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기도하지 않는 이유 21가지

하나님아들 2021. 9. 9. 22:22

기도하지 않는 이유  21가지

 

하나.  목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세우십시오
(막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또한 우리는 종종 “내가 나쁜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싶어서 했나?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되니까 하지”라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나쁜 생각을 얼마나 오랫동안 머리 속에 두느냐, 마음속에 간직하고있느냐를 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얼마나 구체화시켜 나가느냐, 그 생각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겨 나가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에 우리 각자를 향하여 “악하다. 너는 매사에 악하다”고 책망하기도 하실 것이며, “넌 참 회개하는 태도가 됐다”고 칭찬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 반대편에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항상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나서 심판과 상급을 결정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기도를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절대 명령이요, 특별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권위 있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느냐 하면 기도가 지닌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권위를 두는 사람은 너무도 당연히 기도하게 됩니다.

왜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목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목표가 명확한 사람들은 아파도 기도하고, 고통스러워도 기도하고, 행복해도 기도하고, 여건이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날씨가 나쁘면 나빠서 쉬고, 좋으면 좋아서 놀러 가느라고 쉬고 구하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목표가 명확한가, 명확하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하거나 함부로 성의 없이 중언 부언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내용,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아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종이에 기도 제목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표를 임신시키는 것입니다. 임신해서 관리를 잘하면 분명 정상아를 출산시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배 안에 목표라는 아이를 임신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은혜롭고 복된 출산 곧 기도 응답이라는 기쁨의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정말로 꼭 출산하기를 원하는구나”하고 주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 물어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해야 합니다. 

둘.  일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시 37:1-6)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37:5)

첫째, 자행자지 하는 인간들의 실례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슨 일이든 항상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실례들은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 탑 사건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하는 완악하고 고집스런 인간의 본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이 왜 하나님의 원대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과 자기 고집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살인과 도피와 처절한 절망뿐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이 자기를 고집하는 이유
그러면 왜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잘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교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잘난 줄 알고 교만하여 마귀의 꾐에 빠져서 그렇습니다.

원래 천사장 루시퍼가 반역하면서 이 땅에 마귀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우리 인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너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너도 혼자 독립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마귀의 꾐에 넘어간 인생들은 그러한 인본주의적이고 교만한 사고에 물들게 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 반기를 들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얻는 행복
이렇게 자신의 모든 문제를 맡길 때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집니까? 본문 1절 말씀처럼 됩니다.

“행악자를 위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안 맡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행악자를 인해 불평하게 됩니다. “이게 왜 이렇습니까? 내가 일을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데 저 나쁜 사람 때문에 일이 잘 안 됩니다.” 결국은 내 뜻, 내 생각, 내 계획대로 안 되기 때문에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긴 사람은 아무리 행악자가 나타나 자기 일을 방해한다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시편 37편 1-2절은 링컨 대통령이 갖고 있던 성경책 중에서 가장 줄이 많이 그은 구절입니다. 낡아서 닳아질 정도로 긋고 또 그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힘이 되는 성경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아직도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고 있으면 문제를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않아서 그렇다는 판별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참고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께 모든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민하고 염려하는 모든 문제에 친히 개입하여 주셔서 하나하나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고 심지어 우리의 상처받은 명예까지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게 해주실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줄 알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든 하나님 마음이 아닌 내 마음대로 처리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나에 대한 기대감을 잃지 않았거나,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교만하고 못된 자아를 죽이고,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나의 길을 여호와께 모두 맡기고 확실히 믿는다면(시 37:1-6)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경건한 방식을 모르고 어떻게든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 기도보다 다른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먼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성경 구절이 다섯 구절 있는데 본문 말씀이 그중 하나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여기서 말하는 ‘의’는 옳을 ‘義’를 말합니다.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옳게 생각하는 일을 먼저 구하고 처리해라. 그러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에서 ‘이 모든 것’이라는 단어 안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의 것을 먼저 추구하기만 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순서를 바꾸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게 되는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 사람은 선택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기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데 기도보다 쇼핑을 먼저 할뿐이고, 기도보다 아이들 과외시키는 일에 좀더 열중할 뿐이고, 기도보다 사업하는 일에 좀더 열중할 뿐이지 기도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기도보다 점을 먼저 자고, 기도보다 먼저 먹고, 기도보다 먼저 놀고, 기도보다 먼저 텔레비전을 보고, 기도보다 먼저 공부하고, 그런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고 살아갈 때  기도 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주 강한 사고가 없이는 기도는 항상 제일 마지막 순서로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왜 기도해야 되는가 하는 정확한 가치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주님을 먼저 섬기고, 주님을 내 삶의 최고 순위에 둘 때 비로소 우리의 입술에 기도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또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순서가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은 이 순서를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넷.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 26:31-36)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69-75)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갔을 때에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신앙의 졸장부요,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멀찍이 따라갔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집의 한 어린 하녀가 지나가면서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지적하자, 베드로는 뻔뻔한 얼굴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무능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자신이 무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다가오자 무능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기도하는 자
그러면 자기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과 못 깨달은 사람의 차이를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준거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능하니까 어차피 내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뒤늦게나마 찾아온 인생을 내치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적어도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먼저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그 어리석음을 떨쳐버릴 때까지 그를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은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뛰어다녀 봐야 안 되니까, 나는 무능하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으니까, 바로 기도하게 된단 말입니다.

둘째, 자기 뜻을 버리고 주께 순종하는 자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를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준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안 하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을 보면 자신이 현재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의지하기 전까지는 아무 역사도 아 베푸십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전에 역사를 베풀어도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그들을 오히려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수 7:3)

위의 말씀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직도 일이나 무슨 계획을 주도적으로 세워 나간다면, 주께 순종 안 하고 내 맘대로 살아간다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직도 내 힘으로 무슨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은 아직도 교만하고 못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나는 아직도 교만한 인본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철두철미하게 자아가 깨어져 매일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신본주의자입니까?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인생의 소원에 귀 기울이시며 그의 안타까운 간구에 친히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낮아지고 겸손해지느냐에 따라서 우리 신앙 생활의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인생은 결단코 이 타락한 세상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령한 분투를 기대합니다.

다섯. 간구하는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기도를 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은 죽이는 행위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기도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본성을 고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간구하는 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무 재미없고,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이 간구하는 심령을 구하면 ‘간구하는 영’ 곧 ‘성령’께서 기도를 도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려고 잠깐 무릎 꿇고 있으면 오만 잡생각이 다 납니다. 그리고 정작 기도의 말문을 열었을 때, ‘이거 어떻게 기도하나’, 이런 막막함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슥 12:10) 만약 우리가 이 약속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 지금 역사하셔서 저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희한하게 우리의 속 심령이 뜨거워져서 기도의 말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왜 기도가 더 하고 싶고, 왜 기도할 때마다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심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더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동안에 성령이 충만하던 사람도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환영하지도 않고, 모셔들이지도 않으면 성령님이 안 계신 사람하고 똑같이 행동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더 심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이 계신 것을 인정하고 온 마음과 뜻으로 환영하고 모셔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 안 하고는 결코 못 견디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 못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좋다, 도와주겠다” 하시면서 기도하고픈 심령과 함께 기도를 통한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 간구하는 영을 제게 부어 주옵소서. 늘 기도할 수 있도록, 수시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 전에 항상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옵소서,”

왜 기도하지 않게 됩니까? 바로 이 간구하는 영을 구하지 않고 무시해서 그렇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뿐 아니라 끝날 때도 내가 간구하는 영에 사로잡혀 기도했는지 확인해 볼일입니다. 기도에 승리하면 생활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바른 기도 생활을 통해 여러분의 전인격,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여섯.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귀순자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탁아소에 맡긴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당과 수령을 위해 일하고 돌아오면 아이는 부모의 수고를 고마워하기보다는, 이처럼 먹고 입고하는 모든 것이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님의 은덕’이라고 찬양합니다. 이때 부모가 조금 빈정대는 투로 이야기를 하면 “아니 아버지, 어버이 수령님 위대하신 지도자에게 무슨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아이가 자기 부모를 비판하고 단죄한다고 합니다. 북한의 아이들은 부모보다 수령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흉허물없이 지내야 할 가정이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다 보니 개인의 인정은 말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차피 내가 있어도 저들을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저들이 굶어 죽는 것도 아니니까 나 한 사람이라도 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남한으로 넘어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 가지신 분들 대부분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 교인들의 경우는 교회 앞 세차장에서 바로 중앙선을 넘어서 가실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교통법규를 많이 어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인격이 손상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교통법규를 어긴다는 것은 절제가 안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호 하나에서 기다리는 절제가 안 되는 사람은 다른 것에서도 절제를 못합니다
아무리 호언 장담을 해도 기본적으로 교통법규를 못 지키는 사람은 다른 것도 못 지킨단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일도 얼마든지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스트레스 척도를 보면 최고의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100이고, 그 다음에는 이혼이 50, 교통위반이 13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한 번씩 어김으로 스트레스 수치 13씩을 받고 살아간단 말입니다. 하루에 교통법규 7-8번씩 어기면 스트레스 수치가 100씩은 기본적으로 됩니다.

성령님의 취미는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취미도 진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나 자신의 행복과 내 가정의 만족만을 위해 살지 말고, 성령께서 즐겨하시는 전도의 일에 힘써야 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놓아하시는 관심과 우리의 공동 관심은 예수님입니다. 성령님은 요한복음 16장 14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이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관심사와 우리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사는 집이요, 좋은 차요, 세상 명예 등이라면 성령님과는 도저히 교제가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영원한 평행선이란 말입니다.
성령님께선 취미가 전도이고, 전도할 때 능력을 주시고,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할새 두루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안 나가면 역사가 안 나타납니다. 취미가 전도이고 관심사가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수준이 같아야 하고, 그 다음에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왜 기도하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와 성령님간이 관심사가 같지 않고, 취미가 같지 않고, 우리의 추구하는 바와 성령님께서 목적하시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녕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길 원해도 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는 나대로, 성령님은 성령님대로 하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기도가 점점 사라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 격식을 갖춰서만 기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첫째, 특별한 것만 기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너무나 많이 쉬면서 기도합니다. 많이 쉬는 것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한 경우만 살펴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시시콜콜한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별 시시콜콜한 말도 “유치하다. 유치해. 그걸 기도라고 하냐” 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모든 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격식을 갖추어 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주 기도하지 않는가 하면 정식으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기도를 많이 못하게 됩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도로 접수를 시켜야 기도를 많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틈만 나면 기도해야 합니다. 틈만 나면 기도를 해야 쉬지 않고 기도가 되지, 매일 정식으로 격식을 갖추어 기도하려고 해서는 자주 기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어떻게 하면 안 쉬고 기도할 수 있느냐 하면 정말 종일토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종일토록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입으로만 하는 기도로는 곤란합니다. 생각 가운데서 주님을 향해 마음으로 종일토록 기도할 때만 가능합니다. 생각을 계속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선 그것을 기도로 인정하십니다.

셋째로, 듣는 것은 기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도 기도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여쭙고 가만히 응답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것, 그것도 기도입니다. 듣는 것을 기도로 인정 안 하니까 기도를 자주 하지 않게 되는데, 듣는 것도 기도로 인정하고 주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넷째로, 사랑의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주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심부름하고, 밥 사주고,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것,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것 이것은 한마디로 신바람이 안 납니다. 실제로 우리가 밤에 산에 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과 진실된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면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재미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사랑의 대화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까요? 쉬운 예로 기도하면서 시계 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의 대화가 아닙니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서 시계를 봅니까? 시계를 봐도 몰래 보죠. 시계 보다 들키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기도를 한다고 앉아서는 계속해서 시계를 보는 것은 이미 그 기도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10분 됐네. 한 세 시간 한 줄 알았는데.” 이것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 어쩌구 어째. 10분 해 놓고선 세 시간이나 지난 것 같다고” 하시며 섭섭해하십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부모를 위해서 뭘 하나 사 오면 그 작은 것을 가지고 평생 자랑합니다. “얘가 일곱 살 때 돈 줬더니 갖고 나가 이걸 사왔다”고 하면서 옆 사람이 귀찮을 정도로 자랑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정말 쉬지 않고 사랑의 관계성을 가지고 기도 드리면 자랑스러워하시며, 크게 기뻐하시고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응답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덟. 그림을 그리듯이 구체적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마음 가운데서 철저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것을 변형시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적인 힘이 강합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을  파탄시키기도 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기도 합니다. 폭행을 하기도 하고, 엄청난 피해 의식에도 사로잡히게 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게도 합니다. 그 피해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생각은 그림입니다. 성도들이 왜 기도하지 않게 되느냐하면 내 생각을 가지고 영상화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자꾸 내 입술로만 하면 우리의 좌뇌는 문자를 외우는 데 한계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영상화 작업을 해서 우뇌로 넘기면 재미있습니다.

“그림을 그려라”라는 말은 큰 설득력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이 구체적인 한 폭의 그림으로 떠오르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이성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인내해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믿음은 확신입니다. 확신이 없다면 믿음이 없습니다. 나는 분명히 믿었는데 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하는 말은 내겐 분명히 확신이 있었는데 왜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하는 말과 같습니다.

무릎 꿇고 앉으면 내가 지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인가 그것을 먼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께 무엇을 구하려고 앉아 있는 걸까? 그러면 그 구하는 것의 최종 상태는 어떤 것일까?’하는 것을 생각 가운에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지금 구하는 것과 그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기도해야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계약서 얻는 작업은 결국 그림 그리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줄기차게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고 몇 번 하다 말고, 또 잊어버립니까? 내가 글씨 써놓은 것은 잊어버리지만 그림 그리다 만 것은 어디까지 그렸는지 압니다. 그만큼 영상화 작업은 우리들에게 집중력을 가져다줍니다. 왜 기도하지 않게 됩니까? 결국 그림으로 그려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우리들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아홉.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 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열. 계획없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솔제니친의 딸이 서방 세계로 탈출한 뒤 인터뷰에서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 계획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되 성경에 위배되지 않게 세워야 합니다. 성경과 위배되게 계획을 세워 놓고 부득부득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데 그건 마귀에게 뜻대로 해 달라고 비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면 절대로 계획을 잘못 세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간단합니다. 빚 안지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이 “게으르지 말아라” 했다면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라” 했다면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집을 짓는데 막대기로 금 그어 놓고 집을 짓겠습니까? 건축사를 부르고 설계사를 부르겠지요. 세 시간 동안 조깅을 하는 사람이 무조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겠습니까? 얼만큼을 가서 돌아와야 세 시간 안에 돌아오는가를 계산하겠지요. 고속도로로 갈 때 우리들이 거리를 계산해서 시속 100km로 가면 소요 시간이 얼마가 걸릴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기도도 계획성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계획적으로 기도를 하니까 기도할 제목도 없고, 그냥 가서 앉아 있으니 졸리기만 한 것입니다. 계획이 있고 기도의 목표가 있으면 기도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아껴 계획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그 시간 내에 이 문제를 주님께 상의 드려야겠다’라는 계획이 있어야만 합니다. 상의드릴 문제도 없고, 무엇을 간구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기도를 드리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노트를 만들거나 기도 제목을 적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데 현재 장애물이 뭐냐, 장애물을 제거해야 되겠다.’ ‘내가 지금 이 사람하고 이렇게 붙어 있으니 기도가 안 된다. 떨어져야 된다.’ 이러한 것이 계획입니다. ‘나 혼자서는 기도가 안 된다. 힘을 합해 볼까.’ 이것이 계획입니다. 무계획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계획을 잘 세우십시오. 그래서 최소한 나의 기도 제목이 이러하니 이번에 내가 산에 올라가면 두 시간 이상 기도하겠다, 두 시간 반을 하겠다, 혹은 세 시간을 하겠다라고 계획을 세우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하나. 포괄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 17:8-16)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결국 이렇게 본다면 우리 집에서 누가 대표로 나가서 사업을 할 때, 배후에서 누군가가 손을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업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사업에서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의 특징을 가만히 보면 이 사람들은 꼭 돈이 안 되는 것만 좇아 다닙니다. 이상하지요? 아무튼 소득이 안 되는 것에만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저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게 눈을 가린 사람처럼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전체를 내려다보면서 “하나님 저쪽이 지금 몰리고 있사오니 도와 주시옵소서” 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돌아가는 상황을 포괄적으로 보고 기도드리기 위해 모세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런 포괄적인 기도가 이뤄져야 하는데, 앉으면 그냥 나 받을 것만 계속 달라고 하다가 끝나기 쉽습니다. 이기적인 기도이고, 포괄적이지도 못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적으로도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아니, 돈 안 들어가는 일에도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돈 들어가는 일에 이기심을 극복한단 말입니까. 기본적으로 기도를 통해서 인간성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열둘. 마귀와 씨름하는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 6: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 말씀의 의미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바디랭귀지를 보면 다른 것은 안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남은 10000명의 지원병 중에서 300명만 남겨두고는 모두 다 돌려보냈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엎드려 졸기도 하고, 기도하다가 비몽사몽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조느냐, 누워서 조느냐, 엎드려서 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졸다가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깨어서 기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군사로 만 명을 택하지 않으시고 300명을 택했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내가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일을 맡기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기대를 거십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타협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냥 왔다갔다하는 교인으로는 인정하시지만 지도자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셋.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 5:17-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기도하지 않게 되는 데는 몇 가지 마귀의 술책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도해라, 그러나 간절하게 기도하진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간절하게 하지 않으면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이를 알기 때문에 마귀는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지는 말라”고 유혹합니다. 기도하다가 응답이 오지 않으면 서서히 낙심되고 ‘매일 해봐야 소용없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간구할 필요성을 잃어버리고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은 태도가 다릅니다.

첫째로, 고난이 왔을 때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작은 성취보다는 오히려 고난이 더 낫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들은 급하게 간절히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간절하게 기도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를 드렸다”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비로소 성도들이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고난이 오면 간절하게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에 처해지면 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둘째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지 못하면 간절히 기도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문둥병에 걸려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미 간절하게 구해야 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제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해야 하고, 아직 못 끊고 있는 악습을 끊기 위해서도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벌써 10년째 혹은 몇 년째 응답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간절하게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제 인식을 못하는 것입니다. 거저 적당히 ‘이 정도면 되지’하고 넘어가는 태만함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넷. 사랑의 관계성을 기억하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눅 15:3-6)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8-9)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탕자의 비유도 같습니다. 형은 매일 집 나간 그 동생을 잊어버리라고 아버지께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아들을 기억하면 무엇하겠느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형제 많은 집에서 유난히 문제 일으키는 형제를 다른 형제들은 ‘좀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자녀들이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부모님께서는 문제아이기 때문에 다른 자녀들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더 안쓰러워하고 애착심을 갖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성이 바로 마음 쓰고, 안쓰럽게 생각하고, 애착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식과 부모는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곧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한 드라크마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또 그 속썩이고 집 나간 탕자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관심이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왜 기도하지 않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의 관계성의 대상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가출하는 것도 같습니다. “왜 내 요구를 안 들어 주십니까” 하면서 가출하는데, 또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가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또한 사랑의 관계성을 의심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 의심해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 자체가 사랑의 관계성이다”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악조건에 처한다 할지라도, 내 자녀가 잘못된다 할지라도, 내 사업이 일시에 망한다고 할지라도, 내 고난이 너무나 장기적이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관계성, 사랑의 줄만은 절대로 놓쳐선 안 됩니다. 사랑의 관계성은 어떤 고난을 있어도 꼭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고난당할 때 바라봐야 할 것은 고난을 볼 것이 아니라 고난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라보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졸면서 비몽사몽간에 문 앞에 외상값 받으러 온 사람 상대하듯이 하나님을 상대하니까 졸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사랑의 관계성으로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절대로 졸 수가 없지요.
우리가 기도를 쉬지 않고 더 많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성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과의 내밀한 대화, 기도는 자연히 쉬지 않고 계속되게 됩니다.

열다섯.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주로 확신을 못 얻는 이유는 기도할 때 자꾸만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개입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결론이 없고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반복해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다시 하겠습니다. 기도의 결론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욕심이 어디서 개입된 건지 깨닫게 해주십시오”라고 해서 또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자! 이거 어떻게 할까요?’ ‘제 생각엔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어떻게 원하십니까?’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자꾸 반복해서 여쭈십시오.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알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해서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의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면 어떤 사람이 나를 애먹이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와도 절친하셨습니다. 가롯 유다 때문에 전혀 불편해 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기도하다 확신을 받으면 ‘아무리 그래 봐라. 난 확신을 받았다. 아무리 당신이 나 속 썩여 봐라. 나는 최소한 언제까지는 당신에 대해 참기로 했다’ 하며 자유로움을 얻는 겁니다. 그런데 자유로움을 못 받고, 확신도 못 받으면 ‘이걸 오늘 자를까? 내일 자를까?’ 매일 갈등하는 거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큰 해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열여섯. 기도의 유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첫째 , 기도하게 되면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오순절 성령 대강림이 있기 직전, 열두 제자와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자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기도하는 그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이 충만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무리들은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또 보혜사 성령을 모내시겠다는 구주 예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몸으로 증거하였습니다.(행 2:1-13)

둘째, 하나님의 생각, 성령님의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는 순전히 인간의 의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아픈 사정을 깊이 헤아리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의 유익은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기도하지 않는 인생은 주의 능력과 권위를 덧입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의 능력과 권위를 힘입지 않고서는 절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함으로 증인도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경건한 통로인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이뤄 드리는 신령한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인생을 통해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하는 교회는 살아 역사하는 교회요, 기도하는 교회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충만해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절망한 자가 소망을 가지게 되고,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오히려 역동적인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근본 동인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다시 사도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주님 앞에, 사람 앞에 바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열일곱.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 28: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첫째로, 몸이 말을 듣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은 그렇게 위대한 주님의 일꾼이었지만 날마다 자신을 쳐서 주님의 법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쌓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바울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 6:18)라고 하였습니다. 정녕 기도는 우리의 몸을 주님의 법에 복종시키도록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몸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해야 계속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구약 당시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상번제’라고 하여 하루에 두 차례 아침 해 뜰 무렵과 저녁 해 질 무렵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세 차례, 즉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이 되면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손을 하늘 높이 들고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우리고 이렇게 기도를 생활화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으로 들어와서 내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으로 모든 결론들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5장 8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죄악된 우리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열여덟.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눅 11:1-4)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첫째로, 대화 형식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대화란 상대가 말할 때엔 듣고 안 할 때엔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 혼자만 연설하듯 강연하듯 말하는 것은 설교 내지는 강연이지 절대로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 성도님들이 산에서나 새벽 기도 때에 기도하는 걸 보면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선포를 기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상황을 사실대로 아뢰는 겁니다
내가 만약 지금 우물에 거꾸로 빠진 상태라면, 거기에 무슨 격식이 있겠으며 거기에 무슨 고상한 언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살려 달라”고 외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르신 말입니다. 
“가서 포도주가 없다고 그래라.”
저희는 보통 “포도주가 떨어졌사오니 어떻게 하셔서 이렇게 역사해 주시옵소서”라고 자신의 상황 설정을 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잘못 처리하실까 봐 그럽니까? 하지만 이것은 아주 건방진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상황을 사실대로만 아뢰고,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 제목을 미리 준비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려고 앉아 있으면 멍하니 있는 사람이 많은데 기도 제목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해가 가지요. 하루 종일 곗돈에다, 결재할 돈만 챙기니, 앉으면 돈 생각만 나지  기도 제목이 생각나겠습니까? 한 가지는 어김없이 생각나지요. 돈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넷째로, 환경을 잘 고려해서 기도 장소를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되지도 않는 말로 시끄럽게 하는데 앉아 있으면 소음 공해로 기도가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돌을 던져서 날아갈 거리만큼 따로 떨어져 기도하시다가 이르실 말씀이 있으면 오셔서 말씀하고 또 가셔서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한적한 곳에서 휴식과 기도를 겸하여 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열아홉. 기도의 순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첫째, 하나님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왜 기도해야 하는가? 이는 모두 우리들 입장에 맞춰서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을 먼저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

왜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게 되느냐 하면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 기도 제목이 계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늘 쉬지 않고 기도 생활에 충실한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그 제목이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드릴 때마다 시간이 부족해서 미처 그 제목을 다 아뢰지 못하고, 또 ‘점심때 이런 제목으로 드려야 되겠다’ 하는 기도 제목이 항상 밀려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잘 안 하는 분들은 기도 제목이 없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하여 기도를 못하게 됩니다.

둘째, 성령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무엇을 구해야 되는가 중에 하나는 우선 순위 문제이고, 또 하나는 실질적인 제목 문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우둔하다는 것을 성령께선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미처 빼놓고 못 아뢰는 제목들까지도 성경님께서는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도들이 미처 아뢰지 못한 것을 아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제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도 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기도 제목으로 무엇을 구해야 될 것인가를 안내하실 때에 하나는 우선 순위 문제를 가르쳐 주시고, 또한 실질적인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십니다.

셋째, 회개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많이 연구한 분들은 제일 위의 단계로 보통 ‘찬양을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찬양을 먼저 드리든지 회개를 먼저 하든지 그것은 개인적인 취향에 맞추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통 죄를 잔뜩 짓고 교회 나왔는데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잘 되느냐 하면 이론이 찬양이지 잘 안 됩니다. 내가 죄짓다가 심령이 답답해서 간신히 죽다 살아나왔는데 양심이 있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쉽게 찬양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꼭 순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먼저 앉아서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목욕부터 하고 더러워진 부분부터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내고 나서 “주님 이 죄인 여기 나왔습니다. 제가 이러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예수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십시오. 주님 피 공로가 아니면 제가 어디 감히 이 자리에 나와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양심에 가책이 되는 부분들을 깨끗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 같은 문제아를 이렇게 변화시켜 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저처럼 기도 안 하는 사람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수가 있습니까?”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우리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제게 하나님이 세상 중 가장 우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실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칭찬해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뭘 기도드릴까요?” 하고 기도 제목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필요는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아직 주님께로 나오지 않은 영혼들을 위해서 하는 중보 기도, 그것을 가장 원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필요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님에게 자녀가 8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가지는 자녀는 생일날 안 찾아오는 자녀거든요. 그런데 그 자녀를 위해서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믿기 시작했는데 아직 중생을 못했다거나 은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필요입니다.

넷째,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드려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원래 사탄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세상에서 교회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도 없지만, 교회만큼 공격을 많이 당하는 데도 없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를 위해서 그리고 직분자들을 위해서 은사자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열심히 기도드려서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기도로 타인을 위해 선행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선행도 일체 베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돈이 안 들어가는 것인데 돈이 안 드는 기도를 먼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이여, 내가 구제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고넬료처럼 구제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이것이 다 위선이란 말입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풀기 가장 좋은 것이 기도입니다. 그 차원을 먼저 이뤄내지 못하면 구제도 어렵고, 그런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전도를 해도 상대방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명에와 체면을 위해서 전도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의지적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하려면 1년에 몇 번 못합니다. 먼저 의지적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끝으로 시간이 남을 때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곧 기도함에 있어서도 실천으로 옮겨서 기도를 해봐야 이게 정말 영향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건 좀 어렵겠는데.’ 안 썰어 보고 내 맘대로 기도를 하니까 생전 기도에 진전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가 느는 방법을 기도를 실질적으로 실천해 보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기도를 드릴 때 재미있고, 더 의욕 있고, 보람있고, 기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를 기쁘게 해선 조금밖에 기쁘지 못합니다. 정말 기쁜 건 내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꼭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은 성령님의 안내를 받아서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스물.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자연의 이치는 영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영의 소욕을 좇아 자행 자지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자는 결국 불의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사망을 열매로 거둘 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바울 사도는 가르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어 풍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없어서 받지 못하고 궁색하게 살아갑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역으로 ‘적게 기도하면 적게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스물하나. 기도한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나겠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렘 33:1-3)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자 그 부군이 그 돈을 다음날까지 자신이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그 집사님에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에게 다음날 4000만원을 주면서 “거 젊은 목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돈을 다시 갚겠어. 그러니까 그냥 헌금하는 것으로 하자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에게 보이리라”(렘 33:4)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성취시키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우리를 어려운 환경에서 건져 주십니다. 왜냐하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곧 ‘건져내신다’는 뜻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자, 건져내시는 분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짖으면 불신 가족들을, 정신적인 고통에 있는 자들을, 죄책감에 빠져 있는 자들을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대가를 치러야만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