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신유,영 분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아들 2012. 9. 26. 14:41

예수가좋다오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글/김선환 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역사 하신다.(막16:17∼20)

 

마가복음 16장 17∼20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며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여 구원시키고 교회가 부흥이 되고, 성도들의 가정이 구원을 받고,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이 말씀으로 먼저 간절히 바랍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 16장 9∼20절 말씀은 후에 어떤 사람들이 추가해서 기록했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엄연히 지금 읽은 말씀은 정경으로 인정된 성경입니다. 성경 66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또 저의 경험으로도 이 말씀대로 믿고서 행했을 때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의 말씀을 원본에는 없지만 추가로 기록했다는 신학자들의 말을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유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되느냐?] 하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병고치는 은사라든지 성령의 은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은사로 주는 것이지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병고치는 능력을 배우러 오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배우러 오십시오!] 하고 광고를 합니다. 결론을 내린다면 배우면 됩니다. 병고치는 신유의 능력과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객관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경책이 없다면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배울 수가 있습니까? 예수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신유의 능력은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가르쳐야 합니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게 하고, 의지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자기 영혼 속에 간직하게 하고, 순종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다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모르고 부르짖는 사람은 환상은 볼 수 있지만 다른 영들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주여! 내게 기록된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받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성경의 약속을 모르고 무조건 기도하다 보면 산신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대로 약속을 믿고 간직하고 [내게 그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로 받기 위해서 엘리사가 요단강까지 따라가서 [선생님의 영감의 갑절을 내게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왕하2:9).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엘리사처럼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제 능력을 못 받습니다. [내게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는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갖고 성경에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엘리사를 들먹이지 말고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안수해서 병을 고치시고 또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기도를 하면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보고 배우고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신유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지 않고 보지도 않고는 도무지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서 그대로 믿고 기도하고 순종하고 행할 때 누구에게나 다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자마자 가르치셨습니다(마10:5). 가르쳤다기 보다는 그냥 말로 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셨을 당시에 신약성경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너희는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안수해서 병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복음도 전파하라.] 하고 말씀하실 당시에 신약성경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당시에는 구약성경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예수님에게 [너 배고프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해서 먹어라.] 할 때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신8:3) 하고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이미 기록된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때 당시는 구약성경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도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로 [너희들은 가서 귀신 쫓아내고 병고쳐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자마자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10장 1∼8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또 배우고 가르치고, 믿고 순종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쉽습니다. 기록되어진 대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말씀으로 [얘들아 너희들 가서 병든 사람을 고치고 가면서 전파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말하고 또 귀신을 쫓아내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도 포함됐습니다. 예수를 배반했던 가룟 유다도 이것을 받아서 능력을 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에 들리게 그냥 말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듣고서 기억한 것입니다. 녹음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이천 년 전에 녹음기가 어디 있습니까? 귀로 듣고 자기 심령에 기억한 것입니다. 기억했다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자 [예수님이 귀신 쫓으라고 했으니까 쫓아야지.] 하고 쫓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안수하라고 가르쳤지. 그래 하자.] 하고 안수한 것입니다. 그냥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배워서 깨닫고 그대로 가서 순종했을 때 그대로 됐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3절에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선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열두 제자 뿐 아니라 칠십 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는 아니고 오늘날로 말하면 평신도를 말합니다. 둘씩 둘씩 전도하러 나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불러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17∼20절에 그들이 그냥 말로 듣고 그대로 행한 다음에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칠십인에게도 그냥 [가서 그렇게 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성경 기록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보고 읽고 너희도 이렇게 하라.] 하고 우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절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우리의 핵심이 되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계실 때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나 하나 세상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녹음기도 없고 기록이 안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세상에서 없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세상에 남겨야 되겠다.] 해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40년이 지난 후에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송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복음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에 나타난 사도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워서 그대로 할 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병고치는 신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쉽게 받을 수도 있고, 더 쉽게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칙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집을 찾아가는데 주소가 있고 약도가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찾아가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주소도 없고 약도도 없었습니다. 그냥 가라는 말만을 듣고도 가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확실한 주소와 약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유와 병고치는 것, 배우고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7∼20절의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하고 예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 그리고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을 읽고 듣고 우리 영혼 속에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고 읽었었고 깨달았을 때 우리에게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했습니다. 요새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 뉴스를 듣고 우리가 압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긴다고 아주 해석까지 해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친 예수의 신유의 방법과 성령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워서 기도하고 행하게 되면 누구나 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유의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마18:3)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갑니까? 어린아이들이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고 착하다고 해서 천국에 갑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선사업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받아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떠나 있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니고 박애주의입니다. 착하고 겸손하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어떠한 말씀이든지 그 말씀 앞에서 아멘 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하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받으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받으라는 말씀이지 마음 착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받을 때 그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다른 이유를 붙이지말자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계시의 말씀에 하나라도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할 것이요, 이 내용의 말씀 중에 하나라도 빼먹으면 하나님의 낙원에서 그 사람을 제하여 버린다.] 했습니다(계22:18∼19). 이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더해도 안 되고, 빼도 안되고, 그냥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고, 겸손하게 될 때 그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정관념을 버리셔야 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배웠든지간에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헌법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합니다.] 하지 않고 교리나 교파가 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 말씀대로 깨닫고 따를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10톤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짐승 중에서 굉장히 큰 짐승이고 힘이 센 짐승입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코끼리 새끼를 가는 줄로 다리에 묶어서 말뚝을 박아서 붙들어 매면 힘이 없기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말뚝에 줄이 매달려 있으니까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리고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몇 번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해 버리고 그 줄에 메여서 삽니다.

 

 그리고 몸뚱이가 불어나서 어른이 되고 10톤 가량 되는 힘이 센 코끼리가 됩니다. 그래도 코끼리는 그것을 뽑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 나무는 못 뽑는 거야. 나는 안 돼.] 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10톤이나 되는 덩치를 가지고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뚝은 발로 한 번 툭 치면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나는 저것을 뽑을 수 없다. 내가 해봤는데 안 된다.] 하는 관념줄에 매여서 처량한 신세로 남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고정관념이라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능력을 받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성경대로 해야지 고정관념이나 자기 생각이나 어떤 교리 같은 것을 따라서는 절대 안 됩니다(고후10:4∼5). 그러므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역사를 자꾸 제한하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일들은 이천 년 전에나 했던 일이지. 이천 년 전 초대교회 때 병원이 없을 때나 안수해서 병고치고, 사도들이 역사했지 과학의 첨단을 걷는 이 시대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병을 고치시고 방언을 하게 하고 환상을 보게 하시고 예언을 하게 하셨던 놀라운 역사가 사도행전에 기록됐다고 가르치고 설교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꾸만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 성령은 그곳에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 주의자가 되면 안됩니다. 은사에 미쳐서 싸다니면 예수님 욕먹이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어떤 책에는 [성령은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녀와 같다.]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 성령은 소녀가 수줍음을 잘 타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처럼 그만큼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는 성령의 역사를 복음서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성령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가신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고 [말라져라.] 하고 명령했을 때 마른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적이며 표적입니다.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 안에 성령이 계셔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30세 이전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온 세상의 죄를 전가(轉嫁)(죄인이 제물에게 안수하여 죄인의 죄를 제물에게 넘기는 것) 받으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성령이 예수 안에만 있었지만 예수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은 믿는 신자 속에 보편적으로 내주 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행적을 보면 예수께서 역사한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유는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때문입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성령을 모시고 역사 하신 것과 사도들이 성령을 모시고서 역사한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시공간을 초월해서 쑥 들어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문이 닫혀있었는데 시공간을 초월해서 쑥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에티오피아 장관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하고 물로 세례를 준 다음에 성령이 빌립을 홀연히 이끌어다가 아소도 지방에 뚝 떨어지게 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니신 것과 성령의 역사로 빌립에게 있었던 것이 내용이 같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것과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행한 것은 똑같습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양적으로 볼 때는 사도행전에 더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직접 말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면 누가 믿어 줍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천사들이 역사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도 하고 옆구리를 쳐서 깨우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에게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도 하셨습니다. 역사가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인이 [이리 와서 나를 도우라.] 한 적도 있습니다. 환상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꾸 이런 것을 제한하면 일생동안 신앙 생활을 해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경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한하는 사람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만약 방언을 부인한다면 평생 방언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설령 체험을 못했을지라도 성경은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는데도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아직까지 체험하지 못했을지라도 믿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자기가 체험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인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모해야지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이 우리 교회에 마음대로 역사해 달라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도무지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행하신 일, 즉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 기록을 못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다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억에 특별히 남는 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충격적인 일은 오래 오래 기억합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충격적인 일 곧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나 물위를 걸어오시는 충격적인 것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이지 못한 것은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40년이 흐르고 70년이 흐르는데 어떻게 기억합니까? 그러므로 예수의 행하신 이적 곧 성령의 역사가 무지무지하게 많았지만 다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것은 신유의 목적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유를 배우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 신유의 목적이 나옵니다. 왜 우리가 신유를 가르치고 신유를 행하고 또 전파해야 하는 가에 대한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성령의 역사가 많았는데 다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이것만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31절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신유를 행하는 것도 영생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의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유의 목적이 병고치는 목적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믿음이 떨어진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 신유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신유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유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데만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온전한 복음은 바로 신유입니다.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면 당연히 신유는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에는 영적인 구원도 있고, 정신적인 구원도 있습니다. 즉 잘못된 정신을 새롭게 하고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도 넓은 의미로는 구원입니다. 잘못된 환경과 생활이 예수 앞에 돌아와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도 구원입니다. 영, 육, 생활 모든 것을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신유도 똑같습니다. 구원의 의미와 신유의 의미는 영적으로 육적으로나 의미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삼서 2절에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했습니다. 구원이나 신유나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신유란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로 사람의 영육간의 모든 병과 비정상적인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신유하면 육신의 병든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전에 임신을 해서 만삭이 된 여자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여자에게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답답한 일이 있어서 부여 기도원에 갔다가 목사님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결혼을 한지 일 년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는 [너 없이는 못산다.] 하면서 쫓아다녔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신혼 첫날밤을 자고 나자 마자 그 이튿날부터 남편이 [너 꼴 보기 싫어서 못산다.] 하고 말을 했답니다.

 

그리고서는 이혼하자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급을 타면 생활비만 조금 주고 남편은 사글세방을 얻어서 혼자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답답해서 기도원에 갔다가, 저한테 와서 안수 받고 병고침 받고 간 사람을 만나서 제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딱한 사정을 듣고 [이것이 마귀의 역사이고 귀신의 역사이구나.]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시옵시고, 이 사랑하는 딸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데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깔깔깔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모릅니다. 귀신은 여자에게 들어와서 이 가정을 파탄시키려고 부부간에 갈등을 생기게 하고, 이혼시키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괘씸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이 가정을 파괴하고, 행복을 파괴하는 귀신은 떠나갈지어다.] 했습니다. 예수님는 좋은 것을 주시지만 마귀는 나쁜 것을 줍니다. 하나님은 좋은 씨를 뿌려주었는데 귀신이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 그래서 만삭된 몸이 뒤로 넘어졌기 때문에 애가 잘못됐을까봐 걱정을 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이제 가보십시오. 남편도 돌아올 것입니다.]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신유는 육신의 병만 낫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도 있습니다. 물질을 도둑질해 가는 것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의 집에 젖소가 한 마리 쓰러져서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의사가 갔는데도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에게 안수를 했더니 소가 [음매!]하고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귀는 나쁜 것을 갖다주고 도둑질해 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분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분명한 분별력을 갖는 것이 영분별입니다. 물론 기도할 때 환상 가운데 영이 분별되기도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영의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신유는 육신의 병, 마음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 문제, 영적인 문제를 다 포함하여 고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잘하다가 괜히 교회 나오기가 싫고 인색한 마음 들고 낙심이 되는 것은 영적으로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안수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해결이 됩니다. 믿음 생활 잘했었는데 낙심이 되고, 교회 가기 싫다는 것도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주일만 되면 손님이 온다는 사람도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귀신이 손님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교회 못 가게 자꾸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가려고 하면 [오늘 하루만 빠지면 어때?] 하는 생각 때문에 계속해서 빠집니다. 그것도 영적으로 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주고, 영적으로 고쳐주고, 안수해주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유입니다. 신유를 넓게 생각해야지 육신의 병에만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는 신유의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신유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 이름으로 영육의 병과 생활의 잘못된 것, 비정상적인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서 영의 눈을 뜨게 돼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마가복음 16장 17∼18절의 말씀에 모든 믿는 자는 신유를 행하는 명령을 위탁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유는 특별한 사람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배우다보면 성령의 역사와 신유의 은사를 하나 하나 배우게 됩니다. 아주 자세하게 배울 것입니다. 왜 신유를 행하다가 어느 날 뚝 끊어지냐면 성령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이라는 제한만 두었지 거기에 믿는 특별한 목사, 안수 집사, 장로만이 행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안수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직분 안수가 있고, 성령이 임하게 하는 안수가 있고, 병고치는 안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병고치는 안수는 믿는 자면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직분 안수와 성령님이 임하게 하는 안수는 특별한 지위를 가지거나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들이 하는 것이지만 병고치는 안수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운 대로 믿자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목사들 중에 [목사나 안수할 수 있는 것이다 병든 사람에게 평신도는 안수하지 마라.] 하는 것은 자기 권위가 떨어질까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누구나 안수할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에는 [믿는 자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자기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해서 무조건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는 [믿는 자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라. 믿는 자는 귀신을 쫓아라.] 하고 말씀하고 있지만 자기의 권위가 떨어질까 봐 못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못하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도 못하면서 순종해서 하려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비방하는 소리에 우리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잡힐 때 로마 병정들이 칼을 차고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오는데 막상 로마 병정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모르고 가룟 유다와 짰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입맞춘 사람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니까 잡아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정들이 실상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는 어떤 분인지 모르고 가룟 유다가 입을 맞추는 사람을 잡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말씀 치유 세미나를 비판하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로마 병정과 같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막상 예수를 잡으러 온 로마 병정도 예수가 어떤 분이지 모르고 잡으러 왔습니다. 남이 하는 말을 듣고 [죽일 놈이다.] 하고서 잡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남이 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말씀 치유 세미나에 대해서 누가 [이단이다.] 하고 별 얘기를 다 할지라도 와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성경대로 하면 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와보지도 않고 뜬소문만 듣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왔으니까 체험하고, 목격해야 합니다.


요한 일서 1장 1∼4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듣고,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서 전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괜히 뜬소문을 듣고 비방할 필요없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는 것은 자기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능력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2∼33절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어떤 사람 병을 고쳐주었더니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들려서 귀신을 쫓아낸다.]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려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비방했을 때 예수께서는 [같은 편끼리 어떻게 분쟁할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28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받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곧 {말로 인자를 훼방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 하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이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복음이 전파되고 신유가 당연히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고, 심하게 얘기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들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의 하던 일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일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못하는 것을 인정하고 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도 못하면서 예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한 일을 너도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23∼24절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말씀을 전파하시고 교육하시고 설교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3대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교육하셨다는 것입니다. 전파하셨다는 것은 설교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약한 것과 병을 고치셨습니다. 곧 신유를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전도하고 병을 고쳐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3대 사역이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물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해야 합니다. 치유가 사랑이 없이 됩니까? 어떤 사람은 [귀신만 쫓으면 다냐? 사랑이 있어야지?] 하고 핍박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 사랑 없이 되는 것입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눌린 자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비방하려고 하면 이렇게 별 소리를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없이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의 일을 행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 예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자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여 예수의 일을 하는 사람이 그의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내 제자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서 순종하고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제자이고 예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방해하고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사단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고 명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떠나시면서 간곡하게 말씀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고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 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시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임마누엘 하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임마누엘 하십니까? 신유를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일하는 사람에게 임마누엘 곧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일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님! 나와 함께 해주세요.] 하고 아무리 기도한들 주님이 내려오시겠습니까?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면 멀리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예수의 제자가 돼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이 기뻐하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영원히 함께 곧 임마누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28:18∼20). 그러므로 [주님 내 안에 오세요, 저와 함께 해주세요.] 하고 기도할 필요 없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면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마 황소 천 마리를 잡으면 작은도시사람들 모두 포식할 것입니다. 실컷 먹을 것입니다.

 

 번제의 의미가 뭡니까? 온전한 헌신제 아닙니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번제는 [나를 쓰시옵소서. 내 평생 헌신하기 원합니다. 열매맺기 원합니다.] 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하고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너무 기쁘고 감동하셔서 솔로몬이 자는데 꿈에 찾아오셔서 [솔로몬아 뭘 줄까?] 하고 물었을 때 솔로몬은 [부귀 영화와 원수에게 벼락 때려주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내게 지혜와 총명을 주세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귀와 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에 제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나와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신유를 행하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은 양떼를 맡기십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은 전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면서 먼저 주님이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양을 맡겨주시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에게 다른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5절에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바닷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를 한 척 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 위에서 바닷가에 앉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다 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지혜와 수단방법 다 동원해도 안 되었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리이다.}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믿으면 생명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나고, 병이 고쳐지고, 귀신이 떠나갑니다. 말씀대로 믿으면 이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고기가 엄청나게 잡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어떻게 귀신을 쫓아냅니까?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깨닫고 믿음으로 간직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안수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귀신을 쫓든지, 말씀을 벗어나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도무지 능력이 없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수레 삼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역사는 성경 말씀이 있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하려고 단에 서기 전에 항상 [하나님 제가 설교할 때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가 가서 설교할 때 성령이 내려오셨다 하신 것처럼 제가 오늘 설교하고 안수하고 기도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을 때 동일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을 갖고 손을 얹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을 갖고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기분을 따라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봉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불신자였는데 원래 예수 믿기 전부터 세상말로 [공자 가운데 토막이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자 가운데 토막인 만큼 마음이 착하고 순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불신자였는데 교회에 왔습니다. 목사가 착한 마음을 갖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 그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런 설교 안 해도 나는 원래부터 착하다.] 하고 말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망할 사람입니다.

 

 원래부터 착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와서는 하나님이 명한 기록 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원래부터 마음이 착했고, 박애주의자로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지라도 교회 와서 예수님을 믿었으면 성경에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했기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선한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원래부터 착한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당초에 영적으로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진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합니다.] 하고 기도할 때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 하면은 믿는 자에게 누가 역사합니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역사(役事)할 때 역자는 부릴 역(役)자이고 사자는 일 사(事)자입니다. 말씀을 믿고 일하면 성령이 일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믿음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행복하지 않습니까? 믿음대로 행함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성령은 성경을 수레삼고 오신다.]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는 곳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대로 믿고 나가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행함에 따른 어려움 들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주변에 있는 전통과 신학에 의해 제재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우리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안배웠는데..] 하고 말을 합니다. 지금 여기에도 목회자들이 계시지만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사실 목회현장에 나와서 사용하려고 하면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를 양성할 때 애당초부터 목회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존의 신학교에서 배운 후에 목회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한 5년 정도는 방황을 하고 그 이후에야 조금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신유를 해 나가면 전통이라는 것이 가로막습니다. 신학이 가로막습니다. 교파가 가로막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의심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오라.] 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갔습니다. 그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물위를 걷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정혼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간음한 일이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그래서 공개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오니 계집종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라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하여 우리의 제자가 아닌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능력 많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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