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몰트만의 창조론: 신적인 자기비움(Zimzum)을 중심으로

하나님아들 2021. 10. 11. 22:52

몰트만의 창조론: 신적인 자기비움(Zimzum)을 중심으로
Moltmann's Doctrine of Creation: Focusing on the Divine Zimzum


박찬호
Chan Ho PARK

백석대학교(조직신학)
Baekseok University
EMail: chanho@bu.ac.kr


(Accepted on January 31, 2016)


Moltmann contends that the creation is done by God's self-decision to create before creation. Before creation, he argues, God made self-limitation to make a room for creation. Moltmann asserts that the room or space is the nihilo of creatio ex nihilo. In this scheme the concept of creation is not masculine but female. Creation is not out side of God but within God. Eschatologically God dwells in creation. Thus God will be all in all. These contentions of Moltmann lack the biblical basis and undermine the transcendence of God.


I. 서론
II. 하나님의 자기 결정
III. 하나님의 자기 제한
IV. 우주적 쉐키나
V. 비판적 평가
VI. 결론


I. 서론

이 논문은 창조론과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독일의 개혁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의 주장을 다루고 있다. 몰트만은 창조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이 세계의 창조주가 되시기로 자기 결정을 하신 결과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창조의 어떠한 필연성도 거부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세계를 필요로 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2장).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특이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짐줌이라는 카발라의 교리를 채택하여 몰트만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그 자신 안으로 퇴각하셨다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의 결과로서의 이러한 여지가 무로부터 창조의 무(nihil)이다(3장).

우주적 쉐키나는 몰트만의 종말론적인 토론이 갖는 다양한 차원들의 유일한 초점이 된다. “우주적 쉐키나”라는 용어를 통해 몰트만은 최종적인 상태에서의 하나님과 피조물의 상호 내주를 표현하고자 한다(4장). 몰트만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입장이 일종의 만유재신론임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불가피하게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창조적인 균형을 유지하는데 실패하였다(5장).


II. 하나님의 자기 결정

몰트만은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나 신적인 존재 자체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이 세계의 창조를 세계의 창조주가 되고자하는 신적인 결정에 연결시킨다: “만일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본성으로부터의 유출이 아니라면 창조 행위는 창조하겠다는 신적인 의지의 결심에 근거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창조가 존재하기 전에 세계의 창조주가 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은 논점이 없는 질문이 아니다. 몰트만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 전에 하나님은 자신의 왕국에서 영화롭게 되기 위해 창조주가 되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원성과 창조의 시간 사이에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God’s time)이 서 있다. 이 시간은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통해 지정된 시간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생명이 창조적으로 유출되었다는 유출설에 반대한다. 이러한 관념은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현대 신학에서 유출설은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몰트만은 틸리히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신적인 창조성과 신적인 생명 자체를 동일시함으로써 틸리히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구별을 폐기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몰트만은 창조가 자발적이고 변덕스러운 창조자(Demiurge)의 ‘작품’(work)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유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몰트만은 즉시 ‘사랑으로부터’라는 말을 덧붙인다.

몰트만은 소유물에 대한 절대적인 처분권을 의미하는 형식적인 자유 개념에 반대한다. 몰트만은 실질적인 자유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자유라는 진리는 사랑이며 이것은 선의 자기 전달(self-communication of the good)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와 사랑은 동의어”라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 몰트만의 견해는 칼 바르트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을 상보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으로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자유 개념과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개념을 중재해 보려고 노력한다. 개혁파의 전통을 따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 그 자신과 비피동적인 영광과 그 자신의 내적인 생명에 만족한 채로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택하셨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있어 이러한 입장은 부적절하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써 만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면, 이 결단 이전의 그의 본질과 이 결단 이후의 그의 본질 사이에는 하나의 모순이 있다. 그리고 그의 실체과 그의 계시 사이에는 하나의 모순이 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였을텐데’라는 추리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유는 바로 그 자신인 진리와 결코 모순될 수 없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은 동의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의 자기 전달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선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본질적 선하심에 상응하는 것만을 선택하며 그리하여 그의 선하심을 창조로써 전달하고 선하심을 그 속에서 전달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유로운 사랑 속에서 그의 선하심을 나누어 준다. 이것이 그의 창조 사역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사랑으로부터 그의 선하심을 전한다. 이것이 그의 창조의 유지 사역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아적인 사랑(ecstatic love)이다. 이 무아적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에게 상응하는 것을 창조한다.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결심은 하나님 편에서는 “본질적인 결심”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하나님은 그가 하신 결심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의지와 본성의 일치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가 영원히 그러한 바로 그 동일한 사랑으로 세계를 사랑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영원히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세계를 사랑하시거나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필연성과 자유에 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이 선하심이라면 그의 의지의 자유는 선한 것을 원하는 데에 있다. ... 만일 우리가 필연성의 개념을 강제적인 필연성과 타의적인 결정의 차원을 떠나 생각한다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필연성(necessity)과 자유(freedom)는 일치한다. 필연성과 자유는 하나님에게 자명하다. ... 하나님에게 있어 자유 가운데서 사랑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필연성이나 변덕스러움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적 또는 자발적인 결정으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세계를 자유로 창조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없이는 존재하실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계와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고 제안한다.

기독교 유신론에서는 창조가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God's free will)의 작품으로 묘사된다. 즉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작품(work)으로 하나님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할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내적인 이유나 외적인 강제도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은 자기 충족적이다”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적 만유재신론(Christian panentheism)은 ...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시작하였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신의 타자를 갈망한 결과이며 신적인 사랑에 대한 타자의 자유로운 반응을 갈망한 열매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 속에 이미 세계에 대한 관념이 영원 전부터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가 곧 사랑이라면 신적인 사랑 역시 얻을 때 보다 줄 때에 더 행복하다. 무자아성이 사랑의 본질에 속한다면 영원한 자기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은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를 전달하는 사랑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와 필연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보캄은 “몰트만은 선택의 자유와 필연성 사이의 대조가 하나님 안에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자유는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내적인 필연성이다. 즉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몰트만은 자신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것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몰트만은 나중에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필연성이다’라는 견해를 발전시키게 되었다고 보캄은 지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몰트만은 만유재신론자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자기 충족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영원부터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바르트의 견해에 만족하지 않는다. 몰트만은 창조는 일종의 필연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이며 이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필연성이다. 이 점에서 몰트만의 입장은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 즉 존재론적 만유재신론(ontological panentheism)과는 다르다. 몰트만은 창조가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의 결과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몰트만의 자발적 만유재신론과 고전적인 유신론의 대조는 절대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몰트만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세계를 향해 그 자신을 사랑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개방하기 때문이다.”

부머-프레디거(Bouma-Prediger)도 또한 몰트만에게 있어 창조는 사실상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것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부머-프레디거는 “삼위일체 내적인 사랑으로는 불충분하다. 하나님은 창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창조는 신적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라고 쓰고 있다. 심지어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이라는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의 영>에서는 유출설의 전통이 지닌 장점을 통합하려고 한다: “성령론에서 우리는 신플라톤주의적인 것으로 잘못 훼손이 된 유출이라는 개념을 채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유출을 통해 창조된 존재가 ‘신격화될’(deified) 것이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 안에서 영화롭게 된다.”


III. 하나님의 자기 제한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창조” 이전에 무한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을 몰트만은 설정한다. 몰트만은 ‘밖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와 ‘안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를 구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나오시기 전에 그 스스로 결심하시며, 그 자신을 내어 맡기시며, 그 자신을 결정하심으로 그 자신에게 내적으로 행위하신다”라고 몰트만은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에게 ‘안’(within)과 ‘밖’(without)이 있다고 제안한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 자신 ‘바깥에’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해 무한한 하나님은 그 이전에 ‘그 자신 안에’(in himself) 이러한 유한을 위한 여지를 만들어야만 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를 위한 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활동적인 공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 자신 안으로의 퇴각(withdrawal)이다. 전능하시며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퇴각을 통해 무(nihil)가 생겨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거두어 들이시며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신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바깥의 창조’가 동시에 하나님 안에(in God) 존재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재 안에 창조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공간 안에 창조가 존재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몰트만은 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몰트만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인 관계성은 너무나 넓어서 전체 창조가 그 안에서 공간과 시간과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안과 하나님 바깥에서의 행위로서의 창조’는 도리어 탄생 또는 가져옴(a bringing forth)이라고 하는 여성적인 개념으로 불리워져야만 한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자신의 세계가 자신 안에(in himself) 있게 하심으로 창조하신다: 있으라!”

몰트만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라는 아이디어를 짐줌(zimsum)이라는 유대교의 카발라의 교리의 도움을 받아 발전시킨다: “짐줌은 집중과 집약을 의미하며 그 자신이 그 자신으로 퇴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짐줌 교리는 아이작 루리아(Isaac Luria)에 의해 발전되었다. 몰트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유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축소(shrinkage)의 과정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아닌 그 무엇이 이 구체적인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가?... 무한한 존재가 행하는 모든 행위 가운데에 첫 행위는 ‘밖을 향한’ 행위가 아니라 ‘안을 향한 행위,’ 곧 ‘하나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의 자기 제한’이다.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수난(passion Dei)이지 행위(actio)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자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앞서의 첫 번째 행위에서 남겨 놓은 원영역(primal space)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째 행위에서 이다.

짐줌 교리에 따르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이 아니다. “반대로 창조는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자기 운동, 즉 창조에 그 자체의 공간을 허용하는 운동에 의해 먼저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 자신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그 자신 안으로 퇴각하신다”라고 몰트만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아이디어는 창조의 해석에 있어 필연적인 교정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단지 어떠한 것이 존재하도록 부르심에 의해서, 또는 어떠한 것을 세우심으로 창조하지 않으신다.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있게 하심으로, 여지를 만드심으로, 그리고 그 자신을 퇴각하심으로 ‘창조하신다.’ 창조적 만드심은 남성적인 은유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창조적인 있게 하심은 모성적인 범주들을 통해 보다 더 잘 표현된다.” 몰트만은 남성적인 범주들보다 여성적인 범주들을 더 선호한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우주적 쉐키나를 통해 발전시킨다.


IV. 우주적 쉐키나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몰트만은 종말론적인 토론의 다양한 차원들의 유일한 초점으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쉐키나(the cosmic Shekinah of God)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의 고향인 자신의 창조에 ‘거하시고자’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 안에서 자신의 ‘안식’(rest), 즉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쉐키나에서 전체 창조가 새로워지며 영원히 생명을 얻고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 자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창조는 ‘새 예루살렘’을 취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쉐키나의 본향이 되기 위하여 새롭게 창조된다(사65장; 겔37장; 계21장)....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내주는 그의 피조물들의 공간(space)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the presence of God)이다.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탈출한 것,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시간적으로 제한된 거주지를 발견한 것, 그것은 새 창조의 거대한 공간들 곧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이들 속에 충만할 것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의 곧 하나님의 쉐키나를 가져올 것이다.

성령의 신학과 함께 쉐키나의 신학은 사랑의 신학이다. 그것은 가부장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쉐키나와 성령은 ‘신성의 여성적인 원칙’이다. 쉐키나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몰트만은 창조 안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은 쉐키나, 즉 하나님의 내주다. 그리고 쉐키나의 목적은 전체 창조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몰트만은 쉐키나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 안에 창조가 내주하는 것도 표현하고자 한다: “...‘창조의 공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 자신을 퇴각시키고 자신의 창조에 공간을 줌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드신다.... 창조주는(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거할 수 있는 하나님(God who can be inhabited)이 된다. 세계의 살아있는 공간으로서의 하나님은 플라톤이 이미 주장한 것처럼 여성적인 은유다.”

그렇다면 무한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무한을 통하여 지상의 제한된 공간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그 안에 ‘거하실’ 수 있는가? 그 대답으로 몰트만은 다시금 유대교의 쉐키나 교리를 제안한다: “쉐키나라는 아이디어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살기 원하시는 유한하고 지상적인 공간과 연결해 준다. 쉐키나 신학은 성전 신학이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강림 행동이며 그 결과 하나님이 내주하게 되는 것이다.” 상호 내주(perichoresis)라는 부수적인 아이디어가 쉐키나 신학의 정의가 된다. 몰트만은 상호 내주 개념을 상호 침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상호침투라는 개념은 종류에 있어서 다양한 것의 일치와 차이 모두를 유지하게 해준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 그리고 영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몰트만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쉐키나 신학을 따라 “주님은 자신의 세계가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유대교의 주장에 더하여 창조는 또한 하나님을 위한 거주하는 장소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하심의 역사적 과정과 그의 종말론적 완성을 통하여 그의 창조에 대한(towards) 창조자의 거리가 있는 대칭은 그의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적 현존으로 변한다. 창조 위에 있는(above it) 하나님의 외적 현존에게 창조 안에 있는(within it) 하나님의 내적 현존이 첨가하여 온다. 그의 창조에 대한 창조자의 초월에게 그의 창조 안에 있는 그의 내주의 초월이 첨가하여 온다. 이리하여 온 창조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집(house of God), 하나님의 성전(temple)이 되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본향(home country)이 된다.

그 결과 몰트만이 자주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실(고전15:28) 만유재신론적인 비젼이 마침내 성취될 것이다. 몰트만의 말을 들어 보자: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할 때 창조는 하나님 바깥에서 자신의 공간을 상실하며 자신의 자리를 하나님 안에서 얻게 된다. 태초에 창조자가 자기를 그의 창조의 거주 공간으로 만든 것처럼, 종말에는 하나님의 새 창조가 그의 거주 공간이 된다. 이리하여 세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세계 안에 거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범신론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가 하나님 속으로 폐기될 필요가 없으며, 무신론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계 속으로 폐기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속하며, 세계는 그의 창조로 존속한다. 그들 상호 간의 내주함을 통하여 그들은 혼합되지 아니하며 분리되지 않는 상태로 존속한다. 하나님은 신적인 방법으로 그의 창조 안에 거하고, 세계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이러한 상호 내주를 통하여 소위 “우주적인 속성의 교류”(cosmic communication idiomatum)가 일어난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서로의 속성에 상호 참여”라는 스콜라주의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피조물들 안에 내주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 참여하고 이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피조물들은 영원과 현재의 신적 속성에 참여한다. 이리하여 땅 위의 피조물들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허무성의 시간(chronos)이 중지되고, 신적인 삶 속에 있는 영원한 삶이 시작한다. 이리하여 피조물들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의 공간(topos)이 중지되고, 하나님의 편재 안에 있는 영원한 임재(eternal presence)가 시작한다. 하나님의 내주하는 영원은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준다. 하나님의 내주하는 현존은 ‘더 이상 비좁지 않은 넓은 공간’을 언제나 피조물에게 주신다.

몰트만은 새로운 창조는 우주적 성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주적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아무런 매개도 없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내주다. 이러한 내주하는 임재는 하늘과 땅을 새롭게 만들며 새 예루살렘에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그들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쉐키나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중재되지 않은 즉각적인 임재가 모든 것에 침투해 있다. 모든 것 안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상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룩과 영광이다. 이것이 이러한 창조의 목적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내주의 거룩과 영광은 전체로서의 창조와 모든 개별적인 피조물의 종말론적인 목표다. 이것은 종말론에 신학적인 차원과 미학적인 차원을 제공한다.”


V. 비판적 평가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실’ 몰트만의 종말론적 또는 만유재신론적인 비젼은 우주적 쉐키나와 함께 완성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임재가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다가오는 만유재신론적인 상태에서 하나님과 세계는 분리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상호 간에 구분할 수는 있다. 속성의 교환을 통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의 속성에 참여한다. 우리는 영원성과 전능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피조물이 참여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이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하나님 자신에게 심각한 장해가 된다.

폴킹혼은 만유재신론을 전적으로 배격한다. 왜냐하면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을 흐려지게 하는 점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사이의 상호적인 자유로운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킹혼은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라는 몰트만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만유재신론을 변호하기 위해 하트숀(Charles Hartshorne)과 같은 만유재신론자들은 “‘만일 사물들이 단지 하나님 “바깥에” 존재한다면,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 즉 하나님과 세계가 있게 될 것이다.’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과-하나님-아닌-것(God-and what-is-other-than-God)이 하나님 보다 더 큰(보다 더 포괄적인) 총체가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폴킹혼은 “세계는 단지 하나님께서 세계를 위한 여지를 자유로이 만들어 주심 때문에 존재함으로 하나님 더하여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실체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말하고 있지 산술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자기 제한을 통해 몰트만은 폴킹혼의 비판에 견딜 수 있을 것같은 그 자신의 만유재신론을 제시하고 있다.

밖을 향한(ad extra) 창조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마련된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면 하나님 밖에 있는 현실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 자신 안에 ‘바깥을 향하여’(outwards)를 마련한 하나님 안에(in)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창조를 생각하지 않는 일 없이 보다 더 큰 진리에 의하여, 다시 말하여 창조의 역사가 그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으로 창조의 역사가 귀결되는 보다 더 큰 진리, 곧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는 진리에 의하여 포괄되어 지고 파악되어 진다.

이것은 몰트만의 종말론적인 만유재신론의 비젼을 표현해 준다. 이것은 창조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최종적인 형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자기제한은 종말론적인 비젼(즉 “전체 창조가 변화되는 영화롭고 제한이 없어진 무한함”)의 성취를 전제하고 있다.

콜린 건톤(Colin Gunton)은 “케노시스(kenosis)로서의 창조라는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인 개념”에 반대하여 왜 그것이 설득력 없는 논증인지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건톤은 몰트만과 달리 하나님에게 외부적이면서 상호관계성과 편재를 배제하지 않는 창조된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이 지지하는 이론에 대해 건톤이 제시하는 두 번째 비판은 몰트만의 이론에 아무러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가 진정으로 그 자체이려면 왜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을 포함해야 하는지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건톤은 마지막으로 케노시스가 “세계에 대한 어떠한 하나님의 관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되는, 타락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다루도록 지정되어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창조에 대하여 케노시스라는 은유를 작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기독교의 창조 개념은 하나님 바깥에 세계의 창조(creation of the world outside of God)를 주장하고 있다. 비록 몰트만이 “이러한 교리[신적 짐줌]의 기본적인 생각이 우리에게 범신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를 생각할 기회를 준다”라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적 짐줌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는 그를 만유재신론으로 인도하며 건톤에 따르면 이러한 만유재신론은 최종적으로는 범신론과 구별되어질 수 없다.

몰트만의 신적인 짐줌이라는 개념과 함께 다루어야할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체현 또는 그의 공간성의 문제다.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시간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나아가 하나님의 공간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실 비젼이 완성될 때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주가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몸 없이도 공간성 없이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비록 몰트만은 하나님이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용감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의 공간성은 불가피하다. 우리의 고통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주장, 사회적 삼위일체론, 짐줌(zimsum)이라는 유대교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임,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주라는 만유재신론적인 비젼을 몰트만이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공간성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게다가 몰트만은 상호침투적인 공간 개념을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상호침투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몰트만은 장(場, field)으로서의 성령에 대한 판넨베르그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에 능동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판넨베르그는 비유적으로 성령을 현대 물리학의 장 개념에 비유하고 있다. 몰트만은 또한 그레이스 젠첸(Grace Jantzen)과 같이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언급하지도 않는다.

콜린 건톤(Colin Gunton)은 “뉴턴의 망령이 많은 현대의 삼위일체적인 신학에서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며 여전히 살아 있다. 우주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 안에(공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해된다는 제안 가운데서 특히 그러하다”라고 주장한다. 건톤은 몰트만의 사상을 다룬 다음 창조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젠슨은 어거스틴의 시간에 대한 견해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아주 넓음(roominess of God)이라는 아이디어-공간적인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건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세계가 진정으로 세계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가 하나님 안에 포함되는 그러한 관계성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만유재신론은 궁극적으로는 범신론과 구분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유재신론은 세계가 그 자체이기 위한(하나님 이외의) 다른 공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다른 문제는 몰트만의 종말론적 만유재신론의 두 용어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 이 주제에 대해 영국의 몰트만 해석가인 리처드 보캄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는 세계 너머의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세계의 개방성을 표현하는 것인 반면에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계 안에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것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가톨릭 여성 신학자인 엘리자베스 존슨도 또한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계 안에 하나님의 내재를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존슨은 “초월성에 대한 과중한 강조를 하고 있는 고전적인 유신론을 포함하여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인 모든 진술은 하나님께서 세계의 심장부에 긴밀하게 거하신다고 확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내주가 상호적인지, 즉 세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있는지”에 대해서 존슨은 보캄과는 달리 “신학적인 견해의 스펙트럼은 최소한 그러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답하는 두 가지 방식과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적인 유신론과 범신론은 그것을 부정하지만 만유재신론은 그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세계 안에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몰트만은 위대한 종말론적인 질문은 “무엇이 궁극적인 목표인가? 그것은 세계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는 한스 우어 폰 발타자르(Hans Ur von Balthasar)의 신학적 사고의 목표인 반면에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몰트만은 “영원한 삼위일체가 역사의 구속과 세계의 완성 가운데 그 스스로를 영화롭게 한다”는 자신의 견해와 “세계의 종말론이 영원한 삼위일체 안에서 발생한다”는 폰 발타자르의 입장을 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전적으로 중재불가능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두 견해는 거울에 비치는 형상과 같이 서로에게 관계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신적인 방식으로 세계 안에 내주할 때 세계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 안에서 공간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여기에서 사랑 가운데 경험되어 지는 그런 류의 상호적인 상호침투(reciprocal perichoresis)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신다(요일 4:16). 바울에 의하면 이러한 상호 내주의 현존은 여기에서는 사랑이라 불리워지지만 그때에는 영광이라 불리워질 것이다.

자신의 만유재신론을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양자를 함께 강조하고자 한다. 다른 만유재신론자들과 같이 몰트만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뉴턴에게서와 같이 이신론으로 인도하였다.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는 스피노자에게서와 같이 범신론으로 인도하였다.” 이러한 두 극단에 대한 대안으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적인 창조개념과 만유재신론적인 견해를 제안한다: “삼위일체론적인 창조 개념은 일신론과 범신론이 지니고 있는 진리의 요소를 통합해준다. 만유재신론적인 견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몰트만의 주된 관심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성이다: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구별은 포기되어서는 안 되지만, “오늘날 생태학적 창조론은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내재를 인식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하나님을 너무나 초월적이게 하여 내재성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있어서 [초월성과] 동등하게 중요한 속성이 될 수 없게 하는 것은 작업과 기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내재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본성이 될 수 없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신론과 세계의 기계화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모든 개념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라고 쓰고 있다. 결국 몰트만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변증법적인 구조”를 내어버리고 “내재적 초월”과 “초월적 내재”를 주장하게 된다.


VI. 결론

지금까지 신적인 짐줌을 중심으로 한 몰트만의 창조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창조를 하나님의 자기결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함으로 몰트만은 짐짓 정통적인 창조론에 서 있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도 세계를 필요로 하신다는 주장을 통해 만유재신론적인 생각을 받아들인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창조론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몰트만은 자신 만의 혁신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무라고 하는 것을 유대교 신비주의의 일파인 카발라의 신적인 짐줌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님 안에 있는 공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 또는 케노시스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드신다. 그것이 바로 무라는 것이다. 하나님 바깥의 창조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창조론은 남성적인 유비를 사용하지만 이런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여성적인 경험이다. 창조는 하나님 안에 창조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에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이 현존하게 될 것을 쉐키나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 주장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쉐키나를 통해 새창조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실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비전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성은 훼손이 되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경계는 흐려지게 된다.

결국 몰트만의 창조론은 비록 독창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근거를 확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몰트만의 창조론: 신적인 자기비움(Zimzum)을 중심으로 |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