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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말씀에 근거해 세속정부의 허상들 파헤쳐야

하나님아들 2021. 5. 15. 10:52

교회는 말씀에 근거해 세속정부의 허상들 파헤쳐야 | 김재성박사

진실 2021. 2. 4. 09:13

http://blog.daum.net/kkho1105/23117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의 정치적 책임 (8·끝)

 

김재성 칼럼]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의 정치적 책임 (1)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들과 의무들과 사명들 중에는 정부와 정치적 사항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성경적인 관계정립을 위해서는 교회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지난 날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가 정치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떤 사건들을 경험했으며, 칼빈주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공헌을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중요 정치적 사상들과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오늘날 교회의 정치 사회적 역할을 위한 대안마련에 시사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종교개혁은 가장 본질적으로 근대사회로의 발전이었으며, 전 세계 시민들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디딤돌을 제공하였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후로, 개신교 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왕국들의 지배자들에게서 엄청난 핍박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시민전쟁을 감행했고,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는 개신교 교회의 생존을 위해서 종교전쟁을 겪었다. 합스부르크 왕국(스페인과 오스트리아)과 개신교 제후들 (네델란드, 스웨덴 등) 사이에 삼십 년 전쟁 (1618-1648)이 벌어졌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The Peace of Westphalia)으로 종결되었다.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입헌군주제가 견고해졌고, 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정착했으며, 마침내 네델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기독교 정당의 이념을 내걸고 집권하여 시대의 과제를 감당해냈다.

 

 

 

1. 칼빈의 교회론과 정치에 관한 교훈들

필자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 칼빈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대 종교개혁자의 지도자들이, 루터와 츠빙글리를 비롯해서 서로 존경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무조건 답습하지 않고, 창조적인 기여를 남겼기 때문이다. 당대의 논쟁거리였던 성찬론에서도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기념설에서 아쉬움을 발견하고, 독자적으로 성경적인 견해를 찾아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루터와 츠빙글리와 달리, 칼빈은 교회가 세속 정부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가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확실한 제도로 정착시켰다. 동시에 칼빈은 교회 혹은 성직자가 세속 정치를 통괄하는 신정통치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nontheocractic). 루터가 작센주의 군주 프리드리히의 권위 아래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교회가 단독적인 권한을 확보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칼빈은 파악하였다. 또한 츠빙글리가 사역했던 취리히에서도 시당국의 권위 아래서 교회의 모든 개혁적인 조치들이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 칼빈은 교회가 성경적으로 완전히 개혁되려면 이런 세속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자치권을 확보하고 스스로 갱신해 나가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특히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삼 년 동안 머물러 있던 시기에, 마틴 부써가 제시한 교회자치권이 시의회에서 부결되는 실패를 목격했었고, 이것을 교훈 삼아서 제네바에서는 교회의 독립권을 확고히 세우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적으로 실현시켰다. 칼빈에게서 중요했던 점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각자의 자율권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칼빈이 일생동안 철저하게 노력하여 세우고자 했던 원칙은 세속정부로부터 개혁 교회의 독립성, 자치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스위스 제네바는 국왕이나 제후들의 지배를 받지 않던 독립 자치도시로 성장했다. 칼빈의 목회방침에 영향을 받은 후에, 제네바는 시민들의 영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유일한 자치도시로 세워져 나갔다. 제네바와 같은 완벽한 신앙공동체로서의 도시건설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교회의 목회자를 세우는 독립적인 권한을 당회가 확보하도록 최초로 개혁한 것은 결국 민주정치의 시초를 놓는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목회자로서 칼빈은 교회를 향한 호소와는 달리, 시민정부의 정치와 의무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경고와 조언과 반대의견을 발표했다. 이러한 입장은 칼빈주의 전통에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서, 베자와 17세기 칼빈주의에서도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주장했다.

16세기의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상황들 속에서 그 누구도 실현시키지 못했던 영향을 발휘한 칼빈은 교회와 시정부와의 독립적이면서 협력적인 관계 정립을 위해서 획기적인 방안을 정착시켰다. 그가 꿈꾸어 왔던 대로 교회의 독립권은 목회자 선발과 임명의 과정에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받는 것이었고, 또한 성도들의 영적인 권징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내용이었다. 칼빈이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법령”(Ordonnances

Eccléiastiques de l’Eglise De Genée)은 1541년 11월 7일, 200인 의회가 수정·통과했고, 시 총회에는 11월 20일 제출되었다. 이 교회 법령에서 칼빈이 주장한 두 가지 새로운 면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첫째, 칼빈의 정치적인 견해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교회의 자치권 확보였다. 그는 교회의 제도 자체를 신약성경의 초대 교회처럼 완전한 자유권을 가진 별도의 기관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최초의 조치를 제네바에서 성공시켰다. 칼빈은 초대교부들의 시대를 근거로 해서, 교회의 독립적인 자치권을 옹호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제정하신 모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받아들여지면 되는 기관이다. 둘째, 권징의 시행을 교회가 완전히 넘겨받도록 한다는 조항이다. 시 행정 당국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영적인 권위에 의해서 주어진 결정에 따라서 시의 형벌로 보충해 주도록 요청하게 되었다.

칼빈의 성취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을 비교해 보자. 외클람파디우스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사역하면서, 그토록 교회의 권징을 자체적으로 자유롭게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지만,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써 역시 목사회가 약간의 부차적인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 받았으나, 시의회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여서 결국에는 그들의 결정을 수용하고 말았다. 루터나 쯔빙글리는 이런 제도 자체를 아예 목표로 삼지도 않았었다. 바젤이나 베른이나 취리히에서나 그 어느 다른 스위스 자치도시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칼빈은 세속 권세들이 교회를 다스릴 수 없으며,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서 교회는 처음부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어느 정도까지 교회가 이런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원리만큼은 인식되도록 칼빈은 남은 생애를 바쳐서 투쟁적으로 싸워서 교회의 존엄성을 인정받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목사의 안수와 성직 임명은 교회 자체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국왕이나 교황이 성직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오직 지역 교회가 자체 목사의 임명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개혁이었다. 제네바 시의회에서도 새로운 목사 후보를 먼저 제출하고 심사를 받도록 요청했다. 칼빈의 주장은 목사회에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지, 시의회가 관장할 사항이 아니라고 맞섰다. 결원이 발생하면 목사회가 먼저 성경 해석에 대해서 심사하고, 목사들에 의해서 다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목사 안수에 일반 시민들의 결정 권한이 없도록 했으며, 1561년 교회법령에서는 시민들이 팔일 안에 항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새로 안수 받은 목사는 시의회에서 맹세함으로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시의회는 목사회가 결정한 사람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칼빈의 정치적인 관점은 그의 『기독교강요』 마지막 부분에 서술되어 있고, 그 외에도 그의 주석들과 신학논문들에 담겨져 있다. 다른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제네바에서 사역한 까닭에, 칼빈은 교회와 국가가 모두 다 시민들의 권위와 자유와 의무들을 인정할 권한이 있음을 새롭게 서술하였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독일에서 루터파 교회는 불합리한 정부의 행정에 대항하는 신학적인 정당성을 심각하게 제기하지 않았다.

 

 

 

 

[김재성 칼럼]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의 정치적 책임 (3)

 

2. 칼빈주의 저항권 이론

칼빈주의 저항이론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담겨져 있는 통곡이자,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기본적으로 잘못된 왕권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성경적 이해가 제시된 곳은 바로 『제네바 성경』의 각주와 해설에서였다.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린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제네바 성경에서 지적된 해설들을 따라서, 합당한 왕의 명령이 아니면 거부할 수 있음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저항 설교의 한 부분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서 징치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당대에 내려져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성경말씀이었다.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로마 교황의 권위가 빛을 잃자, “왕권신수설” (Divine Right of Kings)을 통해서 절대주의 시대에 왕권의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주장한 이론이다. 그 바탕에는 교회에 관해서도 “수위권”(Royal Supremacy)을 주장하는 왕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으니 심지어 영적인 최고권세로까지 스스로 올라가서 정죄하고 심판을 내렸다. 엘리자베스, 제임스 1세, 챨스 1세 등은 한결 같이 왕은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메리 여왕 시대에 유럽 대륙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왕권신수설을 비판한 존 포넷 (1514–1556), 크리스토퍼 굳맨 (1520-1603), 그리고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낙스(1514-1572)에 의해서 저항권이 널리 전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후,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과 예식은 성공회라는 국가교회 체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유럽의 개신교회를 채택하지도 않았던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Elizabethan Religious Settlement)은 “1559년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통일령 (Act of Uniformity, 1559)을 강화하게 되자,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교회를 세울 수 없었고, 단지 칼빈주의 신학과 정신으로 활동을 도모할 수 밖에 없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로 이어지는 스튜어트 왕조에서 왕권신수설은 한층 강화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이던 토마스 카트라잍은 한편으로는 군주제도를 옹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장로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분투노력했지만, 결코 순탄치 못한 삶으로 고난을 감당해내야만 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교성경』 (1568)을 사용하도록 강조했고, 제임스 1세는 “흠정역”을 새롭게 내놓았는데, 세부적인 정치적인 견해는 『제네바 성경』 의 해설과는 달랐다.

 

 

죠지 부캐년(1506-1582)은 생애의 대부분을 학업과 교수, 투옥과 도망자 생활 등으로 점철하였다. 낙스의 종교개혁이 정착되자 1560년경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왕궁에서 어린 제임스 6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후에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양쪽 다 다스렸다. 부캐년은 1566년에 공개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평신도로서 총회의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부캐년은 어린 제임스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꿔보려고 노력했고,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군주가 되어서 왕권의 제한성을 인정하도록 변화시키고자 했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담긴 저서가, 『스코틀랜드 안에서 군왕의 권리』이다.

 

부캐년은 시민들의 저항권 이론을 제시하여 스코틀랜드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부캐년의 정치적 주장들은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기나긴 박해 속에서도 왕에게 저항하다가, 찰스 1세의 동생 제임스 7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제지하고자 1689년에 파면시키고, 명예혁명을 성취하였다. 부캐년의 핵심적인 정치사상은 모든 정치적 권세의 원천은 시민들이라는 점이다. 왕권은 제한적인 것이고, 조건적인 권세를 받는 것이기에, 왕이 시민들을 종교적인 이유로 처벌하고 학정을 가한다면 저항을 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다. 부캐년의 책은 1584년에 의회의 결의로 정죄를 받았고, 1664년에 찰스 2세에 의해서 정죄 당했으며, 1683년에는 제임스 7세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책을 불태웠다.

 

 

프랑스 왕들의 횡포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탄압도 잉글랜드의 사례들과 같았다. 프랑스 종교전쟁이 진행되면서, 강물같이 많은 피를 흘린 위그노들의 저항이 한층 강화되었다. 1572년 8월 23일, 바돌로뮤의 날 밤에 약 5만여 명의 개신교회 성도들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자, 프랑스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저항권에 대해서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오도르 베자 (1519-1605)는 칼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저항권을 옹호하는 글 (Du droit des magistrats sur leur subiets, 1574)을 발표했다.

 

 

네델란드에서도 스페인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를 옹호하는 글을 알투시우스 (1557-1638)가 발표하였다. 그는 칼빈주의 정치사상가로서 독일의 법조인이었다. 1609년에 스페인에게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지도자들하고 투쟁을 지속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교회의 정착을 위해서 국가를 장악하고 있던 각 지방 귀족들과도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항구도시 엠덴은 네델란드 상인들만이 아니라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잉글랜드와 신성로마제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요충지였는데, 독일 루터파 군주들도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강력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1571년과 1610년에 두 차례 개신교회의 총회가 엠덴에서 개최되었으며, 화란 개혁교회의 심장부이자, “북부의 제네바”로서 지켜나갔다.

 

 

칼빈주의 저항권 이론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김재성 칼럼]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의 정치적 책임 (7)

 

 

3) 헤르만 도이베르트

20세기에 접어들어서, 카이퍼의 칼빈주의 사상을 정치와 국가의 영역에 적용시킨 학자가 헤르만 도이베르트(1894-1977)이다. 자유대학교에서 철학적 신학을 가르친 그는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서 저술을 남겼다.

도이베르트는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법적 영역이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규정했다. 삶과 생각의 영역들은 다른 것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영역들이다. 성경적인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창조의 질서가 나오는데,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성의 구조적 원리들이 포함되어 있다.

도이베르트느 국가 우선주의에 사로잡혀서, 즉 국가와 가정을 혼돈 하는 것에 반대했다. “내적인 구조적 법률에 따라서 볼 때에, 가정은 하나의 작은 교회공동체가 아니요, 작은 규모의 국가 공동체도 아니요, 경제적으로 검증된 조직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어째서 군주제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정부의 정치적 형태가 결혼의 내적인 영역 안에 이식되어질 수 없는 이유이다. 반대로, 국가는 가정이나 다른 작은 기관들의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없다.

경험적으로나 본질적인 면에서나, 국가는 가장 확실한 심판적 기능을 갖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국가개념의 위험성에 대해서 반복해서 경고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영원한 로마 제국의 오래된 이념으로 돌아가려는 책동이었다고 비판했다. 독일에서는 나치운동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견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위기에 대해서 경고했다. 초월적인 내적 개인성을 무시해버리고 국가 구조의 우선을 주장하는 정치이론과 사회이론들은 최근에 나타난 악한 현상들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이론 속에는 개인과 가정을 무시하는 가운데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으며, 결국 국가의 위기가 초래된 적이 많았다.

도이베르트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국가 경배주의라는 것인데, 전적으로 비기독교적인 주장이라는 교훈을 강조하였다. 국가주의자들은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것만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거짓된 것이다.

 

카이퍼의 칼빈주의를 정치에 적용시킨 도이베르트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5.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논쟁들

칭의와 의로움의 전가 교리는 낡은 신학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결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고문서에 담긴 불필요한 사색도 아니요, 도서관의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죽은 교리체계가 아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논쟁을 제기하는 주제다. 종교개혁 오백주년 기념대회가 전세계 곳곳에서 개최된 2017에도 칭의 교리와 구원론에 대하여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루터와 칼빈 이후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형벌적이고 대속적인 구속사역이라고 설명하여 왔다. 헤르만 바빙크는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오직 고난으로만 한정되기 때문에, 수동적 순종의 개념만을 수용하는 자들은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은 인간으로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완전한 순종의 열매이다.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1547)에서 칭의교리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함없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선행과 공로 사상에 근거하는 신인협력설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의 신학사상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칭의교리는 개혁주의 교회가 서느냐 무너지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체인 것이다.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들, 금욕주의자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중보사역에서 배제시켰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아직까지도 로마 가톨릭 신학과 알미니안주의를 붙들고 있는 공로주의와 자유의지를 근간으로 하는 자발적인 결단을 강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반대하였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취급하던 펠라기언주의가 부활하는 느낌이요, 알미니안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피스카토르 (Johannes Piscator, 1546-1625)가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반대하자, 프랑스 가프 총회에서 그의 견해를 거부했고, 제네바의 정통신학자 프랑소와 뛰르땡이 이를 철저히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청교도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히 반대했는데, 제임스 어셔 감독이 주도한 아일랜드 신앙고백서에서도 피스카토르의 견해를 배격했다.

파레우스 (David Pareus, 1548-1622)는 독일에 살던 개혁주의 신학자였으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근거로 하는 의로움의 전가를 반대했다. 그는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의 제자로, 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의로움의 전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사람의 의로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칭의의 전부는 죄의 사면일 뿐이라고 하였다.

돌트 총회에서도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거부하는 논쟁을 벌였다. 이들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다소 이견들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결국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의 전 생애 기간에 걸쳐서 한결같이 자원하는 심정으로 수행되었음을 드러내고자 사용한 것이며, 총체적으로 구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성취되었음을 강조했다.

17세기 초반에 등장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쏘씨니언들과 아미랄디언들은 행위언약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자리에서 각자 사람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결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동적 순종”에 대한 거부자들은 주로 현대 신약학자들의 대속교리에 대한 곡해에 기인하고 있다. 순종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적 형벌 당하심이라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풀이했다. 십가자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처참하게 제물로 바쳐진 대속적 형벌의 교리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도 역시 다른 속죄론들의 도전을 받았다. 수동적 순종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죄 없으신 어린 양이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켰다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죄인을 대신하여서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으심을 의미한다고 개혁주의 교회는 고백한다.

그러나 신학사에서 속죄론에 관련된 교리들의 논쟁을 살펴보면, 이미 수많은 변질과 가 있었다. 이레니우스와 동방교회의 재현설, 오리겐의 속전설, 안셈의 만족설, 아벨라르의 도덕적 감화설, 그로티우스의 도덕적 통치설 등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해석들이 있다. 이들은 심지어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온 인류의 죄를 덮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왜곡들로 인해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속죄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거부하게 되었다.

알미니안주의에 맞서서, 청교도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행위언약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그 내용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명쾌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단지 수동적 순종만을 삽입하려던 주장을 투표로 거부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어야만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에,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명시적으로 구체화하지 못했던 이유는 반율법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야할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탁월한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술들에서 능동적 순종의 교리에 대한 확고한 설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개발이 이뤄져서, “칭의론 논쟁”이 벌어졌는데 적어도 서로 다른 네 가지 신학적 관점들이 (진보적 개혁파, 로마 가톨릭, 신성화, 바울 신학의 새관점 등) 나와서 전통적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칭의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전가 받는다는 정통신학의 교리를 거부하는 “바울 신학의 새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코 건전한 성경적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속죄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자 정사와 권세에 대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라는 것을 신적인 속성으로 분류해서, 성도들에게 전가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서, 루터와 칼빈의 전통적인 개혁주의 칭의론과 전가 교리를 비판하는 소위 “바울신학에 대한 새관점”을 제기한 신약 학자들이 (N.T. Wright, James Dunn, E. P. Sanders, 등) 내놓은 연구들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의 피흘리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새관점”신학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하였다. 이들은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과 의로움의 전가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있으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믿음의 역동성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처럼 첨예한 논쟁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믿음으로 그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다시 조명되었다.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논쟁들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5. 한국교회의 실천적 과제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과연 어떻게 실천하고,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날,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을 형성해 왔던 분들이 분투노력했던 것과 같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도 현실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남겼다. 단순히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만 그치지 않고, 개혁주의 교회는 문화의 전 영역에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 청지기 사명을 놀라우리만큼 탁월하게 감당하여 왔다. 그러한 유산과 업적들이 지속되기 위해서 부단히 우리의 신학적인 감각을 새롭게 해야만 한다.

첫째로, 교회는 세속정부의 허상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특히 인간에 대한 신뢰성을 지나치게 극대화 시키는 정치적 공약들과 그 허상들과 속성들을 철저히 비판해야만 한다. 현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는 국가적 표어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람의 본질적 요소에 잠재하고 있는 허망하고 가식적인 성격을 분명히 직시하여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과 자아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칼빈은 우리의 자아가 “자기 사랑으로 눈이 멀고, 취해버렸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는 인간 본성의 내적인 선을 낙관적으로 강조하는 인본주의 정치학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성경은 결코 낙관적인 인간론을 인정한 적이 없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한다” (렘 17:9-10).

마르크스는 인류평등주의 실현을 주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모든 개인들이 타인을 향해서 배려하고 보호하며, 개인적인 재산에 대해서 책임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1917년부터 1989년까지 비인간적인 공산주의를 강요해온 소련 사회가 결코 승리하지 못한 것도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교회는 인간 본성의 어두움에 대해서 직시하기 때문에, 정치선동가들이 말하는 허황된 낙관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둘째로, 교회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행되는 탈선과 부패를 똑바로 직시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도록 참여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제도 안에서도 얼마든지 불의와 불법이 자행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고발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 항상 먼저 강조하여서, 오직 세상에서의 물질적 풍요와 문명 발전에 빠져있는 국가의 계획과 방침들을 고쳐주도록 해야만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 선 칼빈주의 교회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를 향해서 가장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바른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다. 교회는 그 어떤 정부에 대해서든지 유토피안적인 이상을 선전하는 자들의 헛된 우상숭배를 비판하고 그 허상을 완전히 밝혀주는 일에 힘써야 한다. 정당이나 정부를 과신하는 자들에 의한 통치는 민주적인 사회라고 하더라도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크다. 민주주의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단정 할 수 없다. 성경은 사람의 자유가 궁극적 가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유는 반드시 제한을 받아야만 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서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롬 6:16-20). 진정으로 자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교회는 다수결제도로 정당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그 정치적 결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음성도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야 한다. 인간의 주권 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인정할 때에, 대의 민주주의라는 세속장치가 윤리와 정의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흐룬 반 프린스터가 민주주의 정치제도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만병통치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일찍이 리챠드 백스터는 하나님의 주권과 순수한 민주주의가 상호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감지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높이 세우는 신학적인 차원이 없으면,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궁극적인 근거를 바르게 제시할 수 없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가치체계가 분명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가면을 쓴 전체주의가 되고 만다.

셋째로, 교회는 세상에 세워져 있는 국가의 앞날에 대해서 정확하게 종말론적인 희망과 심판의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가 품고 있는 종말론적 교훈들을 소개하고 강조하면서, 이 땅 위에서 이뤄져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의와 진리와 평강”(롬 14:13)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죄악에 물든 통치자들의 시대는 결코 영원하지 못하며, 더구나 정부조직을 지도해 나가는 정권의 이념이나 정당의 강령들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교회가 기대하는 종말론을 잘못 이해하고, 변질시킨 사상들이 성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자들은 자동적으로 인간의 진보가 진행되어서 마침내 유토피아를 향해서 나갈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교회는 현실 역사를 부정하고 회피하는 종말론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히틀러 나치즘처럼, 어떤 이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면 사회 구성원들이 나눔과 평등을 공유하게 된다는 허망한 공약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교회는, 특히 교회를 대표하는 연합단체는, 국가와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성경의 종말론적 교훈을 끊임없이 제공하여야 한다. 국가에서 발표되는 정책들과 정치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안목에서 성경적으로 평가하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지적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국왕의 정책과 불신앙에 대해서 주저함 없이 비판했고, 현실 정치에 대해 지적했다. 솔로몬은 정치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금언은 돈으로는 살 수 없이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그의 일생에 전개되었다. 다윗 왕국의 역사는 인간이 경영하는 국가의 허점을 그대로 노출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 주었다. 즉,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받지 않는다. 교회는 국가와 정부 안에서 분명히 반복되는 인간역사의 오류를 지적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넷째, 교회는 국가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완전케 하는 은혜를 받으며, 섭리 가운데서 보전된다. 성령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셔서 양심을 밝혀서 인류의 죄악을 저지하신다. 창조의 세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심으로서 성령의 은사로 조명을 받도록 하신다.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도 역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다.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피조물 가운데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불어넣어 주신다. 성령의 권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문화와 국가 사회를 위해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 (행 17:28).

 

교회는 말씀에 근거해 세속정부의 허상들 파헤쳐야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