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8)/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8) – 성경의 시녀인 신학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신학은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학문적 연구 결과이다. 성경은 완전하고 변함없는 진리를 말하지만 신학은 이를 불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신학자나 교회도 자신의 해석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교회처럼 신학도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특정 교단이나 교파의 신학이 완전할 수 없고 성경의 가르침에 비교적 가장 근접한 신학만 있을 뿐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다(엡3:5절). 선지자는 물론 사도들은 구약 성경에 정통한 히브리 인들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인은 일원론자이다. 사도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헬라 문화와 언어를 이용하여 사도들은 구약 성경에 이어 신약 성경을 기록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헬라 철학을 지지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원론은 타락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시대가 끝나며 사도 시대도 끝났고 교부 시대가 왔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비히브리 인들로 헬라 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 이들은 당시의 지배 세력인 헬라 철학에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 기독교 신학을 세웠다. 기독교는 히브리 사고를 보여주는 창조 기사(창1-2장)를 무시하고 타락 기사(창3장)로부터 신학을 출발시켰다.
앞으로 올 메시아에 의한 구속과 구원(창3:15절)만이 이들에게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사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에 따르면 구원은 영적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나 천당이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과 같은 존재로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산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조직신학적(연역적) 연구 방법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각론들이 전개된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맞춰 성경을 분해하고 분석한 후 관련 성구들을 각론에 편입시킨다. 여기 몇 가지 문제가 발견된다. 이들 주제 이외 다른 중요한 주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진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이다.
당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가는 천당 또는 천국 즉 내세로 보았다. 이것이 각론 중에 신국론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도 말한다. 이것이 간과되었다. 내세적 천국 개념에 따르면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윤리학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죄악 세상 가운데 성별 된 곳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직신학은 성경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만을 주제별로 연구한다. 성경 본문의 역사성이 무시된다. 신자들의 삶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교회는 늘 동일한 진리만 전해준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의 교리들은 적용에 무관심한 원리주의 또는 원칙주의 같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방식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할 때마다 영원한 진리를 다른 국면으로 설명한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경 신학이 20세기 초에야 비로소 발전했다. 역사성을 고려하며 성경을 연구하는 귀납적 방법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주제별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점에선 성경신학도 조직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제별 연구 방법은 시계가 아닌 시계의 부품들을 연구하는 식이다. 한편 부품들을 잘 알게 하지만 다른 한편 부품들이 구성한 시계와 그 기능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즉 술어(術語)의 정의에는 탁월한 데 술어들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주제들이 진주 구슬들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들을 엮어 보화로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성경의 본문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종교개혁 이후 본문만 아니라 문맥을 감안한 성경 연구 방법이 나타났다. 칼빈의 역사문법적 성경 해석(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이 좋은 예이다.
해석을 위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문법적 구성을 연구하란 뜻이다. 성경 본문에서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이렇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문법적으로 서로 얽힌다. 이로써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일차적 가르침이 드러난다. 이 일차적 가르침은 신학적 주제들(2차적 가르침들) 사이 통섭적 관계에서 나온다. 물론 일차적 가르침들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 보여준다. 이 일은 분석과 분해를 좋아하는 조직신학적 방법으론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에 내재된 약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조직신학의 각론들이 전하는 2차적 가르침들만 말하는데 만족한다. 다시 말해 술어의 정의와 내용만 전하는 식이다. 이는 극복돼야 한다. 각론들은 나름 성경 해석에 유용하다. 조직신학에서 신학적으로 잘 정의된 용어들은 성경 해석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들은 성경 본문 안에서 서로 만나고 얽히며 융합적인 가르침을 준다. 분해된 부품들을 재조립하여 시계로 만드는 과정과 같다.
이 때 성경 본문의 역사적/문화적 여건과 상황은 이에 맞추어 선택된 신학적 주제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신학은 성경 본문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기사를 보여준다. 6일 창조, 인간 창조 그리고 문화 사명이 기록된다. 이들은 수많은 2차적 가르침들(신학적 주제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1장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일차적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창1:28절)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며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2차적 가르침들은 1차적 가르침을 위해 봉사한다. 이런 연구가 잘 수행된다면 일차적 가르침들을 신앙 삶에 적용시키는 일이 참으로 용이해진다. 아울러 특정 역사적/문화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 삶과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려진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영원한 진리(조직신학)가 어떻게 달리 설명되는지도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원의 수학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각종 신학들 – 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 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 원어는 물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친 후 3년째부터 두 신학을 이용하여 어떻게 성경 본문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해석의 결과는 역사신학의 도움으로 검토 받은 후 실천신학에 접목시킨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배운 신학들을 통섭적으로 성경 해석에 적용시키는 훈련은 아주 중요하다. 적어도 일년 동안 이런 훈련을 해야 비로소 성경과 신학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성경 해석 훈련은 구약의 모세오경과 신약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제 5복음서)으로 시작함이 좋다. 모세오경은 성경 전체의 기초이며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구약의 역사적 성취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책들의 해석은 목회하면서 배운대로 스스로 하면 된다.
이런 성경 해석 훈련이 없다면 신학은 목회와 신앙 삶을 위해 무용지물이 된다. 성경과 신학이 따로따로 논다. 그 결과 성경은 지혜서, 교훈집 또는 옛날 이야기로 전락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성경보다 절대로 앞설 수 없다. 신학은 기독교의 전부가 아닌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들만 가르칠 것이 아니다. 신학들을 성경 해석에 이용하도록 반드시 훈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실천적 성격을 잃고 신(神)과 종교에 대한 전문적 지식인 종교학으로 전락할 것이다. 기독교도 구원의 종교란 지위를 잃고 종교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출처] 성경의 시녀인 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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