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비 평 훼케마
“부자와 가지 나사로의 비유 :(눅16:19-31) 우리가 이 비유를 상세한 점까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이 부자는 세상에서 사치를 누렸고 나사로는 가난했지만, 죽은 뒤 부자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만약 사람이 죽은 뒤 그저 무의식이나 비존재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면 이 비유는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비유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부자와 나사로의 다양화된 의식적인 존재는 종간 상태 동안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1)
해 설
현대 칼빈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훼케마 씨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사람이 죽는 때로부터 부활할 때까지의 중간 기간동안 몸을 떠난 영혼이 의식을 가진 채 실제로 겪는 중간 상태(lnternediate State) 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 기간동안 의인의 영혼은 낙원(hades)에서 예비적인 행복을 누리고, 악인의 영혼은 음부(hades)의 불 속에서 예비적인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훼케마 씨의 이러한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칼빈의 가르침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중세 신앙을 뿌리치고 공식적인 개신교 신앙으로 돌아선지 겨우 2년만인 25세때 (1534), 최초로 쓴 글이 바로 혼수론(魂睡論 . Psychopnnychia)으로 알려진 신학 논문이다.2) 죽음에서 부활까지 사람의 영혼은 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친 당시의 열심 있는 개혁자들이었던 재세례파(Anabaptist)들을 공박하기 위하여 민망스러운 거친 표현과 개신교 신앙의 연조처럼 미성숙한 논리로 특징을 이룬 이 논문에서 칼빈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이야기로 영혼이 “몸을 떠나 자유롭게 된” 3) 때의 상태라고 진술했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는 훼케마씨는 그것을 다른 목적을 가진 비유라고 가르치는 안식일 교회를 이단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주장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근거를 확연하게 규명해 보자.
있을 수 없는 현실
변 증
이상에 기록된 칼빈의 가르침이나 훼케마 씨의 주장이 참말이라면 아래의 몇 질문에 대해 성경 말씀과 상식에 근거하여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 신구약 시대에 죽은 모든 의인이 죽으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면, 기원전 거의 2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 이전의 영혼은 어디에 있었을까? 의인이 죽으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다는 어떠한 암시라도 성경에 있는가?
◯ 의인의 영혼이 머문다는 아브라함의 품과 악인이 영혼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 당한다는 음부(陰部)가 아주 가까워, 비유에서처럼 마주 보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부모, 부부, 자식, 형제나 친구, 이웃이 불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그 참상을 눈으로 보며 몇 년, 혹은 몇 천년을 지나는 아브라함 품안의 의인들은 그런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낙원은 없어야 하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생지옥일 뿐이다.
◯ 죽은 의인의 영혼은 아브라함의 관할 아래 있고, 고통받는 악인들도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탄원해야 한다는 말인가? 비유에서처럼 죽은 의인의 영혼이 고통 당하는 악인의 영혼을 위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성경 어디에 이러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가르침이 있는가?
◯ 칼빈이나 훼케마 씨는 비유에 나타나는 아브라함, 부자, 거지 나사로가 모두 죽은 뒤 몸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들이라고 했는데, 성경 분 문에는 그들이 영혼이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히려 품, 눈, 손가락, 혀 둥 육신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지 않았는가?
◯ 성경에는 아브라함도 다른 노독들과 함께 약속된 영생과 본향은 받지 못한 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었고, 하나님께서 는 그들을 위해 세상 끝날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신다고 했는데(히11:8, 13-16, 39. 40), 어떻게 아브라함만이 마지막날 있을 부활도 거치지 않고 육신도 없는 영혼의 형체로, 성경에는 유례(類例)가 없는 이상한 낙원에 홀로 나타났다는 말인가? 이와 같은 가정은 성경은 물론 상식에도 벗어나는 일임을 쉽사리 알 수 잇다.
이 비유에서 부자가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음부(陰部)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하데스”(hades)로, 히브리어의 “스올”(aheol)과 같은 것인데 그곳은 의인이건 악인이건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게 되는 무덤임을 앞서의 연구에서 밝혔다.4) 하데스 곧 음부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고 불꽃 가운데서 태워진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고 기록된 바가 없다. 죽어 무덤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풍자적인 비유이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한 것뿐이다.
비유 속의 비유
실제로 성경에는 이솝의 우화(寓話)처럼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쓴 경우가 있다. 즉 여러 나무가 사람같이 말하는 것처럼 쓴 경우가 그것이다.(삿9:8-15, 왕하14:9). 그것이 비유인 지는 문맥을 보면 알 수 있고, 상식으로도 알 수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된 누가복음 16장은 예수님의 여러 비유 설교 가운데 한 부분임을 다음의 요약에서도 일목요연해진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눅15:3)”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후 이어서 ,
(녹15:4-7)잃은 양의 비유
(눅15:8-10)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눅15:11-32) 잃어버린 아들[탕자]의 비유
(눅16:1-13) 불의 하나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
* 재물에 관한 바로 앞의 비유를 듣고 이를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견책하는 말씀을 하신 후 이어서,
(눅16:19-31)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심.
그리하여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자를 주제로 한 비유들, 16장은 현세의 재물과 내세의 운명을 주제로 한 비유들임을 한 눈에 보게 된다. 그런데 이상의 여러 비유들을 소개하는 문형(文型)이 모두 비유를 시작하는 특유한 것이어서 그것이 일련의 비유임을 문학적 감각으로 도 알 수 있다.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한[‘어떤’ 과 같은 원어임] 부자가 있어...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가...”
누가 보아도 비유인 「부자와 나사로」의 기사를 굳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고집한 칼빈의 판단은 어리둥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비유라고 가르친 당시의 재세례파 신자들을 향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기(煙氣)로 대낮의 빛을 꺼 보도록 하게 하라”5)고 질책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다른 저술인 공관 복음서 주석에서는 “영혼이 무슨 입이나 혀나 눈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고 말하여 이것은 윤리적 의미를 가르치는 것”6) 이라는 정반대 되는 말을 하여 또다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출처는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民俗說話)였음이 금세기에 들어서 밝혀졌다. 즉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옮긴 이야기인데 시-오시 리스(Si-Osiris)라는 사람이 사후에 지하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7)이러한 이집트 민속 설화가 유대 판으로 변형되어, 바르마 잔(Car Majan)이라는 한 부자 세리와 한 가난한 서기관이 죽어 장사되었는데, 이 서기관의 친구가 꿈 가운데서 이두 사람의 내세의 형편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가난했던 서기관이 광활한 낙원을 거닐고 있었고 부자였던 세리는 냇가에 서 있었는데 목이 말라 애쓰면서도 물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8)
마치 부정 축재로 거부가 된 재벌들과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빗대어 고발하는 오늘날의 풍자문학(諷刺文學)이나 사회 만평(社會漫評) 과 같은 것으로 「부자와 나사로」이야기 역시 예수님의 풍자적 비유인 것이다.
비유의 목적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한 교훈은 무엇인가? 이미 문맥에서도 나타났듯이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무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16:14), 이에 대한 대답으로 19절 이하의 풍자적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 이 세상에서 누리는 재물의 축복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신 바 현세와 내세의 운명에 대한 보증이라는 그들의 통념을 여지없이 분쇄하셨다.
◯ 부자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쾌락과 안위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는 것을 엄연한 죄임을 지적하셨다.
◯생전에 형성한 성품은 건널 수 없는 “큰 구렁”[26절]처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사후에는 구원을 위한 두 번째 기회가 없으므로 생전에 구원을 이루고 선을 행하라 는 교훈을 주셨다.
◯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곧 구약 성경의 권위를 재학인 하시고 (16:31), 어떠한 이적도 성경 말씀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으며, 성경 말씀만이 진리의 표준이요 구원의 방편임을 재천명 하셨다.
다시 말하면 이 비유의 목적은 교리 적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임을 알 수 있었으며, 한 두개의 비유를 가지고 교리의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는 신학적으로 금기(禁忌)사항임을 이미 신학적인 상식이 되어 있다.9)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개인의 이름을 붙여진 경우는 이곳뿐이다. 무슨 목적에서 였을까? 비유에 나타난 교훈이 실제로 적용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후에 예수 님과 평소에 친숙했던 베다니의 마르다 와 마리아 자매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장사된지 나흘이나 된 것을 예수 님께서 다시 살리신 최대의 기적을 행하셨다(요 11:1~44). 그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낙원이나 지옥에서 불러오지 않으시고, 직접 이름을 부르시고 무덤에서 불러내셨다. 만약 나사로가 낙원에 이르러 행복에 겨운 몇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는 이 세상으로 다시 호출되어 내려왔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비 평 “비록 우리가 이 비유[부자와 거지 나사로]로 부터 중간 상태[죽음에서 부활 때까지
훼케마 의 상태]에 관한 자세한 진술을 찾아내도록 허락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신자가 죽는 의식을 가지고 행복 속에 존재하지 않거나, 불신자가 의식을 가지고 고통을 꺼지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요점이 없어지고 만다.“10)
해 설 훼케마 씨는 앞서의 비평에서처럼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그것이 사람이 죽은 후부터 부활할 때까지 겪는 중간 상대(The Intermediate State)의 묘사라고 무리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앞서의 이유로 그것을 반대하는 안식일 교회를 이단시하고 있다. 도대체 대부분의 교회들이 믿고 가르치는 이 중간 상태(中間狀態)란 무엇이며,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심각히 구명해 보자. 어리둥절한 사실은 현대의 칼빈주의 신앙의 대변자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중간 상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훼케마 씨 자신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 술 훼케마 “물론 성경은 사람이 죽고 나서 부활할 때까지의 소위 중간 상태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미래의 생명에 대한 성경의 기별은 육신의 부활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이 이러한 중간 상태의 성격에 관한 어떤 이론적인 학설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11)
성경 적인 중간 상태-무의식
변 증 자신도 성경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자인한 비성경적인 교리를 왜 굳이 주장해야 하며,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기 때문에 반대하는 안식일 교회를 오히려 이단이라 하는가? 훼케마 씨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부활할 때까지의 상태를 자세히, 분명히 그리고 풍부히 밝히고 있다.
◯ 다윗을 비롯한 모든 노독들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다(행 2:34 ; 히 11:13~16). 살아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 부활하여 승천한 모세는 예외이다(유 1:9 ; 마 17:1~5).
◯ 자식이 잘 되고 못되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다. (욥14:21)
◯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전9:5, 6, 시 146:4),.
◯ 아무“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전9:10)는 무활동 상태이다.
◯ 고통도 느끼지 못할 뿐더러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이다.(시6:5; 30:9; 88:10; 115:17; 사38:18, 19).
이러한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완곡한 표현이 곧 “잠”이다. 왜냐하면 잠은 죽음처럼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에 대하여 의식이 없으며,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나듯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잠과 동의어로 쓴 경우가 성경17책에 걸쳐 66회나 기록되어 있다. 12) 아래에 이 사실을 증거 하는 성경 상의 증언들을 열거한다.
*욥(3:13; 7:21; 14:12; 17:16)
*모세(신31:16)
*다윗(시13:3; 삼하7:12;왕상1:21; 2:10)
*솔로몬(왕상11:43)
*여로보암(왕상14:20, *이하 모두 왕상) 르호보암(14:31)
*아비암(15:8)아사(15:24)...
*아합(22:40)등 선하거나 악한 모든 왕들.
*예례미야(렘51:39, 57)
*다니엘(단12:2, 13)
*예수그리도(마9:24; 막5:39; 눅8:52; 요11:11)
*마태(마27:52)
*누가(행7:60, 13:36)
*바울(고전7:39; 11:30; 15:6, 18, 20; 살전4:13, 14, 15,; 5:10)
중간 상태-개신교의 연옥
신. 구약 성경은 이토록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 때까지의 중간 상태를 철저한 무의식으로 확인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구약의 노독들, 선지자들과 일반 왕들, 신약의 사도들 모드가 한결같이 죽음을 의식이 없는 “잠”이라고 했는데, 정반대로, 칼빈은 혼수론(魂睡論)이라는 비성경적인 논문까지 써서 “죽음의 온밤을 통하여 영혼은 행복을 즐기기에 필요한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깨어 있다”13) 고 항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반대한 재세례파 등 개혁자들을 이단으로 정죄 하였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가? 칼빈의 혼수론에 현저히 위배되게 가르친 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한 사도들, 노독들도 모두 이단시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토록 황당무게한 가르침의 기원은 어디인가?
훼케마 씨가 교수로 몸담고 있었던 미시긴주 그랜드 해피즈에 소제한 칼빈 신학교에서 38년이나 가르친 벌코프(Louis Berkhif) 씨의 대표적인 저서인 [조직신학]은 현대 칼빈주의 신학의 대본(貸本)격이다. 이 책에서 벌코푸 씨는 죽음에서 부활까지 몸을 떠난 영혼들이 예비적 행복이나 고통을 겪는다는 중간 상태에 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초대의 교부들이 고안해 낸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14)
훼케마 씨 자신도 칼빈의 중간 상태에 관한 가르침이 북아프리카 출신 교부인 어거스틴 에게 서 연유했음을 그의 다른 저서에서 인정하고 있다.15)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고대 이집트의 영혼불멸 사상의 중심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교부들에 의하여 카톨릭교회의 연옥에 관한 교리로 발전했음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16)
아래는 이에 관한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요약한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교회와 더불어 화평하게 죽은 모든 사람은 연옥(煉獄)으로 알려진 중간 영역(intermediate realm)에 처하여 형벌 적이며 정결하게 하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 신자만이 즉시 천국에 간다. 침례[영세] 받지 아니한 모든 어른들과 침례[영세]받은 후 죄를 지은 사람은 즉시 지옥으로 간다. 교회와 교재를 가지면서도 어느 정도의 죄를 짊어지고 있어 부분적으로 성화 된 그리스도인들은 연옥으로 가서 모든 죄가 정화(淨化)될 대까지 장단(長 短)간에 고통을 받은 후에야 변화되어 하늘로 간다.”17)
칼빈의 중간 상태와 카톨릭의 연옥
죽은 후 영혼이 정화(淨化)될 가능성을 배제한 것을 제외하고는, 칼빈이「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근거로 주장한 중간 상타니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고안해 낸 연옥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칼빈은 카톨릭의 연옥을 마귀의 고안이라고 했지만, 다음에 인용된 전경연씨의 결론처럼 칼빈의 그릇된 주장은 결국 또 다른 개신교의 연옥인 오늘날의 중간 상태라는 엉뚱한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이...몸과 영혼의 분리, 불경경한 자의 영혼이 받는 고통 같은 것을 말함으로 카톨릭적 표상[연옥]이 침입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영혼이 부활 때까지 깨어 기다린다든지 불경견한 자의 영은 예비적인 징벌을 곧 받는다고 설명함으로써 중간 상태에 대한 사변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그 시대의 아들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의문을 풀 책임을 지고 그러한 논의에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나 그의 교설 (敎說) 이 모든 시대의 표준은 아니다.18)
전경연 씨의 말대로 칼빈은 “그 시대의 아들이”였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 칼빈의 예정론과 영혼불멸 신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초기 교부 어거스틴은 그러한 영혼불멸 사상을 고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받았으며. 플라톤은 곳곳을 이집트에서 지원 받은 것이다. 결국 칼빈의 영혼불멸 신앙이나 중간 상태에 관한 사상 역시 성경이 아닌 헬라의 사상이 였음을 다음의 인용에서도 확인된다.
“그[칼빈]는 사람이 죽음으로 혼은 육을 떠나 본향으로 간다고 하였다. 죽음은 외국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영혼이 아버지 집에 돌아가고 불멸을 분 깃으로 받는 것이 라고 하였다. 이 영혼의 본향은 ‘아브라함의 품’ 이다. 이것은 헬라적 영혼불멸의 관념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옮겨 놓은 것이다.”19)
칼빈주의 신앙의 기본 신조인 웨스크민스터 교리문답서(rhe Westminster Catechism)도 그릇된 영혼불멸설을 옹호하면 서도 “이 두 곳[천국과 지옥] 외에는 몸을 떠난 영혼이 갈 수 있는 어떤 곳도 없다고 성경은 인정한다”20) 고 했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제 삼의 장소로서 개신교의 연옥인 중간 상태를 믿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금세기에 들어 킬빈주의 중간 상태가 비성경 적임에 대해 안팎으로부터 심각한 비평을 받고 있는 것은 성서 신앙의 회복을 위한 훌륭한 진전이다. 그 중에는 금세기 대표적인 개혁 주의 신학자인 화란의 벌카워(GC Berkou-wer). 루터 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알트하우스(Paul Aithaus)등도 포함되어 있다.21) 올바른 양심과 성숙한 지성은 서로 어긋날 수가 없다. 오늘날까지 가르쳐지고 있는 칼빈주의 중간 상태는 중세 카톨릭 신앙에서 개신교 신앙으로 공적으로 돌아선지 2년밖에 안 된 25세의 젊은 이 칼빈이 아직도 영혼불멸에 관한 중세 교회의 영향을 채 벗어나지 못한 형편에서 처음으로 쓴 미성숙한 신학 논문「혼수론」에 기초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모든 면에서 성장했고 또 성숙해진 오늘날의 신앙 지성인들은 칼빈이 중세기의 짙은 암흑이 겨우 걷히기 시작한 새벽 미명(未明)에 불과한 “그 시대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하고 방금 펼쳐지고 있는 대낮의 광명(光明)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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