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유대적 배경에서 본 복음서

하나님아들 2021. 4. 13. 23:00

유대적 배경에서 본 복음서

 

 

/ 저작자 : 미상(저작자 연락요망)

구체적으로 유대적 배경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예를 들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말틴 루터(탁상담화)가 지적한 것처럼 신약 성서가 헬라어로 씌어지긴 했지만 헤브라이즘(Hebraism)과 유대적인

표현들로 가득차 있다. 그는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고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히브리어로 성서를

읽는 사람은 샘솟는 물을 샘터에서 마시는 사람에 비유하고, 헬라어로 읽는 자들은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는 자들에,

그리고 라틴어로 읽는 사람들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자들에 비유하였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 사상과 관습, 언어, 종교에 익숙해야 한다.

신약 성서가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지긴 했지만, 예수께서는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헬라어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헬라어를 연구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발견하는데는 큰 도움을 주지만, 예수의 본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예수의 본래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사용하신

어떤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를 현재 형태의 헬라어로 옮겼겠는가를 살피는 것이 헬라어 자체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9)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와 만나셨을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으셨다. 베드로는 그 질문에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학자들은 여기에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헬라어에 주목한다. 예수의 질문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가 처음 두 번은

아가페로 되어있고, 마지막 사랑은 필레오로 되어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사용한 단어는 3번

모두 "필레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발견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요구하신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필레오적인

사랑이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구분하는 것은 헬라 철학에서이지,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께서 아가페나 필레오 같은 전문적인 헬라어 용어를 사용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 21-48) 산상보훈에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

"(ego de lego hymin)라는 표현이 6차례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그러나"라는 역접 접속사로 인해 예수의

윤리를 구약의 윤리와는 반대되는 반제(antitheses)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이 가르침은 예수의 독특한 권위(completely unique claim to authority)를 잘 말해주며(Karl Barth), 유대교나

랍비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Michaeel Schmaus, Georg Eichholz). 여기에서 "그러나"로

옮겨진 헬라어 de는 대부분의 경우 역접 접속사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표현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va ani omer lachem이 된다. 이는 흔히 랍비들이 보충설명을 하거나 의미를 심화시킬 때 사용하는 관용구로서

(Mechilta Exodus Jethro 9; Tos Yota 6:6-11; Tos Bik 1:2), 직역하면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는 뜻이다.

 

랍비들은 이 표현을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배웠다(들었다)" 또는 "이렇게 이렇게 씌어있다"는 표현 다음에 그 뜻을

심화시키거나 재해석할 때 사용하였다. 예수의 경우도 꼭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상대화하시기 위하여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심화시키고 재해석하시기

위해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Lapide, 44-45).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눅 20:9-16)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준 주인이 몇차례 종들을 보내서 소출을 맏아오게

하였으나, 그 때마다 종들을 다 죽이고는 소작료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모내야겠다. 설마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생각하고는 아들을 보냈으나,

그마저도 죽였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서,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를 지칭한다.

여기에서 "사랑하는"은 agapetos로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yachid이다.

구약 성서를 번역함에 있어서 70인역에서는 yachid를 agapetos로 옮겼다.

그러나 yachid라는 단어는 단순히 사랑한다는 개념도 갖고 있으나 대개는 "유일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가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것같다. "이제 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있었다"(막 12:6).

이 비유가 기독론적인 비유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단순히 "사랑하는" 아들의 비유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외아들"의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Young, Jesus and His Parables, 284-289). 2. 신약 성서

가운데는 유대적인 표현에 대한 이해없이는 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서 한두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마 16:1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 예수께서는 흥분하셨다.

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예수의 반응 가운데서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겨주셨다.

그러면서 이러한 권한을 그에게 부여하셨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천국문을 열고 닫고 하는 권한에 관한 말씀이었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네가 땅에서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요 네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리라."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은 열고 닫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매고 푸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은 무엇인가?

"매다"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asar이며, 풀다는 아람어로는 share, 히브리어로는 hitir이다.

이 단어들이 본래 의미하는 것은 무엇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이다(Samuel Tobias Lachs, A Rabbinic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57;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94; Alfred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531). 즉 무엇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권한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을 위한 신약 성서(The Jewish New Testament)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네가 땅에서 금하는 것은 하늘에서도 금할 것이요, 땅에서 하락하는 것은 하늘에서도 허락될 것이다."

 

랍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들의 해석은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거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랍비들의 해석(구전으로 전승된 Oral Law)을 집대성한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서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다.

랍비들은 유대인들의 행동 규범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규정한 것은 곧 하나님이 규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이 금한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으로, 그리고 그들이 허락한 것은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랍비들이 규정한 것은 금지 규정들뿐이다. 성서가 허락한 바 이외에는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랍비들은 이러한 권한들을 갖고 있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과 하나님의 백성의 행동 규범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랍비들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교회를 치리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이러한 권한을 행사해야 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권한과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이 결정 사항의 효력은 이러한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권한이 어떻게 행사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특별히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잘 나타난다(행 15장; Edersheim, 917).

교회는 바로 이러한 권위에 근거하여 중요한 결정들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에서는 후대에 매고 푸는 것을 용서와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Edersheim, 531).

"이 땅에서 죄를 풀면(용서하면) 하늘에서도 풀(용서할) 것이요, 땅에서 매면(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매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용서와 관련하여 매다 풀다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8:18).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 20:23).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어두우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마 6:22-23).

 

영어 성서에서는 좋은 눈(성한 눈)은 single eye 또는 good eye로, 그리고 어두운 눈은 evil eye 또는 bad eye로 옮겼다.

물론 시력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눈을 마음의 눈으로, 즉 양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영적인 눈, 즉 영안(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느냐 안 열렸느냐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예수에게서 이 말씀을

직접 들은 1세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였겠는가?

눈이 선하다 악하다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도 나오는데, 항상 물질의 사용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다.

물질에 대하여 인색한 사람을 악한 눈을 가진 사람으로, 관대한 사람을 선한 눈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 15:9; 잠언 23:6; 28:22).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악한 눈은 떡을 탐하고 그의 상에서 인색하니라"(시락서 14:10). "선한 사람은 어두운 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가난한 사람에게 바리를 베풀며,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긴다"

(베냐민의 유언 4:2-4). 미쉬나에서도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관대하게 사용하나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다. 랍비들은 좋은 눈과 겸손한 마음, 겸헌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제자들

가운데 속하나, 악한 눈과 영적인 교만과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은 발람의 제자들에게 속한다고 가르쳤다

(미쉬나 Avot 5:22). 랍비 엘리에제르는 의로운 삶의 기본은 악한 눈을 버리고 선한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미쉬나 Avot 2:13-14).

 

이처럼 선한 눈이나 악한 눈은 1세기 당시 많이 사용된 히브리 관용구로서,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올바르고 관대하게 사

용하는 사람을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으며, 인색하며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사람을 악한 눈을 가진 사

람이라고 했다(신 15:9; 잠 23:6; 28:22).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말씀의 컨텍스트(마태복음 6장 19-34)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지는데, 여기에서는 물질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덧붙이자면, 본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성한 눈 또는 좋은 눈이라는

표현보다는 "선한 눈"이라는 표현이 더 나며, 어두운 눈보다는 어두운 눈이라는 표현보다는 "악한 눈"이라는 표현이 낫다. 3.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예수와 그의 청중들은 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추가 설명없이도 청중들은 예수의 말씀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러한 예들을 들어보기로 하자.

 

탕자의 비유(눅 15:11-32)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우는 비유 가운데 나오는 둘째 아들을 왜 우리는 탕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가 탕자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그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죄는 무엇인가?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살았다.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단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의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또는

그의 불효 때문에 그를 탕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비유의 핵심을 빗나간 것이다.

 

유대인 청중들이 예수에게서 이 비유를 들었을 때, 그들이 가장 흥분하며 "세상에 그런 불효막심한 놈이 어디있는가?"

하며 혀를 찼던 장면은 그가 집을 떠나는 장면도 아니고, 그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장면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재산을 다 탕진했다는 말에 두손을 불끈 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유산을 미리 상속해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씀을 꺼내시자, 거기있던 청중들은 서로 어리둥절한채 "아니, 세상에 그런 몹쓸 놈이 있나?"라고 말하면서

웅성거렸을 것이다. 청중들이 가장 분노를 느꼈던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다.

 

이유는 이렇다. 당시의 유대 상속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녀들에게 유산을 상속해

주거나 아버지에게 상속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어있었다. 설혹 재산을 분배해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기로 한 땅을 저당잡혔다가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저당잡은 사람은 그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재산권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미쉬나 Baba Batra 8:7).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자녀들은 재산을 요구할 수도 없었고,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의 유대 관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요구는 이런 뜻이다. "아버지, 나에게는 아버지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유산이나 상속해 주십시오." 그는 유산을 요구함으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한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필요없으니 재산이나 물려달라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한 도덕적인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탕자였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아버지를 떠나 "먼나라"로 가서 살았다.

그러기에 나중에 돌아와서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울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자지간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유산을 상속해서 먼나라로 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촛점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단절에 있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기 때문에

탕자였던 것이다. 4. 때로 우리는 복음서나 바울 서신을 우리의 전이해를 가지고 이해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삶의 자리에서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었겠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예수의 청중들이나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어떻게 이해되었겠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 다음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서 한 예로 십자가를 들어보기로 하자.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 16:24). 예수께서 제시하신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 하면 고난과 희생, 자기부정을 먼저 연상하게 된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원과 용서를 상징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인류애를

상징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2천여년동안 십자가의 기치아래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을 받아온 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하셨을 때, 십자가의 의미를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하였겠는가?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직까지 제자들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이나 용서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박해의 상징이었다. 당대의 역사가 요셉푸스는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갈릴리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인들은 아무런 특별한 이유없이도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십자가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 의한 유대인들의 박해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의해 부당하게 수난과 박해를 받은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난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이

말씀을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에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박해에 대한

경고를 주는 컨텍스트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도 더욱 분명해진다.

 

성서에서 최초로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예수 말고 또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이 있었는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향해 갈 때, 이삭을 정죄받은 사람으로서, "자기등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처럼" 나무를 지고

갔다고 하는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창세기 랍바 22:6). 기독교에서도 이삭을 예수의 모형으로 보기도 한다.

이삭의 희생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삭처럼 자기가 달려 죽게 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셨다. 이삭도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데 사용할 나무를 손수 등에 짊어지고 형장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유대의 랍비들은 십자가로 이해를 한 것이다.

5. 우리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렴을 갖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동방 박사들이 3명이라든지,

그들이 낙타를 오고 왔다든지, 사울이 바울로 그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믿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보탠다면, 최후의 만찬 자리에 제자들만이 참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된 고정관렴이라는 것은 성서의 유대적 배경을 살펴볼 때, 잘 드러난다.

 

최후의 (유월절) 만찬(마 26:17-30) 성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에는 뒤에서

어렴푸시 비추어 오는 빛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이 예술적으로는 걸작품이지만,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유월절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에 행해진 유월절 만찬이다. 이 유월절 만찬은 세데르라고 하는데, 해가 진 다음에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행해지는 하나의 의식이다(막 14:17). 그러나 이 작품은 환한 대낮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이 만찬이 서양식 테이블에서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넌센스이다.

그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였다(요 13;12). 한편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메뉴를

보면, 보통 먹는 빵과 물고기이다. 오병이어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월절 만찬에 준비되는 음식은 포도주와 누룩 없는 떡과 구운 양고기, 쓴 나물 등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최후의 만찬에 12제자들만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만찬석상에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 모두가 참석했는지, 아니면 그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만이 참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이러한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하고만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고정 관렴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유월절 만찬은 본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만찬을 들게 되어 있다(출 12:3-4).

가족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못했으면, 그룹을 지어서 여럿이 함께 지키도록 되어 있다.

예수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것이었다.

또한 유월절 만찬 자리에는 아이들도 참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집안의 가장 큰 남자 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오늘 밤이 다른 날들과 다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때서야 아버지가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이 유월절 만찬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유월절 만찬 의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자녀들에게 출애굽을 회상시켜주는 일이다

(출 13:8; 탈무드 Pesachim 116a). 따라서 아이들이 빠져버린 유월절 만찬 의식은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은 그들만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오지 않고 그들의 가족들

(어머니,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그들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올라왔다

(마 27:55-56; 막 15:40-41; 눅 23:49; 요 19:25). 그런데 가족과 함께 지키도록 되어 있는 유월절 만찬 의식에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은 내버려두고 예수와 제자들만 유월절 의식을 거행했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온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서이다

(마 27:55; 막 15:41; 눅 23:49). 그 여인들이 유월절 만찬을 준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자들 둘이 그 만찬을 다 준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도록 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직접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여인들이 준비하는 것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들도 모두 그 자리에 참여했을 것임에 확실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관례였다.

 

예수의 승천 이후, 12라는 숫자를 중요시하였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한사람이 더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제자)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라야 했다(행 122).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바사바라고 하는

요셉과 맛디아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맛디아가 뽑혀서 12제자단에 들게 되었다(행 1:21-26).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들과 함께 예수 곁을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셉과 맛디아는 바로 그들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며,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모든 순간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던 성만찬의

자리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는 단순히 제자들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석했던 것이다(Joseph Stallings, Rediscovering Passover, 153-157).

6. 예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이 주어진 컨텍스트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대부분 본래의 컨텍스트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컨텍스트는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설정되어진 컨텍스트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말씀들은 유대적 배경을 이해할 때, 그 컨텍스트를 발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마 6:1-18) 산상설교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관한 세가지 주제를 가지고

교훈을 주셨다(마태 6:1-18). 진정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해서 가르치셨는데, 그 내용이나 형식이 동일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이 세가지 주제를 서로 연관시켜서 가르치신 것일까?

이 가르침의 배경은 신년 축제(Rosh Hashana)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새해(9월이나 10월경)가 되면 열흘동안 신년

축제를 벌인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경건 생활에 힘쓴다. 그들은 이 기간동안에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힘쓴다. 그리고 마지막 열흘째 되는 날에는 모든 민족이 다 의무적으로 금식을 하고,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들어가게 되어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죄사함을 선포한다. 이 날이 바로 대속죄일이다. 신년 축제의 마지막 날이 바로 대속죄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신년이 되면 먼저 영적인쇄신 기간을 갖고, 모든 지난 날의 죄를 사함받은 후에 새출발을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유대인들처럼 신년이 되면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힘쓰셨을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대 속죄일에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이러한 경건 생활에 힘썼던 것이다.

그들은 이 기간동안에 얼마나 열심히 신실하게 구제(선행)를 베풀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 그 이름이

생명록(의로운 자들의 명단)에 기록되어질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탈무드 Sanh. 13:3).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년 축제를 그들의 이름이 의로운 자의 명단에 오를 수있는 기회로 여기고 열심히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힘을 썼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신년 축제시에 행하는 이러한 종교적 행위들을 염두에 두시고

올바른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이다.

 

부활 논쟁(마 22:23-33)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와서,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결혼하였는데,

하늘 나라에서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예수와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때 예수께서는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부활의

증거로서 대개 이사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예언서들이나 시편을 인용하였다

(예를 들면 다니엘 12:2, 이사야 25:8, 시편 73:24 등). 그러나 예수께서는 널리 알려진 이러한 구절들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출애굽기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구절보다는(이 구절을 부활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리새인들이 많이 인용하던 구절들이 더 부활을 더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편이나 예언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인용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예수께서 아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경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예언서나 시편의 말씀에 그렇게 큰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설복시키기 위해서는

오경 가운데서 성경을 인용을 해야 했던 것이다. 오경 가운데서도 신명기 31:16이나 32:39 등이 부활을 증명하는

본문으로 바리새인들은 이해하였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 구절들을 부활과 연관시키는 것은 컨텍스트를 무시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러한 구절들을 제시하는 것도 의미가 없음을 예수께서 아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경에서 성경을 인용하시되, 그러한 구절들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구절을 인용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