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이 궁금해 하고 있으며 그래서 가장 많이 알고 싶어하는 것의 하나가 성령론에 있어서 그분의 사역과 관련한 '성령세례'이며 또한 이와 연관한 '성령충만'입니다. 여기서는 이를 '성령세례'란 주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령세례에 관하여 알고자 하면 우선 이와 관련한 몇 가지에 대한 선취적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성령과의 관계성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입니다.
넷째,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갖는 의미의 이해입니다.
다섯째,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교회에 끼친 영향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를 보겠습니다.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
사도신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이어서 성령에 대하여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대체 성령이 무엇인데 우리가 믿는다는 것입니까? 성령(聖靈)은 글자 뜻대로 하면 '거룩한 영'인데,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을 이름입니다(롬 8:9).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통 말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곧 신의 속성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 부르고, 또 어떤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르고, 또 어떤 때는 성령으로 부르고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관계를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제9문에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십니까?" 하고서 "하나님의 신격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삼위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 각 위의 고유성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같으시며,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도 동등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소교리문답 제6문도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며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8장에서도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신다는 진리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53문에서는 "성령"에 대해서는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하고 그 답의 첫 번째에서 말하기를 "성부, 성자와 함께 성령도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 인격 되신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별하고 판단하여서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한 분 하나님의 삼위 인격 되심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이 중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언급되거나 이와 같은 구절을 몇 군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3장 22절.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누가복음 1장 35절.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마태복음 3장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9절.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요한일서 5장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은 벨직 신앙고백서 제9장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여 늘 확증되었고 주장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앞에서 먼저 거론하였듯이 사도신경에서 그리고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에서도 봅니다.
니케아 신조.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을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동일본질을 가지신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에서 내여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사,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다가, 3일 만에 성경의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또한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사죄를 위한 한 번의 세례만을 인정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바라본다"
아타나시우스신조.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 이전에 먼저 이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순결하게 지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 이 신앙이란 다음의 것들이다. 삼위(三位)자체가 일체(一體)이시고, 일체(一體)자체가 삼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삼위는 혼합한 것도 아니요, 그 본질을 나눈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한 인격(위)과 아들의 다른 인격(위), 또한 성령의 또다른 인격(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격은 모두가 다 하나요 그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함께 영원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성부께서 창조함 받지 않으신 것 같이, 성자도 창조함 받지 않으셨으며, 성령도 창조함 받지 않았다. 성부께서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신 것 같이, 성자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령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성부께서 영원하신 것같이,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 영원한 분들이 아니시며, 한 영원한 분이시다. 창조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지도 않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단 한 하나님만이 계실 뿐이다. 성부께서 전능하시듯이 성자와 성령도 전능하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의 전능자가 계신 것이 아니요, 오직 한 하나님의 전능자가 있을 뿐이다. 성부가 하나님이시듯이 성자도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만이 계실 뿐이다. 성부께서 주님이시듯이 성자도 성령도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주님이 세 주가 아니라 한 주이실 뿐이다. 우리는 이 각각의 삼위(三位)께서 그 스스로 하나님이시오,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기독교의 진리로 받는 바이다. 따라서 세 하나님이 계시며 세 분 주님이 계시다는 말은 참 기독교인으로서 금한다. 성부는 그 무엇에서 만들어지지지 않으셨으니, 곧 창조함 받지도 않으시고, 나지도 않으셨다. 성자는 성부에게서만 나시며, 지음을 받았거나, 창조되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내지셨으나 지음을 받았거나 창조되었거나 발생된 분이 아니시고, 나오신 것이다. 따라서 세 분 성부가 아닌 한 성부, 세 분 성자가 아닌 한 분 성자, 세 분 성령이 아닌 한 성령만이 계실 뿐이다. 이 삼위에 있어서 그 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에 앞서거나 뒤에 계신 것이 아니며, 어느 한 위가 다른 위보다 크거나 작을 수도 없다. 다만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대로, 이 모든 것에서 삼위(三位)가 일체(一體)이시며, 일체(一體)가 삼위(三位)인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셔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는 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제네바 교리문답 제6조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책들은 앞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의 단순한 거룩한 본질이시며 곧 삼위(三位)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 있음을 가르친다. 성부는 만물의 최초의 원인이며 원리이며 기원이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이며 영원한 지혜이다. 성령은 성부의 덕력(德力)이며 능력이며 효능이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부터 탄생하신 분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 분이다. 이 삼위(三位)는 혼동되지 않고 구별이 있되 서로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며 영원성과 능력이 평등하시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옛날의 회의들이 제정한 것을 고백하며, 성 힐라리(Hilary), 성 아다나시우스, 성 키릴(Cyril)과 같은 교부들이 배척한 모든 종파들과 이단들을 기피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조도 하나님에 관하여서 기술하면서 삼위일체를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또 인정하며 그에게만 의뢰하며 섬기며 그만을 예배하며 그만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원, 무한, 불가해, 전능 및 불가시하신 분이며,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로 구별된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제3장 하나님, 그의 통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광대불변하시고 하나이시며, 나뉠 수 없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되시지만, 이분의 삼위의 인격은 결코 분리되거나 혼동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부터 낳으시고, 성자는 형언할 수 없는 출생방법에 의하여 낳으심을 받으셨으며, 성령은 진실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시고, 이 성령 역시 영원부터 계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이렇게 해서 본질이 같으시고 영원성이 같으시며 피차 동등하신 삼 위격(Three Persons: 三位格)이 있는 것이지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으며, 순서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올 수도 있으나 이 삼위는 서로 동등하다. 왜냐하면 이 삼위는 성자와 성령은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삼 위격의 분명한 구별을 계시했다. 예컨대, 천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다른 말과 더불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발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했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성령은 또한 비둘기의 모양으로도 나타나셨다(요1:32). 또한 주님 자신이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 주님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믿음의 내용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서 보는 하나님의 존재성과 함께 그 사역과 관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자신의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벨직 신앙고백서 제9장은 말하기를, "더욱이 우리는 이 삼위의 특별한 직위와 그 행하심이 우리 인간을 향하고 계심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성부는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며, 성자는 그의 피로써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주가 되시며, 성령은 그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역을 계시하시고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성부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와 구속의 원리를 계시하시고 있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원리를 좇아 일하신 구속의 역사를 계시하시고 있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은혜를 그분 안에서 완성을 이루어가도록 각 믿는 자들에게 적용해 나가시고 계심을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는데 참고할 만합니다. 구약 시대는 성부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일하던 시대는 성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성령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삼위 인격의 사역을 나타내신 시대의 특성에 의한 시대적 구분일 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에 독자적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전 시대에 걸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협력적으로 자기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가령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시는데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구속 사역을 수행해 나가셨습니다(요 14:10, 눅 1:35)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 14:16). 성령은 하나님의 영,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해 가십니다(롬 8:27).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 속에서 교회에 기원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니므이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예수님과 성령과의 관계성
예수님과 성령과의 직접적 관계는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마 1:20)과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재하였습니다(마 3:13-17). 또한 예수님의 지상 생애 내내 성령은 예수님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수종들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들러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셨는데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곳을 찾아 읽으신 것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19).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한 이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하여 자신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곧 구주이심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관계하여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여 계시면서 주도적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수종들었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여 그와 함께 계시는 이 모든 표현은 예수님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육신을 빌려 입고 오셨으나 그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여서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셨습니다(참조; 눅 4:1, 14. 18).
한편,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이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자신이 육신으로 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요구, 곧 율법 아래서 정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죽으셔서 율법의 요구인 죄값을 충족시키고 주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올 수 있는 은혜의 법을 세워 모든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해를 열어주실 것인데 이제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은혜의 법 아래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셨던 구속 사역을 성령께서 계속해서 일하실 것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
이제 성령세례에 관한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말하는 표현인 '성령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는 일을 할 것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증거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를 받으러 나온 유대인들에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고 말하여 예수님이 주실 세례인 성령 세례에 대해 증거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천국 도래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 도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 증표로 그가 베푸는 물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주는 물세례를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메시야가 주시는 성령 세례를 부각시켜 말함으로써 단지 아무 것도 아닌 상징성에 불과함을 내비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요단강에서 물을 취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소유한 분으로써 바로 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즉 메시야는 성령을 풍성히 쏟아 부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선지자 요엘에 의해서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하실 일을 예언하기를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28, 29, 32)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후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성령 강림이 선지자 요엘에 의해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행 2:16-21).
선지자 요엘의 예언에 의하면 성령의 사역은 우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미칠 것입니다. 성령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주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로써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를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주시는 세례가 갖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풍성히 쏟아 부어 주어 죄 씻음과 함께 영생에 이르는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여기서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참조. 마 3:10, 12) 회개하지 않는,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을 완전히 멸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를 성령세례와 불세례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인 의미를 대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와 심판, 충만한 복과 철저한 파멸을 모두 초래합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심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이 주실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지 50일이 되어서 맞이한 오순절날에 성취되었습니다(행 1:5, 8, 2:1-4). 예수님은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는 고난 주간 중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인 목요일에 제자들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실 때 자신이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실 것으로서의 제자들을 떠나갈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자신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그들이 머물 처소를 준비하러 가는 것으로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그들을 데려가 자신이 있는 곳에 그들도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고 하면서(요 13:1-14:3)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 주어서 그들과 같이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성령은 진리의 영, 곧 진리로 인도하는 영이신 데(요 14:17) 그가 오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분부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령께서 일하셔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며,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해 온 모든 것을 다시 일깨워 주어서(요 14:26)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의 구원의 전과정을 도와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은 '보혜사', 그러니까 「돕는 자」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성령 세례, 예수님이 구하여 제자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예고하신 보혜사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첫 번째가 되며 또한 이로써 구약의 절기를 종지(終止)하는 오순절날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오순절날에서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서 힘있게 진행되어 가고 온 세상에 확장되어 갑니다. 오순절에 있은 성령강림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실 불 세례는 마지막 날에 주어짐으로써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는 모두 성취되어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는 현재적이며 종말적입니다. 성령세례의 주어짐은 현재적이며 불 세례의 주어짐은 미래적입니다. 하나님 나라 또한 현재적이며 종말적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한데 모아 불에 던져 태우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영원한 천국에 들여보내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두운 지옥으로 쫓겨나 죄값인 죽음의 형벌을 겪게 하십니다. 이러한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시작이 오순절에 있은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강림한 이래로, 예수님께서 증거한 복음을 듣는 사람은 계속해서 들으며, 듣지 않은 사람들은 또한 계속해서 듣지 않게 됩니다. 의를 행한 사람은 계속해서 의를 행하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불 세례를 받을 사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상으로서 있는 일입니다.
성령 강림이 온 세상과 교회에 미친 영향
그러면 이제 오순절날에 있은 성령강림이 온 세상에 끼친 영향을 봅니다.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온 세상에 미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알게 해 주셨을 때 알려 주셨습니다.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것임을 밝히고서 예수께 돌아오는 사람,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어서 전파된 복음을 믿고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대위임 명령을 주셨습니다(마 28:16-20, 눅 24:44-49, 행 1:4-5). 그리고 사도 삼으신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礎石)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시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땅의 사람들에게, 곧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죄를 씻어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사역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의 구원의 전과정에 개입, 간섭하셔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다음으로, 오순절날에 있은 성령강림이 교회에 미친 영향을 보겠습니다. 오순절날에 강림하신 성령은 성령세례가 갖는 의미의 원리적인 면에서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동시에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세례의 원리적 사건이기 때문에 종말이 있기까지 모든 세계에 성령세례가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오순절날에 성령강림이 있은 때부터 성령세례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당시 제자들에게만 성령세례가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세계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성령세례는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에 온 땅의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는 그때까지 성령세례는 주어집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
오순절날에 있은 성령강림으로 '성령 세례'는 교회적 관심사로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은 자로서 이것이 우리에게서 직접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겟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성령세례는 복음 전도를 받아 교회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관련하여서 다음의 사실을 뜻합니다.
첫째,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죄씻음과 새생명을 주시는 중생의 역사를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진리에 순종하게 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교회[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오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를 통해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서는 제도적 교회권에 들어온 사람이 있고(외적 소명), 제도적 교회권 안에 들어온 사람이든, 제도적 교회권 밖에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접하면서 있는 사람이든지 간에 그들이 복음을 듣는 것에서 진리를 깨달아 진리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깨닫고 영접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내적 소명). 따라서 외적 소명의 부르심을 받는 것과 내적 소명의 부르심을 받는 것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을 깨끗이 하시는 중생의 역사를 하십니다. 여기서 내적 소명의 부르심을 받는 것과 중생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에는 시간적 차이가 없습니다. 동시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첫사람 아담 안에 이는 모든 후손이 죄의 부패성을 지니고 있어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십니다. 이 중생의 역사는 죄의 사람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는 사건입니다.
이 중생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과 자격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중생하지 않고서는 육에서 나온 육의 사람으로서 언제나 육의 사람으로 그냥 있게 됩니다. 육의 사람은 썩어질 몸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 마지막은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지요. 중생의 역사는 이 육의 사람을 영(성령)의 사람, 곧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모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것에 의해서 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1)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에 의해서 되어지는 신비[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직접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영을 심으시므로 우리에게 성령의 생각과 사상,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메시야가 나타내실 표적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비밀'에 관한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3:3-7). 이처럼 성령은 복음에 의해 교회 속에 들어온 우리를 중생케 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이 중생의 역사가 있고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따르는 여러 가지 다른 역사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며,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기 죄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구주이신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영접하고 신앙하여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크게 '회개'와 '신앙'인데 이 모두는 중생과 더불어 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둘째, 성령 세례는 성령 세례가 주어진 때부터 세례가 지닌 작용을 지속적으로 발휘해 나가는데, 성령 세례 받은 자를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 세례에 의한 중생의 역사는 우리가 외면적으로도 거듭난 자의 삶을 살도록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소유한 생명은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벧전 1;22-23)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살아가도록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능력적으로 충만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 충만'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 시키실 뿐만 아니라 의당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의 삶을 능력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성령의 뜻을 좇아 살려고 하는 순종하는 믿음이 요구되어집니다. 곧 성령의 뜻을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 성령의 뜻을 거스릴 때는 당연히 영적 침체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 세례가 갖는 성령 충만의 관계
이러한 까닭에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도우시는 은혜를 입어 성령 충만한 자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성령충만의 이해에 있어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흔히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령충만을 성령으로 충만해져 가야 할 것으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은 그때부터 이미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자로서 성령충만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해져 가야 할 상태에서 이렇게 저렇게 뭔가의 신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성령충만해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충만한 자로서 성령의 뜻을 좇아서 우리 삶을 온전히 드려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의 능력은 결코 전혀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부족함이 없습니다.우리가 기쁨으로 성령의 뜻을 받들고자 할 때 우리가 원하는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해 나가시는 주님의 일[구원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요 여기에 우리 몸을 온전히 드려갈 수 있게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 나가는데 그런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우리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의 존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단지 도와주는 보조적인 분이 되고 말며 항상 "내가 무슨 일을 했다"거나 "내가 무슨 일을 해 냈다"고 하는 자기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사실은 성령님께서 일을 해 나가시는데 우리는 그 성령님이 해 나가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일을 해 나가시는 분은 우리가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해 나가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삼아 주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우리는 마땅히 성령님이 해 나가시는 일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히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여서 우리와 함께 하여서 성령충만한 자가 되게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물론 이 성령 충만한 상태는 성도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서 미미하거나 또는 큰 정도의 차이를 갖기 마련입니다만, 성령께서는 성령 세례 받은 자를 그때부터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서 성령 충만은 성도에게서 성령 세례를 받은 때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 안에서 성도가 진리 위에 서도록 지도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성령세례]을 한 결과[중생]로서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세례의 작용은 계속되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서 온 몸을 목욕하여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것처럼 영혼의 정결함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수시로 발을 씻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듯이(요 13:10), 우리 육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들과 함께 계시면서 씻어주시는 일을 해 나가십니다.
그 일을 무엇에 의해서 하시는가 하면 우리를 진리 위에 서도록 성령께서 지도해 주시는 일을 통해서 하십니다. 우리의 지식과 성품이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는다고 해서 안심해도 될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 - 에 이르기까지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와 같고 소년과 같고 청년과 같고 한 것이지 온전한 지식과 성품을 소유하기까지는 마치 아이들이 부모의 교양 속에서 훈계를 받고 있지만 끊임없이 감독과 지도가 없으면 제 멋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성질이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감독하시며 우리가 진리 안에 서고, 진리를 좇아 살도록 끊임없이 지도해 주십니다. 성령을 요한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17). 이 말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인도해서 진리를 아는 지식과 지혜를 깨닫도록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진리를 의식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리로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하면서 성령의 뜻에 복종해서 살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는 세례를 주시는 그 일로서 역할이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살게 하는 연속성을 띠고 있는데 가장 먼저 성령으로 '지적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지적 충만한 상태로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그를 하늘에 속한 자답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일에 관심을 갖고 살게 하는데 곧, '생활 충만'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면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인 변화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워갈 것이지 이 세상 일에 미련을 두고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고 하면서 성도의 생활 원칙으로 육신의 욕망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 입니다(골 3:1-17).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일상에 기도생활을 가지며 성도간에 사랑에 의해서 공유적인 삶을 행하는 이 모든 생활의 변화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있는 자의 상태를 보게 되는데, 사실 이러한 성령 충만한 생활의 시작은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의 사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지속적인 작용으로서 있는 일이며 이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성령충만한 자는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빛을 간직한 데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주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뜻을 좇아서 할지라도 우리 의지와 힘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뜻을 좇아서 그리고 성령을 의지해서 이런 저런 행위를 하고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하면 그 모두는 우리 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신데 따라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할 경우 어떤 선을 만들어낼지라도 그것은 고작 죄성을 띤 육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은 십자가를 거스리는 악한 죄라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럴 경우 그는 필연적으로 선을 '자기 의'로 이끌고 가기 마련입니다. 악한 욕망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명예와 인기를 얻고자 하며 때로는 이를 위해서는 질투하거나 악한 감정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란 용어를 사용하여서 우리들이 성령충만하여 갖는 신행에서 나타나는 결과들은 자기에게로 가져나갈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소원을 갖고 일해 나가고자 하신 성령님께로 가져나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자 하였습니다.
셋째, 성령 세례에 의해서 나타나지는 변화는 성령으로 '능력 충만'한 상태에서도 현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을 통해서 믿는 자들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또한 그 교회가 성령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두 열 한 차례에 걸쳐 나타나 자신이 다시 살아나셨음과 함께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 중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전도 대위임 명령을 주셨고(마 28:16-20, 눅 24:49, 행 1:4-5), 승천하실 때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8). 그리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제자들에게 충만히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으로 그들을 도와 복음을 증거케 하여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 일을 하는 전진 기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온 세상의 구원의 성업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위임하여 사명으로 맡겨 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성취해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성령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에 주어진 이 사명을 받아 세상 끝 날까지 완수해 나갑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강림하여 제자들에게 요엘 선지자에게 예언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충만히 거하셔서 성령 세례를 원리적으로 보여주셨으며 또한 교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 목적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지적인 면에서나 생활적인 면에서 보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다 복음 전도의 사명과 관련하여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있는 능력 충만함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많이 알고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면서 언제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준비와 그 상태에서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의 능력[권능]으로 충만한 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머리는 지식으로 채워져 있고 입은 있어도 복음의 증거와 관련하여서는 벙어리 인 것은 사실은 마음은 있으나 그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복음 증거와 관련하여서 성령으로 능력 충만함을 보이지를 못합니까?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면 그 까닭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서 우리 안에 충만히 내주하고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증거하며 살게 하시는데 여기에 있어서도 성령께서 우리가 증거할 말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는 믿음의 비밀[복음의 진리]을 알게 해 주시고 이를 맡겨 주심에 의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 앞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 그 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될 때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말할 것을 다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은 지도해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베드로가 각 처에서 올라온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회개의 구원을 말한 것은 성령 충만하여 있는 가운데서였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공회 앞에서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평온한 가운데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성령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성령 충만한 상태는 '은혜 충만'이었고, '지혜 충만'이었고, '믿음 충만'이었고, '권능 충만'이었습니다(행 6:3, 5, 8, 10). 성령 충만은 그가 지니고 있는 믿음에서, 말하는 지혜에서, 행하는 일에서 나타났습니다. 빌립 집사가 구스 내시라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도한 것도 성령에 의해서였으며, 그가 체포되어 총독 벨릭스 앞에 서서, 또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전한 복음을 말한 것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였습니다. 그가 로마에까지 가고, 서반아[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한 것도, 또 그렇게 한 것도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여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령의 사람이 진리 안에서 능력[권능] 있게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 증거와 관련하여서 능력 있는 삶은 단지 마음에 의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을 좇아 진리의 인도를 받으며 일상에서 성령의 뜻을 받들어 섬겨 나가는 중에 언제든지 준비되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 세례의 작용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위하여 함께 선한 삶을 살아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성령 충만한 데서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기를 "성령께서는 우리를 한데 연결시켜 한몸으로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는 세례를 받았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13). 그러면서 몸의 각 지체는 모두 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돌보아주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으로 첫째는 사도,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선지자들, 셋째는 교사들, 다음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남을 돕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이들을 지도하는 사람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이런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나은 것인 사랑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세례를 주신 성령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일도 하십니다. 이때 은사가 교회의 성도들의 재능에 따라 주어져서 능력껏 발휘하게 하시는데 교회의 삼직제는 그러한 봉사의 직무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이렇게 직분자가 세워지고, 그들이 봉사하듯이 동일하게 교회의 각 지체된 성도들이 사랑을 따라 하나님께 은사를 구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으로 있는 모든 성도가 행복하게 되고 각 일원이 서로 돌보아 주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성도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성도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성도가 함께 즐거워하면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에 참여하여 기꺼이 돕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하나 되어 가는 일에 힘쓰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몸의 각 지체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위해 많은 지체를 만드셨으며 각 지체를 적절하게 붙여주셨습니다. 만일 몸이 한 지체로만 되어 있다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이상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지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지체가 서로 떨어져 있어서는 온전한 몸의 모습을 띨수가 없습니다. 함께 몸에 붙어 있으면서 각기 맡은 독특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 세례에 의해서 다 같이 한 성령 안에서 나온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가는 일에 힘쓰게 하십니다. 은사는 '은혜'란 말과 같으며 '선물'이란 말과 같습니다. 복음의 진리 위에서 믿음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언제든지 쓰여질 능력[재능]을 보이며 잘 준비되어 간 자에게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필요에 따른 목사의 은사도 주시고, 교사의 은사도 주셔서 성도를 가르치는 일에 봉사하게 하시는가 하면, 장로의 은사도 주셔서 성도가 진리 안에서 올바르게 서 나가고 있는지를 감독하여 돌보게 하시고, 집사의 은사도 주셔서 사랑을 공급하며 돕는 일도 하게 하시고, 전도의 은사도 주시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교회를 봉사할 수 있는 각양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 교회가 온전히 서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성령께서 봉사할 은사[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유무상통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랬는데 그 중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을만한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권위자'(勸慰者)입니다. 이 이름에 나타나고 있듯이 그는 자기에게 있는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헌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헌금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주께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긍휼에 풍성한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였습니다. 그가 행한 권면과 그가 베푼 위로는 그의 도움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일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 긍휼에 힘입어 더욱 교회로 연합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일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도, 건강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이끌어내시는 성령의 역사가 그 마음에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서 봅니다. 하나님의 긍휼인 봉사의 직무는 좋게 여기고 흉내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며 산다고 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교회 안에 각 지체에 의한 여러 가지의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 되어 가는 모습이 있게 합니다. 성령이 주신 은사를 좇아서 선하게 살아가는 분들에게 있는 것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게 교회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 아닙니까? 그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선하며 아름답습니까? 이런 성령의 열매의 나타남이 있는, 참으로 성령이 주신 은사를 좇아서 선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든, 희락이든… 어떤 것 중에 하나를 힘쓴다고 해서 나타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난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그들 모두가 한 성령에게서 난 자 인고로 자기가 지체로 있는 그 몸을 돌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며, 그 은사를 가지고 은사를 주신 성령의 뜻을 좇아 살 때 성령의 열매는 한 가지 면에서가 아니라 아홉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열매 모든 면에 속성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상에 의한 성령 세례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은 맺음으로 끝내며,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 이해 비교'를 간략히 부록으로 싣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을 주시는 일을 할 것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증거되었는데 이는 먼저 믿는 자 안에의 성령님의 임재의 중요성부터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의 중요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성업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적용시켜 믿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에게 내주해 계시면서 그들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믿음과 삶을 주관해 가신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문제가 '성령 세례'이며, 또한 이로 인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셔서 당신이 거주하실 처소로 삼으십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령님의 선행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자들에게 오셔서 구속의 복음에 순종으로 듣게 하시고, 중생시키시고, 회개시키시고, 신앙을 갖게 하시고, 칭의를 입히시고, 양자로 삼으십니다. 이 모든 일은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령님이 함께 계시며 사실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이 모든 과정을 일으키시는 용어로 사용하신 단어가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이 말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직접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연합'입니다(롬 6:2-11).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하여 그분의 생명을 받아 그분의 생명체로서의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성령 세례'라고 하면 '죄 씻음'과 '새생명'을 일으키는 중생의 역사와 관련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고 장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그런 새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내주하시며 그들에게 적용시키신 구속을 그들의 믿음과 삶에서 이루어 가도록 지도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여기에서 성령님께서 임재하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참된 의미와 그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때부터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섬기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에 사로잡혀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삶을 갖는 모습입니다.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자기 안에 내주해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롬 8:9)의 존재를 항상 의식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한 뜻을 좇아 살 것을 생각하고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고자 하실 일에 대해서 언제나 순종으로 자신을 드려 갈 생각을 갖고 또한 일을 도모합니다(롬 8:5).
이런 그에게서는 가시적인 변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데 따른 지적 충만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삽니다. 이런 일은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거기에서 있을 일에 대하여 힘쓰며 사는 생활 충만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구속을 적용시키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지상적 모습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셔서 그들로 한 교회의 모습을 띠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권능으로 함께 하시면서 그들이 능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는 까닭에 여기에 온전히 순종하여서 자신을 드려 그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켜 성령으로 능력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한 이해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이 단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 세례를 주십시오!", "성령 충만한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막무가내 식으로 간구하는 실정이기에 여기의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중생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물과 성령으로'라고 표현한 것은 성령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서이다.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의 부류는, 물과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라고 보아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중생케 한다는 견해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물과 성령에서 물을 '세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례가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성령께서 중생케 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여기서 물은 구약에서 종종 그랬듯이 내면적 정결케 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있다. 이 견해가 가장 근접한 견해라고 보는데, 물과 성령은 '물, 곧 성령'으로 봄이 좋을 듯 하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출생의 신적 집행자는 성령이신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중생케 하시는 일에 그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사역의 수단으로서이지, 사람의 타락한 부패성(죄의 오염)을 씻어 정결케 함으로 새생명을 소유케 하시는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
부록 :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 이해 비교
로이드 존스의 저서를 통해서 그의 성령론에 깊이 공감하고, 그 성령론이야말로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에서 성경적 성령론으로 통일하였다고 보는 정원태가 쓴 '열정 칼빈주의'에서 소개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중생(요 3:3-5) :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의 영혼 속에 심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2. 성령의 기본세례(고전 12:3, 13) : (로이드 존스는 고린도전서 12:13에 나타난 성령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라고 하여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의 능력 세례'와 구분하고 있다. 요한복음 1:33 참조) 거듭난 영혼을 주님의 몸된 교회에 연합시켜(고전 12:13)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라고 부르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과 성령의 기본세례는 동일한 사건을 각각 다른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전통적 칼빈주의 교회(개혁교회)에서 중생한 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기본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3. 성령의 생활충만(엡 5:18) : 중생되고 '성령의 기본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지속적으로 온전히 받는 것"이다.
4. 성령의 능력세례(눅 24:49, 행 1:5, 8, 2:1-4) : 신자들이 성령의 생활충만한 가운데 살 때 그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로이드 존스가 본서에서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친히 부어주시며 오순절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 부어져 왔으며, 또 계속 부어짐으로 각 신자와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 성령의 능력충만(행 2:1-4, 4:8, 31, 7:55) : 특별한 사역과 위기의 때에 성령의 능력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재한 상태이다.
이러한 정리에서 볼 경우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과연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에서 성경적 성령론을 따르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은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전혀 맞지 않다고 말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개혁주의 성령론과 차이점을 보이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은 그가 성령 세례를 두 국면으로 구분하여서 말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와 또 하나는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 세례'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는 오순절날의 성령 강림에 의한 세례와는 다른 것으로, 성령께서 새 생명을 심고 주님의 몸된 교회로 연합시켜 주를 모시고 섬기며 살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 세례'는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지속적으로 온전히 받음으로써 생활에서 신령한 도덕적 열매들을 맺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뚜렷한 변화가 있는, 그러니까 성령의 생활 충만한 상태에 있는 자를 주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상태에 있게 하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위기의 때에서나 그외에 특별하게 능력을 발휘해야만 할 때에 주님께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심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한 상태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령의 능력세례는 성령의 생활충만한 상태 위에 부어집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생활충만한 후에 성령의 능력세례나 능력충만은 없을 수도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세례와 능력충만은 언급한대로 특별한 사역이나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때에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성령 이해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전후의 성령의 사역을 분류하여 보는 데 따릅니다. 오순절 전에도 성령의 사역은 있어 왔고 이는 오순절 전에 보이는 신자의 중생과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설명하는 데서 성령 세례를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로 보며, 오순절날에 있은 성령 세례는 교회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친히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사역을 계속해 나간다는 이해에서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교회가 증인의 삶을 다하기까지는 성령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주권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따라 강림해 나가는 것이 됩니다. 그 중요한 성경 구절은 누가복음 24장 49절의 "볼찌어다 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와 사도행전 1장 8절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여기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성취해 나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로이드 존스의 성령 이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과연 개혁주의 교회의 성령론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그의 성령 이해가 개혁주의 교회의 성령론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필자는 우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전후로 성령 세례를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여깁니다(그렇지만 로이드 존스가 성령 세례에 대하여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는 것을 이해를 합니다.그러기에 그의 성령 세례에 관한 견해를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배격할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 가지는 것 뿐이지 종합적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갖는 의미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구원론적인 신앙관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뿐만 아니라 로이드 존스도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할 때 성령의 기본세례와 성령의 능력세례를 구분하여 말하면서 '성령 세례/성령의 능력세례'를 오순절 사건 전후로 무 짜르듯이 분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그가 '성령 세례/성령의 능력세례'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친히 부어주시는 세례인데 오순절 뿐만 아니라 전교회사를 통하여 계속 부어져 왔으며, 또 계속 부어짐으로 각 신자와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또한 교회의 부흥역사를 신약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부터 보는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하시며 새생명을 주시며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세례를 받게 하는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또 다른 국면의 세례로 교회의 부흥 역사를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함 속에 있게 하기 위해 부어주시는 세례인 성령의 능력 세례를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로 이해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와 '주님이 친히 주시는 성령 세례'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성령 하나님이 제일위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과 제이위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원리 속에서 일하시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십자가의 도'는 전시대적이며 전우주적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지닌 구원의 원리 속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그 모습을 보이기 전과 후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구원 얻는 은혜의 유일한 방식인 '하나님의 의'를 원리적으로 보여줍니다. 골고다 언덕 이전의 십자가에서는 이를 통해 알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 이후의 십자가에서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시대에서 오순절에 있은 역사의 한 사건으로 있으면서 그 이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전시대적이며 전우주적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도 성령은 물론 우리의 중생과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에 의하여서 되어진다는 믿음의 지식을 갖고 그 지혜의 상태에 있기 위해서 앞서 선지자의 예언이 있어 왔고, 또한 선지자가 한 예언을 성취하는 방식에 의해서 온 세상에 그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는 가장 구체적이었으며 이는 계시의 점진적 발전의 원리에서 바로 눈 앞에 벌어질 것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주실 메시야를 그는 보는 가운데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주님께서 주실 성령 세례가 전시대에서 그리고 전우주에서 확증되고 또한 행하여지기 위해서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이 성령 강림에 의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자들에게 성령 세례가 주어져서 중생과 주님의 몸에로의 연합이 있습니다만, 이는 또한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서 주님이 주실 것이라고 한 그 성령 세례 받은 자는 이제 자기 안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의 주권 속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분의 사람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며 살게 됩니다. 키와 지혜가 함께 자라가듯이 성령과 은혜가 충만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합니다. 성령과 권능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능력 충만한 상태에서 산 사람은 가령 스데반 집사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로 선출된 사람이 일곱 사람임을 명심하십시오. 스데반 집사 외의 다른 집사는 무능력하게 살았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스데반 집사가 다른 분에 비해서 유난히 거론되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사로 선출된 사람들만이 성령의 능력 충만한 자였다고도 보지 마십시오. 예루살렘교회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각 처로 흩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 처에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국을 증거하며 보여준 그들이었습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그런가 하면 교회에 직분자들만 성령의 능력 충만한 상태에 있다고 보지 마십시오. 교회를 함께 온전히 세워나가는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성도는 '더 나은 은사'를 나타내고 있는 자들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4-16).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7-31).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은 자라서 지적인 면에서 성령 충만하고, 도덕적인 면에서 성령충만하여 생활의 변화를 갖고, 능력에서 성령충만하여 주님을 증거하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은 그가 믿음이 자라가면서 함께 띠어 가는 모습입니다. 아직까지 지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같고 육신에 속한 자와 같은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변화를 갖지 못한 자가 있기도 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성령의 생활충만한 모습을 보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변화가 있는데 증인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여기에 능력 충만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예 전적으로 헌신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활에서나 증인의 삶에서나 참으로 열심을 갖고 충성하는데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서는 다른 분이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모든 면에서 정말 모든 성도들에게서 칭찬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설명이 로이드 존스의 성령 이해를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성령 이해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지, 그는 성령 세례를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세례'와 '주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의 두 국면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데서 무리가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분류하다 보니까 오순절날의 성령 강림에 의하여 주어지는 이 성령의 능력세례가 없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과 이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성령의 능동적 작용, 그러니까 이 세례에 의해서 능력 충만한 삶에로 나아가는 것으로 강조가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의 사도들이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경험하고 여기에서 능력 충만한 활동이 행해진 것을 비롯하여 스펄젼, 웨슬레, 무디 등의 특별한 경험을 '성령의 능력세례'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의 경험은 특별합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구약의 신앙인들이 경험한 은혜도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무개와 같은 특별한 경험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경험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을 증거하는 삶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특별한 경험을 필요로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도 특별한 능력을 겪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겪은 경험이 주님을 증거하기에, 우리가 받은 은혜를 말하기에 부족한 불충분한 것이 아니며, 불명료한 것이 아닙니다.그런 면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능력 충만이 사도들이나 또한 교회사에서 교회의 부흥과 관련하여서 특별하고도 두드러지게 능력을 발휘하며 활동을 한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나 이는 그들만에 한정된 것이 아닌, 사실은 전교회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이는 예루살렘교회가 보인 교회적 속성에서나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된 사명을 수행해 나간 데서와 그로 인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교회가 보인 생명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세례에 따른 성령의 생활충만과 주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에 의해서 성령의 능력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굳이 분류하여 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우리를 분명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지혜가 충만하십시오. 성령의 생활이 충만하십시오. 성령의 복음 증거하는 능력이 충만하십시오. 이 말은 지혜에서, 생활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서 그 무엇에서나 성령 충만하여야 한다는 말이며, 이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성령의 생각을 좇아서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도모하는, 곧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힌 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우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우리의 지혜가 있어야 하며, 생활이 있어야 하며,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의 모습이, 그리고 성도 각 사람의 모습이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께 온전히 붙잡혀서 사는 성령의 사람으로 있지 않는 것은 왜 인지요? 그 이유를 이렇게 판단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그것이 지적인 것과 관련해서든지 생활과 관련해서든지 복음의 증인된 사명의 삶과 관련해서든지 간에 사실은 그 모두가 다 '성령의 능력'으로 갖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그냥 있게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욕망을 좇아서 사는 자다운 삶에서 있게 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묵상에서 사는 삶을 게을리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자신을 드려가려는 기도의 삶을 게을리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하며 성도와 함께 하고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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