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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은 목회와 신학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아들 2021. 9. 14. 23:00

성경관은 목회와 신학의 뿌리입니다

 

김중은/ 한국교회 안에는 아무래도 장로교가 좀 많기 때문에 먼저 장로교를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싶은데요, 장로교가 가진 특징이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 바로 성경에 대한 태도와 관점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요약하면 성경에 대한 권위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믿음이고, 그래서 다른 어떤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이죠. 이것이 바로 한국 개신교의 신학과 교회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뿌리요 기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성경관은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는 입장에서 본 것인데, 어쨌든 성경관에 따라 성서 해석도 달라지게 되고, 심지어는 이단 시비의 발단이 되기도 하고, 또 한국교회는 성경관으로 인한 교단 분열의 역사도 겪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엔 현대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예를 들어 신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성경관의 혼란이나 심지어는 신앙적인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결국은 성경관의 문제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차제에 이런 대담을 통해 우리 한국교회의 성경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와 목회와 신학계에 조금이나마 도움과 자극을 주었으면 합니다. 

  

김정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이 개신교의 출발점은 성경입니다. 개신교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고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성경관은 개신교의 심장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성경관에 대한 글들이 교회사 초기에는 상당히 많았는데, 현대로 넘어올수록 성경관에 대한 글들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입니다. 반면 주로 성경해석에 대한 글들이 그 자리를 대치합니다.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성경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지금 성경관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시의 적절하고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성경을 날마다 보면서도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큰 관점 곧 성경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 대담은 저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김중은/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어떤 경향을 띠는 성경관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의 이해를 위해 우선 중세 로마 천주교를 생각해 보면 좋은데요, 천주교는 교황의 권위를 모든 권위에 우선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과 구조 아래서는 성경적인 신앙 지도가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경이 모든 권위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전통의 성경관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가능한 거죠. 이렇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성경관은 두 가지 요소를 띱니다. 첫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기록이기에 권위가 있는 겁니다. 즉 성경의 계시성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영감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데 있어 잘못 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부터 특히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1:21 등을 근거로 성경의 영감을 강조하게 된 겁니다. 영감, 즉 데오 프뉴스토스(deo pneustos)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인간 기자가 잘못한다면 그 권위에 치명상을 입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주장하게 되며, 무오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관이 개신교회 칼빈주의 혹은 정통주의를 통해 흘러왔는데, 지난 18세기에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다름 아닌 구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계몽주의인데, 이로써 인본주의 사고가 모든 학문을 지배하게 되고 신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그래서 신학자들도 신앙보다는 이성, 즉 ‘오직 믿음’(sola fide)이 아니라 ‘오직 이성’(sola ratio)의 시각으로 신학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고 제물러라는 학자가 선언하기에 이르렀죠. 이 주장이 자유주의 성서신학의 촉매제 역할을 했어요. 그 뒤를 이어 슐라이에르 마허 등의 여러 학자들은 성서해석학과 일반해석학의 구분을 없애자 했고, 성경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볼게 아니라 똑같은 종교문서로 보고 역사비평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본격화됐죠. 그 이후 소위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용시키는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바로 이게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겐 이 고등비평(higher criticism)과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 정확히 뭐냐에 대한 이해도 참 부족한 것 같아요. 그저 서구신학이 발전되어 학문적으로 성숙한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나 동경심으로 좋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서구 사람들이 바보가 않을 테니까 하면서 그런 서구의 신학 방법론에 대한 기대랄까 외경심이랄까 하는 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서구적 학문 방법론이라야만 학문적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해요. 그렇게 지금까지도 적당히 이해하고 내려오다 보니까 성경관의 혼란까지 초래하는 것 같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게 종교개혁적 전통의 성경관이고, 기록된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자유주의적 성경관의 핵심입니다. 이런 후자의 성경관을 취하면 성경은 그저 보편 윤리를 말하는 것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나가게 되며, 결국 종교학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는 종교학이고 도덕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상대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유주의 성경관이 아닙니까? 

 

또한 소위 신정통주의 성경관이 문제입니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의 잘못된 신관이나 역사 내재주의에 대해 초월적인 신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새로운 정통주의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이런 면에서 박형룡 박사도 인정하듯 기여한 점이 있습니다. 즉 구자유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에 대해 주장한 것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정통주의가 대학에서 살아남기 위해 역사비평 방법론을 받아들인 점입니다. 말하자면 초월과 내재를 어떻게 해서든 섞어 보려고 한 것이죠. 그런데 역사비평이라는 것이 뭡니까? 완전히 성경을 영감된 계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역사적 문서로 보고 해석하려는 태도이거든요. 그럼에도 서로 모순적인 두 입장을 예를 들어 바르트가 성서 연구에 전제를 했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오해가 생기고 혼란이 생긴 겁니다. 이점을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어쨌든 종합하면, 성경관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정통적인 입장이고요,

둘째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고,

셋째는 바르트적 신정통주의로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때문에 아주 큰 혼란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하는 점에 대해 반틸 박사 등이 많이 논쟁했죠.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르트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경은 계시에 대한 증언이다는 것이 중심적인 견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핵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급진주의라고 하는 입장인데,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입장입니다. 하나의 유대교 문서이고 고대 중동의 종교 문서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도 한 노만 가트왈트는 “유물사관으로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을 정리하겠다”고 분명히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했어요. 유물사관이 뭡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잖아요. 야훼는 히브리 민중의 하나의 평등사회의 이데올로기지 무슨 야훼가 있느냐 하는 거죠.

다섯째로 칼 멕킨타이어 등을 위시하여, 극단적인 보수주의 입장으로서 성경의 글자 토씨 하나까지 틀림없다는, 소위 축자영감설입니다. 축자영감설 하니까 오해가 많은데, 좀 해명돼야 해요. 토씨나 획 하나까지도 전부 축자로 영감됐다는 건데, 근본주의라고도 하죠. 근본주의는 복음주의와 구별돼야 해요. 어쨌든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정우/ 역사적으로 잘 정리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성경이 있다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성경 위에서 성경을 다 판단하고, 내 이성과 경험에 맞으면 인정하는, 그러니까 인간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는 그림이죠.

두 번째는 자신을 성경 옆에 두는 그림인데요, 카톨릭의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성경과 함께 교황이 있고, 교회의 해석이 있어요. 성경과 교회의 해석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에는 교회만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자가 되죠. 그래서 때로는 교회의 해석이 위에 올라가야 하는 그림이 되기도 해요. 세 번째 유형으로는 복음주의적 혹은 개혁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해석자가 성경 아래 있는 그림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신앙 고백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성, 경험, 전통도 성경의 권위 아래 두게 되죠.

그 다음이 신정통주의인데, 이 입장은 자유주의와 정통적 견해를 변형한 경우라고 생각해요. 실존주의적 특성을 띠는 입장인데요, 신정통주의도 상당히 실존적이거든요. 또한 신비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실존주의적 입장과 맥을 같이 하죠. 이 입장에 대해서는 성경을 자기 자신 안에 두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안에 성경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내게 계시가 되는 것은 모두 성경이고, 접촉이 되고 내게 부딪쳐 지고 내게 말씀이 되고 내게 사건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님 말씀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개신교는 어쨌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전통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솔라 스크립투라가 우리의 성경관을 형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 아래 있는 그림이 매우 중요해요. 하지만, 동시에 ‘아래’ 있음으로 인한 복종의 관계를 넘어 성경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개념도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함께’라는 말은 성경과 동등한 자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경 본문의 해석과 사건에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차원 혹은 믿음으로 성경과 화합하는 이런 차원의 의미이며, 이렇게 돼야 성경이 성경으로서 우리에게 더 실제적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는 것이죠. 

  

김중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학적 혹은 신앙적 혼란의 뿌리에는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의 이해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데요, 성경관은 우리의 신앙에 뿌리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우선 성경관이 교회와 목회와 신학함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을 좀 깊이 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성경관이 기독교 안에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관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성경관 논쟁이 신학계와 교회에 끼친 영향을 짚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김정우/ 성경관 논쟁은 어찌 보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초대 교회에는 적어도 성경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중세교회도 성경의 권위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정이 되었고 전제됐어요. 물론 초기 교회 때로부터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방법들이 있었고, 신학적 토론과 입장에 있어 안디옥 학파라든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성경의 권위는 전제였습니다. 하지만 중세교회는 실제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놓쳤어요. 교황과 교회의 권위 때문이죠. 다시 말해 중세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사실상 명목적으로만 인정한 것이며, 실제로는 놓치고 말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 권위의 재발견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죠. 다시 말해 성경의 권위를 실제화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충족성 문제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의 구원 문제를 가르치는 데 있어 충족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 특히 가톨릭은 이 성경의 충족성에 대해 철저하지 못했던 같습니다. 항상 교회의 해석이 있어야만 성경이 우리에게 충족하게 온다는 것이었죠. 자료를 보니까 12세기에는 공식적으로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금했더군요. 최근 제가 「사목」이라는 잡지를 보니까 거기에 주교나 그 이상의 교직자를 일컫는 장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장상이 성경해석에 있어 어떤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도 또 순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장상의 해석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카톨릭도 성경 해석이나 성경 읽기를 강조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성경 해석이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의해 성령의 조명으로 누구나 읽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열려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관과 관련된 가장 컸던 논쟁은 아무래도 종교개혁 같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 정확 무오한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종교개혁적 전통이 만들어지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그러다 보니 성경이 번역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가톨릭은 셉튜어진트보다 벌게이트가 더 순전하다고 봅니다. 벌게이트에는 제롬과 같은 교부들의 숨결이 베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전통에 대한 헌신이 그들에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틴데일이라든가 여러 성경 번역자들이 순교를 당한 것도 결국은 성경관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종교개혁적 전통이 경건주의로 넘어가면 상당히 실존적으로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지만, 스콜라주의로 인해 너무나 경화되어 교리가 성경을 거의 지배한다고 해야 할 상황으로 변하고 맙니다. 성경이 교리를 형성해 가야 하는 것인데, 그 반대로 성경을 관장해 버리는 결과로 바뀌고, 그러다 보니까 교리가 생명력이 넘치는 성경으로 표현되기보다는 너무나 철학적이고 사변적이고 규범적이 되어 역사적인 접촉점을 잃고 우리의 믿음과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 버리죠. 이런 배경 가운데서 자유주의가 등장했고, 자유주의가 스콜라주의적 신학에 도전을 하면서 비로소 성경신학이 태동했습니다.

   

성경신학의 출발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새로운 성경관의 출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학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성경 자체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고, 그래서 성경신학이 태동될 때 굉장한 비판들이 있었어요.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에 와서는 새해석학, 독자반응비평,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의 등장으로 성경을 보는 눈을 크게 바꾸고 있죠. 어쨌든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성경관이 신학을 형성하고, 또 신학이 성경관을 형성하는 해석학적 순환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경건주의도 성경을 단지 학자들의 전유물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과 삶을 위한 것이라는 성경관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건주의의 등장과 영향으로 인해 성경을 우리의 삶을 위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 훨씬 큰 도전과 활력을 준 것 아닙니까?  

  

이런 점에서 성경관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임이 확인되는 것이죠. 실례로, 문선명이라든가 이단들은 근본적으로 정통 기독교와는 다른 성경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죠.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케논(canon) 즉 정경으로서의 성경입니다. 그리고 케논으로서의 성경이란 이미 그 속에 규범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믿음의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케논으로서의 정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단은 믿음의 범주를 떠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하죠. 

  

김중은/ 성경관 논쟁을 종교개혁과 연관시킨 것은 아주 좋은 지적이라고 봅니다. 즉 로마 천주교로부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분명히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성경관에 관한 토론은 결국 사변적인 이야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회와 신학과 성도의 삶의 현장을 위한 것입니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누구나 읽고 성경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을 교회의 권위 아래에 두려는 태도는 바른 성경관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성경관, 그리고 거기에 따른 성경해석의 원리 곧 성경은 그 자체의 해석자라는 것과 성경의 바른 해석은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온다는 이 두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성경 본문은 영해나 상징적인 해석 이전에 문맥이 지시하는 대로 명백한 문자적인 해석과 그 기록자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해석해야 된다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죠. 

 

또 하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루터와 칼빈이 과연 오늘날 역사비평학의 원조였느냐 하는 겁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역사비평학과 관련지으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루터와 칼빈은 문법역사적 방법을 적용한 복음주의적인 성경관을 견지했다고 봅니다. 이 두 견해 사이에서 루터와 칼빈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루터와 칼빈이 정말 역사비평학의 원조였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거죠.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어쨌든 이점을 밝혀야 해요. 자유주의 성서학자들은 루터와 칼빈이 성서를 재발견했는데, 그들의 주석을 보면 성서에도 오류가 있고 잘못이 있다고 했다면서 현대 계몽주의 성서 연구가 그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연히 성서비평이 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의도적으로 연결을 짖곤 합니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지 하는 점은 반드시 분명히 짚어야 해요. 이를 위해서는 루터와 칼빈이 어떤 점을 오류라고 했고 무엇이 문제가 있다고 했으며, 그리고 이들의 생각과 방법이 역사비평 방법론과 같은 것이지를 정리해야 해요. 그래야 이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김정우/ 제가 섬기는 한국신학정보연구원이 만든 “한국신학정간물기사색인” 씨디롬으로 “성경(서)관” 주제어 검색을 해 보았는데, 카톨릭에는 성서 및 성경에 대한 글은 참 많지만, 그러나 성경관 혹은 성서관이라는 글은 거의 없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마도 카톨릭은 자신들의 성서관을 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종교개혁의 성경해석의 전통은 아무래도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문자적이라는 말보다는 문법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문학적 해석이라고 한다면 문학 안에 문법까지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요. 문자적 하면 너무 근본주의 적인 자구만 따지는 관점이 있기 때문에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웨슬리나 경건주의적 전통에 가면 실천적 해석 혹은 실천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내게 실천이 되지 않는 해석은 내게 유익이 없다는 전통은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 옳다 하더라도 그 해석이 내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가현설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시편 때문에 루터와 칼빈을 자주 참조하게 되는데, 칼빈의 주석은 데오도레의 해석과 축을 같이 해요. 매우 문법적 해석이죠. 그러면서 당시 교회의 교황과 갈등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또 기독론을 확고히 하고자 애쓰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어요. 반면 루터의 주석은 아무래도 실존적이죠. 신학적 주석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믿음의 공동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그들에게 던지는 설교체의 글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믿음의 실존적인 측면이 강하죠. 이런 점에서 루터는 아직까지 알레고리적 전통을 많이 따른다고 할 수 있어요. 칼빈에게 이르면 모형론으로 넘어갑니다. 안디옥 전통을 훨씬 많이 따르는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역사비평학자들이 칼빈과 루터에게서 비평학의 원조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일면 전통을 거부하고 성경의 권위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활동은 비평적이었지만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 관심은 성경의 권위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비평학을 루터 및 칼빈에게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더 학문적인 토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는데, 성경관 논쟁에 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사실 역사비평학입니다. 역사비평학은 성경관 논쟁에 있어 근본적인 축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죠. 역사비평학적 성경관이 신학계와 교계에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김중은/ 교회사적으로 크게 보면 성경관 논쟁이 종교개혁과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그런 작업을 했어요. 그러나 그 이후 여러 변형을 거치면서 성경관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하고 신학적 갈등이 증폭되는 그런 현실을 낳았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점은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났는데, 한국교회 성경관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죠. 김양선의 「한국교회 해방 10년사」에 나오듯이 당시 함흥지역에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가 이스라엘의 역사는 유대인의 편견사이고 거기에는 오류가 많다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교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어요. 이게 한국교회 안에 성경관과 관련해 문제되기 시작한 구체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이후 김재준과 박형룡의 성경 무오 혹은 유오 논쟁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갈등 속에서 1953년의 기독교장로교 분열은 다른 여러 요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계기는 바로 성경관 문제였어요. 즉 쉽게 말해 김재준은 성경이 유오하다는 것이었죠. 성경에 오류가 있는데 오류가 없다고 말하겠느냐 하는 것이었고, 반면 박형룡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무슨 소리냐 한 겁니다. 이렇게 된 것을 모두 성경관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뿌리에 들어가 보면 역시 성경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아요. 박용규 교수가 「한국장로교사상사」에서 한국장로교를 이해하려면 성경 무오와 성경관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일리가 있다고 봐요. 신학과 교회, 혹은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그리고 이후 신학에 큰 흐름을 결정지을 만큼 성경관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분명해요.

  

김정우/ 한국교회에서 감리교는 장로교와는 다른 성경관, 즉 역사비평학을 처음부터 수용했고, 장로교는 처음부터 거절했어요. 성경에는 역사적, 문학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관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교수님이 언급한 것처럼 서고도는 “성경에는 문학적 역사적 지리적 오류가 있다”고 말했어요. 또 1934년에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는 모세의 저작이 아니다”라는 모세 저작권 문제를 제기했고, 이 때문에 총회가 소집되어 갈등을 일으켰으며, 그 외에도 여성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문제, 어빙돈 성경주석 문제 등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쨌든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관 문제는 장로교의 분열의 신학적 이유였어요. 그때 김재준 박사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거기에는 신화적인 것, 전설적인 것도 있고 역사도 있고 비유도 있고 격언도 시가도 교훈도 의례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는 성경의 정확 무오성이라는 것은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라는 영역 안에서만 성립이 된다”고 했고, 이것 때문에 평양신학교가 조선신학교로 분열이 됐어요. 그리고 조선신학교는 역사비평학을 근간으로 신학을 하겠다고 시작된 신학교가 되었죠. 그 외에도 한국교회 안에는 교단 분열이 있어 왔지만, 성경관이 핵심 쟁점이 된 것 같지는 않아요. 어쩌면 명분을 위해 성경관을 이용한 분열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경관 논쟁을 거쳐오면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 것이 있다고 보는데요, 한국교회는 한편 성경을 높이 받들면서도 성경 자체를 공부하기보다는 ‘내 성경관은 너 성경관보다 더 좋다’는, 어떤 의미에서 명분 싸움에 이용된 역사가 많은 듯 해요.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김중은/ 그 이후에도 60년대에는 김기수 목사가 요나서는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이야기다 했고, 호주 선교사 변조운도 성서비평학을 얘기했어요. 우리가 천국 갔을 때 하나님이 너의 성경관이 무엇이냐라고 묻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한국교회 안에도 사실은 성경관 문제가 뿌리 깊은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서양이나 독일, 영국, 미국교회 등도 이런 갈등을 겪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죠. 이 모든 갈등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경관에 있습니다. 우선은 이런 사실을 좀 분명히 인식하는 게 필요해요. 

  

김정우/ 어떤 의미에서 성경관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깊은 겁니다. 성경관이 다르다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것이고, 이데올로기가 다르면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성경관은 완벽한데, 성경해석을 자기 멋대로 인 경우가 많아요. 다시 말해 나의 성경관을 나의 해석과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현상 말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안타까운 현상이죠. 경직된 성경관을 가질수록 그럴 가능성이 많은 것 같아요. 어쩌면 오늘날 대개의 한국교회 목회와 신학의 현장의 문제는 여기에 관련이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김중은/ 성경관 논쟁의 핵심적인 논쟁의 쟁점은 결국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얘기할 것인지 무오하다고 말할 것인지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류가 있다면 무엇이 어떤 게 오류냐 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을 떠올린다면, 만일 성도들이 성경 본문을 들고 목사님들에게 와서 이 본문은 오류가 아니냐, 저 본문과 맞지 않는데 어떻게 봐야 하느냐 하고 따져 들기 시작하면, 과연 목회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야 하는 거죠. 사실 이런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냥 잠잠한 것 같아요. 

  

김정우/ 저는 성경의 유오 혹은 무오 문제를 좀 달리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성경의 오류 문제는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해 그 말을 오류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이 말하는 오류의 기준이 제시되고, 그리고 그 기준이 정당한 기준인지가 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관 논쟁에 있어 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신성과 인성 곧 디바인 오쏘십(divine authorship)과 휴먼 오쏘십(humas authorship)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를 강조하는 사람은 무오를, 후자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개 오류를 주장하는데, 문제는 성경이 양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마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대립적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신적인 것이기에 초월성을 갖지만 동시에 성경은 인성을 갖고 있기에 역사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에 있어 신성과 인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초월성과 역사성 혹은 내재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독특한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를 보면 초월적인 종교는 비내재적이고, 내재적인 종교는 비초월적이에요. 즉 초월과 내재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는 충돌을 일으키는데, 기독교 신앙만은 이것을 포괄적으로 담아 냅니다. 이점은 성경 자체가 초월성과 역사성, 즉 신성과 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초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극대화하면 너무 스콜래스틱(scholastic)해져서 우리의 삶의 현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절대적 진리만, 그래서 비문화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비실천적인 명목상의 진실만을 강조하는 것이 되고, 그 반대로 내재성만 강조하게 되면 완전히 역사성에 함몰되어 초월성은 부인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즉 양성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성경에 대한 오해가 많아지고 또 잘못된 강조점들이 잘못된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역사비평학의 기여도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성과 역사성에 있어서 역사비평학만큼 많이 드러내어 준 방법론이 없으니까요. 만일 교회 2000년 역사에서 역사비평학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성경의 역사나 지리나 또 문화나 관습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차이점에 대해서도 깊게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비평학의 최고의 문제는 단어가 다르면 출처가 다르다는 데까지 넘어가는 것이고,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인데, 저의 강조점은 역사비평학이 그런 지적을 했으니까 모세가 올라가는 것도 있고 내려가는 것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결국 상대방의 약점을 우리의 강점으로 만들어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교회의 신앙을 더욱 건전하게 해 나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거죠. 즉 계시성과 영감성을 전제하면서도 역사 내재적인 측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계시 자체가 다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저도 역사비평학 때문에 참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번은 고 박윤선 박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개인적으로 “박 목사님, 정말 역사비평학자들이 한 게 다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뭘 다 틀렸겠소. 근본적인 몇 가지가 틀렸겠지요”라고 하더군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대화였지만, 제게는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떤 방법론이든 강점도 있고 약점도 있기 마련이며, 어떤 방법론도 그 하나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전부 드러내지는 못할 겁니다. 방법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다양한 방법들이 성경의 계시를 더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김중은/ 성경의 계시성이 포기되는 상황에서도 얻어지는 열매를 우리가 어느 정도 기대하고 선별적으로 사용해서 교회와 신앙에 어느 정도 유익이 되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고 보는데요, 저는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17세기까지는 그래도 서구신학의 해석학적 자리가 초월이나 신성을 강조하는 믿음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났어요. 믿음의 시대는 가고 이성의 시대가 자리잡은 겁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정리가 어려워요. 루터와 칼빈은 고등비평을 알지도 못했고 역사비평 방법론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역사비평의 원조를 그들에게 두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무리가 있고 그들의 저작이나 사고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로 정리하고 싶은데요, 첫째, 루터 칼빈의 성경관 이해는 성서무오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결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사람들이 아니죠. 그런데 19세기에 뉴욕 유니온신학교의 찰스 브릭스가 고등비평을 가르쳤다고 문제가 되자 그가 자신을 변명하는 글에서 루터와 칼빈도 성경에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꾸 인용하는 바람에 마치 역사비평학의 원조가 루터와 칼빈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본다면, 루터와 칼빈이 정말 오늘날 자유주의 고등비평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비평학을 말할 리가 없어요. 루터 칼빈의 성경관은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역시 문법 역사적 방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문자적으로 특별히 지시하지 않는 한 문맥에서 그 문자의 평이한 뜻을 받아들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등비평의 원리는 첫째, 성경도 다른 모든 고대 종교서적들과 같은 기준으로 비평해야 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인간이 기록한 문서라는 것이고,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는 것이죠. 둘째, 과거의 기록에 나타난 경험은 오늘 우리 현재의 경험과의 유추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고 사실 여부가 가려질 수 있다는 겁니다. 셋째,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므로 자연법칙에 의존해서 성경의 모든 사건들을 원인 결과에 의해 해석을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행동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부터 부활까지 모두 불가능한 얘기가 되죠. 이러한 고등비평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역사비평 방법인데, 이때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우리의 경험과 유추의 관계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무엇이 정말로 일어났느냐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만고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비평은 신앙파괴적인 비평인 거죠. 이점을 박형룡도 누누이 얘기했고 메이첸이나 구라파의 헹스텐베르그 등 유명한 학자들이 지적했습니다. 

 

물론 역사비평학에서도 우리가 배울 바는 배워야 하겠죠. 정말 역사비평적 방법이 18세기에서 나와 오늘까지 우리 교회와 신앙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요소가 뭔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먼저 저부터 고백하면, 성경을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는 그런 장점이랄까 경이감을 내게 주었어요. 역사비평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보니까 속속들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됐느냐 하는 겁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냈느냐 하는 거죠. 못살려 냈어요. 못 살릴 뿐 아니라 그것 배운다고 사람들을 얼마나 고생시키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의 기록으로서 성경의 역사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점을 원리적으로는 수행하면서도 복음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 곧 성경이 기록된 본질적인 목적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정적 역할을 너무나 많이 했어요. 그래서 오늘날 역사비평을 받아들이는 교회나 신학교마다 약화되고 있는 현상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루터와 칼빈은 결코 계몽주의적 사고에서 생각하는 그런 차원에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 그래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김정우/ 고등비평과 역사비평학의 관계와 출발과 의미에 대해 잘 말씀해 주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박사님의 말씀은 구자유주의 내지는 초기의 역사비평학을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와서 자유주의는 많이 수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비평학자들 자기들끼리도 많이 싸우고, 또 문서설이 나온 지도 200년이 됐지만 아직까지 오경 형성에 대해서조차 역사비평학계의 확고한 결과가 하나도 없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역사비평학계 내에서도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글들이 많이 나왔고, 또 같은 편집비평을 하더라도 독일 쪽과 미국 쪽이 많이 달라요. 역사비평학이 결국 추구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곧 성경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문서 중심으로 역사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는데, 200년 동안 모든 학자들이 달라붙어도 어떤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요. 방법론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게다가 믿음에 근본적인 해악들을 가져오다 보니까 목회 안되죠 선교 안되죠 교회가 침체하죠, 그렇다고 서양 교회가 다 문닫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역시비평학이 교회의 신앙에는 큰 도움이 안된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왈터 부르그만이나 페트릭 밀러 등 역사비평학을 적용하면서도 교회의 신앙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신앙을 간직하려는 역사비평학자들의 자기 반성 부분도 충분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학자로서 방법론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토론해야 하겠죠. 왜냐하면 방법론 없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비평학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서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넘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일 겁니다. 사실은 이게 더 중요한 문제죠. 특별히 한국에서 신학을 하는 자로서 우리의 정황에서 토론해야 할 이슈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이런 점에서 저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비평학이 제일 치명상을 끼친 부분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실 국제비평주석을 보면 언어학적인 면에서는 탁월해요. 또 성경원어사전이 나온 것도 어떤 면에서 비평적 성경신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믿음의 공동체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거든요.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했고 한국교회가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믿음 부분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결국 성경적 신앙을 갖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니까 이런 면을 부각시키면서 세계 학계에 기여를 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중은/ 한국교회에서 고등비평이라는 말은 1921년 평양신학교의 「신학지남」에 어도만 교수가 쓴 “고등비평”이라는 제목의 글로 처음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감리교가 자유주의를 수용해 1916년부터 양주삼 목사가 「신학세계」에서 “구신학전서총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면서 고등비평을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소개했다고 유동식 교수가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양주삼은 고등비평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어요. 이 기회에 이점은 바로 잡았으면 해요. 아무튼 어도만의 글에는 “고등비평은 원리적으로 합당하다”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그가 고등비평을 제대로 이해하고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최고로 문제가 되는 성경관은 다름이 아니라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입니다. 한국교회의 성경관 혼란은 자유주의도 아니고 복음주의도 아니라, 중간지대에 해당하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입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분명히 개혁주의 전통에 서면서도 성서관은 역사비평학적인 방법을 전제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박형룡은 괴이한 성경관이라고 했어요. 물론 성경관 가지고 상대를 이단이니 뭐니 정죄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역사비평적인 방법과 고등비평이라는 것이 뭔지는 분명히 인식해야 해요. 이런 인식이 부족하니까 무슨 말을 해도 정리가 안되고 혼란이 가중되는 겁니다. 신정통주의도 보면 성경은 구원과 행위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오류도 받아들이거든요. 한번은 성경에 무슨 오류가 있냐고 물었더니 김재준 박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땅에 영원한 기초를 두어 요동하지 않게 하셨다는 게 오류가 아닙니까”라고 했답니다. 지금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죠. 

성경의 오류 문제에 대해 복음주의적으로는 성경에는 오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러면 뭡니까? 성경에는 다만 난제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게 좋습니까? 한국 개신교 교단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이 질문을 한번 던져 보고 싶어요. ‘당신이 정말 기독교인이냐? 그렇다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게 좋으나 아니면 난제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게 좋으냐’라고 말입니다. 성경에 난제가 있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이면서 성경에 왜 오류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까! 개신교의 출발과 전통이 바로 이런 입장이었어요. 즉 난제라는 것이죠.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모든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이 일관되게 표현하는 바입니다. 반드시 오류라고 주장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꼭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싶어요. 엄밀히 따지자면 확인된 오류도 아닌데 말입니다. 법정적으로 판단이 끝난 그런 오류가 아니지 않습니까? 차제에 저는 그런 것은 오류가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요. 다만 성경에 난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칼빈과 루터의 전통에 의하면, 우리에게 원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오류란 사본상의 오류일 뿐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봐요. 사본상의 차이이고 오류이지 그것을 성경의 오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성경 안에 모순되고 불일치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는난제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런 것을 오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성경관 자체에 혼란이 생기고 불필요한 갈등과 싸움이 생깁니다. 오류가 있는 게 아니고 난제가 있을 뿐이라고 정리하면, 쓸데없는 논쟁이나 분열의 문제도 훨씬 쉽게 극복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서구신학의 성경관이나 해석 논쟁에 있어 가장 도전적인 용어가 바로 성경에 오류(error)가 있다, 모순(contradiction)이 있다는 건데요, 저는 잘못된 용어 사용이라고 지적하고 싶어요. 난제가 있을 뿐이고, 역사적, 문화적, 연대적 간격에서 오는 차이(difference)가 있을 뿐이라고 개념정의를 고쳐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김재준 박사부터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총회 앞에서까지 말할 필요가 뭐냐는 겁니다. 

  

김정우/ 한국교회 안에 요즘은 성경관에 대한 글들이 거의 사라진 것 같아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근본이고 제1항이요 뿌리입니다. 이 뿌리와 근본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는 교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영역들이 궁극적으로는 성경관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 때문이었고, 그것이 믿음과 교회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메시지를 준 것이거든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습이라든지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성경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으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내게 필요한 것들만 가져오는 실용주의적 접근만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우리의 설교에 힘이 없는 것 같아요. 개신교의 전통이란 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고, 또 이 성경에 근거한 설교는 강력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교회들 안에서는 그런 강력한 설교를 듣기가 너무도 힘든 상황이 되었어요. 한편 성경을 높인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주의 깊게 주해하는 일조차 간과하기 일쑤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적법한 절차들마저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아요. 결국 성경관, 즉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실제화되어 있지 않은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어쨌든 성경관 문제를 짚어 본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우리 믿음의 본질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성경관 주제는 정말 다급하면서도 중요해요. 

  

게다가 우리의 문화가 지금 너무 무섭게 변하고 있어요. 멀티미디어로 넘어가는 시대에 우리 다음 세대들도 우리들처럼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사소통 구조가 이제는 근본적으로 듣는 시대가 아니라 보고 느끼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학자들이 성경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학자들의 근본적 반성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김중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21세기에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신학자들로서는 관심을 두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가 보이는 것, 포장에만 열심을 내다보니 뿌리에는 너무 소홀해요. 더 나아가 통일을 앞둔 시대에서 한국교회가 일치를 이루어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일단 장로교가 일치를 추구하려면 신학적 작업도 필요하고, 그 신학적 작업의 출발은 바로 성경관입니다. 적어도 장로교만의 일치를 위해서라도 이런 기초적인 토론들을 계속하고 심화해야 한다고 봐요. 

  

성경관을 생각하면서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자라온 데는 역시 사경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고 봅니다. 성경관을 말하는 이유도 결국 한국교회를 위한 것인데, 새벽기도회를 새벽사경회라 해도 좋겠어요. 기독교 신학은 성경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또 사경회 전통도 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우/ 이번에 박창환 교수의 글을 보게 됐는데, 그는 “한국개신교의 성서적 태도는 맹목적인 사랑, 힘들이지 않는 독서, 잘못된 해석, 성서에 대한 배타적 태도”라고 말하더군요. 참 의미 있는 지적인데요, 우리는 너무도 성경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또 성경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다 그냥 영감 받아 설교해 버리니까 성경이 쉽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시편을 주석하면서 느끼는데, 정말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날마다 절감해요. 우리에겐 성경에 대한 어떤 외경심이 너무 없어진 것 같아요. 성경과 일치되고 호흡하려는 태도도 있어야 하지만, 성경과의 거리감도 있어야 하거든요. 어쨌든 성경이 쉽다고 생각하니까 교주 많이 나오고 이단이 득세하는 것 같아요. 요즘 한끝 한다는 목회자들을 보면 거의 교주같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성경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가 하는 걸 절실히 느껴요. 구라파에서는 의사가 되는 데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해야 할 정도의 인문학적인 소양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목사가 된다고 하면서도 그런 소양들을 별로 생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꾸만 불신자들에게조차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이런 것들이 다 성경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닌가 해요. 다시금 백투더바이블, 즉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김중은/ 박창환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교회가 성경을 사랑한 것은 좋았는데, 맹목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냐고 했는데, 이것은 바른 성경관을 가진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외경심과 더불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도 좋지만 지식이 있는 겸비된 사랑이어야 해요. 상대를 이해하는 사랑이 완전한 사랑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성경 공부에 대한 절실함이 왜 생기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바른 성경관이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성경관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 바탕에 없으니까 자꾸 딴 데로 빠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흔히 ‘그냥 덮어놓고 믿어라’는 말을 하는데, 그래서는 정말 안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오히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말씀을 듣고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들은 약화되는 것 같아요. 기도모임들은 많은데 말입니다. 

  

김정우/ 한국교회가 이제는 성경에서 기도로 넘어간 것 같아요. 저는 이점도 참 큰 위기라고 보는데요, 한국교회는 기도로 유명해요. 새벽기도, 심야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수요기도 등 온갖 기도가 있고, 지금은 기도가 목회 상품까지 되어 수험생을 위한 기도 혹은 100일 기도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데 있어요. 다시 말해 성경을 떠나니까 기도도 어떤 샤머니즘적인 것으로 흐르는 것 같고, 성경을 떠나니까 선교도 목회도 다 심각하게 왜곡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성경을 떠나니까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죠. 

  

여기서 축자영감의 문제도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의 기본적인 이해는 ‘문장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축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먼저 단어는 진리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좋겠어요. 진리는 문장으로 표현이 되거든요. ‘버벌 인스피레이션’(verbal inspiration)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문장으로 말씀하신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목적을 이루어야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축자라는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영감과 무오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 부분도 너무 오해되고 왜곡되곤 해요. 또한 급진적 혹은 근본주의적 이해들도 많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다듬어 보다 좋은 한국적 전통으로 연결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중은/ 축자영감이라는 용어도 갈등의 요인이 되곤 했는데, 오해 부분을 잘 지적하셨어요. 어떤 자구나 문자, 글자 자체가 어떻게 됐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를 문장으로서 바로 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축자영감입니다. 한국교회 초기 평양신학교의 이눌서 교수 등의 글을 보면 사실상 축자영감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가 없어요. 또한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언사(言詞)영감’이라고 했어요. 그게 아주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언사영감 혹은 언어영감이라고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굳이 축자영감이라고 표현하니까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는 거죠. 실제로 영어에는 축자영감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있어요. 즉 영어로 '버베이팀 인스피레이션'(verbatim inspiration)입니다. 세계 모든 복음주의 학자들이 확인한 사실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확인하고 싶은 점은 루터나 칼빈도 오류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사본 혹은 번역의 오류이지 성경의 오류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적인 성경관이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김정우/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은데, 모든 문학적인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를 들어 시편 1편을 보면, 법이 비인격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 혹은 비역사적 진리로가 아니라 인격적 진리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 궁극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죠. 그래서 성경적 성경관이라고 할 때 그것을 개념적 진리로도 표현할 수 있겠고, 또는 신앙고백적 진리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저는 특히 말씀이 인격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을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 교회는 말씀과 삶이 이분화되는, 어떤 면에서 가현설적인 전통을 늘 거부했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성경적 성경관을 생각하는 데 있어 인격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격과 삶에 말씀이 녹아 있고,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떼굴떼굴 굴러다닐 정도로 말씀에 젖은 그리스도인, 삶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독교적 성경의 진리를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 그런 것이 진정한 성경관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볼수록 어떤 완성된 인격을 보는 것 같아요. 

  

김중은/ 바울 사도가 문자는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 했는데, 이게 성경관의 마지막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말씀이 체현되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죠. 문자만 가지고 싸우는 것 자체가 성경적 성경관을 모르는 데서부터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아직까지 근본주의적 멘탈리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주의이거든요. 개신교 전통의 개혁주의 혹은 복음주의 성경관은 결코 문자적인 무오설 혹은 문자 자체에 얽매이는 성경관이 아닙니다. 영을 살리는 데까지 가는 그런 인격성을 보는 성경관입니다. 

  

김정우/ 저는 문자에 대해 그리 부정적인 느낌을 갖지는 않습니다. 문자라고 한다면 단어, 형태소, 음소,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단어와 구와 문장을 이루는 데 있어 문자에 대한 이해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문자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생기기 때문에 좀더 적절히 표현하도록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김중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경관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목회자라면 자신의 성경관이 더 분명히 정리되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의 성경관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라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성경관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어떤지를 좀 진지하고 솔직하게 생각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김정우 교수(총신 구약학 교수)와 김중은 교수(장 신 구약학 교수)와의 성경관에 관한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