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 신학의 맥
- 칼빈, 녹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박형룡의 Sola Scriptura의 원리에 따른 기독론적 교회론 중심으로
1. 서론
장로교는 성경의 교회 정체를 총괄하는 개념이다. 장로교는 분명 역사적 교회 형태를 지시하나 무엇보다도 성경-역사적 교회의 역사상 구현으로서의 당위성을 갖는다. 다음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장로교를 정의하고 있다.
장로교가 믿고 가르치는 교리들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 교사들이 마련한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경이 가장 열렬하게 주장하는 교리들을 가장 현저하게 부각시키면서 그것 자체가 가르치는 것들을 믿고 가르친다. 구약 시대 이후 사도 바울의 족적을 따르는 가장 위대한 교리적 권위는 354년에 태어나 430년에 사망한 아프리카 히포의 장로 혹은 목사 어거스틴 그리고 1509년에 태어나 1564년에 사망한 칼빈에게 돌려진다.
여기에서 보듯이 장로교는 “성경적인” 모든 것을 함의하는 일종의 포괄적 지시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장로교는 본질상 역사적 혹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성경적”이라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장로교는 분명 역사적 교회이나 그것은 우선 성경-역사적 교회이다. 그것은 성경-역사적 교회로 역사상 존재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교회의 성경적 당위성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경-역사적 교회를 가장 심오하게 신학적으로 개진한 사람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당위성을 처음으로 역사상 구현한 사람은 존 녹스였다. 녹스가 개혁의 나팔수를 자처하기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에는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틴테일이 번역한 영어 성경이 루터의 가르침에 비추어 읽혀지고 있었다. 녹스는 그러한 시대적 격랑을 칼빈의 신학을 빌어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추스른 것이다.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 자체를 강조했다면, 칼빈은 그 복음의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의 은총이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 가운데 계속 부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녹스는 이러한 칼빈의 언약신학이 교회 가운데 구현됨을 보여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장로교의 수립은 종교개혁의 제 3기적 특성을 갖는다.
필자는 장로교의 가장 고유한 특성을 기독론적 교회론에서 찾고자 한다. 장로교는 역사상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사실과 그가 교회의 머리시라는 사실에 뚜렷이 기초한다. 전자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구원과 더욱 관련되며 후자는 교회를 통한 성도의 다스림과 더욱 관련된다. 특히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에서 이 양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갖는 이러한 특징은 그것이 칼빈의 신학을 역사적으로 구현했다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의 근간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표본이 되는 표준 문서들은 스코틀랜드 교회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한국 장로교는 여러 교단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공히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의 전통에 서 있다. 본고는 한국 장로교 총회 100주년을 맞이해서 한국 장로교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이러한 뜻을 고려하며 먼저 칼빈의 기독론적 교회론을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서 일별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이를 어떻게 계승하고 역사상 구현했는지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살핀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하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기독론적 교회론을 고찰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서 장로교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후 이를 죽산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비교해서 고찰한다.
2. 칼빈의 기독론적 교회론
한국 장로교 신학의 정체성은 그 기원이 대체로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적이고 개혁적인 신앙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에서 일어난 신학 논쟁을 “20세기 초의 미국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의 재판”이라고 보기까지도 한다. 죽산은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논쟁이 어떤 측면에서 장로교적 특성을 드러내었는가? 이를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칼빈 신학의 장로교적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교회정치의 여러 가지 형태를 논함에 있어서 장로정치는 그것이 교인들의 참여와 함께 당회, 노회, 총회의 위계질서를 구비한다는 점에서 특정된다. 참여와 질서는 교회정치의 황금률이라고 할 것이다. 제네바의 칼빈은 이를 극적으로 조화롭게 추구하였다. 그의 대작 기독교강요에서는 이를 주도면밀하게 심층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론을 전개하면서 위격적 연합을 통한 신인양성의 중보를 강조하였다.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분의 다 이루신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고 여겨서 받아주신다. 그러므로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개혁주의의 언약신학으로 전개되었다.
칼빈의 신학이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장로교—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교리 즉 예정론이 부각되었다. 그리스도와 예정론 이 두 교리가 칼빈이 교회의 본질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선택된 백성들이 그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예정론 이는 이후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현격하게 보여주는 두 교리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가해 주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의 공동체(coetus) 혹은 연합체(societas)를 이룬다.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 공통의 값으로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이 값의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 즉 대속(代贖)이 창세전에 작정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나타난 주권적인 사랑과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 칼빈은 이 두 가지를 들어서 자신의 속죄론을 전개했다. 칼빈은 속죄론을 다루면서 아들의 순종을 통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시종 추구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언약신학은 이러한 사랑이 통시적으로 성취되고 공시적으로 적용되는 경륜 혹은 질서에 다르지 않다.
칼빈은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라는 두 축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고리로 연결될 때 교회는 참되다고 보았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 주신 은혜와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성도는 말씀을 바로 듣고 성례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라간다. 이를 위하여 “건전하고 온전한 교리”가 교회에 보존되어야 한다.
칼빈은 교회의 정치를 그 본질과 연결시켜 다룬다. 그는 교회가 성도들의 참여를 통하여서 하나의 몸(corpus unum), 하나의 연합체(societas una)로서 서게 되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도를 함께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그들이 다음 “근본조항들(articuli fundamentales)”에 대한 고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 그리고 이것들에 버금가는 교리들.”
이러한 교리적 규범은 단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제한하는 경계선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종교적 관용과 형제적 화합의 넓은 폭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고백은 단지 명문(明文)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감독”이 되신다. 친히 목자로서 양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사죄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교회에 부여된 “열쇠의 권한(clavium potestas)”은 복음의 능력과 관계되는 것이지 직분을 맡은 자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보자의 자리에 서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 교회를 보존, 통치하신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사신(使臣)”을 통하여서 뜻을 전하고 그것을 듣게 함으로 “겸손에 이르는 훈련”을 받고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데 있다. 교회의 사역은 마치 “힘줄”과 같아서 그 직제(職制)와 직분(職分)”은 교회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칼빈은 성도의 교회 참여를 단지 부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함께 자라가는 필수적인 의무와 같이 바라본다.
교회의 다양한 직분은 하나님의 소명에 부합해야 하므로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감독이다. 그는 감독자이기 전에 교회의 법을 제정하신 분이다. 교회의 구조는 그분의 중보 양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 혹은 universalis)는 있으나 “보편적 감독(episcopus universalis)”은 있을 수 없다.
칼빈은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에서 찾는다. 그것은 비가시적 교회를 뜻하지만 또한 가시적 교회에도 해당한다. 왜냐하면 가시적 교회의 성도들을 묶는 끈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즉 영원한 선택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으므로 그 분의 인격 가운데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이러한 말씀의 조명(illuminatio)과 감화(persuasio)가 교회의 연합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칼빈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auctoritas)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는 오직 그 저자(auctor)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성도의 교회의 삶이 역동적인 것은 구속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로서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말씀이 객관적으로 확실한 진리라는 사실과 그것이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확신하게 된다. 칼빈의 교회론은 이렇듯 기독론적 기원을 가지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신앙과 삶의 규율이 된다는 sola Scriptura 원리로 개진된다.
3. 장로교의 형성: 녹스의 신학과 장로교 신조들
3.1. 녹스의 예정론
녹스를 전문 신학자라고 보기에는 난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예정론에 관한 책은 그의 신학적 입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수작이다. 이 책은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고 펠라기우스적인 입장에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던 카스텔리옹(Sebastian Castellion)을 추종하는 무리에 의해서 저술된 어느 글에 대한 반박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녹스는 예정론이 하나님의 교회에 필수적이며 이것이 없다면 참 신앙이 교육될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겸손도 없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을 찬미하고 영광을 올리는데 이를 수도 없다고 보았다. 녹스는 예정론이 신앙을 가르치는데 필수적인 이유는 오직 그것을 통하여서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과 경륜”에 있다. 하나님은 “가슴” 속에 품은 기뻐하신 뜻을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경륜” 가운데서 성도들을 택했다. 녹스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어구를 숱하게 반복한다.
하나님은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단지 자의적인 혹은 변덕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약속의 “진리”와 성취의 “은혜”가 충만하다(요 1:14, 17).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조건을 찾으시며 약속하시나 우리의 자리에서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조건을 찾기 위하여 명령하시나 우리의 자리에서 이루신다.
예정론은 운명에 관한 논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다루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분의 속성과 배치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들의 완전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비 가운데 무조건 긍휼을 베푸시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죄는 무조건적이지 않다. 유기된 자들도 만세전에 분명 그렇게 정해졌다. 그러나 그 파멸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는다. “그들의 파멸의 정당한 원인과 질료(the just cause and mater[matter] of their perdition)”를 자신들 가운데 품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분의 어떠하심에 부합한다. 하나님은 진리 가운데서만 사랑하신다. 죄에는 사망의 형벌이 따른다. 스스로 죄의 값을 치르게 되면 그 순간 존재가 멸절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대속의 방식으로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그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으로서 죄의 값을 치르되 마땅한 무름의 자리에서 그리해야 했다. 즉 대속은 하나님이시자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죄의 값을 치르셔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시는 방식 밖에 없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주셨다. 아들이 우리의 자리에서 죄의 값인 사망의 형벌을 치르시고 의의 값인 순종을 다 행하셨다. 그러므로 예정은 그리스도 자신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지체들 사이의 결합과 연합(the conjunction and union betwixt[between] Christ Jesus and his membres[members])”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세전의 작정은 곧 교회의 대한 작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예정이다. 녹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는 죄를 묻되 용서하시는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분의 진노보다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유기는 조건적이지만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유기는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poena debita)”이지만, 선택은 죄를 속하고 의를 전가하는 “무조건적 은총(gratia immerita)”이다. 녹스는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하는 의지를 구원의 “이차적 원인(causa propinqua)”이라고 여기는 것조차 거부한다. 왜냐하면 부르시고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믿음과 순종은 선택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열매라고 보기 때문이다.
녹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하게 수립되는 것(the perfect building)”이 만세전의 선택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녹스는 선택과 유기의 이중적 예정(praedestinatio duplex)을 전개함에 있어서 타락전 예정설에 서 있다. 이는 칼빈과 베자의 영향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미리 타락을 예지하시고 타락한 인류의 일부를 은총으로 선택하시고 일부는 영원한 형벌에 두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며 모든 것이 가하나 불의한 것을 용납하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죄에는 형벌을 정하셨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아들이 공로로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뿐만 아니라 유기도 그 원인을 단순히 인과적 “결정(ordinance)”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경륜(eternal counsell[counsel]”에서 찾아야 한다.
유기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선택과 반대된다. 그러나 유기가 선택과 반대된다고 해서 선택을 무조건적 은혜로 여기듯이 유기를 무조건적 시벌(施罰)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선택은 적극적으로 “행하시는 것(agentem)”이지만 유기는 마땅한 형벌을 “당하는 것(patientem)”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예정은 구원의 공로를 인간의 선행에서 찾는 펠라기우스의 입장과는 배치된다.
녹스의 예정론은 칼빈의 신학에 정초해 있다. 녹스는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경륜은 오직 그 분의 어떠하심과 뜻의 비밀에서만 추구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칼빈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뜻이 선택뿐만 아니라 유기의 “원인이고 질료(the cause and the mater[matter])”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뜻의 경륜(the counsell[counsel] of God’s will)”은 칼빈의 후계자 베자가 카스텔리옹을 비판하면서 이중 예정론을 변증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녹스는 베자가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 가운데 작용하는 효과적인 능력(an effectual and working strength in all things)”이라고 한 점에 주목하였다. 녹스는 특히 이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심오하게 전개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언의 조상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경우에는 이러한 예정론의 주권 사상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고 항변한다.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제3의 어떤 존재였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대리적 무름을 행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참 하나님도 아니기 때문에 마땅한 만세전 삼위 하나님의 예정 교리가 원천적으로 거부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녹스의 예정론의 핵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를 이루고 그것은 오직 그 분 안에서 영원하다는 사실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오셔서 죽음으로 그 의를 다 이루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그 분의 영원한 지혜라는 사실이 역사상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 뜻은 죄를 지은 아담에게도 계시되었다(창 3:15). 그리고 이후에는 다윗의 언약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녹스는 예정론으로부터 교회의 본질로 나아간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교회를 “여인의 후손(the seede[seed] of the woman) 아래에 있는 선택된 자들”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유기된 자들을 뱀의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악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선택과 관련하여 녹스는 세 가지를 결론적으로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주신 동일한 영광이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주어진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지체들의 결합과 연합은 너무나 견고하고 친밀해서 그들은 하나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셋째,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택함 받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3.2. 녹스의 칼빈주의 그리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녹스의 예정론에 전개된 사상은 그 자신이 기초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분명히 표명되었다. 교회는 “보편적(catholike[catholic])”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이며, 그리스도는 동일한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생명도 없고 영원한 복락도 없다는 점이 천명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은 비가시적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지며 택함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녹스의 예정론에서와 같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아담으로부터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에 이르기 까지 연속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성도의 선택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리스도가 신성으로만은 죽음을 당할 수 없고 인성으로만은 그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신인양성의 중보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 형제, 목자, 그리고 영혼의 감독자가 되신다고 하였다. 이는 칼빈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다름없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이방의 무리가 “사악한 모임(pestilent Synagoge)”으로서 “하나님의 교회(the Kirk[Church] of God)”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성경의 많은 예를 통하여 말하는데 이 역시 녹스의 예정론에서 분명히 개진된 부분이다.
1960년 에든버러 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행한 제임스 매큐엔(James S. McEwen) 교수의 코로알 강좌(Croall Lectures)는 녹스의 종교개혁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밝힌 드문 글 중에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서 우리는 녹스의 신학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녹스는 성경은 스스로 말하고 자증하나 성령의 역사로 사람의 경험 가운데 말씀하는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녹스는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as)”을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에서 찾는다. 말씀을 말씀 자체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녹스는 이러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신학자, 설교자, 주석자, 전파자 등의 이름으로 그 경험을 나누는 일을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았다.
녹스의 예정론은 이러한 성경관에 정초해 있다. 녹스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 논리와 방법에 있어서 추종하였다. 녹스는 예정론의 핵심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주권적인 작정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신앙과 삶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교리라는 측면을 줄곧 강조하였다. 성경 전체가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데 그 감화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관적 확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화가 교회를 형성하는 성도의 고백이 됨은 물론이다. 이는 칼빈이 말씀의 “객관적 확실성”과 더불어 성령의 “주관적 확신”을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성도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이라는 믿음으로부터 기인한다.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다. 오직 이중예정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섭리로 이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공로가 교회론의 본질적 담론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이 부분 역시 칼빈의 영향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녹스는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서 구속사와 구원론 전반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녹스는 이러한 예정론을 어느 나라와 민족을 이끄는 하나님의 일반적이며 우주적인 섭리로 확장해서 보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녹스가 교회를 향한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식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성경적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당대 가장 첨예한 논쟁점이 되었던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녹스의 입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는 성찬이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는 쯔빙글리의 입장이나 루터란의 공재설도 부정하였다. 녹스는 성찬의 신비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가운데서 찾았다. 그리고 성찬에 있어서 주님의 임재의 영적인 권능이 언약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찬에 있어서의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뿐만 아니라 성도 서로간의 연합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녹스의 성찬론은 칼빈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녹스의 신학적 입장은 장로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부각시켜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듣는 말씀은 신랑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다. 이 교회는 그 본질이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있으나 가시적인 유형적 연합을 추구한다. 특히 그것은 교회의 총회 가운데 구현된다. 이렇듯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에 대한 역동적 이해가 녹스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나타나는 뚜렷한 장로교적 특성이다.
3.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로 신앙을 철저하게 구현한 칼빈의 신앙과 신학이 충실하게 계승되었다.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가 역동적으로 다루어졌으며 구원론에 있어서 구원서정과 성도의 삶이 함께 강조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를 통한 중보로 인한 의의 전가와 이로 말미암은 성도의 거룩한 삶이 강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근저에는 칼빈의 신학과 이에 바탕을 둔 언약신학이 흐른다. 그리하여서 특별계시와 함께 일반계시가 강조되고, 은혜언약이 구속사의 맥으로 제시되고, 율법의 규범적 용법이 부각되며,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책임이 함께 논의된다. 이는 가히 성경의 진리에 대한 최고의 고백서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특성으로부터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유기적 구조를 천명한다.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비가시적이나 지상의 가시적 교회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받고 한 몸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보편적 교회는 비가시적이거나 가시적이라고 하였다(25.1-4).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의 감화를 받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거룩함이 있으나 여전히 완전하지는 않다(25.5).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며(25.6), 성도는 그분 안에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말씀의 교제를 나눈다. 교회의 직분의 본질은 이러한 교제와 연합에 있다(26.1-2). 성도의 이러한 교제는 그리스도가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심으로 부여하신 복음의 은혜를 나누는 것으로서 그의 의의 전가에 따른 것이지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신격을 취하는 신화(神化)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26.3).
교회의 직분자들이 말씀을 권고하고 권징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전하게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것을 “열쇠의 권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그들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의미이지 그들에게 어떤 공로나 자질을 부여한다는 것이 아니다(30.1-2). 권징은 그리스도의 언약에 따른 절대적인 은혜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30.3-4). 여기에서 교회의 권한을 교회의 본질 가운데서 이해하고 있는 신앙고백서의 특징을 인식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대회와 협의회의 치리의 필요성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31.1-3).
교회의 이러한 권세는 고유하므로 시민국가의 권세와는 구별된다. 교회는 어떤 기관이나 회(會)의 이름으로도 국가의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31.4). 국가 위정자도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23.3). 다만 위정자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므로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성도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23.1-2,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신학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사상과 부합한다. 그 기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구속의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 성도를 구원하시고 그들의 거룩한 삶을 주장하신다는 언약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율법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 그리하여 죄의 값을 다 치르시고 그 의로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8.1).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 그 믿음은 성도의 삶에 열매를 맺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11.1-3). 칭의는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와 함께 인쳐지며 성화는 그 영으로 성도가 자라가는 것이다(13.3).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된 율법을 은혜 가운데 지키는 삶을 산다(19.6-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이제 우리 안에 임하여 계속적으로 교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성도가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롬 8:9)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차 말한다. 주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을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기한 형벌을 치르셨다. 그리하여 죄사함과 함께 의를 전가해 주시는 은혜언약의 머리가 되셨다. 새로운 시대에 역사하는 구원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구속사적-구원론적 은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7.1-5).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주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도의 구원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영”은 곧 진리의 영이다. 칼빈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영의 고리로 말씀의 객관적 확실성과 주관적 감화가 연결된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서장에 할애된 성경론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를 전제하는 개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성경이 자증하고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은(1.5)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1.4) 성령의 내적인 조명으로 계시되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성경론의 근저에는 구원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이른다는 칼빈의 이해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교회의 사역은 이러한 부요함을 나눔으로 서로 함께 자라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정은 그리스도 자신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지체들 사이의 결합과 연합” 즉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역설한 녹스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전개된 이중 예정론(3.3)은 단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교회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측면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강조한 장로교 신학의 본질을 제시한다.
4. 박형룡의 기독론적 교회 이해
죽산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제목의 한 논문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정의에 비추어 한국 장로교 신학을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부르며 그 특징으로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믿음,” “하나님 주권에의 확신,”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성실한 실천,” “천년기전 재림론”을 들었다.
죽산은 여기서 장로교 신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수용자세 혹은 삶의 영향에 치중하고 있을 뿐, 우리의 관심사인 기독론적 교회 이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면 죽산은 장로교 신학의 본질을 단지 이렇듯 현상적으로만 파악했던 것인가? 죽산과 함께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두 축으로 회자되는 정암 박윤선의 교회론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인 교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수종드는 회중”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교회론을 전개했다면 죽산은 어떠했는가?
죽산은 장로교를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정의하며 청교도적 삶과 개혁주의 신앙을 아울렀는데, 그는 이러한 특성을 함의하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여겼다. 죽산은 우리가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라고 부르는 돌트 신경의 가르침은 모두 예정론에 정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7문과 신앙고백서 제3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도 제한도 없으며 오직 그 분의 주권적 작정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이 “보편적 무형교회”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대속을 전제한다. 선택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을 백성을 정하심이다. 그 백성이 “주의 교회,” “그리스도의 신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1조를 정확히 반영하는 입장이다.
“무형한 공동 즉 보편의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피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는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며 충만이다.”
교회가 본질상 “신도의 교통(communio fidelium 혹은 sanctorum)”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한 분 그리스도의 동일한 의를 공유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교회는 본질상 “신도의 교통”으로서 “신도의 모(母)체(mater fidelium)”가 된다. 로마 가톨릭은 이를 역으로 다루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죽산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교회를 “피택자들의 집단(coetus electorum)”으로 보는 시각에서 뚜렷해진다. 성도들의 연결 고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은총에 있다. 교회의 근간은 성도의 회개에 앞서 소명이며 믿음에 앞서 중생에 있다. 성도들은 공동의 노력체가 아니라 공동으로 부름 받은 소명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형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말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유형 교회의 보편성을 차치하는 것은 아니다. 죽산은 유형교회의 필연성을 하나님의 뜻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무교회주의자들을 이단시한다. 죽산은 유형 교회가 “조직체”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지상의 교회는 먼저 주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 분의 의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만 지상의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죽산은 유형과 무형의 교회를 분리해서 보지 않고 함께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지상에 존재하는 대로의 교회가 유형적이며 무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죽산은 말한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에서도 전자는 택자들의 총수이고 후자는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고 했으니 이는 한 교회의 양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의 본질이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있다는 죽산의 사상으로부터 기인한다. 죽산은 WCC를 비판하면서 그들이 로마 가톨릭과 같이 가시적 교회에만 치중하고 이를 비가시적인 무형 교회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죽산은 교회의 신적인 기원은 오직 아들의 대속적 공로 위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고백 위에 세우겠다고 하신 것은(마 16:18) 교회의 본질이 그 분의 의를 인정하는 성도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언약적 머리”시다. 그는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역사적 언약을 역사상 성취하셨다. 그 분은 이제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우리가 자라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기적 머리”가 되신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자신이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심으로 온전해 진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심이 “통치하시는 머리”로 중보하심에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 분과 연합함이 곧 교회와 연합함이 된다. 성도들은 무형 교회의 일원이지만 유형 교회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의 직분은 권리이지 의무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의 묵상과 성례의 은혜에 함께 동참하여야 한다. 그리고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즉 은혜의 방편들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죽산은 장로교의 역사적 기원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권 교회론에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죽산의 입장은 우리가 살펴 본 칼빈, 녹스, 웨스트민스터를 잇는 신학의 맥과 닿아 있다. 그것은 기독론적 교회 이해라는 이름으로 포괄적으로 규정된다. 죽산이 청교도적 삶의 측면을 통하여 장로교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성도의 확신이 경건의 출발이라는 것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는 구속사적으로 구원을 다 이루시고 지금 그 의를 우리를 위해서 전가해 주시는 한 분 주 중보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죽산의 장로교적 교회 이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가 되시고 그 분 안에서 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지금 살게 하신다는 교회와 성도의 삶에 대한 역동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5. 결론: 장로교 교회 신학의 적실성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과 녹스와 박형룡을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의 형성과 한국 교회에서의 수용과 발전에 대해서 고찰했다. 이를 통하여 몇몇 논점이 부각되었다.
첫째, 장로교는 성경적 정치 구조를 지향한다. 장로교는 이미 성경-역사적 교회 형태였다. 장로교의 정체가 이러하므로 그 본질과 구조 그리고 작용은 오직 성경의 진리 가운데 추구된다.
둘째, 장로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연합을 교회의 본질로 여긴다. 이는 두 가지를 함의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성도의 모임이라는 의미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함께 공유하는 한 몸이라는 의미이다.
셋째, 교회의 이러한 본질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만세전의 주권적인 작정에 따른 선택의 예정에 있다. 예정론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작정을 다룬다. 그런데 그 작정은 이미 교회로 하나가 되는 몸의 지체로서 정하심이다. 몸의 지체로서 성도는 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넷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로서 연합된다. 교회의 연합은 단지 조직체로서만이 아니라 유기체로서 그리하다. 성도는 유기적 몸의 구성자로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함께 자라간다. 교회의 정치 구조는 이를 세우는 것이며 직분은 그것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성도에게만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이다.
다섯째, 장로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형과 유형의 교회의 긴밀성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죽산이 강조했듯이 “보편적 유형교회”와 “보편적 무형교회”가 함께 다루어진다.
장로교회의 본질은 만세전의 예정에 따른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 장로교회의 역동성은 이러한 연합이 가진 비밀에 기초한다.
칼빈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원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 열매의 모든 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교회는 이러한 맛을 내는 몸이다. 지체의 각 부분이 그 자체로 죽어있으나 한 몸을 이룸으로 살아있듯이 교회도 그러하다.
녹스는 교회의 이러한 성격을 지상의 성도의 삶 가운데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러한 비밀이 이미 만세전의 선택에 담겨있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성도를 선택할 때 교회의 일원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성도를 여호와의 임재가 있는 장막이라고 여겼다. 그 장막은 단지 격리된 영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머무는 처소이다.
죽산은 교회의 비밀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으며 이것이 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를 묶는 끈과 같다고 여겼다. 죽산에게 있어서 교회의 속성과 가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비밀의 성격에 따른다고 보았다. 죽산은 이러한 연합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자라가는 “유기적 연합”이며, 영생의 삶을 함께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몸을 이루는 “생(生)적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함께 자녀 된 자로서 함께 상속자가 되는 “영적 연합”이며,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나 하나가 되는 “불가분 연합”이며, 그 효과와 능력이 우리의 사유를 뛰어 넘어 무한히 신비한 “불가사의 연합”이라고 하였다.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필히 성도의 교회와의 연합에 이른다. 왜냐하면 성도는 교회의 지체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영생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장로교는 교회의 삶을 넘어서서 성도의 세상 속에서의 삶 까지 나아간다. 녹스가 말했듯이 교회와 국가는 고유한 영역이 있지만 교회는 성도의 국가의 삶 까지도 영적으로 돌보아야 한다.
장로교 신학은 구원과 교회의 신학뿐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를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교회의 본질과 함께 성도의 교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시적이며 비가시적인 보편적 교회를 강조하는 소이이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에 기초한 장로교 교회 정체가 이 시대에 여전히 적실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설립 제20주년 기념세미나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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