화되어 이단으로 정죄 되기도 하였다.] 을 전파하는 경우도 있게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성령론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정리하고 Power Encounter 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정립해서 더 이상의 개혁주의의 관점이 무기력한 것으로 오인되는 혼돈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에따라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Power Encounter 를 바로 이해하고 보다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2. 목적

 

본 논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령론과 선교학의 관계, 성령론과 복음전파의 역동성 문제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을 분명히 정립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또한 교회 성장과 현지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위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의 능력이 성령 안에서 역동적이며,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적극적인 복음전파를 제삼 확인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더 이상의 혼돈은 사탄에게 많은 아지트를 확보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혼돈이야 말로 사탄의 궤계에 말려 드는 것인줄로 안다.

 

 

연구질문 

1) Power Encounter 가 생성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2)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Power Encounter 신학의 문제점은?

3) 개혁주의 신학은 Power Encounter 를 무시해야 하는가?

4) Power Encounter 개념의 긍정적 측면은 무엇인가?

5) Power Encounter 란 용어가 성경적으로 적합한가?

6)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은 적합한가?

 

3. 목표 

 

1) Power Encounter 이론이 발생한 신학적 역사적 배경을 점검하여 한 시대의 신학적 기류가 당시에는 옳은 것이라고 여겼지만 시대가 흘러가면 그 사상의 근원적 오류가 발견되고 또 발전된다. 이런 관점에서 배경을 이해한다.

2) 역사적 반동으로 일어난 사상은 그 자체로서 이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탄생한 근거를 살펴 이것이 잘못된 전제에 의해 생겨난 것임을 증명하고 그의 신학이 개혁주의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것이다. 

또 존 윔버와 피터 와그너의 사상이 가진 문제점을 검토하여 개혁주의적 비판을 가할 것이다.

3) 그러나 Power Encounter 를 근간으로 하는 윔버와 와그너의 신학이 개혁주의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교회성장과 선교의 확장에 보다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Power Encounter 란 용어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개혁주의적 개념인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근거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Visible Appearance)” 이란 용어로 바꾸어야할 것을 제창한다.

 

4. 가정 및 가설

 

1) 모든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고 선제한 사상의 발전, 변형된 것이다. Power Encounter도 전제와 배경 위에 세워 진 것으로 전제한다. 

2) 구원얻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인격적으로 연합하는 것’ 이라고 전제한다. 이는 교리적 고백과 인격적 고백을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즉, 교리적 고백자가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거듭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중대한 실수로 규정한다.

3) 피터 와그너와 존 윔버는 미국의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교회성장 신학이 번영신학으로 발전되었거나 발전될 경향이 있다고 전제한다.

4) 치유와 가시적 능력의 현현에서 힘의 원천은 성령이 아니라 말씀이며 말씀을 성령이 조종하시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령 자체를 능력의 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밖에 없고 능력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하며 지금은 ‘성령의 시대’ 라는 전제는 비성경적이라고 규정한다.

5) 개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을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설복(박영선, 하나님의 설복) 하셔서 결국 본인의 인격이 영접 행위의 주체가 된다. 예수를 영접함에 있어서 최종적인 결정은 개인에 달려 있으며 인격이 거절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원리를 귀심들림(Demon Position)에 적용한다. 귀신들림은 반드시 본인의 결정에 달려 있으며 귀신들린 사람도 개인의 인격이 있어서(매우 위축되고 일그러져 있으나) 그 개인이 내재한 사탄을 거절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에게 불순종을 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말씀안에서 귀신을 부정할 수 있고, 귀신들림의 상태를 싫어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실증할 것이다.

 

5. 논문의 중요성

 

하나님은 능력대결이란 용어가 있기 전에도 자신을 계시하셨고 변함없이 행하셨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과 전제에 따라 다르게 보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비 비상성( 非 非常性) 을 볼 것이며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한 계시의 수단임이 증명될 것이며 사역에서는 말씀을 중요히 여기는 전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말씀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주권에 따라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을 믿는다. 이 믿음은 연약해진 교회와 선교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며 헛된 새로운 비방을 찾아다니는 사역자의 발을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상고하는 본래적 사역으로 이끌어 줄 것을 믿는다.

 

6. 연구 방법

 

역사적 방법( Historical Method ) 으로 생성배경 부분을, 2, 3, 4 장의 문제점은 서술적 방법( Descriptive Method) 으로

5 장의 실례는 사례 연구 방법( Case Study Method) 를 사용할 것이다. 자료는 도서관 , 학술잡지에 주로 근거하고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할 것이다. 

 

7. 논문의 한계

 

본 주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제를 접근함에 있어 개혁주의적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지식과 자료의 한계가 많았다. 지역 악마 사상(Territorialism) 이나 영적 지도(Spiritual Mapping) 개념은 비교적 최근 유행하는 개념으로서 최근 자료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김성태 교수의 논문( 신학지남, 1995)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또한 개인의 사례연구에 있어서 객관성을 찾는데 충분히 연구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연구를 보완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과 선교 현장의 구체적 진보를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주기를 기대한다.

 

II.  Power Encounter 의 생성 배경

 

A. 역사적 신학적 배경 

 

1. 제 2 세기의 이단 -몬타니즘(최초의 신비운동)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영적 운동은 초대 교회의 제도화 경향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했다.

이들의 발달은 주교- 장로(또는 사제) -집사로 구성된 제도적 조직이 경직화 되어 가는데 대한 반발이자 직분이 고정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예언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묵시적이고 예언적인 분위기를 타고 박해에 편승하여 급속히 성장해 갔다.

몬타니즘은 보혜사 성령의 위치, 그들의 순교에 대한 열망,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 등은 요한에게 속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Frand 1984: 254)

170 년경 몬타누스(Montanus)와 막시밀라 (Maximilla ) 프리스킬라(Priscilla)가 나타나 성령으로부터 새로운 계시와 거룩한 도성의 임박한 도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몬타누스는 요한이 본 천상의 예루살렘이 곧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에(Pepuza) 도래하여 이 시대를 끝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초점을 맞추어 불붙어 오른 이 운동은 스스로를 “새로운 예언” 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의 영감부분을 의심했으며 정경성에 의문을 제기 했다. 

179년 임종을 앞둔 막시밀라는 “나는 양들로부터 늑대로 몰리고 있다. 나는 결코 늑대가 아니다. 나는 말씀이요 영이요 능력이다” (스나이더, 1994:21)라고 하여 이단의 길로 들어갔음을 자증했다.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는 ‘이단종파들에 대한 처방’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은 퀸틸라와 프리스킬라를 대단히 존경하며 그들은 여예언자로 부른다. 이들은 여성의 성직 입문을 정당화하기 위해 빌립의 딸들이 예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그들의 모임에서는 흰옷을 입고 손에 횃불을 든 일곱 처녀의 행진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처녀들은 신비경에 빠져든 상태에서, 인간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을 한탄하거나 울부짖으며 회개를 하곤 한다. 그러면 다는 사람들도 그들은 그들의 말처럼 성에 관하여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다” 는 바울의 말에 따라 여성 주교와 여성 장로를 두고 있다.

이들 ‘새로운 예언 운동’이 배척된 것은 예언과 황홀경에 빠져드는 은사를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230년 이코니움 총회에서 몬타니즘 신봉자의 세례를 부정함으로서 그들을 사실상 배척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는 비밀 조직으로 300년 이상(어거스틴은 354-430 이라고 함) 지속된 곳도 있다.(워커.1984:54)

이들의 영적 엘리트 의식(김의환, 1983: 92) 은 오늘날의 능력대결을 주도하는 윔버에게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의 매력은 힘과 역동성의 문제. 즉 넘치는 활력과 사람들을 지도자나 참여자로 이끌어 들이는 능력이다 . (스나이더 1994: 29) 

그러나 이들이 사람들을 동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데는 성공하였고 당시 교회가 지닌 제도화, 경직화의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찾은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중심이 아니라 ‘새로운 예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부분에서 결국 제도적 개혁이 본질을 바꿀 수 없다는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2. 합리주의 

 

a) 사고의 태동

서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은 경험주의, 과학주의 등에 뿌리를 둔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세계관은 계몽주의(1648-1789) 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옥스퍼드 교회사 대사전에는 계몽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계몽운동은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행복을 촉진하려는 열렬한 욕망과 더불어 모든 초자연적 종교( 특히 기독교를 지칭함, 저자 주)에 대한 반대와 인간 이성의 완전한 충족성에 대한 신념을 결합한 사상운동이다. ..... 이 운동의 대표자 대다수는 기독교적인 교조(敎條)들을 배척하며 카토릭교 및 개신교 정통주의를 반대했는데, 이는 두 교파가 그들의 생각에 인간으로부터 이성적 기능의 사용을 박탈해 버리는 영적 흑암의 세력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계몽된 이성의 원리를 그들이 일단 깨닫게 되자, 인간 본성의 선을 믿는 그들의 근본적 신념은 안이한 낙관주의 및 인간 사회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낳아 놓았다. 

(F.L.Cross,ed.,T.O.D.,104-105)

합리주의는 1618-1648 년까지 있었던 종교전쟁으로 전 유럽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피폐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발생했다. 종교에 대한(기독교를 말함) 회의와 절망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기대나 의지를 말삸시켰고 오직 인간의 자율적 도덕과 양심에 따른 사회를 꿈꾸게 되었다.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신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의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생명력에 기초한 부흥의 물결이 가라 않고 교리와 신조, 정통과 비정통 문제에 정신을 빼앗긴 채 권위를 고수하려는 부패한 시대 였다.

이로 인해 서구교회는 모든 성경의 초자연적인 진리를 합리주의 잣대로 평가하고 해석하여 교회를 합리적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b) 합리주의와 신학

 

(1) 초기의 합리주의 신학

초기 합리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이적을 모두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이적들은 그대로 받고 어떤 이적은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된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들은 비합리적인 이적일지라도 교훈적 가치가 있다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기에 들면서 이적을 완전히 부인하고 복음서 내의 이적들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했다. 라인하드(Frantz Reinhard, 1753-1812)는 예수를 특별한 신적 교사로 생각하고 아무도 그와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와 이성의 연합이라고 생각했다. 

말기에는 이적적 기사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점차 떨어지면서 허더(Jonadan Herder, 1744-1803)같은 사람들은 기적들은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믿음에 속한 것이라고 말함으로 합리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면서 그는 제한된 의미에서 이적들이 역사적인 증명에 의해 확증되면 받아들여저야 한다고 했다. 허더는 초자연적 사건들의 개입을 허용하는 문은 잠그지 않았다.

 

 

(2) 파울루스(Heinrich E. G. Paulus, 1761-1851)의 신학

허더의 보호를 받은 파울루스는 1811년 Heidelberg 의 신학교수로 취임하여 90세까지 봉직했는데 그는 신비주의자이며 합리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강요로 죽은 어머니와 대화하는 억지 가장을 하면서 자랐다. 그는 성장후 자연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방법으로 복음서를 비평하게된다. 

파울루스는 아버지에게 받은 비 정상적 종교형태를 보면서 철저히 합리주의자가 되어 성경의 예수를 거짓말쟁이로 “예수의 생애”에서 정의했다.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은 비계몽시대(합리적 지식이 없어 무식한 시대)에는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 초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해버린 자연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박형용 1988: 49-52)

 

(3)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1808-1874)

스트라우스는 튀빙겐 대학에서 낭만주의, 신비주의, 자연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 Schelling을 연구하면서 중세의 신비주의자 뵈메(Jacob Boehme)를 접하게된다. 1835년 27세의 나이로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으로 교수직을 박탁당하고 어렵게 살게 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처음에는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라고 생각하다가 점차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했다고 한다. 또한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 사건을 부인하는 자리에 섰다. 

 

이상의 세 합리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은 한결같이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합리성의 칼로 도려내고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와해시켰으며 한편으로는 성경 비평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주의를 고무시켰다. (쉐퍼,1993:31)

계몽 운동 정신은 독일 개신교 속으로 길이 침투해 들어가 (19세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와해 시켰으며 한편으로는 성경 비평을 , 다른 편으로는 감정적 “경건주의”(Pietism)를 고무했다 

 

c) 합리주의의 붕괴

산업 혁명과 신무기의 발달 등으로 세계를 장악해 가던 서구 세계는 188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이 발표되면서 무한한 진보와 가능성을 믿는 학설이 난무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선교가 확장되는 등 대단한 희망 속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Reinhold Niebuhr는 이런 확신은 깨어주기 시작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단체에 들어가서는 윤리적인 표준으로 일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못하고 단체의 유익을 위하여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위해 일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므로 인간에 의한 이상 세계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자가 시켰다. 19세기의 사상은 몰락의 길로 가게 된다. 결국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합리주의적 이성주의적 사고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이어 20세기가 되면서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이 땅에 낙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깨고서 자기 자각에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3. 내재신학(경험주의)의 발흥

 

인간은 이성으로 논리적인 사고의 전기, 즉 개념에 의해서 모든 체계를 설명할 수 있고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칸트는 “이성 자체는 진리가 아니라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사물의 이해가 중요했고 그것이 진리의 표준이고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의 경험, 구체적인 내용의 이해가 결정적이고 중요하다. 보편 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내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된 사실이 진리를 결정한다” 고 하여 종교적 진리까지 경험으로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경험주의적 사고가 발전하면서 신학도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세상을 정신계(noumen)와 현상계로 구분하면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의 어떤 것은 이성의 사용이나 관찰 가능한 증거를 통하여 주장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진리이다’ 고 말한다. 

슐라이어막허는 종교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지식의 일로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를 만지면 알 수 있는 느낌, 바로 그 느낌이고 신의 세계는 그 느낌으로 온 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를 지식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감정의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슐라이막허의 내재신학을 받아들이면서 진첸돌프의 경건주의 운동, 모라비안 운동 등과 결합되어 종교를 느낌, 즉 감정의 일로, 그리고 주관적 체험의 일로 받아들였다. (서철원 1995 : 17 )

신정통주의(칼 바르트)는 성경은 종교적 경험의 원천을 제공하지만 증명이 가능한 분야, 즉 역사와 과학에 관해서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쉐퍼,1993:50)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개념은 실존주의의 역사해석방법을 신학에 적용하여 절대적 진리를 모두 상대화 한 실수가 된고 말았다. 칼 바르트가 정통주의의 거센 신앙 해체작업에 맞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성경을 다시 찾아와 실존적으로 해석을 하므로서 성경을 살리기는 했으나 결국 객관성을 살리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 살린 것이다. 

루터교의 경우도 루터의 중생 체험에서 출발하므로 중생의 체험을 많이 강조한다. 객관적이고 초월해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신학을 출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 인간의 종교성에서 신학을 출발하여 종교 체험을 강조하면서 그 일환으로 중생 체험을 강조하지 시작하였다.

위에 제시한 것이 매우 합당한 논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객관적이고 초월적 성격이 무너뜨리고 주관적, 경험적, 감정적, 신비적 개념으로 전락시켜 복음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은 항거하지 못한 영적 암흑기였다. 오히려 복음의 객관성을 포기하고 교회는 내적이고 감정적, 신비적 종교로 빠르게 변신해 가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갔다.

 

a) 경건주의 신학

성경의 권위가 심각하게 추락하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말씀의 권위가 무너지자 종교는(기독교를 지칭함) 급속히 경험적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초자연적 경험(체험)의 세계는 합리주의의 칼을 피해 갈 수 있는 길로 받아 들여 졌기 때문에 그래도 성경과 하나님을 믿으려는 거룩한 무리(?) 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고 대답할 것이다.” 고 말한다. 때로는 명백히 반대되는 고고학적이며 역사적인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이 있으면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회복되었던 성경의 진리들이 점점 합리주의와 교회의 제도화 속에서 점점 화석화 되어갈 즘 경건주의자들이 일어난다. 이들에 의해 기독교의 정체성이 ‘경험했거나 행하고 있는 것’의 맥락에서 정의 되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의 경험적 세계 속에 갇혀 복음을 점점 축소하였고 이로말미암아 수많은 이단들이 자랄 수 있는 모판의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런 비이성적 종교는 진리에 대한 즉각적이며 본증적인 지각으로서 사유의 과정이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직관주의(intuitionism)로 발전하게 된다. 

‘1차 대각성 운동에서 죠나단 에드워즈는 합리적 확신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촉구했다 에드워즈는 폭넓은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폭넓은 사상 때문에 당대의 사상가들과 그의 사상을 복음을 변증하는데 사용했다. 그의 설교는 드라마틱하거나 탁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대한 정서적 영향을 미쳤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계몽주의의 자연주의에 직면하여 일어난 초자연주의에 대한 대중의 갈급한 외침이었다.. 그렇지만 1차 대각성 운동은 전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인적 회심을 불러 일으켰다’.(호튼, 1996:200)

이 문제에 대하여 마이클 호튼(웨스터민스터, 캠브릿지 Ph.D)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그 초점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하는가?” 로 변화되었다. 

그 변화는 신학으로부터 감성으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의 목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제 2차 대각성 운동의 모습을 당시의 지도자였던 피터 카트라이터(Peter Cartwriter) 는 19세기 초의 캠프 집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리차드 홉스타터,[미국인의 생활에서 반지성주의], P.79) 

“ 첫 경련이 일어난 다음 여자들의 끈 달린 모자나 남자들의 모자나 빗 따위가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가 젖혔다 하는데 그들의 긴 머리채가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채찍이 휘돌려지는 것 같았다. 

설교자들 자신들이 히스테리컬해져서 땅바닥에서 뒹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정신없이 웃어댔는데 그들은 이를 가리켜 ‘거룩한 웃음’이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개처럼 펄쩍 뛰며 사방을 돌아다녔으며 다람쥐를 쫓아다니며 짖어대는 개처럼 ‘귀신을 쫓는다’고 소리쳐댔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했는데 이들은 이것이 성경에서 사도들이 했던 ‘다른 방언들’ 이라고 믿었다.”

이런 반 이성적 모습을 오늘날에도 자주 볼수 있는 것으로 합리주의적인 이신론과 냉랭하고 죽어버린 정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이 새로운 감정주의를 제2차 대각성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은 제 1차 대각성 운동과는 내용상의 연계성은 별로 없다. 

 

b)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서 나왔다. 인간은 선하고 정작 필요한 것은 절대적 자유, 즉 전통과 과거와 제도와 사회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낭만주의 는 경험의 중심을 인간으로 전제하고 철저히 감정주의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한 예를 들면 기독교의 증거에 대한 새뮤엘 콜러릿지(Samuel T. Coleridge)는 “ 사람들에게 그 말이 의도하고 있는 것을 느끼도록 해주라. 만약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생길 수 있도록 해주라” 고 하면서 “진리의 진정한 증거는 주관성에 있다.” 고 했다. 

이 결과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새로운 형이상학적, 초월적 이단들의 탄생을 보게 된다.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퀘이커 교도들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가 아니라 “내적인 광채”를 최고의 권위로 생각했다. 그 증거로 성례전의 경우에 있어서 성례는 외적의식과 물질적 세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례전을 배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스웨덴버그 (신접주의 이단, 신지학의 뿌리 ) 같은 이단의 등장을 보게 된다.

 

c) 초월주의 

1830년대 유니테리안 교회에서 발생한 초월주의는 물질적이며 유형적, 개관적 세계를 초월하여 영의 원천에 도달하여 그 공급을 받기를 원한다. 이들은 신성과의 합일을 추구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가 그렉 싱거(Gregg Singer)는 “심지어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고 알려진 교단에서 조차도 ...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신학을 선호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류의 전적 타락과 같은 칼빈주의 신학을 수정한 신학 즉 ‘민주화 신학’의 창조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호튼, 1996:206) 고 하였다. 

결국 개혁주의가 견지해 오던 인간의 전적타락과 무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협동에 의한 구원이라는 알미니안주의를 채택한다.

그러나 초월주의는 알미니안이나 유니테리안도 말하지 못한 “인간의 신격화” 까지 주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청교도적인 신앙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죄와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포기하고 나아가 성경의 절대적 신앙을 인간의 감성의 수준으로 약화 시켜 벼렸다. 

이 초월주의는 제 2세기의 영지주의 이단과 중세의 이원론 및 신비주의, 프랑스의 열광주의자(Enthusiasts)와 동류들이다.

 

 

d) 실존주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죄뢴 키엘케골(Soren Kierkegarrd)은 국교회의 죽은 정통에 실망하면서 “신 앞에선 단독자”라는 철학적 명제를 가지고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그리고 실제적(경험적)인 하나님을 선언했다.

그는 진리는 주관성에 있다고 하면서 진리는 이성과 변증을 통해서 증거할수 있는 형식적 명제가 아니라고 했다. 

실존주의는 인간과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희망이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깨어지면서 인간 본성이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한편에는 대대로 목사이며 신학교수의 아들이었던 니이체( F. Nieche, 그도 신학을 공부했다)의 사신론(살신론)적 실존주의는 교리적 기독교의 종말을 고하고 기독교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밀려났다. 이때의 사상은 허무적이어서 사르트르, 알베르 까뮈 등은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가르치게 된다. 

 

결국 허무적 실존주의는 서구 지역을 약물중독과 쾌락으로 인도했고 동구의 국가들로 하여금 전제주의(국가주의, 공산주의)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경향성들은 더욱 심각하게 기독교를 감성적 종교로 이끌게 된다. 

잭슨 리어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전한다.

 

“도시 문화의 합리화와 기독교의 감성적 종교성에로의 몰락은 자아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침해하였다. ...

물질적인 위로만 주며 영적인 맛은 빠져 버린 무게 없는 문화는 그들의 덧없는 삶에 어떤 정의를 내려 주고 어떤 분명한 구별과 내용을 주는 강렬한 경험을 바라고 있는 무게 없는 인간을 키워 내고 있다.” 

결국 감성중심의 종교는 건강한 자아 의식을 제공하는 기준을 잃어버리고 영적 모호성을 제공하였고 이런 일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복음적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자라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재신학(경험주의)은 순간의 종교이지 일생의 종교가 될 수 없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과 감정과 율법주의적 금기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내재신학은 복음을 우주적 객관적 자리에서 주관적 사적 도덕적으로 만들어 세상으로부터 복음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를 뒤엎어 버린 사람들은 대부분 경건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싸움은 교실이 아닌 기도 실에서 나왔으며 자기들이 사악한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의해 주도되었다. 임마누엘 칸트에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로, 다시 죄렌 키엘케골에로 경건주의는 현대 실존주의로 길을 열었다.

슐라이어마허는 모라비안 학교에서 자란 사람으로 자유주의자의 조상이 되었다. ‘도덕주의는 도덕성을 좀먹고 율법주의는 유법을 합리주의는 이성을 신비주의는 신비를 경건주의는 경건을 좀먹는다.’는 명언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재주의 신학은 결국 기독교의 본질자체를 왜곡 변질함으로서 사탄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조류가 현대 선교학에 다시 부각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B. 오순절 신학(Pentecostal Theology)적 배경

 

 

18 세기 중엽 일어나 웨슬레이 형제들의 교회 부흥 운동을 오순절의 기원으로 본다. 존 웨슬리는 ‘성령의 두 번째 축복’ (Second Blessing of the Holy Spirit)개념을 신학적으로 고착화했다. 이것은 사역을 위한 초자연적 능력을 기름부음 받는 것과 거룩함의 완전성에 이르는 길로 규정하였다. F. B. Meyer 와 Andrew Murray 등은 성결의 중요성과 성령의 극적 체험을 중시하였다. (신학지남, 김성태. 1995:156)

오순절 운동은 세 부류로 나뉘는데 성화는 칭의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완성된 사역으로 보고 성령세례를 두 번째 단계로 보는데 중생을 성령세례와 구분하고 성령세례시에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은사들을 하나 이상 받는다고 생각한다. 1906년부터는 방언을 가장 강조하는데 이들을 전통적 오순절주의자(Pentecostalist)라고 한다.

이들은 오순절 교단에 속한 자들인데 1900년대 초반기의 ‘아주사 부흥’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4중 복음(Four-fold Gospel)', 혹은 ‘순(Full) 복음’을 전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 병고치는 분, 장차 오실 왕으로서의 사역을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부류는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 운동가(Charismatic Movementist) 로서 성령세례의 증거를 방언 말함에 한정하지 않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한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룬 은사 운동에 참여한 자들이며 이들의 특징은 오순절 주의자들과 마찬가지 사상을 가졌으나 오순절 교단에 속하지 않고 일반 교단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김성태교수는 M. Lloyd Jones 의 성령론을 오순절주의의 두 번째 부류( 김성태. 1995 : 158)로 구분했다.

셋째 부류는 기적과 이사를 동반하는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운동인데 오순절 주의자나 은사주의와 상관이 없이 복음주의자들로서 성령충만을 받아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를 경험하며 표적과 이적을 강조하되 여전히 자신들의 교단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와 무관한 전혀 새로운 그룹으로 인식한다. 

존 윔버 (John Wimber)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가 대표적 인물이다. ‘제3의 물결’이란 용어는 와그너의 『성령의 제 3의 물결: 현재 표적과 이적을 만나는 길』,『크리스쳔의 삶에서 제 3의 물결』 등을 통해서 확산되었다. 

피터 와그너는 신앙을 네 단계로 나누어 구원의 신앙, 거룩하게 하는 신앙, 적극적 사고를 낳는 신앙, 표적과 이사를 수반하는 신앙으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와그너는 Power Encounter 가 이루의 진다고 한다. Power Encounter는 사차원의 신앙을 가진 성도가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능력 있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적이요 성령의 외적 은사로서 표적과 기사가 강조되며 특히 힘의 치유를 주장한다.

은사운동은 북아메리카, 한국, 중앙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브라질, 칠레 등 일부 남아메리카 국가들로 확대되었다. 빈손 사이넌(Vinson Synan) 은 ‘종교개혁 시대 이래로 교회에서 가장 활발하고 가장 빠르게 성장한 운동이다’(하워드 스나이더 1993 : 33 ) 고 주장했다. 은사 운동가들은 제 3의 물결을 통해 거대한 복음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이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워드 스나이더 재인용. 1993)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현재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은혜를 비처럼 쏟아 부으실 단계에 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과 승리가 주님께서[서 오시기 바로 직전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다 그들은 성령의 모든 은사가 교회에서 부활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부는 패배의 신음이 아닌 승리의 함성을 올리게 될 것이라고 열렬하게 믿고 있다

와그너는 “나는 80년대에 정통 복음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오순절 교회와 은사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동안 오순절 교회와 은사 운동이 체험해 온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을 수용하는 것을 보았다.” (와그너. 1987)고 말하면서 ‘앞으로 몇 십년간 표적과 기사를 동반한 강력한 복음주의가 가장 중요한 동향으로 등장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의 의견을 청종할수 있어야 한다. 

오순절운동은 교리적인 면에서 차이가 무한대이며 엉망진창이다. 그럼에도 이 운동이

통일성을 유지해 온 것은 ‘성령세례’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신’ ‘방언’ ‘황홀경’ 등의 공통분모 가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운동은 철저히 비인격적이며(뒤로 넘어짐, 동물소리, 황홀경, 무질서, 비명...) 감정적 현상이었다. 이런 신학적 무질서가 팽배하여 짐으로 말미암아 비성경적 ‘영적 전쟁’ 사상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배양해 왔다. 

이런 토양 위에서 풀러신학교를 중심한 성장주의 신학이 동양적(인도, 중국의 철학과 종교) 귀신론 사상과 결합되어 새로운 기독교를 형성해 가고 있다. 

 

C. 문화 인류학적 배경

 

오늘날 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의 제 3 세계에서 큰 성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회 성장이 인수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 바레트( David Barrett) “지난 100년동안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교회 유입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났다” 고 했다 와그너는 “이슬람 지역에서도 새 신자의 수확이 있었다 그는 역사상 다른 어떤 유사 시기보다 이슬람 지역의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학적 접근 방법의 연구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지난 6년간이었을 것이다”고 했다. 

 

1. 자연주의에서 허무주의로

 

서양의 자연주의는 허무주의에 귀결되었고 허무주의는 자연주의에 물든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식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현대 기독교의 유신론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다. 

1960년대 미국의 중산층의 가치관이 젊은 세대에 의해 거부되면서부터 동양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들의 과학 기술이 현대전(現代戰-베트남전쟁)을 가능케 했고, 경제적으로는 불공평과 압박, 과학 기술과 경제체제의 관리자들을 지지하는 종교로 부터의 자유를 선언한다.(사이어 :150) 이는 곧 서양 사상에서 동양 사상으로의 선회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동양의 사상은 반합리주의, 혼합주의 , 정적주의 , 과학기술의 부재, 소박한 생활 양식, 철저히 다른 종교적 구조 등의 특징을 지닌 동양은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더욱이 유구한 전통과 명상에 잠긴 소박한 구루(Gurus;흰두교의 스승)는 답답한 서구인에게 환상적 해답이었다. 

그들은 선(禪) 단(丹) 등의 흰두교 불교 등의 경전이 보급되었고 신비적 종교들이 서구의 합리주의의 허물어진 담을 쉽게 넘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 특별히 다루고자하는 동양의 사상은 순환론적 역사관이다.

서구의 사관은 직선 사관을 따른다. 그래서 역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기독교도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양인에게는 예수의 존재, 기적 행함, 병자를 고침, 죽음과 부활 등이 실제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동양의 사고는 그것이 현재 여기에서의 의미(here -and- now meaning)를 갖고 있지 않는다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사이어, 1987:167) 사건이란 어떤 역사적 특정 조건에서 일어난 일로서 반복할 수 없는 시공간상의 것이기에 과거의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동양의 많은 경전들은 경구, 비유, 우화, 설화, 노래, 시, 찬미가 등으로 만들어져 있을 뿐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이런 사고는 서구인에게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서구의 모든 가치를 여지없이 상대적이고 지엽적인 지식으로 전락되면서 서구인들은 당황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자랑하던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진리로 정의되자 절대적이고 전 포괄적인 지식을 찾아서 동양의 사상에 몰두하여 동양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두 사상사이에 혼돈이 오게 되었다. 

 

3. 진리의 상대주의 발달

 

이런 경향은 문화인류학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전파되었는데 문화 우위론적 관점에서 비 서구 국가들을 경시하던 동양의 사상이 문화 상대주의 관점이 발생하면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동서양의 장벽을 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이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줄은 예견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대주의적 경향성은 곧 성경의 절대성을 잃어 버렸고 기독교 진리의 상대화로 진행되었고 서구에서는 동양적 사상을 근간으로하는 뉴에이지(New age Movement) 또는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 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기독교계의 노력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동양의 범신론이나 신비주의를 대적하기 위하여 개발해 낸 것이 보다 더 신비적이고 보다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를 비웃는 자들을 맞서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 결국 기독교를 파괴하는 자유주의(호튼, 1996: 191)였고 칼 바르트(Karl Bart)가 쓰레기 통에 버려진 성경을 다시 집어들어 實存主義의 해석법으로 성경을 살려 냈다는 것이 성경을 非歷史的, 非事實的 책으로 바꾸어 버린 것처럼 결국 기독교를 상대주의 시대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미국 성장학파의 노력이 고등한 기독교를 원시종교로 전락 시키는 오류를 범한 새로운 자유주의로 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이런 사고가 윔버에게서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현재의 상황에 재현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리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표적과 이사’를 기독교의 최고의 표지로 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사탄의 속임이 아닌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과거 유럽의 선교 대상 국들이 선교의 중심국으로 기독교 역사의 주체가 되면서 3세계 국가의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정설로 받아드려 지고 있다 (스나이더. 1993 : 22) 는 견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18세기에는 자유주의신학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널리 인식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해서 진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성경 해석학상에 있어서 역사적, 전통적해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III. 제 장 Power Encounter 신학의 문제점 

 

A.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의 로이드 존스의 영향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를 말하면서 성령의 두 번째 경험, 즉 성령의 내재의 확신이나 사역을 위한 능력을 부여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이 곧 개혁주의 내에 오순절 성령론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결과가 되었다고 본다.(로이드 존스 1986 : 11)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기를 원한다. 

 

1. 로이드 존스의 한계

 

a) 문제의 진단에서 오류

로이드 존스의 손자인 크리스토퍼 캐더우드는(로이드 존스. 1986: 소개의글 )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 하고 있다. 

 

으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 계통에서 현존하는 완전주의 교리를 논파하기 위하여 쓴 글에서 성령의 인침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에베소강해를 시작하면서 성령의 인침은 회심과 구분된다고 깨닳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진리를 믿어 아는데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청교도들처럼 날마다 진리의 산 체험, 소위 체험적 진리를 체득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과 자기 주위에 있는 많은 인하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점증하는 영적 무기력에 대한 관심으로여 그는 점점 더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는 부담을 느꼈다. 실로 그 이후부터 부흥에 대한 열망은 그의 남은 사역을 주도하였다.” 고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교리적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왜 영적으로 무기력한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헌신 하지도 않고, 구원의 확신과 감사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와 그리스도안에서 새생명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으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를 강해 하면서 왜 거룩한 삶으로의 문제를 고민 한데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12) 라고 가르치고 있으나 사람들은 영광의 찬송이 되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던 로이드 존스는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께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사명이며 당연한 귀결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서는 개인들이 가진 전제와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이 문제의 원인을 성령을 받지 못한(또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을 때 성령을 받지만 충만은 아니며 사역을 위해서 과거의 사람들이(부흥운동기의) 그러했던 거처럼 성령의 위에서 부어주시는 능력있는 사역을 위한 세례를 가르치게 된다. 

 

b) 성령충만에 대한 개념 정의의 오류

그러나 에베소서에는 12회 성령이 사용되었는데 어느 곳에서도 성령의 능력세례를 받아야 할 것 처럼 말하는 구절이 없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엡 5 장의 성령충만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자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하여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하라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첫째, 성령충만은 지혜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살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주의할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둘째, 성령충만은 세월(시간)을 아낄줄 아는 마음과 연관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시공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귀히 사용하고 이 시대의 악함을 분별하며 적절히 자기의 삶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에 충만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안에서 말이다.

셋째, 성령충만은 주님의 뜻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마음을 같이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사모하며 열망하여 힘쓰는 사람이다. 

넷째, 술취하지 말라. 여기서 술은 억제제이다. 알콜은 의학적으로 이성과 판단을 억제하는 약품이다. 혹자는 술을 먹으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긴다고 하면서 우리도 성령에 충만하면 힘과 용기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상적인 판단력이 억제되고 이성의 활동이 혼란하게 되어 내 주먹으로 저 벽을 치면 벽이 넘어질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주먹으로 벽을 치면 손만 위골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능력이 아니다.

술취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갈수 있었던 것은 어린 마음에 의분을 참지 못하여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정상적인 이성의 판단과 분별력으로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는 객관적 사실을 따라 나아갔다. 

 

다섯쩨 성령충만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함과 관련된다. 여기서 서로 화답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확한 이성의 작용을 요한다. 자세히 상대의 노래를 듣과 그 노래에 맞는 노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도 성령충만이 사람을 영웅적인 능력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삶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와의 사이에서 서로 존중하며, 서로 종이 되는 주님의 사역의 계승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또는 오순절 계열)에서 오해 되고 있듯이 성령을 받으면(성령충만)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초자연적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 하면 성령의 인격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사역에 상기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능력과 기적, 신유와 방언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이 항상 성령충만과 연계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나 소아시아의 교회, 또는 그 이후의 교회사에서 영적 어린아이라고 비유된 고린도사람들도 은사에 익숙했고 그로말미암아 분쟁에 휩싸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고민은 현재 교회와 선교에 실재하는 Power Evangelism 필요성과 너무도 흡사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과연 교리가 바르고 건전한데 삶과 이어 지지 않는다면 교리가 삶과 구분되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교리가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것이라면 올바를 생활의 가르침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2. 존 스토트식의 이해

 

교리가 올바른 삶을 만들지 못한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수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성경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고 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참으로 거한다면 그는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다. 참된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다. 으로이드 존스는 교리적 고백을 거듭남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 (Jhon Sttot) 신앙을 4가지로 구분했다(존 스토트. 1986 : 10 ) 

첫째 기독교의 신조만을 믿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신학도 철학도 아니다. 교리를 믿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약2:19절에서 “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고 말한다. 

둘째 기독교의 규약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지니고 있지만 윤리를 따르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니다. 

셋째 기독교의 의식들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들은 예수님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교인의 신분과 교회의 출석은 그리스도 인의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또한 기도 성경 읽기 등 이런 의식이나 의무를 공적 사적으로 지킨다 해도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 참된 신앙은 무엇인가. 넷째의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직접 확고하게 언명하는 어떤 사람이다. 이들은 회개를 통하여 그의 죄들을 단호히 배척한다. 믿고 사랑하며 봉사하고 복종하며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치는 사람이다. 

이것을 스토트는 다시 이렇게 요약한다.

 

A Admit(인정하다.)

B Believe (믿는다)

C Consider (숙고한다.)

D Do (실행한다)

즉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믿으며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참된 구원 얻는 믿음이다.

 

 

3. 성령의 문제인가 생명의 문제인가

 

로이드 존스는 믿음을 교리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중생으로 인정하게 됨으로 교리적으로 중생한 사람들이 왜 성장하고 능력 있게 봉사하지 않는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개념이 “성령의 제 2세례 ” 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두 번째 경험은 당시의 영적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영적 부흥을 맞고자 하는 그의 거룩한 열망과 경험주의적 영국의 철학이 신학에 작용하여 만들어진 시대적 정황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가 우려한 무기력증과 무능력은 성령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문제이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본질적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대속, 삶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복음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될 것이다.

루터는 참된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온갖 부분을 가장 우렁찬 목소리와 가장 명확한 해석을 곁들여 고백하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하더라도 세상과 악마가 이 순간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는 저 작은 문제를 제외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군인의 충성은 전투가 맹렬한 곳에서 입증되어야 하며, 그 모든 전투에 있어서 그것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만일 그 점에 있어서 그가 주춤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패주와 불명예가 있을 뿐이다.”

결국 개혁주의 안에서의 로이드 존스의 이런 성령 신학화 작업이 첫째, 복음의 본질적 명확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영구히 교리적 고백을 중생으로 인정해 주는 커다란 과오를 범했다. 둘째, 개혁주의 진영의 신학적 혼돈을 초래하여 번영신학, 부흥신학, 교회성장신학 등 실용주의 신학이 침투하는 길목을 열어 주었다. 

 

B. 성장학파와 피터 와그너

 

1. 와그너와 성장학파와 그 문제점

 

개인과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방법론을 찾아 왔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데가 미국의 교회성장학이다. 와그너는 그의 스승인 맥가브란의 사상을 발전 또는 적용한 사람이다.(와그너 1990:18) 

교회성장학의 창시자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박사는 선교사의 자녀로 출생하여 본인이 선교사로 세계의 각처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역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연합 기독교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선교사 병원, 학교, 나환자촌 등을 경영하면서 피나는 선교활동을 벌였으나 성과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런 갈등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많은 교회들을 확산시키는 방법이 필히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에 성장하는 교회와 정체하는 교회의 차이점을 찾아 연구 하던 중 1955년 '하나님의 가교(The Bridge of God 'Friendship Press, 1981]을 출판함으로서 교회 성장운동이 시작된다. 이 책을 통하여 와그너의 정체성을 찾고 비판하려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신학적 문제:

선교의 중심 목표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발견하여 그들과 화해하고 주님의 제자로 훈련시킨다는 것으로 선교를 복음을 들려주고 열매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무책임한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은 제자 삼을 것을 말씀하였으므로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윤리적 문제:

실용주의적 관점으로서 엄청나게 쓰여지는 하나님의 인적 물적 자원들이 효과적으로 쓰여지고 있는가. 이들의 투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진전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청지기직을 책임 있게 수행하여 그의 활동을 그의 사역의 성과에 따라 평가할 것을 주장한다.

 

3. 선교학적인 문제 :

대중운동이론(People Movement Theory) 으로서 선교 전략에 문화인류학적을 접목하여 개인주의화된 서구와 달리 미전도 지역은 집단적 경향이 강한 것을 근거로 개인적 차원의 복음이 아니라 가족, 씨족, 부족, 종족 단위로 개종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 근거에 따라 ‘동질집단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를 말하는데 이는 ‘사람들은 인종적, 언어적, 계급적 장벽을 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종으로 인해 가급적 사회적 이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각자의 결단이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본다.

 

4 기독교도화(Christianization)를 제자화와 완전화로 구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개종하여 몸된 교회에 헌신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제자화이고 평생의 삶을 주님을 위해 살게되는 영적 윤리적 발전 과정을 완전화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제자화도 되지 못한 지역이 세계의 70%를 찾이 하고 있는데 사역이 완전화에 집중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사람들을 추수 현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성장학파의 견해 비판

 

교회성장학의 기본 출발점에서 이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의 주제를 가지고 평가하려한다.

 

a) 실용주의 

‘하나님의 가교’에서 맥가브란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양육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시킨 것은 큰 도전이 되었다.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잘못 오해된 (타락한) 예정론을 받아들여 전도자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 된 시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만 구비하면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우리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상은 이미 챨스 피니(Chales Pinny)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죄인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하기에 요구되는 모든 기능과 자연적인 성품들을 가지고 있다’(찰스 피니, 1976: 서문)고 하여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그의 부흥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찰스 피니, 부흥론 중에서- (호튼 1996: 82) 

 

에드워즈, 휫필드 등의 부흥운동이 성령의 주권에 의한 것이었다면 피니의 부흥은 방법론을 잘 구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어서 자신의 무력함을 겸허하게 인정’ (패커 1982:10) 하여야 한다. 구원은 전도의 방법의 탁월성이나 전도자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맥가브란이 원래 예일 대학의 신학부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교육받은 탓에 초기에는 자유주의자 였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적인 개혁주의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본다. 그러나 고통 당하는 선교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복음적인 사람으로 돌아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인간론적 관점에서 출발한고로 개혁주의적 관점보다는 상황론적이며 현상학적 관점이 많이 보인다.

자유주의에서 복음주의로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그가 개혁주의의 전통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깊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논지인 ‘윤리적 문제’에서는 그는 자신이 실용주의적 관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실용주의자임을 전제하고 있다. 

두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하나는 투자대비 효용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의 문제이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상기하면 과연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보다 많은 영혼에게 전파하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하여야 하는 이유가 경제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향유 붓는 여인’을 책망하는 가룟유다의 사고방식이 되지 않는가? 

무디(D. L.Moody)의 뒤를 이은 대중 전도자가 된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한 기자의 질문에 ‘내가 하는 일로 받는 보수는 한 영혼당 겨우 2 달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회심시킨 사람들의 수에 비해서 나는 ... 적게 벌고 있습니다.’ (홉스타터 :115, 미국인 생활에서 반 지성주의에서) 이 전도자의 마음에는 자신이 복음의 싸구려 장사군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참된 그리스도인)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른 전도자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실용주의자가 아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죄인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고치는 것 보다 인류를 파멸시키고 새로운 아담,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 훨씬 실용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또한 구원에 있어서도 매우 실용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 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기를 기뻐하시는 반 실용주의적 이신 분이시다.

사역의 가치를 측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사역자의 사역을 평가하는 기준이 성과에 따라 평가(특히 물량적 성과) 한다는 것은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다섯 달란트로 열을 만든 종과 두 달란트로 배를 만든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찾았던 것은 주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 방종했던 종만 추방당했다. 이사야의 사역으로 하나님을 믿고 회개한 자가 없었고, 예레미야의 사역에 물량적 성장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책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사역자가 있고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역자가 있다. 능력을 행한 사역자가 그렇지 않은 사역자에 비해 고등하지 않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 그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 힘(power)의 모양으로 나타날때가 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받는 종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서도 주님의 사역을 감당함으로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때로 어떤 선지자는 철저한 가정의 붕괴(호세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경험하기도 하며, 한 사람에게도 전도하지 못하고 힘없이 목이 잘려 죽는 선교사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들은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성령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의 전체 사역자들을 살펴보면 모든 사사, 선지자, 제사장, 사도, 전도자 등이 모두 외적 사역에 번성을 가지고 온 사람보다는 오히려 고난과 역경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묵묵히 믿고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호튼은 실용주의에 대해 결론적으로 평가하기를 ‘(실용주의) 사상이란 무엇보다도 구체적 기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리와 사상의 세련에 대한 능멸’을 가져왔다. 

오직 다른 사람의 정서를 움직이는 힘을 자진 사람이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 즉, 부흥사, 연예, 오락, 메스미디어 종사자들의 그늘에 복음과 성경이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호튼,1996:81)

호튼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전도자의 능력에 의해 좌우 되었고 부흥의 테크닉과 장비가 성령의 임재를 가능케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결국 기독교를 세계의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세상사람들로부터 잃어버렸다.

 

b) 셋째 논지인 동일집단원리는 인간 중심적 사상이다. 

 

(1) 인종적 계급적 장벽을 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복음은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인격적 결단을 요구 한다. 즉, ‘자기부정(self-deny)'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을 망각한 것이다. 여기서 맥가브란의 사고의 한계점을 볼 수 있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을 여러 지위들 중 또 하나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죽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 났으며,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러 함이라)

요6: 66 에 오병이어를 먹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던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떠나가고 말았다. 이들을 향해 성경은 ‘제자 중 여럿’ 이라고 하여 그들에게도 제자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들이 참으로 제자인가? 아니다. 이들은 명목상의 제자이며 자기중심적 목적을 가진 제자들로서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복수)이 있으며 누구인지 주님은 아신다’고 말씀한다. 이들은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믿지 않는 제자 였다. 곧 명목상이며 외형적인 제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선언은 66절에서는 ‘그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고 말씀 하셨다.

이들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라고 했다. 그들은 주님을 따랐고 능력과 기적을 몸소 체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즉시 떠나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구원받는 참 믿음은(고전 15:2) 명목상의 믿음과 구분되어야 한다.

맥가브란이 계급의 장벽을 넘지 않고도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문을 넓힌 것은 교회에 사람들을 붐비게 하는 방법으로는 성공적일 수 있으나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데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기독교인들은 흑인들은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모든 문화적 혜택을 독점하고 심지어는 흑인지역에는 전기 마저도 공급하지 않았다. 이들 백인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 이었으나 철저히 계급의 장벽을 유지한 채로 흑인을 노예처럼 고용하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면서 즐긴다. 그리고 흑인들의 비교육과 비문명에 대해서는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흑인들은 기독교는 백인의 종교이며 자기는 토속종교나 모슬렘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다. 

맥가브란의 가르침은 결국 인간의 죄성에 바탕을 둔 자파 이기주의(自派利己主義)를 수용하여 외형적으로는 부흥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예수님도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왔으나 주님은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지 않고 피하여 (요6:15) 산으로 피하셨으며, 또 계속 찾아다니는 무리에게 예수님이 주되심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육적인 동기를 책망하셨다.

이런 현상에 대해 호튼은 자본주의 경제학에 있어서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는 ‘소비자 중심주의’ 가 교회에 들어온 것이라고 지적한다.(호튼, 1996:119-147) 

 

c) 집단 개종의 문제

집단적 개종이나 집단적 신앙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유익 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어느 집단의 왕, 추장, 족장, 대표자에 의해 개종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현대 선교학에서는 개인적 접근보다는 집단 개종 개념을 도입하여 종족단위의 선교를 강조(랠프 윈터, 루이스 부시, 토마스 왕...)하기에 이르렀다.

이 개념은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서 랄프 윈터의 총회 연설로 체계화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복음화 위원회(LCWE)의 결성으로 발전하고 현재의 Unreached People Conception으로 발전하였고 세계선교 센터(Center for World Mission)가 설립되었고 최근 ‘ AD 2000 세계선교대회’가 서울에서 1996년 열려 미전도 종족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동질 집단원리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높인다는 말은 복음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최대한 장애물이 될만한 것은 감추어 버리자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마치 어느 약품이 어떤 질병의 치료에 좋다면 그것이 설령 여러 부작용이 있다하더라도 그 부작용을 감추고 일단 구매하도록 하자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얼마나 상업적인 생각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사회적인 것이 아닌 종교적인 것이 되게 하자’( 와그너, 1990:14) 는 이 말이 얼마나 기독교를 타락 시켰는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종교적 활동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삶은 어떻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괴변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혁주의를 포기하고 종교와 삶을 이원론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와그너는 이 사상을 좀 더 발전 시켰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죄성도 사용하자는 쪽으로 발전시켰다.

‘특정한 문화 구조 안에서의 다양한 종속적 하위 문화와 그에 속한 사람들의 집합적 군집력을 이용하여 지교회 성장에 역동적인 동질 단위의 그룹을 형성하고 소속감을 심어 주며 분열이나 폐쇄적 집단이 되지 않도록 전체 회중을 위해 축제적 예배 의식과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을 주장한다.’(김성태, 1994:142) 고 본다.

이에 대해 김성태교수는 이런 교회는 ‘ 교회의 네 가지 속성 중 연합과 보편성의 교회로 승화될 수 있겠느냐?’(김성태 1994:142) 라는 지적을 했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결과론적 반성이다. 더 근본적 문제는 이들의 구심점, 또는 출발점이 복음이 아니라 민족주의이거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모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원리는 2차적 결정 기준이 되며 이런 조건에서는 복음이 개인의 인격 변화 촉진시킬수 없다. 

 

성경적으로도 롬9: 6-13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였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리브가(이삭의 경우)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고 하셔서 복음이 집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쌍둥이의 경우에도 달라 질 수 있음을 가르친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으로마가 황실에서부터 집단 개종(실제는 인격적 개종이 아니라 통치 수단으로서의 개종) 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어 버렸고, 영국이 국교회가 되면서 영국의 영성이 죽어 버렸으며, 생명의 그리스도가 종교에 갇힌 그리스도로 변질되어버렸다. 

 

d) 복음의 수용성에 따른 추수신학의 문제

복음에 대해 수용성이 높은 지역이나 종족에게 전략적인 차원에서 자원을 집중하자는 것인데 이는 인본주의적 신학(김성태 1994:144) 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해 엥겔은 ‘적대적인 지역이나 국가에도 선교의 자원을 균등하게 투자함으로서 균형적인 선교 수행’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본인의 견해는 첫째, 수용성이 높은 지역이 저절로 , 또는 그 지역은 본성적으로(* 그 지역의 全 世代를 통하여) 수용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지역의 성향은 내적 원인과 외적원인으로 나누어 지는데 내적 원인은 역사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이며 , 외적원인은 지형(산지, 평야지, 바다, 위도상의 차이...) 등에 의해 정하여 진다. 

복음의 수용성이 높다는 것은 지역 성향 요인의 외적 요소에 따라 종교성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종교성이 높다고 해서 복음에 수용성이 높은 것이 아니다. 수용성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으로마사회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비되었던 것처럼(김의환 1983 ) 또 으로마 사회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는 데는 저절로,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와 희생의 피가 흘려져서 이룩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수용성이 높은 지역을 위하여 투자할 뿐만 아니라 수용성이 매우 낮은 지역도 다음을 위해서 계속 투자함으로서 ‘때가 차매’ 성취될 것을 위해 예비해야 한다. 

둘째, 수용성을 근거로 지역을 한정할 수 있는가? 현대 선교학의 문제점으로 선교의 전제가 제 3세계권, 또는 비 서방권을 지칭하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본인의 견해로는 현재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도 복음을 받아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는 국가라고 본다. 이들 국가는 매주 1회 이상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5%도 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들도 선교 대상국으로 분류되어야 하며 선진국형 복음 전략이 심각히 필요한 것이다. 

선교를 공간적,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시간적, 상황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과거의 한 때는 영국이, 또 한 때는 미국이 복음에 충실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한 때는 복음을 위해 엄청난 헌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의 심성 내면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보다는 종교적 목적을 얻기 위하는 징조들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들도 복음화의 대상으로 구분하여야 한다.

하워 스나이더는 경제 공황을 경험한 미국 사람들에 대해 ‘북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봉사나 희생보다는 자아에 더 중심을 두는 태도와 행동과 생활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기독교적 자기 도취의 등장’을 보고 있다고 정의한다.(스나이더 1993:123)

이에 대해 와그너는 객관적으로 교회의 질을 측정하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전망하고 (와그너 1990:33)있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와그너의 한계이다. 인격을 측정하는 획기적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이며 상대적 발상인가? 

 

셋째 한국의 선교 지도자들은 미국적, 비 서방국가를 열등하게 보는 제국주의적(호튼 1996:필독을 희망한다.) 선교관에서 탈피하여 선교의 주체성을 함양해야 한다. 

선교의 주체적 의식보다는 쇠퇘해가는 미국적 신학을 성경적 신학으로 오인하는 편협성을 버려야 한다. 세계의 특히, 제3세계의 비서방국가는 미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형성된 선교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미국신학에 대한 역동적 상황화작업을 통해 보다 순수하고 객관적이며 보다 성경적인 선교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 

 

C. 윔버의 신학사상

 

로이드 존스의 중생과 성령세레에 대한 이해는 존 윔버와 피터 와그너의 사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피터 와그너는 신앙을 네 단계로 나누는데 첫째, 구원의 신앙, 둘째, 거룩케 하는 신앙, 셋째, 적극적 사고의 신앙, 넷째,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신앙으로 구분한다. (피터 와그너. 교회 성장과 영적 능력: 87-100) 여기서는 로이드 존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인정하면 구원을 얻은 것으로 보고 삶에 있어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둘째 단계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믿음의 단계를 셋째로, 그리고 능력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단계를 최종 단계로 생각하는 것이다. 

존 윔버는 전세계 교회들의 성장하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은 표적과 기사에 있다고 정의한다.(와그너. 1990 : 255) 오랄 로버츠대학교의 라스무슨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에 있어서 치유 현상이 교회 성장의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인구의 22% 가 그리스도인인 과테말라에서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고 있으며 1900 년에 400 만 명이던 아프리카의 경우 21세기에 접어들면 3억 5천 1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다 기적과 표적을 통한 결과라고 말한다. (와그너 1990 : 256)

존 윔버는 서구 교회들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로 합리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간과한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원인을 제시한다.(윔버, 교회성장과 표적, 기사)

 

1. 세계관의 문제

 

서구적 세계관에는 사각 지대가 있어서 영적인 문제, 조상과 관련된 문제,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에 대해서는 속수 무책이다. 

표적과 기사에 의존하는 사역에 종사하기 위하여는 이런 서구적 세계관을 버리고 첫째, 중간지대를 포함하는 신학,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학, 셋째,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표적과 기사 치유와 고난, 보이지 않는 능력들을 다루는 선택 등을 실천에 옮길 것을 말한다. 

 

 

2. 세속화된 신학의 문제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으며 대위임령을 통해하나님의 권위가 교회에 위탁되었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에 부여되었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음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사역을 시작했다. 사탄과 대적을 하였고, 제자들도 능력을 입은 결과 초자연적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결정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환상, 은사,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인 수단들에 의해 인도하심을 받았다. 또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사랑의 표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능력대결의 현장에는 표적과 기사가 함께 제시되고 있으며 서신서의 기록된 것은 실패한 것만 소개되었다.

 

3. 하나님 나라 -표적과 기사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왕국(사탄의 통치, 악한 이 세대)을 격퇴시키고 그 안에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앞으로 올 세대) 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치유와 축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현재에도 자유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므로 기적을 행하신다’(와그너 1990:35) 

사탄의 왕국이 예수님의 진정한 적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사탄의 왕국을 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은 사탄을 격퇴시키는 것이며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은 사탄을 격퇴시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누가 승리자인지 드러났으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까지는 사탄의 세력은 이 땅에서 머물면서 악한 일을 계속할 것이다. 중간 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는 사탄과의 계속되는 싸움에 출전하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표적과 기사란 단어의 정의: 

윔버의 경우 행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표적을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표징으로 보고 말씀과 역사는 장차 올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기적(표적)은 앞으로 올게될 우주적인 구속의 약속과 전조를 나타내는 것이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사탄의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침노와 사탄의 최종적인 패배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죽은 자를 일으키신 사역은 죽음이 결국에 가서는 패퇴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인간의 필요가 충족될 것, 풍랑을 잠잠케 함은 이 땅을 위협하고 있는 혼동의 세력들이 완전히 물러갈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한다.

 

4. 교부들의 사역

 

표적과 기사는 교부 시대, 중세 시대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도 “만일 내가 치유의 기적들만을 기록하고 다른 기적들에 관하여서는 생략했다 하더라도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 중략...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기적들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사용하시는 분이다” 라고 한다.

 

5. 성령의 능력을 입은 교회

 

은사론적인 관점에서 윔버는 은사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사역을 수행할 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주고받는 관계에는 이성적인 의미와 초이성적인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가난한 자와 눌린 자에 대한 사역의 바른 형태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사회 활동, 즉 이들에 대한 치유 축사 사역을 하는 것이다. 세계 복음화에 대한 과제를 완수하는데 있어서 연료(energy)는 성령의 능력이다.’고 한다.

 

6. 능력 전도

 

고전 2: 4을 근거로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설득력 있게 설교를 했으나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다음 행선지인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바울은 말씀 선포와 더불어 이적을 행사했던 것 같다.” 고 윔버는 생각한다.

‘나는 고린도에서 행한 사역의 유형을 능력전도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동시에 이성을 초월하는 복음사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구주 되심의 표징은 그 사역에 나타난 능력이었다.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가 능력의 나타남을 말해 주었다.

초대교회의 경우도 복음전도를 이러한 관점 (능력) 에서 전개함으로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 프로그램 또한 제한된 의미에서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능력전도야 말로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교회성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아서 그들의 죄악과 요구를 알아내는 능력, 병마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 사탄의 사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이다.

 

D. 존 윔버의 견해 비판

 

능력이란 무엇인가- 표적과 기사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역동성인가?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 우리에게서 인가? 하나님에게서 인가?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외적이기만 한가? 내적이기도 한가? 

윔버의 견해를 따른다면 지금까지 역사상 ‘대부분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 무기력한 교회, 성경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조차도 모르고 지내온 교회’ 인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를 보면 바울은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아이라고(고전3:1-4) 정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러 은사에 익숙한 상태였다. 윔버의 구분대로 라면 고린도 인들은 능력과 기적을 베푸는 완성적인 단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윔버의 전제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인지를 볼 수 있다. 

이제 그의 논지를 따라 평가해 보자

 

1. 세계관의 문제에 대한 비판 

 

서구 세계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간 지대의 상실을 이해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하나님과 사탄이 마치 대등한 것처럼 여겨질 우려가 있다. 알란 티펫에 의해 사용된 Power Encounter는 물활론적 세계관을 가진 세계의 2/3 지역에 하나님의 실제가 나타남으로 전통적인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가 압도당하여 하나님에 대한 수용성을 갖게 한다는 것인데 와그너는 이 용어를 Paul Heibert 중간 영역의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다.(김성태, 1995:163)

폴 히버트는 성경을 중심으로한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초문화적인 고등 영역과, 피조물인 천사와 사탄과 귀신들이 속해 있는 비절대적이며 초문화적인 중간 영역,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적이며 문화적인 영역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와그너의 폴 히버트에 대한 이해는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와그너는 절대적 하나님과 영들의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구분만 있지만 실제로 히버트가 제시하는 그림에는 하나님과 영들 사이에는 침범 할 수 없는 절대적 구분선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다음의 그림에서 이해해 보자

여기서 와그너가 제시한 도표와 히버트의 도표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와그너/ 디모디 워너 히버트

 

히버트의 이해는 영들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만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사람을 침범치 못한다고 이해한다. 오직 허용적으로 하나님의 간과하심이 있을 뿐이다. 더욱 사탄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히버트의 그림에서는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접근할 수 없는 절대주권적 영역이 있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탄이 과연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도전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J. I. Packer. : 15 ) 에 전적으로 의존함을 명백히 해야 한다. 

 

2. 세속화된 신학의 문제에 대한 비판

 

표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윔버는 예수님의 사역을 표적과 기사로 정의하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교회사의 중심 주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a)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성

그러나 실상 복음서의 주제는 표적과 기사로 일관하고 있지 않다. 초기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표적과 기사를 사용하셨으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란 신앙고백 이후 사역의 방향은 대중적 사역보다는 제자화 사역에 집중하셨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구체적인 반증을 보여준다. 

마16:1 절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로 전도하기를 원한다고 윔버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두 종류의 지도자들을 동시에 복음화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것은 윔버가 말하는 대로 세속화고 이론화된 경직된 바리새인들과, 세계관의 사각지대에 빠져 영, 부활 등 초자연적 실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동시에 자기의 신학이나 사상을 포기하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를 시험(메시야성에 대해) 하러 왔기 때문에 이들에게 표적을 보이면 (윔버의 견해대로) 이들은 꼼짝없이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4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라고 그들의 요구를 일축하셨다. 윔버는 이 구절을 싫어할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었다면 왜 자신의 방법을 ‘악하고 음란’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의문이다. 

 

b) 요나의 표적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모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요나의 표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는 예수님을 요나에 비교하여 자신의 부활을 표적( 헨드릭슨 1984:393 ) 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견해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거절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한다. 

‘요나의 표적’ 이란 말은 너희들이 보기를 원하는 표적은 성경에 있다 는 견해이다. 결국 표적은 예수그리스도 자체이시며, 그의 사역(죽으심과 부활, 표적과 기사가 아닌) 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표적의 진정한 목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병자의 고침, 죽은자의 회생 등은 천국의 도래를 현시하는 모든 것들의 갱신과 재창조라는 사실로부터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이적들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전체가 점점 발전하게 되는 시초로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다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표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리델보스 1987:169)

 

리델보스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병고침이나 죽은자의 회생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들은 곧 다시 죽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철저히 어떤 이적도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행하여 진 것이라고는 한 곳이 없으며 그 활동의 수단으로서 보조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아래 지적은 리델보스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리델보스. 1987: 167 -175) 

 

1. 광야에서 주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장면에서 나타났다 시피 예수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과업을 위해서만 전적으로 사용된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셔서 백성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세상의 통치를 누리는 메시아로서의 모든 사람에게 인정된 메시아 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굶주리는 광야도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회피해서는 안되며 철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는 것도 철저히 성부의 지시에 따라서 행하셨다.

메시아의 이런 사역(겸손, 고난, 죽음...)은 오히려 천국이 어떤 양식을 따라 나타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윔버는 이런 메시아를 초라해서 거절한 것이다.(저자의 견해)

 

2.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의 특별한 양식이나 그리스도 자신의 고유의 메시야적 과업의 성격을 떠나서, 우리는 예수가 행한 이적들이 그의 설교와 비교해 볼 때 점점 그 수효가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이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예수는 그 곳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권유했을 때 주님은 ‘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님은 설교하기를 원하였고 제자들과 무리는 능력을 베풀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님의 ‘진정한 과업은 설교이다’(Schniewind. Mark: 52) 이적은 천국이 임하였다는 예수의 선포의 진리를 사건으로 보여 주는 표시이다.

 

3 이런 이유로 이적과 믿음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적이 예수의 사명과 권위에 대한 믿음을 돈독히 해주며(막2:1-12),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이 있을 여지가 없다.(막6:5)

나사렛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이적 행하시기를 바라고 기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았을 아니면 한 두 개만 행하였을 때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음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이적은 전도의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표적과 이사 자체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결정은 예수의 인간성과 그의 설교의 비밀로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표적은 의미 없는 사건이 된다. 표적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윔버는 이해해야 한다.

 

4. 이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지시하며 세상이 새롭게 될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적들이 곧 세상이 새롭게 되는 시초라는 말은 아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절대권과 능력에 대한 표적들을 보이고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그 믿음을 확증하도록 하라는 교훈을 받았다. 

표적과 기사가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된 것은 아니며 자기 계시의 수단이었다. 여기서 자기 계시란 예수님은 표적을 행함으로서 자신을 증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시험을 받으셨고 자신이 능력을 받고 능력을 베푸는 장으로서 사탄과의 싸움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바빙크는 이적과 기사의 목적을 (바빙크, 1983:218)

1 경건치 않는 자를 징계하기 위해서(창6:6 출5:1 레10:1 민11:30 14:21 16:1 21:6 마8:32 21:19 행13:11)

2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자비를 나타냄(홍해를 건넘 광야의 이적, 예수의 병고침,

3 선지자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기위해 (출4:1 삿6:37 삼상12:16 왕상17:24 왕하1:10 20:8) 서라고 말한다

윔버의 성령관은 오직 능력에만 국한되며 인격적이신 성령의 사역은 간과 되고 있다. 

또한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의 표징이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롬5:8)은 매우 무기력한 말씀이 되고 개인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경험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먼 사람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이 매우 개인적 경험적인 것으로 전락된다.

 

3.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그가 행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 와 같은 방식으로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Wimber. 1988 : 60) 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복음 전도에는 그와 같은 표적이 늘 따라다니지 않고 있고 또한 대부분의 역사상 교회들이 복음 선포에 그런 능력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윔버는 그것을 우리가 전심을 다해 구하지 않았기 때문 (Wimber 1988 : 169). 이라고 한다. 

 

a) 현재적 나라와 미래적 나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되었지만 아직은 미래에 완성될 나라로 정의하고 있다. (Cullmann. 1989 )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현재적인 쪽으로만 강조해서 나타난 오해이다. 

하나님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천국에는 천국과 메시아가 현재 임하였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절정에 달할 시기는 아직 도차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불완전성과 임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천국은 이미 왔다 하지만 그 성취는 아직 미정인 채로 남아 있다.(리델보스 1987:154)

성경은 오히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긴장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삶을 제시하고 있고 최종적 영광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으로마서 8: 22-25 절에서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도한 우리 곧 처음 익은 열매를(그리스도)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들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미래적이다 (고후 5:1-4, 고후4:16-18) 

 

b)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

또한 윔버는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왕국(사탄의 통치, 악한 이 세대)을 격퇴시키고 그 안에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앞으로 올 세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곳에서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소양이 결여되고 얼마나 철저히 표적과 기사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c) 요한 복음의 영생과 힘의 원리(Power) 

공관 복음에서 절대적이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요한복음에서는 “영생” 이라는 관계 중심적인 용어로 바뀐 것도 하나님 나라의 중심 주제가 힘의 원리(Power Evangelism)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다 것을 알 수 있다.

 

d) 윔버와 빈야드교회와의 분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근거로 빈야드 교회는 ‘그가 행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와 같은 방식으로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Wimber. 1988 : 60) 하면서 여러 계시와 끔과 예언 환상 등을 인정하고 수용하여 엄청난 부흥을 이룩했다. 그러나 부흥과 함께 점점 비성경적 요인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윔버는 토론토의 빈야드교회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제명하게 된다.

“저는 빈야드 교회 연합이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지도라로 사역해 온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공식으로 철회함을 통고합니다. ...(중략) ...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운데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있을 수 있다고는 이해하지마는 이러한 현상들은 권장되거나 강단에 세워지거나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어지도록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바탕으로 삼아져서는 안 됩니다.”(윔버, 1995,12,13일 토론토 빈야드교회 지지철회 통고문) 

이는 엄청나게 웃기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자랑하고 교회성장의 대표적이며, 능력과 기사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교회를 제거한 것이다.

토론토 빈야드 교회 부목사인 록(Steve Long)은 ‘귀신에 의한 일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Christian Week 1995, 5, 9)고 전하고 있다.

토론토 공항 빈야드교회 담임목사 존 아노트의 윔버에게 보낸 답변서.

(1995년 12, 5) 

“우리는 주님의 계획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주의 성령의 특정한 역사를 주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하나님의 묵시적 인도는 빈야드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들에서 분기(分岐)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에 대하여 신실한 청지기로써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에 심히 유해한 반향(反響)을 최소화하도록 행동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결국 서로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틀린 것인가? 둘 중 하나인가 아니면 둘 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2:3-11)

 

4. 교부들의 사역

 

윔버는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의 기적과 함께 사용되어 예수님의 사역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계속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사도직의 표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경을 면밀히 검토하면 능력과 기사가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에 집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원시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의 초기 사역인 오순절 사건을 중심으로 나타 났으며, 복음이 어떤 지역에 처음으로 소개될 때는 능력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증거 하신 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사건을 기점으로 후반부의 사역에서는 더 이상 표적과 기사가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초기 개척 시대에는 일어났던 초자연적 사건이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들로 대부분의 서신서가 구성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와 그 후 시대에도 이런 현상들을 강조한 분파들이 계속 있어왔지만 그들은 결국 이단으로 지명되었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들의 출현이 하나님의 교회를 각성시키고 참된 복음을 회복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진리는 비진리이다. 교회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라고 해서 진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패커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교회를 갱신시키고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를 긍휼히 여기심과 그의 백성들이 굳은 심령을 진리로 새롭게 하심과 특별한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김성태, 1995:177) 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능력 전도에 대한 비판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를 실패한 것으로 보고 “다음 행선지인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바울은 말씀 선포와 더불어 이적을 행사했던 것 같다” 고 윔버는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고린도에서 행한 사역의 유형을 능력전도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동시에 이성을 초월하는 복음사역이기 때문이다.’ 고 말한다 

그러나 윔버의 성경관찰은 거꾸로 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고린도서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a) 고린도서는 능력전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전혀 표적과 이사를 거절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고전1:22에서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b) 성경적 능력은 무엇인가

바울은 지혜로운 방법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능력과 표적과 이사’에 의한 방법도 부정하고 있음을 윔버는 보지 못했다.

윔버는 고전 2:4절을 인용하면서 ‘내 말과 재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를 즐겨 인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상에서 살펴보면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이 능력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1장 23절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가 능력이며 지혜라고 한다.

이는 아덴에서는 실패한 전도가 바울이 마음을 고쳐먹고 고린도인에게 전도를 할 때 ‘기사나 이적’을 통해 고린도인들이 쉽게 전도받고 그 결과 고린도에서는 많은 결실을 맺었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설명은 지혜도 없어 보이고 능력도 없어 보이는 설교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을 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설교를 통해서 성령이 능력을 베풀어 많은 사람을 믿게 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능력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첫째, 복음 그 자체를 말하는데 사용되었다. (롬1:16)

둘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어다. (엡3:16-9)

셋째, 경건한 삶, 즉 순종하는 사람을 살도록 하는데 사용되었다. (벧후1:3) 

고(성인경 1994 : 89-93) 가르치고 있다.

 

c) 십자가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는가?

윔버는 ‘교회가 너무 지나치게 십자가만을 강조한다’(능력전도, :60)고 비난하고 있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과 끝날의 영광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윔버는 성경의 가르침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고 무능력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멸망할 유대인들의 관점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외적인 형태로 나타나도록 전제한 그의 전제는 물량주의적, 경험주의적 신학의 올무에 빠지게 되었고 주관주의의 함정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d) 세례요한에게 말한 예수님의 증거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었을 때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귀머거리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윔버는 이것을 보라고 외친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이 주님되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많은 자칭 메시아가 나타나 기적을 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보고도 사람들은 즉시 메시아라고 부르기를 주저 하였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으면서도 메시야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표적과 기사 그 자체로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마11:4-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고 하신 말씀은 ‘ 귀머거리가 듣을 것과 소경이 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이사야 성경의 말씀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 즉, 말씀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으로 본인은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바로의 마술사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마7:22)할 수 있다고 하신다.

눈에 보여지 기적을 주목하라고 하지 안고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이다.

 

e) 계시론 문제

성서전체를 통하여 자연적인 존재와 활동에 초자연적인 것들(천사의 방문, 꿈 , 환상, 예언..)과의 계속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과 원하시는 길을 보여 줄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계시관의 오해에서 온 것이다. 개혁주의는 계시에 대해 두 가지 큰 주제를 견지하고 있는데 하나는 계시의 완료성이며, 다른 하나는 계시의 점진성이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두 기둥은 바른 성경 해석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계시의 완료성: 계시는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뉘는데 여기서는 특별계시인 성경의 완성을 말한다. 성경의 계시는 사도시대에 이미 완성되었고 수정되거나 첨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성령이 성경을 통하여 조명하심을 믿는다. 그래서 설교를 강조하여 보다 더 잘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윔버의 교회는 성경을 강해하거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고 순종하려하기 보다는 설교시간은 대부분 간증이나 일어나 기적에 대한 소개로(정동수, 1996:166) 끝나 버리고 늘 강조되는 것은 비이성적 혼돈 상태에서 나오는 예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계시의 점진성: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 66권 각 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의 정도에 따라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계시에는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theophanie)으로 하나님이 감각적 인식이 가능하도록 인격적으로 나타나시사 자신의 임재하심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사사시대 이후에는 점차 그 자취를 감추고 백성들 가운데 그 성전 안에 거하시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자들이나 대리자들에 의해 전해지게 된다. 그러면서 성경의 기록이 점차 많아지면서 간접적 방편을 사용하신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신현의 절정을 맞게 된다.

 

f) 기독교 무당: 꿈 환상 천사의 방문 가능성

또한 꿈이나 환상도 자주 사용되어 지는데 초기 계시 단계에서 많이 나타나고 선지자나 예언자에게 나타났었다. 그러나 꿈은 헛된, 거짓된 사탄의 계시로 사용되기도 한다.(시7:20 사29:7 렘29:8)

윔버는 심지어 주술적인 능력까지도 사모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아서 그들의 죄악과 요구를 알아내는 능력, 병마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 , 사탄의 사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을 사모하고 있다. 이런 독심술(讀心術)은 이방 종교이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교회에도 ‘투시의 은사’란 이름으로 이단이나 불건전한 기도원에서 행하여 지고 있는 것이다. Power Encounter를 지지하는 앤더슨(Anderson :setting free )도 투시를 사모할 은사로 구분했다. 

결국 기독교를 저속한 무속 종교로 전락시킬 위험이 매우 많다. 과거에 기독교가 부흥했다가 신비주의로 발전하여 영적으로 망한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적 무당(영국과 미국에는 기독교적 마술사가 많다. 십자가와 성경, 마리아 상을 등을 도구로 점을 치는 점쟁이)을 만들어 내는 근거를 학문적으로 제공해 준 셈이다. 

이런 식으로 계시가 완성된 상태에서 특별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조명 외의 또 다른 방법, 즉 꿈이나 예언 ,독심술 등을 사모하기 시작하면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질 심판이 있을 것이다. 살후 2: 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2:3-11)

이렇게 발전되어 가는 신학적 흐름에 대해 패커(J .I. Packer)는 오순절 성령 운동의 위험성을 ‘엘리트 의식, 분파 주의 , 감정 주의, 반지성주의, 직통주의(Illuminism) 카리스마니아(은사를 그 사람의 영적 수준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성, Edward D. O'connor에 의해 시작된 용어), 극한 초자연주의, 행복주의(Eudaemonism), 귀신의 압박, 획일주의’를 들고 있다. (Packer. 1986 : 250-257) 

 

6. 힘(Power) 개념의 문제점

 

힘의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영향 아래서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획일적으로 외형적, 물질적, 가시적, 경험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매우 가시적 경험적 세계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능력은 때로 외적 경향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의 완성된 나라 국민으로 접합하게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 지향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복음이 심히 왜곡되어 현세적 종교로 기독교가 전락하게 될 것이다.

 

7. 영역문제 (Territorialism) 

 

1)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현세에서는 인격적이며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서 “영토”의 문제를 잘못 이해한데서부터 출발한다. 윔버는 ‘맹수의 부르짖음’ 현상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말하는 글에서(빈야드운동에 대한 공개강의 1996: 16. 개혁주의신행협회주최) ‘대적의 영향에 대한 하나님의 분개’와 ‘영토를 되찾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의 선언’ 이라고 한다.

윔버는 하나님나라의 영토 개념을 현 세계의 어느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이곳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좌표상의 어느 지점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격적인 장소이다.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가장 참되고 심오한 설명은 예수 자신의 인격 속에서 찾아야 한다.(Ridderbos 1987: 13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천국이 어디 있는가 물었을 때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한다. 이는 천국이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이 인정되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영토 개념을 공간적으로만 이해 한 것이다. 한 번 회복된 땅이라고 해서 영원한 주님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절대 기준은 그의 신하(제자)들이 왕과 함께 거하는 곳은 어디나 천국이며 그 신하들이 떠나고 사탄의 무리가 거하면 그곳은 즉시 사탄의 영향력이 지배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고 복구된 지역이 될 수 없다. 

여전히 그 장소가 무엇으로 사용되던지 그곳에 거하는 자가 누구이며 누구의 지배를 받는자 인가가 중요하다. 

 

2) 과연 하나님이 원수(사탄)의 손에 땅과 사물을 강탈당하였는가? (윔버,1996:17)

하나님이 각 교회에 ‘일어나 원수가 불법으로 강탈하여 지배하고 있는 땅과 사람과 사물을 되찾을라’고 말씀한다면 사탄에게 빼앗긴 것이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들어보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6조는 인간은 ‘원죄이든 사실상의 죄이든 모든 죄는 의로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 율법에 역행하는 일로서 ... 그로 인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엡2:3) , 율법의 저주를 받도록 되어 있다.(갈3:10) 따라서 죄인은 영적이고 현세적으로 가장 비참하고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롬6:23 엡4:18, 롬8:20, 마25:41 살후1:9) ’ 

대요리문답서 27문은 “타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상실된 것과 하나님의 불만과 저주를 가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사탄의 쇠사슬에 매인 종이며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모든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창3:8,24, 엡2:2, 딤후2:26, 눅11:21, 히2:24, 롬5:14, 롬6:23, 애3:39, 마25:41, 유7)” 라고 한다. 

계속해서 28문에서는 죄의 형벌을 “내적으로는 마음의 어두움으로 버림받은 생각, 심한 명상, 마음의 강퍅, 양심의 공포, 추한 정욕이며, 외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모든 피조물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와 우리 육신과 명예와 상태와 관계 직업에 미치는 악한 것과 죽음 그 자체입니다.(엡4:19,롬1:28, 살후2:11, 롬2:5, 사33:14, 창4:13, 마27:4, 히10:27, 롬1:26,창3:17, 신28:15-8, 롬6:21).”

 

인간에게 임한 저주와 고통은 사탄이 인간을 강탈해 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죄 가운데 유기(遺棄)하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결과 였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아담과 화와를 추방하셨고 화염검을 가진 천사로 지키게 하셨다.

 

3) 성경의 잃은 자에 대한 언급 -개인적 차원이 많다

잃은 자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군중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행하며 유리함이라(막6:34) ’고 하셨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랄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눅10:2) 고 하셨다.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과 추수(영적 회복) 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언급으로 이곳에는 사탄과의 전쟁이나 빼앗겼다는 의미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τ? ?π?λωλο?) 양’ 이 있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삭개오 이야기(마10:6 115:24) 처럼 좀더 개인적인 의미에서 발견되어진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의 아흔 아홉’과 대조되는 ‘잃은 양’의 비유가 있다.(눅 15:1-7, 18:12-14), 잃은 동전 비유와 탕자의 비유(눅15:8, 11)가 있다.

여기서 ‘잃은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대의 유대 국가 내에 있는 종교적 반감을 고려해 볼 때 대단히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들이고, 율법에 대해 철저하지 않은 군중들과 백성들은 멸시를 받는 잃은 자들이 된다. 

예수님이 거듭 말씀하신 잃은 자들은 바리새인인 경멸하고 또 사회에서 그 존재 가치를 상실 당하였던 사람들의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리델보스,1987:215-217)

 

그 이유는 ‘잃은 자’는 소위 ‘죄인들’ 혹은 ‘세리와 죄인들’ 로 한층 강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아를 상실한 자이며 돌아보는 목자가 없어 하나님의 참된 백성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잃은 자’가 하나님이 사탄에게 빼았겼다는 의미로 이해 된 것은 한 곳도 없다.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일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마9:3) 그리고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구절을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천국의 실현을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탄도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아래서 잠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기까지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윔버의 견해대로 라면 하나님은 늘 ‘사탄 때문에 분노하여 울부짖는 분’ 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힘이 약한자가 강한 자를 인하여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와 울부짖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탄 보다 열악하다는 것으로 된다. 이는 철저한 사탄을 높이는(고의적인지 아니면 무지함인지..) 반역적 행위이다.

 

8. 지역신 개념 

 

 

세계에는 지역마다 그 곳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있는데 이것을 먼저 결박하고 축출하고 나야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 될 수 있다고 믿는 이 개념은 매우 구약적(혼합주의적 혼돈에 빠진 이스라엘의 경우) 사고이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주변의 아람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다스린다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구약의 전통적이며 정상적 사고는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대상16:26)’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세상 백성의 신(대하32:19)’,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왕하19:18)’,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는 참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사 37:19)’,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행19:26).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신약에 있어서도 바울은 우상의 재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를 

‘ 우상의 재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참신)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 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우상에게 드린 재물을 먹음에 대하여)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 고전8:4 -)

우리가 먹든지 않든지 그 자체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약한 자가실족하지 않기를 위해 금할 것을 말한다.

고전10:26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구약과 신약의 계속적인 가르침과 선지자들의 교훈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신들까지도 마음대로 장악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우상은 실재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탄은 그 존재를 인정해 줄 때 그 활동의 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탄의 영역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어느 지역에 대한 축사를 단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고 이런 예는 이방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교도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주 능력 대결의 모델로 제시되는 구절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구절들을 살펴보자. 

 

① 갈멜산 사건 

능력대결의 표준적 모델로 제시되는 엘리야의 갈멜산 사건에서도 아무리 세밀히 살펴도 바알(사탄)과 하나님이 대결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참 신이시며 바알은 거짓 신(신이 아님을 )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기획하신 사건이다. ( 엘리야가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지시한 사건임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왕상18: 1)

하나님이 계획 하셔서 이스라엘에 기근을 허락하시고 또 때가 되매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의 계획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에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신 하나님 등 모든 성경에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이 대립적인 양상을 띤 것이 없다. 

이 사건에서 바알은 아무런 흔적도 나타내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저항하거나 대결하는 국면을 전혀 보이지 못하였다. 여기서 사탄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 앞에서는 존재나 활동 자체가 무시되며 사탄의 사역지는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는 속임을 베풀 수 있다. 

 

② 다니엘서 해석

지역신(territorial spirit )을 주장하는 디모데 워너는 그 증거로 단 10:13-4, 고후4:3-4, 마 12: 29 을 들고 있는데 

단 10:13-4 의 바사국군이 막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 부활 사건까지의 사탄의 방해 기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만일 워너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 계획도 사탄이 막으면 21일 까지 (다니엘의 경우) 방해를 받을 수 있다면 엄청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다니엘의 21일 기간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도가 있으므로 하나님 편에서 지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분명하지 않고 대체로 접근을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해석학적 작업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한 구절의 난해한 구절을 가지고 개혁주의의 주권 신학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고후4: 3-4는 사탄이 불신자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믿지 못하게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 사탄만 제거하면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Packer.1982 : 111)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있어야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Territorialism 의 개념은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알미니안적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탄이 저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3절에서는 “망하는 자들” 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미치지 못하도록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탄의 역할(혼미케 하거나 아니면 불신자의 영혼을 포기하여 하나님께 넘겨주거나 하는)이 구원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전제가 되는 것이다.

마12: 29 절은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의 두목’이라는 대적자들의 논리에 대해 변증하시면서 일반 전쟁에서의 비유를 들은 것이다. 예수님도 먼저 사탄을 결박 시켜야 그 다음에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패커(Packer. 1986 ) 우려한 것처럼 사탄을 너무 대단하게 높여 하나님의 주권까지도 억제하거나 제한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일 뿐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용적 도구일 뿐이다.(삼상 16:14, 15, 18, 18:10)

 

9. 여호와의 악신

 

여호와의 악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 이 사울을 번뇌케도 하고 사울에게서 떠나기도 하였다. (삼상16:14, 18:10, 19:9) 이 악신이 하나님의 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따르며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같은 개념을 살후2:10에서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아니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둔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셨느니라’

칼빈은 결국 “사탄이 어떻게 버림받은 악한 자들을 지배하며 여호와께서 어떻게 버림받은 자들과 사단 가운데 역사하시는가”(Calvin IOTCR vol.2 ch.iv. 96) 를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한다. 

칼빈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독교강요 2권 4장)

인간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나 성경은 사단을 사용하여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1 인간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으며 자발적으로 그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

2 하나님과 사단 및 인간이 동일한 사건에서 활동한다.

3 하나님께서 진노를 전하는 사단을 통하여 그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그가 원하시는 대로 인간의 목적을 정하고 그들의 의지를 자극시키며 그들의 노력을 굳게 하신다

4 하나님이 악인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여주는 성경적 실 례가 많이 있다.

5 사단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10. 영적 지도( Spiritual Mapping) 개념

 

사탄에 대한 과대한 인정 현대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Dowson. 1992 : 31) 이것은 모든 문제를 사탄에게 돌리고 사탄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될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사탄을 결박하여 추방한 지역은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다 되어 버린 지역이 되는지 물어야 한다. 어느 도시도 복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회복된 데는 없으며 영적인 생명의 문제는 공간적인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초 공간적인 실제이다. 이것이 서구의 세계관이 동양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후 올바른 분별력을 잃고 있음을 보는 부분으로 초자연적 영적 실제를 과도히 인정한 나머지 영적 실제를 물질적 공간적 실제로 대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 되는 개념이 통치(Reign) 인가, 아니면 영역(realm)인가? 에 관한 문제는(Ladd 1985:151) 이미 결론이 제시된 것이다.

 

11. 토론토 축복의 문제점

 

a)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함

상담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중얼거리며 사람들의 이마를 손으로 침으로서 그들이 뒤로 넘어져 영문 모를 말을 하고 웃는 것인데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 현상은 능력 아래 넘어지는 것, 성령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 성령 안에서 쉬는 것 등으로 묘사된다.’ (정동수 1996:131)

이런 경험의 원천은 하나님 외에도 자기최면 혹은 그 현상에 참여하는 동료들간의 압력, 혹은 단지 그 현상을 경험해 보려는 욕망 등에 따라 순전히 인간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 

표적과 기적을 보여 달라는 외침은 역사상 계속 되어온 것이다.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오히려 넘어지는 것이 반대의 경우 즉, 사탄의 역사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 17: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 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오자 또 넘어졌다.

막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 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이들은 황홀경이나 정신적인 기능의 상실을 가져 왔다. 넘어질 때 생기는 수치를 가리기 위해 어떤 여인은 담요로 하체를 가려야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자주 일으키셨다. ‘일어나 네 침대를 들고 걸어가라’요5:8) . 마귀의 통치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은 반대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었다(막5:15)

쿠르트 코흐는 ‘나는 입신(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함)을 성령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고 했고, 메릴 엉거는 ‘유명한 병 고치는 자들과 카리스마 지도자들은 이런 능력들을 성령의 참된 선물로 인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부인해야만 한다. ..... 오늘날 교회 내에서 계속 팽창하고 있는 카리스마적 혼돈은 하나님의 백성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을 매우 미묘하게 실제적인 형태의 신비주의로 데려가려는 사탄의 가장 큰 계략이다’ 라고 지적한다.

 

b) 웃음예배와 맹수의 부르짖음

‘거룩한 웃음’ 으로 일컬어지는 부흥운동은 성령에 의해 죽임 당하는 것, 조절할 수 없는 웃음, 괴성을 지름, 맹수의 표호, 발작, 놀람 기쁨, 평화, 사랑을 느끼는 것 등을 동반한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가르침에는 너무도 흡사한 것이 많이 채집된다. 

뉴에이지 사상 중에 쿤달리니 에너지(kundalini energy)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등뼈 속에 굉장한 에너지원이 있는데 이것을 개발하여 표출하게되면 어떤 병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보자

‘ 이 같은 과정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규제한다는 것에 매우 어려움을 느끼게 되며 쿤달리니 에너지가 밀려들어오는 동안에 여러 종류의 원치 않는 소리를 내고, 그들의 몸은 이상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로 움직인다. 이 같은 현상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무런 동기가 없이 부자연 스럽게 내는 웃음이나 또는 우는소리를 내는 것, 다른 이상한 방언을 하는 것, 동물의 소리나 움직임을 흉내내는 것 등이다. .... 이렇게 쿤달리니 에너지가 깨어나게 될 때 생기는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이 과정이 종종 격렬하며 파괴적이지만 실상은 병을 고치는 것이다.’

라즈니쉬(오레곤주에서 활동한 구루로서 일단의 무리의 교주였다)의 경우도 자주 신에 의해 술취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추종자들에게 영적 술을 마시라고 권하였고 라즈니쉬의 영적 술은 그의 손이 사람들의 이마에 닿으면 그의 추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황홀경에 빠져 마루 위에 누어 있곤 했다.

인도의 성인 라마 크리쉬나는 매일 사마디(Samadhi) 라는 황홀경에 빠졌는데 매우 아름다운 꿈을 꾸고 공중 투시(육체 이탈)도 하며 길게는 며칠씩 이런 현상이 계속 되었다. 또 울음이나 웃음을 동반하기도 했고 또한 다른 사람도 머리나 가슴에 손을 얹음으로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크타난다 역시 ‘샥티팻’ 이라는 머리에 손을 얹는 행동을 통해 ‘구루의 은혜’ 라는 것을 추종자들에게 주었는데 이들에게는 자제할 수 없는 웃음, 으르렁대는 소리, 개처럼 짖는 것, 쉬쉬하는 소리를 내는 것, 몸을 떠는 것 등이 있었다. 때로는 얼마간 벙어리가 되거나, 의식을 잃거나, 굉장한 기쁨과 평화, 사랑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중국의 기공 도사 얀신(Yan Xin)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의를 한 것에 대해 1992년 5월 16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 강연장의 그곳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쏼라쏴라 외쳐대는 오순절 부흥 집회와 비슷하게 되었다.’

얀신은 ‘민감한 사람들은 매우 강렬한 육체적 감정, 즉 웃음이나 울음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과정이다.

멜른이 지은 [미국 종교백과사전] 에는 수부드 신앙은 핵심 요소인 라티한(latihan)을 연습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의 능력에 자신을 내어놓는 방법을 의미한다. 인용하면

‘올바른 라티한은 우리기 의식을 생각 너머로 옮겨 놓음으로서 신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많은 경우에 여러 가지 몸짓과 음성으로 나타난다. 즉 비명소리 신음소리 웃음소리나 노래가 동반된다. 이때 사람들은 사랑 자유 등의 감정을 느끼며 병고침도 받게 되고 고차원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

이상의 여러 이교도들에게서 보여지듯이 윔버의 이런 현상들은 기독교와 가깝기 보다는 이방 종교와 가까운 것이라는 것이 종교사회학적 분석이다.

초대교회의 이단인 몬타니우스파도 황홀경에 빠져들어 가서 ‘인간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을 한탄하거나 울부짖었다.’ (스나이더 1994: 22 -24)

토론토 웃음예배의 비정상적인 것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토론토 축복 혹은 거룩한 웃음예배는 모든 예배와 영적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이 의식과 함께 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매우 중대한 성경의 법칙을 무시한다.

2 성경어디에도 소위 토론토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3 토론토 축복은 사람의 기분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4 토론토 축복은 대규모 군중최면이다.

5 그것을 받아들이는 크리스천들의 맹신에 대한 기준을 더욱 약화시킬 뿐이다. (더 큰 속임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분별력을 마비시키는 것)

6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을 약속한다. 그러나 지름길은 성경에 없다.

7 복음을 흐리게 만들며 에큐메니칼 일치를 촉진시키는 또다른 방식이다.

8 새 생명을 얻거나 회개하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 즐거움과 쾌락을 조장한다.

9 남들에게 과장해 보이려는 시도와 불경스러운 것들로 점철되어있다.

10 이 같은 실수로 인해 토론토 축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매우 창피한 것으로비쳐지게 한다.

웃음이나 맹수의 소리 등은 분명히 이단적이고 이교도적인 것으로 인격적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영적 성장과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와 혼돈으로 지탄받는 일이 되었다. 

 

사회로부터 지탄의 소리가 높아지자 토론토 축복은 잘못된 것이 라고 이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인 윔버는 토론토공항 빈야드 교회를 추방한다(L.A Times 1995.12.10) 선언은 웃을수 만은 없는 넌센스이다.

이들은 그렇게 찬양하고 빈야드의 성령운동이라고 선전 고무하던 현상을 추방한 것이다. 그럼 추방된 빈야드와 다른 빈야드는 다른 영이었는가? 

토론토에서 주도하던 그 영적 존재가 다른 빈야드 교회의 영적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닌가.

요한은 경고하고 있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개혁주의 교회는 더 이상 교회성장의 귀신에 들려 교회만 성장한다면 무엇이든 하고 보는 마귀의 올무를 분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미련해 보이나 가장 분명하고 빠른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2-25)

 

IV. 성경적 영적 전쟁

 

선교와 복음 전파에 있어서 둔화된 성장에 획기적 해결책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서구 교회는 세계관에서 원인을 찾았고 이에 따라 영적 대결, 영적 전쟁, 오순절적 성령론 등에 따른 감각적이고 즉흥적(신속한)부흥을 추구하게 되었다. 더 빠르고, 더 감각적인 결과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부분적 진리를 갖게 되었고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결론이 제시하는 것으로 유혹을 받게 되었다. 

교회 안에 편만히 자리 잡아가고 있는 귀신론과 축사론, 빈야드의 성장론 등은 성화의 바른 길을 저해하고 교회를 온통 혼돈의 늪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혼합된 세계관 속에서 추구하는 열심히 얼마나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개혁주의 교회는 빨리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개혁주의 진영은 현대의 이성주의에 물들어 영적 전쟁을 신비적인 것으로 무시해 버리고 문제를 심리적 사회적 병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도 경계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변별력 없이 빠져들어 가는 극단의 은사주의자들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실제 영적 전쟁 안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사탄과 직접 부딪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거짓 교훈에 대항하여 우리의 마음을 결단하는 전쟁이 올바른 영적 전쟁이다.

 

A. 오해 된 영적 전쟁

 

영적 전쟁에 관한 혼돈이 심각하다. 폴리슨(1996:10)은 이런 경험을 말한다.

신디아는 토스트기가 고장이 나자 귀신을 쫓아냈다. 그리고 남편과 언쟁이 나자 서로 상대방에게 분노의 귀신, 자존심의 귀신, 자기의의 귀신을 결박하고 꾸짖고 쫓아냈다.

신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편의 눈에서 번뜩이는 살인마 같은 귀신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는 외쳤죠 분노의 귀신아,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너의 능력을 결박하노라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쏟아지는 사탄의 능력을 막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구했어요’

이런 기도의 결과는 무엇일까

첫째, 부부 서로에 게 적대감과 증오를 증대하였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이 적대감 공표와 혼돈 미움을 위해 사용하였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서로를 사탄

의 종으로 보냄으로서 사탄은 어부지리(漁父之利) 하게 되었다.

사탄과 귀신에게 막대한 힘이 있음을 인정해주는 결과를 초래했고 사탄을 인간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시켰다. 

사탄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사는 사람에게 매우 용기를 주는 말인 것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고 너의 안에 있는 사탄의 짓이므로 사탄만 쫓아내면 된다’ 는 생각이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당연히 당사자는 그때부터 문제만 생기면 사탄을 쫓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평생 해결되지 않고 날마다 사탄만 쫓으며 공허하고 무익한 삶을 반복할 것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사탄(또는 귀신으로 사용하나 본 논문에서는 혼용함)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세계에 온통 귀신들이 가득한 것으로 말한다.

영적전쟁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오는 문제(건강, 재정, 직장..)나, 개인적(성격, 성욕, 낙담, 과식, 외로움...) 문제를 축사를 통하여 몰아내어야 할 죄와 갈등의 귀신들의 행위라고 믿는다.

위에 기록한 사례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소설, 미신, 환상, 비상식, 어리석음과 철저한 이교도적인 영적현상이 우리 세대에 ‘영적 전쟁’ 이라는 가면 아래서 교회 안에 번창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전쟁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이유를 폴리슨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우리는 현대의 과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2. 우리는 갈수록 이교도적으로 되어 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3. 선교와 인류학, 현대 커뮤니케이션이 우리로 하여금 애미니즘 문화의 관습과 믿음을 더욱더 의식하게 했다.

4. 마약 담배 술 부도덕한 성관계, 폭력 ,음식, 일, 돈, 쾌락, 스포츠 등에 중독된 심각한 속박아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5. 종종 극단적 학대 때문에 일어나는 이상 행동이나 문제 행동은 더욱 빈번히 나타난다.

6. 많은 사람들은 가끔 악의 존재를 기괴하고 흥분된 감각으로 경험한다.

7.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속에 거주하는 귀신들을 쫓아 내기 위해 축사 사역(DELIVERANCE)을 가르치고 실행하고 있다.

 

B. 영적 전쟁의 전통적 방법

 

역사적으로 영적 전재엥 관하여 글을 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귀신들림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역사 하는 사탄의 힘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거짓의 굴레에 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영계 속에서 살았고 영적 전쟁에 관해 너무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탄의 전투, 함정, 속임수, 계략을 알았지만 축사형태의 사역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책으로 토마스 부룩스의 ‘사탄의 계략에 대항하는 귀중한 치료법’, 존 번연의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윌리암 거널의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거대한 분리, 공간삼중학’, 레이 스테드만, 제이 아담스, 존 맥아더 등이 있는데 이들은 죄를 귀신 들림으로 보지 않았고 또한 축사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던 존 네비우스(J. Nevius)와 프레드릭 리히(F. Leahy)는 사역지에서도 현대 축사론의 방법에 따르지 않고도 사탄 문제를 설명한 사상가들이다.

네비우스는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중국인들의 수 백가지 귀신들린 현상을 보고하면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귀신으로 부터 구원했고 (Demon Possession and Themes에서), 리히는 1975년 그의 책 ‘쫓겨난 사탄’ (Satan Cast Out) 에서 귀신론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성경적 증거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감각적인 것을 선동하여 자주 부당한 결론에 도달한다’ 고 말했다.

엡 6: 10-20절 성경이 말하는 사탄과의 싸움에는 축사가 아니라 첫째,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에 의존하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며, 셋째, 순종하고 넷째, 열심히 기도하며 다섯째, 성도들간의 협력이다. 귀신들이 인간에게 침입하여 거주를 통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경은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성도 상호간의 관계가 거론되고 있어서 이 두 관계가 정상적일 때는 사탄의 공격을 이길 수 있다.

 

축사론자들은 귀신을 경시하고 영적인 힘을 불필요하고 열광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상해로부터 보호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정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성도도 귀신에 의해 시달릴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면서 믿음은 火戰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패를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귀신이 미치지 못하는 천국으로 옮겨 놓으시지 않는다. 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계속 축사를 해야 한다는 마술적 세계관에 빠져있다.

 

C. 마술적 세계관의 문제점

 

마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건과 행동을 귀신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역신 (Local-gods), 영들, 조상신 등에게 잘 보여야 하며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둘째, 마술 숭배와 그 행위는 규범이다. 점성술, 예언자, 영매, 마법사, 몰아지경에 빠지는 자, 점쟁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셋째, 마술을 행하는 민족들은 또한 폭식, 술취함, 갖가지 종류의 부도덕, 욕심, 피에 굶주림, 힘의 과시와 같은 일반적인 인간의 중독을 추구한다.

그런데 Power Encounter를 통한 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여러 죄와 상처, 인생의 문제점들이 있는 것을 ‘사탄이 거주하는 지역’ 또는 ‘사탄이 거주하는 장소’ 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죄, 상처, 문제에 귀신들이 들어가 거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들의 거주 문제’로 보지 않고 또한 ‘귀신을 쫓아냄’을 해결 방법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의 축사를 지지하는 제 3의 물결 운동자인 와그너, 챨스 크랲트, 존 화이트, 윔버 등은 지역악마주의(Territorial Spirits) 관점으로 접근하고있다. 

복음주의 계열의 닐 앤더슨, 디모디 워너, 톰 화이트, 에드 머피 등은 자기구제법 (self -help)을 통해 제 3의 물결 운동주의자들과는 차이를 보이면서 대신 귀신의 거주로부터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으로 ‘진리와 믿음’을 강조한다.(폴리슨 1996:38) 

 

D. 구약성경의 가르침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주변국은 철저히 지역신 개념에 물들어 있어서 귀신들을 숭배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영향에 이스라엘도 비와 농경신으로서 바알을,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서 아세라를, 번영의 신으로 애급의 아피스를, 전쟁의 신으로서 여호와를 섬기는 혼합종교의 형태를 가진 때가 많았다. 

이스라엘에 정치가 평온하여 농사에 관심이 많을때는 바알과 아세라를 찾고 하나님의 징계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여호와 종교가 번성한다. 이 두 사이에서 늘 머뭇거리며 혼돈의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여러 주변국가들과 그 신들사이에서 국가가 발전하면서 현대 교회보다 훨씬 귀신의 활동에 대해 익숙한 사회였다. 그러나 구약은 귀신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오늘날의 축사주의자들과 같지 않았다.

구약은 사탄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마술적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죄와 고통에 대해 귀신론적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또 구약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며 모든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지 않는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

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삿21:25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전9:3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위의 성경은 한결같이 인간의 죄와 악행, 마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도 인생의 문제에 귀신의 역할과 개입을 강조하지 않고 인간의 자체의 부패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싸움의 대상이 귀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임을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경을 살펴 보자

 

1. 구약의 가르침의 해석

 

a) 창3: 1-5 사탄의 종속성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성경은 사탄이 피조물임을 명시하고 있다. 사탄은 겨우 피조물 중 야생동물로 비교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교적 세계관은 이 세상을 능력이 비등한 善神과 惡神의 대결장으로 생각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저주의 대상이며,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된 것을 말한다. 

마술적 세계관은 귀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여 마치 하나님과 사탄이 영적으로 대결(encounter)할 수 있는 것처럼 사탄을 높여 주고 있다. 이것은 현대적 사탄 숭배주의들의 선언이 아닌가?

예수전도단의 존 도우슨(John Dawson)은 천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그는 지배천사(territorial angel), 보좌천사, 최고천사, 지천사, 천사장, 수호천사가 있다고 말하며(도우슨 1992:143-4), ‘보호천사는 아이들이 탄생할 때 지정되어 평생 그 사람을 시중든다’고 한다. 천사는 물질 세계(지상세계)의 일을 도와 주는 일을 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신다.(1992: 148) 고한다. 

그러나 도우슨의 결론은 성경의 계시의 발전 과정에 대한 무지함에 따라 성경을 단편적으로 종합한 결과이다. 

구약시대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계시가 완성되며 성령의 내주가 있고 난 다음에는 천사가 인간의 삶에 개입하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내주는 인생의 모든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지도하시는 일에 충만하며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손이 모자라 천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육체적으로, 또는 가시적으로 나타내실 수 없기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타내셨으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보이셨고 성령의 내주를 통해 모든 문제를 온전히 이루셨다.

그러나 히브리서 1:19의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구약에 익숙한 사람들로서, 천사에 대해 저들이 가지고 있는 숭배하는 마음을 책망하기 위해 구약적 관점에서 ‘성도를 섬기는’ 자란 말씀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구약에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을하여 사람을 돕는 일을 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수신자들이 알고 있는 천사에 대한 구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천사는 너희를 섬기라고 보내준 자’ 들인데 너희는 어찌 그들을 섬기느냐? 라고 책망하시는 말이다. 이 구약적 전제를 버리고 현재에 적용하면 천사가 우리 뒤를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보호하는 자가 되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과 혼돈을 야기 한다. 

신약의 다른 어떤 곳, 특히 우상을 숭배하는 여러 지역에서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게된 여러 초대 교회에서도(특히, 사탄의 위가 있다고한 계시록의 7 교회에서도) 사탄을 대적하는 일을 축사로, 성도의 삶을 돕는 천사의 존재에 대해 말하려하지 않는다.

창세기 3장의 결론은 

첫째,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종속된다.

둘째, 사탄은 사악하고 거짓말쟁이이며 살인자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문제는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 고통, 번민, 고뇌, 비난, 죽음 등은 죄의 결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결과이다. 사탄으로 인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이다.

 

b) 삼상 16:13-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

여호와의 영이 사울왕을 떠나게 될 때 악신이 사울을 괴롭혔다. 

이 결과는 다음과 같은 원인을 가진다.

첫째,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둘째,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에게 평안을 빌도록 함으로서 다윗을 높이는 것이다.

셋째, 다윗에게 궁정을 출입하도록하여 장차 왕으로서 통치 원리와 기반 형성을 형성케 하기 위함이다.

넷째,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줄을 알게하는 알게하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셨다.

이 결과 다윗은 범죄 했을 때 먼저 하나님께 성령을 거두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도(다윗)을 양육해 가시는 주권적 사역이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의 범죄한 왕들이 다 악신에 들린 것은 아님을 보아서도 주권적 사역임을 알수 있다.

축사론자들은 사울의 경우를 ‘성도도 귀신들림이 가능하다’는 샘플로 사용한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귀신이 사울의 불순종을 통하여 사울 안에 ‘거주 지역’을 확보하여 사울로 죄를 짖게 만든 것이 아니다. 

사울을 괴롭히는 영은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었다. 

다윗이 사울을 치료하는 방법도 축사가 아니라 노래(찬양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시편의 어느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었다.

 

c) 삼상 28:3-25 엔돌의 마술사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는 일을 신접한 여인이 했다. 그럼 정말 사무엘 인가? 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대부분 사탄의 장난으로 본다. 그러나 사탄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다. 사탄의 활동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또한 마술을 받아 드린 사울왕도 자기 마음을 귀신이 지배하도록 길을 열어 놓아 귀신의 지배 속에 행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대상10:13-4) 당한다.

하나님은 마술사 발람을 사용하시고, 엔돌의 신접자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d) 왕상 22:6-28 아합을 죽이도록 꾄 영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여호사밧과 아합이 아람과 싸움을 할 때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기로 정하셨다. 이에 영들을 통하여 선지자들을 속게하였고 거짓을 믿게 버려 두신다.

이 본문에서 보여지는 점은 선지자들을 속이고 아합을 죽게 하는데 거짓의 영(사탄)을 사용하시고 있으며 또 그 사탄의 활동내용과 시기와 방법에 대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실행에 옮긴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징계와 심판의 때에 사탄을 사용하신다.

 

 

e) 욥기 1:6- 2:10

욥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행동하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악이 사용된다. 

영적 전쟁 안에서 드라마는 하나님의 드라마이지 귀신의 드라마가 아니다. 성경은 죄를 귀신들림으로 주장하여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는다. 욥은 자기 의, 교만과 실망, 분노, 연민, 조롱하는 말 등과 같은 귀신들의 집단에 의해 침입 당하지도 않았고 그 귀신을 축출하도록 권면을 받지도, 행하지도 않았다.

욥은 고난의 이차적 원인인 침략자, 도둑, 질병, 아내의 악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욥은 하나님과 씨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사탄은 유혹과 번민, 속임, 거짓말, 낙담, 실망 등과 같은 갖가지 방법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있다는 견해와 마귀가 우리의 삶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견해 사이에 그 어떤 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김빠진 형식적 기독교와 비성경적 영적 전쟁가들 사이에서 갈등을 가질 필요가 없다.

 

f) 스가랴 3 - 대제사장 여호수아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 쪽에서 여호수아를 비난하려고 서 있는 모습을 본다. 여호수아는 실제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이 비난을 받을 만한 죄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죄를 사해 주시는 약속으로 사탄의 입을 막았다. 사탄은 악한 행동이 제한되어있고 인간에게는 죄가 가장 큰 문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와 형벌이 속하여 진다는 전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2. 구약적 가르침의 결론

 

구약전체의 영적 전쟁에 대한 결론은

첫째, 철저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둘째, 인간은 항상 책임 있는 죄문제의 행위자이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건의 책임자이다. 결코 인간의 악과 멍에와 어둠에 대하여 사탄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셋째, 구약은 사탄과 귀신들의 활동을 인식하지만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계시며 귀신은 제한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넷째, 하나님의 주권은 전쟁의 방법, 사역의 방법,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며 악으로부터 돌이키게 한다. 또 하나님의 주권은 여호와 안에서 안식처를 얻게 했고, 그의 음성에 순종하게 했다.

현대의 축사론적 영적 전쟁은 성경의 시각보다 이교의 마술적 세계관에 가깝다

 

E. 신약의 가르침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신약의 복음서에는 축사 사역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축사론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도 귀신을 쫓았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또 ‘성경 그 어디에도 금지하지 않으므로 계속 행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1. 귀신들림은 열병, 불구 됨, 소경 등과 같이 인간이 당하는 질고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며 모든 질고의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2. 요 9: ‘...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 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가끔은 구약에서(사울왕) 귀신들림이 특별한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일반적인 저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자에게 다가가신 것은 특별한 죄의 결과로 보아 회개할 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모든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를 나타낸 것이지 귀신들린 자가 고통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이것은 귀신들린 자가 다른 병자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신들림이 귀신이 들려있는 사람의 도덕적 악과 연계되는 것이 아니다.

 

3. 성경의 열병, 발작, 마비 등은 더러운 영들이 불신과 죄에 굴복하게 하는 멍에를 지워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4. 예외적 경우도 있다. 거라사 광인(막 5장), 빌립보의 노예 소녀(행16장)

그러나 거라사 광인이 이상행동, 불안, 사회 부적응, 실성과 비참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이 그의 죄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 않다. 노예 소녀도 성가시게 좇아 다니며 진리를 말하는 그 소녀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하고 있지 않다.

 

신약의 결론 

사탄이 인간의 삶에서 주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려고 시도할 때 예수님은 언제나 축사 형태의 영적 대결을 시도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며 숨겨진 죄를 드러내셨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은 것은 선과 악 사이에서 일어나 거대한 전투가 아니라 인간의 비참함을 경감시키려는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다. 축사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죄와 고통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심각한 실책을 범하고 있다. 

현대의 능력 대결, 영적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본은 사실상 성경적 세계관이라기 보다 마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이다. 상황적 악에 대해 행하신 모범을 모든 도덕적 행위의 죄악과 싸우는데 적용함으로서 모든 죄와 악을 귀신들림으로 가르침으로서 성경과 상반된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F. 최근의 가르침

 

복음주의 계열의 제 3의 물결 운동의 사람들과는 달리 복음주의 계열의 사람들은 이를 혼합하려고 애를 쓴다. 

 

닐 앤더슨(Neil Anderson)은 진리 대결이 능력대결에 대치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귀신과 담화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핵심적 복음의 교리를 믿도록 초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우리의 정체감을 갖도록 권한다. 

그러나 앤더슨은 근본적인 문제를 죄로 인해 거주하는 귀신에 의한 것으로 개념화한다. 그래서 앤더슨의 실제로 행하는 사역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의 귀신들을 전통적인 영적 전쟁 방법으로 쫓아내도록 가르친다. 이 발상은 위에서 언급한 귀신론적 세계관과 전통적 방법을 혼합한 절충안에 해당돤다. 죄의 원인은 내주하는 귀신의 탓으로 보고 해결은 전통적인 방법에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한 신학적 혼합주의는 결국 괴상한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 교회성장학을 무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현대교회 갱신 세미나의 교안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탄과의 관계 아래서 사탄을 대적하고 추방함으로서 자유를 얻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요약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목; ' Setting Your Church Free' 

1) 매일 기도(Daily Prayer)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기도-

하나님은 나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만유의 주이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지 하시고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 중략 )

이제 나는 너 사탄을 거부하며 (stand against) 모든 악령들은 나에게서 떠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라!! 

나는 이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습니다. 나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만이 선하고, 받을만 하고, 완전하심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취침기도( Bedtime Prayer)

하나님. 저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 주시고, 주와 함께 하늘의 모든 신령한 축복을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중략)

하나님, 내가 잠자는 동안 사탄이나 그의 부하들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나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안전지대요, 내가 편히 쉴 곳임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호텔/아파트를 기도로 청소하자 (호텔을 사용하게될 때)

호텔/아파트에서 모든 부정한 것을 다 제거한 후 다음 기도를 드리자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당신이 하늘과 땅의 주되심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기라고 모든 쓸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이 곳에서 우리 가족이 살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집에서 우리 모든 가족이 함께 영적으로 안전한 집이 되고 또 원수의 모든 공격에서 보호하여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이미 하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명령하노니 이 집에서 전에 살던 자들이 혹 집 구조물이나 가구를 가지고 악령을 섬긴 근거가 있다면, 그 모든 악령들은 이 곳을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이 집을 이용하여 행하였던 모든 저주와 주문을 우리는 부인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집에 우리를 보호할 천사를 배치하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리는 원수의 침입의 시도에서 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보호하심을 감사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불신자가 살던 집에 이사간 경우

당신이 살게 될 방/집에서 모든 부정한 우상 조각물을 다 제거 한 후 다음과 같이 크게 기도하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일상 거처할 이 방/집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를 위하여 이 거실을 선별하셔서 영적으로 안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전에 살던 사람이 이 방에서 혹 우상 신이나 악령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실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부인합니다. 또한 전에 살던 자나 나 자신이 이 방에서 사탄의 활동을 허락한 일이 있다면 이제 나는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 권세로서 명령하나니, 모든 악령들은 이 방/집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방/장소에서 사는 동안 나를 보호하는 천사들을 지정하여 배치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닐 앤더슨의 여러 영적 전쟁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첫째, 악령들이 모든 공간적 영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을 위한 활동 영역을 확보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되고 있다.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안식은 혹시라도 사탄이 거주하지 않나 하는 두려움으로 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인정하는 것이 인격적 사랑이 아니라 원수를 피하는 방편이 되며, 인격적 사랑의 관계가 어렵게 된다. 

셋째, 마술적 주문을 인정하고 있고, 죽어 있거나 살아있는 모든 것에 힘이 있다고 믿는 물활론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는 천사에 대한 많은 인정으로 천사 숭배(수호신)로 갈 수 있다. 

현대 영적 대결 교리를 만든 이들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이미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영적 혼란 상태와 기독교가 범신론으로나 샤마니즘화 되는 길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나온 경험적 신비주의가 합리성도 잃어버리고 성경의 신비도 잃어버려 결국 자유주의로 가는 길목을 마련해 준 것처럼 현대의 생기 잃은 기독교를 구원(?)하기 위해 찾아낸 제3의 물결운동, 영적 전쟁, 능력대결 등의 교리가 교회성장이라는 허상의 기치아래 온 세계 교회를 옛뱀의 독아(毒牙)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네 교회가 ‘사탄의 회, 사탄의 위..’가 너희 중에 있다고 하는 주님의 경고를 들었던 것을 회상하며 ‘빨리 교회가 성장한다’ 는 사탄의 속임수에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4:7) 하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하던 사탄은 오늘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20)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하면 부흥한다. 이렇게 하면 속히 성장한다, 이렇게 하라’ 외치는 성장 귀신의 음성을 분별하여야 한다. 

 

V. Power Encounter 신학이 개혁주의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일관되게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신학의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신학이 윔버가 지적하듯이 매우 폐쇄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A.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

 

Power Encounter 적 개념이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던(히버트) 선교방법에서 선교지의 상황과 문화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엘렝틱스를 하는 전황를 촉진 시켰다. 비서구 세계를 무지하다는 시각으로 이해하다가 비 서구 지역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할수 있게 되었다. 이로말미암아 빠른 복음전파와 선교의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 제람 바즈는(성인경 1994 : 219-224)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복음 전파의 가속화로 급속도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둘째, 20세기 전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주의가 쇠퇴하고 복음주의가 부흥한다. 

복음의 활기찬 전파와 복음에 대한 유럽과 북미에서 새로운 기류가 일어나게 하는데 기여했다.

 

B.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론의 재고 기류

 

첫째, 개혁신학은 ‘성령의 생동적 사역을 향하여 열려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 속에서 누리는 생동적 체험이 결여된 것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김영한 1994 : 80 )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오늘날 이러한 은사가 없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라고 한다.(김영한 재인용: 칼빈 1960 : 445 ) 어거스틴도 이에 동의한다.(어거스틴: 1950 :.820)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책 서문에서 ‘우리가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들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얼마나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가’ 질문하면서 성령에 대해 빈약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Abraham Kuyper. 성령의 사역 ) 

몬타니즘이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촉진(스나이더 1994:25)시킨 것처럼 개혁주의 교회는 성령론에 대한 바른 정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개혁주의 신학은 생동적인 성령사역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전인적 성장을 꽤하는데 힘을 써야한다. 그래서 경험주의 신학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고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있게 전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는 왜 말씀의 가시적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것은 폐쇄적 사고의 결과라고 믿어진다. 능력신학이 표적과 기사, 능력대결을 신학화( Theologizing) 하여 오류에 빠진 것처럼 능력과 초자연적 역사가 없어야 한다고 제한한 신학 역시 오류이다. 

바른 복음이 전해지고 말씀 선포되면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적 사건이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의 구원(병의 치유), 죄를 이김, 삶의 구원( 악습으로부터의 해방, 술, 담배, 노름.......) 이 일어 날수 있으며 사탄에게 억압당한 영혼이 해방되고 새 삶을 찾는 일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 (이 부분은 사례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다.) 

셋째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 사역의 다양성을 재 발견해야 한다. 즉 개인적 차원에서 병을 치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오류를 버리고 가정과 사회 역사 우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역사 하시는 성령의 보편적 사역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성령은 인생의 내적 사건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우주, 지구 환경에 까지도 능력으로 역사해 가시는 분임을 인식하여 성령을 개인적, 소극적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발전 시켜야 한다.

넷째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은사론으로 치우쳐 성화와 인격적 열매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는 오순절 신학의 약점을 보완하고 성령론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안다.

 

역사를 통해서 성령운동의 반발로 교회가 더욱 제도화, 성직자 중심주의, 은사의 제도화로 더욱 화석화 된 경우가 많음을 (스나이더 1994:27) 인식하고 오류의 재연을 막아야 한다.

패커는 은사운동을 정의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려는 전략” (1986 : 236) 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전략을 가지고 역사 하시는 의도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은사 운동의 긍정적 국면들을 그리스도 중심, 성령의 권능을 입는 삶, 정서적인 상태를 표현함, 많이 기도함, 기쁨이 충만,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동원됨,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마다 다 할 일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 선교의 열정, 소그룹사역의 활성화, 교회 조직에 대한 자세, 공동생활, 관대한 자선 등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뢰할 만한 부분에서 많은 분량이 있다.(1986 :242-249) 고 지적한다.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 연구한 최갑종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빈야드 운동이 비성경적임을 인식하면서도 이 운동을 통한 긍정적 결과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최갑종 1996: )

1. 복음적인 선교 운동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당시 교회가 사회운 등을 하는 것을 선교로 생각하는데 대한 반동으로 사회 운동이 아니라 인간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2. 성령운동을 표방한 점

3. 현대 문화를 복음에 수용한 점

4. 초자연적 세계관에 대한 재 인식 (회복운동)

5. 평신도 목회 개념의 적극 도입 운동

이런 장점을 가졌기 때문에 윔버의 빈야드 운동은 성장하게 되었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장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찾도록 고무시켰다.

폴리슨은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1996:43-45)

1. 현대 세속 시대의 영적 황무지(무신론적 경향)에 유신론의 근거를 마련했다.

2. 보수적(안일한)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영적 장소임을 각성케 했다.

3. 인간의 개인적 문제가 내적 원인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원인이 있음을 새롭게 인식을시켜 영적 무지를 고발했다.

4.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영적 문제에 깊이 헌신하도록 했다.

5.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 주었고 유약한 기도를 책망했다.

6. 전통적인 영적 전쟁 방법을 다시 찾고 확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로 은사운동, 특히 현대의 능력 신학( Power Theology)은 많은 긍정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VI. 개혁주의적 초자연적 능력의 가능성

 

그러면 모든 초자연적 현상들이 다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개혁주의자들도 많은 경우에 초자연적 능력을 보아 왔고, 또 인정해 왔다. 다만 현상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과 그 결론을 다르게 말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는 성령의 외적 은사로서의 표적과 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예외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 속에서 기도의 응답을 통한 특별한 경우의 기적은 예외적인 것이다. 

 

A.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표적과 기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찰스 핫지(Charles Hodge),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안토니 휘케마(A. A. Hoekema) , 리챠드 개핀(R. Gaffin), 월부드(J. F. Walvoord) 등을 꼽고 있다. (김성태. 1995:164-165) 이 견해는 표적과 기사를 정경 형성과정에서 있었던 일로서 정경 완성 이후에는 마감이 되었다고 보고 은사를 직분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최근에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교회론적 관점에서 성령의 부어주심(Outpouring) 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이퍼(Kuyper)는 비활동성 (Inactiv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패커(Packer)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수용하려고 한다. 이에 동조하는 학자로는 몽고메리 보이스(J. Montgomery Boice), 데이빗 웰즈(David F. Wells)가 있다.

 

특히 데이빗 웰즈는 “성령의 외적 은사가 평범하게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복음에 적대적인 상황,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받는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자주 일어나는데 그것은 영적인 힘의 충돌(Power Encounter)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실재를 나타내심으로 복음을 입증하시고 그의 고난받는 백성을 위로하시며 능력있게 하시는 의미가 있다”(Wells . 김성태 재인용. 1995:167) 

김성태 교수는 “선교지 상황, 복음이 심하게 왜곡되고 거부되어지는 상황 신자들이 핍박받고 몹시 고난 당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외적 은사로서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음을 적극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5 : 168) 고 정의 한다. 

 

 

B. 필자의 견해

 

필자는 웰즈의 사상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충돌(Encounter)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데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 충돌은 대립적 양상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립하는 대등관계로 전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Visible Appearanc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제창한다. “가시적 현현”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 절대 주권에 대하여. 

계속하여 언급해 왔던 것처럼 하나님이 영적, 인간적, 물질적 세계의 절대 주권자이며 자기의 권세 중 어느 것도 사탄에게 빼앗기거나 불법적으로 점령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싸워서 빼앗아 오거나 대결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

 

 

2. 성경과 성령에 대해여.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에 대한 계시는 성경으로 충분히 완성 되었으며, 성경은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무오한 절대 유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무엇이나, 또는 성경과 더불어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성령도 성경과 더불어 거하지 않고, 성령도 성경안에 거하셔서 성경을 말씀하시고 조명하시고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더 온전한 이해와 사역을 위해 성령의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 이나 그 무엇도 부정한다.

 

 

3. 특수한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복음 전파에 있어서 특수한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셔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즉, 

1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2 복음의 사역자가 긴급한 위기를 당하였을 때

3 기타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가시적 현현이 주로 비복음화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계시하는 방법으로 구약적 방법에 가까운 형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비 복음화 지역에서도 계속적으로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초기에 발생하여 자신을 알리고는 이어서 성경과 인격적 방법으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 처음에는 스스로 표적을 행하셨으나 자기 계시가 끝나고는 표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 아직도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이런 계시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윔버나 유사한 무리들과 같을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4. 대결적 양상에 대한 주권적 해석.

사탄의 능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기적을 행하거나 선교사를 위협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사탄과 ‘영적 힘 겨루기’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탄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여 사탄의 능력 아래 압도를 당하게한 후 그보다 더 큰일을 행하심으로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신’이라는 것을 알리시려는 계산되고 의도된 행동이라고 본다.

때로는 지친 자기 사역자에게 하나님의 동행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적 방법으로 사탄의 능력을 사용하신다.

실례로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의 술사들이 능력을 행하게 하신다.(하나님의 주권적 허락이라고 봄) 그래서 바로왕으로 하여금 의기양양하게 한후 결정적인 재앙을 통해 여지 없이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다.

엘리야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의 선지자들이 아합과 이세벨의 손에 죽도록 허락하셔서 한껏 대적들의 마음을 고양시키셨다. 그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고 희희낙낙했다. 이때 하나님은 바알과 아세라의 힘에 밀려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고양시켜 놓고 끝내 결정적인 징계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전체를 전멸시키신 것이다.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지쳐버렀을 때 하나님은 이세벨을 통하여 도전을 받게 하셨다. 그는 더 이상 전의를 잃고 도망하며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물과 떡을 먹이고 쉬게하신다. 

 

C. “가시적 현현” (Visible Appearance)의 비 비상성(非 非常性)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Visible Appearance)은 비상한 능력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나타나며 끊임없이 계속 하나님의 현현의 역사가 계속 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다만 차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 (실존주의적, 경험주의적 이해)가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하고 치우치게 하였음을 정리하고 밝힌다. 

‘성령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수많은 방법으로 이둠에 빛을, 멍에에 자유를, 혼돈이 있는 곳에 건전함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성경이 실천 신학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실천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산 증인’ (폴리슨 1996:18)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다음에서 말하는 전인적 접근법으로 인격이 고쳐지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일어날수 있다.

 

D. 전인적 접근법

 

1. 기독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이 이 세상에 얼마나 절대적이며 사탄의 세력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승리를 이미 확보했으며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면 불신앙 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복음과 말씀 안에 있는)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확신하고 담대히 복음을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상황에로 담대히 나아갈 때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의 현현이 필요할 때는 능

력을 

둘째, 고난의 잔이 필요할 때 그의 능력으로 고난 당함을 허락하신다.

기독론적 의미의 승리는 늘 능력대결 양상의 일방적 승리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론적 의미의 참된 승리는 마귀를 추방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성경대로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하시다가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내려와서 호령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대로 묵묵히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는 순종하시는 모습이 기독론적 승리 한 국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도, 고난도, 죽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하였다면 그것은 승리이다. 

때로는 고난 당함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면 고난 받는 것도 승리의 한 국면임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 승리와 영광의 행진곡이다.

이런 관점에서 리차드 개핀 (Rechard Gaffine)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을 강조한다. (1989 : 8-10)

 

2. 상담학적 접근

기독교 상담이 획일적인 경향이 있어 왔으나 최근 많은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체적 접근법(Wholistic Approach)이다. 한 사건을 영적인 것으로만 본다든지 정신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의 경우 정신과적 정신질환자를 모두 귀신들린 것으로 이해하여 기도원에서 구타 사망케 한 일이든지 육체에 병든 사람을 마귀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하여 귀신을 축출하면 병이 낳는다고 가르치고 귀신을 추방하기 위해 애쓰는 귀신론의 경우(귀신론, 김기동) 등 사건을 단편적 국면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벗어야 한다. 

어떤 정신병, 귀신들림, 육체의 질병, 마음의 병, 사업의 곤경, 성적타락, 음주, 약물중독, 등등의 모든 인생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떤 것도 영적인 원인만 있거나, 어떤 것은 사회적 원인만 있는 것은 없고 모두 영적 원인, 사회적 원인, 육체적 원인(의학적), 정신적 원인, 심리적 원인, 유전 환경적 원인, 등등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함께 치료하고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정신과의사로서 융합적 상담법을 제시한 뜨루니에는 다음과 같은 도표로 설명한다.

그림 인간에 대한 융합적 접근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열 문둥병 자들을 능력의 나타남을 본인들이 직접 체험했지만 그들 중 아홉은 복음에서 떠났다. 또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이 나갔으나 다시 일곱 귀신을 몰고 들어와 처음보다 그 나중 형편이 더욱 심하게 된 경우를 예수님이 말씀 하셨다. 

결국 인격적이고 전인적 치유가 있지 않으면 국지적 능력 체험은 무력화되고 말며 이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범신론적이로 이해 하거나 다원주의적 경향을 가질게 할 수 있다.

 

E. 전인적 접근을 통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실례

 

 

본 인의 경험과 목회적 실제를 통해 실제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복음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을 소개하고 정의하려고 한다.

 

1, CASE 1 

 

Name: Kim O O Sex: Male Age: 43 Job: Public Official

Disease : Demon Possession (Melancholy) Non-Christian

Approach: 

1994 9 한 교인(환자의 누나) 으로 부터 예배 인도를 부탁 받음

동생이 귀신들렸으며 정신병원에서 입원하였으나 차도가 없어서 방문하여 처리한 일

1. 복음을 전함 ( 비록 빈약한 정신 상태와 집중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그도 영적인 존재이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내주가 가능한 것처럼 그도 마귀를 영접해야 되는 자이다.

 

2. 그가 그의 인격이 손상되었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의 영적 죽음의 상태를(엡2:1-3) 고치실 수 있으며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전도자가 가짐 

이는 매우 중요한 관점으로서 전도자가 먼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탄은 전도자를 두려워한다. 예수님도 거라사 광인에게 가셨을 때 그는 심히 두려워하였다.

3. 약 2시간동안 치료와 하나님의 용서( 그에게 죄의식이 문제가 됨을 발견) 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되는 일임을 반복해서 설명할 때 그에게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4. 상담 초기에는 매우 격한 요동과 혼란이 있었지만 전도자가 조용히 마음으로(환자에게 사탄에 대한 두려움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탄을 대적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계속 미칠 수 없음(주께서 이곳에 계심으로)을 선언하고 계속 말씀의 능력을 믿고 전하였을 때 그가 변화되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하고 즉시 모든 두려움과 우울증....이 떠나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2, CASE 2 

 

Name: Kwon O Sex: Femine. Age: 18 Job: Student

Disease : Demon Possession ( Epilepsy)

Disease History : 10 Years Christian

Approach: 

19**년 7월 환자의 아버지로부터 자기 딸의 귀신 들렸음과 그래서 입원 치료, 약물치료를 10년째 받고 있으나 점점 더욱 심하여 저서 이제는 포기하고 시골에 휴양 차 보내기로 하였다고 결정상황을 고하려 교회를 방문

1.먼저 아버지와 상담: 

목사: 왜 귀신들렸다고 하는지?

아버지: 병원에서는 모두 정상이라고 하며... 그래서 기도원, 기도하는 분...을 찾아가니 한결 같이 귀신들린 것이라고.... 그리고 자기들이 보아도 귀신들린 것처럼 보인다.

목사: 아이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아버지: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 지금도 교회에 열심이...

........... 이하 생략 .................

 

2. 치료 :

1단계: 가족치료 (환경치료)

1) 먼저 아버지의 신앙관, 구원관 귀신관을 질문 형태로 접근하여 성경적 관점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해 성경을 통해 인식시킴.

2) 딸의 나이 (고2)에 따른 학교생활과 교우관계, 여자로서 성숙함에 따른 이성적 갈등 문제 육체적 결함으로 인한(비만) 정신적 갈등 등을 병(발작)을 통해 도피하려는 의지임을 부모와 상담을 통해 인식시킴 ( 사탄으로부터 자유를 누림)

2단계: 본인과의 치료

1) 본인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존감(Self-Esteem)을 성경말씀을 통해 확인시킴

사탄을 예수님이 이기셨음을 확인하고 마귀의 두렵게 함 인정하지 않음

2) 실제적 치유

* 그는 밤마다 영적 억압을 받고 있었고 또한 발작할 것을 두려워하여 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고 잠자기를 요청했다. 

“ 예수님 저를 사랑하여주셔서 구원하시고 내 마음속에 성령으로 내주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울 사도도 간질병이 있었다는데 저도 오늘밤 예수님과 함께 발작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발작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니 저는 마귀도, 발작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발작을 주시려면 주님과 함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 ” 

성도가 사탄을 과도히 인정하면 사탄의 속임은 더욱 외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실제로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발작에 대한, 마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후 다시 발작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3) 3단계: 외적 치료 (사회적, 심리적)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리스도안에서 승화시키도록 조치하고 외적 기준이 미의 본질이 아님을 인식하고 자유케 함, 또한 실제적 다이어트 방법도 제시하여 효과를 거둠.

교우관계에 대한 자신감을 고양하고 이성에 대한 고민은 정상적이며 주님과 함께 고민을 기도가운데 해결하도록 함

기타 접근은 1 번의 예와 같음.

결과 : 지금까지 병이 깨끗이 나았고 매우 정상적인 교회 활동과 좋은 인간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음. 

그후 1년 이상 경과를 살피던 중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격적 억압이 있을 때 재발한 경우가 있었으나 정도가 매우 경미하였고 오히려 본인이 억제해 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병원을 의존하거나, 요양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 않고 목사와 인격적 관계를 발전 시켜가면서 상담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정신적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이 경우에서는 성령 안에서 인격적 성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볼수 있다.

 

3. Case 연구의 결론

본인의 실제 말씀에 의한 전인 치유의 관점에서의 접근은 오순절주의적인 능력 신학화가 개혁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오히려 개혁주의의 본래적 관점인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성령 안에서 나타나는지를 보이려 했다. 

말씀의 능력을 제외하고 성령의 또 다른 능력을 찾아 나선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더 이상 존재할 자리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계속해서 나타나지고 있다. 다만 오순절신학에 있어서는 말씀과 성령님보다는 중간 매개자인 전도자가 대단해 보이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나는 죽고 주만 영화롭게 하는 바울의 십자가의 신학에 정면적으로 배치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VII. 결론

 

능력대결 개념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뿌리를 살펴보았는데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제도화되기 시작한 2세기의 몬타누스에 성령론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의 몬타누스파가 경건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은사와 황홀경에 빠져들다가 결국은 성경을 넘어 자신을 성령과 동일시 하는 등 타락하여 정죄에 빠졌다. 

그러나 이단으로 규명되면서 역사에서 지하로 숨어들어가 내면화 되면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게 된다. 근대의 합리주의가 발생하면서 성경과 기독교는 또 한번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일어난 내재신학운동이 경건주의 초월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령을 외적 활동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이어서 오순절주의자들이 대를 이어받아 무기력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오순절시대를 예고하고 나왔다 그러나 오순절주의는 성결의 극적 체험을 강조하고 은사에 대한 집착으로 곧 비평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기적과 이사를 강조하면서 나온 제 3의 물결운동가들에 의해 현대 능력대결 신학이 자리를 잡게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문화인류학적 발전이 선교와 교회성장에 사상적으로 동기를 부여하였는데 새로운 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소개되면서 흔들리던 서구 사상에 전기를 마련한다. 모르고 살던 초자연적 실제에 대한 관심이 사회학에서 신학에 이르기까지 발전되면서 사회학적 설명들이 신학의 옷을 입고 진리로 둔갑을 하는 시대였다.

이런 혼돈은 곧 교회를 양극단으로 몰고 갔고 한편으로는 온세계가 오순절의 부흥운동이 세계로 번져나갔다.

능력대결의 신학적 문제점으로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영적 무기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제 2의 축복, 또는 성령세례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동시대의 존 스토트의 신앙개념으로 이해해 보았다.

변화되지 않는 인격의 문제는 성령의 새로운 능력을 받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충만히 못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을 받으면 사역자가 되고 용맹하여지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현상을 통해 만들어지 유추에 지나지 않는다. 오해된 전제는 오해된 결론을 낳는 것이다. 

자라지 않는 이유는 생명의 씨앗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게 되어 있고 또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씨앗의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영양분과 물을 자꾸 공급하면 거기에는 부패가 따르게 된다. 왜 성령운동이 일어나면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분쟁과 파벌이 생기게 되는가? 그 이유는 생명있는 씨앗을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순절적의 사상을 이어받은 윔버나 피터 와그너의 영적 대결이나, 힘의 개념이 매우 경험주의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며 비성경적임을 증명하였고, 성장학파의 출발 자체부터 인위적이며 자유주의적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장학파의 창시자인 맥가브란은 자신이 실용주의자임을 전제로 밝히고 있듯이 복음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발전시켰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미국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능력대결의 근거로 제시된 성경을 면밀히 살핀 결과 능력대결, 지역신 개념, 영적 지도 개념, 토론토 축복 등이 매우 이교도적임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개혁주의적 관점의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힘의 신학이 개혁주의 진영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간과하지 않았고긍정적 측면을 부각하고 인정하였다. 그 장점으로 미전도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어 복음전파의 가속화되었고 자유주의적 기류를 몰아내고 복음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내부에 잊어버린 성령의 활발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생동감있는 신앙생활을 위한 동기를 부여했다. 마치 개혁주의는 성령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던 오해에서 실제 칼빈이나 여러학자들이 성령에 대한 적극적 믿음이 있었음을 알아보았다. 

초기 예언자(몬타니즘)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난 것처럼 올바른 성령론을 찾는데 개혁주의 교회는 노력해야 함을 소개하였다.

혼합된 세계관을 기독교가 받아들임으로 교회안에 귀신론, 축사론, 빈야드식의 이상한 성장운동 등이 성화를 향한 정도(正道)를 포기하고 마술적, 기계적 성화, 감정적 부흥, 즉흥적 결론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한편의 사탄의 존재나 신비를 아예 무시하고 이성적, 심리적 방법으로 치우치는 것도 비판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영적 전쟁의 원리들을 찾아보았다.

성경적 원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의 모든 사건을 하탄과 결부시키는 것을 부인하며, 사탄의 활동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인간과 하나님과 사탄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 하에서 사탄의 역할을 규정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사탄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 아직도 온전한 성경적 답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앤더슨의 사례를 통해 확인하면서 얼마나 심각하게 사탄이 역사를 장악하려고 하는지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영적전쟁에 대한 견해가 어디서부터 오해 되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의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견해를 살펴 보면서 개혁주의 관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인식을 예로 들면서 “능력 대결” 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과 사탄을 대등한 것처럼 여겨지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Visible Appearanc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라 영적전쟁을 재해석해야 함을 주장하고,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면서 진리의 상대화를 막고 그러면서도 무시하기 쉬운 특수지역이나 특수상황에서 실재하는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원리를 제시하였다.

마치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듯한 상황도 일어 나고 있으나 실상은 대결이나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등한 전략적 행위로서 ‘가시적 현현’을 행사하심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에는 기독론적 접근법으로 삶에서 주어지는 고난의 상황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상황을 믿음으로 이기는 것과, 전인적 상담과 문제해결을 위한 섬김으로 근원적 문제해결과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한 실례로 제시된 전인적 접근을 통한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Visible Appearance)은 실제로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 나고 있는 , 또는 일어나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과 삶을 고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하시는 역동적 결과가 없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더 이상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오해 되지 말아야하는 것은 역동성을 오해하면 ‘그리이스 로마 신화’와 같이 사탄과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영적 전투의 진정한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속에 역동적으로 역사하실수 있도록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싸움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탄은 속임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헌신하여 자신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되어 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 말씀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제시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새로이 성령의 능력을 만들어 내든지 또는 전도자 자신의 이름을 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보다 성령이 더욱 중요하여 질 수 없으며, 더욱 사람이(전도자) 위대한 능력자로 나타나면 우선은 복음 전파에 힘 있는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복음의 몰락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17-18세기의 부흥운동이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한 것을 기억하면 개혁주의적 재고는 철저한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믿는다.

목회학적, 상담학적, 선교학적 연구를 보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말씀의 사역에서 찾고자 해야 한다.

현재의 능력신학이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을 근거로 일시적이고 시위적인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면 기독론적이며 말씀 중심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차원에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삶을 변화시키는 본질적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도록 교회는 힘써야한다.

선교 제 2세기를 맞이 하면서 비 개혁주의적 혼돈 신학이 세계로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보다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정리된 Power Encounter를 세계교회를 향해 제공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개혁신학은 여러 신학적 명제들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제안하고 이끌어 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면 그것을 변증하는 비개혁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칼빈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하고 연구하여 영적 우선권을 확보하고 이끌어 가는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칼빈이 20대에 완성한 ‘기독교 강요’를 자랑하지만 말고 현대적 명제에 대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또 하나의 ‘기독교 강요’가 나올수 있도록..

너희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멘- ( 야고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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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studying

[ The Reformed Reconsideration and Altern-

ative Proposal about Power Encounter]

The most important problem of modern mission is the spiritual Warfare 

Peter Wagner said "Power Encounter is to show the fact that Jesus's ability is far superior to the false god or spiritual being that some groups of people worship and are afraid of.(1990:257)

Mission is the effort to regain the world(people) which was far away from God by sin and the Bible expresses that the mission is to have the world come back from power of satan to that of God. In such position, it can be said that the mission is the battlefield where the tension and confronting between God and satan occur.

After the Illuminationism, western theology was influenced by the world-view based on Scientism, Empiricism and Rationalism, denying supernatural phenomena and passed over the satan's actuality and activity.

After that, as the activity experience or mission place was increasing with cultural anthropology, western missiology began to accept recognition about Oriental world-view (spiritual world -view). 

But the problem is that the most new recognition is not based on biblical understanding and the western mission commit a fault which imitates the oriental thought as it is. It was recognized that the western world-view ignoring supernatural world didn't have an interpretable ability about supernatural problem with it's own measure of the scientific and empiric value, and then it last the ability of critical contextualization.

Western world accepted the oriental value uncritically, theologized and became to make Power theology.

It made a theory, Power Encounter of modern concept and formulated with seeing the mission spot as the battlefield which God's power fights against satan's power in John Wimber's Power Evangelism. Obviously God himself superintends the state where God's power is. If it is knowledged as the state where God takes a stand against satan, we will be in the logical conflict that have God be in the equal level with satan and also understand Him as local-god who superintends only a certain part. This problem in mission is to misunderstand the God sovereign(J.I Paker:1980:5), and even it is an unrefomable and mixed thought.

In coming two centuries mission, Korean churches began to emphasize the Holy spirit theology as the suitable solution for the slow church growth and the enervation of church, and accepted or emphasized the term 'power'

But the problem which the appreciation of critical state brings began to appear. In the present age we are in the spiritual confused time which only the growth of church is very important without thinking how or what theology is. Because of that church offers the opportunity which many heresies can disgrace the beauty of Good News (Gospel) to them. Missionaries as well as in the mission spot give up reformable course and set up thought with pentecost theology or spread heretical thought.

In this thesis, I want to arrange th reformable position of theory and power of Holy Spirit and the concept about Power Encounter. So I want to suggest the more biblical alternative proposal for understanding Power Encounter in reformable position, because the reformable view should not be misunderstood as the enervated thing.

Thought this, we will be convinced the power and authority of God's world in the growth of church and the mission, and also the positive Good News(Gospel) spread which the Scripture power will appear actively and visibly in Holy Spirit.

In this thesis, Visible Appearance concept is suggested as an alternative proposal in the reformable position of power Encounter and demonstrated with evidences and illustrations.

<Studying Question>

1) What is the historical circumstance where Power Encounter appears?

2) What is the theological problem in the Reformed position?

3) Does the Reformed Theology have to ignore Power Encounter?

4) What is the affirmative side of Power Encounter concept?

5) Is the term 'Power Encounter' suitable biblically?

6) Is the unusual, remarkable property of The Visible Appea- rance sui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