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

하나님아들 2021. 9. 5. 23:29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

 

기도와 단순성

기도는 단순성이 생명입니다. 우선적으로 사상과 생각을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기도의 열정을 일으키는데는 많은 복잡한 교훈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구하면 얻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한 가지 약속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나치게 이론적인 기도 개념은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사념(邪念)을 불러 기도에의 열정을 사그라뜨립니다. 중세 교회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기도를 강조하였음에도 진정한 기도가 부재했던 것은 기도를 신비적이고 스콜라적인 사변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 형식의 단순성 역시 기도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수적입니다. 기도를 단순한 요청으로 이해할 때 기도의 활력이 살아나나 지나치게 절차와 형식에 매일 때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기도의 단순성을 역설하는 스펄젼의 비유는 귀기우릴만 합니다. "우리는 요점을 감추고 변죽을 울릴 필요도 없고 주님의 손에 간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불투명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미사여구를 가려 쓰려는 노력도 적합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바를 가장 단순하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구하자.. 마치 돈이 필요할 때 수표를 가지고 은행에 뛰어가면 현금으로 바꾸어 주듯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믿고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오늘 기도에 있어서 간구의 단순성과 투박성이 제하여지므로, 기도가 너무 매끄럽고 세련된 철학행위가 되었고, 영적 마찰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마져 그 기름에 미끄러져 거의 실족 당할 뻔한 처지에 빠져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어떤 특별하고, 추가적인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만족하는 반(反)하나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고백에서처럼, 성경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규정했습니다(삼상12:23). 토마스 맨톤은 시편을 인용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을 악한 자의 특징"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라고까지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마귀가 인간을 미혹시킨 가장 악랄한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만족할 수 있고, 인간의 잠재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만심은 인간에게서 기도를 거두어 갔습니다. 특히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오면서 그것은 더욱 심화됐습니다.


유명한 '영적 전투'의 저자 ‘티모씨 워너’는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 있어서 사단의 주된 전술은 바로 그 시초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속이는 것이었다. 인간 안에 있는 놀라운 잠재력은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능력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호와 외에 다른 합법적인 힘의 근원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만족하면서 자기 능력을 신뢰하는 순간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기도할 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기도의 워밍업은 필요한가?

우리는 흔히 기도의 문이 열리니 안 열리니 하면서 기도를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포장하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란 특별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기도를 복잡하고 사변적인 어떤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소위 '기도의 영'에 사로잡히기 위해 무익한 소모전을 펼치게 만듭니다. 실제로 로마교회는 그들의 영성훈련에서 기도를 조명, 정화, 합일로 나누어, 기도를 어떤 단계나 절차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각기 도달 단계에 상응하는 영적 지위(The hierarchy)를 부여했습니다. 예컨대 기도가 조명 단계에 진입하면 초보적인 신자로, 합일 단계에 도달하면 거의 성자적인 부류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같은 것은 심리주의적이고, 로마교 특유의 계급주의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에서처럼 개신교의 기도 원리는 '오직 믿음'에 의존합니다. 이는 종교개혁주의 신앙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인간의 전적 타락'교리에 기인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최적의 상태나 최악의 상태나 다 거기서 거기일 뿐입니다. 아무리 최적의 마음 상태에서 기도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기도의 효력이나 응답의 조건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기도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상태 따위를 크게 괘념하지 않으며, 최상의 마음 상태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 경험에서도 쉽게 확인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기도하는 듯한 느낌과 영적인 혼돈감을 느끼나, 간구가 열렬해지면서 어느새 기도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충분한 워밍업을 거친 것 못지않은 진한 교감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에 몰입하기 위해 마음 언저리를 배회하며 탐색전을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도자를 사념과 공상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자마자 즉시 간구에 돌입하십시오.

그래도 꼭 기도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누가 강변한다면, 그것은 '결핍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간절한 필요에 사로잡힌 자에겐 기도가 되고 안 되고 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시키던 말던, 어떤 형식이나 이론에 구애됨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게 됩니다. 칼빈이 기도를 기술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를 거부했던 것도 기도를 이같이 필요에 의한 간구로 본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하기에 최적의 심리 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이런 영적 환경을 조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혁

자들까지도 공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지나치게 자신의 심령상태나 느낌 등에 좌우되는 것은 신앙적이기보다는 자기 의존적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기도의 제일 장애물은 기도를 시작하는데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 자체가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니이젤의 지적처럼 우리는 기도를 고무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성육의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보증인이 되셨다는 이유로 우리의 음성을 신에게 높이 옮길 수(153) 있어야" 합니다.

기도할 마음이 없는 중에 드린 기도가 응답되고, 미심쩍고 희미한 기도가 응답되는 은총의 신학을 강조하는 스펄젼의 말 역시 어떤 심리상태하에서도 우리를 기도하도록 고무합니다. 스펄젼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여 기도에 부적합한 마음상태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공사장 감독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다. 만일 기도할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은밀히 기도 할 기회가 없다면 그냥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그러면 곧 당신은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칼빈 역시 "불을 끄지않기 위해 자주 연료를 준비해 놓듯이"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나, 설사 그런 준비된 감정이 못된 경우에도 감정을 무시하고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기도와 확신

은혜신학으로 대변되는 개혁주의신학은 기도 응답의 원천 역시 "오직 은혜"라고 말합니다. 인격적 결함을 가진 자의 의심투성이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내리시는 응답은 실로 그 은혜의 위대하심을 찬탄케 합니다. 다음의 스펄젼의 경험적 고백은 동일한 연약성을 지닌 동료 인간들을 격려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불신앙적입니까! 여러분과 나는 시온좌로 가서 하나님께 복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오늘 아침,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신실한 기도라 할지라도 거기에 얼마만한 믿음이들어 있는지요? 아무리 잘 믿는 때라도 우리의 신뢰가 너무나 적음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장 크게 자랐을 때라도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의심으로 가득 차있는지요? 결코 거부하지 않으시고 한번도 자신의 말을 어기거나 저버린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그토록 자주 의심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있습니까? 이상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은혜'라고 부르짖으면서도, 확신을 기도응답의 조건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막11:24, 약1:6) 또한 개혁주의 신앙의 특색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기도생활에서 확신이라는 주제에 관한 한 특별히 확고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의 확신 가운데 드려진 기도만이 성령의 능력을 행할 것입니다. 칼빈은 단호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효과 있게 기도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는다는 확신을 양손에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그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고, 모든 성인들이 그들의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담대한 믿음에서 잉태되고 또한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소망에 기초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은혜와 확신으로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확신을 단지 인간 지성의 산물이나 덕성의 열매로 간주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확신은 로마교의 비판처럼 인간의 분수를 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겸비함일 뿐입니다. 칼빈 역시 확신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 혹은 그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는 겸손으로 이해합니다. "자기낮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기도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막 1:24)...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설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요청은 하나도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대언자와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개혁자들의 확신은 단순한 확신을 넘어 뻔뻔함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참된 겸손에 의해서 낙심되어지고 굴복되어졌을 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의해서 기도하도록 격려받는다. 칼빈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유일한 기도는 신앙의 뻔뻔함에서 나오는 것이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반해 로마교에는 확신이라는 것이 없을뿐더러 확신을 이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확신이란 불완전한 죄인에겐 분수를 잊은 교만이었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인식론을 좇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성을 성경권위의 최종 판단자로 삼을만큼 인간 이성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 이같은 로마교의 이중성은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영적인 기도라고 하면, 소위 영험한 신비주의적인 기도 혹은 '관상 기도'같은 것을 떠 올리나 사실은 믿음의 기도만이 영적인 기도입니다. 이는 기독교는 시종 믿음으로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역시 신령한 일은 믿는 일이었고, 신령한 사람은 곧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맨톤 역시 영적인 기도를 믿음의 기도로 말합니다". 루터는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는 야고보서 5장6절을 해석하면서, 믿음으로만 한다면 기도는 강력한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약속을 통하여 스스로를 거기 묶어두셨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끈질긴 기도

성경은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끈기있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밤중에 떡덩이를 빌리러 온 친구의 이야기, 가나안 여인의 간구 등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밤중에 떡덩이를 빌리러 온 친구의 이야기 중에서 "벗됨을 인하여가 아니라 강청함 때문에" 들어준다고 한 구절은, 기도의 응답조건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끈질기게 요구하는 강청에 두는 듯 한 인상까지 줍니다. 청교도 토마스 맨톤은 기도를 향으로 비유하면서(시 141:2), "향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좋은 향기가 나지 않듯이 열심이 없는 기도는 불을 붙이지 않은 향과 같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끈기있는 기도의 모범을 그 누구에게서보다도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특히 예수께서 기도하신 장소가 겟세마네로 지칭된 것은 그 같은 그의 기도와 걸맞아 보입니다. '기름 짜는 틀'(겟세마네)로 불리운 그곳의 이름처럼 그의 기도는 기름을 짜듯, 열렬함과 끈기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토마스 맨톤에 의하면 간절함은 기도의 날개로서 기도를 하늘로 날아 올라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 이 많다'(약5: 16)는 말은 보다 정확히는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포사이드는 끈질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교통의 보증으로 말합니다. "기도에서 끈질김을 버리고, 끈질김을 독백이나 혹은 하나님과의 대화의 정도까지로 약화시키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그를 이기려는 열망을 버려면... 드디어 기도는 그 실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즐겨 말하는 개혁주의자들 역시 "구하지 아니하면 얻지 못한다"는 원리를 동일하게 수용하며, 기도의 수고와 노력을 당연시합니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단순히 겨루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겨루는 것이 라고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에서 이것을 읽을 수 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바울도 그의 청중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 2)고 강조했다. 그는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을 '기도에 열심으로 애쓰는' 사람으로 묘사는데(골4:2), 이것의 문자적인 번역은 '기도에 너희이다‘ ”.

도날드 블레쉬는 기도를 비유하면서 다만 말로써 하는 넋두리가 아닌 야곱이 했던 것과 같은 힘으로 하는 씨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축복하지 아니하고는 못가게 하는 씨름이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과의 씨름이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자기 몸이 땀으로 젖을 때까지 눈 속에서 기도했으며, 인도의 장로교 선교사였던 존 하이드는 '아버지시여, 이 영혼들을 제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신자는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 같습니다.

기도의 원천은 하나님의 자비

구원, 죄사함, 치유 등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시여가 그렇듯이, 기도 응답 역시 그의 자비에 의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닫혀진다면 아무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히 기도할 담력을 가짐은 그의 자비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멸시받던 세리로 하여금 감히 성전에 올라 기도하도록 용기를 갖게 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에의 호소에 다름 아닙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때, 그의 기도도 중단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포함에 누구에게 기도하도록 격려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일깨워 주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 역시 그의 강요에서 죄인이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우선적인 지식을 그의 자비하심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그가 인자하시며 오래 참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참아주시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우리에게 인애하시다는 신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인애와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를 알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것을 안들 그 지식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티모디 죠지 역시 우리 기도에의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햇습니다. “우리 소망의 실질적인 토대는 우리의 기도들이 방향 지워지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모든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으로서의 기도

소위 자기 동기적인 필을 받지 않으면 미동도 않는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결코 사람들을 움직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라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를 고무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 동기에서 기도의 자극들을 받을 수 있지만 만일 "기도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사실에 고무받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스펄젼의 말대로, 우리는 기도하도록 권고, 권면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황금의 입으로 불려진, 요한 크리소스톰 역시 "왜 기도하십니까? 주님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으로 고무 받습니다. 기도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전제로 한 택자의 특권입니다(눅18장). 즉 어딘 가에서 들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대상을 향해, 그것도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 모를 불안정한 인격자에 대한 허공의 외침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를 향해 신뢰를 둔 당당한 요구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기도는 원시적인 기도와는 달리 필요와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며, 절망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확신 속에서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약속들은 우리에게 구할 바를 가르쳐 주며, 또한 간구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약속으로 우리에게 기꺼이 빚진 자가 되어 주시고 있음을 배우도록 하자'고 했으며, 참되고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에서 생깁니다고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특권으로서의 기도

우리는 종종 기도를 무능한 노약자들이나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쯤으로 생각하면서 '할일 없으면 기도나 할것이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유능하고 패기발랄한 젊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깁니다. 성경은 기도를 결코 그런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할 일 없는 자의 소일거리도 아니며, 기도는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는 애처러운 몸짓이 아닙니다. 기도는 유무능자를 불문하고 더 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구하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보듯이 과부만 기도한 것이 아니고, 위대한 장군들과 왕들과 지혜자들도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에밀 브루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중 기도만큼 매력적이고 또 겸손한 것은 없다. 가장 매력적이란 것은 기도가 모든 하늘의 하늘도 감히 포괄할 수 없는 전능하신 이를 대화로 붙잡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자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헛된 것이 아니라고 신뢰할 수 있음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것을 바로 이해한다면 그는 너무 놀라 현기증까지 생길 수 있다" 고 했습니다. 무명의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저자는 "기도란 우리의 최상의 특권이며, 가장 중한 책임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주신 가장 위대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기도는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탁월하며 가장 장엄한 행위이다... 기도란 바로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이다. 전심 전력을 다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상 전투에 있어서 최후, 최대의 업적이다" 라고 했습니다.

행위로서의 기도

기도는 대개 정적(靜的)인 일로 이해되고, 그러한 정적인 개념이 기도를 관념이나 내면의식으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부부의 종교들은 이런 정적인 기도 개념을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시작도 끝도 없이 흥얼흥얼하는 불교도들의 염불이 기도의 상징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방정교회의 ‘예수기도’와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라는 수도원적 기도 개념이 일조했습니다.

기독교적인 기도 개념은 시작과 마침이 분명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과 마침이 분명하셨습니다(눅11:1). 야곱의 얍복강에서 한 기도의 씨름 역시 기도가 내면의 관념적인 짓거리가 아닌 분명한 행위임을 시사해줍니다. 기도를 관념화하는 데 대한 다음의 비판은 음미해 볼 만합니다. “첫째는, 기도가 행위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 야 하지만, 기도는 마음가짐 이상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기도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시작과 끝의 행위셨다”

 

댓글:

기도(祈禱, prayer)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형태(잠15:8;대하7:14;엡6:18;약5:15;딤전2:1;골4:2).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 하는 것이다(마6:9-15,7:7,엡6:18).

①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영적 호흡이다(마21:13;살전5;17) 
②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것이다(요일1:7;출33:11;요15:14,15) 
③ 영적 전쟁이며 동시에 자기 포기다(시109:4,17-19;빌3:8;시22:6) 
④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믿음의 부르짖음이다(시39:12,61:1;눅18:7) 
⑤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체험하는 길이다(마6;8;사65:24;엡3:20) 
⑥ 문제 해결의 열쇠다(렘33;3).

  • 기도를 호흡에 비유하는 이유

    ① 호흡은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도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② 호흡은 잠시라도 중단되면 즉시 활동과 생명에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해야 하며(엡6:18;골4:2),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다(살전5:17). 

    ③ 호흡은 우리 몸에서 생긴 이산화탄소를 내보내고, 신선한 산소를 몸에 공급하는 일이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깊이 기도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다보면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영적인 이산화탄소(불안,나쁜 생각, 부정, 염려..)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을 회복하고 새 힘을 주는 영적인 산소(믿음, 소망, 사랑, 용서, 신뢰...)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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