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 영성
유해룡 교수
I. 서론
도시문명과 물질문명 그리고 무기력힌 서구의 기독교 문화로부터 사람들은 점점 내적인 궁핍과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서구에서는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에 근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으로서 무신론 주의가 등장했고, 내면세계의 풍요와 성숙을 꾀하는 인본주의적인 내면운동(혹은 뉴에이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II. 종교다원주의의 뿌리
화이트 헤드(A.N. Whitehead)는 1930년대에 쓰여진 그의 길에서 밝히기를 “제도권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은 ’제일의 원인‘이라는 얼어붙은 이미지 아래에 있는 종교 안에 갇혀 있다’라고 지적했다.1) 여기 얼음의 이미지는 하나님에 대한 상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따스함과 생명감이 넘치는 하나님에 대한 감성적 경험(affective experience)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신론적인 하나님은 위대한 우주의 건축가요, 거대한 탑에 걸려있는 시계의 제조자였지만,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관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은 무한한 우주의 높은 고도 위로 내밀려졌다. 살아있는 하나님 경험의 상실은 기독교가 더 이상 그 사회를 지배하는 당연한 문화거나 공유할만한 가치체계가 되지 못했고, 옳고 그름을 가름해 주는 준거의 틀도 되지 못한다. 헤겔은 말하기를 ‘니체는 이미 죽은 하나님을 축하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2)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어 있다”라고 니체는 그의 책 「Joyful Wisdom」에서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가장 타락된 개념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모순되며 삶을 변화시켜 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니체에 관한한 신의 죽음은 인간해방의 징표이다. 사실 신의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고, 포로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자 하나님은 죽었다. 너 고상한 인간들아 이 하나님은 가장 위엄한 존재이다. 그가 무덤에 누워있기에 당신은 다시 부활한다.”3)라고 니체는 외쳤다.
니체는 1900년 죽었다. 그러나 ‘신의 죽음’의 주제는 미국 신학자 William Hamilton 과 Thomas Altizer에 의해서 다시 부활 되었는데, 그 때가 바로 1960년대이다. 시사 주간지 Time지는 1966년 부활절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사실 Hamilton 과 Altizer는 신의 죽음의 운동과 매우 밀접한 저서가 이미 1961년에 Gabriel Vahanian에 의해서 "신의 죽음(The Death of God)"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후기 기독교 시대의 문화”라는 부제가 붙었다. Vahanian은 그 후 1978년 '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라'4)부언했다. 해밀톤과 알타이저는 바하니안 이상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알타이저에게 있어서 신의 죽음이란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 시대의 하나님 경험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전해주고 하는 메시지는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개념의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회복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복음이란 분명히 구원적인 행동으로서 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죽음의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5)
로빈슨은 1963년에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기독교적인 신의 비평의 상당부분은 인습적인 신론(conventional theism)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습적인 종교(교회)안에 갇혀진 신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사실 인습적인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비평은 로빈슨 이전의 1956년 Alasdair MacIntyre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무엇이 신학적인 혁명인가?에 대한 답을 하면서, 하나님은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만약 그 분이 숨겨진 초월자라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옳았다.6) 라고 했다. 그는 세상적인 해방에 관련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한시적 세상이라는 객관적인 구조 안에 계시는 실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들의 하나님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부재나 계속성에 대한 의문제기이다. 19세기 말기로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철학이나 신학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그 실체는 인간의 상실감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상실감과 일치되고 있다. 확실히 실존주의 철학자들로부터 그것이 표현되었다. 좌절감 상실감 속에서 그들의 의미하는 신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신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죽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잠재울 수 있는 전능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을 말한다면 ‘어떤 신이 죽었느냐’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입증한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서구의 인습론적인 유일신론을 말하는 것이다. 19-20세기에 걸쳐서 믿지 않기로 선택한 이 신은 17세기의 계몽주의적이고 교리적인 기독교의 산물이다. 당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로 선택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선택의 문제라고 했던 파스칼의 주장은 유일신론적인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쇄신이다. 잘못되고 부적합한 신관을 믿고 주장하는 것은 무신론보다 더 심각한 믿음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견해를 버리는 것은 필연적인 정화의 작업이다. 역설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의 무신론은 거짓 신들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드(Freud)는 신앙을 사상과 행동의 틀안에서 보았다. 1907년쯤 그가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라는 저서를 발간하면서 프로이드는 종교를 근본적으로 병리적이고, 혼란된 상태, 그리고 보편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신경증 현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사실 프로이드 자신은 그 종교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의 모델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우주적으로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미성숙의 형태이며, 어린 시절 성적인 욕구가 성숙한 어른의 상태로 탈바꿈하는데 실패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병리적인 요소’라는 프로이드의 비평에서 그는 ‘믿음의 비진리성’이라는 가정의 문제로 옮아가고 있다.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라는 저서의 제 5 장은 단순히 신앙의 심리적인 원인들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허위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프로이드가 언급하는 ‘종교의 비진리성’에 대한 가정은 심리적인 분석에 의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인습적인 이성주의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문화적 종교에 대한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나, 그의 작품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프로이드는 당시의 믿음과 신앙적 실천이 상당히 신경증적이고 혼란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7) 물론 이러한 프로이드적인 통찰력이나 이해는 무신론자들이나 비신앙인에게도 적용되는 비평이기도 하다.
정통 기독교와 여러 이단들의 주장 사이에서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정통주의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주장대로 이단들은 거짓 선명성에 의지하면서 역설(paradox)를 거부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그것이 역설적인 요소와 창조적인 의혹이 있을 때만이 자라고 성숙되어 간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성(mind)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렴풋한 믿음 안에서 무지의 길을 통하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알려진다는 것이 정통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믿음은 끊임없는 의문의 과정으로서 보여진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혼란된 의문을 제시한다. 창조적인 의심이 없는 종교는 종교를 그럴싸한 안전보장에 이르도록 타락시키고, 종교는 경직되고 잔인하게 된다. 영성적인 삶의 전면모는 의심의 구름 속에서 고통을 받기고 하고, 심각하게 상처를 받기도 해야 한다.
인습적인 종교의 눈으로 보기에는 믿음과 의혹은 마치 무신론자처럼 보인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취급을 받았다. Justin Martyr는 자기 스타일로 만들어진 신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무신론이라는 타이틀을 환영했다. 하나님의 세계는 끊임없이 경험되어지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하나님이다. 성서적인 믿음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경험 가운데에서 알려지는 하나님이시다. 경험없는 하나님은 지적인 추상의 하나님으로 남는다.
이러한 물결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문화적인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세대들은 모순적인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매우 실용적인 듯하지만 내면에는 초월적인 세계에 강렬한 갈구가 있다. 이성적이면서 초이성적인 세계(신비의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미 서구사회에서 겪었던 몸살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와 가장 유사한 구조와 현상을 지닌 사회가 미국이었다. 그 만큼 그 사회가 이 사회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면 보다 적합한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가 겪고 있었던 종교다원주의 운동은 대강 다음과 몇가지의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III.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운동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하자면 6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을 말한다. 그 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조금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50년의 미국의 형편을 고려한다면 그 다음 20여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후 미국은 세계 공업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 사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산업기반을 온전히 보존한 나라는 미국 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미국은 유래없이 최대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 전후시대에 늘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때를 일컬어 baby boomer시대라고 한다. 이들이 바로 60년대의 미국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냈다.
물질적인 풍족함, 과학 기술의 발달, 그리고 높은 교육수준을 받은 이 배이비 붐 세대는 엄청난 지식욕과 자유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물질의 부유와 문화적 자유의 물결을 따라 미국 사회는 물론 교회나 신학적인 흐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세계적인 석학이나 모든 분야의 학문이 풍요와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사회를 몰려왔다. 무엇이든지 제한받지 않고 쏟아져 들어왔다. 자유와 지식욕이 넘치는 베이비 붐 세대들은 그들의 훌륭한 고객이 되었다. 신학에서도 학문은 자유롭게 열려져 있었다. 교회의 영적인 부흥 운동은 점점 일찌기 계몽주의 시대를 방불하는 냉랭한 지성주의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유럽대륙을 거쳐 미국의 60년대는 가히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60년대 미국은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고 회의케 하는 일들이 터져나왔다. 1963년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곧 이어 벌어진 마틴 루터 킹목사의 암살,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본격적인 개입, 극단적인 냉전의 분위기는 젊은이들을 분노케 하고 절망케 했다.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의 문화, 종교, 사회를 저항하는 일단의 반문화 운동 (counter culture)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은 60-70년대에 미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트족(Beat Generation: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성인이 된 젊은이들로, 냉전으로 인한 환멸에서 발생한 것으로, 선 따위의 신비적인 방법에 의한 현실 이탈과 사회적, 성적 긴장으로부터 해방을 신봉한다.)과 히피(Hippie)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틀에 박힌 생기없는 물질문명과 기술문명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객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관에 더 이상에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관적인 신비의 세계로의 탐닉을 시도하였다. 이 반문화 운동은 환각제와 비교(occult)를 주관적인 신비의 경험의 매개체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심리학자 Timothy Leary,(1920 --)나 철학자 알란 와츠(Allen Watts, 1915-1973), 시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 --)등이 LSD와 같은 환각제 등을 신비적인 내면세계의 체험 내지 종교체험의 정당한 매개체로 인정해 주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티모디 리어리는 LSD 사용을 종교적 순례요 성례라고까지 주장하였다.8) 마음을 바꾸는 화학적 작용과 하나님을 향한 열망 사이의 관계성은 1960년대의 사건만은 아니다. 이미 고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카나비스(cannabis)는 기원전 6세기에 Zend-Avesta에서 언급되어 있고, 리그 베다(Rig Veda)의 1/10이 soma (거룩한 버섯과 일치되는 약초) 라는 약물 사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약초는 일찍부터 명상의 보조제로서 그리고 내적인 영적 여행의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마술적 음식의 개념으로서 사용되었다. 종교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경험의 결과인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일산화 질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마음의 본질과 의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9) 이렇게 역사적으로 뿌리를 가지고 있는 약물과 의식의 관계가 1967년 LSD (Lysergic Acid Diethylamide)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LSD는 1954년에 Worcestershire 에 있는 Powick Hospital에서 소개되었는데, 1950년대에 걸쳐서 그것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로서 심리치료 영역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LSD와 다른 환각제 사용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사람은 Timothy Leary 였다. 그는 확실하게 신앙운동의 틀안에서 LSD를 사용했던 사람이다. LSD의 사용은 신앙적인 순례요 성례라고 했다. 모든 종교는 어떤 순간적인 환상의 영행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LSD 여행은 고전적인 환상의 신비적 여행이다. LSD와 함께 들어간 차원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대면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들과 일치한다. 이 여행은 곧 하나님의 여행이다. ‘나는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당신을 가르칠 수 있다’라고 했다.10)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던 소외된 일단의 젊은들 사이에서 환각제에 의한 체험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높아졌다. LDS는 그들로 하여금 제한적인 개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실제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바드의 Leary의 주변에서 젊은이들이 LSD를 복용하였는데,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얻기 위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chlorpromazine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신경증적인 상태를 치료하는 약품이었다. 그런데 LSD의 해독제가 바로 chlorpromazine 이다. Leary 세대 이후에게는 LSD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의학계에서나 사회에서 치료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상태를 경험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위험이 따랐지만 그 결과가 하나님의 경험이라면, 그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3년 Brain Wells라는 심리학자는 “Psychedelic Drugs”라는 저서에서 기독교와 진지한 환각제 사용의 중심에는 영적성장을 위한 추구가 있다라고 했다.
하나님께 이르는 환각적인 황홀에 대해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LSD를 통한 경험과 신비가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심문제는 화학적인 작용이 영적 진보의 안전한 기반이 될 수 있느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Allan Cohen이라는 Leary의 제자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어졌다. 1969년 런던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서 그 물질을 적당히 사용한다면 이 물질을 통한 경험은 충분히 극적으로 100%의 하나님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직면한 문제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냐는 것이다. Cohen은 LSD를 통하여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다. “당신이 만약 500 microgramm의 LSD를 복용하면 종교적 경험을 보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경험이 바로 영적성장에 도움이 주느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자면 ‘당신이 경험한 심각한 경험조차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라는 사실이다. 만약 LSD 로 말미암아 매우 강렬하게 사랑하고자 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당신이 사랑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논란의 여지 없이 그것은 '아니다' 이다 (누가 접시를 닦겠느냐라는 심각한 논란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물을 통한 하나님의 추구는 결국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분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에 대해서 어떤 기회를 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약물의 문화로부터 그 약물의 경험을 뛰어 넘는 새로운 영성운동이 자라났다. 이 운동은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의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종교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추구가 개인에게 속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음악이 그들의 세계를 대변해 주었다. 질서잡힌 사고를 할 수 없을 만큼 고출력 앰프를 사용하여 귀가 찌어질 듯한 소음 섞인 밴드와 현란한 조명으로 그들의 심리를 광랑케 하는 록 음악이 출현했고, 또 음악을 통하여 강력하고 자극적인 음향효과를 통해 환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이키델리 록 (Psychedelic Rock)이 나타났다. 이 음악은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불만과 분노를 담아내었고 동시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꿈을 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67년 사흘간 계속된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열린 몬테레이 페스티벌이나 1969년 8월 16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우드스탁(Woodstock)의 록 페스티발은 청년 문화를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뉴욕 센트랄 파크에서는 30만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록 페스티벌은 규칙과 질서를 무시하고 반문화적인 자유를 구가한 전설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때의 배이비 붐 세대를 일컬어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창조성, 여가, 자율성, 쾌락, 참여, 공동체, 모험, 생명력, 자극등을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나 권위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적 의무에 매일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은 당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현실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며, 기독교가 배경이 된 미국의 주류문화나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새 세대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몸부림이었다.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로서의 종교다원주의
1) 내면적인 신의 추구
뉴에이지 운동이란 반문화적이면서 종교적인 성격을 깊게 띄고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모든 종교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각기 다른 표현양식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이다. 그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신이며, 자아이다. 小我는 凡我로 확장되며, 그 범아에서 모든 소아는 일체가 된다. 소아는 범아로부터의 분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종교를 인정하나 배타적인 종교의 배타성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각 종로로부터 필요한 만큼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의 혼합주의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절대적인 초월자에 대한 귀의보다는 내면 안에 있는 신, 각 개체에 존재하는 신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모든 것은 신의 속성을 분여받았다. 표현양식이 다를 뿐이다. 이 신은 비인격적인 힘이거나 거대한 우주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이런 성향을 용납하는 힌두교나 기타 동양의 신비종교에 대해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Bhagabad)"나 "우파니샤드(Upanishads)같은 문헌들이 그들의 사상을 자리잡게 해주는데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 그것들을 통해서 범신론적인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뿌리로 하여 환생을 믿게 된다. 최근에 이 분야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이 미국의 여배우인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이다 그녀의 체험적인 고백을 다룬 “극히 불리한 처지에(Out on a Limb)"에라는 TV 시리즈가 시청자들에게 윤회사상, 텔레파시, 유체이탈과 같은 경험, 체널링(channeling), 외계와의 접촉등 갖가지 신비술의 과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에너지이다. 혼은 그 육체를 떠나 새로운 육체에 머물 때까지 있게 되는 것이야. 그렇기에 환생(reincarnation)이라 부르지, 또한 그것을 죽음 후의 삶, 출생 이전의 삶이라 하지.11) 이것은 영생의 근거를 찾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이다. 이 종교운동의 근거를 준 그들의 영웅은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라즈니쉬 (Bragwan Shree Rajneash), 마하라즈 지(Maharaj Ji) 등의 인도인들이다.
2) 깨달음의 종교추구
요즈음 서양인들은 유대교 및 기독교의 틀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을 동양신비종교에서의 깨달음으로 그 유형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동양의 전통에 눈을 돌리고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와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들을 위해 무언가 제시해 줄 수 없는지 찾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회가 종교의 참된 영적 측면을 상실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직적 종교를 통하지 않고도 개인적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믿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12) ‘동양의 형이상학과 ’새 의식 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것들이 기술주의를 앞세우는 서양정신의 압제적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 사상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우리의 합리주의, 물질주의, 상업주의 문화를 비난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영성적이고 선지자적 역할에 대한 침묵에 의해 생겨난 공백을 메워주는 사람들로 자처하고 있다.
그 동안 전통적 교회가 기독교 내의 중세 신비주의자들이나 이슬람교 내의 수피, 유대교 내의 카발라주의자들 등 직접 경험 및 깨우침을 추구하는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항상 이단자 부류로 취급되어 왔다. 이제 이단자들로 취급된 그들은 기반을 구축하고 있으며, 교리라 믿음을 깨우침이라는 의미로 대체되고 있다. 윌리암 제임스는 “신비적 상태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깨우침의 상태로 인식한다. 이것은 추리적인 지성으로 측정할 수 없는 진리의 심연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3)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만 천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 하나의 깨달음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현자는 자기가 없다는 데서 호소력을 갖는다. 믿음 대신 깨달음의 차원을 소중히 여기는 서양의 뉴에이지 세대들은 고대의 禪家에서 제시되는 尋牛圖(혹은 십우도)에서 그 깨달음의 모델을 찾는다. 소는 의식의 내면 본성, 즉 존재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
3) 인본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신의 추구
인간이 무엇인냐? 스펭글러는 이렇게 주장한다. “내가 하나님인가? 내가 그리스도인가? 내가 무한대(the Infinite)가 부풀어 나는 곳으로부터 당신에게 오는 존재(a Being)인가?...나는 이 모든 것들이요, 그 이상이다.”14) 즉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영적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전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요 과제는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우주 자체가 영적인 실체여서 인간의 삶이 우주의 힘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가이아’ 이론’등이 그 한예이다. 그것들이 환경보호 이론의 강력한 근거를 주기도 한다).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각성함으로서 보다 고차원적인 의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 개인적인 자아와 현상적인 자아를 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는 고자아(The Higher Self)가 있다고 말한다. 이 고자아는 초인격적인 자아로서 신비스러운 수준에서 다른 자아들과 일체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15) 그러므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여 활용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잠재력은 여러 가지 교육기법에 의해서 일깨워질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환경을 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자기 성취와 자기 실현이 인생의 당연한 목표이다. 즉 인간이 처한 모든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능력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사실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일어났다. 1952년 뉴욕의 목회자였던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은 「적극적인 사고의 능력」(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자아의 잠재능력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로버트 술러(Robert H. Schuller)는 ‘자기존중의 신학’에 대해서 썼으며, ‘가능성 사고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만 필과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자기 연민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나 인간의 근원적인 타락이나 죄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작용도 했다.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의 인간잠재개발운동(Human Potential Movement)과 적지않은 공감대와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있다.
4) 구체적인 경험을 주는 신의 추구
인간이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요가나 선이나 마인드 콘트롤, 초월명상 등을 수련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련방법은 명상이다. ‘신지학 협회’(The Theosophical Society)의 창설자인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17) 는 “명상은 침묵이며 말로 하지 않는 기도이며 플라톤이 표현한 대로 신을 향한 영혼의 열렬한 전환이다. 이는 틀별한 선(good)이 아닌 선, 그 자체 곧 우주적인 지고선이다.”18)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명상을 통하여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뉴에이지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라즈니쉬도 “명상을 통해 무한(infinite)으로 될 것이며 그리고 우주적 될 것이다. 그러면 전체(the whole)와 하나가 될 것이다."19) 라고 했다. 뉴에이지 운동에 관련된 이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자아를 우주적인 의식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아의 가장 내면에 이르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가장 완전하고 심오한 실재(reality)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이다.20)
퍼거슨은 체계적이고 적극적 탈바꿈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1) 뉴에이지 시대의 사람들은 우연한 탈바꿈을 기대하기 보다는 체계적인 탈바꿈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갖가지 훈련 방법을 도입한다. 특별히 심리학적인 요법이나 동양종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수행방법을 선호한다 예를 들자면:
* 음악---뇌는 음정과 박자에 민감하며, 음악은 오른 쪽 뇌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정서적이고 안정된 뇌파를 형성케 한다. 심상 구상을 병행한다.
* 자조 및 상조 조직망 --- 예를 들자면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 과식 치료 모임등이 있는데 그 규칙을 보면, 의식의 진행과정과 변화에 유의할 것,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다짐할 것, 내적 성찰을 통해 ‘보다 큰 힘’과 협력할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온갖 종류의 명상법 --- 선, 혼돈 명상(discursive meditation), 초월 명상(TM), 요가 (하타요가 ---음과 양의 균형을 의미한다. 즉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통합으로 육체를 단련하는 법을 가르친다), 기독교식 명상(Lectio Meditation), 심상 구상과 명상을 결합시킨 정신통합(psycho-synthesis) ( 무의식과 상황을 결합하고 조화시키는 훈련).
* 꿈일지 작성 --- 꿈은 일상적 의식의 범위를 초월한 영역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중개하는 유용한 매개체이다.
의미요법(Logotherapy) 이나 원인요법 (Primal Therapy) --- 예를 들자면 유년기의 걱정거리로 다시 돌아가 주로 심상 구상을 이용하여 유년기의 부정적 경험에 대한 부모와의 화해 부모의 용서를 추구하는 치료법등.
대응하는 태도:
1) 그릇된 태도
--- 전혀 무시하는 태도 (사단의 세력과는 상종도 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
--- 뉴에이지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격리시키는 태도
--- 모든 영역을 뉴에이지적, 기독교적이라는 흑백논리로 판단하여 뉴에이지를 금기시 하는 태도(Taboo Mentality)
2) 바람직한 태도:
---그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며 기독교적 영성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 영성의 현주소를 돌이켜 보자.
* 기독교는 내면적이라기 보다는 지나치게 외향적이다 (외향적인 성취지향적).
* 내적 체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의인화에 대한 오해, 믿음과 은총에 왜곡, 초월적인 하나님의 속성강조, 반면에 내재적인 속성에 대한 이해부족)
* 물질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사고에 적극적 편승(현실 참여적인 신학적 입장에 편승)
* 소유지향적이다 (존재지향적인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 금욕적이고 수덕적인 삶의 결여
* 심도있는 기도생활의 결여
3) 대안:
뉴에이지 운동에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대토로서 “명상”을 선택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잘못된 영성을 바로잡고, 올바른 영성에의 길로 들어서는 길은 건강한 “기도”생활의 회복에 있다.
기독교 명상을 하나의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다. 뉴에지의 영성과 접촉점을 가지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에로 인도해 줄 수 있다. 접촉점이란 그들의 체험을 강조한다. 내재적인 신성을 경험하고 확인하고자 한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명상을 통하여 자아성찰에 이르게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비루함과 연약함과 죄악성을 통감하고, 자신이 아닌 타력에 의한 구원의 길을 체험케 한다. 교리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신성에 이르는 중보자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한다.
뉴에이저들이 내적 잠재능력에 개발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경험케 한다 (성령님의 체험). 뉴에이저들이 심도있는 명상수련을 갈망하듯이 소유지향적이고 욕구성취적인 기도로부터 존재지향적이고 관계형성적 기도훈련을 제시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불경이나 힌두경전이 명상의 대상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성서가 명상에 대상이 된다. 성서 명상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체험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서의 내적인 체험을 통한 영적인 각성,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회심과 회개의 삶을 더욱 농도짙게 강조되어야 한다.
1) A. N.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Cambridge UP, 1933) p. 157.
2) Leech, p. 4.
3) A. Kee, The Way of Transcendence: Christian Faith without belief in God (Penguin, 1971), p. 127.
4) Leech, p. 5.
5) 상게서.
6) 상게서, p. 6.
7) 상게서, p. 15.
8)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Theology as Spirituality (New York: Harper & Row, 1985), p. 17.
9) William James,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 참고하시오.
10) Timothy Leary, The Poliitics of Ecstasy (Paladin 1970), pp. 212, 73.
11) Shirley MacLaine, Out on a Limb (New York: Bantam Books, 1984), p.307.
12) 1978년 1월 미국의 <맥콜즈>지는 6만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거의가 조직적 종교에 회의적이었으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구교 단체들이 1978년 6월에 발표한 조사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76%가 조직적 종교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 믿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60%가 교회가 영적 측면을 상실했다고 대답했다. Marilyn Ferguson, 「뉴에이지 혁명」(The Aquarian Conspiracy) (서울: 정신세계사, 1987), p. 466-467, 471.
13) Ferguson, p. 471.
14) David Spangler, Revelation: The Birth of a New Age (San Francisco: Rainbow Bridge, 1976), p. 60.
15) James Lovelock, The Age of GAIA, 홍욱희 역, 「가이아 시대」(서울: 범양사, 1992)를 참고하라; 가이아 이론이란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생태중심적 자연관으로서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전체가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자동유지하면서 지구 생태계를 영속시킨다는 것이다. 가이아의 목적은 자연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전체 생태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전체적인 통일성의 원리를 배반할 경우 생태계는 자체 유지를 위하여 상대적인 인간에게 큰 고통을 초래하게 되며, 이 우주아와 일체를 이룰 때 인간에게 행복이 있다라는 주장으로 발전된다.
16) 김창엽, “뉴에이지 운동, 그 정체와 대책,” 「목회와 신학」 (1992, 8), p. 224
17) 신지학 협회는 1875년 뉴욕에서 블라바츠기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그들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모든 종교는 공통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힘들을 인정하며 그것을 연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그들의 이론은 종교의 기본 원리를 성경에 두는 것이 아니고 불교나 흰두교를 혼용하고 있다.
18) H. P. Blavatsky, The key to Theosophy, p. 176.
19) D. Groothuis, Unmasking the New Age, p. 141.
20) James Sire, The Universe Next Door,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88), p. 20: 김성수, 「목회와 신학」, 1992, 9, p. 103.
21) 상게서, pp. 105-117.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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